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거경궁리 (4)
고(故) 상신(相臣) 신숙주가 졸할 적에 임금에게 마지막으로 상언(上言)하기를,
‘청컨대 일본과 실화(失和, 불화)하지 마시옵소서.’
하였다던가.
민주당에서 마치 아무 일도 아니라는 양, 이번에 일본 구주(규슈)에서 벌어진 소란에 대해 알려왔을 때, 이준경은 먼저 그 말이 실화(實話)인지를 의심하고, 뒤이어 그러한 일이 실화(失和)라고 할 수 있는지 한참을 고민하였다.
한편으로는 멀쩡한 – 일본이 과연 지금 멀쩡한 나라인지는 차치하고라도 – 남의 나라에 격물을 빙자하여 한바탕 불화를 일으켰다고도 할 수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천하 백성을 이롭게 하고 또 이 나라 조선의 신법(新法)을 지켜낼 단초를 얻었으니 오히려 화평을 이루었노라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암만 생각해도 군자로서도, 또 배우는 사람으로서도 용납하기 어려운 면이 있었다.
가운데 낀 심의겸만 고생시키는 것도 무엇하여, 무더위 무릅쓰고 직접 사업당 찾아가 임 당수를 만났는데, 밝히는 내막은 이준경 그가 짐작했던 것보다도 더욱 경악스러웠다.
허나 임거정 하는 일에 경악함도 하루이틀 일이 아니라, 그저 한숨 한 토막으로 그쳤다. 물론 이것만 해도, 어지간한 일로는 한숨도 잘 안 나오는 요즘 이준경으로서는 꽤 크게 흔들린 셈이었지만.
“그래서, 처음부터 미리 판을 짜둔 뒤 격물을 하겠노라 떠들었다는 말인가?”
“그렇소만.”
타카노부 그치가 걸려들지는 몰랐지만, 적어도 누군가 꿈틀하는 시늉 할 것임은 예상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미 조선과 교역하며 조선국 아전들만큼이나 민주당 뜻 잘 따르게 된 상인들을 한데 묶고, 히데요시 녀석에게 그들 움직여 싸움이 시작하기도 전에 미리 제압할 것을 귀띔해두었다.
그러고도 움직이지 않는다면, 그때는 다른 수를 써서 다이묘들로 하여금 비장해둔 재산을 시중에 풀도록 만들 심산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그 전에 일이 마무리되었다.
그리하여 다시 몇 달이 지난 지금. 아직 벼가 영글기까지는 두어 달쯤 남았지만 벌써부터 대풍(大豊)의 기미가 보인다던가. 심어서 거두는 만큼 저들의 몫이 늘어나니, 모 심고 김 매는 정성이 평년의 몇 곱절은 된다 하였다.
일견 어리석은 농군들조차 그러할진대, 이문에 밝은 상인들에 있어서는 더 말할 것이 없었다.
이제는 공보를 통해, 격물의 취지에 맞추어 저들의 주장한 바가 참으로 밝혀졌노라 드러내는 일만 남았다.
“거경궁리와 격물치지 여덟 글자를 두고 주부자(朱夫子, 주희)를 비롯해 얼마나 많은 선정(先正)들께서 고심하셨는지 아는가? 거기에 자네 벗 탁오 그이가 좋아하는 왕양명 그이도 꽤 진력(盡力)하여 궁리하였지. 그분들께서 자네 이야기 들으시면, 참 편하게도 산다며 혀를 차실 것이야.”
“내가 정말 진지하게 뭘 궁구할 성정이었으면 도적질을 했겠소?”
“화담 선생 제자가 그런 말을 해서야 되겠는가.”
꺽정이가 무어라 반박하려 했는데, 생각해보니 아닌 게 아니라 그의 사형들과 사저가 모두 학문에 발을 걸치든 탁족을 하든 하고 있었으므로 말문이 막혔다.
곁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이지함마저 고개를 끄덕였으니, 도저히 할 말이 없어 헛기침을 할 뿐.
