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꺽정은 살아있다-233화 (233/259)

70. 해서파관 (2)

천안문의 변에 휘말린 서생들 목숨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 관직을 내던진 서계는, 근래 흰머리와 더불어 부쩍 한숨이 늘어났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가...”

분명, 지금의 대명은 엄숭이 전횡하던 그때의 대명보다는 나았다.

해금령이 풀리면서, 중화의 상인들은 온 천하로 나아가 금은과 온갖 재보를 나라 안으로 들여왔다. 은의 양이 늘어나면서 일개 백성들까지 물건을 편리하게 사고팔 수 있게 되었으며, 그 살림살이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 요새는 군비로 말미암아 다시 세금이 늘어나고 있었지만 – 나날이 좋아지고 있었다. 

엄숭과 결탁한 부패한 관리들은 모두 쫓겨났다. 관례니 풍습이니 하며 힘없고 어리석은 백성을 괴롭히던 자잘한, 그러나 모두 합하면 그 어떤 혹리(酷吏)보다도 무서운 잡세와 인습은 사라졌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쩌면 태조 고황제께옵서 천명을 받으신 이래 처음으로, 이 나라의 조정, 황제 폐하를 정점으로 하는 거대한 기구는 대일통이라는 하나의 사명을 따르게 되었다.

그러나 슬프게도, 억겁의 수면 끝에 눈을 뜬 이 거인 반고(盤古)에게 있어 인의(仁義)란 눈꺼풀과 같았다. 한 번 뜨인 눈은 감기지 않고, 대명 조정이 지닌 날것 그대로의 모습, 황제의 명에 따라 만백성부터 산천초목까지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는 괴물이 나타났다.

“죄인 서계는 비화인(非華人)이다!”

“죄인 서계는 당장 나와 백성 앞에 죄를 고해라!”

홍병위. 대일통이든 무엇이든, 그저 관에 결탁해 위세 부리며 남을 짓밟는 그 맛에 취한 작자들. 그간 저자에서 서계와 그의 일가를 욕하던 이들은 며칠 전부터는 더욱 과감해져, 이제는 서계의 집 앞까지 와서 저렇게 소란을 일으키고 있었다.

“면목이 없습니다, 아버지.”

이 집안의 죄인은 단 하나, 애지중지하며 키운 막내아들 서영. 

그러나 아들의 죗값은 다 치룬 지 오래다. 빼앗은 땅은 응천순무 해서가 문제삼기도 전에 먼저 모두 돌려주게 했으며, 서계 자신이 아들과 함께 직접 응천부로 나아가 자명(自明, 자수)하였다.

“너의 죄가 아니다.”

새로운 대명의 하늘 아래서, 사(私)는 티끌과 같이 가볍고 공(公)은 태산과 같이 무거웠다.

지금 저들이 서계를 죄인이라 부르는 까닭은 단 하나,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 위해, 알량한 명성을 떨치기 위해 유명한 – 그러나 끈 떨어진 – 고관을 먹이로 삼기 위함일 테다.

허나 정녕 그런가? 이 집안의 진정한 죄인은 누구인가? 조정이라는 괴물을 풀어놓는 데 일조한 잘못은 자신에게도 있지 않은가? 

그때, 하인들이 애써 막고 있는 대문 너머에서 환호하는 소리가 일어났다.

“와아아! 마침내 관에서 나섰다!”

“관노야 나리들! 우리의 피와 살을 갉아먹는 자들에게 똑같이 앙갚음을 해 주십시오!”

마침내 올 것이 왔다. 이제는 다 끝났다. 마침내 저의 제자였던 장거정은, 평온한 이면에서 점차 어지러워지는 민심을 가라앉히고자, 멸사봉공을 운운하며 늙은 스승을 쳐내기로 작정한 듯하였다.

