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030화
“이제야 알겠네, 비올라. 네 비밀을.”
힉슨이 말했다.
“내 비밀?”
한아린은 뜨끔했다.
비밀이라니.
설마 빙의자인 걸 알아차렸다거나한 건 아닐 테고.
“너, 용병술을 타고났구나.”
힉슨은 혼자서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 정도 통찰력이 있으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기술도 상당할 테지.”
아마도 저건 타고난 영역이리라.
역대 살성을 가지고 태어난 이가 모두 저랬었나.
‘아닌 것 같은데.
아무튼 비올라는 특이한 아이였다.
“그래서 진짜 모습을 감추고 내게 접근한 거였어. 도움을 바라는 어린아이의 모습을 하고서.”
“내 진짜 모습이 뭔데?”
“환영 만찬회에서 보여준 철혈 공녀의 모습?”
…
철혈 공녀?”
비올라도 얼핏 그런 얘기를 들은 것 같기는 했다.
입양된 공녀의 몸속에는 푸른 철혈(鐵血)이 흐른다는 소문.
그 누구보다 벨라투스러운 입양 딸이 가문에 입양되었다는 소문.
‘진짜 소문이 돌고 있나 봐.’
비올라는 오해를 바로잡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사실 그건 오명이 아니라 위명이었으니까.
“그래. 철혈 공녀. 쪼끄만 게 아주 맹랑하기 그지없어.”
비올라는 뻔뻔하게 되물었다.
“그래서. 싫어?”
“아니, 뭐, 누가 싫댔냐? 그냥, 귀여워서 그래, 귀여워서.”
그 말에 제논이 움찔했다.
‘힉슨 경도…… 알아차리셨습니까?’
제논은 혼자서만 알고 싶은 비밀을 누군가에게 들킨 것 같은 기분을 느꼈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한편, 툰드라는 고개를 들었다.
‘나를 봐주시면 좋겠는데.’
비올라가 자신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비올라에게는 비올라만의 사정이 있었지만, 툰드라는 그 사실을 몰랐다.
나를 좀 봐주세요.
간절함을 담아 계속 쳐다봤다.
주인의 눈길이 애탔다.
그리고 비올라도 툰드라의 눈빛을 읽었다.
‘그만 좀 쳐다봐!’
저 좀 쳐다봐 주세요. 제발요.
하는 어린 강아지 같은 모양새였다.
그렇지만 쳐다볼 수 없었다.
괜히 또 진짜 비올라가 튀어나올 수도 있으니까.
비첸은 그 묘한 기류를 읽었다.
비올라가 툰드라 녀석과 눈도 마주치지 않고 있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헤헤.”
그는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볼을 살살 긁으며 웃었다.
그러던 차, 비올라가 말했다.
“오빠. 나랑 잠깐 얘기 좀 하겠어?”
“나랑? 둘이? 우리 둘이?”
쟤 빼고?
우리 둘만?
우리. 둘.만?
비첸의 눈빛이 굉장히 부담스러웠다.
“어. 둘이.”
“쟤는 빼고?”
“응.”
비첸의 입이 귀에 걸렸다.
툰드라를 많이 의식했다.
“가자! 얘기하러! 단! 둘! 이!”
앞장서서 걷던 비올라는 비첸의 함박웃음을 보지 못했다.
***
비올라의 방.
비첸이 의자에 앉았다.
양팔을 두 허벅지 사이에 넣고 몸을 앞쪽으로 쭉 뺐다.
비올라의 말을 한껏 기대하는 모양새였다.
“무슨 얘기?”
“아까 내 개랑 눈빛 나누는 거 다 봤어.”
소설로 표현하자면,
「“내가 언젠가 너를 죽여줄게.”
“나야말로 당신을 죽여 드리겠습니다.」
이 정도의 눈빛이 오갔다는 걸 읽어냈다.
비올라 입장에서, 그래서는 곤란했다.
다행히 비올라는 비첸을 다루는 법을 몸으로 터득했다.
“나는 오빠가 아까 대련에서 왜 졌는지 알아.”
“안 졌어. 무승부야!”
“진 거야.”
특별한 변수만 없다면 무조건 비첸이 이겼어야 맞다.
그런데 무승부였다.
그 말은 곧 패배했다는 뜻이었다.
월등한 실력으로 무승부를 당한 거니까.
“아냐! 분명히 무승부였어!”
비올라가 한숨을 내쉬었다.
확실히 애는 애다. 풀어서 설명해 주기로 했다.
“오빠가 실력이 훨씬 더 뛰어나잖아. 맞지?”
“그으럼! 당연하지! 나 세.”
비첸이 한껏 잘난 체를 했다.
