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꺽정은 살아있다-256화 (255/259)

76. 백년하청 (3)

오늘도 어김없이 태양은 동쪽에서 떠오르고, 어둠과 별반 다를 바 없던 황하의 색도 도로 누렇게 돌아왔다.

“이 중원도 속히 저렇게 본래의 색을 되찾아야 할 텐데요.”

제남에서 황하를 바라보는 쪽에 있는 어느 한적한 정자에서 해서가 말했다.

어제 느닷없이 나타난 왜인 직전신장에게, 장거정의 대일통론보다도 더 허무맹랑하게 들리는 – 해서는 그런 제안이 어쩌면 현재로서는 가장 상책일 수도 있으리라는 점에 씁쓸함과 기묘함을 느꼈다 – 계획을 전달받은 남경 조정의 요인들은, 하루 말미를 달라 청하였다.

장거정과 달리 서계와 오승은은 모두 나이가 지긋하였고, 더구나 여독과 피로 또한 그간 켜켜이 쌓였으므로, 이튿날 아침에 일찍, 남의 이목을 피해 이곳 정자에서 만나기로 하였던 것이다.

“그럴 날이 올지는 모르겠구려. 이미 너무 많은 것이 변하였으니.”

지난날, 헌법 제정을 청하는 무리에 끼어 북경 구경이나 하러 오던 길에 이 제남에 들린 바 있던 오승은은 고개를 저었다.

말년에 겨우 저의 이야기책이 팔려 삶의 여유를 얻었다는 데 안도하던 서생이, 고작 십 년만에 이름도 괴상한 국민당의 영수가 되어 천하의 대사를 논하게 되었다. 그러니 그 한탄은 비단 중원뿐 아니라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기도 했다.

“아무리 그렇다 한들, 어찌 저 황하의 색이 변하겠습니까. 중화 또한 마찬가지겠지요.”

장거정이 서계를 몰아내고 입각했을 때부터 그 대일통의 방향에 일부 그릇됨은 있을지언정 사직과 백성에게는 이로울 수 있으리라 여기고서 함께했던 해서는, 북경 조정을 이끌게 된 왜장 직전신장의 제의에 반대하였다. 

국민당을 이루는 향신 태반이 바랐던 것은, 저 조선처럼 저들이 국법을 두려워하지 않고 능히 나라의 정사를 논하고 또 그에 참여하는 것까지였다. 이제 서슬 퍼런 장거정 내각이 무너졌으니, 그 바람이 이루어지는 일만 – 그리고 그 무슨무슨 공사니 하는 것에 빼앗겼던 저들의 가산과 가업을 되찾는 일만 – 남았다 여기곤 했다.

그렇다면 그들이 그리도 좋아하고 심지어 흠모하기도 하던 그 개명된 법도를 이루는 대가로, 중화의 위대함, 그들이 지금껏 너무나 당연하다 여겼기에 딱히 바란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것을 포기해야 한다면 어떻겠는가?

“우리 대명은 잠시 잘못을 범하고 도리를 잊어 오늘의 곤경에 처하였을 뿐입니다. 화이(華夷)의 구분은 사라질 수 없고, 안타깝지만 화이 사이에 끝내 뜻이 갈려 다투는 것 또한 막을 수 없지요.”

“화이의 구분이니 대일통이니 하는 말이 사민(士民)을 공히 억누르고 자칫 온 천하를 숨막히게 할 뻔하였소. 이제는 달라져야 하오.”

“그러나 저 직전신장의 제의는 결국 나라를 쪼개자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저 누런 강물처럼 우리가 다시 본래의 빛을 되찾아, 다른 나라의 시기를 사고 다시금 다투게 될 때, 잘게 나뉜 중원으로 이를 막아낼 수 있겠습니까?”

이미 북경 조정은 남경 조정과 싸울 의사가 없음을 여실히 드러냈다. 그러므로 이대로 북쪽으로 마저 나아간 뒤, 각지의 역도와 도적을 진압하고, 그사이 조선이 원하는 바가 있다면 우선 들어주는 한이 있더라도 하나의 나라는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것이 해서의 주장이었다.

그렇게 오가는 해서와 오승은의 다툼 사이로, 백발 성성한 서계가 조용히 『좌전(左傳, 춘추좌씨전)』 구절을 읊조렸다. 

