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백아절현 (2)
천하전도를 노려보며 장거정은 찻잔을 기울였다.
그로서는 도저히 좋아할 수 없는 이지가 서양에서 돌아온 뒤 스승 서계와 저 장거정에게 바친 지도였다. 필시, 은근히 저의 식견 뽐내고 나아가 천조를 비웃기 위해 바친 것이리라. 장거정은 그렇게 의심하였다. (실제로도 그 뜻이 맞았고, 그 지도는 민주당이 지닌 정밀한 지도의 어설픈 모사품에 불과했지만, 장거정은 이를 알지 못했다.)
“정녕 그 글을 써서 조선에 보낼 심산인가?”
익숙한 발걸음에 이어, 역시 익숙한 목소리까지 등 뒤에서 들려오자 장거정은 마침내 고개를 돌렸다. 그의 스승이자 은인, 그리고 집주인인 서계였다.
“예, 스승님. 그것이 최선입니다. 근래 조선의 상황이 심상치 않으니, 우리가 지금 살피지 않는다면 장차 큰 화로 번질 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큰 화라... 그건 그렇지.”
엄숭의 전횡으로 망가진 조정의 법도를 되돌리는 것만 해도 여간 큰일이 아니었는데, 거기에 더불어 해금령을 완화하고, 일조편법이라 통칭되는 새로운 세법까지 도입하기까지 하는는 등 지난 수 년간 과로에 시달린 서계는 부쩍 늙어 있었다.
그런 과로는 상당 부분, 제자이자 딴 마음 품은 장거정이 물 위에서 부추기고 물밑에서 발목 잡은 탓에 쌓인 것이었지만, 서계는 이를 알지 못했다.
엄숭의 혼백이 저 계단 아래 남아 있어 이 모습을 본다면, 필시 엄숭 자신이 서계의 속마음을 알지 못했듯 서계도 저의 제자 속마음 모른다고 조소하였으리라.
“강남 서생들, 특히 절강부터 양광까지 바다에 면한 주군(州郡)의 서생들이 무엄하게도 정사를 논하니, 숙정(肅靜)만이 답입니다.”
태조 고황제(주원장)께서 중원을 일통하고 달단을 몰아낸 뒤 세워졌던 질서는 이미 다 무너졌다. 가장 부유한 강남의 바닷가에서조차, 토지를 가진 자는 열에 하나가 채 못 되니, 부세의 제도를 고치고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는 것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일이었다.
“스승님의 신법으로 큰 이익을 얻었음에도, 만족함도, 겸손함도 알지 못하고 오히려 떠들기를 그치지 않는 자들입니다. 허나 그들은 마치 앵무처럼 바다 건너의 논변을 읊을 뿐이니, 강남 서생들을 제압한다 한들 어찌 화근이 사라지겠습니까.”
해금령이 풀리고 막대한 은이 들어오면서, 강남의 향신(鄕紳)들은 그 덕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들 입에서 공공연히 무엄한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조선국에는 민주당이 있고 탕평당이 있으며, 공회가 있고 통의부가 있는데, 왜 가장 문명하다는 대명(大明)에는 없는가?
그 두 당 모두 높고 낮은 이들이 부귀를 누리며, 그 부귀를 바탕으로 정사를 거드는데, 저들에게만 의권이 있고 자신들에게는 없다는 말인가?
일조편법으로 손해를 보았음에도 그저 숨죽이고 있는 화북의 향신들과 달리, 강남의 서생들은 저들이 북경으로부터 멀다는 것을 믿고, 또 저들 수중에 있는 은의 힘을 믿었다. 무엄한 언사를 내뱉을 용기가 샘솟기에는 족하였다.
“그러므로, 스승님께도 몇 번 말씀드렸듯 조선의 헌법은 결코 조선만의 일이 아닙니다. 동창의 사람들도 그렇게 고하지 않았습니까.”
조선에 돌아온 임거정은 거침없는 행보를 재개하였다. 헌법의 논의가 나오자마자 – 수상쩍게도 재빨리 – 그럴듯한 초안을 그의 당여를 시켜 만들어내었고, 나아가 조선 곳곳을 누비며 유세를 다니고 있었다.
조선에 나가 있는 이들의 보고에 따르면, 잠시 한양에 돌아왔다가 다시 경상도로 내려갔고, 그 뒤로 전라도로 넘어가 민심을 저의 편으로 꼬드기고 있다던가.