어깨를 쭉 펴고 콧대를 잔뜩 세우면서.
아냐!
칭찬 아니라고!
“근데 무승부면 진 거지. 더 센 사람이 더 약한 사람과 무승부였으니까.”
“아무튼 결과는 무승부야.”
비올라가 인상을 찡그렸다.
“멋없어.”
“엥?”
비첸의 몸이 움찔했다.
저 놀라운 균형 감각을 가지고 있는 살인귀 꿈나무가 의자에서 굴러떨어질 뻔했다.
그만큼 심적 충격이 컸던 것 같다.
비첸은 비첸 나름대로 합당한 추론을 했다.
“내가 져서 그래?”
“아니.”
사실 비올라는 누가 이기든 상관없었다.
또 이겼다고 해서 더 멋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을 것이다.
사실 비올라 입장에서는, 이기고 위험한 등장인물은 별로다.
안 이기고 안 위험한 등장인물이 더 좋다.
비올라가 말했다.
“벨라투라면, 자신에게 벌어진 일에 대해 억지 주장을 할 것이 아니라, 그 결과를 토대로 더 발전할 생각을 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게 합리적이잖아.”
“……그, 그건…….”
“오빠는 그 순간 평정심을 잃었고, 동작이 너무 커졌어. 그래서 오빠보다 훨씬 약한 툰드라에게 공격을 허용한 거야. 약한 툰드라는 오빠의 유일한 약점을 잘 짚어냈고, 오빠는 잘 못한 거고, 툰드라는 잘한 거야.”
진성 독자였던 한아린은 비첸의 심리를 단숨에 꿰뚫어 봤다.
오빠로서 이만큼이나 강하다!
나는 세다!
이런 걸 강력하게 주장하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대련이 끝났을 때도 오빠는 툰드라를 노려봤지.”
“응. 무승부였단 말이야. 근데 넌 툰드라한테만…….”
“툰드라한테만?”
“됐어. 말 안 할래.”
무승부였는데 네가 개한테만 칭찬해 주고, 나한테는 안 해줘서 그렇잖아. 그리고 걔만 걱정해 줬잖아.
여덟 살 비첸은 괜스레 심술이 났다.
“그게 멋이 없다는 거야.”
“그게 왜?”
“오빠는 벨라투잖아.”
비올라는 비첸 다루는 법을 많이 터득했다.
“그리고 툰드라는 그냥 내 개고.
맞지?”
“응.”
“벨라투는 늘 강자여야 해. 내 말이 틀려?”
“안 틀려.”
“환영 만찬회에서 아버지를 보면서 느꼈어. 아버지는 여유로웠어. 나는 아버지를 보면서, 저게 강자의 여유구나, 그런 걸 느꼈어.”
비첸은 할 말을 잃었다.
비올라가 하는 모든 말이 맞았다.
“강자라면 여유로울 수 있어야 해.
오빠가 그렇게 아등바등하는 건, 강자가 아니라는 증거잖아.”
“난 내 오빠가 강하면 좋겠어.”
비첸이 침을 꿀꺽 삼켰다.
왠지 비올라의 말이 모두 맞는 것 같았다.
“그러니 내 개 따위를 상대로 그렇게 살기를 드러내지 마.”
툰드라가 안전하게 잘 성장해야 한다.
그사이 비첸이 툰드라를 크게 다치게 하거나 죽게 하면 안 된다.
그러니 제발!
남주가 무럭무럭 잘 클 수 있도록 도와주라!
“그래야 벨라투답잖아. 강한 오빠가 되어줘.”
비첸이 흥, 하고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만 기분은 좋았다.
비첸은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다시 비올라를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걔는 그냥 개고, 나는 오빠인 거잖아.”
어딘가 묘하게 핀트가 어긋난 느낌이긴 한데.
틀린 말은 아니어서 동의해 줬다.
“응.”
“하긴. 내가 개 같은 녀석을 진심으로 상대하는 건 좀 그래. 그렇지?
나는 무려 벨라투인데.”
비올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품격 잃지 말고 강자의 여유를 가져줄 거지?”
“그러면 좀 멋있을까?”
비첸의 눈빛에는 묘한 기대감이 담겨 있었다.
원작 속에는 이런 내용이 없었다.
비첸과 비올라는 작품 초반부에 대등한 성장 속도를 보이면서 라이벌로 성장한다.
비올라는 느낄 수 있었다.
나랑 라이벌 느낌이
‘묘하게…
아닌데?’
오묘한 느낌이었다.
왜인지, 비첸이 자꾸 ‘멋있음에 집착하고 있다.
