소설리스트

임꺽정은 살아있다-179화 (179/259)

53. 백아절현 (1)

기미년(1559) 삼월 십오일자 정론보에 이러한 글이 실렸다. 바로 경주로 낙향한 이래 재조론의 좌장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 이언적의 글이었다.

‘무릇 법이라는 것은 둘로 나눌 수 있으니, 삼대(三代)의 법과 후대의 법이다.

삼대의 법이란 무엇인가? 천하의 사람을 기르고, 그들이 능히 봄에 경작케 하고 가을에 거두게 하며, 의복을 갖추고 예법을 따를 수 있게 하는 것이 삼대의 법이다. 법은 오직 천하를 위할 뿐, 한 사람을 위하여 세워지지 않았다. 높고 귀한 이는 누구도 선망하지 않았고, 낮고 천한 이는 스스로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천하의 재부(財富)는 오로지 천하의 것으로, 법에 따라 곳간을 드나들 뿐 어느 한 집에 머물지 않았다.

이러한 법은 아무리 소략할지라도 만인이 즐겨 따르며, 마치 딱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편안히 여기게 된다.

후대의 법이란 무엇인가? 군주는 천하를 얻고서도 다만 종사를 보존하는 것만을 원하고, 사대부는 그 천하 아래에서 어찌하면 저의 집안이 부귀 누릴지만을 염려하며, 오직 집안 하나를 이롭게 하기 위해 법을 세우니 이것이 후대의 법이다. 스스로 사사로운 이익 취하기를 바라고, 그 이익이 남에게 미치는 것은 시기한다. 남을 속이면서 저는 속지 않기를 바라고, 남의 것을 탐하며 남이 저의 것 탐하지 않기를 바란다.

이러한 법은 아무리 정밀할지라도 오히려 천하를 어지럽게 만들며, 사람의 눈을 가리고 손발을 묶으니, 마치 그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스스로 옭아매게 된다.

나라가 세워지고 일백오십 년이 지나 경장을 논하는데, 아직 정사의 아름다움은 마치 동이 틀 때와 같아 단서가 보일 뿐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다.

선비가 이를 근심하지 않는다면 또 무엇을 근심으로 삼겠는가?

이에 탁고개제((托古改制)의 뜻으로 해동(海東)을 재조(再造)할 헌법 14개조를 성상께 건백하였는데, 어리석고 늙은 촌부의 헤아림은 둘레 십 리의 마을조차 넘어서지 못하니 참으로 망령되고도 외람한 일이다. 바라건대 이 글을 보는 이들은 헌법을 널리 읽고 질정하며, 고칠 것은 고치고 가감할 것은 가감하여주기 바란다.’

비록 뜻을 달리할지언정 여전히 스승을 존경하는 이황은, 스승의 안부 여쭙는 글의 답장으로 이 글을 받아보았다. 이후 조식에게 각별히 청하여 이 글을 실어달라 하였는데, 조식이 답하기를, 이미 저도 같은 글을 받아보았으며 이미 주자공(인쇄공)들에게 맡겼다는 것이었다.

어찌 된 영문인가 물으니, 분명 영남 어딘가에 있어야 할 임꺽정이 이언적을 경주 자옥산에서 만나고 한양으로 급히 돌아왔다 하였다.

그로부터 하루 전, 사업당에 느닷없이 들이닥친 꺽정이가 여전히 경주에 머물고 있는 병해를 제외한 나머지 중진들을 급히 불러모았다.

“아, 글쎄. 나는 선비가 낙향하면 정말로 세상에 관심 끄고 사는 줄 알았지 뭐요.”

“꼭 그런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닌 법이지. ‘돌아가자꾸나(歸去來兮)’ 노래하던 도연명(陶淵明)도 조정에서 벼슬 줄 때는 덥석 받았다더라.”

당장 이지함 저도, 꺽정이 못 만나고 어디 산속에서 은거나 하고 있었다면, 조정에서 현감 벼슬이라도 준다고 운 떼자마자 좋다고 튀어나왔을 터였다.

“더구나 회재 선생도 마음이 좀 괴로운 게 아니실 테다. 네가 좀 이해해 주거라.”

“내 마음은 본디 바다와 같소.”

