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염리예토 (1)
서군을 한 번쯤 찔러 볼 심산으로 비젠을 노리고 들어간 동군은 고작 반나절 싸움으로 일패도지하였는데, 코우즈키 성 앞의 골짜기에는 동군의 시신만 가득하고 민병은 하나도 죽지 않았다고 하였다.
물론 그때 출정한 동군 장수들로서는 억울한, 악의와 왜곡 가득한 소문이었으나, 정 그리 저들 이름을 구하고 싶었더라면 그날 코우즈키 성 앞에서 아마고 잔당을 버리고 후퇴하는 대신 끝까지 싸워야 했을 것이었다.
소문을 들은 무사들이 보인 반응은 대체로 둘 중 하나로, 고작 민병 따위에게 무너지는 동군이 한심하다고 혀를 차거나, 아니면 동군의 변명을 곧이곧대로 믿어 그 무시무시한 ‘붉은 마병(赤い馬兵)’의 힘에 감탄하곤 했다.
(‘붉은 마병’이란 니탕카이 요한의 군세가 돌격하기 전 외친 ‘압카이 어럼비’의 앞부분을 대충 ‘붉다(아카이)’는 말로 알아들은 일본 사람들이 붙인 별명이었는데, 니탕카이의 부하들 중 성경을 다 읽은 이들은 요한계시록의 적기사를 떠올리며 오히려 더 좋다고 떠들곤 했다.)
허나 히메지(姬路) 성을 지키는 어린 구로다 간베에(黒田官兵衛, 구로다 요시타카)는 그 이면의 진실을 알아보았다. 그간 서군을 애매하게 지지하던 가문 내의 입장을 확 바꾸어 서군에게 제대로 성문을 열어젖힌 것이다.
그리고 그 성문으로 들어오는 온갖 사람들을 멀리서 바라보며, 간베에는 자신이 틀리지 않았음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저들이 바로 일본 무사들보다 세 배는 빠르게 산길을 달릴 수 있다는 붉은 마병들이로구나. 저 류큐에는 살갗 검은 사람들이 일꾼으로 일한다는데, 지금 그 나라에서 생색내기로 보내온 의병들을 이끄는 저 야스케(弥介)라는 자도 그런 흑인 중 하나인가 보구나.
그리고 지금, 딱 보아도 비범한 사람들과 함께 나란히 걸어들어오고 있는 저분이 바로, 천하의 틀 자체를 무너뜨리는 이, 조선의 흑염룡이로구나.
대동한 근위무사 두 사람과 문관 하나까지, 도합 네 사람이 하나같이 주변을 꼼꼼히 살피니 이 성의 내력을 살피고, 공수(攻守)의 이점을 헤아리는 듯하구나.
“그, 흠흠. 서양 땅에는 이런 말이 있소이다. 멀리서 보는 것은 모두 아름답다고.”
구로다 간베에가 선모하는 또 다른 사내, 린죠 히데요시가 슬그머니 다가와 말을 걸었다.
“아, 참으로 훌륭한 말씀이십니다.”
“아니, 내 말은, 그러니까... 우리 당수님과 그 일행분들 언행은 가까이서 살피지 않는 게 마음에 이롭다는 뜻이었소.”
꺽정이 주변에서 함께 히메지 성을 살피는 이들은, 실제로는 그저, 남편 찾아오는 길에 왜성 어떻게 생겼는가 구경하고 있는 명희와 철수, 연숙이 (아직 덩치가 작아서 간베에 눈에는 미처 들어오지 않았다), 그리고 ‘탁오 삼촌’일 뿐이었다.
주변의 모든 것을 번쩍이는 눈으로 살피는 이 소년이 은근히 마음에 들었던 히데요시는, 소년의 앳된 환상을 지켜주는 것과 성 주인인 구로다 씨를 배려하여 진상을 밝히는 것 사이에서 중도를 찾느라 한참 고생해야 했다.
“고생하였소.”
그날 밤, 아들딸 둘을 적당히 재운 뒤 꺽정이와 명희는 천수각(天守閣)을 함께 오르고 있었다.
“아예 따라가기도 엄두 안 나는 이국에 계신 것도 아니고, 부군이 고작 바다 하나 건넌 곳에 계시는데, 안사람이 찾아가 뵙지 않는 게 오히려 부도(婦道)에 어긋나지 않겠어요?”