조선 현지에서는 사족을 모욕하고 어리석은 백성들을 현혹하는 짓을 하고 있다는데, 정작 그런 진상은 강남으로 잘 전해지지 않았다. 직접 조선을 오가는 상인들은 마치 『서유기』의 제천대성 보듯 그것을 짐짓 통쾌하게 여기고, 글로만 조선을 접하는 선비들은 어떻게 저들도 그 명성과 부귀에 걸맞는 목소리를 낼 수 있을지만 고민하며 다점(茶店)에 삼삼오오 모일 뿐이었으므로.
“그 또한 틀리지 않네. 하지만 크게는 천조와 번국 사이의 도의에 얽힌 일이요, 작게는 그 임거정과 얽히는 일일세. 반드시 신중해야 할 것이야.”
무심결에, 여러 해 전 엄숭이 임거정 발에 맞아 날아가 자빠졌던 쪽을 돌아보며 서계가 말했다.
“걱정 마십시오, 수보 대인.”
처음에는 그저 민주당을 견제하기 위해 조선 안에 마음대로 부릴 일손 하나를 구한다는 생각으로 접촉하였던 자가, 이제는 제법 저만의 생각을 품은 채 무리를 이끌고 있었다.
물론 그래본들 저의 힘만으로 천하 곳곳에 손발을 뻗치고 있는 민주당을 꺾을 수는 없을 테지만, 사냥개가 저의 힘만으로 능히 사냥감을 잡을 수 있다면 사냥개로서의 쓰임은 없는 법이었다.
“이럴 때만 수보 대인이라 칭하는군. 허나 내가 어찌 걱정을 아니할 수 있겠는가?”
“제가 아니라면 다른 누가 이런 일을 맡겠습니까?”
스승에게 당당하게 말대꾸하는 장거정이었다. 허나 틀린 말은 아니었으므로 서계 또한 얼굴은 찡그릴지언정 다른 말은 덧붙이지 못했다. ‘엄숭의 난’ 이후로 서계가 어떤 일이 있어도 함께 믿고 갈 수밖에 없는 이가 바로 제자 장거정이요, 새로 내각에 들어온 이들 중 장거정만큼 유능하고도 재기 있는 이는 없었으므로.
그리고 서계의 침묵을, 장거정은 곧 허가로 받아들였다.
“그렇다면 글을 준비하겠습니다. 조선의 국문을 배워보는 것 또한 나름대로 재미있는 일 아니겠습니까?”
조선을 두고 벌어질 한바탕 싸움. 그 싸움에서 가장 중요할 명분을 얻기 위한 다툼. 그 ‘권점’에서 임거정을 확실히 억누르기 위해 장거정은 소소한 꾀를 내었다.
임거정으로 말미암아, 조금은 민주당에 불리하였던 여론은 다시 조금씩 그들 편으로 돌아서고 있다 하였다. 그보다 먼저 조선에 가 있던 동창 사람들 또한 여론이 결코 유리하지만은 않다고 전하였다.
(그 와중에 처음부터 미덥지 못하였던 천주 서생 이지는 어째 보고를 누락하고 있었는데, 옛날이라면 모를까 지금은 서양의 사정과 글을 아는 이가 그때만큼 귀하지는 않게 되었으므로 – 임거정과 이지에게 고마워해야 할 일이었다 – 여차하면 죄를 씌워 다시는 중원 땅을 못 밟게 하면 그만이었다.)
허나 그래본들 백중세다. 어느 한쪽에 무게추 하나만 슬쩍 얹어주어도 천칭은 기울 터.
화하(華夏)는 이적(夷狄)을 다스리고, 그들에게 이름을 주며, 그들의 마땅한 자리를 가르쳐준다. 그것이 제요(帝堯, 요임금) 때부터의 이치였다.
그리고 장거정은 그것이 거짓이었음을, 그가 태어나기 이미 한참 전부터 중화 사람들이 스스로 속이고 또 사방 오랑캐들이 기꺼이 중화의 눈을 가려왔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괜찮다. 잘못은 고치면 그만이다. 그릇된 것은 바르게. 이름은 이름에 맞게(正名).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라면 장거정은 중화의 허명(虛名)과 그것이 주는 거짓 체통 따위는 언제든 내버릴 수 있었다.
