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029화비올라는 제논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이 모든 대화도 공작에게 보고가 올라갈 거다.
마침 힉슨이 좋은 기회를 만들어줬으니, 십분 활용하기로 했다.
“비첸은 은밀한 살수로서 훈련을 받았어. 그러니까 이렇게 뻥 뚫린 장소에서의 대련에는 맞지 않아.”
비첸의 장기는 은밀한 기습이다.
훤한 대낮에 ‘우리 서로 싸우자!’
하고 펼치는 대련에는 맞지 않는 단도술을 익혔다.
“그에 반해 아저씨의 검은 패도적인 검이잖아. 툰드라는 아저씨의 검을 배웠으니, 이런 공개적인 대련에서는 유리하겠지.”
“그래서?”
“지금 상황에서 상성은 사실 툰드라가 좋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첸이 이긴다.
며?”
“아직 숙련도에서 비첸에게 미치지 못하니까.”
툰드라가 아무리 천재여도 훈련 기간에서 차이가 너무 많이 났다.
“그러니 특별한 실수만 없다면 비첸이 이길 거야.”
“특별한 실수라면?””
“갑자기 너무 흥분해서 큰 동작을 취한다거나.”
“취한다거나?”
“방심해서 일부러 틈을 보여주다가 당한다거나. 그런 경우가 있겠지. 비첸은 아직 어리고, 지금 모양새로 보니, 놀이라고 생각하는 거 같거든.
그러니까 툰드라에게도 기회는 있어.”
힉슨은 한동안 황당하다는 듯 비올라를 쳐다봤다.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야, 비올라.”
힉슨이 킥킥대며 웃었다.
“비올라.”
“응?”
“너 솔직히 말해.”
“뭐가?”
“너 몇살?”
“일곱 살.”
“일곱 살 아니지? 너 동안이지?”
일곱 살더러 동안이냐니..
저게 말인지 방구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비올라는 조금 뜨끔하기는 했다.
그렇다고 내 안에 스물한 살 있어요! 하고 광고할 수는 없었다.
그때.
“으아아아아!”
기합 소리가 들려왔다.
***
“으아아아아!”
툰드라가 목검을 크게 휘둘렀다.
후웅!
목검이 허공을 갈랐다.
비첸은 툰드라의 목검을 가볍게 피해낸 뒤 헤헤 웃었다.
“헤헤. 아직 어설프다!”
동작이 너무 컸다.
빠르기는 했지만 저렇게 해서는 체력이 금방 소모된다.
열린 심장이 보였다.
찌르면 끝이다.
“안 찔러야지.”
비첸에게 있어서 툰드라는 쉬운 상대였다.
빈틈이 많은 초보자.
툰드라도 그걸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와는 별개로 화가 났다.
‘젠장!’
남주로서의 승부욕이 뿜어졌다.
조금 더 흥분했다.
몸동작이 더 커지고 몸에 힘이 더 많이 들어갔다.
그럴수록 비첸에게는 유리해졌다.
그런데 그때, 비올라와 힉슨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이 보였다.
…주인님?’
‘비올라다!’
툰드라와 비첸은 거의 동시에 비올라를 발견했다.
그리고 서로 다른 생각을 했다.
‘주인님께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여드릴 수는 없어.’
‘좋았어. 나는 무척 세다는 걸 보여줘야지.’
오히려 툰드라는 이성을 되찾았다.
머리가 차게 식었다.
몸에서 힘을 뺐다.
‘실력은 내가 열세.’
그러니까 틈을 잘 노려야 한다.
지금 비첸은 방심하고 있다.
‘기회는 한 번이야.’
그 작은 틈. 그 틈을 노려 공격하면 한 번의 기회는 생길 것 같았다.
그의 이성이 차게 가라앉았다.
그에 반해 비첸은 조금 신이 났다.
툰드라와는 반대로 흥분했다.
‘나는 오빠니까!’
오빠니까 강한 모습을 보여주기로 했다.
‘한 번에, 멋있게 끝내 버려야지.’
비첸에게 있어서 툰드라는 약자였다.
언제든지 끝낼 수 있었다.
자만심과 방심.
그리고 비올라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한데 어우러졌다.
몸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툰드라가 입술을 깨물었다.
‘온다.
아까보다 동작이 커졌다.
그래서 읽어낼 수 있었다.
‘내 왼쪽을 점하고 거리를 좁힐 거야.’
기회를 잡았다.
빠르게 목검을 휘둘렀다.
탁!
목검에 무엇인가가 걸렸다.
“그만.”
힉슨이 툰드라와 비첸 사이에 끼어들었다.
한 손으로는 툰드라의 목검을 잡았고, 또 한 손으로는 비첸의 단도를 붙잡았다.
