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꺽정은 살아있다-219화 (219/259)

66. 화살을 부러뜨리는 힘 (1)

한양에서 번뜩인 빛이 지구 반대편으로 전해져, 장차 안트베르펀과 위트레흐트, 암스테르담을 밝히는 문명의 등불(또는 에스파냐 주둔군 병영을 불태우는 횃불)로 화하기 몇 달 전.

조정으로부터 우다이진(右大臣) 관직을 받은 오다 노부나가는 쇼군을 거르고 바로 조정에 상소하여, 에이로쿠(永祿) 연호의 개원(改元)을 청하였다. 그리하여 에이로쿠 8년(1565)은 덴쇼 원년이 되었고, 천하의 명운을 걸고 벌일 대전쟁의 전초전은, 일본 안에서는 덴쇼의 역(天正の役)으로 불리게 되었다.

무슨 요란한 선전포고나 신불(神佛) 향한 공양은 없었다. 아직까지는 일본 안에서의 싸움이었고, 규모가 조금 많이 클 뿐 무가 사이에서 티격태격 다투는 것은 지난 백 년간 다반사에 불과하기 때문이었다.

덴쇼 연호가 일본 예순여섯 주에 선포되자마자 이곳저곳에서 싸움이 벌어지기 시작했는데, 그 일진일퇴의 공방 하나하나에 일일이 값어치를 매기기는 아직 일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일에 대해서는 마땅한 처분이 있어야 할 것이라고 감히 말씀드립니다.”

서군의 본부가 있는 히로시마(廣島) 성 한복판에서, 시마즈 씨를 대표하는 토시히사가 모리 모토나리를 향해 거침없이 목소리를 내었다.

“마땅한 처분이라! 그래, 시마즈 쪽에서 생각하는 마땅한 처분이란 무엇인가?”

모토나리가 언짢은 기색은 조금도 드러내지 않으며 짐짓 호방하게 되물었다.

“우리 사츠마 무사들은 규슈와 남쪽 바다의 후방을 지키고 있습니다. 전공을 모두 모리 씨에게 몰아드린 셈이지요. 헌데 우리 모두의 대의를 위한 싸움에서는 무용을 드러내지 못하고, 무용을 드러낸 싸움은 우리 모두의 대의를 위한 것이 아니었지요.”

한양 공회에서 선서를 낸 이래, 조선 조정은 일본국 정이대장군에게 이웃나라 사이의 서로 돕는 뜻으로써 나라의 은 일부를 내어주고 또 일부는 빌려주었다.

그리고 그렇게 빌려주거나 넘겨준 은으로 쇼군은 조선국 사업당의 흑의군과 자유민주당 함대를 빌렸고, 조선군에 넘어가야 할 화포와 선박 일부를 사들였다.

(그 은의 적지 않은 부분은 서해가 이끄는 옛 왜구들이 잠상 노릇과 마닐라 갈레온 노략질로 마련하고 있었으니, 결국 돌고 도는 셈이었다.)

그러나 오다 노부나가 또한 이를 가만 앉아 지켜보지만은 않았으니, 바로 기나이의 남은 세력을 짓밟거나 복속시키고, 사카이마저 점령해버린 것이다.

기나이에 남은 미요시 잔당과, 노부나가와 이미 불구대천 사이였던 일향종, 그리고 사카이를 버리고 탈출한 유력한 상인들은 모두 이시야마 혼간지(石山本願寺)로 모여들었고, 사카이를 점령한 동군은 혼간지를 삼면에서 포위하고 있었다.

“혼간지는 일국 다이묘의 거성보다도 견고한 요새요, 기나이에 남은 마지막 거점입니다. 내해(세토 내해)에서 가장 유력한 모리 수군이 혼간지를 지원해야만 장차 일대 합전(合戰)으로 동군을 꺾을 수 있지요. 

그런데 아마고(尼子) 씨가 무너지는 동안, 정작 모리 수군은 구마노(熊野) 수군에게 패배해버리지 않았습니까? 그것도 전공을 탐내어 무리하게 저들을 쫓다가 그리 되었다지요. 그렇게 한두 번만 더 패하면 혼간지에 물자를 들여보내는 것조차 어려워지지 않겠습니까?”

류조지와 오토모 씨 사람들도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서군 안의 세력 구도는 모리 대 시마즈, 그리고 시마즈에게 붙는 나머지 다이묘들 정도로 굳어졌던 것이다. 

그리고 시마즈 토시히사가 억지로 트집을 잡는 것도 아니었다.

일공구민과 공론주의를 내세운 모리 씨는, 이즈모(出雲)에서 겨우 명맥 유지하던 아마고 씨를 무너뜨리고 주고쿠를 완전히 장악했다.