“아아, 숙대(장거정의 字)여, 정녕 이 늙은 스승마저 희생으로 바치려 하는가. 대일통이라는 그 헛된 기치의 어디에 대체 그만한 값어치가 있다는 말인가?”

그 말을 비웃듯, 서계 일가를 죄인으로 만든, 저 더러운 무리의 우두머리 왕가가 저의 알량한 얼굴 내밀며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잊지 말아주십시오! 이 왕 아무개, 오로지 조정의 바른 뜻을 받들어 천하위공(天下爲公)을 이루고자, 저 안의 죄인을 앞장서서 고변하였으니, 바라는 바가 일신의 광영은 아니지만 베풀어 주신다면야...”

감히 그 입으로 경전을 논하니, 나라의 배운 자들이 교화를 잘못 편 까닭인가, 아니면 애초에 바른 학문을 제때 구하지 못하여 교화의 효험을 이루지 못한 까닭인가. 

마침내 우지끈 하는 소리와 함께, 괴성이 마치 비명처럼 울렸다.

그 비명 같은 괴성이 실제로 비명이라는 사실은, 한 박자 뒤에야 깨달았다.

“이놈의 자식들이 낄 곳과 빠질 곳을 분별하지 못하는구나! 그 분별 가르쳐 주마!”

좀 담이 큰 하인 하나가, 다른 하인 등을 밟고 올라서 담장 밖을 살폈다.

그랬더니 눈에 보이는 것은 해괴한 풍경. 암만 보아도 동창 사람인 듯한 자들과 함께 온 일군의 장사들이, 느닷없이 소매 걷어붙이고 몽둥이 꺼내들고는 인정사정 없이 주변을 후려친 것이다.

어찌나 힘도 좋은지, 한 번 휘두르면 두세 사람이 자빠지고, 더 높이 올라가고자 서계를 모함한 촌부들은 정말로 더 높이 올라가, 촌음뿐이지만 하늘을 날았다.

그 광경을 어떻게 전해야 서계 어르신께서 믿어주실까, 잠시 걱정하던 하인들이었는데, 그들에게는 다행히도 서계는 금방 그들의 말을 참으로 믿어주었다.

서계는 그 옛날 자신이 만났던, 사람을 능히 허공에 띄울 수 있는 힘을 지니고, 또 그 힘을 제멋대로 휘두를 만큼 우악스러운 사내를 잘 기억하고 있던 것이다.

“이보시오. 요즘 백성들은 옛날과 같지 않소! 고분고분 당할 것 같소?”

다들 혼비백산하여 흩어지는 와중에 딴에는 동네 홍병위의 우두머리랍시고 왕가 녀석이 앞에 나섰다.

허나 홍병위 대장 왕가 놈에게는 억울한 일로, 그의 걸쭉한 강소성 사투리 섞인 항변은 애초에 북경 관화도 못 알아듣는 임꺽정에게는 통할 리 만무하였다.

뜻밖의 일로 인해 어디 석불처럼 얼어붙은 진린 옆에 서서 구경하던 심유경, 아니, 이탁오가 잽싸게 통변해주니, 꺽정이는 히죽 웃었다.

“그렇게 고분고분하지 않은 놈들 중 가장 대성(大成)한 게 나다, 멍청한 놈아.”

“이럴 수는 없소. 내게도 의권이 있다는 말이오!”

“네놈이 남의 의권을 저기 논밭 사이에 쳐박았으니, 너도 저기 가서 네놈 의권 실컷 찾아보려무나.”

그 의권이라는 말이 어디서 나왔는지는 알고서 떠드는 것일까. 꺽정이는 말과 뜻이 통하지 아니하는 이 상황에 개탄하여, 어리석은 왕가 녀석에게 만국 공통으로 잘 통하는 저의 주먹으로써 의사를 전해주었다. 

“이, 이게 대체 무슨 짓이오?”

