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만인지적 (4)
경기도 지평 살던 개똥이는 군제가 바뀔 때 운 좋게 군졸이 되어 평생 호구 걱정은 덜었다. 돈깨나 모아 저의 이름부터 김계동(金契同)으로 바꾸어 올렸고, 사 년 전에는 이 조총이라는 신묘한 기물을 익히게 되었다.
그리고 이 기물은, 오늘 저에게 큰 광영을 줄 것이다. (‘광영’이 무엇인지는 잘 몰랐지만, 아마 포상 중에서도 엄청난 포상을 가리키는 말일 테다.)
민주당인지 인민당인지, 헌법인지 무엇인지는 잘 모른다. 하지만 오늘 싸움에서 이긴다면, 그들이 모시는 원수와 군관들이 저 도성 안에 당당히 입성해 한 자리씩 차지하게 된다면, 이곳 살곶이벌에서 명줄 내걸고 싸운 이들 또한 민주당 아전들처럼 거들먹거리며 살 수 있을 것이다.
구령에 따라 저의 조총에 화약을 넣고 화승을 붙였다. 비록 실제로 이 총을 누군가에게 쏴보지는 않았지만, 훈련은 많이 해 보았으므로 딱히 구령을 따른다는 생각도 없이 손이 움직였다.
그 말 끝나기 무섭게, 저쪽에서 당긴 화살이 비 오듯 쏟아진다. 비로 치면 가랑비지요, 그나마 목책에 맞거나 아예 힘 잃고 그들 앞에 떨어지지만, 그래도 맞는 사람은 있다.
“준적인(准賊人, 적을 겨냥함)!”
그리고 비로소 가늠자 앞이 보인다.
땅이 울리고 있었다. 저들 야인들이 벌써 이만큼 바짝 다가와 있었던가?
이제 방아쇠만 당겨 거발(擧發, 격발)하면, 저들은 무너질 것이다.
만약 당기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지? 흉험한 기세가 바람처럼 그들 사이로 퍼지며, 그런 의심을 쏜살같이 불어넣는다.
모두의 관자놀이에 식은땀이 흐른다. 봄의 건조한 훈풍 덕에 그 땀은 금방 마르지만, 그것을 그 누구도 의식하지 못한다.
“쏴라!”
“누구냐! 아직 아니...”
‘거발’이라는 구령 대신, 투박한 ‘쏴라’가 어디선가 나왔다. 개똥이는 저도 모르게 그 말에 따랐다.
일제히 ‘탕-‘소리가 나는 대신, 마치 우박이 지붕을 때리는 것처럼 연달아 총성이 이어졌다.
이렇게 된 이상, 차라리 일제히 쏟아붓고 빠르게 다시 재는 것이 옳다 판단한 군관들은, 뒤늦게 외쳤다.
“거발!”
“거발 후 즉각 세총(洗銃, 총열 내부 청소)!”
매캐한 연기는 강바람 타고 흩어지고, 그 뒤 드러난 모습은...
그대로였다.
말 몇 마리 쓰러지고, 아마 사람도 몇 명 죽었겠지만, 척 보아도 이삼천은 되는 야인들은 전혀 줄지 않은 듯했다.
“놈들이 활 쏜다!”
“수그려!”
“맞았다! 내 팔!”
“시끄럽다! 뒷 차(次, 열) 교대!”
이만오천 군세 중 조총 든 이들만 모아, 세 줄로 늘어놓은 진형. 그 진형이 꿈틀대며 움직인다.
비웃기라도 하듯, 비스듬히 달려나가며 멀어지던 야인들은, 옆으로 달리면서도 슬그머니 다가온다.
“준적인, 거발!”
뒤이어 개똥이를 밀쳐내고 앞에 선 자들이 하나둘씩 포를 쏜다. 저의 때보다는 조금 더 뭉쳐서 쏘기는 했지만, 여전히 먼저 쏘는 자는 많고, 뒤늦게 쏘는 자, 쏘려다 화승에 불이 꺼진 자들이 있다.
그러나 괜찮았다. 저들은 멀찌감치 달려가고 있었고, 그 모양새는 흡사 도망치는 듯하였으므로.
“놈들이 물러간다!”
“천세! 천세!”
“아직 이르다! 뒷 차 교대!”
이번에도 저쪽에서 쓰러진 자들은 얼마 되지 않는 듯하였으나, 무슨 일인지 야인들은 멀어져가고 있었다.
“엇? 저기 저놈들!”
물러나는 야인들은, 어느새 한양 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동요하지 마라! 원수와 막료들이 저런 꼼수를 아니 대비하셨을 줄 아느냐!”
물론 저쪽, 원수가 있는 청계천 뒤편 언덕과 중량천(중랑천) 건너편 쪽에도 인민군이 목책을 세워두고 기다리고 있다.
