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빛은 동방에서 (3)
떠들썩한 무리는 죄다 빠져나가 훨씬 한적해진 이준경의 집에 탕평당 중진들이 다시 모였다. 슬슬 골병 들 나이도 된 지라 요양 핑계로 공무에서 물러난 이준경의 형 이윤경을 필두로, 당의 실세라 할 수 있는 이황과 조식 같은 원로들 – 이제는 그들도 ‘원로’라는 말이 어울리는 연배였다 – 이 찾아왔다.
헌데 다들 백발 성성한 초로에서 중로(中老) 선비들인데, 이황과 조식 뒤에 따라오는 이들은 검은머리 수북하였다.
당에 들지 않아도 무방하니 찾아와서 젊은이의 식견을 들려달라며 삼락서원 시절 스승의 연 맺은 이들을 끌고 온 것이다.
그렇게 늘 모이던 이들에 류성룡과 성혼까지 따라붙었으니, 이준경은 이것이 천하의 영재를 얻어 함께 대사를 논하던 이지함의 심정인가 하고 일순 이해하게 되었다.
“실로 하늘이 내린 재주로구나!”
그렇게 모임 파한 뒤에 늘 모이던 늙은이 네 사람만 남자, 이준경은 바로 찬탄하고, 이윤경은 이황과 조식 두 사람을 칭찬하였다.
“두 젊은이 모두 오늘 모임에 잘 데려오셨소. 나라의 앞날을 논하는 자리에는 화담후인(花潭後人)이 들어와야 마땅하고말고.”
“화담후인이 무엇입니까, 형님?”
재상으로 봉직하랴, 탕평당 영수 노릇하랴 바쁜 이준경은 아무래도 공직에서 물러난 형보다 시쳇말에 어두웠다.
“요즘 서생들 사이에서 늙은이와 젊은이 가를 때 쓰는 말이라네. 『화담자의』그 기문(奇文)이 나오고서 나라 학풍이 뒤바뀌고 나아가 천지개벽하듯 나라 법도가 바뀐 고로, 통상 『화담자의』 나온 뒤에 비로소 글을 익힌 이들을 화담의 후인이라 부른다더군.”
그 말에, 다른 세 사람 모두 속절없이 감상에 빠져들었다.
화담후인이라, 참으로 절묘한 말이 아닐 수 없었다. 당장 경기도 군현에만 내려가도 화담후인이라는 자들은 대개 저들 배운 바가 전부인 줄로 알고, 윤원형이나 김안로의 행악한 이야기를 들으면 ‘역시 옛날 사람들은 과장이 심하다’ 떠들 것이다.
선비의 치부(致富)를 치부(恥部)로 여기지 않는 것이 이황과 조식 같은 이들에게는 궁리하고 마음을 가다듬은 끝에 이른 결론이지만, 화담후인들에게는 마치 그 옛날 기자가 팔조금법 정할 때부터 내려온 듯한 법도처럼 보일 테다.
이황의 스승 이언적이 도적의 소굴이라 지탄하였던 장시는 이제 전국 어디에나 열리고, 어지간한 저자에는 한양과 인천의 번화함을 본뜬 가게가 하나둘씩 생겨났다. 대도호부나 목(牧)쯤 되는 큰 고을에는 쇄은과 은자뿐 아니라, 동전과 은표까지 통용되곤 하였다.
그러나 더 깊게 들어가면, 근본부터가 달랐다.
성현의 말씀을 의심하고, 이단의 학설에 빗대어 검증하는 것이야말로 성현의 후학(後學)으로서 마땅한 일, 자랑스러운 일이라 여기게 되었다.
하늘과 땅의 형상부터 그 사이 사람의 도리에 이르기까지, 시종일관 의심하고 스스로 궁구하며, 설령 스승의 말씀일지라도 한 번씩은 다시 보는 것을 스승 섬기는 도리라 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화담 뒤에 나온 이들이 생각하는 국가란 이 자리 모인 늙은이들 머릿속의 국가와 같지 않고, 그들이 생각하는 국인(國人)은 이들이 생각하는 백성과 같지 않았으며, 의권(義權)이라는 것은 그들에게는 인의예지신 오상(五常)만큼이나 오래되고도 당연한 말이었다.