이지함과 허엽•박순은 그들 손으로 온갖 잡학의 교학서(敎學書, 교과서)를 썼을 뿐더러 그 스스로도 번듯한 학자요, 하다못해 도적 다음으로 배움과 거리가 멀 것 같은 사저 황진이도 요새는 유상(儒商) 많은 송도에서 그렇게 며느릿감 많다고 소문난 학교의 훈장 노릇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흠흠. 어쨌든 우리가 옳았다고 밝혀지지 않았소. 듣기로 퇴계 어르신께서도 사람을 모아서 쓰던 그 책을 거의 마무리하셨다는데.”
아무리 그렇다 한들, 이번 구주 격물의 내막이 밝혀진다면 이황이 그 제자와 벗들을 부려 함께 쓰고 있는 『안민제설석의(安民諸說釋疑)』에도 의문 품는 이들이 나올 법하였다.
말이 ‘의문에 대해 해석해 주는’ 책이지, 실제로는 부국안민(富國安民)에 대한 통설 여럿을 정리한 뒤 이황이 세운 주장으로 하나씩 반박하는 내용이었다.
사민(四民)의 동등함이나 억말(抑末, 상공업 억압)의 잘못됨 등에 대한 논변이야 이미 조선 땅에도 차고 넘치지만, 『안민제설석의』의 핵심은 바로 조령(朝令)으로 상공(商工) 두 말업을 통제하지 않을수록 오히려 이익이 늘어나고 사대부부터 일개 농군까지 모두 그 혜택을 누리게 되는지 그 소이(所以)를 성현의 말씀이 아닌 이치와 논증만으로 밝혔다는 데 있었다.
그러면서 친절하게 서문에는 ‘황명 유왕 전하께 올리는 글’까지 아주 겸손한 필치로 덧붙였으니, 탕평당 사람들 중 꼭 조식만 과격하다 할 일은 아니었다.
“만약 우리 당이 제안한 것이 모두 이루어진다면, 그 누구도 퇴계 선생 글에 논박할 생각은 못 품을 게요. 이문 챙기는 데 다들 눈이 멀 테니.”
“그래, 일본국 사정도 사정이지만, 이 사람 찾아온 것은 바로 그 제안 때문일세.”
“아, 당론이 정해진 것이로군요.”
꺽정이가 곤란해 할 때 꼴 좋다며 입 닫고 있던 이지함이 나섰다.
“그렇소. 요새 세워지는 신법들 중에서도 더욱 전례가 드문 것이었지만, 우리 당이 당이니만큼 가(可)가 나올 수밖에.”
이준경 답변에는 다소간 씁쓸함이 묻어 있었다.
두리손의 난이 끝난 이래로 조정과 공회는 모두 탕평당과 민주당의 것이 되었다. 물론 어정헌법에 이르기를 꼭 사 년에 한 번씩은 권점을 하여 공회를 물갈이하라 하였으니 언제까지나 마냥 두 당이 사이좋게 국론을 이끌 것이라는 보장은 없었지만.
더구나 조정을 절반쯤 채우고 있던 심통원의 무리도 모두 쓸려나가고, 그 자리에는 노론 집안 출신으로 상경한 몇몇 사람들 외에는 모두 두 당 중 적어도 한 쪽에는 찬동하는 이들이 들어왔다.
그것을 노리기라도 한 것처럼, 탕평당 쪽에는 중말(重末, 상공업 진흥)하는 신법을 세워달라는 요청이 계속 들어왔다.
세자가 그 베네치아인가 하는 나라의 은화를 꽤 신기하게 보던데, 우리도 비슷하게 뭐 상평통보(常平通寶) 같은 이름으로 은화와 동화를 만들어 쓰면 어떻겠느냐 하는 주상의 하유 – 이로 인해 지금 주전도감(鑄錢都監)이 세워져 화폐의 제도를 궁구하고 있었다 – 부터 시작하여, 지금 이준경이 논하고자 찾아온 민주당 쪽의 입법(立法) 제안까지.
