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천하의 모든 것 (2)
먼 옛날 우임금이 도산(塗山) 땅에서 하늘 아래의 일만 인군(人君)을 모아 맹약을 맺었으니, 이것이 바로 하늘과 땅이 열린 이래 처음으로 열린 회맹(會盟)이었다.
그렇다면 장차 한양에서 열리게 될 모임은 회맹이라 부를 수 있는가?
꼭 칭제건원까지는 하지 않더라도 명색이 천조 대명을 상대로 싸워 (사실상) 이겼으니 뭔가 유세는 부려야 하지 않겠냐는 선비답지 못한 일시의 유혹에 흔들려, 그만 임꺽정의 부추김에 넘어가 한양에서의 열국(列國) 화약 여는 데 동조한 대소신료들을 덮친 고민거리였다.
다행히 이번 전란을 거치며 조정의 새로운 인재로 부상한 류성룡이 나선바, 논의가 일단락되었다.
‘공자께서 『춘추』를 지으실 때에는, 패자(霸者)가 천자의 위덕(威德)을 빌어 제후를 모으는 것을 회맹이라 불렀는데, 이는 이미 존주대의(尊周大義)가 어그러지기 시작한 때의 일이니 상고할 가치도 없습니다.
우리 조선국은 군신(君臣)과 대소인민(大小人民)이 하나되어 개명된 법도를 이루었고, 이는 다시 이웃으로 퍼져, 나라가 열린 이래 처음으로 일본국과 북방 여진이 모두 우리의 형제와 같이 되었습니다. 이로써 비로소 나라 사이에 크고 작음이 있을 뿐 높고 낮음은 없음을 드러내 밝혔습니다.
아, 성인이란 무릇 나고서부터 깨우치신 분을 이르니, 어찌 삼대(三代)의 성왕(聖王)이나 공자와 같은 분들께서 이 이치를 모르셨겠습니까? 다만 군민(君民)의 법도가 아직 개명되지 못하여 먼저 교화에 힘쓰셨을 뿐입니다.
성인의 유업(遺業)을 오늘날 우리 조선과 이웃나라들이 더불어 이루고 있으니, 지금 우리가 회맹과 같은 구례(舊禮)를 따른다면 이야말로 성인의 뜻에 맞지 않습니다. 마땅히 과하지 않으면서도 부족하지도 않은 새 이름을 지어 붙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업당이 막 천하대회 협조 공문을 뿌릴 무렵에 한발 늦게 만국화약(萬國和約)이라는 이름이 정해졌는데, 공회에서 조금 더 요란하거나 거창한 이름을 바라는 이들이 잠시 반대하기는 하였으나 류성룡과 이이가 함께 논박하니 금방 공론이 정해졌다.
그리고 그 만국화약 준비하는 일은 육조에 고루 뿌려졌는데, 전란이 끝난 이후에도 불어난 덩치가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 봉록을 흩뿌리는 것 이상으로 나라의 정사가 치밀해지는 효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 터라 볼멘소리는 나올지언정 돌보아야 할 일을 놓쳐버리는 일은 그닥 벌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가외로 ‘만국영빈도감(萬國迎賓都監)’을 세워 이 모든 일의 총책을 맡도록 하였는데, 도제조야 본디 겸직이니 이준경이 그대로 맡고, 그 아래에는 율곡 선생 이이 이하 총명하면서도 아직 딱히 관직에는 나서지 않았던 사람들을 긁어모았다.
“지금껏 세인(世人)들이 이 사람을 보고 인지상정에 어둡다는 둥, 모든 사람이 저와 같을 수 없음을 모른다는 둥 헐뜯었는데, 서애(류성룡) 자네와 이곳 도감의 인재들을 보니 그들이 틀렸고 이 사람이 종국에는 옳았음을 알겠네.”
“하하,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어찌 선생 앞에서 인재를 자처하겠습니까.”
사실상 도감의 전권을 맡게 된 이이는 저의 생각에 사람 구실은 하는 이들을 긁어모았는데, 대개는 삼락서원 원생 출신들이라 이이와 합이 잘 맞았다.