“아이들도 데려올 줄은 몰랐소. 반갑기야 엄청 반가웠지만.”
“우리 사이에서 나온 아이라면, 어차피 범상하게 살기는 글렀지요. 이럴 때 미리 바깥 세상을 구경하게 훗날을 위한 도리라 생각하여 함께 데리고 왔답니다.”
나주에서 제주도 가는 것만으로도 벌벌 떨던 시절은 지났지만, 그럼에도 아직 배 타고 멀리 가는 것은 완전히 안전하지만은 않은 일이었다. 비유하자면 사람은 그럭저럭 잘 다니지만 그렇다고 호환이 끊어지지는 않는 그 옛날 고갯길과 같다고 할까.
허나 평소에 위험한 짓거리는 골라서 하고 다니는 꺽정이로서는 명희의 말이 일리가 있다 싶을 뿐이었다.
“아이들 훗날이라...”
철수는 벌써 나이가 제법 찼다. 만약 백정이 아닌 반가 자제로 태어났다면 지금쯤 벌써 혼담이 슬슬 조심스레 나올 정도였다.
배움이라면 유학도, 상학(商學)도 질색하고, 다만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복잡한 기계를 다루는 손재주가 있다던가. (어려서 힘을 주체 못해 하도 이것저것 때려부수고 다니다 보니 몰래 뒷수습하며 익힌 재주였다.)
“아이들 훗날을 고민하는 날이 올 줄은 몰랐소.”
“낭군 뜻대로 모든 일이 이루어지고 온 천하가 한바탕 뒤집힌다면, 그 뒤에는 굳이 우리가 아이들 훗날을 고민해줄 필요도 없겠지요. 아이들이 능히 알아서 스스로 갈 길을 택하고 나아갈 수 있게 될 테니까요.”
명희가 부군 향해 웃어주니, 꺽정이 또한 잠시 든 딴생각을 금방 떨쳐내곤 삐걱거리는 나무 계단을 마저 걸어올라갔다.
부부가 하필 이 시각에 천수각을 오르는 것은, 잡인의 이목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미닫이문이 드르륵 열리니, 일렁이는 호롱불 아래 천하전도와 일본 지도를 펼쳐두고 머리 맞대고 있는 이탁오와 린죠 히데요시, 권율과 이순신 네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 오셨습니까. 막 준비를 마치던 중이었습니다.”
어느새 두 지도 위에는 깃발이 꽂혀 있었고, 그것도 아직 덜 빼곡하다는 양 이탁오와 히데요시 두 사람이 열심히 깃발을 더 꽂고 있었다.
“때늦은 후회지만, 주나라 무왕이 목야(牧野)에서 제후들에게 선서한 것처럼 우리도 뭔가 더 멋들어지게 국인선서를 천하에 퍼뜨릴 수 있지 않았을까 싶소이다. 지구 한쪽에서 외치면 바로 다음날 반대쪽에서 전해들을 수 있는 정도까지 기물의 법도가 발달하면 그런 날이 올지도.”
이미 국인선서로 인하여 지구 반대편 저지대가 불타고 있고, 이스칸다리야(알렉산드리아)에서는 맘루크들의 반란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미처 듣지 못한 이탁오가 말했다.
“그것 참 좋은 생각입니다. 그리고 정 필요할 때는, 그 선전포고라는 것을 하기도 전에 미리 기습을 한 다음 부득이한 사정으로 선전포고가 늦게 전해졌다고 우길 수도 있겠지요.”
히데요시가 좋다고 맞장구를 쳤다.
“아니, 어떻게 그런 생각부터 할 수가 있는가.”
“그냥 하는 말입니다, 헤헤. 애초에 확실히 이길 자신이 있다면 모를까, 한두 판 싸우고 화해할 사이라면 한 번 깨진 신뢰를 수습하기 어렵겠지요. 도적 무리의 우두머리가 아니라 나라를 제대로 이끄는 중신이라면, 어지간한 바보 멍청이가 아니고서는 그런 짓은 안 할 겝니다.”
깃발이 다 꽂힌 뒤의 천하전도는 풍악산(楓嶽山, 가을철 금강산)마냥 울긋불긋하였다. 깃발 하나하나가 단풍 든 나무 대신 전란이 벌어지고 있는 곳을 표징한다는 점만 제외하면 제법 멋들어졌다 할 만하였다.
