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염리예토 (2)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유명한 ‘염리예토 흔구정토(厭離穢土 欣求浄土)’ 여덟 자를 우마지루시에 적게 된 것은, 바로 이마가와 씨를 따라 상락하던 길, 오케하자마에서 그 무시무시한 오다 군에게 으깨졌을 때의 일이었다.
허겁지겁 도망치던 중 잠시 의탁한 한 절의 주지가, 이대로 할복을 하든, 은거를 하든 해야 하지 않을까 잠시 고민하던 애송이 무장에게 들려준 말. 『왕생요집(往生要集)』이라는 옛 글에 나오는 문구라던가.
그 요결을 들은 이에야스는 오다 노부나가의 손을 잡을 결심을 하였다.
일본 천하를 저의 것으로 하고 싶은 욕망은 그대로였다. 그러나 온 나라를 지옥도로 만든 뒤에 그 위에 선다면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그저 죽고 죽이는 순환에서 잠시 수레바퀴의 맨 위에 올라섰을 뿐, 때가 되면 시산혈해로 도로 빠져드는 것은 똑같았다.
그렇다면 바뀌어야 한다. 이 더러운 땅(穢土)을 미워하고, 떠나고자 마음을 먹어야(厭離) 한다. 그리하여 정결한 땅(浄土)으로 나아가야 한다.
오다 노부나가는 고찰(古刹)마저 거리낌없이 불태우는 잔혹함으로 인하여 제육천마왕이라 불릴지언정, 그 이치만은 알고 있는 듯하였다.
그저 파천황 일색인 듯하던 노부나가의 행보는 어느새 그 결이 달라졌다.
미요시 일족이 하루아침에 몰락하고, 잠시 하야시 쇼군을 만나고 오겠노라며 노부나가가 사카이를 홀로 다녀온 뒤, 그런 변화가 더욱 두드러졌다.
무너뜨리고 파헤치는 행보는 겉보기로는 이전과 똑같았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둘을 부수면 하나를 세우고, 셋을 짓뭉개면 둘을 빚어냈다.
우대신 노부나가가 그리는 세상, 바다 건너 장거정이 그리는 세상. 그 모습이 조금씩 일본이라는 바둑판 위에 포석으로 놓이고 있었다.
혼간지를 에워싼 이곳 나니와(浪速, 現 오사카 일대의 옛 이름) 벌판에 세워진 동군 진영도 그중 하나였다.
오다-도쿠가와 동맹의 힘에 승복하기는 하였으나 그뿐이었던 동군이었다. 그것이 고작 한 해 사이에 마치 처음부터 하나의 군영이었던 것처럼 바뀌었다.
우에스기나 호조의 가신들 중에서도 그 재주가 입증된 자는 어김없이 높은 자리를 맡겼고, 또 재주가 있으나 아직 그 본디 주군조차 이를 알지 못하여 그간 말석에 있던 이들을 발굴해내기도 했다.
그저 내친김에 마구잡이로 인사를 한다고 여긴, 자존심만 높은 이들이 몇 번이고 찾아가 항의하였으나, 그럴 때마다 노부나가는 마치 그들을 처음 태어났을 때부터 지켜본 사람처럼 장단점을 열거하며 그에게 적합한 쓰임새가 무엇인지를 밝히곤 했다.
감히 노부나가에게 직접 찾아와 우려를 표하든, 대놓고 불만 드러내든 하는 이들에게는,
‘지금 우리는 일본과 그 너머 천하까지 노리고 있다. 언제까지 명국에서는 고작해야 현(縣) 하나쯤이나 될 법한 조그만 땅덩이를 두고 쿠니(國)라 부르며 소꿉장난이나 할 생각이냐?’
하면서, 지금 굴욕이라 여기는 것을 버티고 나면 얻게 될 엄청난 권세와 위명에 대해 말하곤 했다.
그마저도 영락없는 노부나가 화법으로 설명하였기에 원망을 풀기는커녕 도리어 쌓아올렸건만, 무장들은 대개 분개하면서도 납득하곤 하였다.