“그런 이들을 위하여, 아니, 더 뒤에 나타날 더욱 기이하고 놀라운 이들을 위하여 이렇게 뜻을 모은다니, 이럴 때면 지나간 세월이 과연 남가일몽은 아니었는가 아득하구려.”
조식이 그답지 않게 아련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곧 그다운 모습으로 돌아와, 고개를 한번 도리도리 흔들고는 소매를 걷어붙였다.
“젊은이들의 품은바 생각까지 모두 들었으니, 이제는 더 지체할 것도 없소이다. 바로 논의를 해 보십시다들.”
임꺽정은 물었다. 어느새 가장 개명된 나라라고 스스로 여기고, 또 그것을 하등 이상하게 여기지 않게 된 이 나라 조선국.
그런 나라를 지키기 위해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는가? 또 어디서 그쳐야 하는가?
후일 조선이 어찌 될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지금 그들이 써내려가는 초안이 공회를 거치고 성상의 어정(御定)을 거친다면 그 누구도 지금 살아있는 모든 조선 국인의 총의가 이 글 안에 담겼음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닥쳐올 전란에서 이것이야말로 가장 중한 법이요 지표가 될 터였다. 조선이 외압에 굴하지도, 안으로부터 무너지지도 않으면서 인의의 나라, 개명된 나라로 남기 위한 도리.
그리고 장차 조선이라는 나라를 마주하게 될 모든 외방(外邦)에게는, 이 글을 보이면서 우리 조선은 이러한 나라이니 우리의 벗이 될지, 원수가 될지는 오직 그대의 마음가짐에 달렸노라 알리게 될 것이다.
“의권이 무엇인지, 나라와 임금, 국인 사이의 도리는 무엇인지. 우리가 어떻게 오늘에 이르렀고 또 앞으로 어떻게 되기를 바라는지를 모두 담아야 할 것이오.”
“문장은 어떻게 쓰는 것이 좋겠소?”
“임 당수가 손수 겪고 온 것처럼, 세상에는 진서(眞書, 한문)가 통하지 않는 나라가 통하는 나라보다 훨씬 많고, 설령 진서를 안다 하여도 경의(經義)와 고사에 밝은 이들은 더욱 희귀할 것이외다. 민주당의 탁오 선생이 얼마 전에 받은 소식으로는 그 프랑스라는 나라에서 막 『주역』과 『중용』을 옮겨서 그들 말로 출간하였다 하니 한두 세대 뒤에는 달라질지도 모르겠지만 말이오.”
지필묵을 준비하며 이황이 이준경 말에 답했다.
“서양의 선비와 성현의 도리를 논할 날이 온다면 참으로 재미있겠군. 때로는 우리가 오래 살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지 않소?”
“무릇 배움을 논할 때도 충서(忠恕)가 있어야 할 테니, 그러려면 우리도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익혀야 하겠지.”
“그만하면 괜찮은 거래 아닌가.”
이윤경이 아우 말을 웃으며 받았다.
“허나 지금 우리가 하는 일은, 단군이 나라를 세우고 기자가 동쪽으로 와 교화 베푼 이래 처음 있는 것이오. 후인들은 오히려 우리를 부러워할지도 모르지.”
“자, 그러면 후인들의 부러움을 사 보십시다.”
때맞추어 머슴이 연적에 물을 담아 왔다. 글로써 오가는 말 정리하는 것은 이황 혼자였지만, 나머지세 늙은이도 저도 모르게 소매를 걷어붙였다.
노론 향반들 중에서도 덜떨어지고 시세 어두운 자들이 모인 선우당 또한 이 무렵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민주당과의 연줄로, 또 나름의 통찰로 곧 닥쳐올 전란을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던 다른 당들 – 심지어 대동당조차 – 과 달리, 선우당에게 대명과 곧 한바탕 싸워야 할 수도 있다는 말은 실로 당혹스러웠다.
“그러나 상국에서 헌법의 일이나 지금 우리의 나라 꾸리는 법도를 두고 번국을 정벌하겠다고 한다면 우리로서도 참기 어려울 것이오. 그렇지 않소?”