당장 지금도, 마루 위에서 류성룡과 한담을 하는 듯하면서도 두 사람 모두 서안에 놓인 종이를 곁눈질로 읽고 그 아래에 가부(可否)나 더 살펴야 할 점 등등을 적어가며 사안을 처리하는 중이었다.
지금도 하나는 예조, 하나는 호조에 각각 들어가 (지나치게) 보람찬 일을 하고 있는 황윤길이나 김성일이 보았더라면, 대체 왜 하늘이 조선 땅에 저들을 낳기 전 저런 괴악한 선진(先進, 선배)들을 먼저 낳았는가 한탄하기 딱 좋은 광경이었다.
“그나저나, 중원 안의 다른 조정들에 대해서는 들어온 바가 그새 있었는가? 이러다가 자칫하면 탁오 선생이 서방에서 열국 사신들과 상인들 모아오는 것보다 뒤처질 듯한데.”
“오늘 아침에 사업당 쪽으로부터 강남에서 초모된 품목의 명단을 전해받았습니다. 그때 듣기로는, 아직 확언할 수는 없으나 대회가 열리기 전까지 다른 조정이 세워질 것 같지는 않다고 하더군요.”
이번 화약과 대회를 준비하는 일에서 사업당과 영빈도감은 긴밀히 공조하고 있었다. 만국 조정을 대표하여 찾아올 사신들이 한양 성내에서 모이는 동안, 천하대회를 위해 찾아올 각국의 상인과 저의 고안한 물건을 자랑하려는 공장(工匠)들은 성저(城底)에서 모일 예정이었다.
만국 사람들이 모여 저들 솜씨를 뽐내려면 적잖이 넓은 공터도 필요하고, 그들을 유숙케 할 숙소 마련하는 일, 만에 하나 다툼이라도 벌어질 때 – 당장 에우로파 사람들은 저들끼리 투닥거리기를 수백 년을 해 왔다지 않던가 – 대비하는 일 등등, 모두 도감에서 관할해야 할 일이었다.
류성룡이 말하는 강남의 명단이란, 그 대회에 자신이 고안한 (또는 고안했다고 주장하는) 물품을 들고 와 제게 밑천을 기꺼이 대어 줄 물주를 얻고자 하는 이들과, 그 물품의 명단으로 바로 얼마 전 남경을 통해 전해져 온 것이었다.
이 어려운 시국에도 – 또는 어려운 시국이기에 – 사업당 사람들은 물론이요 남경 조정에서도 놀랄 만큼 열렬한 호응이 있었다. 허나 아무리 보아도 찾아오겠다는 사람들은 죄다 남직례와 그 주변 양강(兩江) 출신이요, 회수 이북이나 사천 등지의 사람은 없었다.
“그건 조금 아쉽군.”
“세간에서야 아국 조선이 아주 개명되었노라 떠들지만, 기실 이십여 년이 지난 지금도 완전히 풍속이 변하지는 않았습니다. 몇몇 사람이 뜻을 모아 풍속과 법도를 경장하겠노라 굳게 마음을 먹었기에 겨우 여기까지 이끌려왔을 뿐이지요. 강남이야, 육왕(陸王, 양명학)의 학풍이 크게 일어났으니 국민당에 향신들이 크게 동조하였지만, 나머지 지역은, 특히 물산이 궁벽한 곳은 그렇지 못할 것입니다.”
벌떼같이 일어난 도적들이나 그 도적 때려잡겠다며 일어난 더 큰 도적들 중 나름 인망과 학식이 있는 자들이 북경 조정의 제안에 동조하고 나서기는 했으나, 아직은 그뿐이었다.
척계광 등의 관군이 끝내 멋모르고 날뛰던 도적들을 몰아내고 다시 어느 정도 평온을 되찾은 성들이, 당초 노부나가의 구상처럼 모든 성이 각자 그 민의에 따라 어떤 조정에 속하거나 새살림을 차리는 그런 일이 이루어지려면 꽤 세월이 필요할 터였다.
“그렇다면 강남의 물산이 풍족한 게 다행 아닌가. 얼마 전에 서 대인이 정론보에 글 실으신 것처럼, 천병 수십만보다도 강남의 면화가 전란을 막는 데 더 도움이 될 테니.”