“성상께옵서 사 년에 한 번 권점의 제도를 세우도록 하였으니, 이제 세간에서 어떤 불평이 나오든 거리낄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영상 대감께서는 스스로 거리끼지 않으셔도 될 것입니다.”
그 마음 읽은 이지함이 위로인지 아닌지 묘한 말을 건네주었다.
‘인민의 정부’라는 말 하나가 끝내 죄를 받지 않고 인구에 끝내 회자되면서, 오늘날의 ‘민탕일색(民蕩一色)’ 공회를 권점으로 무너뜨리고 백성 다수의 지지 받아 재조론의 뜻을 다시 세우자는 말이 조금씩 삼남에서 돌고 있었다.
그리고 탕평당은, 가랑비에 옷 젖듯 그러한 비난을 받을 만한 당, 시류를 잘 읽어 부귀하게 된 경화사족들의 당이 되어가고 있었다. 민주당이 일으키는 온갖 일의 뒷수습, 부족한 제도의 확충, 그리고 옛 법과 새 법 사이 갈라진 곳 메우는 데 온 힘을 다 하다 보니 부지불식간에 그렇게 되고야 말았다.
“퇴계도 화이부동 주이불비(和而不同 周而不比)를 운운하며, 누군가 비판하지 않는 당론이라면 그것은 당론이라 할 수 없다 하더군. 이 사람도 그 뜻을 십분 이해하나, 어쩔 수 없는 옛 사람이라 미련을 끝내 버릴 수 없다네.”
위로는 주상의 신망을 받고, 아래로부터는 백성의 칭송을 받으며, 오직 화해(和諧) 두 글자 속에서 국사를 돌보는 그런 모습을 그 어떤 신료가 바라지 않으랴.
허나 그런 감상에는 별 관심 없던 꺽정이가 끼어들어, 옆으로 새려던 이야기를 도로 제 앞으로 끌고 왔다.
“그러면 우리는 올 가을에 저 논상원에서 일 벌이는 것으로 알겠소.”
민주당의 제안이란 이러하였다.
민주당 아래에 사업당이 있고, 그 사업당의 아우뻘 되는 자유민주당이 있는데, 이제 그 자유민주당도 제법 덩치가 커졌다.
하여, 민주당과 사업당의 애매한 관계를 정리하기도 할 겸, 나라의 법으로 소위 ‘계사율(契社律, 회사법)’을 세우자고 제안하였다.
그리하여 사업당을 ‘계사’로 등록하고, 이어서 자유민주당도 훗날 일본 쪽에 비슷한 법이 생기면 그쪽으로 옮긴다는 전제를 내세워 우선 한양에서 계사로 적을 올린 뒤, 이어서 사업당처럼 분표(주식)를 발행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자유민주당 분표가 시중에 풀리는 날, 규슈 땅에서의 격물 결과 – 미리 답은 정해졌으나, 아직 세간에서는 알지 못하는 – 도 함께 알릴 심산이었다. 족히 온 천하의 눈길을 모을 수 있는 방법이 아닐 수 없었다.
아무리 장거정이 동창을 풀어 훼방을 놓는다 해도, 언로(言路)를 틀어막는 대신 직접 중원의 사람들을 설득하고 저의 편 만들기로 마음을 정하였은즉 한계가 있을 터였다. 더구나 돈 버는 일에 있어서라면, 설령 바닷가 전체에 장성을 쌓는다 한들 조선으로 오려는 중원 사람들을 막을 수 없을 것이었다.
“그래, 그렇게 알고 있게나. 물론 그때까지 법도를 모두 정비해 공회를 거치고 성상의 윤허까지 받으려면, 또 수많은 이들이 고생을 하게 되겠지만...”
“진량사 쪽에서 전해오기를, 그 대사탕국인지 고사도(대만)인지 하는 곳에서 조금 안쪽으로만 올라가면 꽤 높은 산이 나온답디다. 거기에 분화두(커피)를 심었다니 한 삼사 년만 버티면 될 것이오. 내가 마셔보니까 좀 쓰긴 해도, 잠은 확실히 잘 쫓더이다. 그 효험이 차에 비할 바가 아니오.”