청계천과 중량천은 비록 발목에서 허리 정도나 잠기는 얄팍한 깊이지만, 반대편에서 작정하고 지킬 경우에는 제법 그럴듯한 해자가 되었다.
과연 저쪽에서 별군 병사들이 우르르 나와 창 들고 활 겨누니, 여진 야인들은 개울을 넘을 엄두도 못 내고 북쪽, 저들 동무들 있는 쪽으로 물러났다.
“해치웠나?”
“그런 말 하지 마라. 부정 탄다.”
“하화약(下火藥)!”
구령에 다시금 정신을 차린다. 아직 싸움은 겨우 붙었을 뿐이요, 화약은 아직도 꽤 남아 있다. 또 한 번 저 아차산 쪽에서 일군의 마병들이 달려나온다.
여전히 아차산 위에는 ‘임꺽정’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그러나 여진 야인들이 인민군 진형 앞을 내달릴 때 슬그머니 올라왔던 세 번째 깃발은, 어느새 도로 사라져 있었다.
두리손이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것은, 그 깃발이 오르내리기를 여러 차례 거듭한 뒤였다.
“이대로 버티기만 하면 우리가 이기는 것과 진배없습니다.”
“실로 그렇습니다. 저 동대문 위에서 싸움 구경하는 모든 이들이 지금 이 모습을 보고 있을 것입니다. 어찌 오늘 해가 진 뒤에도 감히 대적할 마음이 남겠습니까? 하하!”
이 싸움은 이기지 않아도 된다. 저들에게 조금이나마 타격을 주어 물리치고, 임꺽정이라 한들, 북병이라 한들 결코 도성의 포위를 뚫을 수 없음을 도성 안의 고관들에게 드러내 보이면, 그것이 바로 이기는 것이므로.
그리고 지금껏 인민군 군교들은 그 소임을 다하고 있었다. 조총의 불벼락 앞에서 야인들도, 그 뒤를 이어 뛰어든 북병들도 견디지 못하고 물러났다.
그저 아차산에서 중량천까지 동에서 서로 달리며, 어떻게든 뚫을 곳을 찾으려 하다 끝내 실패하고 물러날 뿐.
차라리 초장에 일만오천 마병을 모조리 이끌고 달려들었다면, 그리하여 난전으로 끌고 갔다면, 야인이나 북병과 달리 이쪽 인민군 병사들은 단병(短兵, 근접전)에 약하니 그나마 승산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래본들 저쪽도 조총에 맞고 기세가 완전히 꺾인 뒤일 테니, 수가 많은 이쪽을 당해내지 못하고 속절없이 밀려날 뿐이겠지만, 적어도 잠시나마 밀어붙일 수는 있을 것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저렇게 아무런 효용도, 이득도 없는 짓을 반복한다는 말인가? 삼천 정도로 나뉜 무리가 번갈아가며 진형 앞을 달리고, 조총 앞에서 끝내 물러난다.
또 한 번, 일제히 거발하는 소리. 처음과 달리, 이제는 섣불리 먼저 쏘는 이 없이 일사불란하게 방포한다.
그리고 또 한 번, 비스듬히 달리며 틈을 찾는 듯하던 북병은 물러난다.
그리고 또 한 번, 아차산 위의 세 번째 깃발은 내려간다.
불현듯, 불길한 느낌이 엄습한다. 임꺽정 세 글자가 마치 저들 모두를 조롱하는 듯하였다.
“바레투! 바레투 그자를 불러와라! 무슨 수가 있어도 저 깃발을 완전히 꺾어버려야 한다!”
도성 성벽. 한양에 남은 고관들과 서리들, 백성들 모두 성벽 위에 올라와 살곶이벌의 살풍경한 모습을 먼발치서나마 바라보고 있었다.
이것도 엄밀히 따지면 구경은 구경이겠지만, 엿장수 하나 보이지 않고, 훤화하는 이 역시 한 사람도 없었다. 그저 탄환의 자국 선명한 성가퀴에 올라, 이마에 손바닥 올린 채 동쪽을 응시할 뿐.
“또 쏜다!”
“아이고!”
이곳에서는 벌판의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성벽은 나름 높고, 이지함과 이준경 외 고관들이 올라가 있는 문루는 더 높지만, 그사이 성저십리에도 민가가 빼곡히 들어섰기 때문이었다.
허나 마병의 달리는 소리와 그 뒤를 따르는 흙먼지, 그리고 조총과 저들이 가져온 양이 총통의 포성은 여기까지 여실히 전해졌다.
그리고 저 멀리 아차산 위의 깃발도.
“맞았다!”
“아니? 또 섰다!”
그간 성벽을 잊을만 하면 다시 때리던, 그리고 이쪽에서는 속절없이 맞기만 해야 했던 그 양이의 총통이 아차산을 또 때린다.
그러나 이번에도 깃발은 꺾이고 부서질지언정, 똑같은 모습으로 똑같이 세워졌다.
그 의연한 모습에 사람들은 감탄하며, 어쩌면 이길 수도 있겠다는 기대를 다시 품는다.