꺽정이 또한 이언적과 이야기 나누며 그 마음속 설움을 얼추 짐작은 하였다. 애제자 이황은 다른 길로 가 버렸고, 말년에 차마 세상을 버릴 수 없어, 제자다운 마음도, 품성도 없는 놈을 마치 약조 맺듯 제자로 들여 마지막으로 경세(經世) 법도 논하는 데 발을 걸치게 되었으니, 목석이 아닌 이상에야 만감이 교차하고 회한이 남지 않을 수 없었다.

허나 다른 사람 마음도 제대로 헤아리지 않는 이이가, 다른 사람이 전해주는 또 다른 사람 마음까지 신경써줄 리 만무하였다.

“헛소리는 그만하고 얼른 소식이나 마저 들으십시다, 당수.”

“어렸을 때는 귀엽기라도 했지, 에휴.”

한창 삼락서원에서 그나마 저를 조금 따라올 만큼 총명한 이들을 만나 교학상장(敎學相長)하고 있다가 끌려온 이이로서는 뾰족하게 채근할 만도 했다.

“경주 자옥산 초당에 여인들 드나든다는 소문 듣고 찾아갔는데, 병해 사형께서 곧장 그 여인들 정체를 알아채셨소. 바로 대비 마님 모시는 궁인들이더이다.”

왕실의 여인들이 한양과 그 주변을 벗어나기 어렵기에, 대신 저의 머리카락이나 몸에 지니는 장신구 따위를 궁인에게 주어 전국 명산에 치성드리게 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전우치로서든 병해로서든, 그런 궁인들 자주 접하였던 이로서, 경주 일대에서 조금 수소문하여 얻은 단서로 그 정체 파악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자전(慈殿, 대비)께서?”

조용히 궁에 머물던 대비는 근 몇 년 사이 부쩍 봉은사 찾아 불공 드리는 일이 늘었다. 임금이야 본디 별 생각이 없고, 불교의 폐단 운운할 법한 탕평당 사림들은 경장의 뒷처리에도 바쁠 뿐더러 공회의 여론으로 저들 생각하는 좋은 법도를 밀어붙이는 재미에 빠져 있었으므로 그 누구도 대비의 행적을 문제삼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보니, 봉은사 오가는 길에 간혹 딴길로 새기도 했던 모양이었다.

“그렇소. 내가 뵙자마자 추궁했더니 곧장 털어놓으시더이다.”

임꺽정 하루이틀 본 것도 아닌 – 따지고 보면 서경덕과 이지함 다음으로 꺽정이와 안면 튼 선비기도 했다 – 이언적은 답을 회피할수록 저의 체통만 깎이고 못 볼 꼴만 보게 된다는 이치를 잘 알고 있었다.

하물며 저의 처신에 부끄러움이 없으니, 어찌 답을 내놓지 않겠는가.

헌법을 둘러싼 싸움이 끝나면, 이 나라 조선의 앞길을 두고 진짜 싸움이 시작될 터였다.

이긴 쪽은 헌법으로 민의가 다 드러났다며 그 명분을 내세우고, 진 쪽은 진 쪽대로 무언가 핑계 내세우며 불복할 터. 양쪽 모두, 권점 한 번으로 순순히 승복하고 물러나기에는 너무 많은 것을 걸게 되었다.

그리고 이언적은 그 다툼이 또 한 차례 사화(士禍)로 이어질 것을 두려워하였다. 어느 쪽이 이기든, 원한이 생긴다면 풀고자 할 것이므로.

“우리를 너무 못 믿으시는구나.”

“글쎄올시다. 나라도 만약 저놈들이 감히 사형이나 여기 밤골 도령을 해치려 든다면 선비들이 화 아니 당하는 세상 만들겠다는 것을 얼마나 지킬 수 있을지 모르겠소.”

꺽정이에게 결과 어찌 나오든 받아들이라 은근히 권유한 것을 생각하면, 이언적은 여전히, 싸움에서 (나름 제자인) 두리손의 승산이 더 높다고 보고 있는 듯했다.

“여하간 그래서, 만일의 만일이 거듭되어 정말 큰일이 터졌을 때, 지켜야 할 것을 지키고자 서로 말을 맞추게 되었다 하오.”