“헌데, 그것이 깨지고 있단 말이지. 바로 저놈들 때문에.”
노부나가가 접의자에 털썩 앉으며 이에야스에게 한탄하듯 말했다.
‘저놈들’이란 바로 노부나가를 일본국왕으로 책봉해주겠다며 찾아온 ‘명국 사신들’이었다.
“부디 그렇다고 답해다오. 타케치요 네놈은 첫눈에 저놈들이 가짜라는 걸 알아보았겠지?”
“물론이지요. 지나치게 명국 사신들 같았으니까요.”
명나라 관복이 어떤 것인지, 대부분의 일본 사람들은 모른다. 그나마 근래 상인들은 바다를 종종 건너곤 하여 잘 알고 있었으나, 안타깝게도 명의 관복과 조선의 관복, 그리고 대충 관복 시늉만 내는 어설픈 옷을 구분할 수 있는 상인은 노부나가 진영 맞은편, 꽁꽁 포위된 혼간지 안에 있었다.
허나 명나라 사람은 어떻게 생겼고 그 복식이 어떠한지 제대로 모르는 이들도, 얼추 ‘이러이러할 것이다’ 하고 짐작하는 것은 충분히 가하였다.
그리고 동군 진영에 엊그제 카락선을 타고 나타난 무리는, 마치 일본 무장들 머릿속의 ‘당나라 사람(唐人, 중국인의 통칭)’을 그대로 그려놓은 듯, 이국 정취가 과할 만큼 만연하였다.
“아마 류큐 놈들일 게다. 그놈들은 수백 년째 중원 남쪽 항구를 오갔고, 또 아예 중국 사람의 후손인 경우도 많으니, 그들을 사신으로 꾸민 것이겠지. 흑인들을 데리고 다니는 것도 그렇고.”
이름을 심유경이라 하는 명나라 사신은 저의 호위라며, 흑인 장사 두 명을 대동하였다. 소문으로 들었던 것만큼 까맣기만 하지는 않은, 마치 얼룩덜룩 흰 분칠을 한 것도 같고 검은 분칠을 한 것도 같은 이들이었다.
이 또한 순박한 무사들에게는, 저 사절들이 진실로 명국에서 온 귀빈들이라는 증거로 보였다.
“나름 글밥깨나 먹었다는 중놈들도 그 칙서의 사본이라는 것을 보고는, 진짜 칙서의 문장인 듯하다고들 하더구나. 만약 너와 내가 바깥 세상을 더 잘 알지 못하고 그냥 도카이도에서만 노닐고 있었더라면 영락없이 속아넘어갔을 것이다. 그러니 다른 얼간이들을 마냥 탓할 일만은 아니지.”
저들이 내세우는 바는 이러하였다.
조선의 무도한 무리들이 온 세상을 어지럽혀, 마침내 그 화가 일본에 이르렀으니 이는 대명 천자가 근심하는 바라.
심지어 일본국왕 원씨(아시카가 쇼군)조차 그 어지러움에 놀아나니 이는 실덕(失德)의 증표였다. 따라서 그를 폐하고 나라 안에서 인망과 재주로 이름난 평씨(平氏, 헤이지)의 후예 직전신장(오다 노부나가)을 새로이 일본국왕 평씨로 세우고자 한다.
단, ‘봉천고명(奉天誥命)’ 넉 자는 가볍게 내릴 수 없는 것이라, 갖추어야 할 예물과 고명 문서 등은 모두 그들이 타고 온 배에 아직 실려 있다고 하였다.
그 모든 거짓말을 천의무봉(天衣無縫)으로 늘어놓으니, 믿는 이들은 더 깊게 믿게 되고, 믿지 않는 이들은 같은 동군 사람들에게 멍청이 소리를 들었다.
상세한 내막까지는 알지 못해도, 서군의 뒤에 조선이 있듯 그들 동군의 뒤에 명국이 있다는 것은 대개 아는 바가 남들보다 조금 넓다 싶은 이들이라면 주지하는 바였던 것이다.