이탁오와 명희가 찾아온 가장 큰 뜻은, 어디까지나 당수 임꺽정과 일본에 있는 여타 중진들에게 지난 한 해간의 정세를 알리고, 필요하면 계책을 가감하기 위해서였다.
“고작 한 해 사이에 온 세상이 한바탕 붙게 되었으니 이만하면 국인선서도 제법 청사에 남을 법한데.”
“아, 에우로파 쪽은 아직 제대로 소식이 들어온 건 아닙니다. 계획된 바와 그 외 짐작된 바를 바탕으로 깃발을 꽂았을 뿐이니 너무 믿지는 마십시오.”
즉 나머지 지역은 다 한양의 사업당으로 모인 소식을 바탕으로 깃발을 꽂았다는 뜻이었다.
“바다에서는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우리 예상대로 그대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명의 동쪽 바다는 넓고, 아직 민주당과 자유민주당이 거느린 주사(舟師)는 거기에 조선의 수사(수군)까지 더하여도 바다 모든 곳을 아우르지는 못하였다.
자유민주당의 옛 왜구들은 광주(廣州)부터 영파(寧波)까지 명의 동남쪽 해안을 누비며, 잠상 노릇과 에스파냐 은괴 해적질을 하는 데도 바빴고, 마닐라에 머물고 있는 배들은 이들을 피해 언제든지 명과 일본 동쪽을 오갈 수 있었다.
그리고 에스파냐 역시 류큐나 조선의 남쪽 해안, 규슈 등지를 집적거릴 만한 힘은 없었으므로, 니탕카이의 여진 군세가 그사이 더 불어나고, 동래에서 막 나온 화포와 수마트라 섬을 우회하여 조호르로 전해지는 화약이 히로시마나 히라도에 닿는 것을 막지 못하였다.
“그 와중에 류큐에서 엉뚱하게도 에스파냐 상대로 첫 승전보를 거두기도 했지요.”
“그래, 그 야스케라는 놈은 나도 보았다. 생긴 것과 달리 꽤 똘똘하던데.”
몇 달 전 포르모사 섬(대만) 북동쪽에 표착한 갈레온 한 척을, 그 힘과 머리가 특출나 농장을 관리하는 일까지 맡게 된 전직 흑인 노예 야스케가 농장 일꾼 및 경비대를 데리고 나포한 일이 있었다.
아직 슈리성이 한바탕 불탄 일로 에스파냐 사람들에게 두려움이 남아 있던 류큐 사람들인지라 야스케는 뜻밖의 무명(武名)을 얻게 되었고, 류큐국왕 쇼 겐이 보낸 류큐 의병대를 이끌게 되었다. 스스로 지키지도 못해 시마즈 무사들을 고용하고 있는 처지의 류큐인지라 의병의 수가 많지는 않았지만, 지난날 전투 이후 절치부심하며 양성한 조총수들의 솜씨는 사이카슈에 비할 만하였다.
“조호르에서는 술탄 알라우딘 리아얏 샤가 아체의 술탄과 함께 말라카를 탈환할 준비를 마쳤습니다. 하지만 마닐라에 모인 포르투갈과 에스파냐 전함이 다른 쪽으로 움직였다는 확실한 증거를 얻기 전가지는 쉽게 움직이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바예지트 대군이 향한 바다 건너편은 어떤가요? 그쪽이야말로 저들에게 금방 함락될 만큼 취약할 듯한데.”
유심히 지도 살피던 명희가 뭔가 놓치고 있던 것을 떠올리곤 물었다.
“아마 그곳은 이번 싸움이 끝날 때까지 에스파냐 군인 하나 보지 못할 것입니다, 아씨. 저들로서는 칼리푸르니야를 치는 데 쓸 배 한 척도 아까우니까요.”
차라리 전쟁에서 이긴 뒤 조약으로써, 북아메리카 서해안의 오스만 투르크 식민지와 동해안의 프랑스 식민지를 동시에 빼앗는 쪽이 더 수지타산이 맞는 일이었다.