그제야, 조선에서부터 조용히 따라오던 심유경의 지인과 그 의형제들이, 서계의 집앞에 서자 돌변하여 같은 편을 인정사정 없이 때려잡았다는 사실을 겨우 머릿속에서 받아들인 진린이 소리쳤다.

자신이 응천부에서 저의 소속을 밝히고 데려온 관병 여럿들도 홍병위들과 같은 신세가 되어, 나 살려라 도망치든, 나 살려라 도망치다가 나 죽는다 소리 하며 나자빠져 있든 하였다.

“아, 이놈도 있었지. 이보쇼, 탁오 선생.”

꺽정이가 눈짓하니, 진린이 분명 심유경으로 알고 있던 이탁오, 그러니까 장거정이 직접 지목한 중화 인민의 적, 그리고 그의 이름 빌린 팜플렛이 유행하고 있는 브라반트와 리보니아에서는 파우스트 박사와 동급으로 취급되는 사내는 덩달아 짖궂은 웃음을 지었다.

“아, 그렇지. 하마터면 잊을 뻔했습니다그려.”

그러고는, 부리나케 도망치는 관병과 홍병위 무리 등짝을 향해 돌아서서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나는 광동성 소주부(韶州府)의 진린이다! 네놈들이 감히 우리 민주당의 벗인 서계 대인을 해치려 하므로 내가 단죄하러 왔다! 너희들은 앞으로도 내 주먹을 조심하는 게 좋을 게다!”

남경으로 오는 배 위에서 진린이 신나서 열심히 떠드는 것을 귀담아 들은 이탁오가, 진린 본인보다도 더 진린 같은 목소리로 외쳤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진린의 뺨을 또르르 흐르는 눈물을 타고 뒤늦은 후회가 번졌다.

분명 동래를 떠날 때만 해도, 서계를 만나러 간 악적 임거정을 서계의 집에서 사로잡고, 동창이 나라에 보탬 되는 곳으로 바뀐 이래 제일의 대공(大功) 세운 사람으로서 큰 포상을 받을 기대로 가슴이 벅차올랐건만.

그리하여 남경에 닿자마자 같은 동창 사람들에게 사정을 알리고, 우선 자신이 동래에서 훔쳐온 조선의 무시무시한 새 군기(軍器, 병기) 일람을 전한 뒤 관병과 동창 끄나풀 여럿을 구해 이곳 송강부(松江府, 現 상하이 일부)로 왔건만.

임거정 잡으러 가는 무리 사이에 바로 그 임거정이 끼어 있을 줄 그가 어찌 알았겠는가. 아무리 중화의 대일통을 가로막는 악적의 수괴라지만, 어찌 이런 잔학한 꾀로써 자신의 앞날을 짓밟는다는 말인가.

“사람의 탈을 쓰고 어찌 이런 간악한 짓을 할 수 있소? 이제 나는 끝났소!”

물론 진린이 백날 꺽정이에게 항변해본들, 남경 자금산(紫金山)의 돌무더기 앞에서 항변하는 것보다도 더 효험이 적을 터였다.

“뭐 그런 섭한 말을 다 하나. 뭘 해도 안 될 편에 서느니, 곧 이길 편으로 미리 갈아타는 게 훨씬 낫지. 따지고 보면 우리가 바로 네놈의 은인이란 말이다.”

“임 당수 말씀이 옳습니다, 흐흐. 뭐, 이러고 나서 정작 우리 당이 패망하게 되면 그때는 정말 인생 망하는 것이지만, 원래 세상 일이라는 게 그런 위태로움은 감수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덩달아 진린 속을 긁는 이탁오였다. 그사이 꺽정이 따라온 흑의군들이 주변 정리를 마쳤고, 꺽정이는 성큼성큼 굳게 닫힌 서계네 저택 앞에 나아가 외쳤다.

“이보쇼! 서계 어르신! 기껏 닫아 잠근 문짝이 엄숭 그 노인네 등뼈 꼴 나는 것을 보기 싫으면 얼른 문 여시오!”