“황하의 물이 맑아지려면 사람의 수명으로 얼마나 기다려야 할까 (待河之淸 人壽幾何).

옛 사람이 그리 읊은 지도 벌써 이천여 년이 흘렀소. 사람의 수명으로 치면 족히 수십 대가 넘는 세월. 그러니 저 조선 땅에서 군민(君民) 사이 법도가 크게 변하여 오늘에 이른 것처럼, 나라 사이, 중화와 나머지 천하의 사이도 변할 수 있을 터.”

“어찌 그것이 가하겠습니까? 바라건대 가르침을 구합니다.”

장거정의 스승이자, 엄숭까지 견뎌낸 노선비. 아마 이탁오 다음으로 지금의 중원 사람 중 견식 넓을 서계에게 두 사람 모두 귀를 기울였다. 

“스승으로서도, 신하로서도 무엇 하나 제대로 이루지 못한 이 늙은이가 누구를 더 가르칠 수 있겠소? 다만 이 사람이 조선에서 보고 들은 바를 몇 가지 이야기해보고자 하오...”

과연 이 전란이 끝난 뒤 새로 짜이게 될 천하는 그 전과 달라질 수 있을 것인가? 삼대(三代)의 아름다운 정사 바깥에서 새로운 법도, 더 좋은 세상을 열 수 있을 것인가? 더 이상 중화가 오랑캐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 천자의 손에 모든 힘이 모이지 않더라도 중화가 스스로 그 무게를 감당할 수 있는 세상. 

서계는 감히 그렇다고 말하고 싶었다. 

“여충(汝忠, 오승은)의 『서유기』는 이 사람도 재밌게 읽었소. 조선에서는 식자 치곤 아니 읽어본 사람이 없더군.”

느닷없이 자질구레한 이야기책을 언급하니, 책의 저자인 오승은부터가 눈 휘둥그레져 서계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중화란 그런 것임을, 그제야 깨달았소. 가운데 있어서도 아니요, 나만이 가장 뛰어나다고 힘으로 강압해서도 아니요, 오로지 스스로 발하는 문채와 광명으로써 모두를 끌어모으는 것이 중화지.

우리 글이 진서라 불리며 모든 나라에서 식자들이 읽고자 하는 것은, 그 글자가 쉬워서가 아니오. 수천 년 동안 성현이 이 땅에 나서 글로 그 가르침을 남겼기 때문이요, 또한 사소한 단상부터 흥미진진한 이야기까지 만물을 글에 담았기 때문이오.

중화의 문물이 천하제일이라 불리며, 저 멀리 서방에서조차 지구를 반 바퀴 돌아 찾아온 것 또한, 누군가 강요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우리의 장인과 상인들이 힘써 나라의 상공(商工)을 진흥했기 때문이오.”

처음에는 중원 각지에 조정이 난립할 것이요, 그 빈틈을 노리고 온갖 모리배가 준동할 터였다.

그러나 곧 그들은 깨닫게 될 것이다. 은이 흐르는 중원의 모든 길은 이미 강남에 얽매여 있었고, 그들이 암만 날뛰어도 이를 바꿀 수는 없었다.

중원 바깥 또한 마찬가지였다. 조선의 민주당이 아무리 뛰어난 장인과 상인을 거느리고 있다 한들, 일본의 동척사가 얼마나 비옥한 옥토를 개간하든, 천하의 물류에서 강남과 그 배후의 중원 전체는 항상 가운데에 있어 이들을 떼어놓고는 교역을 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처음에는 이익을 위해 엮이고, 나중에는 의리와 관례의 이름으로 엮이면서, 조정의 난립은 조정의 병립(竝立)으로, 공존으로 이어지게 되리라. 

“천하가 진심으로 하나의 법도를, 그 개명된 법도를 따르게 된다면, 그때는 나라가 다르고 사람의 부류가 다르다는 것조차 중하지 않게 될 것이오. 

모두가 우리의 글을 읽고, 우리의 문물을 저의 것처럼 접하며, 우리 사람을 저들의 사람과 같이 여기게 될 것이오. 그리고 개명된 법도 아래에서는 그들이 곧 임금과도 같게 될 것이오. 

