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꺽정은 살아있다-242화 (241/259)

73. 만병지왕 (2)

처음부터 도원수 임꺽정과 그 아래의 조선 및 여진 장졸들은, 무순을 치되 딱 그 성만 무너뜨리고 빠져나올 예정이었다.

이는 꺽정이나 명희 등 어느 한 사람의 발상이 아니요, 봉황성에 마련된 삼국도총부(三國都摠府)의 명에 따른 것이었는데, 애시당초 삼국도총부가 이름이 거창하지 결국 사업당 깊은 곳에서 서로 머리 맞대고 지도 들여다보던 사람들 모임이었으므로 이 또한 딱히 새로운 일은 아니었다.

무순은 허투알라에서 요양 쪽으로 나오는 길목을 틀어막는 요충지. 따라서 그곳의 성을 무너뜨리는 것은 단순히 면전에서 침 뱉는 정도의 모욕을 넘어, 군략(軍略) 짜는 상대의 팔을 꺾어 비트는 효험이 있었다.

“흐흐, 화적 막아보겠다고 세운 담장을 허물어버리면, 짐 싸서 달아나든 이판사판이라며 화적떼 있는 산속으로 달려드든 할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

철퇴하는 꺽정이네 군사를 허겁지겁 따라오는 명군을 멀리서 바라보던 꺽정이가 짓궂게 말했다.

무너진 무순성을 다시 쌓아올리는 것도 물론 가하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도총부 사람들은, 적장 척계광의 사람됨과 재주를 생각했을 때 그가 무너진 무순성을 복구하는 데 인력을 할애하는 대신, 아예 무순성을 지킬 필요가 없도록 그대로 허투알라 쪽으로 밀고 들어올 공산이 더 크다고 보고 있었다.

“그리 말씀하시니, 솔직히 말해 영 하찮게 들리는 걸요.”

천진에서 크게 다친 이래로 흑의군의 검은 옷 벗게 된 양벽을 대신하여 그 자리에 오른 임밤이가 저의 두령을 놀렸다. 요새는 흑의군도 나름 갑옷을 차려입고 다녔지만, 그 위에 옻칠을 하든 물감을 칠하든 하여 그 거무튀튀한 빛깔은 그대로 지키고들 있었는데, 밤이도 마찬가지였다.

“뭐, 일만 명 군사끼리 싸움박질하나 화적떼랑 관군 수십이 무리지어 싸우나 결국 싸움인 것은 매한가지지.”

흑의군의 우두머리까지 올라왔지만 임밤이는 명희도, 멀리 도총부의 이순신도 아니었으므로, 당수의 당당한 주장에 ‘그런가?’하고 혹하고야 말았다.

“놈들이 저렇게 빨리 따라온 걸 보니 원래 무순 쪽에서 뭔가를 꾸미고는 있던 모양인데, 그래본들 저리 허겁지겁 엉망으로 달려오고 있으니 백날 준비했다 한들 무슨 소용이겠냐. 중간에 한 번 거하게 들이칠 수 있게 차비들 하거라.”

밤이가 어색한 군례를 올리고 물러났다.

무거운 화포를 옮기는 이들 사이로 곧 군령이 전해지고, 꺽정이는 안사람에게 뒤를 맡기고서는 이미 산등성이에 오른 여진 마병들 사이로 향했다.

무순 바로 동쪽, 이름도 퍽 성의없게 지은 무순관(撫順關)부터는 죽 산투성이였다.

산천(山川)이라 통칭하는 것이 딱 어울릴 만큼, 굽이굽이 이어지는 산등성이와 그 사이 골짜기를 역시 굽이굽이 흐르는 개울. 

그 좁다란 뱀 모양 길을 따라, 명나라 군사들이 동쪽으로 나아오고 있었다. 무거운 화포를 끌고 물러나는 조선 군사들이 그리 멀리 가지 못하리라는 믿음 하나만 가지고서 달려오고 있는지, 진영은 흐트러지고 마병과 보병, 포병은 서로 멀리 떨어졌다.

“무순관부터는 너희 나라 땅이라 하였지?”

압카이 아파시 구룬의 마병을 이끄는 젊은 장수 우르지가 꺽정이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능숙한 조선말로 답했다.

“예, 도원수 대감. 따로 정계(定界)한 바는 없었으나, 그간 서로 그렇게들 여기며 함부로 범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저기 저놈들이 바로 네놈들 땅에 발 디딘 첫 번째 명나라 놈들 아니겠느냐? 손님을 맞이하러 가자꾸나.”