이탁오가 칼리푸르니야에서 한참 서쪽을 짚으면서 설명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알탄 칸은 이곳, 감숙(甘肅) 쪽에서부터 조금씩 명의 변경(邊境)을 건드리고 있습니다. 예전처럼 한 곳을 우르르 뚫는 게 아니라, 모든 곳에서 살짝 집적거리면서 장 수보가 한 곳에 집중치 못하도록 만들 심산이지요.”
얼마 전에는, 일부러 명 관헌들에게 혼란을 주기 위해 초원과 숲 사이의 땅을 두고 몇 번쯤 다투었던 ‘어러스 울루스(루스 차르국)’의 ‘카삭 부’(코사크) 사람들까지 꼬드겨 함께 감숙성 가장 서쪽의 진보(鎭堡) 몇 곳을 약탈했다고도 하였다.
약탈하면 일가견이 있던 돈 코사크의 아타만(지도자) 예르마크 티모페예비치(Yermak Timofeyevich)는 재물의 냄새를 기가 막히게 맡는 재주가 있었으므로, ‘타타르인’들이 제안한 일확천금의 기회를 바로 알아보았다. 시베리아 원주민의 요새를 털어본들 고작해야 모피나 나오기 마련. 남쪽의 부유한 키타이(중국)를 노리는 쪽이 훨씬 큰 이득이었다.
“그러니까, 말은 그럴듯해도 이쪽 동방에서의 싸움은 우리 손으로 끝내야 한다는 말이로군.”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그저 보고 듣기만 해도 어질어질할 이야기를 일목요연하게 끊어 정리하는 꺽정이였다.
“옳은 말씀이십니다. 말하자면 아직까지는 생채기만 서로 조금씩 내는 정도고, 우리가 가장 먼저 전장에서 공을 세워야만 나머지도 기세 올리고 팔을 걷어붙일 것입니다.”
이탁오가 흔히 볼 수 없는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민주당이 고작 십여 년 사이에 온 세상에 우군을 확보할 수 있던 이유 중 하나가, 저들이 맨 앞에 서서 적의 기선을 제압하겠노라 미리 공언하고 다녔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여기저기 찔러보며 간만 보고 있는 이들에게 서운하다 말하기는 한참 일렀다.
“얘기가 나온 길에, 요새 일본국 상황은 어떻습니까? 바다 건너에서 듣기로는 곧 결전을 벌일 것이라던데.”
“탁오 그대가 얼추 들은 대로요.”
꺽정이가 마치 저의 입으로 설명해줄 것처럼 운을 떼더니, 여태껏 이탁오와 함께 깃발 열심히 꽂던 히데요시 옆구리를 찔러 대신 말하게 시켰다.
우대신 오다 노부나가의 ‘충언(忠言)’에 따라, 새 쇼군 아시카가 요시히데의 허수아비 막부와 허수아비 조정은 전대 쇼군 요시테루로 하여금 즉시 교토로 출두할 것을 명하였다.
그리고 요시테루가 당연히 이에 불응하자, 요시테루와 그에 찬동하는 서군 세력 모두를 조적(朝敵, 조정의 역적)으로 선포하며 우대신 노부나가에게 토벌을 명하였다.
물론 그렇다고 눈 하나 움찔할 요시테루가 아니어서,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 공식으로 대일본국 신정부(新政府) 수립을 선언하여, 신정부 임시 수반을 자처하며 조선국 국인선서에도 언급된 개명된 법도로서 나라를 다스릴 것을 밝혔다.
그리고 신정부는 국토의 나머지 절반을 마저 해방하고 교토 조정을 구하여, 대정봉환(大政奉還)을 이룩하겠노라 선언하였다. 교토 조정에 저에게 개혁의 총책으로서 맡은바 소임 다할 수 있도록 태정대신(太政大臣, 일본 율령제의 비상설 최고위직)의 직을 제수해달라는 뻔뻔한 글을 올린 것과 함께 벌어진 일이었다.
동국의 소식 어두운 자들은 ‘신세이후(新政府) 씨’라는 다이묘도 있는가 싶어 어리둥절하게 여길 뿐이었지만, 서쪽에서는 일개 민병조차 그 신정부의 대정봉환이 무슨 뜻인지, 쇼군이 쥐고 있던 대정(大政)의 권병이 정확히 누구에게 돌아갈 것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이제 정말로 힘 대 힘으로 부딪힐 일만 남았지요. 지금쯤이면 조슈에서 서군 다이묘들이 하나둘씩 출병하고, 시마즈 가 역시 규슈 남쪽을 지키던 병력 일부를 더 차출해 보내주기로 하였습니다. 결국 일대의 대합전(大合戰, 대회전)으로 일본을 두고 벌이는 전쟁은 일단락이 되겠지요.