따지고 보면 조카지만, 대비는 두리손을 믿지 않았다. 당장 그 옛날 한양이 의민당에게 넘어갈 때, 윤원형과 저의 아들을 지키는 대신 바로 도망치지 않았던가.

그리하여 대비는 유사시 임금을 움직여 선비들만은 탕평당이든 심통원의 사람이든 화를 입지 않도록 힘쓰기로 약조하고, 이언적은 유사시 두리손을 움직여 임금 한 사람에게는 어떤 화도 미치지 않도록 하기로 약조하였다.

“잠깐, 뭔가 이상한데요. 회재 선생께서는 신자(臣子)의 도리를 중히 여긴다 말씀하시는데, 그런 무엄한 일을 입에 담으시다니요. 더구나 성상의 옥체에 위해가 가해질 정도라면, 암만 노론 사람들의 여론을 이끈다지만 멀리 산속에 있는 노선비 한 사람이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언적과 한때 열심히 언쟁 벌인 바 있어 그 사람됨을 얼추 알던 이이가 토를 달았다.

“나도 그게 이상하다 싶었지.”

실은 그저 뭔가 낌새 이상하여 더 추궁한 것에 불과하였지만, 꺽정이는 아는 체하며 이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달콤한 이야기로 꼬드기며 넌지시 더 여쭈었소. 아는 대로 다 털어놓는다면 정론보뿐 아니라 공보에도 어르신네 패거리 글 실어드리고, 앞으로 내가 삼남 고을 돌 때 양반들 면전에서 욕지거리는 삼가겠노라 하였더니, 잠시 고민하시고서는 금방 실토하십디다.

두리손이가 종종 명나라 사람들을 만나는데, 동창 사람인 듯하다더군. 말하는 것으로 봐서는 그 외에 더 만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기는 한데, 거기까지는 어르신도 알지 못하고, 또 알려줄 마음도 없는 듯했소.”

그의 이름을 빌려주고, 그 힘을 빌렸을 뿐, 완전히 두리손을 믿지는 않는 이언적이었다. 자칫하면 조선 안의 싸움이 종묘사직 전체를 해칠 지도 모르는 위험한 일에 있어서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동창이라.”

동창이라면 본디 천자의 수족이요, 지금은 장거정 한 사람의 수족이었다. 일전에 요동과 의주 사이의 교역이 가로막힌 것도 아마 동창의 끄나풀이 조선 안 어딘가에 있기 때문일 텐데, 그 끄나풀이 두리손과 장거정 사이를 오가고 있다면 많은 것이 설명되었다.

허나 소소하게 민주당을 괴롭히는 것과, 다른 나라의 법제, 심지어 그 나라 종사에 관한 일까지 손을 대는 것은 사이에는 천양지차가 있었다.

“언제고 이리 될 줄은 짐작했지만... 점점 일이 커지는구나.”

지금까지 세상에 없던 것을 세우는 일이다. 꺽정이와 이지함이 작정하고 일을 키운 면도 물론 있었지만, 점점 그들 손을 떠나가고 있었다.

말년을 조용히 저술로 보내려 했던 이언적, 역시 조용히 궁에서 여생 보내려 했던 대비조차 두려워하며 빠져나갈 길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리고 결코 세상의 흐름에서 맨 앞에 있다 할 수 없는 그들조차 알게 되었으니, 이제 나머지 사람들도 하나둘씩 눈치를 채고 한쪽 편을 더 가열차게 들든, 아니면 도망치려 하든, 각자 발걸음을 바쁘게 하게 될 터.

“근래 장거정 그이가 조선에 대해 조금씩 날을 세우고는 있다 들었습니다만, 그 정도까지 무도한 짓을 할까요?”

“모르는 일이지. 명분이야 만들기 나름 아니겠느냐.”

대국 명나라라면, 헌법 권점만큼이나 강력한 명분을 어느 쪽으로든 쉽게 만들어줄 것이다. 멀쩡한 임금을 폐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짓을 하지는 않겠지만, 만에 하나 반정이 일어난다면 수상하리만큼 일찍 그들이 추대한 왕족을 왕으로 봉하여 준다던가 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한양의 벌열가 사이에서는 충분한 힘이 될 것이다. 칼자루에서 칼 뽑지 않아도, 그 안 에 칼날 들어 있음을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 것처럼.