예로부터 조천사(朝天使, 명나라로 가는 사신)는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조선 사람들이 선망하는 자리였다. 비록 먼 길이라 위험하기는 하지만, 선비는 능히 명성을 얻을 수 있고 역관은 능히 보화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허나 십 년이 채 되지 않는 짧은 세월 속에서 그것은 반대로 뒤집혔다. 대국 선비들 사이에서 글로 명성 얻기를 원한다면 공보나 정론보가 새로 뚫린 왕도(王道)라 할 수 있었고, 천하에서 가장 부유할지도 모르는 강남에서 상인들이 직접 조선의 배를 타고 인천이나 동래로 건너왔으니 사행(使行)으로 버는 돈은 그에 비하면 푼돈에 불과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가야 하니, 조정에서는 막대한 성은(聖恩)을 베풀어 – 주로 그것은 은의 형태를 띄고 있었으므로 성은(聖銀, 거룩한 은)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 사람을 모으곤 했다.
이제는 슬슬 천조에서 원하던 것처럼 일년삼공(一年三貢)을 폐하고 일년일공(一年一貢) 정도로 줄여도 괜찮지 않겠느냐는 말이 나올 무렵.
별 생각 없이 대충 북경으로 향했던 사신이 예부상서 장거정이 친필로 썼다는 글을 들고 돌아와 모두를 놀라게 하였다.
그 글의 내용도 내용이거니와, 나라가 세워진 이래 양국을 오갔던 그 어떤 문서와도 형식이 달랐던 것이다. 조선국 임거정에게 내렸던 칙서의 양식을 따라, 한쪽에는 진서를 쓰고, 다른 한쪽에는 (아마도 역관의 도움을 받아) 조선의 국문으로 썼는데, 문체는 절절하고 문장은 진솔하였다.
‘황은 입어 대명의 예부상서로 봉직하는 장 아무개가 삼가 조선국왕과 조정의 대소 신료에게 인사 올립니다.
근래 세간의 풍속과 인정(人情)에 인습이 쌓이고 적폐가 생기니, 그 퇴폐함은 날로 심해져 점차 돌이키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는 비단 한 나라의 어려움이 아니요 천하가 함께 지니는 어려움이니, 천조뿐 아니라 천조의 으뜸가는 번병이요 벗인 조선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이에 저 장 모는 성지(聖旨)를 받들어, 천하의 마음을 새롭게 하고 천하의 뜻은 하나로 모으고자 온 힘을 다하고 있습니다. 공실(公室, 중앙집권)을 강하게 하고 사문(私門,민간의 공론)을 막아, 기강을 바르게 하고 모든 것을 공도(公道)로 합하는 것입니다.
조선의 경장이 우리 천조의 경장과 결을 같이하고, 새로 세우는 법도가 마치 거문고와 비파가 서로 음률을 맞추는 것처럼 조화롭다면, 어찌 나머지 천하가 뒤에 따르지 않겠습니까?’
그러면서 어디까지나 대명 조정의 뜻이 아닌 장거정 한 사람의 뜻임을 명백히 밝힌 다음 – 즉 차마 대놓고 밝힐 수 없을 뿐 대명 조정의 뜻과 다름없다는 말이었다 – 오복 운운하는 헌법보다는 나라를 안정케 하고 백성을 편안케 할 헌법이 더 온당하다는 말로 글의 중간을 채웠다.
‘아아, 아버지는 높고 아들은 낮다지만, 아들이 없으면 아비는 그저 후사 끊긴 노인일 뿐입니다. 우리 두 나라가 저 간악한 달단을 몰아내고 세상을 이롭게 하고자 세워져, 한쪽은 아비가 되고 다른 한쪽은 아들이 되어 화목한 아름다움을 지금까지 이백 년 조금 못 되게 이어 왔습니다.
근래 조선국에서 신법을 제정함에 있어 옳고 그름을 두고 사민(士民) 사이까지 논란이 그치지 않는다 들었습니다. 자칫 그것이 그릇되어, 우리 두 나라의 마음이 어긋나는 단초가 된다면 이 어찌 안타깝지 않겠습니까. 장 아무개는 부디 조선의 군민(君民)이 올바른 길을 찾기를 바라며 재차 고개 조아릴 뿐입니다.’