그런데...”
“그런데?”
“바로 그 큰 전투를 준비하는 데 있어 아직 부족한 면이 있습니다.”
이순신이 대신 답하였다.
“듣기로 동군은 우리 군의 속사정을, 그러니까 민병과 의병을 제한 나머지 장수들의 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 합니다. 반면 우리 쪽은 사카이가 함락된 이후 저쪽 동군의 편성은 어떠한지, 우리가 진군하면 어디서 막아세울지, 강약의 형세는 어찌 되는지 아직 잘 알지 못하고 있지요.
서군의 나머지 군세가 이곳 히메지로 합류하기 전까지 저들의 허실을 밝혀내지 않는다면, 고작해야 나만 알고 적을 모르는 상태로 전장에 뛰어들 뿐입니다.”
백전불태(百戰不殆)는커녕 만전불태(萬戰不殆)를 해도 늘 아쉬운 점을 찾아낼 기세로 이순신이 말을 이었다.
“그러니 어찌 보면 이미 싸움은 시작되었고, 아직까지는 그 싸움에서 밀리고 있다, 그렇게 말할 수 있겠지요. 저들은 이미 우리의 허실을 – 제 잘못이 큽니다 – 얼추 알게 된 반면, 우리는 그렇지 못하니까요.”
“저들이 간자(間者, 간첩)를 부리고 있소?”
“그렇습니다. 그것도 이곳 일본에서 뛰어나기로 유명한 무리를 여럿 거느리고 있지요.”
호조의 후마슈(風魔衆)와 도쿠가와의 이가모노(伊賀者)까지, 이름난 시노비(닌자)들은 대개 동쪽 다이묘들을 섬기곤 하였다.
이쪽에도 물론 아예 그런 자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이름만큼이나 실력도 그쪽에 비해 처지기 마련이었다.
“히라도나 조슈 같은 대읍에서야, 수상쩍은 이를 고변하면 크게 포상하는 방도로써 방비하고 있지만, 각지 무장들의 진영은 그에 비하면 훨씬 허술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탁오는 그리 깊게 고민하지도 않고, 옆 동네 마실 다녀온다고 말하는 것마냥 가볍게 답했다.
“그렇다면 우리도 간자를 보내면 그만이지. 듣자하니 저쪽의 노부나가 그이가 서군 무장들을 한 마디 말로 영 싱숭생숭하게 만들었다는데, 이왕 가는 길에 그런 술수도 함께 부려주고 말이오.”
“그런 술수가 있겠습니까? 다만 저희 쪽에서는 마땅히 보낼 만한 이가...”
“보낼 이가 없다면, 여기 이 사람도 있고, 또 여기 임 당수도 있지 않소? 내가 혼자 간다고 하면 여기 임 당수는 걱정되어서라도 재깍 따라올 것이오. 사람이 의외로 그런 면에서는 물러서.”
“정말 무른지 단단한지 격물로써 살펴보시려오?”
느닷없이 저를 걸고 넘어지는 이탁오 향해 꺽정이가 슬그머니 주먹을 쥐어보였으나, 꺽정이를 하루이틀 겪어보는 것이 아니었던 이탁오는 그저 웃어넘겼다.
“거 참, 성깔하고는. 마저 들어보시지요. 딱 당수 취향에도 맞는 못된 장난질이 하나 떠올랐으니.
내 이럴 때에 대비하여 한양에서 글 잘 쓰는 이도 하나 데려왔습니다. 조선에는 삼세번이라는 말이 있다는데, 칙서 가지고 장난치는 것도 세 번은 채워야지. 그렇지 않겠습니까?”
한양에서 데려온 글 잘 쓰는 이란, 받아주는 사람 없어 여기저기 헤매다가 마침내 공보에 들어와 붓 잡게 된 정철이었다.