그 말 들은 우르지 이하 여진 사람들도 좋다고 환호하였다. 이들은 그간 일본 땅에서 작고한 니탕카이 요한과 그의 마병들이 벌인 활약을 듣고, 전공에 목말라 있던 것이다.

그러나 자신 있게 함성 내지르며 비탈길 내달린 꺽정이와 마병들이, 가을걷이철 개상질하는 것마냥 탈탈 털리고서 돌아오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일견 허겁지겁, 눈 뒤집힌 채 산길로 달려오는 듯하였던 명나라 군세는, 실은 날카로운 칼날을 숨기고 있었다.

온갖 괴성을 지르며, 누구는 여진의 십자기를, 누구는 조선의 팔괘태극기 – 십자기와 구분하기 위해 기존의 둑기(<毒+縣>旗)를 간략하게 만든 깃발이라 하였다 –를 휘날리며 산비탈 내려온 동이 마병의 기세는, 생각보다 훨씬 단단한 명의 진영을 뚫지 못하자 그대로 무너지고야 말았다.

“대승을 경축드립니다, 경략 대인!”

“아직 싸움이 끝나지 않았는데 어찌 그런 경솔한 말을 하는가! 제장(諸將)은 모두 스스로 경계해야 할 것이오!”

그간의 차분하고도 정중한 모습 대신 사뭇 냉정하면서도 사나운 모습으로 척계광이 호통을 쳤다.

다른 이들이라면 모를까, 그의 눈에는 이 ‘승리’가 결코 제대로 된 승리가 아님이 명백하였던 것이다.

한 번 돌파가 실패하자, 저들은 곧장 그대로 물러났다. 아마도 임거정일 누군가가 일성호령을 내지르니, 마궁수(궁기병)들이 먼저 말머리를 돌려, 비스듬히 멀어져가며 화살을 퍼부었고, 그 틈을 타고 나머지 마병들도 산 위로 돌아간 것이다.

(나중에 조선말 아는 요동 군관에게 물으니, 그 호령은 ‘야, 텄다, 텄어! 물러나라!’였다고 하였다.)

과연 도적답게, 다른 것은 몰라도 언제 도망쳐야 하는지는 곧잘 직감한 듯하였다. 허나 장수가 아무리 재빠르게 물러나야 함을 깨닫는다 한들, 한 번 돌진하는 군세를 그대로 돌이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 어려운 일을 해냈으니, 이는 임거정의 군재인가, 아니면 그만큼 저들 모두가 정예한 군병인 것인가?

아무튼 한바탕 요란한 싸움을 치루었으나 골짜기 곳곳에 널부러진 적의 시신은 실망스러울 만큼 적었다. 

명나라 군사를 교만케 만들 작정으로 거짓 패배를 하였다기에는, 저들의 당황한 기색이 너무나 진실되어 보였다. 그러나 지금껏 온갖 교활한 수로 천조를 능멸한 임거정이라면 그것마저도 시늉하며 꾸민 것일 수도 있을 터.

“전군에 명한다! 즉시 진형을 정돈하라! 이대로 저들을 쫓을 것이나, 지금까지 허술함을 가장한 것은 폐한다! 산길이 좁으니 다시 장사진(長蛇陣)을 이루되, 언제고 적이 다시금 나타날 수 있으니 반드시 신중을 기하여야 할 것이다!”

가장 선두에서 동이군을 쫓던 삼만 군세에 그대로 명이 전해졌다. 뒤따라 무순관을 지나는 이들에게도 같은 명이 곧 전해질 터였다.

허나 그렇게 열심히 명을 전하고, 좌우에 나타나는 모든 산등성이를 주시하며 동쪽으로 조심스레 행군하였건만, 저들은 그저 후퇴에 후퇴를 거듭할 뿐이었다.

그렇게 혼하(渾河)가 흐르는 골짜기를 따라 동쪽으로 도망치던 동이군은, 마침내 살이호(薩爾滸, 사르후) 산성으로 들어갔다.

살이호 북쪽 철령위 출신으로 일대의 지리에 그나마 밝던 이성량은, 곧 저것이야말로 패착임을 깨달았다.

“저들이 저 성에 의지하는 것은 실로 하책이라 하겠습니다. 저 성은 지키기에는 용이하고 공략하기는 어려우나, 에워싸기에는 쉽기 때문입니다.”