반면 시마즈 씨는 서군의 후방을 지키는 일만을 맡았기에 좀처럼 전공을 쌓지 못했다. 펠리페 2세가 이베리아 반도와 저지대, 신대륙의 금은을 쥐어짜내면서 일으킨 대함대가 이미 마닐라에 웅거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개중 태반은 사람을 싣기 위해 무장을 가볍게 하였는데, 이는 곧 언제 에스파냐 테르시오가 모습을 드러내어도 이상하지 않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시마즈 씨의 돈줄을 쥐고 있는 것과 다름없는 류큐 – 서로 얼굴 붉히지 않기 위해 누가 상전인지는 굳이 말하지 않았으나, 양쪽 모두 알고 있었다 – 를 지키고, 또 규슈와 시코쿠 남해안을 지키는 데에도 바빴다.

“그러니 지금 하리마(播磨, 現 효고 현 일대)에 닿았다는 동군을 막는 일에 있어서도, 마땅히 사전에 군공의 분배를 논하여야 할 것입니다.” 

군공이라는 말이 직접 언급되자, 그간 아버지의 체통을 생각하며 참고 있던 깃카와 모토하루와 코바야카와 타카카게도 눈이 번뜩 뜨였다.

사세를 관망하던 ‘히젠의 곰’ 류조지 타카노부가, 제대로 떠볼 작정을 하며 시마즈 편을 들었다.

“그 또한 좋은 말씀이시오. 따지고 보면, 지키는 것은 모리 당의 장기 아닌가?” 

넌지시 던지는 ‘지키는 것’이란 말은, 곧 이와미 은광 하나 지키는 재주로 서국제일 자리에 올랐다며 모리 씨를 비꼬는 뜻. 형제 중 성질 급한 깃카와 모토하루가 발끈하며 일어났다.

문이 드르륵 열리고 쇼군 요시테루가 나타난 것은 그때였다.

떨떠름한 기색을 애써 감추며, 모두 겉치레로 예를 올리려던 차, 요시테루의 그림자가 어째 평소보다 묵직하고 큼직하다는 것을 하나둘씩 깨달았다.

“아주 잘들 놀고 있군그래.”

지금 들어온 두 사람이 작정하면 그 무예만으로 이 자리에 있는 무장을 모조리 도륙낼 수 있음을 알았기에, 그 뒤를 따라온 린죠 히데요시가 통변을 하기도 전에 벌써 다들 조선말에 귀가 트였다.

“흠흠, 무장들이 군의(軍議, 작전회의)를 하다 보면 격앙될 때도 있는지라...”

“내 너희 모자란 것들에게 한 가지 가르쳐주러 왔다.”

그러면서 조선식 화살통 하나를 꺼내드는 꺽정이였다. 

“화살 아닙니까?”

“다들 눈은 멀쩡히 달려있구만.”

화살통을 툭 던지니, 절로 화살 여러 대가 삐져나왔다. 어찌할 바를 몰라 쩔쩔매는 이들을 더욱 민망하게 할 심산이기라도 한 듯, 꺽정이가 손수 나서서 화살을 집어들었다.

“자, 이것 하나하나가 네놈들이다.”

화살은 대략 스무 대쯤 될 듯했다.

조선 쇼군이 무슨 말씀 하시려는지 다들 예상하여, 떨떠름한 기색이 더 깊어졌다.

저 뻔한 이야기를 모르는 이가 누가 있을까? 모리 모토나리가 슬하 삼형제를 모아두고 했다는 설도 있었지만, 실은 모리 역시 어디선가 다른 데서 듣고 전해준 옛이야기였고, 아들을 둘 이상 둔 어지간한 무장들은 살면서 한 번쯤은 하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하나하나 따로 서면 동국 무장들에게 꺾일 수밖에 없으니, 모두 하나로 뭉쳐야 저들을 당해낼 수 있다. 참으로 옳은 말씀이십니다.”

모리 모토나리가 ‘뻔한 소리 용케도 한다’라는 말을 가슴 속에 아주 잘 파묻은 뒤, 일동을 대변하여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가차없는 코웃음만 돌아왔다.

“아니, 멍청한 놈들아, 그 뜻이 아니란 말이다.”

“하면...?”

꺽정이가 장난하듯 잠깐 팔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스무 대 화살이 그대로 비명을 지르다가 동강 끊어졌다.

모두가 그 우악스런 광경에 할 말을 잊었다. 

