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꺽정은 살아있다-255화 (254/259)

76. 백년하청 (2)

오다 노부나가가 혈혈단신으로 산동 제남 향해 떠나기 며칠 전의 일이었다.

자금성의 불도 꺼진 지 오래였다. 세간에서 다들 말하기를 자금성 안의 전각은 구천 하고도 구백구십구 칸이라 하니, 개중 고작 일이천쯤 불탄다 한들 어찌 내각의 남은 사람들이 모일 곳이 없겠냐만, 그럼에도 노부나가는 한사코 궁 밖에서 만나기를 고집하였다.

“그래서 고르고 고른 곳이 이곳 성문 위요?”

산해관과 천진에서 철군하는 군사를 감독하던 척계광이 농담 삼아 따졌다. 그러나 입꼬리는 도저히 치솟지 못하고 이마와 미간에 잡힌 주름은 펴질 줄 몰랐다.

“그러면 그대 안사람 있는 사제(私第, 사저)에서 만나는 게 좋았겠소?”

노부나가 또한 맥없는 농담으로 응수했는데, 피차 웃음이 나오지 않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일부러 패전을 가장했든, 아무리 끊어 없애려 해도 도저히 그 뿌리를 뽑아낼 수 없는 백련교 첩자 때문에 패주했든, 혁도아랍에서 철수한 이래 척계광 휘하 명군의 전적은 패배뿐이었다.

그렇게 패하고, 몰리고, 쫓기고, 굶주린 끝에 마침내 전란은 끝났으나, 들려오는 소식은 북경이 불타고 오랑캐가 전란에서 이겼으며, 그들의 고향에는 도적이 들끓는다는 이야기뿐.

그러므로 성 안에 들지 못하고 바깥에 진영을 차려 유숙하는 명나라 군사들의 기세는 음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 전란이 시작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비단 이곳 중원과 요동뿐 아니라 한참 전 일본에서부터 모든 일들을 하나씩 복기해보고 있었소. 시끄러운 잡무는 조정길과 풍보 두 사람에게 넘기고, 아무도 건드리지 않는 이곳으로 올라왔소이다.”

“복기라. 어찌하면 저들을 제압할 수 있었을지를 고민하고 있는 게요?”

“그보다는, 어찌하면 오늘을 조금은 다르게 맞이할 수 있었을지를 생각하고 있다 하는 게 맞겠소.”

“둘이 같은 뜻 아닌가 싶소만.”

노부나가가, 더 말해보라는 뜻으로 눈썹을 치켜세웠다.

“이 사람은 무관이오. 무관은 오로지 지키고 이기는 일을 염두에 둘 뿐, 나라의 정사에 함부로 마음을 두어서는 안 되는 법. 

그러나 감히 말하건대, 장태악이 아예 틀렸다고는 못 하겠소. 중화가 참된 중화로서 온 세상에서 가장 앞서지 못하게 된 이상, 언젠가 오랑캐들에게 침노를 당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지. 요동과 요서에서 적과 맞서 싸우며 이를 절감하였소.”

철군하기 전날, 척계광은 산해관 앞까지 그들을 몰아붙인 장수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전하고자 직접 삼국 군대의 진영으로 찾아갔다.

일본에서 끌어오는 군량도 그 무렵에는 거의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고, 명측에 비할 바는 아니었으나 삼국 역시 인마(人馬)가 공히 지친 기색 역력하였다.

그러나 단 하나, 그들의 화포만은 아직도 정예하였다. 일본 장수 임서수길(린죠 히데요시)이 사뭇 자랑스러운 기색으로, 그 화포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자랑하던 것이 아직도 귓가에 선했다.