그런 꼴이니, 노부나가로서도 확고한 증좌 없이는 저놈들은 거짓 칙사라면서 잡아다 목을 베기 어렵게 되었다.
심유경 또한 이를 알고, 종횡무진 동군 진영을 누비고 다녔다.
“척 공(척계광)은 무어라 하던가요?”
“당연히 거짓 칙사일 것이라며 치를 떨었지. 허나 타케치요 너도 들었을 것 아니냐, 그 불쌍한 자가 어떻게 망신을 당했는지.”
천생 무인인 척계광은, 그가 상대하고 있는 임거정과 그의 패거리가 천하에서 가장 간악무도하고 뻔뻔한 도적떼라는 내각수보 장 대인의 말을 그리 깊게 새기지 못했다. 도적이든 오랑캐든 병기로써 제압하는 것이 그의 장기였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저들이 거짓 칙사임을 여러 장수들 앞에서 밝히고자 찾아간 척계광은 도리어 칙사 ‘심유경’의 언변에 탈탈 털리고야 말았다.
‘이 사람이 거짓 칙사라니! 어찌 그런 천인공노할 거짓을, 그것도 순박한 오랑캐 무리 앞에서 늘어놓을 수 있는가! 그런 무엄한 말을 떠드는 그대야말로 누구인가?’
‘등주위(登州衛) 사람 척계광이오. 부친께서는 신기영(神機營) 부장을 지내셨고, 이 사람은 부족하게나마 부친의 직을 이어받았으며 지금은 경사(京師)에 신편된 군세를 감독하며 도독동지(都督同知)의 직을 맡고 있소이다.’
‘하! 사칭을 하더라도 그럴듯하게 해야지! 그대가 정녕 척 공이라면, 이 사람 심유경을 모를 리가 없을 터인데? 그리고 척 도독동지라 하면 곧 내각수보 장 대인의 명을 받들어 군사를 정비하는 중임을 맡고 있는 나라의 간성(干城)이거늘, 어찌 이곳 일본에 몰래 와 있단 말인가?’
언변으로는 어디 가서 부족하다는 말 듣지 않는 고아의 이단심문관들조차 끙끙 앓게 만들었던, 마음으로는 틀렸다는 것을 알지만 그 소이(所以)를 드러내기 어려운 부분만 골라서 억지 부리는 궤변이 잇따랐다.
척계광조차 나중에는 오히려 자신이 정말 척씨가 맞는가 잠시 벙벙해질 만큼, 그 기세가 너무나 등등하였다. 듣는 이들은 다들 심유경이야말로 정정당당한 중원 사람이요, 중원 사람치곤 어째 오랑캐니 무어니 깔보지도 않고 동군 군세에 감탄하기만 하는 듯하던 척계광이야말로 조금 이상하다고 여기게 되었다.
그렇게 주변이 얼추 정리되자, 심유경은 본색을 드러내었다.
‘듣자하니, 우리 조정의 몇몇 사람들이 실수를 하였던 듯하군. 그대들이 관대하게 이해해주어야 하겠소. 일본국은 바다 건너 멀리 있다 보니, 우리로서는 사정을 잘 알지 못하는데, 따지고 보면 이는 상국을 제대로 섬기지 않는 일본국에도 잘못이 있지 않겠소?’
그렇게 절묘하게 속을 긁고는,
‘본관이 이곳에서 살핀즉, 비록 중원에서는 일본을 오랑캐라 하지만 조정이 있고 막부가 있으며, 또 제위(諸位) 무장은 그 재주가 능히 중원에서도 쓰임을 얻을 만하오. 본국에 고하여 그대들 또한 맡은바 관직을 제대로 제수받을 수 있도록 할 것이외다.
이것이 무슨 뜻인지 아시겠소? 책봉이 끝나면 그대들 또한 어디 오랑캐 추장과 달리, 우리 상국을 언제든 오가며 통상의 이익과 교류의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오.’
그 말에 솔깃하지 않는 무장이 있다면 아마 귀머거리일 것이었다.