참으로 조선을 놀라게 할 만한 글이었다. 천조 대명과 조선을 일컬어 ‘두 나라’라 언명한 것도 범상치 않았고, 진서로 쓴 글은 공경스럽고 조선 국문으로 쓴 글은 그 말투가 공대하는 것이었으며, 심지어 사절들의 말에 따르면 그 국문으로 쓴 부분 또한 장거정의 친필이라 하였다.
웃는 낯에는 침을 뱉을 수 없고, 조아린 고개는 때릴 수 없는 법.
만약 저 글을 평소 자문(咨文) 쓰듯 써서 보내왔다면, 아무리 대명(大明)이 조선의 상국이라지만 엄연히 다른 나라이거늘 국법 정함에 대해 왈가왈부할 수 있느냐며 다들 반기를 들었을 것이다.
조선이 거의 망할 지경에 이르렀을 때 명이 은 수백만 냥과 천병(天兵) 수십만을 내어 구해주기라도 했다면 모를까, 지금껏 명이 상국으로서 조선의 국법을 마음대로 할 만큼 깊은 신세를 지운 것도 아니지 않은가.
허나 내용은 분명 남의 나라 내정에 훈수 두는 것이되 그 문장이 간곡하고 형식은 전례 없이 조선의 체통을 살려주는 것이었으니, 근년 사이 명나라 사정을 듣고 은근히 조선만 못한 면도 있다 여기던 개명(開明)한 선비들마저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다들 조선의 국위가 사방에 떨쳤다며 입꼬리 올리게 되는 소식. 그리고 그 입꼬리가 올라간 뒤의 생각은 그 전과는 조금 달라질 수밖에 없을 터.
“온 천하가 이번 헌법 권점에 이목을 모으고 있으니 반드시 권점에 한몫 거들라. 세상에 저의 살다 간 흔적 남기기에 이만한 기회가 또 언제 오겠느냐. 그렇게 설득하고는 있소. 이럴 때가 아니면 저들 하는 짓거리가 언제 대국 천자 귀에까지 들어가겠느냐며 찬동하는 놈들도 제법 있더군.”
그것이 꼭 어리석은 생각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만에 하나 대국 천자든 그 나라 정승이든 누가 거하게 노하여 무언가 수를 쓴다고 하더라도, 고작해야 윗분들 몇몇 쫓겨나든 죽든 할 뿐 일반 백성들에게까지 해가 미치지는 않을 것이므로.
“허나 조금 더 견식 있는 이들은 이 일이 얼마나 전례없는 것인지 떠들면서 대책을 논하고 있더군. 이대로라면 사족들 마음이 또 뒤흔들릴 것이라고 병해 사형은 걱정하시더이다. 소론 사람들이라 하여 무작정 우리 당 하는 일이 다 옳다고 보지는 않으니.”
그러나 지리산 자락을 지나다가 소식 듣고 급히 상경한 꺽정이의 표정은, 저의 언사 내용과 달리 썩 어둡지 않았다.
“그렇다면 우리 탁오 선생이 이렇게 찾아온 것은 정말 천만다행이 아닐 수 없군그래.”
“하하, 과하지 않은 칭찬입니다.”
이지함과 이탁오 또한, 당황하기보다는 슬슬 올 것이 왔다는 표정이었다.
“실로 인사(人事)와 천시(天時)가 맞아떨어지는 격이지요.”
천조에서 때를 만들어주니 그것이 곧 천시 아니겠는가.
어차피 장거정의 성품을 고려하면, 권점이 끝나기 전에 뭔가 수작 부릴 것임은 명백하였다. 그것이 저렇게 전례 없는 모습으로 찾아올 줄 몰랐을 뿐.
그리고 설령 장거정이 북경에서 다망(多忙)한 공사로 말미암아 조선 쪽으로 고개조차 못 돌릴 지경이라 할지라도, 꺽정이와 그 패거리는 중원을 상대로 한 이 불장난 계획을 실행에 옮겼을 터였다.
“자, 그러면 손을 써 보십시다.”
조선 사람들이 주로 교역하는 것은 강남 쪽이지만, 이는 강남이 가장 부유하고 물산 풍족하기 때문일 뿐 더 북쪽에 항구가 없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저 이익이 되지 않아 배가 드문드문 오갈 뿐이요, 그 땅의 향신들 역시 장사보다는 글공부와 전주(田主, 지주) 노릇에 더 열중하기 때문이었다.