중원의 정사가 혼미한 동안, 조선은 변법을 통해 국력을 키우고 군기를 날카롭게 갈고 닦았다. 만약 장거정 대신 다른 이가, 예컨대 엄숭 같은 자가 계속 조정을 장악하고 있었더라면, 그리고 조선왕이 전해지는 말처럼 유약한 성정이 아니라 마치 홍무 연간에 나라를 세운 조선왕 단(이성계)과 같은 성품이었다면, 전란은 일어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 그리고 만약 장거정 그이가 삼 년 전 이곳 북경에서 그 광복삼장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할지라도 결국 전쟁은 벌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이 사람은 보오.

여진과 일본을 두 날개로 삼아 조선이 날아오르게 된다면 결국 하늘을 향할 수밖에 없고, 그 하늘은 이미 천조 대명이 차지하고 있었으니까.”

이 자리에 장거정이 있었더라면, 고개를 끄덕였을 이야기였다. 독선에 가득한 내각수보 장거정이 아니라, 야심은 가득하나 물정 모르던 한림원 편수 장거정이었다 할지라도, 그 총명함으로써 정세를 헤아렸다면 척계광과 같은 결론에 도달했을 테다.

“어찌 그리 장담하시오?”

“황하 강물이 늘 누렇듯, 우임금이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준 이래로 중원의 형세는 늘 그래왔소.

천명을 받들고, 이어가고, 성세(盛世)를 누린 끝에 쇠락하고. 그 틈에 오랑캐가 쳐들어오고, 오랑캐가 천명을 받들었다 참칭하고, 그 전에 천명을 받든 이들의 명운을 그대로 답습하고. 그러니 지금의 조선왕과 임거정이 아니었다면, 그다음 대에 반드시 중원을 노리려는 자가 나왔을 것이라 할 수 있지 않겠소?”

“하, 정해져 있다. 정해져 있다. 죄다 그 소리뿐이로군.”

노부나가가 실소를 흘렸다. 허나 그 실소의 원인을 알지 못하는 척계광은 저의 진지한 속내를 마저 털어놓았다.

“상서 대인께서 광녕문 위에 계신다 하는 소리를 듣자마자 그대를 만나러 이리 올라온 것도 그 때문이었소. 이대로 우리 대명이 중흥의 기회를 잃고 꺾이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지 않겠소?

아마 강남에서 지금 북상하고 있는 해 대인과 그 오승은이라는 서생 또한 같은 생각일 것이오. 사세가 부득이하여 조선과 일본의 도움을 받기는 했지만, 이로써 동이 또한 큰 이익을 얻었으니, 그 이상으로 저들이 무언가를 요구한다면 결코 받아들이려 하지 않을 터.”

노부나가는 척계광의 사람됨을 잘 알고 있었다. 만약 저 대신 조정길이 이 자리에 있었더라면, 장거정의 빈자리를 노리고 자신이 권신 노릇을 하려고 주제 넘게 관여한다 의심했겠지만, 아마 척계광은 자신이 지금 이런 말을 하는 것이 대명에 대한 우국의 마음 외 다른 것으로 해석될 공산이 있다는 것조차 짐작하지 못하고 있을 테다.

“그 말대로라면, 우리는 결국 또 다음 전란을 준비해야 하겠군. 그렇지 않소?”

척계광이 고개를 끄덕였다.

통일된 중원은 주변의 모든 나라에 위협이 되고, 반대로 흥성한 중원 주변의 나라는 다시 중원에게 위협이 되었으니, 척계광 말마따나 이는 황하의 물이 흐른 이래 변함없는 이치였던 것이다.

“장거정 그이는 비록 사람됨에 흠결도 많았으나, 적어도 인재를 알아보는 눈은 그 전의 사람들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고 생각하오. 그런 이가 그대에게 권병(權柄)을 넘겨주었으니, 이 사람은 그대가 어떻게 뜻을 세우든 따를 것이외다.

다만 후일을 걱정하는 마음으로 잠시나마, 상서 대인이 아니라 함께 전장을 누빈 직전신장 공을 대하는 뜻으로 주제 넘는 말을 올렸을 뿐이었소.”