그리고 당장 남경만 하더라도, 사업당 분표를 들고 있는 자들, 조선의 대양서생 또는 그 아들들과 아직도 글로 교분 이어가는 자들, 홍병위의 눈을 피해 정론보를 읽던 자들이 가득하오. 

온 천하가 이리 변한다면, 그 누가 저의 형제와 이웃을 해치려 하겠소?

그러므로 나는 말하고자 하오. 우리는 이미 이 나라가 나아갈 수 있는 여러 갈래 길 중 한쪽에 가장 치우친 길을 걸어 이곳까지 왔소. 다른 길에 기대를 걸어보지 못할 것은 무엇이겠소?” 

세 사람 중에서도 지난 밤을 새며 유별나게 고심하고 또 고뇌하였던 서계의 이야기가 이렇게 일단락되었다.

답변할 말을 머릿속에서 그제야 자아내기 시작한 오승은과 해서 사이로, 엉뚱한 조선말이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분명 짤막하게 몇 가지만 이야기한다 하지 않았소?”

“당수가 이해하십시오. 원래 사람이 늙으면 다 저렇게 말이 많아지는 것입니다.”

“그래, 꺽정아. 너라고 안 늙을 것 같으냐.”

정자 위 사람들 중 가장 연소한 – 그래본들 나이가 쉰을 넘긴 지 오래였다 – 해서가 일어나 난간 너머로 보니, 정자 아래에 사람 셋이 숨어서는 위에서 오가는 이야기를 엿듣고 있던 것이었다. 

서계의 이야기가 워낙 길게 이어지다 보니, 어느새 그 말이 끝난 줄도 모르고 저들끼리 저렇게 떠들고 있는 것일 테다.

이 무슨 괴상한 짓인가, 해서가 막 물으려던 차, 때맞춰 고개 든 꺽정이와 눈이 마주쳤다.

“얘기들 다 하셨소?”

엿들어서 미안하다는 말은커녕 뻔뻔하게 물으니, 모두 기가 막혀 딱히 노엽다던가 불쾌하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사실상 이 전란을 일으킨 한 축과 다름없는 자가 직접 저렇게 좀도둑처럼 첩자 노릇을 하고 있으니, 화를 내기에 앞서 어이부터 잃은 것이다. 서계와 오승은 또한 난간으로 다가와, 정자 아래 장난질하는 어린아이들처럼 옹기종기 모여앉은 임꺽정과 이지함, 이탁오 세 사람을 내려다 보았다.

“우리 몰래 무슨 이야기하는가 궁금하여 이렇게 왔소. 염탐을 할 거라면 직접 오는 성의 정도는 보여야 할 사이잖소, 우리는.

그리고 듣자하니, 다른 건 몰라도 그 황하 맑아질 때가 되었다는 소리는 마음에 드는군. 그러니까 지금껏 이어져온 천하를 마무리짓고 새 시대를 연다는 것 아니오? 내가 바라던 것이 바로 그것이라오.”

이미 노부나가 그놈이 당돌한 제안을 해 왔을 때부터 마음이 꽤 기울어 있던 꺽정이로서는, 이제 무엇을 감수하고서라도 시대를 훔치는 이 일에 뛰어들 생각을 단단히 품게 되었다.

“이제부터라도 우리는 귀 막을 테니, 세 분이서 잘 이야기하여 답을 정해 주시오.”

인천에서 꺽정이 일행을 기다리던 서림은 이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듣자마자 곧장 기함하였다. 

“안 됩니다! 안 돼요!”

임 당수 고집이 대략 어떠한지 익히 아는 서림이었으나, 이 일에서는 도저히 양보할 수가 없었다.

“우리 사업당이 쏟아부은 돈이 얼마인데, 고작 그걸로 퉁치고 끝낸다니요! 명을 상국으로 모시니, 천조를 진짜 천조로 바꾸니 하는 건 중하지 않습니다!”

“그걸로 퉁친다니? 화평만큼이나 장사에 도움 되는 게 어디 있다고?”

“하다못해 어디 항구 하나라도 뜯어올 수는 없겠습니까? 그냥 우리 사업당 명의로 한오백년 빌린다 치고요. 장강 강어귀까진 바라지도 않고, 광동 근방에 한적한 어촌이나 하나쯤...”