하지만 도성 백성들보다 조금 위, 문루에 서서 백리안으로 싸움의 정황 살피는 이준경은 그러지 못하였다.
“결국 뚫지 못하는가...”
살곶이벌에 저들 인민군이 목책을 세우고, 일전을 위한 만반의 준비 마친 것을 보았을 때, 이준경은 인민군의 대처가 너무나 기민하니 아직 안도하기에 이르다는 이지함의 말이 옳았다 여겼다.
그리고 오늘, 그는 수심 가득한 눈으로 기껏 일어난 흙먼지가 한바탕 일어난 뒤에는 다시 북쪽으로 물러가던 것을 보았고, 똑같은 모습이 몇 차례나 반복되는 것을 백리안 통해 보았다.
인민군은 가만히 서 있고, 북병과 야인들은 계속 달린다. 사람의 수로 따져도 인민군이 훨씬 많다. 아무리 교대한다 한들 언젠가는 지칠 때가 다가온다. 지금까지 울린 총성의 횟수를 바탕으로 셈해보면, 아마 적잖은 수가 죽고 다쳐 그 예기(銳氣)도 꺾였을 것이다.
“걱정되는구려. 이대로라면 결국 물러날 수밖에 없을 터인데. 도성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성 안의 군병을 한데 모아 적진을 치는 것이 그나마 승산 있는 길일지도.”
허나 이번에는, 오히려 이지함의 얼굴이 이준경보다 밝았다. 분명 같은 백리안을 번갈아 살피며, 같은 전장을 보았을 터인데, 어찌하여 낯빛은 다르다는 말인가?
“대감의 말씀은 절반은 옳고 절반은 그르다 하겠습니다. 소생 헤아린 바가 맞다면, 지금 북병은 도체찰사가 아닌 도원수가 이끌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직은 나라 안에서 오직 도원수와 그 패거, 아차, 당여들만이 낼 수 있을 그런 병법(兵法)을 선보이고 있겠지요.
그러니 우리는 출성하여 인민군의 뒤를 쳐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승기를 굳히기 위해서 말이지요.“
한참 뒤, 두리손의 군막.
달려드는 – 그것을 ‘달려든다’라 부를 수 있다면 - 북병을 또 한 차례 물리치고, 이제 순번이 되었는지 다시 여진 야인들이 달려나왔다.
그리고 또 한 번, 연달아 쏘는 조총 앞에서 무력하게 물러났다.
아니, 과연 무력한가?
이제는 다른 막료들도, 슬슬 무언가 잘못되고 있음을 깨달았다.
아무리 쏘아도, 아차산 위의 ‘임꺽정’ 깃발은 꺾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수상한 세 번째 깃발은, 마병들이 이쪽의 목책과 포수들 앞으로 달려나올 때면 어김없이 다시 세워지곤 했다.
그제야 비스듬히 달려오는 마병들이, 그 깃발이 세워지면 이쪽 목책과의 사이를 일정하게 유지한다는 것을, 두리손과 막료들은 깨우쳤다.
그리고 무슨 조화인지, 분명 병마를 조련할 때는 족히 조총으로 과녁을 맞출 수 있던 그런 거리였으나, 마병들은 암만 조총을 쏘아도 백에 하나쯤이나 낙마할 따름이었다.
“어찌하여, 이것을 이제야...”
어찌하여 그랬는가? 스스로 변명할 길은 차고 넘쳤다. 임꺽정 석 자의 깃발에 모두 눈이 쏠려 있었다. 저 깃발이 언제 무엇을 할지 모른다 여겨 총통으로 쏘았고, 언제부턴가 거기에만 집착하게 되었다.
그리고 또, 그들 모두 마음 한편으로 두려워하던 북병이 탄탄한 진형을 뚫지 못하고 패주한다는 것에만 집착하였다. 이번 싸움은 이기지 않더라도, 버티기만 하더라도 낙승이라는 그 생각이, 그들의 눈을 가렸다.
허나 과연 그것이 그들만의 잘못인가?
“아니, 이것이 어찌 가한 일이란 말인가? 대체 어떻게?”
이 땅에 조총을 가장 먼저 들여온 것은 임꺽정과 그의 민주당이요, 그것을 전례 없는 방식으로 엄청나게 찍어내어 온 천하에 흩뿌린 것도 민주당이다. 그리고, 이제야 절감하는 것이지만 그 조총을 들고 실제로 가장 많이 싸워본 것 또한 민주당이다.
허나 아무리 그렇다 한들, 아무리 여전히 아차산 위에서 펄럭이는 깃발이 과시하듯 임꺽정 그자가 대단하다 한들, 어떻게 저런 말도 안 되는 계책을 눈앞에서 펼쳐보일 수 있다는 말인가?
백 번 양보하여, 훈련하며 과녁에 쏘는 것과 달리 실제 전장에서는 조총을 훨씬 가까이서 쏘아야 효험 있다는 것을 임꺽정이 그간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치자.