“이번은 무승부다.”
비첸은 결과에 승복할 수 없었다.
“말도 안 돼!”
“말이 뭐가 안 돼?”
“나는 얘 심장을 찌를 수 있었다.
고!”
“대신 네 목이 잘렸겠지. 잊었냐?
얘 검은 장검이야.”
만약 진검 승부였다면 툰드라는 심장을 관통당했을 거고, 비첸은 목이 잘렸을 거다.
“다 알고 있었어! 피할 예정이었다.
고!”
“알기는 개뿔.”
힉슨이 주먹으로 비첸의 머리를 한대 내려쳤다.
쾅!
소리가 났다.
가볍게 친 것 같은데, 교통사고가 나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
비첸은 억울해했다.
“왜 때려!”
“억지 부리는 꼴이 꼴사나워서.”
“우씨.”
비첸의 눈에 살기가 깃들었다.
“어쭈?”
힉슨은 비첸의 머리를 또 때렸다.
벨라투가 내에서, 벨라투 순혈의 머리를 쥐어박을 수 있는 사람은 익슨이 거의 유일했다.
“죽여 버릴 거야.”
“능력이 된다면 얼마든지.”
“조금만 기다려. 진짜 죽일 거니까.”
“그것참 흥미진진한데?”
비올라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농담처럼 오가는 저 말이, 사실은 모두 진담이다.
둘 다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비첸.”
“비올라. 이건 그니까 내가 진 게 아니고, 이게 어떻게 된 거냐면
“자.”
비올라가 품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엥? 계약서?”
소원을 들어준다던 계약서였다. 비첸이 피로 사인했었다.
“네가 아무리 강해져도 이 아저씨를 죽이면 안 돼.”
“왜?”
“그게 내 소원이니까.”
“으잉?”
비첸은 계약서와 힉슨의 얼굴을 번갈아 가면서 쳐다봤다.
아무래도 납득할 수 없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계약 이행을 안 할 생각이야, 오빠?”
“하, 하긴 할 건데……….”
비첸은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못내 억울한 듯했다.
어쩔 수 없었다.
비첸은 진짜 한다면 하는 아이고, 아직 나이가 어리니 폭풍 성장을 거 듭할 거다.
만에 하나, 진짜로 힉슨을 죽이면 문제가 커진다.
이 소설의 중심축이 되어줄 남주도 같이 사라져 버릴 테니까.
‘그건 안 될 말이야. 남주는 훌륭하게 성장해야 해.’
그래서 잘 큰 남주와 함께 1공녀라인을 탈 거다.
그래야 이 공작가를 안정화시키고, 사람 사는 냄새 나는 공작가로 탈바꿈시킬 수 있다.
완벽한(?) 계획을 망가뜨릴 수는 없었다.
비올라가 말했다.
“약속은 지켜야지.”
“그, 그 건…!”
“오빠잖아. 그렇지?”
“무, 물론이지.”
“그럼 약속 지킬 거지?”
“으, 응.”
비첸은 어딘가 속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비올라의 말이 틀리지 않았음을 인정했다.
오빠로서 당연히 약속은 지켜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계약서까지 있는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벨라투로서의 위신이 서지 않는다.
툰드라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볼썽사나운 모습을 보여 드려서 죄송해요. 이기고 싶었는데…….”
툰드라의 모습을 구석구석 살펴봤다.
작은 생채기가 있기는 했지만 큰 상처는 없었다.
“아냐. 잘했어. 안 다쳤으면 됐어.”
툰드라가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잘했어.’
이 말도 조금 기뻤다.
‘안 다쳤으면 됐어.’
저 말은 아주 많이 기뻤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안 다쳤으면 됐다는 저 말이, 왜 이렇게 좋은지 모르겠다.
‘잘해야 해.’
더 잘하기로 했다.
비첸을 언젠가 넘어설 것이다.
오늘 가능성을 봤다.
시간은 걸리겠지만, 비첸보다 강해져서 조금 더 칭찬을 받고 싶었다.
툰드라와 비첸의 눈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그러려면…… 비첸, 당신을 죽여야 할지도 모르겠네요.
비첸도 툰드라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나는 널 죽일 거야. 잡종.’
방금 화가 났다.
비올라가 저 개한테는 잘했다고 칭찬을 해줬다.
이유는 잘 모르겠는데 그게 마음에 안 들었다.
‘왜 개한테만 칭찬해?”
나도 너한테 칭찬받고 싶은데.
왜 나한테는 안 다쳤는지 안 물어봐?
나도 칼 들고 싸웠는데!
자신의 마음이 외치는 소리를, 비첸은 듣지 못했다.
‘짜증 나.’