그 말마따나, 살이호는 굽이굽이 흐르는 혼하가 조금은 넓어지고, 그에 맞추어 골짜기 사이도 조금은 벌어져 그나마 벌판이라 할 만한 것이 생기는 곳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는 다시 말해 대군이 에워싸고 포위하기에도 좋다는 뜻이었다. 

“이 총병 그대는 저 산성의 허실을 얼마나 잘 알고 있는가?”

“부친의 대부터 종군한 가병들 중, 야인들을 따라다니며 저 산의 지리를 살핀 자들이 종종 있습니다. 보시다시피 북쪽과 서쪽, 남쪽 삼면은 절벽이고 동쪽만 트여 있는데, 그마저도 산길입니다.”

잘 아는 이야기가 나와 다소 신이 난 이성량이 답변 뒤에 건의하는 말을 덧붙였다.

“만약 우리가 지금부터 동쪽 산길로 군사를 보내, 짐짓 공격하는 시늉을 하며 저들이 감히 나오지 못하게 한다면, 뒤따라오는 군세가 합류할 무렵에는 완전히 임거정과 동이 무리를 저 성 안에 가둘 수 있을 것입니다.”

척계광이 그 말을 듣고 가부를 고민하는 사이, 제멋대로 저들 동이가 독 안에 든 쥐 꼴이 났다 단정한 다른 장수들이 하나같이 떠들어대었다. 

“하하! 임거정, 임거정 하더니 척 대인 앞에서는 그저 초라한 도적과 다름없군요!” 

“일패도지하고는 저렇게 궁벽한 산성에 틀어박히고야 말았으니, 아주 통쾌합니다!”

척계광이 앞서 경솔한 말을 하지 말라 한 것은 다들 기억하고 있었으나, 눈앞에 크나큰 승첩(勝捷)이 어른거리니 흥분을 금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경략 대인, 이 총병이 제안한 바대로 명을 내려주십시오! 소장에게 명해주신다면, 즉시 동쪽 산길로 나아가 쥐 한 마리 도망치지 못하도록 틀어막겠습니다!”

“대인, 낭중지추의 심정으로 말씀 올리건대, 소장이야말로...”

다들 앞다투어 나설 때였다.

땅이 울리더니, 요란한 포성이 한 발 늦게 귀에 닿았다.

방금 전까지 떠들던 자들은, 그제야 저 살이호 위에서 쏜 포가 이곳까지 닿았다는 것을 깨닫고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아니, 그렇게 줄행랑을 치면서도 화포는 모두 챙겨 갔다는 말인가?”

누군가는 이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에 고개를 갸우뚱하였다. 그들의 상식으로는, 저 오랑캐들이 저런 초라한 산성에까지 화포를 완비하였을 리는 없었고, 애초에 무순성에 화포를 쏜 것도 저들이 지닌 모든 총통을 긁어모은 것일 수밖에 없던 것이다.

그나마 정신을 빠르게 차린 자는, 온몸으로 도망칠 준비를 빠르게 마치고는 간곡히 척계광에게 매달렸다.

“그런 것을 논할 때가 아니오! 대인, 경략 대인! 얼른 몸을 피하셔야 합니다!”

그 말 마치기 무섭게 바깥에서 아우성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개는 날아든 포환이나 그 파편에 맞은 자들이 지르는 비명이었으나, 개중에는 저들 사이에 날아든 수상한 철환의 정체를 뒤늦게 깨달은 군관들의 외침도 있었다.

“이건 비격진천뢰라는 것이다! 모두 피해...”

그러나 그 외침은 폭음에 묻혀버렸다.

“으으, 동이들이 실로 매섭게 발악하는구나! 대인, 즉시 군령을!”

벌벌 떨면서도 애써 태연한 척하는 장수들이었다.

“모두 진중함을 되찾으시오! 그러고도 천병을 이끄는 장수라 할 수 있는가!”

그러나 그렇게 외치면서도, 척계광 머릿속에서는 빠르게 계산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무순성을 무너뜨리는 데 썼던 저들의 매서운 화포. 그것이 필시 저 살이호 성 위에 올라가 있는 것일 테다.