그러고는 정말로 할 말 다 했다는 듯, 고개 꾸벅하고 읍 올리며 문루를 내려가는 척계광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바쁘기는 할 것이다. 지금 있는 군사들 중, 쪼그라든 재정으로 감당할 수 있는 정병만을 추려내고, 개중에서 다시 북경을 지킬 이들과 각지에서 일어난 난리를 진압하러 갈 이들을 뽑고, 요동에서 벌어진 싸움으로 그 재주를 증명한 장수들과 그 못남만을 증명한 장수들을 분간하고...

“차라리 내가 저 아래에 있다면 고민할 일은 없으련만.”

노부나가가 혼잣말로 한탄하였다. 

그리고는, 제 입에서 무슨 말이 나왔는지를 깨닫고 새삼스레 화들짝 놀랐다. 

“하, 오다 노부나가도 성정이 많이 죽었구나. 아직 나이 마흔도 되지 않은 주제에 그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다니.”

혼잣말로 자조하였건만, 그 자조에 변명하듯 다른 생각이 연이어 떠올랐다.

‘이만큼 꺾였으면 족하지 않은가? 또한 이만큼 얻었으면 족하지 않은가? 오다 노부나가라는 자의 도량이 이 정도다.’

일국일성(一國一城)이 무사들 대부분의 꿈인 나라에서 태어나, 오와리 전체를 거느리고 나아가 일본의 절반을 거느렸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중원으로 건너와, 예순여섯 주 좁은 천하가 아닌, 진정한 천하의 명운을 두고 벌이는 전란에서 활약하였다.

그리고 그토록 싸운 끝에, 마침내 저의 오와리 영지와는 비할 바 되지 않는 광활한 땅, 강남에 못 미칠 뿐 일본이나 조선과는 비교하기조차 민망한 화북 땅을 얻게 되었다. 그가 처신하기에 따라 아직 조정의 명이 닿지 못하는 나머지 땅까지 모두 얻어낸다면, 그가 이곳 북경에 세운 막부는 지금껏 그 어떤 히노모토 사람도 이루지 못한 위업으로 인구에 회자될 테다.

자신이 원하는 이상, 가장 뛰어난 사람에 의해 열리는 다나 나은 세상을 일본 땅에 펼치겠노라며 천하포무의 뜻을 세웠다. 이를 위해 오와리 작은 땅에 안주하지 않고, 늘 새로운 것을 찾았다. 

바닷길이 열리자 가장 먼저 조선으로 향했고, 철포라는 신무기를 경계하거나 무시하는 대신 바로 저의 힘으로 삼았다. 어느 땅에 발을 디디든 그 땅의 말을 익혔고, 어떤 새로운 말을 들어도 무시하는 대신 그 뜻을 머릿속에서 되새겼다.

그러나 셋츠 국 아마가사키에서 그 뜻은 꺾였고, 그에 앞서 사카이에서도, 또 그 뒤 한양에서도 그러하였다. 많은 것을 이루었으나 정작 노부나가 자신이 처음부터 뜻한 대로 이룩한 바는 없었다. 그저 남을 이용하면서 절로 그가 세워놓은 길에 접어들었고, 그 종착지에 닿았을 뿐.

장거정 또한 그것을 알았기에, 풍보나 척계광이 아닌 자신에게 그 거짓 정변 이끄는 일을 제의한 것이리라.

오랑캐에게 죽고 자금성과 함께 불탐으로써, 장거정은 자신이 세운 대일통을 후대에 길이 남기기를 바랐다. 중화가 불행하면 불행해질수록 자신의 이름과 뜻이 남아 후인(後人)을 끝없이 고취하기를 바랐다.

이대로라면. 그 뜻이 이루어질 것이다. 한없이 오만하고 한없이 조급하며, 오로지 자신만이 이 중화를 중화답게 만들 수 있다 자부하던 장거정은, 그 뜻에 재주가 약간 못 미쳤을 뿐 오다 노부나가가 본 이 중 가장 지재가 빼어난 사람이었으므로.