‘그러니 본관에게 찾아와, 어느 집안의 누구이며, 어떤 재주가 있으며, 지금 이 성대한 군영 안에서는 무슨 일을 맡고 있는지 알려주시오. 아, 물론 군의 기밀을 본관에게 밝힐 필요는 없소이다.’
누군가는 그저 궁금하여, 누군가는 무언가 떨어지는 것이 있을까 싶어 조심스레 찾아가곤 하였다. 또 누구는 저의 주군을 위한다는 핑계를 대었고, 누군가는 군의 기밀을 심유경 대인에게 밝힌다면 조금 더 좋은 대접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였다.
그사이 심유경 대인을 따라온 명국 사람들 또한 군영 곳곳을 유심히 살피는데, 어째 그 모양새가 태평성세 이어져 군무(軍務)에는 어둡게 되었다는 명나라 사람과는 같지 않았다. 허나 태평성세 속에서 오래 산 사람은 이 무렵 일본에는 없었으므로, 이를 알아보는 자가 드물었다.
그리하여 삼삼오오 사람 좋은 심유경 대인을 찾아뵌 무장들은, 조심스레 이야기를 나누고는 만족하며 나왔는데, 그 화법 절묘하여 들은 뒤에는 아무 생각 없다가 막상 그날 밤 침소에서 잠을 청할 때 물음이 떠오르곤 하였다.
우대신(오다 노부나가)께서는 말씀하시기를, 가장 훌륭하고 뛰어난 이들이 다른 이들을 거느리며 천하를 화평하게 하면 모두가 번영하며 복락 누릴 것이라 하였다.
그런데 저들은 가장 뛰어나지는 않을지언정, 남들보다는 그나마 나은 축에 들었다. 명나라 심 대인의 말에 따르면 그러하였다.
‘허어, 나라마다 다 사정이 다르긴 하지만, 인사(人事)의 법도란 일이관지(一以貫之)일 터. 그대들 본인이 인정하는 것처럼 그대들의 재주가 비록 높은 벼슬을 받기는 아직 아쉬움이 있지만, 그렇다고 막상 박대하자니 이 또한 아쉽구려.’
그렇다면, 정말로 저 명나라 사신이 말하는 것처럼 저들도 조금은 국정을 거들어도 되지 않을까? 그러니까, 그저 가신이 주군 말씀에 따르는 그러한 상명하복 법도를 살짝만 틀어서, 아랫사람이 조금 더 목소리를 내는 것 정도.
물론 그들은 오다 노부나가나 도쿠가와 이에야스 같은 이들에 비하면 한참 부족하다. 스스로 무언가를 입안하거나 시비 가리기에는 지모도, 권세도 모자라니, 여럿이 모여서 한 사람처럼 뜻을 합하여야 비로소 우대신 같은 이들을 제대로 보좌하면서 올바른 의견을 피력할 수 있을 것이다.
노부나가 공도 이미 여러 봉행(奉行, 부교)을 두어 군영의 일을 나누어 맡기고, 이 모든 일을 감독할 군감(軍監)또한 두곤 하였다. 우리가 다 같이 모여 궁리한다면 곧 반역하는 것이라 오해받기 좋고, 또 실제로 그렇게 흘러갈지도 모른다.
“귀 밝은 사람들이 제게 전해준 바에 따르면 그렇게 떠든다고들 합니다.”
“하, 그렇게 이놈저놈 사정 다 보아주다 보면, 그게 저 서군 말하는 공론주의와 다를 게 무어냐. 아예 저들 위해주는 김에 백성들도 함께 위해줘서 일공구민까지 하자고 하지.”
저런 생각의 흐름이 어디로 향하는지, 노부나가는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아직은, ‘그래도 오다 님만한 분이 없으시지 않으냐’, ‘우대신께서는 스스로 재주를 드러내셨으니 능히 동군을 이끌 만하시다’ 하지만, 이런 생각과 말이 오간다는 것 자체가 문제였다.
오다 노부나가는 어떤 공을 세웠기에, 어떤 재주가 있기에 다른 이들의 위에 서는가?