“옳은 말씀이십니다. 우리는 작고 천조 대명은 실로 거대하지만, 그리 따지면 주나라는 사방 백리의 작은 나라로 시작하지 않았습니까.”
이제라도 당론을 명나라에 굽히고 들어가는 쪽으로 정하자는 둥, 헌법이라는 것을 폐하는 시늉이라도 하자는 둥 하는 말은 그 누구의 머릿속에도 스쳐 지나가지 않았다.
어찌하여 개명된 나라가 개명되지 못한 나라의 명에 따라 기껏 세운 어진 정사의 제도를 무너뜨려야 한다는 말인가? 일본국의 대군이라는 자조차 듣고 감탄하여 바다 건너 배우러 온 그 제도 아닌가.
“공자께서 금세에 태어나셨다면 반드시 뗏목을 엮어 건너오셨을 것이오. 어찌 작금의 황명(皇明)이 올바르게 다스려진다고만 할 수 있겠소?”
물론 지금의 나라 모양새가 마음에만 드느냐 하면 그것은 아니었다. 아직도 재조론이 옳다고 믿는 이들이 많았고, 재조론에 완전히 공감하지는 않더라도 오복헌법에 그릇된 부분 있다는 데는 선뜻 동의하는 자들이 또한 수두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이켜보면 이 나라 조선은 먼 길을 왔다. 그들 또한 그 길을 함께 걸었고, 남은 발자국 중 꽤 많은 부분은 바로 그들의 발이 남긴 족적이었으며, 후회는 많지만 더 이상 옛날로만 돌아가기를 바라지도 않았다.
“이 나라의 법도가 개명되었다 하나, 아직 가장 개명된 정도에는 이르지 못하였소. 허나 이것만 해도 벌써 천하의 질시를 얻고 있으니, 후일 우리 손으로 더 나은 정사를 이룩하려면 먼저 지금 그 기틀을 지켜야 하지 않겠소?”
승리를 거둔다 한들 교만해지지 않도록, 오직 짓밟고 정복하는 데 눈이 멀어 당초의 인의를 잃지 않도록, 설령 패망하더라도 이것만은 지킬 수 있도록. 반드시 후대에 남기기를 원하는 것들을 하나둘씩 떠올렸다.
이 작은 나라 조선이 명을 이길 수 있느냐 하는 질문은 나오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어리석은 선비. 시세에 밝지 못한 선비였다. 임거정에게도 부화뇌동하지 못하고 탕평당에도 어울리지 못한 이들.
그런 이들이었으므로, 더더욱 자신들이 지키기로 한 법도에는 우직하였다. 비록 안타깝게도 오복헌법으로 향하는 길만 열어주고 끝났지만, 그들이 알기로 처음 헌법을 세우자고 한 것도 재조론 따르는 향반 그들이었고, 헌법을 후일 고칠 수 있도록 명시한 것은 한량없는 성은에 따른 것이었으나 권점으로서 헌법 고치고자 당을 세우고 세력 모은 것은 그들 자신이었다.
그러한 생각의 흐름 속에서, 한때 저들의 토지 잃고 싶지 않다며 한전법에 항거하여 발버둥쳤던 기억, 아전과 천민 무리에게 수모 당하던 향전의 기억은 조금씩 깊은 물 속으로 침잠해갔다.
어찌 되었든, 이 나라는 그들이 사는 나라였고, 그들 또한 국인의 하나였으며, 지금까지 이 나라 또한 무심하고 야속할지언정 그 점만은 잊지 않아주었으므로.
서도대 안의 네 당 중 가장 근본 없다 해도 할 말 없는 대동당은, 주공동 앞의 남루한 동리에 집 두 채를 빌려 당사로 쓰고 있었다. 당에 소속된 공임도 아예 없지 않고, 만약 약간의 부정함을 감수하며 자금을 끌어모으려 한다면 끌어모을 수야 있겠지만, 그런 짓은 대동당 사람 중 그 누구도 원치 않았다.