원작에는 전혀 없던 내용이었지만, 아무튼 비올라에게는 잘된 일이었다.
채찍을 많이 휘둘렀으니 이제는 당근을 줄 차례였다.
“멋있을 거야.”
“헤헤. 비올라는 비첸이 멋있으면 좋겠어?”
멋있고 자시고,
칼 들고 안 쫓아오면 좋겠어.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그냥 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여줬다.
그러자 비첸은 더욱더 화사하게 웃었다.
‘멋있어져야겠다.
그러려면 역시 여유를 찾아야 할것 같았다.
비올라의 말에는 틀린 구석이 없었다.
‘역시 내가 몸소 개를 죽이는 건 좀 그래.’
개가 발악하면서 열심히 덤벼들어도 좀 봐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는 죽이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비첸은 나름대로 흐뭇한 상태로 제 방으로 돌아갔다.
룰루, 콧노래 소리가 문을 넘어 비올라의 방 안까지 들려왔다.
비올라는 의자에 앉은 채 고개를 갸웃했다.
‘이거 잘 가고 있는 거 맞아?”
전체적으로 보면 잘 가고 있는 건 맞는 것 같다.
의도한 대로 대부분 잘 흘러가는 것 같은데, 어딘가 묘하게 어긋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기분 탓이겠지?’
그날 이후로 며칠이 흘렀다.
비올라는 매일같이 한 사람을 기다렸다.
소설 속에서 ‘며칠 후’라고 언급이 되어 있을 뿐, 정확한 날짜는 언급 되지 않았었다.
‘슬슬…….’
헤라가 찾아올 때가 됐는데. 다음 에피소드인 ‘헤라와의 만남’이 이어질 때가 됐다.
헤론 공작과의 첫 만남에서 단추를 제대로 끼웠듯.
헤라와의 첫 만남에서도 단추를 제대로 끼워야 한다.
원작 속 비올라와는 다른 삶을 살고 싶다.
‘정말 중요한 만남이 될 거야.’
다시 또 며칠이 지났다.
‘뭐지?’
무려 2주의 시간이 흘렀지만 헤라는 나타나지 않았다.
‘왜 안 나타나지?’
뭔가가 바뀐 것 같았다. 시간이 점점 흐르고 있다. 괜스레 마음이 초조해졌다.
‘시간이 너무 많이 흐르면 안 돼.”
원작 내용이 지나치게 많이 바뀌면 안 된다.
아는 것이 힘이다. 알아야 바꿀 수 있다.
그래서 결정했다.
“제논, 이 쪽지를 헤라 언니한테 보내.”
목마른 자가 우물 판다고 했다.
헤라가 먼저 찾아오지 않는다면 이쪽에서 낚싯바늘을 먼저 던지기로 했다.
모른 척하기에는 너무 월척이었다.
“어떤 내용인가요?”
“그냥. 친하게 지내려고.”
제논이 쪽지를 받아 들었다.
“지금 전달할까요?”
“그래.”
그리고 하루가 지났다.
똑똑.
방문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왔다!’
헤라임을 직감했다.
아마도 헤라의 집사라 짐작되는 남자가 말했다.
헤라 공녀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들어가도 괜찮겠습니까?”
제논이 물었다.
“열어드릴까요?”
“그래.”
문이 열렸다.
“들어와, 언니.”
비올라의 귀에 환청이 들리는 느낌이었다.
삐빅! 부자 어린이입니다.
비올라가 환하게 웃었다.
이곳에 빙의한 이래로 가장 밝은 웃음이었다.
‘올 게 왔어.’
집사가 헤라의 휠체어를 밀었다.
헤라는 수수한 느낌의 푸른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은색 머리가 반짝반짝 빛나는 느낌이었는데, 창백하기 짝이 없는 피부와 참 잘 어울렸다.
휠체어에 앉은 그녀가 비올라 앞에 도착했다.
“집사는 나가 있어.”
“알겠습니다.”
척하면 척!
비올라도 재빨리 말했다.
그 어느 때보다 눈치가 빨랐다.
“제논도 나가 있어. 언니랑 둘이 얘기하게.”
“알겠습니다. 다과를 준비할까요?”
나는 딸기 에이드!
말하려고 했다가 참았다.
“언니는? 다과 먹을래?”
“난 됐어.”
비올라는 누구보다 빠르게 말을 이었다.
“나도 됐어.”
살인귀 꿈나무 오빠의 심기는 거슬러도, 부자 꿈나무 언니의 심기는 거스르지 않기로 했다.
헤라와 비올라.
단둘만 이 자리에 남았다.
둘 사이에 묘한 침묵이 흘렀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은 헤라였다.
“어떤 이유로 나를 모욕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