공임 권점부터 국인선서까지, 뒤숭숭한 정국 속에서 정론보에 고상한 시문(詩文)이나 싣다가 끝내 조식에게 한 소리 들은 정철은 제 발로 뛰쳐나왔는데, 서림은 그 소문을 듣자마자 바로 사람을 보내 정철을 공보에 초빙하였다.
저는 한사코 매문(賣文)은 하지 않겠다며 뻗대던 정철이었는데, 그날 밤 저의 앞에 서림이 내민 재물을 보게 되자 비로소 꽉 막힌 성품이 트였다.
그리하여 첫 번째로 공보에 쓰게 된 글은, 조선의 개명된 법도를 따라 좋은 나라 일구기로 한 이곳 일본으로 넘어와 현장의 사정을 살피는 것이었다.
적어도 정철은 그렇게 알고서 조슈를 거쳐 이곳 히메지까지 와서, 온갖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제멋대로 글로 그것을 옮기고 있었다.
그런데 히메지 당도한 다음날, 이미 당 안에서 결정난 사안이라며 느닷없이 당수와 탁오 두 사람이 들이닥쳐 글을 한 통 써내라는 것 아닌가.
“별 건 아니고, 칙서만 하나 써 주면 되네.”
“칙서 한 통. 예, 알겠... 아니, 지금 무어라 하셨습니까?”
“칙서라고 했다. 이놈이 귀가 막혔나.”
성질머리로는 어디 가서 밀리지 않는 정철이었으나, 꺽정이 앞에서까지 그 성질머리를 그대로 드러냈다가는 다시는 성질을 부릴 일이 없어질 지도 모르는 것이었다.
“걱정 말게. 우리가 이 일을 하루이틀 해본 것이 아니라네. 아, 생각해보니 칙서를 번역한다면서 엉뚱하게 고치기도 하고, 사신의 손에서 훔쳐내어 장난질을 치기도 했지만, 아예 통째로 위조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군. 뭐, 어쨌든 날아가도 우리 목이 날아갈 테니 자네는 염려할 것 없네.”
“헌데 이 자가 암만 명필이라 한들, 칙서라는 것은 원래 이런저런 복잡한 예식 갖추어서 쓰고 전하는 것 아니오?”
얼굴 파리해진 정철 대신 꺽정이가 문득 떠오른 물음을 던졌다.
“에이, 조선국이라면 모를까, 설마 저쪽 동군 진영에 진짜 칙서와 가짜 칙서를 가려볼 만한 사람이 있으려고요.”
장거정이 저의 눈에 든 무장 척계광을 얼마 전 직접 노부나가의 진영에 보냈다는 것을 알 리 없는 이탁오는 그저 해맑게(또는 짓궂게) 웃을 뿐이었다.
마침내 조슈에 모인 서군 다이묘 군세가 토막과 신정부 수립을 기치로 내걸고 동쪽으로 진격하니, 하리마의 고데라(小寺) 씨와 그 가신인 구로다 씨는 그간 서군을 애매하게 지지하던 가문 내의 입장을 확 바꾸어 서군에게 제대로 성문을 열었다.
“기나이를 노리기에 제법 좋은 곳이오, 히메지는. 언제까지 조슈에 처박혀 있을 수는 없으니, 곧 그 의병이니 무어니 하는 무리뿐 아니라 서군 전체가 히메지까지 동진할 터.”
혼간지를 포위한 동군 진지에서 손수 지도를 펼치고 설명하는 노부나가였다.
우대신의 자리를 받은 이래 노부나가는 적어도 공석 상에서는 약간의 체통을 갖추게 되었다. 물론 저의 눈에 유별나게 거슬리는 놈이나 정말 격의없이 지내는 사람이 좌중에 있는 경우에는 그 체통을 언제든 헌신짝처럼 버리곤 했지만, 지금은 어느 쪽도 아니었다.
“그러면 양측의 강약 형세는 어떻습니까?”
노부나가가 마련한 통변을 통해 그 말을 옮겨들은 척계광이 물었다.
“단언컨대 우리의 우위요. 그러나 얼마만큼의 우위인지, 그것은 아직 확고하지 않소.
서군이 아무리 모여본들 우리 동군은 다케다와 이마가와 두 집안을 제외한 나머지 기나이 동쪽 세력이 모두 모인 것과 진배없소. 모리와 시마즈 두 집안은 제법 무명(武名)이 있지만, 우리 쪽은 쟁쟁한 이들만 추리고 추려도 오다, 도쿠가와, 우에스기, 호조, 이렇게 넷은 족히 되거든.”