서계가 정론보뿐 아니라 다시 중원 각지에서 제각각 내기 시작한 신보(新報) 등에 모조리 실은 글에 따르면 장차 중원의 형세는 그리 될 터였다. 언뜻 보기에는 조정의 병립(竝立)이 곧 말당(末唐)의 혼란과도 같을 수 있지만, 각 조정이 모두 국인의 공론에 따라 움직이고, 그 국인이 온 천하의 물산과 교역함으로써 생계를 꾸리게 된다면, 결코 전란은 벌어지지 않으리라는 것이었다.
“그래도 강남에서 초모한 품목만 하여도 개중 쭉정이를 골라내지 않는다면 능히 마포를 가득 채울 수 있을 정도고, 이미 조선 내에서 초모에 응한 공장과 상인들 또한 수없이 많습니다.
인천부에 거하는 서방 사람들 중에도 몇몇이 저들의 공예를 뽐내겠다 하였고, 일본 사카이에서 린죠 공이 보낸 전갈에 따르면 그쪽에서도 장인들이 문전성시를 이루어 공을 한 번이라도 만나보고자 한다더군요.”
머릿속에서 자신이 받아본 명단을 떠올려, 오른쪽에서부터 왼쪽으로 쭉 훑으며 류성룡이 말했다.
“개중 각별히 눈여겨봐야 할 자가 있던가?”
“사업을 경영하는 이라면 모를까, 한 사람의 선비가 마음을 둘 만큼 천지나 인간(人間)의 이치에 맞닿는 것은 몇 가지 없습니다.”
이 기회에 조선에 왕양명 선생의 가르침을 널리 펴자고 작당한 강남 서생들이 꽤 많았고, 또 반대로 그들이 넘어오는 즉시 퇴계와 남명, 율곡 선생께서 올바르게 정립하신 도학(道學)으로써 왕학 하는 무리들을 일깨우자며 벼르고 있는 조선 서생들도 많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사업당의 명단에는 들어가 있지 않았다.
“어디 보자... 북변의 북쪽에는 무엇이 있는가 살피고자, 경흥에서 배를 띄워 바다의 북쪽 끝까지 다녀왔다고 주장하는 여진 사람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 임 당수의 자제분 또한 초모에 응하였다고, 선생께서 오시기 직전에 전해 받았는데, 무엇을 내놓을지는 아직 전해진 바가 없다더군요.”
임 당수의 자제라 하면, 저의 사고뭉치 조카 철수다. 암만 저의 안중에 없는 세상일에는 깜깜이인 이이라지만 그 이름 언급되니 주의가 절로 끌렸다.
나라가 개창된 이래로 종친과 혼담 오가는 사람 중 가장 그 집안 위세가 창창하면서도 동시에 그 내력이 한미한 철수는, 사람들이 저를 두고 무어라 떠들건 저의 좋아하는 일에 매진하고 있었다.
그 매진하는 것 때문에 근래 집안이 영 시끄러운 것을 이이도 모르지 않았다. 눈치가 없는 것이지, 귀가 어두운 것은 아니었으므로.
“그... 아직 철수, 아차, 내 생질의 일은 온전히 정해진 것이 아니니 바깥에서는 함부로 발설하지 말게나.”
그러면서 얼추 암산으로 헤아려본즉, 대략 한두 시진 전에 사업당에 ‘임철수’ 이름으로 천하대회에 출품하겠노라 하였다면, 이 무렵에는 저의 매부 귀에도 들어갔을 듯하였다.
임 당수 처갓집이라면 청석골 시절부터 질색팔색하던 서림이었으니, 철수가 사업당 – 불탄 자리에 더 휘황하게 재건하여 얼마 전 다시금 문을 열었다 – 문을 나서자마자 부리나케 파발 띄우듯 연통을 돌렸을 것이었다.
과연 이이의 셈은 그대로 들어맞았다. 류성룡에게 어디 가서 함부로 철수 이야기 하지 말라 당부한지 대략 반 각 뒤, 류성룡이 심상찮은 기미를 느끼고 조용히 사라지자마자 한껏 심란한 얼굴 한 임꺽정이 나타났다.