그뿐이 아니었다. 조선은 문명한 나라요, 예의지방이니, 그 문명과 예의란 결국 알아주는 이 있어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었다.

대명이 백아(伯牙)라면 조선은 종자기(鍾子期)라. 조선 외에 그 어떤 나라도 명을 ‘황명(皇明, 황제의 나라 명)’으로 제대로 대접해주지 않지만, 어쨌든 거문고를 지니고 있는 것은 명나라요, 그것을 타는 것도, 줄을 끊는 것도, 연주할 곡을 정하는 것도 명나라였다.

“어차피 명나라 조정이 우리에게 뭐 더 할 수 있는 것도 없지 않습니까? 요동총병을 시켜서 아예 평안도로 쳐들어온다면 모를까.”

그런 어려운 사정은 잘 모르지만, 이미 대국 강남의 포구를 드나드는 은과 귀물의 흐름이 관의 통제를 벗어나기 시작했음은 잘 아는 서림이 목소리를 내었다.

“헌법의 일이야 저는 잘 모릅니다만, 적어도 올 겨울에 결판을 보기 전까지는 저쪽에서도 뭔가 하지 못하겠지요.”

“그렇다고 가만 내버려둘 수도 없지 않나요?”

명희가 저도 모르게 저의 어머니 닮은 목소리로 말하여 서림을 화들짝 놀래켰다.

“조정이 아닌 동창이라고 하면, 어떤 수작을 몰래 부릴지 모르는 일이지요. 그들이 드나드는 곳이라 해봐야 인천일 테고, 인천을 거치는 이들은 곧 우리 당의 문앞을 지나는 것과 같은데, 첩자를 찾는 것이 그리 어렵지는 않을 것 같네요.”

비단 목소리뿐 아니라 말하는 것도 어째 어머니 닮아가는데, 특히 지난 삼 년간 이지함과 함께 당무를 나누어 맡게 된 이래로 더욱 그렇게 되었다. (아직 젊음을 잃지 않았으므로 자색은 그대로요, 지난날 낭군과 회포 푼 이래 태중에서 자라고 있는 딸아이도 그 미모를 이어받게 될 터였는데, 아직 꺽정이도, 명희도 모르는 사실이었다.)

“안사람 말이 맞소. 일단은 이왕 한양으로 돌아온 길에, 그 동창 끄나풀 찾을 방도나 마련해놓고 가겠소. 그런 쪽으로는 아무래도 내가 직접 나서는 게 나으니.”

“만약 찾게 되면 어떻게 하시렵니까?”

서림이 물으니, 한결같은 말투로 꺽정이는 웃었다.

“조선 땅에 호환 많은 것은 대국 사람들도 잘들 압디다. 정체 감추고 드나드는 작자라면, 도중에 스리슬쩍 사라져도 아무도 모르지 않겠소?”

조선 사람은 일년의 절반은 호랑이 피하는 데 보내고, 나머지 절반은 호환 당한 사람 조문하며 보낸다는 명나라 농담이 있었는데, 워낙 명나라 사람들이 요새 인천과 동래를 자주 오가다 보니 조선 땅에도 알려지게 되었다.

헌데 호랑이가 암만 매섭다 한들, 어디 있는지 종적조차 묘연한 상대를 덮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렇게 어려울 줄은 몰랐소. 사형, 뭔가 꾀가 없겠소?”

인천에서 또 빈손으로 돌아온 꺽정이가 애먼 머리만 긁적였다.

동창이라면 곧 환관들이 모인 곳이요, 환관이라면 티가 나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지나가는 이들 하초(下焦, 사타구니)를 무작정 벗겨볼 수도 없는 노릇이요, 더구나 인천 마당발들에게 수소문해도 환관처럼 생긴 이가 드나드는 일은 없다 하였다.

“나도 지금 바쁘다. 네 다른 사형을 탓하려무나.”

이지함이 가볍게 타박을 놓았다.