뚱딴지 같은 소리로 대꾸하는 꺽정이였다.
그렇게 다시 시일은 흘렀다.
조선이 곧 은화와 동전을 주조할 것이라는 소식이 공보에 실렸고, 자유민주당이 새 사업으로 일본 땅에 지천이라는 구리 채굴에 손을 벌릴 예정임이 밝혀졌으며, 그 자유민주당이 우선 조선에서 분주(주주)를 모을 것이라는 기사도 덩달아 실렸다.
반대로 기사에 실리지 않는 변화도 여럿 있었는데, 예컨대 조선 관군이 병란의 뒷수습을 마치고 언제고 닥쳐올 더 큰 전란에 조용히, 그러나 꾸준히 대비하는 일의 첫 발을 내딛었다는 것이 그러한 숨은 변화 중 하나였다.
비슷한 이치로, 서도지휘첨사(署都指揮僉事)를 역임하던 명나라 장수 척계광(戚繼光)이, 자신이 들은 조선과 서양 군대의 진법을 정리하여 소위 ‘기효병법(紀效兵法)’이라는 진법을 창안한바 내각수보 장거정의 눈에 들었다는 소식도 바깥에는 전해지지 않았다.
마침내 규슈 땅에서 한 해의 수확이 끝나고, 거둘 세곡은 모두 거두어 일 년의 재정이 얼추 정리될 무렵, 마츠라 타카노부를 대신하여 자유민주당 세 영수 중 하나로 올라선 린죠 히데요시는 규슈의 여러 영지에서 올라온 – ‘점잖게 요청하여 받아낸’ – 자료를 들고 한양에 돌아왔다.
이미 여러 차례 공보를 통해, 격물의 뜻대로 규슈 땅의 세입이 그 세율을 사분지일 가깝게 낮췄음에도 오히려 늘어날 기미 역력하다고 열심히, 공보 내는 이들 사이의 속된 말을 빌리면 ‘떡밥’을 뿌린 바 있었다.
그러나 기미가 보인다는 것과, 실제로 결과 드러나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었으므로, 구경을 위해 몰려드는 이가 적지 않았다.
물론 격물의 결론이 어떻게 나느냐보다 자유민주당 분표의 값이 얼마나 치솟느냐에 더 깊은 관심 품고 찾아온 사람들이 더 많았지만.
“거두어들인 세곡은 평시의 십분지칠이요, 상인들에게서 거둔 세금은 평시의 세 곱절이외다. 이로써 본 당이 주도하고 규슈의 여러 무가에서 협조해준 금번 격물은, 본디 내세운 주장이 옳았음을 명명백백히 밝히는 것으로 끝이 났소이다.”
자신이 의외로 무대 위에 어울린다는 것을 깨달은 린죠 히데요시가 힘찬 목소리로 외쳤다.
아무리 올해 농사가 대풍이라지만, 사공육민을 일공구민으로 바꾸었으니, 제대로 세었다면 세곡의 양이 평시의 사분지일이 되는 것이 맞았다.
그러나 각지 농민들이 오직 배불리 쌀밥을 먹고픈 마음으로 분골쇄신하여 농사를 짓기도 하였고, 또 그간 숨겨놓았던 곡식도 올해 거둔 것이라며 슬쩍 내보였기 때문에 – 올해 세곡을 다 내어버리면 나중에 들켜도 할 말이 있을 터였다 – 십분지칠에 달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남아돌게 된 미곡은 농가의 곳간이나 백성의 뱃속에 들어간 양을 제하면 모두 상인들에게 넘어갔고, 또 갑자기 살림 풍족해진 촌뜨기들의 곳간을 노리고 온갖 상인들이 싸구려 방물부터 나름 진기한 과자까지 들고 규슈 시골을 쏘다녔다.
그러하였으므로, 상인들에게 거둔 세금이 평시보다 더 많은 것은 예정된 결과였다. 물론 몇몇 쿠니에서, 성채 안에 숨겨져 있던 재보가 ‘제 발로 걸어나와’ 시중에 풀리지 않았더라면, 평시의 세 배는커녕 갑절에도 미치기 어려웠겠지만.