“때가 때이다 보니, 차마 차는 대접하지 못하겠군그래.”

꺽정이가 못 본 사이 팍삭 늙은 서계가 씁쓸하게 말했다.

“뭐, 이 와중에 그런 것을 바라면 그게 도둑놈 심보지.”

이탁오가 ‘그런데 임 당수는 도둑놈 아닙니까’ 토 달기도 전에 꺽정이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지금 차를 따질 계제가 아니오. 어르신, 얼른 같이 도망가십시다.”

“무어라?”

“아까 저기 ‘진린’이가 외치는 것 못 들으셨소? 이제 누가 보아도 어르신은 우리 당과 한통속이시오. 뭐, 따지고 보면 엄숭 그놈 족칠 때부터 한통속이긴 했지만서도.”

“한통속이라, 하.”

서계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면 한 가지만 묻겠네.”

그리고, 돌연 눈빛이 변하였다. 엄숭 아래에서 저의 진면모를 감추고 수십 년을 버틴 서계였다. 전원(田園)의 가운데로 은퇴하여, 고작 홍병위들 따위에게 수모를 당하는 신세가 되었건만, 그럼에도 우국(憂國)의 마음은 가시지 않았다.

“필시 자네들은 이 사람이 나라를 뒤엎는 일에 앞장서기를 바라는 것이겠지.”

“우리로서는, ‘도로 바로잡는다(反正)’는 말이 더 좋긴 한데, 뭐, 전후사정 다 때려치우고 답하자면, 어르신 말씀이 맞소. 헌데 어찌 아셨소?”

“멀리서 보아야만 비로소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기 마련이지. 이 늙은이가 보기에 자네들, 민주당이든, 조선이든, 그 뒤의 다른 나라들이든, 이 전란에서 우리 대명을 꺾을 수 있는 길은 단 하나, 우리가 안에서부터 무너지도록 하는 것뿐 아닌가.”

항주에서 시작하여 온 강남의 불만 품은 향신들을 규합하고 있는 오승은은, 아직 서계에게까지는 닿지 못하였다. 동창의 삼엄한 감시를 두려워한 탓이었다.

그러므로 서계의 말은, 오로지 스스로 이곳 화정현에서 살피고 헤아려 얻은 결론이었다.

“그리고 내가 정론보와 공보를 제대로 읽은 게 맞다면, 자네 당의 책사 노릇하는 이들은 당연히 이 늙은이보다도 먼저 그런 결론에 이르렀을 터.

그러므로 내 묻겠네. 그대들은 우리 대명을 어찌하려 하는가?”

이탁오는 그저 가운데서 말을 옮길 뿐, 따로 덧붙이거나, 꺽정이에게 귀띔하려 하지 않았다. 임 당수의 솔직한 뜻이라면, 오히려 자신의 그 어떤 교묘한 말보다도 더 서계에게 믿음을 줄 수 있으리라 짐작하기 때문일 테다.

하기야,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그게 무슨 터무니없는 물음이오? 나는 그저 이놈의 대국이 우리네 앞길 막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오. 그 뒤의 일이야 어르신네들이 알아서 해야지, 거기까지 우리네 말을 들으려 하시오?

뭐, 소소하게 따지면야 요동을 뚝 떼어 니탕카이 녀석에게 준다는 둥, 바닷길 가로막는 것은 관두고 동쪽 바다 전체를 우리 민주당이 꿀꺽 삼키는 것을 고대로 받아들이라는 둥, 내걸 조건이야 여럿 있지만, 그 이상은 바라지도 않고 탐나지도 않소.”

천조 대명의 모든 군사가 잡지 못한 휘왕 왕직을 단숨에 붙잡고, 엄답(알탄 칸)도 해내지 못한 엄숭의 실각을 발차기 한 번으로 이루어낸 사내. 