“화살이 암만 많아보아야 화살이다. 힘만 충분하면 한 대를 꺾든 스무 대를 꺾든 똑같이 별 일 아니란 말이다. 고만고만한 놈들끼리 티격태격하는 것을 두고 내 무어라 하지는 않겠다. 군공을 두고 내가 먼저 앞장서겠노라 나서는 것도 막지는 않겠다. 

그러나 똑똑히 알아두어라. 내가 이 땅에서 목숨 바쳐 일구려는 천하의 대사가 바야흐로 이루어지고 있다. 내 발목을 잡는 것은 네놈들 맘이지만, 내 발목 부여잡은 네놈들 손목을 어찌할지는 내 맘이다. 알겠느냐?”

그러고는 부러진 화살을 다다미에 휙 던져버리곤 나가버리는 꺽정이였다.

모리 씨의 거성 고리야마(郡山) 성은 야트막한 산 전체를 성으로 만든 곳이라 아주 견고한 성채였는데, 당연히 그만큼 교통은 불편했다. 하여, 서군의 본부로 새로 히로시마 성을 쌓았는데, 어차피 방어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으므로 대신 편의를 도모하였다.

그리하여 처음부터 여러 서군 무가들이 쓸 공간을 염두에 두고 성을 만들었는데, 당연히 서군의 수장인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라 쓰고 임꺽정과 린죠 히데요시라고 읽는)에게도 큼직한 구역 하나가 제공되었다.

물론 성 주인 모리 모토나리가 작정을 한다면 이 구역 안쪽으로도 저의 귀를 들여보낼 수 있겠지만, 그 귀가 머리통에 붙은 채로 모토나리에게 돌아간다는 보장은 없을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 구역으로 돌아오자마자 요시테루는 한숨을 내쉬었다.

“경솔한 짓이었소.”

“필요한 일이기도 했지요.”

함께 걷던 히데요시가 바로 답했다.

“우리에겐 어쨌든 서군 무장들과 그 세력이 필요하오. 아시지 않소이까. 무장의 긍지를 건드리는 것은, 그것도 일본의 명운을 두고 벌일 합전 앞두고 건드리는 것은 옳지 못하오.”

이번에는 꺽정이가 직접 답했다.

“말 잘 듣는 약병(弱兵)이 장수를 우습게 여기는 강병(强兵)보단 백 배, 천 배 낫소. 저것들의 도움이 필요하긴 하지만, 길을 잘 들여놓아야 한단 말이지.”

방금 전 언짢은 기색 보였던 것이 장난이었음을 여실히 보여주듯, 못된 미소가 한가득이었다. 지금쯤 저의 속내 짐작하느라 다투던 것도 잊고 쩔쩔매고 있을 서군 무장들을 생각하면 입꼬리가 아니 올라갈 수 없던 것이다.

그리고 눈앞의 거한이 바로 황해도 한 곳에서 도적떼만 데리고 일어나 나라를 정복한 사람임을 새삼스레 깨달은 요시테루는, 잠깐의 노여움을 금방 거두고 겸허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소. 애초에 저들이 저리 될 것임을 알고 당수에게 도움 청한 것도 이 사람이었지. 내 생각이 짧았소이다.”

그러자 꺽정이 또한 순순히 그 말을 받아주었다.

“그것만 해도 저 안에 있는 놈들보다 훨씬 나은 것이오. 아주 훌륭하오.”

그러나 요시테루는 그 말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 저 안의 서국 무장들이라고 어리석어 군공을 다투는 게 아니다. 

지난날 오다 노부나가가 사카이에서 던지고 간 공안(公案, 화두)이 일으킨 파문이 아직 잦아들지 않은 것이었다. 무장이라면, 그러니까 무사의 세상이 끝나고 사민(四民)의 공론이 어우러지는 세상이 찾아올 때 잃을 것이 있는 무장이라면 (따라서 쇼군 허울 외엔 빈털털이인 요시테루는 거기에 해당하지 않았다)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서군이 일본을 장악한 뒤의 불확실한 앞날을 대비할 수 있는 것 중 하나가 군공임을 알기에, 어떻게든 군공은 늘리고 저들의 세력은 온존하려 저리들 날을 세우는 것일 테다.

“쿠보사마(쇼군)께서도 짐작하고 계셨겠지만, 하리마 출병은 우리 민병(民兵)과 조선에서 넘어온 의병(義兵)으로만 감당할 것입니다. 처음부터 그럴 작정이였지요.”

머릿속에 천하전도뿐 아니라 일본 예순여섯 주의 지도도 훤히 들어 있는 린죠 히데요시가 말했다.