급히 말 달려 상경한 꺽정이가 돌아올 기미가 아니 보였으므로, 결국 영남에 남은 병해는 임 당수 없는 임 당수 행렬을 이끌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용케 짬을 내어, 가는 곳마다 전우치 이름 내걸며 도사며 땡초며 하는 놈팽이들을 문하에 모으고 있었다.

이미 병해와 함께하기로 한 이들은, 몸주로 물귀신을 모시는지 열심히 병해 곁을 지키며 새로 문하생 들이는 일을 거들고 있었고, 개중 몇몇은 미리 한양으로 올라왔다.

(경주에 있던 이언적은 그제야, 꺽정이가 직접 양반을 욕하지 않겠노라 하였을 뿐, 다른 이들에 대해서는 일말의 언급도 없었음을 깨닫고 ‘그 도둑놈’ 욕을 했다.)

“벌써 그 돌손인가 하는 김해 사람부터 시작해서, 여러 노... 일손들이 차례로 상경하고 있다. 그들에게 격물법에 대해 가르치고 병해 사형이 시킨 일 맡기는 것만 해도 작은 일이 아니란다.”

병해는 인편으로, ‘문하생’ 어찌 부릴지 글을 써서 이지함에게 부쳤는데, 어째 그 내용을 보면 제자라기보다는 노비에 가까워보였다. 그나마 혹세무민하며 일확천금 터지기 전까지는 영 불안한 삶 이어가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과연 본인들도 그렇게 생각할지는 도통 모를 일이었다.

“벌써 일을 시켰다고? 거 참.”

“암만 기학(氣學)이라고 그럴듯한 이름까지 붙였다지만 그렇다고 잡배들이 하루아침에 학자 되는 것은 아니지 않으냐. 그나마 다들 대충으로나마 글은 배웠으니 망정이지.”

기학이란 곧, 병해가 잡배들 데리고 세상 이치 궁리하는 학문의 이름으로 내건 것이었다. 세상의 도를 궁구하지만 이를 도학(道學)이라 불렀다가는 선비들의 공분을 살 것이요, 이학(理學)도 난처하기는 비슷하였으므로, 리(理)보다는 다소 떨어지는, 그리고 항상 변화하며 세상의 드러난 모습을 이루는 기(氣)의 운행을 다룬다고 그러한 이름을 붙였다.

리와 기는 분명 서로 나뉘지도, 섞이지도 않는 것이니(不相離不相雜) 기학이라는 이름까지 걸고 넘어지려면 결국 사단칠정논변에까지 휘말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그 누구도 기학이라는 이름에 시비를 걸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기학의 첫 번째 궁구할 거리로, 조선의 무반이라면 누구나 궁금해할 수밖에 없는 문제, 화포를 어떻게 쏘아야 가장 멀리 나가는지를 연구하라 하였다. 화포 좋아하는 조선 무관 중 그 누구도 쓸모없다 할 수 없는 주제가 아닐 수 없었다.

허나 격물법에 따르면 결국 이를 알기 위해서는 실험을 해볼 수밖에 없고, 화포의 실험을 위해서는 준비할 일이 적지 않았으므로, 이지함이 꺽정이 돕는 데 난색 표하는 것도 다 이유가 있는 셈이었다.

“다른 이들도 다들 바쁘다 하오. 사형이 그나마 한가한 축에 든단 말이오.”

서림은 북경에서의 일정이 끝나 곧 인천으로 돌아올 바예지트와 이탈리아 사람들 상대할 준비에 바쁘고, 장모 신씨네 아들딸 두 사람은 그 옛날 손 씻는 비법 마련할 때 했던 가락을 되살려 조선 팔도의 여론 향방 계산하는 재미에 빠진 지 오래였다.

아직 제대로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은 고을이 훨씬 더 많았지만, 민주당 세가 강한 몇몇 고을, 그리고 꺽정이가 헤집어놓고 간 덕분에 모두들 헌법에 대한 논쟁을 알게 된 영남 몇몇 고을에서는 그럭저럭 조사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사이 노론 쪽에서도, 두리손의 지침이라도 받았는지 모두를 설득하려는 전략을 버리고 소위 ‘오십일계(五十一計)’, 다시 말해 딱 권점에서 이길 만큼의 민심만 확보하는 쪽으로 돌아서면서, 고을의 민심을 둘러싼 싸움은 더욱 불타오르고 있었다.