등 뒤에 조선과 여진, 일본을 업고, 지금껏 그 누구도 걸어간 적 없는 새 세상을 열어젖히려는 사내의 솔직한 답은, 서계가 생각한 그 어떤 것보다도 더 기상천외하였다.

“우리가 알아서 한다... 그렇군. 하하! 처음부터 그랬어.”

고개를 한참 끄덕이던 서계의 입에서, 갑자기 웃음이 한바탕 터져나왔다.

“내 어찌하여 이것을 이제야 깨달았는가. 자네가 어떤 사람인지 잊고 있었어. 이렇게 자네가 찾아와 자네의 입으로, 그리도 태평한 낯으로 그리 말하는 것을 보고 듣지 못했다면 영영 깨닫지 못했을지도, 하하하!”

이 늙은이가 기어코 실성하였는가 일순 의심한 꺽정이가 곁의 이탁오를 바라보았는데, 이탁오는 그저 무언가 아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렇다면 조야(朝野) 양쪽에서 온갖 신산(辛酸) 다 맛보았던 서계의 머릿속, 아직도 그 폭소가 이어지는 서계의 마음 속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가? 

진시황이 육국을 정벌하고 중원을 일가(一家)로 합한 이래 항상 황제가 있었다. 그 황제는 하늘의 아들이었으며, 하늘과 땅 사이에 우뚝 선, 사람 가운데의 참된 용(眞龍), 하늘의 운행부터 땅의 이치까지 모든 것을 자신의 명에 따라 움직이는 자였다.

그것이 부러워 지금까지 수많은 이들이 난을 일으켰고, 또 장성 바깥의 오랑캐들은 그것이 부러워 남쪽으로 말 타고 내려왔으며, 개중 몇몇은 성공하였다. 

그들이 도중에 고꾸라지지 않고 마침내 홀로 우뚝 서게 되면, 그것이야말로 천명(天命)의 징표라며, 이름을 바꾸고 새 천자로 섰다.

개중 욕심이 지나쳐, 아직 천하를 통일하지도 못하였는데 황제를 자처하는 이들이 여럿 있을 때면 바야흐로 난세가 되어 수천만 백성이 어육(魚肉)으로 화하였고, 때때로 어떤 황제는 그런 난세가 부럽다는 듯 억지로 반란을 꾸미고 큰 공사를 일으켜 저의 백성을 갈아넣었다.

그러나 눈앞의 사내는 어떠한가.

산해관 넘어 북경에 들어와, 대머리 중놈도 하는 중원 천자를 조선 백정이 못할 것은 무엇이냐, 이제부터 국성(國姓)은 임씨(林氏)이노라 외칠 생각 따위는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다. 아니, 설령 누가 면류관 들어 바친다 한들, 이딴 불편한 모자는 네놈들이나 실컷 쓰라며 던져버릴 것이었다.

그가 바라는 것은, 그리고 그 뒤를 따르는 이들이 바라는 것은, 고작 그런 시시한 황제 따위가 아니었다.

“내 낙향하여 천하의 동향을 살피니, 어째 무언가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 싶을 때면 자네들의 농간이 있더군. 

지금 우리 대명이 조금씩 굴러떨어지고 있는 이 비탈길. 그 비탈길 향해 내각수보 장태악(장거정)의 등을 떠민 것은 자네들이었지, 그렇지 않은가?”

“그렇소.”

어깨 으쓱하며, 너무나도 무거운 것을 가볍게 시인하는 답이 돌아왔다.

이번에는 이탁오도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다만 그 비탈길은 역대 여러 선황들과, 그 이전의 오랑캐들, 그리고 그보다 더 이전 황조의 사람들이 만든 것입니다. 굴러떨어지지 않고서 어찌 비탈길이 있음을 깨닫겠습니까?”

때로는 일부러, 때로는 뜻하지 않게, 임거정과 그의 민주당은 중화 사천 년 청사 가운데 명멸했던 그 어떤 황제와 재상도 저들이 탐내는 줄 알지 못하였던 것을 보여주었다.