허나 그렇다 하여 그들이 바깥 세상 이야기에 관심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지금까지는 바깥의 일이 그들의 일과는 거리 멀었기에 그만큼 마음 속으로 멀리했을 뿐.
그러나 그것은 곧 바뀌게 될 터였다.
“원래 분탕질은 글로 하는 것이 제 맛이지요, 흐흐.”
자신이 지은 온갖 글로 오히려 이탁오보다도 더 세상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던 이이는 정작 제 코에 묻은 검댕은 알아보지 못하고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대명 예부상서 장거정 대인께서 재조헌법에 찬사를 표하셨다. 조선의 언문으로 직접 써서 보낸 글에 이르기를...’
곧 원고가 완성되고, 조식에게 전해졌다. 꺽정이 일당의 검은 속내 알지 못하는 조식은 그리고 그 글을 그대로 정론보에 실었다. 설령 속내를 알았더라도, 저의 붓 꺾지 않듯 남의 붓도 함부로 꺾지 않는 올곧은 성정의 조식은 딱히 가로막지 않았을 테지만.
그 글은 장거정이 재조론의 큰 뜻에 찬동하며 적은 문장을 거의 그대로 옮겨적고, 이것이 장 상서의 큰 뜻이라 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완성된 정론보는 황해 건너편 산동으로 전해지고, 산동에서는 강과 길을 따라 산서(山西)로, 하남(河南)으로, 호광(湖廣, 현 후베이, 후난성)으로, 사천(四川)으로 퍼져나갔다.
대체 무슨 수를 부렸기에 이러한 조화가 이루어졌는가? 민주당은 그저, 이탁오가 한양 찾아온 직후 남직례와 산동 곳곳에 사람을 보내, 정론보를 현지에서 조판(인쇄)하여 팔 사람들을 구했을 뿐이었다. 아주 높은 값을 부르고 모았기 때문에 사람은 금방 몰렸고, 그와 동시에 현지 상인들 사이에 묘한 소문이 돌았다.
물론 이는, 각별히 더 은을 뿌려 바람잡이들을 부린 덕택이었다. 허나 꽤 솔깃한 이야기였기에 그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장차 이 정론보가 널리 팔릴 것이라더군. 나라의 모든 배운 이들이라면 한 글자도 빠짐없이 읽으려 할 것이라던데.”
“여기가 강남도 아니고, 그럴 리 있겠는가?”
“이보게, 조선 사람들은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 하는 것 모르는가? 저들이 저렇게 은을 흩뿌리며 사람 모으는 데는 이유가 있겠지.”
대국에서 조선을 오가는 배편은 태반이 민주당 또는 자유민주당의 배요, 인천에 당도한 상인들의 장사 상대는 사업당 사람이거나 사업당에서 상학 배운 사람들이었다.
만난 조선 사람이 하필이면 임꺽정과 서림 같은 작자들이라 ‘동방예의지국’은 그냥 농담으로 주고받는 말이라고 여기게 된 바예지트와 베네치아 사절들처럼, 명나라 안에서도 그런 엉뚱한 오해가 퍼져 있었다.
“만약 그렇다면...”
“좋은 장사는 자칫하면 금방 놓치기 마련일세.”
“자네 말이 옳으이. 나는 일꾼들을 모으겠네. 자네는 그 정론보 빼돌릴 궁리를 하게나.”
이미 공보를 모방하여 강남에서는 비슷한 글이 많이 나오고 있었다. 공보가 워낙 이름나다 보니, 대개는 ‘화남공보(華南公報)’니 ‘절강공보(浙江公報)’니 하는 식으로 이름을 정했다.
새로 공보를 만들고 운영하는 것은 어렵지만, 남의 글을 가져와 베껴 파는 것은 쉬웠으므로, 화북의 장사치들은 글자 몇 개만 바꿔서 향신들에게 팔아먹곤 했다. 당연히 원작자에게는 은 한 푼 가지 않았다.
그러니 정론보를 베껴 파는 것도 늘 하던 가락이 있었으므로 그리 어렵지 않게 이루어졌다.