어느 고을에서는 저들의 더러운 행실이 고발당하기 전 먼저 향리들도 만만치 않다며 맞불을 놓고, 나주 고을에서는 아예 강남에서 조판(雕版, 목판인쇄)하는 이들을 데려와 정론보와 공보를 모방한 ‘정언보(正言報)’를 창간하기도 했다. 우스운 것은 그것을 위해 노론 선비들이 대양서생 중 하나로서 굳건한 소론 사람이자 이황의 은정고 사업을 도우며 꽤 큰돈 만지게 된 기대승에게 손을 벌렸다는 점이었지만.

“에휴, 알겠다. 알겠어. 나도 요새 그 통산(統算, 통계) 보는 재미를 깨달은지라, 차마 어찌 신씨 부인과 그 자제분들을 바쁘게 하라고는 못 하겠다.”

군현의 공론 통산(여론조사 통계)는 양쪽 사람들을 모두 놀라게 했다. 오복헌법과 ‘재조헌법’ – 한쪽이 오복헌법이라 불리다 보니, 이쪽도 ‘홍범 14조’니 무어니 하는 말보다는 ‘재조헌법’으로 굳어졌다 – 사이의 차이가 그리 크지 않은 것이 하나요, 지금까지 고작 두 번 발표되었지만 두 번의 결과가 고을마다 확연히 달라진 것이 또 하나였다.

실제로는 민주당 향리들이 조사하다 보니, 그 믿음직스러움도 제각각이요 어쩔 수 없는 온갖 왜곡이 들어가 있었지만 – 대개는 의도해서든 의도치 않게든 오복헌법 쪽에 더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꿈보다 해몽이라 하던가. 공보와 정론보는 물론이요, 어지간한 사람들의 이야기거리에서 헌법 운운하는 소리가 빠지지 않게 되었다.

“언뜻 생각하기에는, 은을 흩뿌리는 것이 상책일 테다. 예컨대 대국에서 건너온 아무개가 큰 죄를 범하여 쫓고 있는데, 그 소재를 알리는 자에게는 은 얼마를 주겠노라 공고한다면 누군가 듣고 단서를 알려주지 않겠느냐?”

가짜 죄인을 만들고, 그 생김새는 수염이 없고 환관처럼 생겼다고 여기저기 공고한다면, 누군가는 그 상에 혹하여 고변하지 않겠느냐는 말이었다.

“헌데 동창 사람이 아니라 그냥 멀쩡한 이를 끄나풀로 부리고 있을 수도 있지 않소?”

“동창에서 환관 아닌 이가 대접을 받으면 얼마나 잘 받겠느냐? 상을 족히 두둑하게 내걸면, 그들이 알아서 자수할 지도 모른다.”

꺽정이 생각하기로 그것보다 더 뾰족한 수는 없을 듯하였다.

그리하여 얼마 뒤, 인천과 한양 곳곳에 ‘사람 찾소’라며 그 사람 생김새를 그린 대자보가 곳곳에 붙고, 번뜩이는 은량 그림과 함께 ‘자수하여 광명찾자’라고 국문과 진서로 각각 적힌 대자보도 함께 붙었다.

그리고 과연 이지함의 지모가 들어맞아, 오래 지나지 않아 효험을 보게 되었다.

허나 이는 은에 혹하여 거짓으로 고변한 수많은 놈팽이들 덕분이 아니요, 셰자데 바예지트와 에우로파 각국 사절들에 한 발 앞서 인천 제물포에 닿은, 극히 범상하게 생긴 배에서 썩 범상하지 않은 사람이 내린 뒤, 곳곳에 붙은 그 대자보를 보고 껄껄 웃은 뒤 곧장 사업당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그대들이 찾는 사람이 있다고 들었소이다.”

“그렇소이다.”

생긴 것은 그냥 대국 사람 같은데 어째 조선말이 유창한 행인이, 사업당 걸어들어와 맨 앞 마당을 지키는 이에게 말을 걸었다.

“그 소재를 밝히면 상을 준다지?”