“듣자하니 이 글은 오직 조선국 국인의 이름으로 쓰이고 또 반포될 것이라 하오. 성상의 재가는 물론 득하겠지만 그뿐이라더군.”
무릇 천자의 교화는 사방에 미치므로, 천자의 조서(詔書)만이 온 천하를 아우르는 도리를 담을 수 있었다.
그러나 말이 그렇지, 실제로는 벼슬길 험난하여 끝내 물러난 주자도 성리의 논변을 말함으로써 그 어떤 조유(詔諭)보다도 더 넓은 이치를 그 글에 담지 않았던가?
하물며 사람이 모여 세우는 것이 나라요, 누가 썼는지 모를 『의산문답』에서 논한 것처럼 오직 백성의 많고 적음과 나라의 넓고 좁음이 있을 뿐 나라의 주인과 그 권병은 모두 동등하다면, 설령 사방 백리의 작은 나라일지라도 그 나라 백성이 한데 모여 오직 그들의 이름으로 조서를 낼 수 있을 것이다.
아니, 그것은 조서보다도 더 높은 글이라 해야 하리라. 황제조차 그 나라 인민이 세운 군주일 뿐이므로.
“허나 분명 명국이 새롭게 경장하는 바는 우리 당이 내세우는 것과도 맞닿음이 많지 않소이까?”
“헛소리! 우리 당의 당규 그 어디에 저 홍병위니 농리공사니 하는 것이 있단 말이오? 명나라에서 재산을 빼앗긴 향신이 많다는 말은 있지만, 그것을 고루 분배하기는커녕 그저 백성의 환심을 사기 위해 일부만을 흩뿌렸을 뿐이오.”
대동의 큰 뜻이 삿된 위정자 한둘로 인하여 더럽혀져서는 안 될 것이다.
그렇다면 더더욱, 대동당으로서는 이번 전란에 두 손 두 발 다 들어 찬동해야 할 것이다.
“우리 당 또한 공회에 초안을 내야 할 것이오. 그래야만 후인에게 부끄러움 없이, 우리가 그 어떤 사리사욕 없이 오직 더 나은 세상을 꿈꾸며 대동을 논하였노라 자랑할 수 있을 것이외다!”
올해 갓 약관에 닿은 젊은이답지 않은 패기. 모두가 수긍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조선국 세자가 나이 열셋이었던 계해년에 중병을 앓은 일이 있었다. 이때 내의 양예수(楊禮壽)가 진찰하고 약을 쓰는 것을 오직 저의 뜻에 따라 하였는데, 영 차도가 없었다. 그간 한가로운 나날을 만끽하던 임금은 별안간 닥친 이 환난에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으므로, 결국 양예수를 내쫓다시피 하고 임거정이를 불러 사방의 유능한 의원을 모아달라 명하였다.
그날 밝혀진 바로, 천하장사의 솥뚜껑만한 주먹은 최고의 명약은 못 되어도, 그런 명약의 처방을 가능케 하는 효능은 있었다. 한양의 의원들, 병해가 전우치 시절 알던 은거 명의 아무개, 그리고 온갖 잔재주에 능한 예수회 소속 평신도 후안 페르난데스(Juan Fernadez)까지 달려들었음에도, 꺽정이가 뒤를 든든하게 지켜준 덕에 진솔한 대화와 동서 의학의 교류만이 이루어졌다.
그 결과 세자는 보름만에 쾌차하고, 양예수는 저의 의술이 조선 제일임을 격물을 통해 증명하겠다며 이를 벅벅 갈았으며, 꺽정이는 늘 그렇듯 ‘뭘 이런 걸 다’ 하면서도 임금이 내리는 포상은 슬쩍 챙겼다.
“그러던 세자가 어느덧 나이 열다섯이다. 세자빈과도 금슬이 좋으니 이대로라면 곧 세손도 볼 것이야.”
그때를 아련하게 떠올리며 임금이 꺽정이에게 말했다.
“손주 일찍 보아봤자 늙었다는 것만 느끼지 않겠소? 하기야, 임금님은 좀 사정이 다르겠군.”