며칠만에 조선에서 정론보를 들여올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곳이 산동이다. 사람의 욕심은 그 어떤 명마보다도 더 빨리 내달려, 한 고을에서 목판을 파기 시작하면 그것이 종이에 찍히기도 전 (역시 그것을 훔쳐본) 다른 고을에서 새로 목판을 파고, 나중에는 심지어 조선에서 정론보가 나오기도 전에 대충 짜깁기한 글을 정론보랍시고 펴내기도 했다.
“이 일대의 향신들이야말로, 참된 독자분들 아니시겠는가! 우리에게 이토록 이로운 일을 해주시면서까지 글을 손에서 내려놓지 않으시니.”
“암, 암. 이게 다 그분들 위하는 길이지. 우리는 소소하게 벌이를 얻고, 그분들은 즐거움과 배움을 얻고, 흐흐.”
그리고 그런 뻔뻔한 짓거리는 큰 성공을 거두었으니, 일조편법으로 말미암아 그간 국법으로 누리던 특혜와국법에는 없지만 어쨌든 누리던 특혜를 빼앗긴 화북의 향신들이 정론보를 앞다투어 사들였던 것이다.
자신의 스승이 다만 시류에 어긋나는 뜻을 품어, 그 문재(文才)와 학문이 묻혀버렸다며 내심 안타깝게 여기던 이황은, 자신이 세운 정론보 덕에 스승에게 불후의 명성을 안겨주게 되었다.
“일조편법은 한때의 이로움만 줄 뿐이요, 후대의 근심은 장구히 이어질 것이다! 어찌하여 젊은이 한 사람의 뜻으로 중원 전체를 어지럽히는가? 이것을 막기 위해서는 헌법이 있어야 한다!”
“천하의 부귀가 금은으로 귀결된 이래로 풍속은 어지러워지고 백성은 고향을 마음대로 떠나게 되었다. 은을 접한 지 오래 되지 않은 조선의 선비들조차 이 이치를 깨달아, 장차 이를 금할 법을 세우고자 건의하였다. 어찌하여 예부상서는 저의 입으로 조선 선비들의 궁리가 옳다 하면서 우리 말은 그르다 하는가?”
세상이 잘못 돌아가고, 저의 아끼던 제자마저 스승을 버리고 그 시류를 따라간다 여기던 늙은 선비가 야트막한 산기슭에서 한(恨) 담아 지은 글은, 몇 달도 지나지 않아 중원으로 퍼져 거대한 불길을 일으켰다.
“예부상서 장거정도 헌법을 세우는 것은 온당하다고 저의 손으로 밝혔다! 그가 그것을 좋다 여긴다니, 우리도 그렇게 해주자!”
“헌법을 세우자! 헌법을!”
격문이 나돌고, 관헌들은 장거정을 운운하는 향신들 앞에서 당혹을 금치 못하였다.
그렇게 되니, 그간 잘못된 소문 날 것을 두려워하여 정사의 옳고 그름 논하는 것을 숨기려는 시늉이나마 하였던 강남의 서생들도 가만 있을 수는 없었다.
“시세에 어두운 북녘의 더벅머리 서생들이 신사(紳士)를 자칭하며 천하의 바른 공론을 어지럽히는구나! 우리라고 가만 있을 수 없다!”
“예부상서는 스스로 조선의 재조론이 옳다 밝혔지만, 그 스승 서 수보는 일조편법을 짓고 해금의 법도를 풀지 않았던가? 우리도 헌법을 세워 서 대인의 뜻을 새롭게 밝히고 장차 나라와 향신이 모두 흥성할 길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천자도, 서계도, 장거정도 알지 못하는 사이, 이미 공보와 사업당 분표 등이 오가며 널리 뚫린 생각과 글의 길을 타고, 사람의 꿈과 욕심, 열망이 쉽게 모였다.
“헌법을 세우소서!”
“우리 대명이야말로 천하에서 가장 문명한 땅이니, 마땅히 그에 맞는 법도를 세우소서!”
슬슬 막혀가는 대운하 대신, 바닷가 오가는 내선을 타고 천진에 닿은 강남 서생들. 굳이 운하까지 갈 것도 없이 저의 발과 저의 수레로 상경한 화북 서생들.
말은 도저히 같은 화인(華人)이라 할 수 없을 만큼 다르고, 행색도, 집안 사정도 달랐지만, 외치는 바는 어쩌다 보니 서로 멱살 잡으면서도 한 가지 주장만은 합치하게 되었다.