“그 또한 옳으나, 하도 거짓으로 고변하는 자들이 많아 우리 쪽에서도 경계하고 있소. 만에 하나 거짓을 고한다면, 그때는 우리 임 당수께서 가만 계시지 않을 것이외다.”

통상 임 당수가 거론되면 다들 움찔은 하기 마련인데, 수상한 행인은 오히려 더 좋아하였다.

“아, 임 당수라. 지금 여기 계시는가? 얼른 가서 첩자가 자수하러 왔다고 전해 주시게.”

무슨 말인가 어리둥절해하는 불쌍한 사업당 녹사(錄事)였는데, 그에게는 다행히도 때마침 지나가던 흑의군 하나가 있었다.

“아니, 탁오 선생님, 여긴 무슨 일이십니까?”

지아웃딘 알 시니 또는 타고스 박사로도 알려진 범(凡)지구적 말썽쟁이가 저의 동류를 찾아온 것이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저 말고도 다른 첩자들이 많습니다. 특히 두리손인가 하는 그이를 직접 만난다는 동창 사람은 꽤 품계도 높다는데, 말하는 것으로 보면 조선 속사정을 제법 잘 아는 자라고 하더군요.”

이탁오가 나타났다는 소식에 그 바쁜 일 다 접고 다시 모여든 민주당 사람들 앞에서 이탁오가 입을 열었다.

조선 사람들이 대국 환관으로 지내는 것이 그리 드물지는 않았으므로, 조선말 하는 동창 사람이 있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환관으로 보이는 자의 소식은 전혀 없었는데.”

“바로 그 점을 우리 태악 선생(장거정)께서 이용하고 있는 것이지요. 하초 멀쩡한 자는 고작해야 동창이 부리는 아랫사람일 뿐, 동창에서 뭔가 큰일 맡지 못한다고 생각들 하니까요.”

“허...”

이미 진사에 중독되어 사리분별조차 제대로 못 하는 천자, 망가져가는 대명을 고치기 위해 분투하느라 바쁜 서계. 그들 사이에서 붕 뜬 동창 환관들은 장거정이라는 마지막 연줄을 잡았고, 그 대가로 장거정은 서계의 묵인 하에 동창을 마음껏 휘두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알량한 환관의 자존심 따위가 무에 중하랴. 새 상전 말씀대로 아랫도리 멀쩡한 이들을 그들 사이에 맞이할 수밖에.

“그리고 북경에서는 이번 제헌(制憲) 일을 꽤 중대한 문제로 여기고 있더군요. 적어도 태악 선생이 제게 한 말에 따르면 그랬습니다.”

이지는 북경 조정에, 그간 임거정이 행한 온갖 위업과 악행을 낱낱이 고하였다. 누가 보아도 터무니없는 것은 지우고, 마치 태사공(太史公)이라도 된 것처럼 공과(功過)를 균형 있게 적어 글로 올렸다. 즉, 제멋대로 유리하게 지어낸 이야기만을 적어서 올렸다.

“당연히 태반이 지어낸 말이었지요. 뭐, 그리 따지면 태사공도 열전(列傳)을 지을 때 정말로 자신이 그 옛날 오간 이야기를 보고 들은 뒤 쓰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그렇다고 정말 벌어진 일들을 꾸미지 않고 올렸다가는, 오히려 어디서 황상을 속이느냐며 저를 벌할 것이 뻔하였다. 이탁오 딴에는 재미도 있고 저의 목숨도 구명하는 방도를 택한 셈이었다.

“그리고 그 뒤로 태악 선생에게 제의를 받았습니다. 자신 아래에서 일해볼 생각이 없느냐 하더군요. 그놈이 워낙 재수 없는 작자라, 그저 엿 먹이고 싶은 마음에 덥석 받아들였습니다.”

이야기 듣는 내내 다들 말이 없어지는데, 이지함은 기가 막혀 웃고, 꺽정이는 그냥 웃겨서 웃었다.

“그래서 무슨 엿을 사서 보내드릴 생각이시오?”

“들어보십시오. 흐흐.”

그저 민주당 하는 일이면 딴지부터 걸고 보는 장거정이었다. 이번 헌법의 일도, 그저 민주당을 억누르고 장차 천조의 근심 될 만한 것을 미리 제어한다는 생각으로만 접근하고 있을 터.