그렇다 한들, 어떻게 그 거리를 정확히 알고, 이쪽에서 아무리 열심히 쏘아도 저쪽에서는 별다른 피해 없는 그 아슬아슬한 거리를 유지할 수 있다는 말인가?
“저들이 천리안이라도 가지고 있지 않고서야...”
“원수, 큰일입니다! 화약, 화약이 부족합니다!”
달려드는 마병을 조총으로 제압하기 위해, 그들은 거리낌없이 조총을 쏘았다.
그리고 거리낌없이 쏜 결과, 처음 포수들에게 나누어 준 두 냥쭝 되는 화약이 이제는 동이 나고 있었다.
그러나 두리손은 다시 고개를 흔들었다. 비록 군재는 부족하고, 오직 계교 넘치는 머리와 제법 출중한 무예뿐인 자신이지만, 그래도 명색이 원수라 부름을 받는 이. 그만은 현실을 직시해야 했다.
“모두 진정해라. 아직 두세 번은 더 쏠 수 있을 터. 그렇지 않으냐?”
“그것은 그렇습니다만...”
“바레투와 포르투갈 놈들이 화약을 제법 가져왔고, 우리 또한 그사이 세 도 병영의 화약을 모아두지 않았더냐. 설령 지금 동났다 한들, 언제든 더 가져올 수 있다. 지금 즉시 사람을 보내, 화약을 가져오도록 해라.
그리고 우리 쪽 병사들이 놀라지 않도록, 곧 화약이 더 당도한다 전하여라.”
“예, 원수!”
이쪽의 화약도 동이 날 수 있지만, 저쪽의 말도 언젠가는 지친다. 화약은 언제든 더 가져올 수 있지만, 지친 말은 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저 깃발. 저 깃발이 어떤 술수인지는 몰라도 저들에게 놀랍도록 정교한 지시를 내리고 있다. 아예 꺾지는 못할지라도, 계속 총통을 퍼부어 제압해라. 깃발이 스스로 서지는 못할 테니, 그것을 들고 또 세우는 자들을 살상하면 족하다.”
그리하여 또 한 차례, 지나치게 자주 쏜 탓에 슬슬 수명이 다해가는 콜루브리나(컬버린) 포가 아차산 둔덕을 때렸다.
허나 사람의 비명도, 피도 흩뿌리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포환이 날아와 나무를 찢어발기는 그 자리에 사람이 서 있지 않았다.
“흐흐, 어떻습니까, 당수.”
흙먼지가 가라앉을 무렵. 참호에서 도키치로가 웃었다.
“그래, 제법이로구나.”
“제가 없었더라면 어찌 되었겠습니까?”
어젯밤 도키치로는 꺽정이가 봉산에서 데려온 옛 의민당 사람들과 함께 몰래 이곳 아차산까지 와서, 이 참호를 팠다. 쓸데없이 그 수준이 높아, 지금 두 사람 있는 곳은 단순한 흙구덩이가 아니라 아예 나무로 벽과 지붕까지 만들고, 바깥을 볼 수 있는 틈까지 만들어놓았다.
“어찌 되기는. 저기 저 바위 같은 거석이 지천인데, 그런 데 뒤에 몸 숨기면 그만이지.”
암만 그래도 참호가 훨씬 더 안전하지 않은가. 그렇게 툴툴대려던 차.
“백리안이나 마저 보아라. 야, 깃발 다시 세워라!”
“예, 당수! 아직 넉넉합니다요!”
평양에서 황해도 거쳐 남하할 때, 중간에 서림이 마련해둔 깃발을 넘치도록 챙겨왔으니, 저쪽 총통이 아작나기 전에는 깃발쯤이야 부러지든 말든 상관없었다.
“엇, 당수? 저기 보십쇼! 저거, 그거 아닙니까?”
“그 따위로 말하면 내가 어찌 아느냐. 백리안 내놓아라.”
그리고는 씩 웃었다.
“오, ‘그거’ 맞구나. 야, 최만복이야! 청기(靑旗) 대신에 적기(赤旗) 올려라!”
“예, 당수!”
명희에게 두둑한 포상을 약속받고 잠시 흑의군으로 복귀한 최만복이가 옆에서 따라 웃었다. 한때 그 이준경과 남치근에 맞서 성황산성 지켰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잘은 몰라도, 뭔가 계책대로 되어간다는 느낌만은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 우리도 슬슬 내려가는 시늉을 해야지.”
“네! 자, 들어라! 의병(疑兵, 군사가 있는 것처럼 꾸미는 것)이다! 얘들아! 의병!”
두리손의 군막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아직도 꺾이지 않은 아차산 위의 깃발. 그 위에 처음 보는 붉은 기가 세워졌다.
필시 무언가의 신호일 터인데, 그렇다면 무엇을 위한 신호인가?