이 전쟁통에 그나마 사업당을 굴러가게 해준 자유민주당 잠상들에게 둔문(屯門, 現 홍콩 일부)이나 포르투갈인들도 욕심을 냈다는 호경(濠鏡, 現 마카오 일부) 이야기를 들었던 서림이 끈덕지게 꺽정이를 물고 늘어졌다.

“거 이번 전란에 멋모르고 휘말려들어간 것도 아니고, 애초에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잖소?”

“알기는 알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너무 재정을 많이 축냈단 말입니다! 당장 화평이 열린다 한들 어디선가 자본을 마련해야 할 텐데, 뭔가 뜯어내지 않으면 어디서 그 자본을 구하겠습니까? 강남 향신들도 그 대불복이다 뭐다 하면서 민력이 쇠잔하였을 텐데...”

“내 나름대로 노부나가 그놈 말 들어주랴, 짐덩이 둘 데리고 명나라 늙다리들 이야기 엿들으랴 고생까지 하며 들고 온 제안인데, 그리 대하니 서럽소.”

틀린 말은 아니었는데, 백 번 천 번 맞는 말을 해도 왠지 얄미운 것이 임꺽정 화법이다 보니 서림의 반발하는 마음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이번 전란에서 흩뿌린 재정은 대부분 조선과 일본 백성들의 곳간에서 모은 것이었으나, 사업당이 기여한 바도 결코 적지 않았다. 

물론 그 재정도 근원을 굳이 따진다면 왕실의 경제사와 명나라 강남의 사업당 분주(주주), 그리고 열심히 해적질로 끌어모은 포토시 은괴 등이었지만, 근원이 어찌 되었든 사업당 곳간 안에 들어오면 모두 사업당의 것으로 여기는 서림으로서는 그 문턱 안에 들어온 은이 도로 나가는 꼬락서니를 결코 가볍게 넘길 수만은 없었다.

“사형, 사형이 좀 설득 해보시오. 나는 임금님께 인사나 드리러 한양 가리다.”

“당수, 당수! 어디 가십니까! 당수!”

그리고 서림은 전생에서 귀신같이 임꺽정을 찾아내던 그 솜씨를 이제야 발휘하여, 정말로 꺽정이 나타나는 곳마다 나타나 재고를 청했다.

조정의 밀명을 받들고, 북경에서 전란 끝내는 논의를 제대로 시작하기 전 북경 및 남경 조정의 의사를 살피고 온 이지함은 – 노부나가 본인이 산동에 나타난 덕에 금방 그 소임을 마쳤다 – 곧장 이 새로운 천조 제안을 임금과 조정의 고관대작, 공회 각 당 영수들에게 전했다.

곧 천진으로 떠날 정식 사절들이 들고 갈 답을 마련하고자 공회가 떠들썩한 동안에도 꺽정이는 서림 탓에 도저히 여독을 풀 기회를 찾지 못했다. 

하필 꺽정이와 명희네 집은 처갓집 옆집이요, 그 처갓집은 불타버린 사업당 대신 서림과 그 아랫사람들이 임시로 저들 사업하는 곳으로 쓰고 있는 터라, 어디를 가든 서림을 피하기가 난망하였던 것이다.

그렇게 사흘째 되는 날, 전날 이탁오의 머리를 빌려 오늘에야말로 서림을 설득시키고야 말겠노라며 제법 그럴듯한 언변을 준비해 온 꺽정이 귀에 인기척이 들려왔다.

헌데 고개 돌려본즉 늘상 보이던 서림은 외려 없고, 이이가 웬 젊은이 하나 – 복식으로 보건대 기학재 사람인 듯했다 – 와 함께 와 있었다.

“당수, 말씀 좀 여쭙겠습니다. 혹시 서생이 도망하는 것을 보셨습니까?”

엉뚱한 물음에 꺽정이도 절로 반문하였다.

“서생이 도망을?”

생김새는 어딘가 모르게 익숙한 기학재 학도가 고개 숙이고 한 발 나와 설명했다.