그는 무엇으로서 자신 홀로 철인(哲人)인 것처럼 횡행하며 일본의 법도를 뒤바꾸려 하는가?
무언가를 보여주지 못하면, 위세로서 이런 물음을 찍어누르지 못하면 동군은 저 서군의 다이묘들처럼 – 오다 본인이 사카이에 잠입하여 뒤흔들었던 것처럼 – 기껏 얻은 단합을 잃고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바로 그것이었군. 내가 사카이에 들어갔을 때처럼 우리 장수들을 떠보고, 또 그 아마고 잔당을 선봉으로 내세워 민병과 의병의 내실을 살핀 것처럼 우리 군 속사정을 염탐하겠다는 것이다.”
“하면 어찌하시련지요.”
고작 하루이틀 사이에 이만한 파란을 일으켰으니,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아 쫓아내는 것이 옳았다.
설령 그로 인해 역시 변덕스럽고 미덥지 못한 노부나가 놈이라는 소리를 듣더라도, 화근을 계속 품고 있는 것보다는 덜 어리석은 짓일 터.
“군의(軍議)를 소집하고, 그 ‘칙사’에게도 동석하기를 청해보아야겠다. 아직 뾰족한 수는 없지만, 날 세워 꼬치꼬치 캐묻는다면 그럴듯한 꼬투리를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그리고 금방 자신감을 되찾은 노부나가는, 군의를 열 것이라며 흠차대신을 포함한 모두에게 참석할 것을 청하였다.
마치 저의 집인 것처럼, 흑인 역사 두 명을 대동하고 심유경이 나타났다.
암만 보아도 익숙한 인상이라고 고개를 한창 갸우뚱하던 척계광은 어느새 사라지고, 뒤이어 무장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노부나가는 예의 따위 모르는 오와리 얼간이 말투를 되살려내고는, 단도직입으로 물었다.
“흠차대신 심유경이라 하였는가. 나는 그대가 거짓 칙사라고 생각한다.”
눈빛으로 놀라는 이들과, 조심스러운 탄식으로 놀라는 이들이 좌중에 그득하였다.
“허어, 처음에는 본관을 알아보지 못하고 무례하게 대하고, 그 뒤에는 다시 부족하게나마 예를 갖추더니, 다시 무례해지는군. 이것이 일본국의 접대 법도요?”
심유경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 실제로는 잠시 깜빡하였으나, 알아챈 이는 없었다 – 답했다.
“헛소리다. 명의 황제가 정 내가 세울 공을 미리 왕작으로 치하하려 한다면, 어디 친왕(親王)의 위쯤은 주어야 옳다. 저 아시카가 요시미츠처럼 일본국왕 같은 거짓 칭호에 만족할 내가 아니란 말이다.”
“교오(驕傲)함이 지나치오.”
“과연 그런가? 내각수보 장 대인이 그대가 북경을 나서는 길에 따로 불러 알려준 바가 없었소?”
“그대가 장차 이 나라 일본을 대일통의 대의에 바칠 것이다, 그런 말은 들었소만. 허나 그대가 이처럼 광패(狂悖)하다면 내 돌아가 황상께 상주(上奏)하고 또 내각의 공론 또한 다시금 모아야 할 것이오.”
금시초문이었던 이들이 나지막히 웅성대었다.
임꺽정에 이어 또 다른 난적이로구나, 그렇게 노부나가가 생각하며 저 뻔뻔한 면상에 금을 가게 만들 만한 물음을 떠올리던 차.
척계광이 슬그머니 저의 시종 두엇과 함께 돌아왔다.
“이제 떠올랐소이다! 저놈은 조선 민주당의 앞잡이인 이지라는 자요!”
호를 탁오라 하는 그 난신적자는 동창 안에서도 이를 박박 가는 상대인지라, 임거정, 이지함, 서림 등과 함께 동창 안에서 얼굴을 그림으로까지 그려두고 밖으로 나가는 이들에게 모두 익히도록 하고 있었다.