“우리 쪽에 화약이 떨어진 것을 어떻게든 알아챈 것 아니겠습니까?”
그사이 화약은 딱 한 번 더 쏠 분량밖에 남지 않았다. 치중(보급) 담당하는 막료의 보고에 따르면 그러하였다.
“원수께서 저들의 계책을 조금이라도 늦게 간파하셨다면, 큰일날 뻔했습니다.”
“아직 이르다. 저 목책을 지키는 포수 하나하나에게 화약이 돌아가기 전까지는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된다.”
그러나 어째, 저 적기가 그 뜻은 아니지 않을까 하는 의심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어쩌면 긴장으로 이미 마음이 지쳐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일지도.
또 한 차례, 마병들이 목책 앞으로 비스듬히 달려온다. 벌써 화약이 떨어진 쪽도 몇 군데 있는지, 아니면 마지막 한 발을 아끼고 있는 것인지, 이번에는 총성이 울리지 않는다.
그리고 이제 다시, 중량천과 정릉 쪽을 지키는 별군 앞으로 쇄도한다. 그러나 지금 저 기세로는, 결코 개울을 건너지 못할 것이다.
해는 이미 중천도 지나, 슬슬 서쪽으로 기울고 있다.
그나마 교대라도 하는 북병과 야인들과는 달리, 이쪽은 계속 목책을 지키고 있었고, 임꺽정 석 자의 무게, 그리고 언제든 그들을 짓밟을 것 같은 묵직한 말발굽 진동을 견뎌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쪽도 지쳤다. 멀리서 보았을 때 언뜻 말들이 지쳐간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착각만은 아닐 것이다. 지금까지 몇 번이나 그랬듯, 이번에도 개울을 건너지는 못할 것이다.
그때, 갑자기 불길한 느낌이 닥쳤다.
만약, 정말로 저들에게 천리안이 있다면? 그런 장난감 비슷한 것을 저들이 서쪽에서 들여왔다는 이야기가, 문득 떠올랐다. 그때는 그저 아이들 가지고 놀 물건이라 여겨 무시하였지만...
만약 저 아차산 위에서 능히 살곶이벌과 그 너머 성저십리, 도성까지 들여다볼 수 있다면, 그렇다면 지금 그 위에서 보일 것은 무엇인가?
두리손이 그 생각의 난류에 빠져 허우적대는 사이에도 싸움은 계속된다.
“앗! 보십시오!”
지금까지 뒤에서 저의 차례 기다리며 쉬고 있던 마병들이, 갑자기 아차산 자락에서 중량천까지 달려온 무리와 합세하였다.
“설마 중량천을 넘으려는 것인가?”
“그렇다면 다행이겠으나...”
그리고 마병들이 개울가에 닿았을 때. 반대편에서 지친 이들을 군교들이 애써 일으키며, 다시 창을 꼬나쥐고 목책 앞에 설 무렵.
“저게 대체 무슨...”
북병들의 태반은, 그 마상재(馬上才)로 이름 높은, 기사(騎射)와 기창(騎槍)에 모두 능통한 그런 자들이 아니라 그저 보병을 말 위에 태운 것이었다.
그 말은, 다시 말해 언제든 다시 말에서 내릴 수 있다는 뜻.
그리고 오늘날 조선의 병사들 중, 셋 중 하나쯤은 조총을 들고 있었다.
“준적인, 거발!”
“거발!”
한쪽에서 포연이 피어오르고, 한 발 늦은 총성이 군막까지 전해진다. 몇몇 재수 없던 자들은 둔치에 서 있다 그 자리에서 고꾸라져, 개울에 빠졌다.
그리고 개울이 붉게 물들 틈도 주지 않겠다는 양, 그 위로 말이 달린다. 아니, 달리는 것이 아니라 그저 개울을 겨우 걸어서 건널 뿐이다.
허나 두리손 눈에도 말이 달리는 것처럼 보인다면, 저쪽 둔치를 지키는 이들 눈에는 어떻겠는가.
“이미 고양에서 무악재로 물린 아군이 있습니다. 그들로 하여금 도성 서쪽을 치게 하고, 이쪽 동대문 쪽의 아군을 모두 이쪽으로 돌려 개울 건너온 저들을 치면 그만입니다. 원수께서 명만 내려주신다면...”
“아니, 성저십리로 물러나도 괜찮습니다. 그쪽은 마병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이미 잘 막아두었으니.”
막료들이 애써 별 것 아니라고 떠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량천을 건너온 마병들은, 수레와 문짝 따위로 가로막힌 성저십리 저자를 향해 힘껏 달려온다.
두리손이 무언가 명령을 내리려는 차, 엉뚱한 쪽에서 총성과 함성이 울렸다.
“큰일입니다! 도성의 적이 출성하였습니다!”
“무어라? 어느 쪽이냐?”
“동대문! 동대문입니다!”