“그런데 말입니다. 사실 그건 저의 집에 섶 가득 쌓인 것은 모르고 이웃집 불구경 나간 것과 다름없단 말이지요. 이미 불씨는 가득 튀었으니, 우리는 부채질이나 하고 겸사겸사 이익이나 조금 취하면 그만입니다.”

그러면서 저의 몇 달 묵은 못된 심사를 온전히 풀어놓는 이탁오였다.

“... 이왕이면 강남에서 조판하는 이들이나 더 들여오십시다. 양주(揚州) 같은 곳에서 조선 사람만큼 솜씨 좋은 이들을 훨씬 싼 몸값으로 데려오든가, 아니면 아예 현지에 새로 조판하는 곳을 차리든가 하시지요. 그리하면 조만간 꽤 재밌는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리하여 얼마 뒤 정론보 내는 이황 앞으로 국문으로 된 짧은 편지 한 통이 당도하였다.

‘어르신네 스승님 글에 관심 많은 이들이 꽤 있는 듯하던데, 혹시 장사 더 거하게 벌여보실 생각이 있으시오? - 임꺽정 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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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자꾸나! 전원이 장차 황폐해지려는데 어찌 아니 돌아갈까.’라는 도입부로 유명한 <귀거래사(歸去來辭)>의 저자 도잠(도연명)은 현령으로 부임하고 80일 만에 사직한 뒤 예술활동에 매진하며 은일(隱逸, 은둔한 선비)로서 명성을 얻게 됩니다. 그로부터 10년 뒤 조정에서 명예직(좌저작랑佐著作郞)을 받게 되지요. 이지함 역시 역시 은둔한 기인으로 은근한 명성을 얻다가 선조 연간에 벼슬을 얻게 되는데, 도연명과 달리 이지함은 은둔 중 그저 유유자적 소일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백성에게 도움이 될 만한 활동을 하였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조선에서 꽃필 과학의 첫 시작점은, 갈릴레이의 유명한 대포알 궤도 실험이 되었습니다. 이는 군사적으로도 매우 활용가치가 높은 주제기 때문에, 사실 갈릴레이 이전에도 시몬 스테빈(Simon Stevin) 등 16세기의 많은 과학자/기술자들이 관심을 가진 주제기도 하지요. 병해가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굳이 화포를 처음으로 꺼낸 것도 이 때문입니다.

금속활자가 보편화된 이후에도 한자 문화권에서는 목판인쇄술의 비중이 결코 줄어들지 않았고, 19세기 서양의 보다 기계화된 인쇄술이 도입되기 전까지 목판인쇄는 훨씬 대중적인 인쇄술로서 지식 유통의 근간이 되었습니다. 윌킨슨(2012)에 따르면 명~청대 중국에서 인쇄된 모든 서적의 90% 이상은 목판인쇄로 출간되었다고 추산되기도 합니다.

이는 표의문자로서 한자가 지닌 특성 때문이기도 했지만, 경제적 관점에서 보다 자본/기술집약적인 활자인쇄보다 노동집약적인 목판인쇄가 더 효율적이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목판인쇄에 사용되는 목판은 내구성이 약하고 금속활자에 비해 자체의 가독성도 떨어지는 경우가 많았지만, 남중국의 막대한 노동력과 역시 막대한 독자층은 목판인쇄가 계속 번성할 수 있는 조건이 되어주었지요. 17세기의 마테오 리치부터 19세기 청을 찾은 유럽인들에 이르기까지 많은 외국인들은 충격적일 만큼 낮은 중국의 서적 가격에 놀라곤 했고, 19세기 중반까지도 유럽의 인쇄술은 중국식 노동집약적 목판인쇄를 가격경쟁력에서 따라잡지 못했습니다. (Wilkinson, 2012. Chinese History: A New Manual. Vol. 1. 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Asia Center; Barrett, 2008. The Woman Who Discovered Printing. New Haven, CT: Yale University Press.) 조선에서 직접 인쇄공들을 모으는 대신 중국 강남에서 직접 고용하는 쪽을 작중에서 택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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