스물다섯 해 조금 넘는 세월 동안 온 천하를 뒤흔들고, 마침내 저의 뜻에 따라 하늘 아래 모든 것을 저의 발 딛고 있는 한양으로 끌어모은 사내는, 늘 그렇듯 자신의 손에 쥐어진 권병(權柄)이야 있든 말든 딱히 개의치 않는 듯하였다.
애시당초 그런 일에는, 온 천하의 임금 노릇 따위에는 별반 감흥도, 관심도 없었거니와, 지금은 고작 그런 것보다도 더 중한 사안이 목전에 있었던 것이다.
“아들녀석이 출품하지 못하도록 도감에서 막아다오.”
“예?”
“장모님도 허리는 굽으셨어도 아직 귀는 멀쩡하신데 아직 새파랗게 젊은 사람이 가는귀가 먹었나. 철수 그놈이 대회 열리는 데 얼씬도 못하도록 막아달래도.”
“예? 하지만...”
“아, 거 참! 조카녀석 안위가 걸려있는데 그럼 제 발로 불난 집 들어가도록 내버려둘 셈이야?”
“저는 며칠째 계속 도감과 집 사이만 오가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윽박지르시기만 하면 무슨 연고인지 어찌 알겠습니까?”
전혀 주눅들지 않고 이이가 또박또박 대꾸하니, 꺽정이도 김이 조금은 샌 채 마루에 털썩 주저앉았다.
“녀석이 뭔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그거 아주 위태로운 일이라고 병해 사형도 말씀하시더라.”
사연은 이러하였다.
병해가 그 옛날 헌법 권점하던 시절, 전국의 뜨내기와 돌팔이들을 끌어모아 권점의 여론 돌리는 데 쏠쏠히 써먹고는, 팔도의 쓸모없는 무리에게 쓸모 찾아주겠노라며 기학재를 연 이래로, 온갖 해괴한 궁리가 기학재에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저 자질구레하고 잡다한 일로 끝날 줄 알았던 기학의 연구는, 이산해라는 걸출한 이가 나타나면서 큼직한 전기(轉起)를 맞이하게 되었다.
“스승님의 조카분께서, 전란 끝나자마자 다시 기학에 몰두하게 되었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 헌데 그것이 어찌...”
“그사이에 아들녀석이 아주 못된 헛바람이 들었으니 문제지, 무어야.”
그간 전방의 도총부에서 내려오는 수요에 맞추어 동래 공장에서 화포와 화약 제작하는 일을 총괄하는 일로 바빴던 이산해는, 그 와중에도 틈틈이, 그 옛날 달과 지구 사이에서 벌어지는 운기(運氣)의 조화에 대해 깨달았던 바를 끊임없이 이어서 궁구하였다.
특히나 그의 머릿속에 떠오른 물음은 이러하였다.
총통에서 쏜 포환이 떨어지는 궤적을 살피면, 미세하게나마 날아가는 도중 힘이 빠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는 멀리서 쏜 화살을 맞았을 때 사람이 크게 다치지 않는 것과 필시 같은 이치일 터였다.
그러나 달은 지구로 떨어지지 않으니, 이는 곧 지구에서 멀리 떨어진 곳의 기(氣)와 가까운 곳의 기가 다르게 작용하기 때문일 테다. 이산해는 둘을 각각 유형지기(有形之氣, 공기)와 무형지기(無形之氣, 진공)로 임시변통으로 구분하였다.
필시 지구가 달을 끌어들이듯, 그 유형지기 또한 무형지기와 달리 지구에 끌어들임을 당하여, 사람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것이리라.
“아, 그렇지요. 거기까지는 저도 들었던 듯합니다. 그렇게 유형지기를 끌어들이는 힘이 실재함을 격물(格物)로 입증하였다지요.”
처음에는 물로써 격물을 해보려 하였으나 도저히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았는데, 마침 병해가 물보다 여러 곱절 무거운 수은을 써보라 조언하여 마침내 뜻을 이루었다고 하였다. 유형지기를 끌어들이는 힘은 수은을 이 척 사 촌(대략 760mm) 이상 밀어올리지 못한다던가.