번뜩이는 것은 에스파냐 용병들의 철갑. 검은 것은 그 이름처럼 검은 흑의군의 군복.
그들이 한때 터전으로 삼던 흑의영을 되찾겠다는 양, 거세게 몰아친다. 그간 도성에 갇혀 있던 그 설움을 풀겠다는 듯한 기세.
“아차산의 깃발이 움직입니다!”
어느 한쪽에 두리손과 막료들의 이목이 집중되는 것을 막겠다는 양, 다른 외침이 들려온다.
아차산에 세워져 있던 ‘임꺽정’ 깃발이, 어느새 수십, 아니, 수백으로 늘었다.
그리고 그 깃발은 하나같이 산 아래로 뛰쳐내려오고 있었다.
“임꺽정 도원수께서 내려오신다!”
그것을 신호삼아, 지금껏 돌아가며 휴식 취하던 나머지 북병들도 달려나온다.
“쳐라!”
그리고 그쪽에 모두의 이목이 쏠린 사이.
그제야, 적기의 뜻, 그리고 아차산 위에서 보였을 모습이 두리손의 머릿속을 스친다.
“화약.”
“예?”
“아차산 위에서는, 필시 화약이 옮겨지는 게 보였을 테다.”
급히 옮기라는 지시에 따라, 화약은 지금 마포와 용산에서 성저십리 빙 도는 길 따라 이쪽 살곶이벌로 오고 있다. 지금쯤이라면... 바로 코앞을 지나고 있을 것이다.
아무리 성저십리의 빽빽한 민가 골목을 다 막았다 한들, 불화살 한 발만 닿으면 끝일 터.
“막아야 한다. 막아야...”
그제야, 그들 가로막는 목책 따위 아무 것도 아니라는 양 달려오는 북병들 사이에 일렁이는 횃불이 보인다.
그 횃불은 곧 무수한 새끼를 치고, 곧 새끼 불꽃은 화살이라는 새 동무와 함께 날아간다.
양쪽에서 울리는 함성 사이에 갇혀 우왕좌왕하는, 큼직한 수레를 향해.
“화약! 화약이 필요합니다! 화약 어딨습니까?”
“조금만 기다려라! 곧 올 것이다! 그때까지 당황한 모습을 보이지 말도록!”
“남은 한 발도 지금 쏴야 합니다! 안 그러면 우리 다 죽습니다!”
“한 발 더 쏜다고 뭐가 달라질 것 같으냐!”
“그러면 이대로 앉아 죽으란 말입니까!”
개똥이네 대(隊, 분대)는 어쩌다 보니, 아직 한 발 정도는 쏠 수 있었다. 그러나 윗선에서는 결코 쏘지 말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그사이 임꺽정 깃발은 어느새 아차산 중턱에서 기슭까지 내려왔다. 아니, 그 옆구리에서 우르르 몰려나오는 자들과 합류한 듯, 이제는 임꺽정 깃발과 그냥 다른 깃발을 구분하기 어려워졌다.
구분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보나마나 저 맨 앞에 임꺽정이 있을 테니.
그제야 새삼스럽게, 두려움을 깨닫는다.
오만 관군과 싸워 이긴 임꺽정. 왜구 두목을 단번에 붙잡은 임꺽정. 야인 두령의 목을 한 판 싸움으로 딴 임꺽정.
그 무용은 이야기로 전해지고, 공보로 전해졌다. 그리고 이제는 자신의 목숨도, 그 이야기 하나를 이루는 핏빛 조약돌이 되리라.
조심스레 양 옆을 살피니, 다른 쪽도 사정은 비슷한 듯하였다. 상관과 다투는 자. 두려움 못 이기고 제멋대로 쏘았다가 그대로 얻어맞아 자빠지는 자.
그리고, 모두가 얼어붙는다. 백 보는 넘게 떨어져 있지만, 느껴지기로는 코앞까지 다가온 것만 같은 무리 사이에서 한 줄기 외침이 살곶이벌을 덮친다.
“이놈들! 나 임꺽정이 여기 있다! 목을 내밀어라!”
어디서 나오는 소리인가? 임꺽정이 어디 있는가? 굳이 고개 내밀어 살피려는 자는 이만 오천 인민군 중 한 사람도 없었다.
그리고 어디에 눈을 두어야 할지, 손발을 어떻게 놀려야 할지, 그 누구도 답을 말해줄 수 없는 지금.
모두의 이목이 임꺽정 깃발, 그리고 임꺽정의 외침에 몰려 있는 사이, 언제든 닥칠 기세로 창과 편곤 휘두르며 다가오는 마병들에게 쏠려 있는 사이.
그 마병들 뒤에 이미 내려, 시위 팽팽히 당기고 있던 수천 개의 손들은 ‘쏘아라’ 구령 한 번에 일제히 시위를 놓았다.
“수그려라!”
화살비가 쏟아진다.
“방패! 방패!”
“목책 뒤에 숨어라!”