오다 노부나가에게 이제 일본은 천하가 아니라, 더 넓은 천하로 나아가기 위한 발판이자 판돈이었다.
그러므로 그 판돈의 값어치를 미리 산정받기 위해 장거정에게 연락을 취했고, 장거정은 군무에 있어 자신을 충실히 보필하고 있는 척계광을 이곳 일본까지 보냈다.
그리고 지금껏 척계광은 왜 장거정이 이 직전신장(오다 노부나가)이라는 자를 높게 사는지, 그리고 그들의 대일통을 이룩하는 데 있어 일본의 공헌할 수 있는 바가 어찌하여 작지 않다고 하는지를 알아볼 수 있었다.
십여 년 전까지만 해도 온 중원을 근심케 하였던 왜구의 악명은 허명(虛名)이 아니었다. 지금 저 본원사(혼간지)라는 절을 가장한 철옹성을 에워싸고 있는 동군 군세의 정예함을 두 눈으로 본 척계광의 결론은 그러하였다.
중원에서도 이만한 규모의 군세는 언제든 모을 수 있다. 그러나 저들의 눈빛, 일백 년 전란으로 다져지고 이번 전쟁에서 무너지면 그들이 지금껏 살아온 삶의 방식 자체가 무너지리라는 것을 깨우친 무사들의 눈빛은 천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것이었다.
만약 어떤 식으로든 수 년 안으로 찾아오는 전란을 마무리지어야 한다면 – 그리고 장거정은 어째서인지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고 척계광에게 강조하였다 – 이들 일본의 군사는 실로 크나큰 도움이 될 터였다.
“지금까지 말씀하신 바에는 모두 동의합니다. 실로 모계(謀計)에 빈틈이 없으시군요. 그러나 저쪽에는 내각수보께서 걱정하시는, 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무리들도 동참하고 있지요. 우대신께서는 필시 그 또한 염두에 두셨으리라 믿습니다만.”
언제부턴가 장거정이 보내오는 명국 사람들은 ‘왜놈들’을 깔보지 않게 되었다. 그사이 일본이 명국보다 강해졌을 리는 없으니, 장거정이 알량한 자존심 너머 참과 거짓을 제대로 살필 수 있는 이들을 추려내어 보내는 것일 테다.
“물론이오. 그런 무리는 크게 둘로 나뉘는데, 하나는 조선 민주당의 소위 대의에 영합한 백성 무리로 민병이라 하고, 다른 하나는 민주당 및 그에 뇌동하는 무리로 의병이라 일컫소.
이들의 실체가 어떠하냐에 따라 우리 동군이 점하고 있는 우위는 상쇄될 수도, 오히려 더 강해질 수도 있소. 그러므로 살피지 않을 수 없었지.
그대를 이곳에 청하기 전, 나는 작은 군사를 따로 파견해 저들의 허실을 헤아리게 하였소. 그리고 그들은 받은바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고 돌아왔소이다. 바로 그대들도 잘 알고 있을, 여진 마병들이 그 의병의 중핵을 이루고 있었소. 지금쯤이면 아마 조선의 총통도 많이 넘어왔겠지만, 그 정도야 우리도 가지고 있으니까.”
여진 야인이라는 말에 척계광은 잠시 놀랐으나, 자신이 누구를 상대하고 있는지 이미 장거정에게 누차 들은 바 있었으므로 금방 정신을 추슬렀다.
“쉽지 않은 상대요. 우리 일본의 군세는 정예하지만, 그런 적을 상대해본 경험은 없으니. 그러나 이미 그들이 이 땅에 있음을 알았으니 대비하면 그만이기도 하오.
그러므로 조정에 건의하여 저들을 조적으로 선포해달라 하였소. 저들로서는 포위된 혼간지를 구원하는 것 외에도 어떻게든 상경하여 그 ‘신정부’의 설립을 재가받을 필요가 생긴 셈이고, 우리로서는 저들로 하여금 동진할 수밖에 없도록 강요할 수 있게 된 것이외다.”