“예, 다름이 아니라, 옛날에 흑의영에 감금, 아차, 모여 나랏일 돕던 서생들이 아직도 육조 곳곳에 머물며 계속 좋은 일을 하고 있는데, 당수께서 어떤 제안을 들고 돌아오셨는지 듣자마자 필시 저들에게 화가 닥칠 것이라며 난리를 치곤 사라졌다고 합니다.”

전쟁은, 특히 이번 전쟁은 이전과는 달랐다. 마음대로 십만 대군을 일으키고 적당한 장수에게 맡겨 전장으로 보내는 것이 아니라, 병비(군비)로 쓰이는 은 한 냥 한 냥, 포 한 문 한 문을 모두 세심하게 관리하는 등, 명효대험(효율적)하게 만사를 운용해야만 비로소 승리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

... 라고 삼국도총부에서 가장 그 목소리 무거운 이순신이 말하고, 아이신교로 교창아부터 아시카가 요시테루까지 모든 집정(執政)한 사람들이 이를 승낙하니, 겨우 흑의영 빠져나온 서생들은 대충 참하관(參下官) 직들 받고 육조로 나뉘어 끌려가게 되었다.

“김성일·황윤길 등 주범들은 대개는 붙잡혔는데, 마지막 한 사람, 김여물은 여전히 종적이 묘연하다고 합니다. 마침 스승님께 인사나 올리려 오던 길에 문앞에서 만나 이렇게 함께 들어오게 되었지요.”

이이가 기학도의 말 받아 부연하였다.

“아니, 내가 듣기로 그놈들 나름 대접 후하게 받는다 들었는데? 더구나 그 깐깐한 동고 대감도 제법 쓸만한 동량이라고 평했다고도 하였는데.”

“제가 서생들 모아놓고 알려주었거든요. 그대들이 고작 임시로 벼슬 맡아 국사 돕는 처지에, 나랏일뿐 아니라 천하의 도리를 논하고 또 다룰 수 있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큰 홍복인가. 이토록 즐거운 일이니 침식(寢食) 따위 제쳐두고 모두 함께함이 마땅하리라. 이렇게 말입니다.”

“천하의 도리라니 그건 또 뭔 소리냐.”

“아니, 그러면 이런 기회를 어떻게 버려둘 수 있겠습니까? 노부나가 그 자가 제의한 것처럼 북경에서 만국(萬國)을 모아 천하의 일을 조정하고 화평을 지키게 된다면, 이는 다시 말해 그들 사이에도 어떤 규율을 세워야 한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당장 저들 조정이 우리 삼국의 광복삼장을 받아들인 게 선례가 되겠고요.

하지만 광복삼장은 실로 소략하니 어찌 이것으로 규율을 삼기에 족하다 하겠습니까? 아예 만국이 모두 따를 수 있는 법도, 그러니까... ‘만국공법(萬國公法)’을 세움이 가당하겠지요. 어디 그뿐입니까? 우리 국인선서에서 보장하는 것을 이왕이면 다른 나라들도 다 따를 수 있도록 이것도 포함시키고... 좌우지간 해야 할 일도, 살펴야 할 일도 아주 많습니다. 이를 즐기지 않는다면 선비라 할 수 있겠습니까?”

“설마 네 녀석, 지금 내 앞에서 늘어놓은 말을 그대로 그 서생들 앞에서 한 것은 아니겠지?”

“원래 진실만큼 좋은 언변이 없지 않습니까. 남명 선생도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나이를 먹어도 성질은 죽지 않는 남명 선생 조식의 처세 조언을 귀담아듣는 것만으로도 영 불안한 일인데, 하필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이 이이였으니 파란이 아니 일 수가 없었다.

“그나저나, 그 김여물이라는 놈은 이쪽으로 온 것이 확실하더냐? 제 발로 호랑이굴로 들어오는 격 아니냐. 암만 등불 밑이 어둡다지만...”

꺽정이가 고개 갸우뚱하며 묻는데, 어째 이이와 함께 따라온 기학재 학도가 뜨끔하는 듯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이이가 말했을 때부터 어째 낯빛이 푸르죽죽하게 변하기도 했다.

“야, 녀석, 머리깨나 썼구나! 어이, 율곡 선생, 저기 저놈이 도망친 서생 김여물이인 듯한데.”

“누구 말씀이십니까?”