아마고 씨가 일공구민에 넘어간 백성들의 이반으로 허무하게 무너졌을 때, 끝까지 신의를 지킨 열 명의 용사가 있었다. 결국 중과부적으로 열 중 아홉이 죽고, ‘산인의 사슴’ 야마나카 시카노스케(山中鹿介, 야마나카 유키모리)만 살아서 도망쳤는데, 그는 동군의 지원을 받아 아마고 씨의 잔당을 규합하고는 주군의 복수를 천명했다. 

시카노스케가 아마고 씨의 후예 가츠히사를 옹립하고는 서진(西進)의 선봉을 자처하니, 서군의 동정을 탐색하고자 하는 동군 다이묘들도 휘하 무장을 하나씩 떼어 그 아래에 보태주었다. 수효는 일만이 채 되지 않았으나, 기세만은 맹렬하였다.

“서군 무장들이 진정으로 한마음 한뜻이 되도록 만들 수 있는 방도는 하나뿐입니다. 저들끼리 다투었다가는 그 잘난 군공의 수위(首位)를 민병들에게 빼앗길 수밖에 없음을 깨닫게 만드는 것이지요.”

애초에 다른 그럴듯한 이름을 배제하고 ‘민병’이라는 담백한 이름을 고집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무슨 사자니 호랑이니, 금수 별명을 자처하며 거들먹대던 무장들에게는, 저 민병이라는 이름이야말로 그 어떤 위명(威名)보다 두려울 것이다.

민병과 다투어 호각지세만 이루어도 치욕이요, 만에 하나 번듯한 군대를 끌고 민병에게 패하기까지 한다면 그때는 할복을 두 번쯤 하고도 부족함이 있을 것이었다.

“그것은 그렇지. 다만...”

“다만?”

“아니, 개의치 마시오. 하야시 쇼군도, 린죠 공도, 그리고 조선에서 넘어온 무장들도 모두 빼어난 이들 아니오. 이 사람은 다만 너무 시일이 짧지 않았는가, 그것을 걱정하였는데, 생각해보면 걱정을 백 번 한들 딱히 도움은 안 되겠더이다.”

민병을 무장시키는 것쯤이야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을 훈련시키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였다.

동군의 무명(武名) 자자한 무장들 상대로 칼 하나, 창 하나가 아쉬웠던 서군 무장들은 민병의 훈련에 저들 무사들 내어주는 것을 매우 꺼렸고, 흑의군과 에스파냐 용병들이 말도, 생각도, 살아온 삶도 다른 농민들을 다스리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물론 그런 열악한 여건에서도 의병장 권율과 그 종사관 이순신은, 종군신부 – 민병과 의병 양측에 교인이 많다 보니 종군신부도 자연스레 생겼다 – 루이스 프로이스가 ‘기적’이라 칭할 만한 일을 일으키고 있었다. 

하지만 과연 기적 하나쯤으로 충분할까? 임 당수나 여타 이름난 무장만큼은 아닐지라도 나름 무사로서의 식견은 갖춘 요시테로루서는 의심을 거두기 어려웠다.

기세등등하게 하리마로 진공하는 아마고 군을 막아세운 것은, 하리마에서 비젠(備前, 오카야마 현 동부)으로 넘어오는 길목을 지키는 코우즈키(上月) 성이었다. 그리 큰 성은 아니나, 이곳을 넘지 않는다면 바닷가로 바짝 붙어 넘어가는 길 한 갈래밖에는 없었으므로 꽤 중한 요지라 할 만했다.

‘갓산토다의 늑대’라 자처하는 모리 씨의 가신 시나가와 다이젠(品川大膳)이 일천도 채 되지 않는 병력으로 성을 지키고 있는 것이 전부였다.

“예로부터 무리에서 떨어진 늑대는 보잘것없기 마련이지요.”

이순신의 가벼운 농에, 권율도 피식 웃었다.

“여해 자네 말대로일세. 저 상월성(코우즈키) 쪽에서 성문을 열고 우리에게 합세하리라 예상했다면, 저렇게 포진을 하진 않았겠지.”

어떻게든 주군의 땅을 되찾으려는 야마나카 시카노스케로서도, 합전을 앞두고 서군의 전력을 짐작코자 하는 동군 무장들로서도, 히젠으로 넘어가기 전 한 번쯤 적을 제대로 맞이할 필요가 있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그러므로 굳이 하리마 깊숙이 달려드는 대신 비젠과 하리마 사이인 이곳 코우즈키 성 앞에 진을 친 삼만 민병을 상대하면서도 저쪽은 딱히 다른 술수를 부리지는 않았다. 그저 이쪽 민병들이 여차하면 성 쪽으로 움직여 병력을 보태주지 못하도록 성과 민병들 사이 절묘한 곳에 진을 친 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우리를 업신여기는 것도 명백하군요.”