남경 조정과 힘을 합해, 너희 조선도 사정 어렵기는 매한가지 아니냐. 우리가 졌으니 그것으로 족하다. 그렇게 나선다면 천하의 임꺽정과 이지함 또한 무어라 더 말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라면 조선으로 돌아간 뒤, 어떻게 절묘한 언변으로 모두를 설득하든, 아니면 임꺽정의 그 무식한 용력으로 머리통 여럿을 깨뜨리든 하여 불만을 억누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이룩되는 화평은 고식(姑息)에 불과할 뿐. 중원의 사람들이 다시금 대양으로 나가기 시작한다면, 중원 사람들이 사업당 분표를 사들이는 대신 직접 상행을 차리려 한다면, 동래와 인천, 재령에서 쏟아지는 기물 대신 저들의 공장(工匠)이 만들어낸 물건을 사들인다면, 결국 분란은 다시 벌어질 테다.

반대로 저들의 요구를 모두 받아들여 간과 쓸개 모두 내줄 것처럼 군다면, 이번에는 원한이 조선이 아닌 중화 쪽에 더 강하게 서릴 뿐 앞날은 똑같았다.

“언제부턴가 남이 만들어준 길을 따라 이곳까지 왔다. 이제 내 대신 길을 터주고 안내해줄 사람도 더는 없다. 그렇다면 이제 어떤 길을 택해야 하는가. 이대로 내 눈앞의 길을 끝까지 마저 가는 수밖에 없는가.”

손에 쥘부채라도 있다면 그 옛날 오케하자마에서 이마가와 군과 맞서 싸우기 전 추었던 춤을 추며 노래라도 부르련만, 어느새 겨울을 연상케 하는 바람은 매섭기만 하고, 무슨 노래를 어떤 말로 부르든 알아줄 사람은 없었다.

그의 등 뒤로 해는 저물고, 그림자 길어지는 만큼 수심도 깊어졌다.

“해 뜨는 나라에서 해 지는 곳으로 왔구나. 천하를 노려 평생 전장을 누볐으나 어디에도 내 천하는 없구나.”

저더러 별 볼 일 없는 놈이라며, 저보다도 더 별 볼 일 없게 생긴 그 면상으로 오와리의 제 거성 앞에 나타나 고래고래 소리치던 린죠 히데요시가 떠올랐다. 

저의 포부 당당히 드러내자 역시 당당한 폭력으로 대꾸를 갈음하던 임꺽정도 떠올랐다.

어느새 곡조가 담긴 한탄과 절도가 생긴 몸놀림 사이로, 저녁을 알리는 냉풍이 불었다.

저도 모르게 바람 따라 등 돌려 석양을 바라보니, 방향만 다를 뿐 똑같이 밝은, 아직 저는 지지 않았으며 내일 다시 떠오르리라 약조하는 듯한 태양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두견새가 울지 않으면 새로 찾으면 그만. 천하가 내 것이 아니라면 새 천하를 열면 그만.”

“... 그래서, 나는 장거정 그 작자 뜻을 이뤄주기로 했소. 대일통 말이오.”

“돌고 돌아 내린 결론이 어째서 그 따위냐.”

노부나가가 그간 얼마나 고뇌를 했든 알 바 아니었던 꺽정이가 딴지를 걸었으나, 북경을 떠날 때와 달리 그 옛날 일본을 누비던 시절의 낯빛을 되찾은 노부나가는 짓궂은 농담으로써 받아넘겼다.

“죽은 사람 마지막 소원은 들어줘야 원혼이 성불도 하고, 나중에 요괴가 되지도 않는 법이라고 내가 만나본 승려들은 말합디다. 

뭐, 지금껏 나한테 당한 일향종 승려들 중에 요괴나 귀신이 나왔다는 말은 못 들어봤으니 딱히 믿음직스럽지는 않지만, 암만 그래도 북경에 장거정 귀신이 나오면 좀 그렇지 않겠소?”