이제는 그 어떤 궁인도 꺽정이가 함부로 말하는 것을 두고 문제삼지 못하였다. 꺽정이 위세에 억눌렸다기보다는, 분개하는 데도 지친 것이었다.
“그래, 다르고말고.”
두 사람은 창덕궁 후원 연못가에 마주 앉아 영 사약같이 생긴 것을 홀짝이고 있었다. 바로 얼마 전 사탕도(대만)에서 처음으로 거둔 분화두(커피)로 우려낸 차였는데, 약삭빠른 진량사 사장 쇼 칸이 신제품 홍보차 바로 조선과 명에 진상한 것이었다.
꺽정이는 이 땅에서 분화차를 가장 먼저 마셔본 사람이었으므로, 임금님께 마시는 법 가르쳐드린다는 핑계로 이렇게 찾아왔다.
물론, 핑계는 어디까지나 핑계일 뿐이었지만.
“그래서, 결국 전란이 벌어질 모양이더구나.”
“뭐, 그렇소.”
마치 어디 멀리 바다 건너편에서 벌어지는 전쟁 이야기하듯 태연하게 답하는 꺽정이였다.
“이놈아, 그냥 전란도 아니고 자그마치 우리가 상국으로 모시는 대명과 다투는 일이다. 국초에 역신(逆臣) 정도전이 전횡하던 때처럼 날선 문장을 주고받는 데서 그칠 것도 아니지 않으냐.”
그러나 임금이 어떤 말로 꾸짖어도 임꺽정은 임꺽정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임금은 저의 힘을 공연히 흩뿌리는 것을 곧 단념하였다.
“그래서, 이길 수 있겠느냐?”
“질 생각은 없소.”
방금 전과 마찬가지로 성의 없는 답변. 그러나 임꺽정을 하루이틀 본 사이 아닌 임금은 그 눈빛이 사뭇 진지해진 것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저도 간만에 어울리지 않는 진지한 말을, 전란에 대해 들었을 때부터 품었던 말을 꺼내보여야 할 것이다.
“꺽정아, 나는 세자에게 화평한 나라를 물려주고 싶다. 권신도 없고, 역모도 없고, 고작해야 권점에서 떨어지는 일로 호들갑 떠는 그런 나라 말이다.”
소윤도, 대윤도 없고. 세자의 자리를 두고 파벌 갈라 죽고 죽이는 일도 없고, 불에 지진 쥐 시체가 동궁전 창가에 매달리는 일도 없는 그런 나라.
“하지만... 견식 부족한 나도 이제는 알겠다. 우리가 그렇게 살고 싶다고 해도 세상이, 아니, 우리 이웃한 큰 나라가 내버려둘 리 없다는 것을.”
멋모르던 시절 지도를 보며, 이왕 군주가 된 것 중원의 황제로 태어났으면 어땠을까 망상해본 적이 없는 것은 아니다.
“산해관을 넘어 북경을 우리 것으로 삼고, 구헌(九獻)이니 팔일(八佾)이니 하는 예를 갖추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
내가 무슨 뛰어난 공적을 세운 것도 아니니, 오직 신하와 백성을 잘 둔 공으로 맞지도 않는 선시(善諡, 좋은 시호) 받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다만 겨우 찾은 이 평온과 화목함이, 쌓이고 쌓인 원망으로 인해 깨지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것이 결코 쉽지 않음을 임금도 들어 알고 있었다. 천하를 저의 것으로 삼는 일은 오히려 쉽다. 천하를 거느린 뒤에도 첫 발 내딛을 때의 그 자신으로 남는 것이 오히려 어렵다.
굳이 불자들의 말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사람의 주검과 피는 당대에 갚을 수 없는 빚을 후대에 남기기 마련.
그러므로 임거정이에게, 이 어디서 떨어졌는지 알 수 없고 딱히 알고 싶지도 않은 도깨비 사돈 같은 놈에게 이리 부탁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온 국인의 뜻을 모을 것이오. 이겨도 온 백성이 이기는 것이요, 져도 온 백성이 지는 것이지. 그러니 어찌 임금님 혼자 걱정할 일이 있겠소?”
“듣기로 이미 너희 당은 전란의 대비를 마구 해나가고 있다던데, 그 기세가 비탈길에서 수레 밀친 것과 같다더구나.”