서양의 식자들이야, ‘자연은 진공을 혐오한다(Natura abhorret vacuum)’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으니 이 격물의 결과에 크게 놀라겠지만, 조선 사람들은 이미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큰 신뢰를 주지 않았으므로 이산해를 칭찬할지언정 딱히 결과를 유별나게 여기지는 않았다.
“헌데 그 얘기 들은 철수 녀석이 이상한 생각을 하게 되었지 뭐야.”
“이상한 생각이오?”
“그래. 그런 힘이 우리 주변에 있다면, 사람에게 도움 되도록 쓸 수도 있지 않겠느냐 하면서, 기물(奇物) 만들 생각을 하더라고.”
하필 기학재의 몇몇 사람들이, 처음 인천에 모여들었을 적에 물 끓이는 힘으로 뭔가를 해 보려고 했던 게 화근이 되었다. 공부는 안 하는 놈이 또 그런 쪽으로는 머리가 좋아서, 옛날에 주워들었던 것과 이산해의 격물 이야기를 짜맞추어 그런 발상을 해낸 것이다.
“물을 끓이는 힘으로 뭘 밀어올리고, 유형지기가 누르는 힘으로 도로 밀어내리고, 그렇게 하는 기물이 어디에 쓸모가 있는지 감이 안 잡히기도 하거니와, 얼마 전에 녀석이 그 짓을 하다가 크게 다칠 뻔했단 말이지.”
아들 녀석이 뭔가를 해보겠다는데 처음부터 말리고 볼 꺽정이는 아니었다. 허나 철수가 물 끓인 김의 힘이 얼마나 되는지 알아보겠다며, 속이 빈 철환 안에 물을 넣고 끓이는 격물을 하다가 졸지에 진천뢰 하나 터뜨리는 꼴을 만들어버리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그렇게 위험한 기물을 중인환시 하에 선보일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암.”
“허나 철수가 금법으로 막는다 한들 가만 있지는 않을 성미잖습니까? 누구 닮아서.”
저도 모르게 꺽정이 흉을 본 이이였는데, 딱히 틀린 말도 아니었으므로 꺽정이도 그냥 넘겨들었다.
“뭐, 그건 그렇지. 그러니까 내 생각에는 단서를 붙이는 게 어떨까 싶다.”
“단서요?”
“그래. 단서. 이번에 과한 욕심을 부리지 말고, 시일을 두고 천천히 궁리하여 다음 천하대회 때 출품하라고 하면 되지 않겠느냐?”
“다음 천하대회요?”
“아까부터 왜 계속 말꼬리만 잡느냐.”
“당수, 다음 천하대회는 열리기가 난망합니다.”
일말의 가감 없이 이이가 딱 잘라 단언했다.
“뭐? 왜?”
“당수, 당수께서는 이번 천하대회의 의의가 무엇이라 여기고 계십니까?”
“온 세상 사람을 사이좋게 한데 모아서는, 그들이 멀리서 챙겨온 금은을 알뜰살뜰하게 후려 먹는 것이지. 공자님께서도 멀리서 벗이 오면 기쁘다 하시지 않았던가.”
“첫째로, 제발 공자님 말씀을 그런 데 쓰지 마십시오. 둘째로, 정말 그 생각으로 천하대회를 열자 하신 겁니까?”
“자금성 기둥뿌리 뽑아먹을 생각으로 들뜬 서 별감에게 찬물 끼얹으면서 떠올린 생각이지. 그렇게 온갖 기물에 볼거리로 막 들뜨게 한 다음, 이렇게 대단한 기물들을 가지고 벌이는 우리 사업당 장사는 앞으로 번창할 일만 남았으니 잔말 말고 우리네 분표나 사라고 할 심산으로다가.”
참 한결같은 임 당수였다. 애시당초 이런 사람이었으니 알량한 권세에 만족하지 않고서 온 천하를 뒤엎게 된 것이겠지만.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가는 목이 다 떨어질 때까지 저어도 부족할 듯해, 이이는 돌아가는 고개를 바로잡고서는 임꺽정도 모르는 임꺽정 속뜻을 풀이하였다.