홍무제 주원장이 호유용((胡惟墉)의 옥(獄)과 남옥(藍玉)의 옥으로 선비 육만 명을 도륙해가며 세운 법도. 손수 조서까지 지어 『맹자』에서 민(民)이 들어가는 장구 읽는 것을 엄금하며 세운 천조 대명의 법도. 그 법도에 금이 가는 데는 그리 오랜 시일이 걸리지 않았다.
어쩌면 이미 그 전부터 금은 가고 있었고, 그저 애써 그 위에 회칠만 하며 숨기고 있던 것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점점 깊어만 가던 금을, 그저 망치질 한 번으로 덧칠한 석회를 부수고 드러내었을 뿐일지도.
만약 그렇다면, 망치질을 한 것은 천하의 근심덩어리 임꺽정과 그의 패당이되, 그 망치를 넘겨준 것은 장거정이요, 망치를 만들어 고이 간직하고 있던 것은 다름아닌 천자와 그의 조상들이라 할 수 있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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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 종종 언급되었던 것처럼, 조선이 명에 보내는 사신은 일 년에 세 번 있었으므로 이를 흔히 일년삼공이라 부르곤 합니다. 보통 조공국들은 삼년일공, 즉 삼 년에 한 번 조공하는 것이 원칙이었고, 주원장 역시 고려와 그 뒤를 이은 조선이 그러한 통례를 준수하기를 원하였으나 번번히 실패했습니다. 작중 조선이 스스로 일년일공을 고려하는 것은, 뭇 제후국 중 제일이라는 자존심과 사행의 경제적, 사회적 이익이 대폭 감소한 현실 사이에서 적당히 조율하여 나온 결과라 할 수 있겠습니다.
엄숭 부자의 실각 후 내각수보로서 대권을 쥐게 된 서계의 행보에 대해서는 당대와 후대를 통틀어 평이 갈렸습니다. 대체로 엄숭을 몰아내고 정치개혁을 시도한 것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평이 많지만, 동시에 그가 권모술수를 동원하였고 어떤 일관적 정책보다는 임기응변 위주로 국정을 운영했다는 혹평도 함께 나오곤 하였지요. (이는 엄격한 주자학도였던 장거정과는 달리 양명학에 훨씬 경도되었던 서계의 학문적 배경과도 무관치 않을 것입니다.) 원 역사에서나 작중에서나 확고한 철학과 그것을 위해 거침없이 권력을 장악하려는 의지를 겸비한 장거정에게 서계가 흔들릴 수밖에 없는 것은 그 때문이라 하겠습니다.
이전에 종종 언급하였던 것처럼, 명은 강력한 전제군주정을 지향하였습니다. 빈농의 자식으로 태어나, 일반 민중의 삶에 공감하면서도 동시에 그 저력을 두려워했던 주원장은 명을 건국하자마자 중앙집권과 황제 중심의 전제정을 확립하려 노력했고, 나아가 황제를 모든 공적 권위의 중심에 두려 노력했습니다. 홍무제 주원장을 여러모로 계승한 영락제 역시, 군주가 공인한 성리학만을 공식
적인 유일한 학문으로 삼아 향신 계층의 사상을 통일하려 노력했지요. 이는 자연스럽게 반대하는 모든 세력에 대한 강력한 압제로 이어졌습니다. 주원장이 호유용과 남옥 등 개국공신들을 숙청하면서 동시에 모반에 관여하였다는 핑계로 수많은 관료와 그 친족인 사대부들을 여러 해에 걸쳐 쓸어 없애다시피 했던 것 역시 이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나 명말로 접어들어, 사회에 대한 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되고 상업을 통해 부를 획득한 향신과 도시 소시민층이 등장하면서 여기에 대한 저항도 이루어지기 시작합니다. 양명학과 같은 ‘이단적’ 사상이 널리 인기를 끌었고, 당시의 사회 분위기를 소시민의 입장에서 풍자하는 『서유기』와 같은 작품도 인기를 끌었습니다. 하지만 장거정을 비롯한 명말의 권력자들은, 여기에 대해 탄압과 통제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대처했고, 결국 한족 최후의 통일왕조는 그 시작과 마찬가지로 민중반란에 의해 무너지는 비참한 결말을 맞이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