“이처럼 ‘자유방임(自由放任)’을 하였음에도 백성의 살림살이와 관(官)의 재정이 동시에 풍족해진 소이연(所以然)을 알고자 하는 이는 지금 막 찍혀 나오고 있는 퇴계 선생의 서책을 읽을 것이요, 세수(稅收)의 세세한 절목을 알고자 하는 이는 다음 공보에 실릴 그림을 보면 될 것이외다.
또한 이어서, 자유민주당이 조선국 계사율에 의거하여 임시로 이 땅에서 분표를 발행하게 된 바, 그 거래를 시작할 것이니 뜻 있는 이들은 이곳 논상원에 내일 다시 찾아오기 바라오.”
강남에서 조선 구경도 할 겸 직접 찾아온 서생도, 큰손의 의뢰를 받아 분표 사들이고자 찾아온 표국(鏢局, 전근대 중국의 우편•운수업체) 사람들도 모두 환호하였다. 어째 히데요시가 처음 격물의 결과 발표할 때보다 뒤에 이어지는 문장에 더 열광하는 듯하였지만.
하기야, 일본의 구리는 조선뿐 아니라 명에서도 동전 만드는 데 쓰이고, 또 이와미 은광이 ‘은의 산(긴잔, 銀山)’이라 불릴 만큼 소출 많은 것은 이제는 온 천하가 다 아는 바였으므로, 그간 사업당이 차지하고 있던 자유민주당의 지분을 쪼개어 여기저기 판다는 말에 솔깃하지 않는다면 상업의 이치를 안다고 어디 가서 말할 자격도 없을 터였다.
“녀석, 제법이구나.”
그렇게 자리 파하고, 간만에 사업당에 인사나 하러 가려는데 그 발치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목소리가 들리지 않더라도 족히 그 주인을 짐작할 수 있을 만큼 큼직하였다.
“헨키(偏諱)를 받았으니 마땅히 부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요, 헤헤.”
“헨키가 무엇이냐?”
“일본국 무사들이 주군의 성명(姓名) 중에서 한 글자를 받아서 쓰는 게 헨키랍니다.”
물론 진짜 헨키는 성 대신 이름을 따오는 것이겠지만, 무사 집안 출신이 아닌 히데요시는 이를 알지 못했다.
“서림 그 녀석이야 대대로 아전이니 나름 자랑스레 여기는 바가 있겠지만, 내 임가 성씨야 내가 그냥 듣기 좋아서 지어 부른 것인데 무슨 귀한 게 있겠느냐?”
“아무튼 열심히 하겠다는 뜻입죠.”
“이놈이 이제 영수 소리 듣는다고 말대꾸도 꼬박꼬박 하는구나.”
그렇게 실없는 소리 주고받으며, 그대로 사업당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기다리고 있을 법한 이들은 이미 다 모여 있었다.
“모두 계획한 대로 되었습니다. 모리 씨부터 시작해 규슈의 크고 작은 세력들은 모두 우리와 함께하기로 단언했지요.”
서림을 비롯해 자신이 인사 올려야 할 이들에게 모두 인사말 전한 히데요시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아직은 단언만 한 것이겠지?”
“그야 당연하지요. 그보다 더 진지하게 복속하겠다고 허리 굽히고 들어오면 그것이야말로 의심스러운 짓 아니겠습니까.”
마츠라와 시마즈 두 집안이 어떻게 되었는지, 비록 겉으로 그 사정이 다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알 사람들은 금방 알게 되었다. 히라도에 시노비 하나쯤은 다들 심어놓았던 것이다.
그리고 규슈의 다이묘들은, 곧 이 ‘하야시 세법’이 앞으로도 규슈에서 계속 이어질 것이요, 그것을 함부로 어기려 했다가는 당장 상인과 농민들, 지금까지는 말 위의 무사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했던 이들의 냉담한 시선에 직면하게 될 것임을 직감하였다.