“수레에 사람 몇몇과 화약이 잔뜩 실려 있긴 하지.”
펠리페 2세의 것이 된 포르투갈은 말라카를 봉쇄하다시피 했지만, 바로 그 맞은편에는 아체(Aceh) 술탄국이 떡하니 버티고 있었고, 조호르 술탄국도 여전히 건재하였다.
그리하여 인천과 동래로 들어오는 천축(인도)산 염초(焰硝)의 양과 값은 별반 달라진 것이 없었는데, 원수지간이던 아체와 조호르가 술탄 쉴레이만의 명령과 동인도 회사의 중재로 손을 잡고 열심히 염초를 나르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뿐인가? 온 조선 사람들이 그들 나라의 개명됨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또 기꺼이 그것을 지키겠다는 마음을 먹을 때까지, 바쁜 한 달을 보내고 일본으로 돌아간 요시테루 뒤에는, 간만에 싱싱한 놈들 괴롭힐 못된 심보 가득한 흑의군과, 미리 지형을 살피기 위해 넘어간 아이신교로 교창아의 아들 탁시가 따라붙었다.
그리고 그 흑의군 이끄는 이는 잔뼈 굵은 양벽도, 임밤이도 아니요, 어디선가 나타난 권율과 그 종사관(從事官) 이순신이었는데, 이럴 때면 늘 잇따르기 마련인 불평불만은 어째서인지 쑥 들어가 나올 기미가 없었다.
“그 얘기는 나도 들었다. 권철의 자 율과 대양서생 이정의 자 순신, 그렇게 두 사람이라 하였던가. 다들 젊은 인재이니, 반드시 나라에 크게 쓰이겠구나. 임금이 능히 그들을 부릴 수만 있다면.”
“두 사람 모두 나 같은 놈과 어울리곤 있지만 심지는 곧다오. 임금님께서 부르신다면야 어지간해선 사양을 아니할 것이오.”
“허나 이 모든 일이 다 금은을 적잖이 요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이랬다가 만약 공회에서 끝내 너희 당의 뜻을 못 따르겠노라 답하면 어찌할 것이냐?”
설령 명국과의 한판 싸움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한들, 반드시 일본을 도와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병법의 이치를 잘 모르는 자들이라면 그렇게 주장할 여지가 충분했다.
그럴 힘이 있다면 차라리 조선의 병비(兵備)에 힘쓰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무엇하러 바다 건너, 그것도 썩 사이 좋다고는 못할 이웃 오랑캐 나라를 위하여 귀한 세금을 흩뿌려야 하는가?
그에 대한 답은, 곧 공회에서 공론에 부쳐질 것이다.
“나는 이 나라 사람들을 믿소. 아니, 보다 올바르게 말하자면, 나는 이 나라 사람들을 믿기로 한 내 모주 두 사람을 믿소.”
꺽정이가 자못 심각하게 답하고는,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냈다.
“이것을 진상한다는 걸 깜빡했네그려. 임금님, 보시오.”
“이게 무엇이냐?”
“기실 처음부터 이걸 보여드렸어야 했는데, 분화차 마시느라 깜빡했지 뭐요. 어젯밤, 우리가 모르는 사이 나머지 세 당이 회동하여, 저들끼리 만든 초안을 하나로 합쳤더이다. 공회에 부쳐질 초안이 바로 이것인데, 오늘 아침에 영상 대감이 우리에게도 사본을 보내주었소. 아마 승정원에도 들어가 있을 텐데, 아무래도 이렇게 주변에 이목 없을 때 먼저 슬쩍 보는 쪽이 서로 편하지 않겠소?”
천자가 천하에 밝히는 것을 조(詔)라 하고, 국왕이 밝히는 것을 교(敎)라 하며, 세자가 밝히는 것을 영(令)이라 한다.
그러나 지금 꺽정이가 보여준 것은 셋 중 어디에도 들지 않아, 그저 ‘국인선서(國人宣書)’라 스스로 밝힐 뿐이었다.