“이만큼 떨어져서 쏘는 화살이면 어지간하면 죽지 않는다! 죽지 않는... 커헉!”
재수 없게 급소에 맞아 죽는 자, 재수 없게 다른 것보다 묵직한 육량전(六兩箭)에 맞아 죽는 자.
특히나 남들보다 트인 곳에서 이래라저래라 떠들던, 남들보다 직급 조금 높은 이들이 그 비에 맞는다.
가랑비라 할지언정, 잘못 맞으면 죽을 수 있는 그런 가랑비. 화살이 얼마나 매서운지는 중하지 않았고, 다들 어찌하면 맞지 않을지만 고민한다.
“고개 들어! 고개 들어! 창수(槍手) 앞으로!”
“화약이 올 때까지만 버티면 된다!”
“화약 다 왔다! 조금만 견뎌라!”
아직 살아 있는 군관들이 외치고, 살고 싶은 군졸들이 따라 외친다.
그리고 그때.
땅이 울리고, 뒤늦게 하늘이 울렸다. 모두들 서쪽을 돌아본다.
달려오는 임꺽정과 북병, 야인들로부터 그들을 지켜줄 화약. 그것이 지금껏 도성에서 선보인 그 어떤 불놀이보다 더 성대한 불꽃으로 화한다.
그 불꽃에서 겨우 시선을 앞으로 돌렸을 때는, 이미 생면부지의 얼굴이 코앞까지 와 있었다.
“온다! 놈들이 온다!”
“그래, 왔다, 이놈들아!”
“쳐라!”
‘웬 도리깨가-’ 라는 생각이 끝이었다. 그렇게 개똥이는 북병 아무개의 편곤에 맞아 명을 달리했다.
무너진다.
기껏 만든 목책을 지키던 사람의 선이 뚫리고 끊어진다. 선은 점이 되고, 점은 무(無)가 된다.
그러나 끊어지고 무너지는 것은, 진형뿐이 아니다.
“어,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원수!”
“원수! 우리 군사는 아직 배수진을 치고 있습니다! 화약이 떨어졌다 하나 창과 검 든 병사도 있고, 또 도성을 포위한 군사들 중에는 아직 기력이 남은 자들도 많습니다! 지금 저들이 출성하여 동쪽을 치고 있으니, 우리 군사로 서쪽을 치면 도성을 능히 점거할 수 있습니다. 부디 명령을!”
배수진이라. 저것은 배수진이 아니라, 그저 한강수 향하여 차근차근 밀려나는 것에 불과하다. 싸우려는 자는 칼과 방패 휘두를 그 작은 빈틈마저 얻지 못하고, 뭔가 명령 내려보려는 자는 달아나려는 자에게 밀쳐져 자빠진다.
정작 죽은 자는, 재수 없게 맨 앞에 서 있던 창수와 포수들뿐이지만, 싸움에서 죽는 자 태반은 진형이 무너진 뒤 생긴다는 것 정도는 두리손도 안다.
그리고 지금, 일만오천 군세에 포위당하여 강으로 밀려나는 이만오천 군세의 모양새가 딱 그러하였다.
물론, 그 와중에도 정신 차린 군관들은 없지 않다. 마병들이 달려드는 것을 막기 위해 진형을 너무나 촘촘히 하였던 것이 패착임을 깨닫고, 서둘러 저들의 영 닫는 이들만이라도 청계천 너머 이쪽, 군막 있는 쪽으로 물러나도록 하는 자들이 보였다.
그들의 명이 나머지 무리에게 전해진다면, 그때는 이만오천 중 절반 이상은 수습할 수 있을 것이다.
성급히 한강으로 뛰어드는 이들 외에, 그저 창칼과 조총 내려놓고 무릎 꿇는 이들도 꽤 있다. 아니, 그 수가 빠르게 불어나고 있었다.
저들을 수습하느라 북병 태반의 발목이 잡혀 있을 때, 겨우 청계천 너머에서 수습된 이들, 개중 그나마 상태 좋은 오륙천만 데리고 다시 공세를 가한다면, 북병을 적잖이 살상하고 다시 몰아낼 수도 있을 것이다.
“... 그러니 명을 내려 주십시오! 아직 우리는 지지 않았습니다!”
“투항하라.”
“예? 원수?”
“저기서 더 피를 흩뿌려 본들 무슨 소용이겠느냐.”
끝났다. 지금 여기서 북병을 격퇴한다 한들, 지금쯤이면 동대문을 넘어 이곳으로 달려오고 있을 경군은 어찌 막을 것인가?
그리고 머릿수의 힘을 빌어 그들마저 막아낸다 한들, 과연 이 싸움에서 이겼다고 할 수 있는가.
단념과 동시에 다시 머리가 돌아간다. 허나 실은 돌아갈 것도 없었다. 이미 거병할 때부터, 어쩌면 서방에서 조선에 돌아온 임꺽정을 그날 흑의영 연회에서 만났을 때부터 이런 날 올 수도 있음을 알았으므로.