“네놈 옆, 김여물 찾는 기학도처럼 분장한 그놈 말이다. 보나마나 이쪽으로 도망치는 길에 율곡 네 녀석을 마주치고서는, 딴에는 머리 굴린다고 그런 분장을 했겠지.”

“으, 으아악!”

만사휴의(萬事休矣) 지경 되는 것을 일순 받아들이지 못한 김여물이 그 자리에서 등 돌려 도망쳤는데, 안타깝게도 꺽정이 앞에서 하기에 썩 현명한 짓은 아니었다.

문득 못된 마음이 든 꺽정이는 김여물을 쫓아가는 대신, 사업당(임시) 있는 쪽으로 달아나는 김여물 등 뒤로 이렇게 외쳤다.

“사업당 사람들 들으시오! 여기 전도양양한 서생 김 아무개가 그대들을 도우러 왔으니, 마음껏 부려먹으시오들!”

사색이 된 김여물은 조용히 발 돌려 이이 앞으로 돌아왔다. 허나 그만큼 잠깐 벌어진 소란만으로도, 꺽정이 외침소리 들은 서림을 끌어내기에는 적당하였다.

“그, 당수, 아직 마음을 아니 돌리셨다면...”

“아, 잘 왔소. 내가 오늘은 별감 그대를 설복시키려고 아주 좋은 언변을 마련해 왔는데...”

그런데 막 이탁오와 함께 (즉 이탁오를 쥐어짜) 지어낸, 어째서 이 천조 발상이 탁월한 것인지 설득하는 이야기를 꺼내려던 차, 방금 전 이이가 한 말이 먼저 머릿속에 떠올랐다.

“잠깐, 그렇지. 그래.”

“무엇이 그렇습니까?”

“우리 사업당이 이번 전란으로 인해 한동안 뭔가 다른 일 벌일 밑천이 궁하게 되었다 하지 않았소? 그 밑천을 모을, 아주 좋은 묘책이 떠올랐소.”

“아이고, 제가 지난 며칠간 혀가 시릴 만큼 반복하고 또 반복한 보람이 있습니다그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시는 줄로만 알았는데...”

별 기대 안 하고 시큰둥하게 대꾸하는 서림이었다.

“아니, 들어 보시오. 이거 제법 그럴듯한데?”

“대체 뭐길래 그러십니까.”

“화평이 찾아오면 장사는 절로 잘 되기 마련이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소? 그러면 사람들도 언젠가는 똑같은 결론에 이르지 않겠소? 그러니 한양에서 한바탕 잔치를 열어 사람들을 모아들이는 것이오.”

천조를 지금처럼 북경에 그대로 둔다고 하여, 전란의 끝 또한 꼭 북경에서 선포할 것까지는 없었다. 공회에 건의하든 임금께 말씀 올리건, 곧 천진으로 떠날 사신에게 연통 넣으면 곧 그대로 북경에 전할 수 있을 테다.

“허나 ‘우리 아직 장사 합니다.’ 그렇게 백방 떠들어본들, 온 동방이 전란으로 재력이 핍진케 되었는데 무슨 효험이 있겠습니까?”

여전히 시큰둥하게 서림이 반문하였으나, 꺽정이는 저의 발상에 취하여 낄낄 웃을 뿐이었다.

“율곡이 방금 전에 말하기를, 이번에 새로 세워질 천조는 만국(萬國)의 천조랍디다. 동방의 몇 안 되는 나라들이야 민간의 재력이 쇠하였지만, 그렇지 않은 나라도 많지 않소?

더구나 지금껏 강남에 닿았던 서양 나라들도, 명나라 조정에 따르면 어쨌든 입조한 오랑캐 나라들 아니오? 게다가 이번 전란에서도 장꺽정이 편이든 우리 편이든 다들 어느 한쪽 편들어 참전했으니, 모아들일 만한 명분은 차고도 넘치지.”

“서양 나라들이라고요?”

“전쟁도 끝났겠다, 수에즈 운하 공사도 그사이 재개하여 거의 마무리되었겠다, 지금 배 띄워 초대하면 길어야 일 년 반 안에 천하를 한양으로 모을 수 있을 게요.”

이 지구 위에 사람이 나라를 세워 서로 싸운 이래, 이만큼 많은 나라에서 이만큼 많은 전장을 누비며 싸우는 일은 한 번도 없었다.