“고작 농언(弄言)을 위해 오지는 않았을 터. 상세히 말씀해 보시오. 대일통을 이룬다는 것이 무슨 뜻이오?”

이지함이 사뭇 진지하게 물었다.

“간단하오. 모든 나라가 다 천조 대명에 속하는 것이지. 조선도, 일본도, 여진도, 남경 조정도, 내가 이끌 북경 조정도, 또 저들이 원한다면 사천 등지에서 들고 일어난 반군 조무래기들도.”

무슨 미친 소리냐며 꺽정이가 끼어들기도 전, 노부나가가 마저 말을 이었다.

“의권의 이론에 따르면 모든 나라는 동등하지 않소? 그 군주 또한 많든 적든 국인(國人)의 뜻에 따라 세워졌으면 매한가지로 존귀하고. 

그러니 황제를 모시고 또 천조를 섬기되, 따로 칭신(稱臣)하지는 않는 것이오.”

“천조를 섬기되 칭신하지는 않는다니, 그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냐.”

“끝까지 다 들어보시오. 대명은 대명으로 남되, 그 대명의 조정은 이제 나라 하나의 조정이 아니라 천하 전체의 조정이 되는 것이오. 애시당초 천자국이라는 게 온 천하를 아우른다고 자처하곤 했으니, 이제야말로, 그 뭐냐, 이름을 바르게(正名) 하는 셈이지.

남경 조정? 그들은 강남을 다스리라 하면 그만이오. 어차피 그들도 나와 요동경략의 수십만 대군을 말 한 마디로 모조리 복속시킬 수 있으리라 여기지는 않았을 테니. 

양광이나 사천의 도적들이 스스로 임금 되기를 원한다면 그 또한 상관 없소. 그들이 소위 개명된 법도를 받들고, 우리 천조를 벗어나지 않으며, 또 그 땅의 사민(士民)들로부터 새로 조정 차리기를 바란다는 동의를 얻는다면 말이오. 물론 우리 북경 조정도 천하 정세가 안정되는 즉시 그리할 것이고.

그리고 천조는 그런 조정들을 모두 한데 모아 새로 세워질 것이오.” 

물론 그리하려면 천자와 제후 사이의 모든 예법을 처음부터 다시 써야 할 것이다. 사소하게는 그들을 가리키는 말부터, 크게는 수천 년을 이어져온 책봉과 조공의 질서까지.

쳐낼 것을 쳐내고, 남길 것은 고치다 보면, 나라들 위에 존재하는 또 하나의 나라(上國)라는 것 하나를 제하면 처음 천조로서의 모습은 거의 남지 않을 것이다.

“천조의 권세는 오로지 그 아래 모인 나라들로부터 발할 것이고. 천자의 위엄은 허울만 남겠지만, 동시에 이곳 중원에 황제라는 게 생긴 이래로 처음으로 참된 천명(天命)을 얻게 될 것이오.”

천자는 천명을 상징하는 한 사람에 불과하게 될 테지만, 천자가 저의 보위를 잃을까 두려워하는 일 또한 사라질 것이다. 오랑캐들이 중화를 흠모하여 복속을 청했다는 그 케케묵은 거짓 또한 더는 유지할 필요가 없을 터.

“저 서방의 무슨 나라가 그렇게 돌아간다고는 들었는데. 카를로스 할아범네 나라였던가.”

“얼추 비슷하지만 그보다도 더 나은 제도라고 나는 자신하오. 전쟁에 호소하는 일 없이, 천하의 일, 적어도 입조(入朝)한 모든 나라 사이의 일을 천조를 통해 논의하고 조정할 수 있다면, 온 천하를 태평하게 유지하는 것이 그저 허황된 말만은 아니게 되겠지.”