‘아 조선국 공회의 공임은 국인을 대표하여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생각건대 천하의 자명한 이치가 있으니,
모든 사람이 똑같이 태어나, 똑같은 의권을 누리며 똑같이 저의 뜻대로 살아감이 마땅함이 하나요,
모든 나라는 오직 사람이 모여 약조하는 데서 말미암으니 오직 국인을 위하고 그 의권을 지키는 데 뜻이 있음이 둘이요,
무릇 사람 사이에 차등을 두고 그 의권을 제한하는 것은 오로지 나라의 사람 모두를 위할 때만 가함이 셋이요,
이 차등과 제한은 오로지 국인의 뜻에 따라 제정되는 법도에 의거해야만 마땅함이 넷이요,
법도로 정해지지 않은 모든 것은 그 누구도 가로막을 수 없어 응당 모든 이들이 뜻한 바대로 펼쳐 이룰 수 있음이 다섯이요...’
“세상 어디서나 통용될 수 있도록 풀어 쓰다 보니 글이 말끔하지 못하게 되었다 하오. 오복이니 무어니 하는 말을 빼고 쓴 것도 세상 나라들이 각기 사정 다르기 때문이라던가.”
열심히 읽어내려가는 임금의 주의를 흐트리는 꺽정이의 사설이었다.
나라의 법도가 세워지고 지켜지는 이치, 법도로 사람을 벌하거나 포장할 때 마땅히 따라야 할 도리, 조정의 모든 행사가 비로소 정당하다 칭해지기 위해 필요한 조건, 사람의 재산이 지켜져야 하는 소이(所以).
구구절절이 써 내려가는 글은 그 문장이 결코 아름답지 못하였고, 그저 평이하기만 할 뿐이었다.
‘... 아 조선국 국인은 이상을 자명한 천하의 도리로 여기고 또 목숨으로써 지킬 뿐이니, 이를 따르기를 원하는 자는 모두 조선 국인의 벗이로다. 이로써 온 천하가 개명된 나라로 발돋움하고, 모든 나라와 그 군주와 백성이 공히 무한한 복록(福祿) 누리기만을 바랄 따름이라.’
“듣자하니, 아직 임금님께 어떻게 재가를 청할지는 논의가 분분하다 들었소. 만에 하나 우리가 지게 되었을 때 성상만은 지켜야 한다면서 임금님은 빠뜨리자는 말도 있었고, 공회에서 먼저 찬반을 살핀 뒤에 찬동하는 이가 삼분지이를 넘어가면 공회 전체의 이름으로 상소하여 대보(大寶, 옥새)로 찍어달라 청하자는 말도 있었고.”
전란을 피할 수 있으면 피하겠지만, 찾아오는 전란이 그들의 뜻 꺾고 옛날로 돌아갈 것을 요한다면 그때는 끝까지, 이 선서가 밝히는 바가 지켜질 때까지 싸울 것이라.
반 년 사이 모인 민심은 이러하였다. 이익과 해악 앞에서 너무나 쉽게 뒤틀리는 민심이, 뒤틀리지 않고 올곶음을 유지할 수 있도록 애쓰는 것, 애초에 전란의 해코지가 미쳐서는 안 될 이들을 지키는 것, 거기서부터는 나라의 군세와 이 모든 일을 스스로 일으킨 민주당의 몫이었다.
“다 좋은데, 한 가지만 바꾸자꾸나.”
“무엇을 말이오? 말씀하시면 굳이 승지고 뭣이고 거칠 것 없이 내 나가는 길에 다 전해주겠소.”
“이 글대로라면 나도 나라의 국인 중 하나 아니더냐? 이 전란 끝나고 내 아들에게 화평한 나라 물려주기를 바라는 아비로서, 비겁하게 아랫사람들에게만 떠넘길 수는 없지 않으냐? 가서 전해다오. 이 선서에 대해 공회의 공론이 찬(贊)으로 정해지게 된다면...”
닷새 뒤 열린 공회에서 국인선서는 참여한 이백구십팔 인 중 이백구십팔 인의 찬성을 받아 국론으로 채택되었다.