“잘 들으십시오, 당수. 당수께서는 그렇게 여기실지 몰라도, 세상의 소위 식자들은 그리 여기지 않을 겁니다.
당수의 말 한 마디에 온 세상의 귀한 이들과 귀하게 되기를 바라는 이들이 모여드는 까닭은, 이번 천하대회가 그만큼 고금에 보기 드물고 앞으로도 한동안 없을 일이기 때문입니다.”
“어째서 그런가? 한 번 모였으면 두 번 모일 수도 있는 거지.”
“뭐, 온 천하를 뒤덮는 대전란을 또 한바탕 일으켰다가 끝낸다면 그렇게 할 수도 있겠지요.”
“말하는 본새 하곤.”
“요지는 이겁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너무나 빠르게 변해 왔습니다. 나라의 제도는 그나마 쉽게 변할 수 있지만, 나머지는 그렇지 않습니다.
천하는 이삼십 년 전에 비할 수 없을 만큼 서로 가까워졌습니다. 그러나 아직 민서(民庶) 하나하나가 마음껏 나라 바깥 유람을 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닙니다.
천하의 물산 또한 이삼십 년 전에 비할 수 없을 만큼 활발히 교역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그 교역의 대부분은 사치스러운 물건이나 그 가치에 비해 가벼운 몇 가지 기물을 주고받을 뿐, 지금 강남과 화북 사이에 그러한 것처럼 면화나 곡식처럼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교역할 수 있는 지경에는 한참 미치지 못합니다.”
만약 이이가 파주에 홀로 남아 경전만으로 공부했더라면, 지금까지 그래왔듯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 여겼을 테다. 그리고 백날을 궁구해도, 이 천하의 상도(常道)에 무슨 문제나 잘못이 있다는 결론에는 이르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은 달랐다. 천하는 천천히, 그러나 확실히 어딘가로 나아가고 있었다. 장거정이 입증한 것처럼 중원의 인구는 늘어나고 있었고, 조선과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강남의 면화가 온 중원에 퍼지는 것은 오늘날에는 당연하게 여겨지지만, 국초만 해도 없던 일이었다. 서양 사람들이 큰 배를 만들어 세상의 모든 바다를 누빈 것도 고작해야 일백 년을 조금 넘겼을 뿐이었다.
허나 이이는 그 방향이 대체로 올바르다 확신하는 동시에, 그 빠르기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정확하게 짚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청와(정여립)의 논변이 아직 한참 이르다고 단언할 수 있던 것도 그 때문입니다.”
“헌데 그 말대로라면, 이번 천하대회에 만방에서 사람이 모여들 것이라고도 기대할 수 없지 않나?”
“이번 천하대회는 조금 다르지요. 천하대회와 만국화약은, 어떻게 보면 그 옛날 도산에서의 회맹보다도 더 중차대한 일, 요순과 단군이 나타나 정사를 펼치고 바빌론과 에기토(이집트)에 첫 임금이 섰던 그 시절 이래 처음으로 온 지구가 하나로 모이게 되는 일이라 할 수 있을 테니까요.”
한 시대의 끝. 대일통과 개명된 법도 사이 다툼의 종언. 황제 카를로스가 예견했던 절대군주의 시대가, 배태되자마자 매장당했음을 알리는 상례(喪禮).
그리고, 모든 것이 금은에 따라 움직이고, 하늘 아래 그 무엇도 예외가 될 수 없는 새로운 시대의 시작.
런던에서든, 리스본에서든, 코스탄티니예에서든, 아크라에서든, 그 의의를 아는 자는 기꺼이 한양으로 향하는 배에 몸을 실을 것이요. 모르는 자 또한 그것이 저에게 이득이 된다는 것만은 알기에 역시 앞다투어 배를 구할 것이다.
“그러니까, 결국 내가 거하게 천하의 도리를 비틀어버렸기 때문에 그 여세로 이런 크나큰 일을 벌일 수 있게 된 것이고, 다음에 이만큼 거하게 천하만물 뒤틀기 전까지는 이런 대회를 다시 열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런 말이로군. 맞나?”