“천하대전(天下大戰)의 끝으로, 천하 모든 나라를 모으는 큰 잔치쯤은 해주어야지. 그리고 우리는 거기서, 여불위는 물론이요 석숭조차 부끄러워하며 울 만큼 성대하게 광고를 할 것이오. 이제 전란이 끝났으니 우리 세상이라고. 그러니 다들 오는 길에 사업당 분표 살 돈을, 쌈짓돈 털고 궁궐의 보석 팔아 마련해 오라고.”

나누어져 싸우던 시대는 끝나고 다 함께 교류하며, 좋은 것 주고받고 서로 이익 올리는 시대가 왔음을. 군주와 귀족의 시대는 저물고 오로지 돈에 따라 귀천을 나누는 시대가 동트고 있음을, 그리고 그 시대를 열어젖히며 맨 앞에서 나아가는 것은 임꺽정, 돈 림, 림 파샤, 코우지오니스와 그의 당임을 온 세상에 알릴 것이다.

“어떻소? 우리 사업당이 암만 재정 곤궁케 되었다지만, 이렇게 유사 이래 가장 성대한 연회를 한 번쯤은 열 수도 있지 않겠소?”

서림의 고민은 짧았다. 

“임 당수를 만난 것은 이 서림이 팔자에 가장 길한 일이었습니다.”

제 말 맞지 않았냐며 꺽정이는 키득대고, 굴러들어올 자본을 생각한 서림 또한 따라서 낄낄 웃었다.

군자와는 거리가 멀고도 먼, 도적 우두머리와 도적같은 상인 우두머리 둘이 그렇게 한참을 웃었는데, 검손당 이씨가 소리 듣고 나와 허파에 바람 들었냐며 하나는 붙잡고 들어가고 하나는 휘휘 쫓아낸 고로 한양 사대문 바깥까지 웃음소리가 퍼지지는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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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계가 글 초반에 인용하는 『좌전』 구절은 백년하청(百年河淸)이라는 성어의 출전입니다. 당시 약소국이었던 정나라가 초나라에게 위협을 당하게 되자, 초의 요구에 굴복하자는 쪽과 초의 적인 진(晉)나라의 원군을 믿어보자는 쪽 사이에서 국론이 갈렸는데, 대부 자사(子駟)가 언제 도착할지, 애초에 오기는 할지 의문스러운 원군을 믿느니 차라리 초에게 굴복하여 화친하자고 주장하며 남긴 말이라고 전해집니다. 국가 간의 신의보다는 당장의 군사력이 더 믿을 만하다는 다분히 현실주의적인 이야기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근세 이후, 거대한 전쟁과 위기의 뒷수습은 보다 새롭고 ‘근대적’인 국제관계의 형성으로 이어지곤 했습니다. 예컨대 30년 전쟁과 소빙기 도래에 따른 全유럽적 위기 상황은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대표되는 근대 국제질서의 초석을 다졌고, 나폴레옹 전쟁과 자유주의의 (기득권에 대한) 위협 앞에서는 강대국 간의 半제도화된 평화체제인 유럽협조체제(Concert of Europe)가 나타났지요. 

특히 유럽협조체제는, 열강들이 패권국의 강압 없이 자발적인 타협과 협력을 통해 세력균형을 모색했다는 점에서 중요하게 평가받는 근대 국제정치의 분수령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폴레옹 전쟁으로 기존의 유럽 내 균형이 붕괴된 상태에서, 열강 간의 협의로 세력균형을 유지한다는 발상이 등장하였고 이것이 모두의 합의를 이끌어낸 것이지요 (Slatchev, 2005. “Territorry and Commitment: The Concert of Europe as Self-Enforcing Equilibrium.” Security Studies 14(4); 이혜정·이경아, 2014, “근대 국제관계와 유럽협조체제: 슈뢰더의 유럽 국제정치 변환론”, 평화연구 22(1)). 작중의 오다 노부나가는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 더 제도화된 상설기구로서 국제기구를 떠올린 셈인데, 황제(천황)는 허수아비로 두고 각각의 나라(國쿠니)는 따로 노는, 동아시아 내에서 상당히 이질적이었던 일본 출신의 노부나가였기에 가능한 발상이었다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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