모든 것이 황제의 명에 따라야 한다 여기는 이들에게, 처음부터 그렇게 세워졌으나 그 원칙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였던 나라의 재상에게, 그들의 명을 우습게 여기는 넓은 세상이 있음을, 그 세상을 다스리기 위한 새로운 방도가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리하여 모든 것을 다스리려는 그 욕심이 꿈틀거리고, 새로 뜨인 눈은 새로 깨달은 욕심으로 가득 찼다. 한 번 끝을 보지 않는 한 끝나지 않을 일이었다.

그리고 임거정과 그의 벗들은, 그 끝을 보여주고자 하고 있었다. 한무제도, 당태종도, 몽고의 성길사한(징기스 칸)과 홀필렬(쿠빌라이 칸)도, 황명의 열성조도 엄두를 내지 못하였을 일을, 천자 한 사람의 천조를 무너뜨리는 일을 해내고자 하고 있었다.

“이 늙은이는 그저, 어지러운 흐름을 한 발짝 떨어져 관망하고자 하였네. 그러나 이 탁류(濁流)는 끝내 만족을 모르고 닥쳐와, 늙은이 한 사람도 가만 내버려두지 않겠다는 양 휩쓸어가려 하더군.

그러다가 겨우 배를 구해 탔으니, 감사한 마음에서라도 어찌 함께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서계가, ‘아차, 이놈들은 원래 이런 도당(徒黨)이었지’ 하고 이마를 탁 치며 한탄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가산 중 그나마 남은 보화를 챙기고, 하인들을 흩어 보내며 그들 편에 장남 서번과 차남 서곤에게 보내는 서한을 맡긴 뒤, 셋째아들 서영과 함께 서계는 길을 떠났다.

“우리는 남경까지 올라갈 것입니다. 그곳에서 당당하게 배를 마련해, 조선으로 건너갈 예정이지요. 그곳에 잠시 머무시다가, 때가 되면 다시 중원 땅을 밟으시게 될 것입니다.”

차라리 묻지 않는 쪽이 마음의 평온함을 위하는 길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되는 서계였다. 

송강부에서 남경 응천부로 향하는 길. 

그 옛날 두보가 ‘끝없이 흐르는 장강은 도도히 흐르네 (不盡長江滾滾來)’라 읊었던 그 장강과는 반대되는 방향으로, 그러나 느릿느릿 움직이는 것만은 꼭 닮은 모습으로 일행은 움직이고 있었다.

일행 중 가장 연로한 서계가 오히려 젊은것들의 유유자적함을 답답하게 여기게 되는 상황. 

“그것을 물은 게 아니지 않은가? 배를 구하려면 차라리 동쪽 바닷가 상해현(上海縣)으로 갔어야 할 텐데, 오히려 남경으로 향하고 있으니.”

“상해는 그저 작은 고기잡이 마을 아닌지요? 무릇 군자는 대로행(大路行)이니, 구차한 길을 오가는 것은 도적떼의 몫일 뿐 서 대인에게 어울리는 것은 아닙니다.”

애초에 이 계절에 작은 고기잡이배로 조선까지 가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허나 아무리 그렇다 한들, 지금쯤이면 보나마나 동창과 관헌에게도 서계가 조선의 악적 임거정과 함께 달아났다는 연통이 한 바퀴 넘게 돌았을 터. 

그런데도 이리도 느릿느릿, 그것도 일대에서 가장 관의 경계 삼엄할 남경 향해 가고 있으니, 한바탕 폭소와 그 뒤의 호언장담과는 별개로 붙잡혀 죽고픈 마음은 없던 서계로서는 답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도중에 몇 번 그들을 검문하려 드는 무리가 있기는 했다. 경장 이전과는 달리, 뇌물도 (옛날만큼은) 먹히지 않고, 공적을 세워 더 높이 올라가기만을 바라는 이들이었다.