“물론 이것만 해도 쉽지는 않겠지. 그 잘나신 중화가 오랑캐에게 짓밟혔다는 것을 두고도 이리 시끌시끌한데, 그저 국법 몇 가지를 고치는 게 아니라 수천 년간 변한 적 없던 것 위에 새로운 질서를 새우겠노라 한다면, 들고 일어날 놈들이 한둘이 아닐 게요.”

황제 한 사람의 뜻으로 온 중원을 빈틈없이 다스린다 자부하던 시절에도 툭하면 일어나던 것이 반란과 역모였다. 심지어 그런 일을 막으라며 각지에 분봉한 번왕(藩王)들조차 반란을 일으키곤 하였으니, 아예 그들이 황족이랍시고 거들먹거릴 여지가 사라져버린다 하면 가만 있을 리 없었다.

“그러나 임 당수 그대가 여실히 보여주지 않았소? 세상은 바뀌었고, 백성도 바뀌었으니, 이제 그들을 다스리는 도리 또한 바뀔 때가 되었소. 

일시의 파란이 지나고 나면, 병장기를 들고 말 위에 오르기에 앞서 먼저 천조에서 동맹을 구하여 서로 균세(均勢, 세력균형)을 이루고자 하는 세상이 열릴 게요.

다툼이 사라지지는 않지만 도를 넘지도 않을 것이오. 저 바깥의 넓디 넓은 세상을 누비며 경쟁하고 시기하며, 화합을 까마득하게 잊겠지만, 창칼로 싸우고 노략질하는 대신 말로 먼저 싸우게 될 것이오.”

말이 하나의 명나라지, 사실상 그 안에 여러 조정을 두는 셈이니, 그 제도가 훨씬 개명되게 변하였음을 애써 외면하는 누군가는 말당(末唐, 당나라 말기)의 혼란함과 다를 바 없다 할 것이다.

장태악의 대일통은 이런 뜻이 아니었다며, 사람들을 선동하고 당파를 이루는 자들도 필시 나올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다툼과 갈등이 전란으로 번지기 위해서는, 한두 사람의 독단이 아니라 수만, 수십만의 동의를 구해야 할 것이요, 천조에서 벼슬을 나누어 가질 각국 사신들조차 어찌하지 못할 들불을 일으켜야만 하리라.

“요동을 여진에게 내주고, 거기에 지금껏 알탄 칸 그 늙은이에게 야금야금 떼먹힌 북쪽 변방까지 포기한다면, 북경은 너무나 국경에 가까워지는 셈이오. 허나 반대로 생각하면, 그만큼 온갖 나라에서 오가기 좋은 땅이라는 뜻이기도 하오.”

이는 경술년에 수만 대군과 함께 북경 나들이를 왔던 알탄 칸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일 테다.

“그러므로 북경은 황명(皇明)의 경사(京師)이자 온 천하의 중심으로 남을 게요. 허울뿐인 이름이 아니라, 진짜 천하 모든 나라가 모이는 곳으로 말이오. 천조(天朝)가 참된 천조가 되는 것이지.”

처음 그들을 찾아왔을 때보다도 더 후련한 표정이 된 노부나가가 그렇게 말을 마치고는, 표주박을 꺼내 물을 들이켰다.

한참 숙고에 들어간 이지함과 달리, 저의 사형이 알아서 잘 정리해줄 것을 믿는 꺽정이는 피식 웃었다.

“녀석, 머리깨나 굴렸구나. 잘난 한 사람이 천하를 다스리네 하는 소리는 어디로 갔느냐?”

“나처럼 잘난 사람이 있으니까 이렇게 온 천하를 재편할 발상도 할 수 있는 것 아니겠소? 

듣자하니 임 당수 그대도, 또 여기 수산 선생도 곧 조선으로 돌아갈 것이요, 공식으로 화평의 교섭을 하기 위해 제대로 된 사신을 천진으로 보낼 것이라 들었소.