혁도아랍(허투알라)쯤 되는 거점이라면 그 나름대로 방비를 갖추어 두었겠지만, 지금 척계광 그가 이끄는 천병을 막기에는 부족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화포를 혁도아랍까지 보내 방비에 보태는 대신 저 성 위에 올렸다는 것은, 둘 중 하나. 정말로 경황 없이 도망치다 보니 제대로 판단할 여유가 없었거나, 아니면 처음부터 저 성에서 저들 천병을 막을 심산이었거나.

계산이 하나씩 끝나가며, 화공이 정교하게 붓질하듯 각각의 셈이 합쳐져 거대한 그림을 그렸다.

“화포가 닿지 않는 곳까지 군을 물릴 것이오.”

좌중은 무작정 안도하는 이들과, 그 다음 나올 계책을 기대하는 이들이 확연히 갈렸다. 척계광은 전자와 후자를 나누어 확실하게 기억해두었다. (다행히 이성량은 후자에 들었다.)

“저 살이호의 절벽은 실로 튼튼한 성벽이 되기도 하지만, 안에 든 이들이 밖으로 나가는 것도 막기 마련이오. 화포도 마찬가지. 만병지왕이라 할 만한 위력을 지니고 있지만, 병력을 움직일 때는 거추장스러운 짐이 될 수밖에 없소.

이 총병, 동쪽 산길은 몇 갈래나 되오?”

“산이 제법 넓게 펼쳐져 있어 확언하기는 어렵습니다.”

“개중 저들이 방금 쏜 것과 같은 화포를 옮길 수 있는 길은?”

“그것은 단 한 줄기뿐이라 자신 있게 답할 수 있겠습니다.”

“잘 되었군. 제장은 들으시오!”

적에게는 백리안이라는 기물이 있다. 가뜩이나 매서운 화포를, 그 기물로써 더욱 정확하게 쏜다고 노부나가는 말했다.

그렇다면 반드시 이쪽의 움직임도 지켜볼 수 있을 터.

“이를 이용하여, 짐짓 군세를 물리는 동시에 혁도아랍으로 우회하는 모습을 보일 것이오.

적장 니탕개가 명을 다하였고, 여진 야인들 안에서도 내분이 벌어지고 있을 것인즉, 아개위 통령 각창안(교창아)의 가장(家莊) 혁도아랍을 취하는 것은 여진 무리를 흩어버리는 묘수가 되리라 이미 그대들에게 설명한 바 있소. 그러므로 저들 또한 그 모습을 보면 부득불 출성(出城)할 수밖에 없을 것이오.

그러나 이 총병이 답한 것처럼, 무거운 화포를 옮길 수 있는 길은 하나뿐. 그러므로 그 주변에 매복하여, 오래 공성에 매달릴 것도 없이 단번 싸움으로 임거정을 완전히 파할 것이오.”

모두가 탄복하며, 언제 조선의 화포에 벌벌 떨었냐는 듯 일제히 읍하며 고개를 숙였다. 

적장은 조선의 여느 장수도, 여진의 오랑캐 추장도 아니요, 다름아닌 임거정이었다.

갑자기 무거워진 세금으로 인해 이미 아슬아슬한 정도까지 올라온 불만을 다스리고자, 내각수보 장거정은 모든 잘못을 동이, 그것도 황상이 친히 조유(詔諭)하기를 천하에 다시없을 악적이라 한 임거정 한 사람에게 돌리고 있었다.

그런 임거정을 저들이 붙잡는다면, 이 얼마나 큰 공이 될 것인가?

“이야, 제법이네. 제법이야.”

사르후 성 위에서 명군의 움직임을 살피던 꺽정이가 말했다.

“이순신 그 녀석이 저런 움직임은 어떤 뜻이라고 적어두었소?”

그러면서 옆의 명희에게 물었다.

명희가 뒤적이고 있는 것은, 바로 그들이 출병할 때 도총부의 이순신이 건네준 종이첩이었다.

적의 동향을 보고 그 의도를 파악할 때 참고하라고 적어준 것이었는데, 본인의 말에 따르면 적장이 자신만큼 뛰어나다고 가정하기만 하면 되었기에 오히려 적어내려가기가 여간 쉬운 게 아니었다고 하였다.

“짐짓 물러나는 것은 곧 매복의 징표라고 되어 있네요.”

흑의영이든, 사업당이든, 사람이 모여 무언가 힘을 합하는 모임을 운영하는 데는 재주가 있을지언정 딱히 군략에는 밝지 않은 명희였다.