헌데 저 심유경은 이탁오와 어째 닮기는 하였으나 미염공(美髥公) 따라한 듯한 무성한 수염이 그와 맞지 않고, 더구나 이탁오는 항상 바깥에서 흉계를 꾸밀 때 임거정과 함께 붙어다닌다고 하였으나 심유경 주변에는 그 오귀자(烏鬼子, 흑인) 거인 둘이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도적에게 한 번 당하고 나면 그 도적의 수법을 능히 짐작할 수 있는 것이외다.”
그것만으로도 지금껏 임꺽정이에게 당한 수많은 나라 위정자들이 탐낼 만한 재주였다.
“하하, 무엄함을 모르고 계속 떠들어대는구나! 이보시오, ‘척 공’! 참으로 그럴듯한 고변이오. 증좌고 무엇이고 아무것도 없다는 것만 제하면 말이지.”
“증좌라면 여기 들고 왔소이다!”
그러면서 손짓하니, 시종들이 나아와 무언가를 내밀었다.
“그냥 물동이 아닌가?”
‘심유경’이 무어라 더 묻기도 전, 척계광이 직접 그 동이를 넘겨받고는 냅다 물을 끼얹었다.
“실로 남의 이름을 훔치는 도둑놈다운 짓이로구나!”
그러나 ‘심유경’의 턱수염과 턱 사이를 이어주던 풀이 씻겨 내려가버린지라, 어느새 이탁오의 그 빤빤한 면상이 드러나고야 말았다.
더 놀라운 것은 그 뒤에서 덩달아 물벼락 맞은 두 흑인 역사였는데, 얼룩덜룩 분칠한 듯하던 얼굴이 하나는 더욱 까매지고 하나는 도리어 구릿빛으로 밝아졌다.
“하야시 쇼군 아니신가!”
조선 상투를 풀어헤치고, 무슨 지렁이처럼 땋은 가닥 – 검은 분칠과 마찬가지로 ‘메이히메(명희)’의 솜씨였다 -이 대신 정수리부터 치렁치렁 늘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 이목구비는 한 번 보면 잊기 어려운 임꺽정이 맞았으므로, 노부나가 또한 탄성을 질렀다.
“하하, 망했군.”
이탁오가 실소하였다.
“내 이럴 줄 알았지. 암만 뛰어난 술수도 삼세번 우려먹는 건 과하다니까.”
모두가 이 도술인지 무엇인지 모를 해괴한 조화에 얼어붙어 있는 사이, 이와 비슷한 일을 하루이틀 겪어보는 게 아니었던 도적놈 패거리만 멀쩡히 움직이고 있었다.
“야스케야, 그거 꺼내라.”
“알겠소.”
노부나가와 이에야스가 급히 무사들을 부르기도 전, 두 사람 소매에서 묵직한 쇠공이 나왔다. 꺽정이가 쇠공을 야스케에게 넘겨주며 말했다.
“왜놈들아! 이것이 바로 진천뢰라는 것이다. 죽기 싫거들랑 까불지 마라!”
그사이 야스케는 어디서 나왔는지 모를 부싯돌을 쇠공에 탁-탁 몇 번 두드리고는, 심지에 불을 붙여버렸다.
“날려라!”
한순간에 막사 안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주군을 지켜라!”
저 철환(鐵丸)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일단은 위험하였다. 더구나 딱 보아도 심지 같은 것이 타들어가고 있었으니, 화약으로 무언가 흉험한 물건을 만들어낸 것일 테다. 화약에 익숙하였던 오다와 도쿠가와 군 사람들은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미워도 주군이라고 아케치 미츠히데가 먼저 주군을 몸으로 밀치고는 철환을 몸으로 덮었고, 이에야스를 지키던 혼다 헤이하치로(혼다 타다카츠, 本多忠勝)도 마찬가지로 저보다 몸집 묵직한 주군을 용력으로 밀쳐냈다.
“이 멍청이들아! 저기 저놈들이 도망치고 있지 않으냐! 붙잡으란 말이다!”
“야스케! 달려드는 놈은 내가 족칠 테니 네가 여기 탁오를 업어메고서 배까지 뛰어가라!”
“알겠소!”