더불어 부쳐진 안건, 즉 국인선서의 뜻에 따라 일본국에 신정부가 세워지면 이를 국인의 세금으로 채워지는 국고에서 지원하는 안은 이백십칠 인의 찬성을 받아 또한 통과되었다.
임금의 행차를 알리는 소리가 서도대를 울린 것은 그때였다.
모두가 부복한 채로 살짝 고개 들어 지켜보던 차, 임금이 발의하였다.
“이 자리에 사람이 많기는 하나, 찬동하는 뜻 밝히는 것만으로도 청사에 길이 남을 일을 한 셈이지 않더냐? 함께 선서에 함(銜, 서명)을 두자꾸나.”
그러고는 미리 준비한 지필묵으로써 일필휘지로 선서 아래에 쓰기를,
‘조선국왕 이환’
이라 하였다.
기세에 취하여 함을 과하게 크게 둔 탓에, 나머지 이백구십팔 인은 깨알같이 함을 서(署)할 수밖에 없었으나, 그 누구도 이를 임금의 허물이라 여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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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생각 없이 살다 간 듯한 조선 명종이지만, 그런 그에게도 잘 살펴보면 불우한 개인사가 많이 있었습니다. 야심 가득한 어머니로 인해 소싯적부터 훗날 인종이 되는 형과의 신경전 속에서 자라났고, 이 과정에서 작중 언급된 작서의 변(灼鼠之變) 같은 흉흉한 사건도 많이 일어났지요. 그리고 형이 요절하자 왕위에 올랐지만, 귀하게 키운 세자 또한 1563년 요절하는 아픔을 겪게 됩니다.
순회세자는 여러 달 동안 병을 앓다가 사망하는데, 실록에 따르면 이는 내의원의 양예수가 공을 독차지하고자 혼자서 세자의 진찰과 처방을 도맡고 다른 의원들의 접근을 막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실록의 사관은 이에 대해 ‘진실로 죽여도 죄가 남을’ 짓이라고 통렬히 비판하는데, 정작 양예수 본인은 이후에 벌을 받기는커녕 선조 연간까지 내의이자 소문난 명의로 승승장구한 것을 보면 이 또한 완전히 믿기는 어려운 기록입니다. 소략한 기록의 주변 정황을 살피면, 명종 본인과 당시 조정의 잘못도 있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당시 조정은 명종이 외삼촌 윤원형을 견제하기 위해 본인의 외척 심통원과 이량 파벌을 밀어주면서 혼란한 정국이 이어지고 있었고, 세자의 병세는 제대로 관리되지 못했습니다. 세자가 졸하기 고작 나흘 전까지도 명종이 정상적으로 대외 행사를 주관한 것을 보면 명종이 세자의 환후가 얼마나 심각한지 잘 알지 못하였던 듯합니다.
지나가듯 언급된 후안 페르난데스는 하비에르의 동방행에 함께한 원년 멤버로, 사제서품은 받지 않았지만 총명함과 잔재주, 그리고 능숙한 일본어 솜씨로 하비에르의 충실한 보좌역이 되었습니다. 하비에르는 여러 차례 본국에 보내는 편지에서 그의 인품과 다재다능함에 대해 칭찬한 바 있지요.
조선시대의 서명인 서압은 다양한 양식이 있었고, 그만큼 서자(署字)나 화압(花押) 등 명칭도 다양했습니다. 조선 전기에는 그저 초서로 성명을 쓰는 정도에 그쳤으나, 조선 중기부터는 점차 이름자를 여러 형태로 독창적으로 변형하여 쓰는 유행이 생겼지요. 서압은 대개 위에서 아래로 내리는 글에만 쓰였기에, 호적처럼 꼭 본인의 신분을 증명해야 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동등한 상대 사이에서나 아래에서 위로 올리는 글에는 쓰이지 못했습니다. 작중 명종이 국민을 대표하는 공임과 함께 서압으로써 선서에 효력을 부여하기로 한 데는 이런 맥락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미국 독립선언서에 유별나게 거창한 서명을 한 것으로 유명한 존 핸콕John Hancock의 업적(?)도 훔쳐냈는데, 도둑놈과 친구로 지내다 보니 그런 일이 생긴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