그러나 그런 명희가 생각하기에도, 만약 저들이 매복을 한다면 동쪽의 산길치곤 제법 넓직한 그 길 – 애초에 그쪽을 통해 화포를 산 위로 올렸던 것이다 –을 노릴 것임은 쉽사리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또 없소?”

“저들이 우회하는 시늉을 한다면, 그 우회하는 시늉을 하는 방향이야말로 저들이 진실로 향하고자 하는 쪽이라고도 되어 있네요.”

“허투알라라. 하기야, 허투알라가 주변에선 꽤 큰 읍이라고는 하더군.”

그런데 꺽정이 말을 들은 명희의 낯빛이 심상치 않았다.

“과연 그것 때문만일까요?”

“그러면?”

“잠깐만요. 잠깐만요... 아, 어쩌면? 그렇지!”

“아니, 닮을 게 따로 있지 왜 그런 것만 임자 오라버니를 닮는 게요?”

낭군이 뭐라 하건 그 자리에서 우르지를 비롯한 여진 사람들 여럿을 불러 이것저것 물어보던 명희는 한참 뒤에야 답했다.

“만약에 말이에요...”

그들은 알지만 저쪽 명군은 모르는 것. 저쪽 명군이 스스로 안다고 여기지만 실제로는 오히려 알지 못하는 것.

그것들을 추려서 짐작해보니, 무언가 떠오르는 바가 있던 것이다.

그날 밤, 사르후 성에서 야음을 틈타 허투알라와 봉황성으로 달려나가는 전령들이 있었다.

그리고 전령들이 떠난 뒤에는 명군이 지키고 있는 산길에서 한참 동북쪽, 외진 길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한바탕 일어났다.

그리하여 이튿날 날이 밝자, 기껏 이곳 산성까지 임거정을 몰아붙인 척계광은 다시 한 번 자신이 허탕을 쳤음을 깨닫게 되었다. 설마 화포를 버리고 도망칠까 했건만, 정말로 일말의 주저도 없이 모조리 내버리고 달아나버린 것이다.

한편 봉황성의 삼군도총부에서는, 여전히 흑의군 가운데 가장 빠른 임밤이 말 달려 전한 급보를 받아든 이순신이 임밤만큼이나 빠르게 도총부의 모든 사람을 불러모았다.

“임 당수, 아차, 도원수로부터 급한 전갈이 닿았습니다. 명군이 예상보다도 훨씬 빠르게 무순관을 넘어, 동쪽으로 신속하게 진군하고 있다 합니다.”

때마침 전황을 논하기 위해 기린울라에서 찾아왔던 아이신교로 교창아까지 찾아와주십사 청한 이순신이 곧장 본론을 꺼냈다.

“아시다시피 도원수 휘하의 군세는 적을 동쪽으로 끌어들이는 데 그 뜻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들의 기세가 맹렬하고, 적장은 병법에 밝은지라, 부득불 당초 예상했던 것보다도 더 멀리 물러날 수밖에 없다고 하더군요.”

도총부에서 나오는 모든 계책은 삼국의 수뇌부, 즉 한양의 맹에 참여하며 지난해 북경에 보내는 신문(申文)에도 함께 서명하였던 이들에게 공유되고 있었다.

그러므로 교창아도 능히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청하기를, 명군을 상대하기 위해 부득불 우리 쪽의 성 하나를 내주어야 할 듯하니 허락을 구한다 하였습니다.”

내줄 성이라 해보아야, 두 해 전 사르후 산에 쌓은 성 정도를 뜻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사르후 산은 명군을 막는 데는 좋은 길목에 있었지만, 그 점을 제하면 고작해야 말을 풀어 키우는 목장이 있을 뿐이였다. 그러므로 짐짓 대범하게 답할 수 있었다.

“무릇 싸움이란 손해 없이 이기기 어려운 법. 특히나 적장 척계광은 자못 재주 있는 자로 이름이 높으니, 고육지계를 베풀어야 할 때도 있는 것이오.”

“통령 합하(閤下)의 말씀이 실로 옳습니다. 자두나무로 하여금 복숭아나무를 대신하여 시들도록 하는 계책(李樹代桃僵)은 엄연히 삼십육계 중에도 드는 것이지요.

더구나 말씀하신 것처럼 저들의 병세(兵勢)가 날카로워 우리 쪽이 한 번 당할 정도였다고 하였은즉, 그 예봉을 꺾는 것이 실로 마땅하다 하겠습니다.”