그 말을 들은 꺽정이가 한참을 장고하더니, 조심스레 물었다.
“예, 바로 그것입니다.”
이이가 뭘 새삼스레 묻느냐며 가볍게 고개 끄덕였다.
“한 번만 다시 말해보려무나.”
“어... 당수가 천하의 도리를 뒤틀었다고요?”
그제야 꺽정이는 껄껄 웃었다.
“하하하! 천하의 도리를 뒤틀었다! 내가 해냈구나! 해냈어!”
이이를 보며 웃고, 가까이는 한양부터 멀리는 서쪽 어딘가에 있을 저의 벗들 모두를 향해 돌아가며 웃다 보니 어느새 아찔하여, 한 바퀴 빙 돌고는 철푸덕 마당에 드러누워 하늘 보고 마저 웃었다.
그리고 어째 부들거리는 듯한 땅의 차가움을 느끼자마자, 정신이 퍼뜩 들어 벌떡 일어났다.
“잠깐. 그러면 철수한테는 뭐라고 해야 하지?”
“그냥 솔직히 말씀하십시오. 무리했다가 몸을 다쳐 불효하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철수 심성이 나 닮았다면서. 녀석이 퍽이나 그런 말에 넘어오겠다.”
“그럼 이건 어떻습니까? 앞으로 일 년 남짓 남은 시일 동안에 과연 제대로 그 증기로 움직이는 기물을 완성할 수 있겠느냐, 운 좋게 몸은 다치지 않는다 한들 천하만방 사람들을 앞두고 다시 없는 망신이나 당하지 않겠느냐, 그렇게 설득하면 넘어오지 않을까요?”
“오, 그건 괜찮네.”
담장 너머에서 몰래 아버지 널찍한 등짝 따라 이곳까지 잠행해 온 철수가 엿듣고 있음을 꿈에도 모르는 꺽정이는, 그저 고개 끄덕이며 옷에 묻은 흙을 휘휘 털어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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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해가 만유인력의 이치를 (엄밀한 수학적 증명이 뒷받침되지는 않았기에 절반뿐인 깨달음이지만) 깨닫는 대목에서 해설한 것처럼, 서양으로부터 태양계 모형을 받아들인 동아시아 사유체계 내에서 기의 흐름으로 만유인력을 해석하는 것은 실제로도 나타난 인식이었습니다. 작중에서는 거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게 되었지요.
이산해가 뉴턴에 이어 또 한 번 저도 모르게 도둑질한 대기압의 발견은 본디 토리첼리(Evangelista Torricelli)의 업적입니다. 원 역사의 유럽에서는, 진공펌프로 물을 약 10.3m 이상 끌어올리지 못하는 현상이 관측된 뒤에야 비로소 대기압의 발견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문제해결 과정이 이루어졌지만, 작중 조선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이라면 무조건 안 좋은 쪽으로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풍토가 있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과 달리 무조건 진공이 존재할 것이라는 가정 하에서 현상을 끼워맞추면서, 얼떨결에 물 대신 훨씬 관측이 편리한 수은으로 대기압 실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토리첼리의 실험은 파스칼의 기압 측정으로 이어지는데, 압력에 대한 SI 단위 파스칼(Pa)은 여기서 유래했습니다.)
수은은 유럽이나 중동과 마찬가지로 동아시아에서도 금속제품의 도금이나 염료 제작 등을 위해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한반도에서도 독자적인 수은 추출법이 삼국시대부터 발달한 것으로 추정되며, 채광성 문제로 다시 고려시대에는 일본이나 아라비아 등지로부터의 수입에 의존하게 되었다가 1492년 주사로부터 액체 상태 수은을 추출하는 방법이 다시금 김중보(金仲寶)에 의해 (재)발견됩니다. 1834년 간행된 이규경의 유서(類書) 『오주연문장전산고』 에는 중국뿐 아니라 조선에서 개발된 여러 수은 추출법 및 수은을 활용한 화학처리 기법들이 수록되어 있고, (과학적이지는 않지만) 수은의 독성 및 이에 대응하는 방법 역시 기록되어 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