그러므로 히데요시가 규슈 여러 쿠니에서 조세에 대한 기록을 받아올 때, 앞으로 자유민주당과 ‘긴밀히 공조하기를 바란다’ 운운하는, 딴에는 비밀스러운 전갈을 함께 받은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지금 그렇다는 것이었다. 신불(神佛) 앞에서 하는 맹세든, 주군 앞에서 하는 맹세든 이익 앞에서 여반장으로 어기는 난세에, 저 말은 아직까지는 그저 공허한 약속에 불과하였다. 그 공허함을 채우는 것은 남을 거느리고자 하는 자의 몫이었다.
“우선은 취체(取締, 이사理事에 해당하는 일본식 직함)라고, 없는 직함을 만든 다음 아주 높은 자리라고 속여서 다이묘들의 가신이나 자제들에게 흩뿌리긴 했습니다. 그리고 각 쿠니의 상인과 마을의 부유한 농민들 중에 우리 자유민주당과 연 있는 이들이 많으니, 장차 쿠니의 일에 있어서 그들과도 의논하면 좋겠다고 넌지시 일러주었지요.
그리고 모리 쪽에도 미리 연통을 넣어두었습니다.”
제 발로 성에서 나와 백성들 사이에 섞이려 하지 않을 무사들. 그들을 한데 묶기 위한 방책이 이것이었다.
곧 서국제일 모리 씨의 이름으로, 상락(上洛)의 계획이 암암리에 규슈 곳곳에 나돌 것이다.
상인들이 무가 위에 서고자 한다면, 무가가 먼저 상인 중의 으뜸이 되어버리면 될 일. 쇼군을 압박하여 나라의 대권을 대신 휘두른다면, 모리나 오토모, 시마즈의 깃발이 전장뿐 아니라 시장에서도 휘날리게 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 이권을 약속하며, 모리는 규슈와 그 너머 다이묘들을 조심스레 꼬드기고 있었다. 노회한 모리 모토나리라면, 스스로 믿지 않는 것을 그럴듯하게 꾸며 남을 속이는 것 정도는 쉽게 이루어낼 수 있으리라.
“그리고 그 연합의 맹주는 모리 씨가 아닌 자유민주당이 되겠지요. 그렇게 되도록 한 가지도 빠짐없이 준비토록 하겠습니다.”
음험한 표정마저도 언뜻 보면 익살스러운 히데요시였다.
“아, 그리고 한 가지 이상한 일이 있었습니다.”
“무엇이냐?”
“제가 히라도를 떠나기 전에, 딱 보아도 어디 이름 좀 있는 다이묘의 가신쯤 되어보이는 무사 하나가 저를 찾아왔습니다. 말투가 암만 들어도 규슈가 아니라 오와리나 그 근방 말투였지요.
사카이 타다츠구(酒井忠次)라는 무사였는데, 저의 주군 미카와노카미(三河守)가 자유민주당을 본받아 회사를 하나 차려보겠다 하여 히라도에 조사차 찾아왔다고 밝혔습니다.”
밝히기를, 그 이름은 동척사(東拓社)로 구상하고 있으며, 장차 천하의 재물을 끌어모아 밑천으로 삼으려 한다 하였다.
“영업의 기밀을 밝히는 대가로 저쪽 속내를 살피는 쪽이 수지타산이 맞겠다 싶어, 짬을 조금 내어 차 한 잔 하였지요.”
조선과 강남의 차가 다기와 함께 일본에 널리 퍼지다 보니, 옛날에는 다도라면 엄두도 못 내던 이들도 이제는 어디서 차 한 잔 하자는 말을 딱히 이상하게 여기지 않게 되었다. (센 리큐처럼 다도의 명인이라 불리던 이들에게는 썩 좋지 못한 일이었다.)
“동척사라. 이름만 보아서는 딱히 무엇을 노리는지가 명확치 않은데.”