그냥 이유 없이 짜증 난다고만 생각했다.
툰드라가 비올라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런데 주인님.”
툰드라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 모습이 극상의 예를 취하는 어린 기사 같았다.
그의 눈동자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강력한 갈망이 녹아 있었다.
강렬하게 간식을 탐하는 강아지 같았다.
***
며칠 전, 툰드라는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했다.
금색 털을 가진 커다란 강아지가 주인이라 짐작되는 귀부인에게 짖기도 하고 옷자락을 잡아끌기도 하는 광경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귀부인이 그 버릇 없어 보이는 행동을 보며 귀엽다고 좋아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 개는 귀부인의 얼굴을 핥기까지 했는데 툰드라에게는 엄청나게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이유를 모르겠어.’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그는 결국 귀부인들의 전유물이라 여겨지는 ‘반려인이라면 꼭 알아야 할 반려견 심리백서(반반백서)‘라는 책을 몰래 사서 읽어보기 시작했다.
그곳에는 충격적인 내용이 가득 담겨 있었다.
‘개가 주인에게 놀아달라고 보채?’
귀부인의 옷자락을 물고 흔들던 그 모습이 주인에게 놀아달라고 보채는 모습이었단다.
간식을 달라고 당당하게 요구해?’
개의 특성마다, 그리고 교육에 따라 요구 행동이 달라진다고도 했다.
어떤 개는 얌전히 엎드려서 예쁜 눈으로 바라보기도 하고, 어떤 개는 주인에게 간식을 내놓으라며 짖기도 하며, 어떤 개는 벌러덩 드러누워서 시위하기도 한단다.
삐지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자신의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내기도 한단다.
그런데 그냥 둬?’
툰드라는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반려견이 이런 거구나………!’
놀아달라고 보채기도 하고, 시위도 하고, 투정도 부리고, 꼬리를 흔들며 애교도 부리고, 간식 달라고 짜증도 내고, 주인과 감정적으로 교류하는 생명체였다.
‘내가 생각하던 것과 많이 달라.’
그는 신세계를 알게 되었다.
그날부터 그의 꿈은 반려견이 되었다.
*
“그런데 주인님.”
툰드라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뭐야?’
비올라마저도 뜨끔할 정도의 간절함.
간절함을 넘어 거의 경건함이 느껴질 정도의 진중한 표정으로, 툰드라가 입을 열었다.
“좋은 반려견이 될게요.”
머리를 앞으로 내밀었다.
조신하게 무릎 꿇고 있는 것이.
당장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세요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비올라는 속으로 황당해했다.
‘반려견?’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살던 비올라에게 반려견이라는 단어는 아주 익숙했다.
그런데 그 단어가 사람에게 붙은 것은 익숙하지 않았다.
‘뭐라는 거야, 도대체?’
왜 반려견이라고 하는 건지 이유는 알 것 같았다.
그래서 미치겠다.
“그러니까, 네가 반려견이라고?”
“네. 옆에 있어 주시겠다고 했잖아요.”
그건 그랬지.
근데 그게 반려견이랑 무슨 상관이야.
“옆에 있는 걸 반려라고 한대요.”
“…….”
아. 그러니까.
옆에 있는 게 반려.
너는 개.
그러니까 반려견이 꿈이라고?
“그래서 반려견이 제 꿈이에요.”
“아직 허락해 주시지 않는 건가요?”
아니. 잠깐만.
그게 허락하고 말고 할 일이야?
내가 비올라를 연기하기 위해서 개라고 한 건 맞아.
우리 사이에 나름의 계약이 오간 것도 맞고,
‘그런데 반려견이라니?’
비올라는 속으로 황당했지만 이내 팔을 들어 올렸다.
주인으로서 칭찬해 준 상태니, 이정도는 해주어도 될 것 같았다.
슥슥—
머리를 쓰다듬었다.
툰드라의 눈이 반달을 그렸다.
“오늘 칭찬이.”
그 반달로 가늘어진 눈 사이로 일종의 광기가 느껴졌다.
아, 뭔가. 살짝 아닌 것 같은 기분인데.
뭔가 약간 어긋난 느낌인데.
“기쁘네요.”
비올라는 무표정으로 툰드라를 쳐다봤다.
도무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수 없었다.
그래서 그냥 보기만 했다.
1초, 2초.’
5초 이상부터는 위험하다.
슬슬 시선을 피해볼까?’
피하는 게 아니라 무시하는 것처럼 보여야 한다.
자연스레 시선을 옮기려던 찰나.
힉슨이 짝! 짝! 가볍게 박수를 쳤다.
“이제야 알겠네, 비올라. 네 비밀을.”
힉슨의 눈이 비올라를 향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