허나 진린이 – 보다 올바르게는, 벌벌 떠는 진린을 대신해 그 입을 자처한 이탁오가 – 둘러대는 언변에는 다들 길을 열어주었다.

아무렴, 조상까지 팔아 알라딘의 후예를 자처하고, 코스탄티니예와 파리, 리스본과 바야돌리드를 쥐락펴락한 그 세 치 혀 앞에 고작 시골 관헌 따위는 놀아나지 않는 쪽이 더 이상했던 것이다.

화정현에서 벌어진 소란에 대해 묻자 둘러대기를, 홍병위 우두머리 왕가가 아무리 그래도 조정의 대신이었던 이를 처벌할 수는 없다고 진린이 평결하자 앙심을 품고 날뛴 것에 불과하다 하였다.

그러면서 지금 이렇게 서계를 데리고 응천순무 해 대인 앞으로 가는 길이라 하니, 설마 동창의 고관쯤 되는 이가 내각수보 장 대인과 함께 문연각을 들락거리는 해 대인의 이름을 허투루 대겠느냐 여긴 관원들은 알아서들 길을 열어주었다.

그러나 그것도 한두 번이지, 바로 그 해서가 떡하니 있는 남경응천부 성문에서까지 통하리라 기대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미친 짓일 테다.

“물론 우리라고 갑자기 미친 것은 아닙니다. 다 믿는 구석이 있지요.”

“믿는 구석이라?”

“여기 탁오 이 사람이, 남경에 닿자마자 응천순무 앞으로 연통 하나 보내두었다오.” 

그간 진린만큼이나 얼떨떨한 채 일행을 따라오던 서계의 아들 서영조차 불안해하며 아버지와 임거정 사이를 번갈아 살폈다.

“연통 하나? 대체 무슨 연통이기에 고작 그것만을 믿고서...”

“걱정은 마시오. 여기 이탁오 이 사람이 워낙 명필이라.”

그러나 이미 따라온 판국에 이제 와서 화정현 자택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 

(문득 그 옛날 임거정이 엄숭 등짝을 걷어찼을 때의 엄숭 나이가 지금의 자신과 비슷하다는 것을 돌이킨 서계는, 임거정이 얼마나 노인을 공경하는지를 새삼스레 깨달았다. 이제 와서 돌아가자 하면, 그때는 제 발로 걷는 대신 야선(也先, 에센 타이시)이 천자를 끌고 간 것처럼 끌려갈 터였다.)

그렇게 심란함을 장강에 흘려보내려 애쓰면서 – 그렇게 잘 흘러내려가지는 않았다 – 남경에 닿았다.

“쉿, 이쪽으로 오십시오! 순무 대인께서 배편을 마련해두셨습니다.”

“아니, 저게 무슨...”

그리고 정말로 성문에 닿자마자, 그들에게 손짓하는 관원 하나가 있는 것을 본 서계의 입은 떡 벌어졌다.

“대체 나라가 어찌 되려 하는가!”

어째 저를 죄인이라 외치는 폭도들 사이에 갇혀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되었을 때보다도 더 깊은 탄식을 하는 서계였다.

서계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으나, 그 탄식의 무거움은 해서가 이틀 전, 이탁오의 서한을 펼쳐보았을 때 내쉬었던 탄식보다 아주 약간 더 묵직하였다.

장거정으로부터 나라의 기강을 잠시나마 더 유지하기 위해 서계에게 일벌백계의 예를 보여야 한다는 말을 듣고 무거운 마음으로 남경에 당도한 해서 또한, 서한을 읽어보고는 똑같은 한탄을 내뱉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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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역사에서 흔해 서계의 퇴전(退田, 토지 반환) 사건이라 불리는 서계 집안의 부패 문제는, 훗날 해서가 청백리로 명성을 떨치면서 과장된 형태로 살이 붙은 채 널리 회자되게 됩니다. 이에 따르면, 서계의 막내아들 서영은 아버지의 위세를 믿고 주변 농민의 토지를 강탈하고, 이에 반발하는 농민은 지역 관헌에게 뇌물을 주어 처형하게끔 하는 등 패악질을 벌였습니다. 당시 응천순무로 부임한 해서는 이를 알고, 한때 자신을 엄숭으로부터 구명해준 은인 서계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단호하게 처벌하였다고 합니다. 