이순신이 찬동하며 감사를 표하니, 권율 또한 맞장구를 쳤다.

“합하께서 그리 흔쾌히 받아들여주시니 저희 역시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결코 가벼운 결단이 아니었을 텐데요.”

그제야 교창아는 자신이 탁상 위에 펼쳐진 지도를 보지도 않고 다소 섣불리 답했음을 새삼스레 깨우쳤다.

혹시나 싶어, 이번 계책으로 말미암아 무너지게 될 성이 어느 쪽인가 살피고자 고개를 뻗었다.

그런데 이제 보니, 사르후도, 그 인근의 자이판도 아니요, 떡하니 허투알라 위에 깃발이 꽂혀 있는 것 아닌가. 

보자마자 눈물이 쏙 나왔다.

“그, 허투알라를 내주겠다는 것이라면...”

아무리 지금은 기린울라로 거점을 옮기다시피 했다지만, 허투알라 또한 자신이 입지를 잡는 것부터 시작해 처음부터 쌓아올린 성이었다. 아직도 숙수후 부의 기반은 적잖이 허투알라에 남아 있었는데... 

그러나 망설임의 싹이 고개를 내밀자마자, 눈치없는 말로 가차없이 그 싹을 잘라버리는 이순신이었다.

“이미 도원수께서 전장의 장수로서 내린 판단이라면서 이미 성에 연통을 넣으셨다고 합니다. 책임은 자신이 지겠다고 단언하였으니, 통령 합하께서는 염려치 마시지요.”

‘어차피 이제 와서 임꺽정을 말릴 방도도 없지 않으냐’ 하는 뒷말은 눈빛으로 전하였다. 봉황성과 허투알라 사이의 거리를 생각해보면, 보나마나 급보를 봉황성으로 날리는 것과 동시에 허투알라에도 성을 비우고 백성을 대피시키라는 말을 전하였을 것이었다.

즉 이미 며칠 전에 허투알라는 텅 빈 성으로 화했을 것이요, 임꺽정은 도총부에 승낙 구하는 것이 일 벌인 뒤에 허락받기를 청하는 꼴임을 알면서도 딴에 구색을 갖추겠다며 이렇게 도총부에 급보를 보냈을 터였다.

허투알라까지 내주면서 저들을 끌어들이는 것에 어떤 이점이 있는지는, 교창아도 알아볼 수 있었다. 허나 아무리 그래도, 아까운 마음이 사무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망할 놈의 도둑놈 같으니라고...”

그 사무치는 마음으로 말미암아 저의 속내가 입 밖으로 툭 튀어나왔음을 뒤늦게 깨달은 교창아가 급히 손사래를 쳤다.

“그, 이 사람의 진솔한 마음이야 그렇지만, 저들이 작정하고 밀고 들어오는 기세를 볼 때 오히려 허투알라를 내주는 것이 상책이 될 수 있음은 능히 알 수 있소이다.”

다행히 권율은 사람 좋게 웃고 있었다.

“합하께서는 공연한 걱정을 거두셔도 좋습니다. 저희 또한 똑같은 생각이니까요.”

“앞의 것과 뒤의 것 중 어떤 생각이 똑같다는 말씀이시오?”

“후자지요. 간혹 앞의 생각에도 동의할 만한 일이 생기기는 합니다만.”

도총부 안의 모든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무렵 깔끔하게 소제(掃除)된 허투알라, 즉 혁도아랍 성에 닿은 척계광과 이성량은 허탈한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군.”

공성계(空城計)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이곳 혁도아랍을 이렇게 허무하게 내주는 것은, 『삼국지연의』에 비유하면 촉이 검각(劍閣)을 훤히 열어준 꼴 아닌가.

성 안의 사람과 가축, 곡량은 말끔히 사라져 있었지만, 성 자체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무순에서 군사가 계속 넘어오고, 치중이 함께 들어오게 된다면, 이곳 혁도아랍은 나머지 여진을 평정하고 압록강 이남까지 공략하는 데 있어 둘도 없는 거점이 될 터.

아니, 애초에 이 소식이, 그러니까 임거정이 패퇴하고 혁도아랍이 그대로 넘어갔다는 소문이 퍼진다면 동요하지 않을 야인이 없을 터였다.

“함정을 의심하십니까?”

“어찌 의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함정이라 할지라도 도저히 마다할 수 없는 함정이니 더욱 머리가 아플 수밖에.”