“일본 동쪽, 그러니까 관동(칸토, 關東)에는 드넓은 평야가 있습니다. 미카와 땅에서 다케다 가와 호죠 가의 영역을 넘어서야 나오는 땅인데, 아직 그 일대를 개간할 여력 있는 세력이 없어 그냥 늪지와 숲만 가득하다더군요.
사업 밑천을 끌어와 다케다와 호죠 씨를 밀어내고, 그 일대를 일궈내려 한답니다.”
“미카와라면 그, 자네 고향 오와리의 이웃 동네 아닌가?”
“그렇습니다. 아, 미카와노카미라고만 하면 모르시겠구나.”
그제야 저의 실수를 깨달은 히데요시가 미카와노카미 관직명 뒤의 진짜 사람 이름을 밝혔다.
“미카와 국의 영주 노릇하는 이인데, 이름은 얼마 전에 바꾸어 도쿠가와 이에야스라 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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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중 이황과 탕평당의 ‘브레인’들이 시도하고 있는 작업은 원 역사에서는 약 백오십 년 뒤 유수원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그의 중상주의적 경제사상을 집대성한 『우서』에는, 양란 이후 세워진 조선 후기 경제체제가 경신대기근으로 한 차례 흔들린 뒤의 시대적 고민이 담겨 있지요. 『우서』에서 언급되는, 당대 지식인들이 기근과 빈곤의 원인으로 짚은 원인은 바로 작중에서도 언급된 인구론적 사고입니다. (물론 작중 장거정과는 달리, 실증 없는 사변적 차원에 머물기는 했지만요.) 그리고 여기에 대하여 유수원이 제시하는 해법 역시 오늘날 관점에서는 매우 ‘근대적’인데, 바로 양반들이 상공업에 종사하도록 하고 사농공상의 차별을 철폐하여 시장에 풍부한 노동력을 공급하고, 나아가 국가적으로 사회간접자본에 투자하여 지주 계층이 지대를 추구하는 대신 자본가로 변모하도록 유도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사상이 체제 바깥의 이단으로 그친 것은, 당시의 정치적 상황 – 유수원은 소론 강경파에 속했고, 1755년 나주 괘서사건에 연루되어 사망합니다 – 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양란 이후 조선이 추구했던 농업 위주의 경제 모델이 그러한 중상주의 담론과는 호환되지 않았던 데서 원인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그에 비하면 조금 더 일찍 현실 데이터에 기반한 실증적 탐구가 가능하고, 또 이미 해체 국면에 있던 조선 전기의 사회체제의 틈을 타고 상업경제가 뿌리를 내린 작중 조선에서는 조금 더 자유로우면서도 생산적인 경제학적 사고가 가능한 셈입니다.
조선에서 화폐경제가 쉽게 정착하지 못한 데는 상업 발전의 부진도 한몫했지만, 만성적인 귀금속 부족도 한 가지 원인으로 작용했습니다. 은과 구리 모두 일본에는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었지만, 조선은 그렇지 않았지요. 그러나 일본에 에도 막부가 수립되고 안정적인 무역이 재개되면서 이러한 문제는 금방 해소됩니다. 물론 여기에는 조선의 금속화폐가 중국이나 일본과는 달리 어디까지나 제한적인 수준으로만 통용되어 쌀과 포목을 완전히 대체하지 않았기에 구리의 수요가 그리 크지 않았다는 점도 한 가지 요인으로 작용했습니다.
이전에 지나가듯 몇 번 언급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본격적으로 등장했습니다. 원 역사에서 이마가와 가의 몰락 직후 편을 갈아타 오다 노부나가와 동맹을 맺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오다 노부나가가 오와리 서쪽으로 세력을 넓히는 사이 미카와 내부를 통일하며 착실히 세력을 키워나갔습니다. 이후 오다 노부나가와 다케다 신겐 등과 연합하여 옛 주군 가문이었던 이마가와 씨를 무너뜨립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각축전 속에서 여러 시련을 겪으면서도 끝내 그 세력을 조금씩 키워나가며 전국시대의 한 축으로 부상하게 되지요. 그가 느닷없이 회사를 세우겠다고 나선 사연에 대해서는 이어지는 화에서 더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