“가자!”
와당탕 소리와 함께 아우성 일어나고, 곧 포위된 혼간지 성루 위에서도 무슨 일인가 싶어 살피는 이들로 작은 소란이 벌어졌다.
“쫓아라!”
“잡혀줄 쏘냐!”
조선 사람 중에서도 유별나게 덩치 큰 꺽정이였으니, 조선 사람들보다 보통 두세 치쯤 작은 일본 사람 기준으로는 더 엄청난 거한이었다.
그러므로 혼간지 성벽 위에서 바라본 이들은, 마치 황새와 뱁새 사이의 추격전을 보고 있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한쪽은 나름 죽을 각오로 달려드는데, 다른 쪽은 고작 세 사람인데도 – 짐짝이 된 하나를 제하면 두 사람 – 외려 여유로웠다.
그리고 눈치껏 여기저기서 따라나오는 이들, 즉 야스케와 함께 일본으로 왔다가 이 해괴한 놀음에 휘말리게 된 류큐 사람들까지 합세하면서 추격전은 더욱 우스꽝스러운 떼거리 춤사위처럼 보이게 되었다.
‘잡아라’ 외치는 이들과 ‘뛰어라’ 외치는 이들 사이 거리가 벌어지고, 마침내 저쪽에서 말 타고 달려나오는 이들이 있어 이제는 따라잡겠구나 싶었을 무렵.
쫓아오는 이들에게는 안타깝게도, 가짜 사신들은 이미 파도 찰랑이는 곳까지 닿아버렸다.
저 멀리 ‘핀투 대인’에게 직접 카락 모는 법 배운 해적 정 아무개의 카락선이 있었다. 그리고 꺽정이 코앞에는 그제 하선(下船)하며 썼던 거룻배 두어 척도 그대로 놓여 있었다.
“과연 류큐 놈들이 머슴에서 장수로까지 올려줄 만한 놈이로구나!”
잠시 숨 고르며 꺽정이가 말했다.
“임 당수도 대단하시오!”
이때를 놓치지 않고 적당히 아첨까지 하는 것을 보면, 야스케 역시 아직 힘이 남아도는 모양이었다.
“아이고, 당수! 얼른 가십시다!”
류큐와 일본, 명국에 이어 조선말까지 익힌 듯한 류큐 사람 하나가 후다닥 거룻배에 올라타며 채근했다.
눈대중으로 얼추 흩으니, 올 사람은 다 왔다.
그리고 등 뒤에서는, 멀어지는 듯하던 아우성이 다시 가까워지고 있었다. 경고하며 쏜 듯한 총성까지 몇 방 울렸다.
“자, 밀자!”
꺽정이와 야스케 둘이서 거룻배 한 척씩을 그대로 밀어붙이고, 배 위에서도 노 잡은 이들은 노로, 노 없는 이들은 손발로 열심히 물을 저었다.
“쫓아라!”
“놓치면 안 된다!”
그러나 그렇게 외치던 이들이 세토 내해의 파도로 신발을 적실 무렵에는, 이미 거룻배는 멀리 멀어져가고 있었다.
“제길, 아까 철포 쏘던 놈들은 어디 갔나!”
“헉, 헉! 여기 있습니다!”
“그럼 무엇 하고 있어! 얼른 쏘란 말이다! 저놈들이 주군을 모욕했는데 뭐라도 해야지!”
활을 들고 온 무사들은 급히 활통을 뒤지고, 총 들고 온 병사들은 애써 화승에 불을 붙이던 차.
족히 예닐곱 정(町, 약 700m)은 떨어졌음 직한 저쪽 큰 배에서 포연이 나고, 촌음 뒤에 메아리치는 포성이 해변에 닿았다.
“화포다! 화포... 엇?”
포환이 직선에 가깝게 날아오는 대신, 위로 붕 떠서 한참 날다가 비스듬히 부드러운 모래에 박혔다.
방금 전 그 막사 안에 있던 덕에, 그 포환의 모양을 알아볼 수 있었던 무사 하나가 비웃으며 외쳤다.