“예로부터 적을 업신여기는 것은 패장(敗將)의 증표 중 하나였지. 그러나 때로는 참으로 업신여김 당할 만한 군세도 있는 법이야.”

코우즈키 성 앞을 흐르는 작은 강을 따라, 골짜기와 언덕이 죽 이어지고 있었다. 

지금 민병이 진을 친 골짜기 동쪽에는 야트막한 언덕이 펼쳐져 있었는데, 어제만 해도 그저 숲과 풀밭뿐이던 그리 심하지 않은 비탈에 지금은 이런저런 요란한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이 골짜기 따라 남쪽으로 조금만 가면 높진 않아도 꽤 험한 산 하나가 있는데, 그 산 위에 있는 것이 코우즈키 성이었다. 그러니 지금쯤 성에서는 양군의 진형이 모두 보일 터였다.

“무리에서 떨어진 겁 많은 늑대로서는 지금 안절부절못하고 있을 것일세. 저의 주군이라는 자 대신 영 형편없는 민병이 이렇게 나타났으니.”

저쪽의 요란한 우마지루시와 달리, 이쪽 민병들은 고작해야 그들의 마을 이름을 흰 천 위에 적어놓은 – 그것도 멋들어진 초서도 아니요 그저 알아보기 쉽게만 쓴 해서였다 – 깃발이 전부였다. 그것으로 사람을 나누어 오(伍), 대(隊), 초(哨, 편제의 명칭)를 정하였을 뿐.

수효는 이쪽이 세 배가 족히 되지만, 기세를 수효처럼 딱 셀 수 있다면 아마 저쪽의 삼분의 일이나 될 듯했다. 이중 대부분은 고작 대여섯 달 조련이 전부요, 아시가루 노릇이라도 해본 이들이 군교로 봉직하고 있었다.

지난 백 년 사이 일본에 태어난 사내라면 전쟁이야 계절 돌아오듯 겪곤 했지만, 지금 민병 대오에 서서 창이나 총을 잡은 자들은 대개 짐꾼 경력이 전부였다.

그러니 어찌 기세부터 벌써 억눌리고 있다 하여 저들을 함부로 탓하겠는가.

“딱 보아도 저쪽에서 굳이 뜸을 들일 것 같지 않군요.”

“그러게, 심상치 않구나.”

마지막으로 병사들 상태를 점검하고 온 히데요시는, 다른 쪽에서 싸움 준비 마치고 온 꺽정이를 만나 함께 군막 있는 언덕으로 올라왔다. 

“아, 수길 형 오셨습니까.”

“여기 그 ‘수길 형’ 윗사람도 뻔히 있는데, 요즘 것들 예절이란.”

꺽정이가 장난스레 툴툴대니, 이순신도 지지 않았다.

“당수께서 예법을 언제부터 그리 꼼꼼히 따지셨던가요.”

“하여간 한 마디 지지를 않아요. 안 그래도 철수 녀석이 애비한테 사사건건 대들던데, 암만 생각해도 소싯적에 나쁜 물이 든 것 같단 말이지.”

“흠흠, 군중무희언(軍中無戱言)이라. 농담은 그만들 하는 게 어떨지요.”

이순신이 안색을 고쳐 한없이 진중한 표정을 지었다. 꼭 이럴 때 안색 고치고 진심 내보이는 게 퍽 얄밉다 여기면서도 꺽정이는 더 딴지를 걸지는 않았다.

이제부터는 권율과 이순신 두 사람이 이곳 진중에서 각각 으뜸과 버금가는 장수요, 지금의 꺽정이와 히데요시마저 싸움이 끝날 때까지는 그 아래 딸린 부장(副將)에 불과하였다. 

“자, 그러면 각자 위치로 가십시다.”

기껏 올라온 보람도 없다고 말꼬리 붙이는 대신 꺽정이는 순순히 물러가고, 히데요시도 그 뒤를 따랐다.

“오늘 여기서 무사의 긍지를 보인다! 칼을 든 자로서 어찌 쇠스랑 든 자에게 밀리겠느냐!”

곧 장마철 급류처럼 아마고 깃발 든 무사들이 쏟아져 내려왔다. 

“쳐라!”

“주군의 원수를 갚자!”

“너희 농민들은 물러나라! 도망치는 자는 베지 않는다!”

일성호령에 화답하는 거센 함성.

그리 급하지 않은 경사건만, 마치 묵직한 돌과 나무 굴러떨어지는 듯한 기세에 민병 병사들은 저도 모르게 한 발짝 두 발짝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치 그 묵직함에 무게를 실어주는 듯, 뒤따라 비탈 내리달리는 우마지루시의 물결.