찬탄할 겨를이 있으면, 그 사이에 어떻게 삼국 백성들을 설득할지나 생각해보시는 게 좋을 게요. 내가 보기에는 이렇게 천조를 뜯어고치고 삼국은 그 아래로 들어오는 게 최상이지만, 조선이나 일본에서는 필시 이번 전란으로 딱히 얻는 것 없다고 여기는 작자들이 나올 테니.”

“당장 우리네 서림부터가 네놈들 자금성 기둥 뽑아먹을 생각을 하고 있다더라.”

“그 기둥 내가 이미 다 태워버려서 이제는 없소. 기둥 뽑으려면 먼저 재건하고 나서 생각할 일이지. 

생각해보니 제법 괜찮은데? 호부상서 직을 준다 하면 서 별감이 사업당 곳간을 열 것 같소?”

“그 곳간 네놈이 불태우지 않았느냐.”

“자금성 불태운 나도 병부상서 하고 있지 않소.”

따지고 보면 한양 불태우는 것도 그 옛날 윤원형의 집을 털 때 꺽정이가 이미 선례를 남긴 바 있었다.

“그새 많은 사람이 죽었소. 당수가 니탕카이 그이를 가깝게 여겼음을 잘 알고 있소. 나도 당수 손에 가신 여럿을 잃고 이제 니와 한 놈만 남았소.

그러나 언제까지 싸우고 또 싸울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소. 나나 당수나, 뭔가를 남기고 가려는 사람인데, 죄다 때려부수고 불사르기만 해서는 이룰 수 없는 일이지.”

“말이나 못 하면.”

“칭찬으로 듣겠소.”

그 무렵 꺽정이와 이지함이 기다리던 해서와 오승은이 멀찍이서 오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이제는 슬슬 이야기를 마칠 때였다.

원수 같은 놈이, 조금 덜 원수같이 보이는 것이 얄미워, 꺽정이는 노부나가 뒤통수를 한 대 탁 때리는 것으로 대화를 마무리지었다.

--- *** ---

척계광은 가정 연간에 무너져내린 명의 군사력이 만력 초에 재건되는 데 있어 큰 기여를 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정작 중국 민중 사이에서는 그 공처가 기질로 인해 다른 쪽으로 더 명성(?)을 얻었습니다. 지난 세기에 한국에서 유행했던 최불암 시리즈나 만득이 시리즈처럼, 척계광을 모티브로 한 ‘공처가 장군’ 시리즈가 청대 유머집에 단골로 실릴 정도였지요. 물론 실제의 척계광은 첩을 셋이나 두는 등 – 이는 대대로 손이 귀한 척씨 집안 내력 탓에 후사를 얻기 위한 측면도 있었을 것입니다 - 적어도 기록상으로는 그의 가정생활에 딱히 특별한 면이 드러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명말의 다른 장수들과 달리 유독 척계광에 대해서만 그런 야담이 많이 전하는 것을 볼 때 그와 아내 왕씨 부인 사이의 관계가 조금 유별났을 가능성은 무시할 수 없을 것입니다.

작중 언급되는 번왕은, 명대에 각지에 분봉한 친왕(親王)과 그보다 한 단계 급이 낮은 군왕(郡王) 등의 총칭입니다. 작중 등장한 융경제가 제위에 오르기 전 유왕(裕王)이라 불렸던 것도, 그가 정식으로 황태자로 책봉받지 못하고 친왕에 책봉된 상태를 유지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영락제 – 번왕 출신으로 반란을 일으켜 제위에 올랐지요 – 이후 군권을 몰수당하고 봉지에 대한 수조권만을 지니게 되었으나, 그것만으로도 규모가 매우 컸습니다. 명의 국가기강이 흐트러진 정덕 연간에 벌어진 영왕의 난처럼 사재를 털어 군사를 모아 반란을 일으키는 경우도 종종 있었고, 그저 조용히 있을 때에도 번왕들에게 들어가는 세금은 명 국가재정에 크나큰 부담으로 작용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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