“하! 똑같은 수법에 또 당할 줄 아는가! 이 철환(鐵丸)은 그냥 쇳덩이다! 무시하고 얼른 저 거룻배를 쏘아라!”
그리고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심지가 다 타고 그대로 철환은 폭발하였다.
동래에서 나온 비격진천뢰의 첫 번째 실전이었다.
죽고 다치고 놀란 이들을 뒤로 하고, 거룻배는 계속 멀어져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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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력 연간, 명과 일본 사이의 엉터리 협상을 이끌며 국제적 민폐를 일으켰던 심유경은 본디 절강성 가흥(嘉興) 출신의 시정잡배로, 강남 해안 일대를 돌아다니며 살던 중 우연히 가정왜구에게 붙잡혔다가 돌아온 (또는 그들과 밀무역에 종사하였던) 인물을 알게 되어 그로부터 일본어와 일본 내부 사정에 대해 들었다고 전합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교묘한 인물이었던 그는 이 지식을 활용해 병부상서 석성에게 접근하였고, 마침내 대일교섭의 책임자 자리까지 올라갑니다.
당시 명-일 간의 교섭은 그나마 심유경은 정상인 축에 들 만큼 무능으로 점철되어 있었고 – 일례로 본디 심유경의 행동을 감독하고 교섭을 총괄해야 할 정사 이종성은 일본으로 가던 도중 부산에서 덜컥 겁을 먹고 도망쳐버립니다 – 심유경은 이를 교묘히 이용하여 몇 년 동안 귀빈 대접을 받으며 히데요시를 일본국왕으로 책봉하는 공작을 펼칩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일본 국왕으로 봉한다’라고 적힌 거대한 푯말을 만들어 오사카에서 가두행진을 하기도 하고, 히데요시와 더불어 그의 장수 40인에게도 벼슬을 내려주겠다는 소문을 퍼뜨리기도 했지요.
명으로부터 처음으로 책봉된 일본국왕은 무로마치 막부의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츠(足利義滿)였습니다. 이는 일본 내에서는 상당한 논쟁을 일으켰고, 1) 천황을 모셔야 하는 쇼군이 다른 황제를 모셨다는 점 2)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적어도 그렇게 주장되는) 일본이 ‘감히’ 다른 나라에 고개를 숙였다는 점 두 가지로 인해 후대 국학자들에게 비난받게 됩니다.
같은 맥락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일본국왕 책봉도 에도 막부 시기 국학자들에게는 비난받을 만한 점이 있었고, 이들은 히데요시가 책봉의 진정한 의미, 즉 천조질서 내로의 편입과 복속을 뜻한다는 것을 본인의 지혜 또는 우국지사들의 도움으로 간파하고 명일교섭을 끝냈다는 서사를 만들어냈습니다. 그러나 심유경과 함께 일본으로 향했던 명과 조선측 인사들의 기록, 당대 일본에 체류 중이던 예수회 신부들의 기록 등을 바탕으로 보면, 히데요시와 그 주변 인물들 중 그 누구도 일본국왕 직위가 천조질서 내에서 지니는 의미를 정확히 인식하지 못하였고, 오히려 문제가 된 부분은 히데요시가 요구한 한반도 남부의 할양과 조선 대군 인질 조항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정결서, 2012. “만력 24년 일본 부사 심유경의 일본행적 고찰”, <경남학> 33). 따라서 작중 시점에서 오다 노부나가처럼 외부 세계와 폭넓게 교류하는 인물을 제외하면 다이묘쯤 되는 인사마저도 ‘일본국왕’ 타령에 넘어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16세기 중후반 조선인과 일본인의 체격에 대해서는, 안타까운 사유로 많이 남아 있는 인골(人骨) 자료를 바탕으로 상세한 분석이 가능합니다. 예컨대 동래성 전투에서 사망한 조선인의 유골을 바탕으로 추산하면, 당시 조선인의 평균 신장은 남성 163cm, 여성 153cm 정도로 당대 일본인(남성 156cm 전후, 여성 143~144cm 전후)보다 유의미하게 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