그에 응답하는 것은, 어째 힘 없는 듯한 나팔소리뿐. 

방포하는 소리 한 번 나지 않고, 평민 병사들은 어느새 등을 돌리기 시작하였다.

“함정이다!”

“아니, 아직 단언하긴 이르다! 계속 돌격해라!”

“쳐라!”

그 도망치는 모양새가 너무나 의심스러워, 저도 모르게 멈칫하는 숙련된 무사들이 있었으나, 지시는 지시였으므로 숨만 잠깐 고르고 마저 전진하였다.

골짜기의 동쪽과 서쪽, 남쪽, 세 곳 중 어느 쪽에서 내려다보든 분명 싸움의 형국이 기이하기는 했다.

서군 민병은 창칼을 맞대는 시늉만 하고, 아니, 때로는 시늉조차 하지 않고 도망치고 있건만, 정작 깃발도, 병기도 내던지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저것은 계책인가? 아니, 그렇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절박하게, 적이 없는 삼면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그저 마을을 단위로 삼아 부대를 편성했기에, 같은 마을에서 온 동무들과 함께 도망치다 보니 대열이 깨지지 않은 것일 터.

결국 그리 단정한 야마나카 시카노스케는, ‘계속 전진’을 또 한 번 지시하였다.

“그러면 그렇지! 어찌 농민에게 창칼을 쥐어주어 무사로 만들겠느냐! 조선의 그 어떤 묘책과 신산(神算)을 들고 온다 한들, 할 수 없는 일은 할 수 없는 일이다! 자, 쳐라! 오늘 우리의 이름을 빛낸다! 달아나는 평민조차 허물어뜨리지 못한다면 무사의 수치 아니겠느냐!”

뒤를 돌아보니, 아마고 잔당의 뒤를 따르는 나머지 동군 진형에서도 같은 결론을 낸 듯, 골짜기로 따라 내려오는 기세가 전혀 주춤하지 않고 있었다.

그때, 또 한 차례 나팔소리가 울렸다. 달아나는 농민들 뒤에 또 한 줄 민병대 대형이 서 있던 것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아니, 정말 복병이었는가? 전령! 뒤따르는 동군에도 전하여라! 심상치 않다!”

“적습에 대비해라!”

“온다!”

맨 앞의 민병을 패주시키면서 언덕을 올라오느라 기세가 흐트러진 아마고 군의 전열. 먼저 도망친 자들은 그저 미끼에 불과했고, 저들이 제대로 된 병사라면 많은 것이 설명되었다.

“쳇, 아무리 그래도 조선 천하인의 이름이 허명은 아니란 말인가!”

“아니, 이상합니다! 저들마저도 도망치고 있지 않습니까?”

“무어라? 그럴 리가 없는데?”

그제야 야마나카도, 후열 민병들 또한 주춤대다가 도망치는 대열에 합류하는 것을 제대로 보게 되었다. 한껏 긴장한 탓에 더 일찍 알아채지 못한 것이다.

“설마... 아, 그렇군! 그래, 후퇴 또한 엄연한 병법 아닌가!”

야마나가 시카노스케가 불현듯 깨달아, 어리둥절한 주변의 아마고 전우들 향해 외쳤다.

“저놈들은 영락없는 농민인 게야! 하하하! 적장은 나름 계교를 부려서, 우리가 농민을 우습게 여기고 무작정 달려들 것이라 예상한 게지. 그리하여 첫 번째 열 뒤에 진짜 병사들을 두어, 한껏 흐뜨러진 우리에게 역습을 하려 한 것이야!”

저들이 수로 따지면 훨씬 많으니 충분히 가한 계책이었다.

정말 저 계책대로 되었다면, 저는 지금쯤 패주하고 있거나 이미 차디찬 시체가 되었으리라 생각하니 등골이 오싹하였고, 또 반대로 그만큼 임박한 승리가 주는 기쁨이 컸다.

“적장은 총명할지언정 실전을 모르는 애송이로군! 자, 돌격! 돌격!”

“아아...”

아직은 젊기만 한 이순신이 아픈 골치를 이기지 못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어째 더 앳되게 보여, 한창 삼락서원 주변에서 말썽 일으키던 치기어린 소년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언덕 위에서 패주하는 민병을 보고 있던 권율 또한 이를 미처 지적하지 못했다.

“안타깝게 되었군.”

“제 실책입니다.”

그러나 ‘이를 어쩌면 좋은가’하며 백짓장처럼 창백한 낯으로 발을 동동 구르거나 하지는 않았다.

“이렇게 된 것은 모두 저의 어리석음 탓입니다.”