당시 사대부들이 농민의 토지를 강탈하는 것은 그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강남 전역에서 광범위하게 벌어졌고, 서영 역시 정확히 어떤 처벌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극형까지는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후대의 각색에서는 ‘부패한 조정의 비선실세’ 서계가 황제까지 움직여 아들을 구명하려 하고, 해서는 이를 단호히 거부하고 서영을 처형한 뒤 사직하게 되지요. 문화대혁명의 계기가 된 희곡 『해서파관』에서는 이 부분에서 해서가 황제를 꾸짖는 대목 등을 대폭 삭제하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대 황제들조차 한 수 배워야 할 엄청난 문자옥(文字獄), 문화대혁명이 일어나는 것을 막지는 못했지요.

지난화부터 등장하여 고통받는 진린은, 원 역사에서는 1560년대 초 젊은 나이에 산악 이민족과 해적의 이중고에 시달리던 광동성에서 군공을 세우며 두각을 드러냅니다. 이후 광동 일대에서 여러 군직을 역임하며 파면과 복직, 승진 등을 여러 차례 겪다가 바닷가 사람으로 수전과 왜군의 사정에 밝다는 이유로 발탁되어 임진왜란에 파병된 명군 수군을 이끌게 되지요. 그가 자신보다 두 살 손아래인 이충무공을 ‘이야(李爺, 이씨 어르신)’이라 부르며 존경하였다는 것은 당대의 여러 기록에도 전하는 바입니다. 이후 전쟁이 끝나자 군공을 인정받아 광동백(廣東伯)으로 봉해졌고, 그 손자의 대에 명이 멸망하자 남경에서 조선으로 망명하여 조부가 공을 세운 강진 고금도에 거하였다고 합니다. 지금도 그 후손인 광동 진씨가 남아 있지요.

이전에 이반 뇌제를 다룬 에피소드에서 지나가듯 언급된 팜플렛은, 원 역사에서 종교개혁을 둘러싼 치열한 대립과 바로 그 종교개혁에 엄청난 파급력을 부여한 인쇄술의 보급이 맞물려 16세기 말부터 크게 유행하였습니다. 흔히 ‘팜플렛 전쟁’이라고도 불리는, 사상 최초의 대규모 여론전이 팜플렛을 매개로 삼아 벌어지게 된 것이지요. 

여기에 휘말려 의도치 않게 엄청난 명성을 얻게 된 인물 중 하나가 바로 요한 파우스트(?~1541) 박사입니다. 연금술 연구에 평생을 바쳤던 그는 생전부터 이런저런 소문에 시달렸는데, 하필 1541년 연금술 연구 중 참혹한 사고 – 시료 폭발로 추정됩니다 – 로 사망하면서 ‘악마와 계약했다가 그 대가를 치루었다’ 하는 소문이 번지게 됩니다. 당대의 팜플렛 유행과, 파우스트의 비극적 사망을 어떻게든 종교적 프로파간다로 삼으려던 이들의 이해가 맞아떨어지면서, 그의 사후 한 세대쯤 지나서는 그의 전기라고 스스로 주장하는 온갖 창작물들이 범람하게 됩니다. 셰익스피어 이전 영국 희곡의 대표주자였던 크리스토프 말로우까지 그를 주제로 한 희곡을 내었지요. 한참 뒤의 사람인 괴테 역시 이러한 작품에서 창작된 이미지를 많이 차용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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