“내가 투항하여, 만인(萬人)이 미워하고 적대하는 그런 자가 되어야, 비로소 나의 사람들이 살 터이다.”
허둥대던 군관들이 그 말에 다시금 저들의 원수 눈치를 살핀다. 그 물음 무엇인지, 너무나 훤히 보였다.
“거기에 네놈들도 들 수 있도록 힘써보마. 다시는 군문에 들 수 없겠지만, 어떻게든 목숨은 건져볼 수 있도록.”
“가, 감사합니다, 원수.”
“바레투와 이성량, 두 사람은 지금 즉시 달아날 수 있도록 해주어라. 네놈들 중 나라 벗어나길 원하는 자들은 그를 따라가도 좋다.”
그렇게 싸움은 끝났다.
투항하라는 외침이 사방에 울리고,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와 아직도 간간히 울리는 포성은 그대로 그쳤다.
달아날 사람은 달아나고, 붙잡힐 사람은 붙잡히고 있었으니, 이제 죽을 사람은 죽을 자리를 찾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지난 며칠은, 그래도 저희 비루한 삶에서 가장 즐겁고도 짜릿한 나날이었습니다, 원수.”
백기를 준비하던 군관 하나가, 막사 나온 두리손에게 군례를 올렸다.
“그 백기, 내게 다오.”
“예?”
“패장이 마지막으로 누릴 수 있는 영예는, 승리한 장수에게 축하를 건네는 것 아니겠느냐.”
군관이 그 말뜻을 물으려 입 열었을 때는, 이미 비탈길 내려가는 두리손의 뒷모습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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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에 이르러 조총의 중요성을 절감한 조선은, 매우 빠른 속도로 조총을 도입하게 됩니다. 1593년 여름 경 자체적인 조총 제작이 시작되었고, 불과 3년 뒤에는 관군 전체 병력 중 30% 가량이 조총수(포수)로 분류되게 됩니다. 이 수치는 전후에 더욱 올라가 50%를 상회하게 되고, 이는 다시 중기병과 승마보병의 조합으로 유연한 전술을 구사하던 후금과의 전투에서 문제를 드러냅니다.
이에 대한 대응책으로 조선 내에서는 다양한 시도가 이루어졌는데, 광해군 연간을 거쳐 최종적으로 채택된 교리는 바로 조총수가 5열 또는 10열을 이루어 교대사격을 하는 전술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기술 수준으로는 조총수만으로는 충분히 돌격하는 기병이나 보병을 완전히 저지할 수 없었고, 그나마 성공한 경우는 숙련된 장교 및 부사관에 의하여 효과적인 사격통제가 이루어질 때에 국한되었습니다.
조선 역시 이 문제를 바로 인식했고, 조총 사격 지시는 다른 지시와 구별되는 나팔로 내리는 등 여러 방법을 모색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작중 등장한, 승마보병의 활 일제사격으로 혼란을 일으키거나 산개 진형으로 공격하여 화력 집중을 방해하는 식의 후금 전술 앞에서 큰 효과를 보지 못했고, 병자호란 중의 최대 참패 – 최근에는 어느 정도 재평가도 되고 있지만 – 로 알려진 쌍령 전투에서 이러한 문제점은 극단적으로 나타납니다 (노영구, 2013. “16~17세기 조총의 도입과 조선의 군사적 변화”. <한국문화> 58).
여기에는, 동아시아에 널리 퍼진 조총이 병사들의 우발적인 사격 가능성이 높은 순발식(방아쇠만 당기면 바로 격발이 되는 방식) 조총이었다는 점도 한몫했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제식훈련 자체의 문제가 있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기효신서』에 명시된 조총 사격 절차는 11단계, 조선에서 통용된 『신기비결』의 절차는 14단계였던 반면, 역시 화승총 위주의 군대로 당대 최강인 테르시오에 맞서야 했던 네덜란드의 마우리츠 판 나사우가 고안한 사격 절차는 42개 동작에 달했습니다.
이는 단위 시간당 투사할 수 있는 화력을 극대화하기 위한 조치였고, 미셸 푸코가 지적한 것처럼 군인과 부대 자체를 기계처럼 완전히 통제하고자 하는, 그 자체로 근대적인 현상이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이는 근대로 이어지며 나타난 현상이자 근대를 만들어낸 현상 중 하나이기도 했습니다 (미셸 푸코, 2016. 『감시와 처벌: 감옥의 탄생』, 오생근 역, 파주: 나남. pp. 256-266). 조총의 도입 이후, 19세기에 이르기까지 비슷한 수준의 화약무기를 다루는 적과 전면전을 경험하지 못하였던 동아시아에서 그러한 변화가 나타나지 않은 것은, 서세동점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17세기~18세기 유럽의 전쟁으로 목숨을 잃은 유럽인들이 그것을 바람직하게 여겼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