“아니, 어찌 그렇겠는가. 아우 또한 미리 알 수는 없었을 게야.”

“나중에 반드시 책망을 달게 받겠습니다. 저도 갈 길이 멀군요. 우선은...”

“그래, 우선은...”

그들이 애써 마련한 계책은 수포로 돌아갔다.

이제 그것보다 조금 더 애써 마련한 계책, 아직 드러내보이지 않으려 했던 그것을 내보일 때였다. 

패주하는 민병들 위로 효시 하나가 날아올랐다.

“저런, 저런.”

“뭐, 잘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역시 사내가 살을 뺴려면 전장을 내달리는 것만한 게 없지요.”

“설마 싸움박질이 고파서 그 벼슬도 내려놓은 게냐?”

“하하, 그렇다고 해 두겠습니다, 암바 버일러.”

살이 두둑하니 올라 꺽정이보다 나이도 많아 보이고 사람도 좋아 보이는 니탕카이 요한이 껄껄 웃었다.

수러 버일러 자리를 세 번 역임한 니탕카이는, 네 번째 임기를 노리지 않고 순순히 내려온 뒤 주션의 의병장으로서 이곳 일본에 저의 전사들과 함께 찾아왔다.

정세가 심상치 않음을 깨우친 해서여진 네 부가 마침내 압카이 아파시 구룬 아래 들어오게 되면서, 그들의 자존심을 살려주기 위해 스스로 수러 버일러 자리에서 내려오고, 해서 사람들도 원한다면 언제든 수러 버일러 자리를 노릴 수 있도록 한 것이었다. 

듣기로 마침내 아이신교로 교창아가 수러 버일러 자리를 얻기는 했지만, 그 아래 야문 중 절반 넘게 해서 쪽으로 넘겨주어야 했다던가. 아직은 위태로운 연합이지만, 교창아는 제법 능수능란한 자이므로 잘 해낼 터였다.

물론 그런 사정까지 모르는 주션 겨레 사람들은 니탕카이 요한의 결단을 칭송할 뿐이었다. 딱히 허황된 명성을 얻고 싶지는 않았으나, 때로는 아름답게 포장된 거짓이 그의 겨레에 더 이로울 수 있음을 수러 버일러 노릇 하면서 깨우친 니탕카이였다.

“자, 들어라! 백정여진 전사들이여!”

그를 따라 가장 먼저 바다를 건너온 일천 전사들이 모두 귀를 기울였다. 아직 크게 외치면 안 된다는 것을 알 만큼 다들 전장을 많이 겪어보았다.

“이제 우리는, 압카이 어전(天主)의 힘으로, 우리 힘으로, 또 여기 계신 암바 버일러의 힘으로 우리가 자유를 얻고 하나의 구룬을 이루었듯, 이곳 오저 구룬(일본)의 사람들을 위하여 왔다. 오저 사람들이 비로소 싸움을 끝내고 하나의 구룬을 이룰 수 있도록, 그들의 구룬에서 어전이자 하늘의 주션(아랫사람)으로 반듯하게 설 수 있도록 하고자 찾아왔다.

이 모든 일을 조금이라도 후회하는가?”

“아닙니다!”

“우리 주션 사람들은 산지에서 말을 타는 것에 능하다. 아마 우리만큼 능한 이들은 지금의 세상에는 없을 것이다. 그러니 저들은 완벽하게 기습을 당할 것이요, 우리의 손에 피를 묻힘으로써 하늘의 법도를 이 땅에 드러내게 될 것이다. 이 모든 것이 하늘이 마련해준 것과 같지 않으냐?”

“실로 그렇습니다!”

“하늘을 이고 있는 모든 사람은 형제다! 형제 중 하나가 붙잡혀 있다면, 우리 중 누구도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자, 가자꾸나! 우리 스스로 자유로워지기 위해, 형제들을 풀어주기 위해 가자꾸나!”

“가자!”

“가자!”

마침내 함성이 울리고, 일천 마리 군마가 산등성이를 짓밟으며 달려나갔다. 

꺽정이 또한 니탕카이 놈이 재상 노릇을 좀 하더니 말빨 좋아졌다며 그 등을 한 대 툭 치곤, 자신이 이렇게 함께 돌격하고 있다는 것을 안사람에게는 전하지 말라면서 투구를 슥 썼다.

그리하여 마침내, 달아나는 민병의 발소리라기에는 너무나 큰 무언가로 인하여 땅이 흔들리고 있음을 아마고 군이 깨달을 무렵.