대체 무엇을 노리는 것인가? 뼈를 내주고 살을 취하는 것이라면 모를까, 척계광이 그에게 가용한 모든 적정(敵情)을 바탕으로 판단하기로는 혁도아랍을 그대로 내주는 것은 거의 한쪽 팔을 내주는 것과 다름없었다.

“장수로서 이러한 말은 가볍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을 알지만... 어쩌면 정말로 적이 우리 생각보다 약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천병의 위엄에 이미 흔들릴 대로 흔들린 것은 아닐지요?”

살이호에서 노획한 적의 화포는, 오랑캐의 기물이라고 무시하기에는 너무나 정교하였다. 과연 저만한 화포라면 능히 무순성을 반나절만에 허물어 무너뜨릴 수도 있었겠구나, 자연스레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중원에도 드문 그런 화포를, 아무리 어떤 계책을 위함이라지만 그토록 쉽게 버리고 갈 수 있단 말인가? 만약 그들이 살이호 성 안에 틀어박혀, 화포에 의지하며 버텼더라면 천하의 척계광이 이끄는 명군조차 어려운 공성전을 각오해야 했을 터였다.

“자네의 말이 옳으이. 경계하는 마음을 내려놓을 수는 없겠지만, 실로 열성조와 사직의 가호가 있어 이런 기회를 얻게 된 것이라면 이대로 놓쳐서도 아니 되겠지.”

불길한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척계광이 답했다.

그리고 충실한 조정의 장수답게, 이 모든 일에 대하여 상세히 적어 표문을 올렸다.

황상께서 크게 기뻐하시며, 자신과 이성량 두 사람에게 표창하는 뜻으로 장수의 위엄을 뜻하는 여덟 기물을 내리면서 장차 더 큰 승전을 기대하겠노라 말씀하셨다는 것을 들었을 때, 그 불길함은 그대로 되돌아왔다.

천하의 악적 임거정을 물리치고 패악한 여진 야인을 제압하여 얻은 혁도아랍. 그리고 그에 대해 황상의 포장까지 받았으니, 혁도아랍에서 서쪽 무순관으로 물러나는 길은 뚫려 있으되 막힌 것과 다름없게 되어버렸던 것이다. 

--- *** ---

무순에서 허투알라로 향하는 길목에 있는 사르후 산은 원 역사에서도 중요한 요충지로 인식되었습니다. 지금은 선양 일대 치수를 위한 저수지가 만들어져 그 모습을 제대로 볼 수는 없으나, 기록에 따르면 혼하(渾河, 훈허 강) 골짜기를 감제할 수 있으면서도 절벽이 적절히 있어 방어가 쉬웠다고 전해집니다. 누르하치는 명에 사실상 선전포고를 하기 전부터 이곳에 성을 쌓고 목장을 조성하는 등, 사르후를 對明 군사거점으로 만들었지요. 1619년 사르후 전투에서 누르하치와 후금군은 이런 요새들을 거점으로 삼아 사로병진(四路竝進) 계책에 따라 동진하는 조명연합군을 각개격파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당시 요동경략으로 조명연합군 총사령관(사로총지휘)을 맡았던 양호(楊鎬)가 사로병진을 채택한 것은, 질적 열세를 수적 우세로 만회하고자 대군을 동원하였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간주되곤 합니다. 즉 남만주 산악지대 한가운데 있는 허투알라를 좁은 산길을 통과해 공격하기 위해서는 병력을 나눌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는 누르하치의 후금군이 그런 조명연합군의 기동을 그저 좌시할 것이라는 암묵적 가정 하에 내려진 오판으로, 가뜩이나 그 질이 열악한 명군 – 병사들뿐 아니라 장수들의 질 또한 몇몇 예외를 제외하면 그리 높지 못했습니다 – 이 수적 우세마저 상실한 채 후금군에 각개격파당하는 최악의 결과로 이어집니다.

개중에는 개원총병 마림(馬林)처럼, 산악지형을 역이용해 참호를 파고 화기로 최대한 후금군을 막아내려 노력하는 등 최선을 다한 인물도 있었으나, 많은 경우 명군은 그저 후금 기병의 기동력과 절묘한 기마전술에 농락당하기만 하였습니다. 정작 사르후 성에서는 싸움이 벌어지지 않았지만, 사르후와 자이판 산 일대에서 이러한 기동전이 벌어졌기에 사르후 전투라는 이름이 후대에 전해지게 되었지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