그리하여 저들은 동군이 마련해놓은 방벽과 함정, 무사의 창칼로 만들어진 그 함정 안으로 알면서도 걸어들어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때, 허겁지겁 들어온 아케치 미츠히데가 급히 예를 올렸다.
“무어냐, 귤대가리야? 내가 지금 귀인을 접대하고 있지 않으냐?”
“그, 그것이... 명국의 사신이 찾아왔습니다!”
“뭐라? 명국의 사신?”
이번에는 척계광도 크게 놀랐다.
그리고 불우한 미츠히데에게 노부나가의 사정없는 물음이 쏟아지기 전, 바깥에서 쩌렁쩌렁 외치는 소리가 있어 미리 답을 내주었다.
“여봐라! 이 진영에는 정녕 장수가 없느냐!”
이곳 진영의 동군 병사들은 다들 저들의 우군으로 알고 있는 남만의 대선 – 실제로는 핀투가 거느린 갈레온에 압스부르고 깃발만 단 것이었다 - 을 타고 나타난 ‘명국 사신’ 이탁오가 쩌렁쩌렁 외쳤다. 그 옛날 남경 가던 길에 저와 투닥거렸던 시정 잡배 하나의 이름을 내세우면서.
“이 사람은 흠차대신 심유경(沈惟敬)이라 한다! 왜추(倭酋, 왜인 추장) 직전신장(오다 노부나가)에게 일본국왕의 직인을 수여하러 왔거늘, 어찌 나를 이리 박대하느냐! 썩 나와 고명(誥命, 외국 국왕의 책봉에 쓰이는 문서)을 받들지 못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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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큐 의병장으로 등장한 흑인 무사 야스케는 원 역사에서는 오다 노부나가의 근위무사로 유명합니다. 당시 포르투갈이 인도양 노예무역에 뛰어들면서, 이들을 통해 흑인 노예가 동아시아로 유입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잘 알려진 것처럼, 몇몇은 임진왜란 당시 명군 무장의 사병으로 참전하기도 했습니다), 신기한 것을 좋아하던 괴짜 노부나가 덕에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된 경우지요. 원 역사에서 노부나가는 1581년 예수회 선교사 발리냐노 신부의 노예였던 야스케를 ‘진상’받았고, 그에게 야스케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무사의 신분도 주었습니다.
물론 과장은 조금 있겠지만, 기록에 따르면 그의 키는 190cm에 조금 못 미칠 정도에 일본인 열 사람의 힘을 냈다고 전해집니다. 그리고 2년이 채 되지 않는 짧은 기간 동안 일본어를 익히고 호위무사 임무를 지장 없이 수행하게 될 만큼 총명하기도 했지요. 이후 주군 노부나가를 충직히 지켰으나 혼노지의 변 당시 중과부적으로 패배했고, 그 뒤의 행적은 전하지 않습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히메지 성은 주고쿠와 기나이를 잇는 길목에 있었기 때문에, 14세기 초에 처음 세워져 꾸준한 개축과 확장을 거쳤습니다. 이후 원 역사에서도 히메지를 관리하던 구로다 씨의 일원으로 어린 시절부터 두각을 드러낸 끝에 히데요시의 군사(軍師)로 활약하게 된 구로다 요시타카의 손을 거치며 오늘날의 형태에 가까워졌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중요한 곳에 있어 계속 확장을 거듭하다 보니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한 지반이 침하하는 문제가 발생했고, 지금도 거의 60년에 한 번 꼴로 – 2010년~2015년 사이의 ‘헤이세이 대수리(大修理)’ 이전에도 이미 ‘쇼와 대수리’와 ‘메이지 대수리’가 있었습니다 - 대규모 수리를 거듭하고 있습니다.
돈 코사크는 16세기 중반 모스크바 대공국이 카잔과 아스트라한 일대를 정복한 시기부터 꾸준히 러시아 대외확장의 첨병 역할을 했습니다. 예르마크 티모페예비치는 이 무렵 이반 4세에게 복속된 돈 코사크의 수령(아타만) 중 하나로, 우랄 산맥을 넘어 시비르 칸국을 무너뜨리고 서시베리아 정복의 첫삽을 뜬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후 돈 코사크는 빠르게 동진하여 17세기 중반에는 아무르 강에 도달하였고, 바로 이때 조청연합군과 교전하게 되지요 (나선정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