언덕 위에 갑자기 생전 처음 보는 마병(馬兵)의 무리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들이 생전 처음 듣는 말로 된 우레와 같은 함성이 골짜기를 타고 퍼져나갔다.

“압카이 어럼비 (하늘께서 바라신다)!”

“압카이 어럼비!”

--- *** ---

장수하며 센고쿠 시대의 끝을 목도한 오기마치 천황(親町天皇)은 원 역사에서도 연호를 여러 번 고쳤습니다. 당시 천황가는 물주 무로마치 막부와 함께 몰락해, 오기마치 천황이 즉위 후 3년 넘게 즉위식 예산조차 마련하지 못해 식을 올리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연호를 바꾸는 것 역시 천황 본인의 의지와 무관한 것으로, 교토의 사실상 주인이 바뀔 때마다 그에 따라 연호를 개정한 것이었지요.

원 역사에서 에이로쿠의 변이 일어나고 미요시 일족이 교토를 장악했다가 몰락하는 등 온갖 전란과 재난이 잇따르자 조정은 1570년 에이로쿠 연호를 겐키(元龜)로 바꿉니다. 그러나 노부나가 포위망을 때려부수며 천하인 후보로 급부상한 노부나가의 ‘요청’에 따라 1573년 다시 연호를 덴쇼로 바꾸게 되지요. 작중에서는 미요시 씨가 순식간에 몰락하여, 연호도 겐키를 거르고 바로 덴쇼로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작중 언급된 이시야마 혼간지는, 바로 지금 오사카 성이 있는 곳에 있던 거대한 절입니다. 성벽을 두르고 요도가와 강물로 해자까지 판 이 사찰 안쪽에는 따로 민간인들이 거하는 마을이 형성될 정도였는데, 그 마을이 조그만 언덕 위에 있었기 떄문에 이를 고사카(小坂)라고 불렀고, 후에 이 이름이 오사카(大坂)로 바뀌었다고 하지요.

원 역사에서 혼간지는 주지 겐뇨의 주도 하에 끈질기게 오다 노부나가에게 저항했습니다. 혼간지는 노부나가 포위망의 한 축을 담당했고, 포위망이 무너진 뒤에도 노부나가에게 저항하는 기나이 세력의 잔당을 모아 항거를 이어나갔지요. 세토 내해의 제해권을 쥐고 있던 모리 씨의 지원을 받아 이시야마 혼간지는 10년 가까이 노부나가 군에 맞섰고, 결국 대세를 이기지 못하고 겐뇨가 항복하면서 일본 내의 잇코잇키는 종막에 접어들게 됩니다.

함께 언급된 구마노 수군은 일본의 기이 반도 (오사카와 나고야 사이 툭 튀어나온 반도) 남동부를 거점으로 하였던 수군/해적 집단으로, 마츠라 수군만큼이나 오래된 유서 깊은(?) 집단이었습니다. 이 일대를 기지로 삼아 시코쿠와 세토 내해 동부 일대에서 이름을 떨쳤지요. 이들은 원 역사에서도 오다 노부나가의 손을 잡고 모리 씨가 이끄는 무라카와 수군에 맞섰고, 승자의 편에 선 덕에 후에 히데요시 아래에서도 수군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 공(?)으로 조선 침공에도 끌려나와 처참한 꼴을 당하게 되었는데, 충무공에게 연전연패한 것으로 잘 알려진 구키(九鬼) 집안이 바로 이 구마노 수군의 한 일파였습니다.

작중 아마고 잔당을 이끄는 것으로 언급된 야마나카 시카노스케는 원 역사에서도 끝까지 아마고 가에 신의를 다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배신과 하극성이 난무하던 전국시대 말에 보기 드물게 충성을 이어간 무장이기 때문에 후대에도 이름을 남기게 되었지요. 원 역사에서 모리가 아마고 가를 무너뜨리자 기나이로 도망쳐, 교토에서 승려로 있던 아마고 씨의 자손을 새 당주로 추대한 뒤 아마고의 옛 가신을 모아 다시 세력을 일구고자 분투하였습니다. 그런 노력은 결실을 이루어, 결국 모리 씨가 지배하던 하리마에 거점을 마련하는 데 성공합니다. 

그러나 이 신흥 아마고 세력은 결국 오다 노부나가와 하시바 히데요시에게 모리 씨를 견제하는 유용한 사냥개 정도로만 쓰일 뿐이었고, 모리 군의 반격으로 히데요시가 일시 후퇴하게 되자 최후의 거점 코우즈키 성에서 항전하던 야마나카도 오래 버티지 못하고 항복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가 살아있는 한 아마고 재흥의 시도가 계속 이루어질 것을 눈치챈 모리 측에 의해 암살당하게 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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