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입양 딸 역할을지나치게 잘 해버렸다-63화 (63/201)

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063화결투가 벌어졌고, 둘의 결투는 무려 한 시간 동안이나 이어졌다.

챙!

검과 검이 부딪쳤다.

“헉…… 헉…!”

“헉, 헉!”

제르미와 툰드라 둘 다 지쳤다.

툰드라는 여기저기 가벼운 상처를 입었고 제르미는 깨끗했다.

실력적으로 제르미가 더 우위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툰드라가 타고난 천재여도, 검을 익힌 시간 자체가 너무 차이 났다.

비올라는 주의 깊게 둘의 결투를 지켜보았고, 힉슨이 피식 웃고서 말했다.

“그래도 꽤 잘 싸우지?”

“응.”

“뭐, 이기기는 힘들겠지만.”

“아니. 툰드라는 이겨야 해. 나를 대신해서 싸우는 거니까.”

제르미와 툰드라가 다시 부딪쳤다.

제르미의 검이 날렵하게 툰드라의 목을 향해 뻗어 나갔고, 툰드라는 잽싸게 검을 피하고서 제르미를 향한 검을 찔러 넣었다.

“툰드라. 내 사냥개가 그것밖에 못해?”

툰드라는 분명 잘하고 있었다.

5년 배운 검술로 10년 넘게 배운 검술가와 막상막하의 실력을 보여주고 있으니까.

비올라의 개입으로 인해 결투가 잠시 멈추었다.

“헉……… 헉…!”

툰드라는 많이 지쳤지만 눈빛은 흉흉했다.

오히려 눈빛의 기세는 처음보다 더 살아난 상태였다.

“제르미 공자는 발검 전 검지에 힘을 주는 버릇이 있어.”

비올라가 스스로 발견한 것은 아니었다.

소설 속에 언급되는 내용이었고 훗날 이것은 제르미에게 큰 약점으로 자리 잡게 된다.

“실초와 허초를 구별하면 도움이 될 거야.”

진짜 공격을 할 때는 검지에 힘이 들어간다.

검지에 힘이 들어가면서 상대적으로 새끼손가락이 살짝 펴진다.

제르미의 나쁜 습관이었다.

“그리고 특별한 리듬을 느껴. 단순한 감각이 아니라 패턴을 읽어서 싸우란 말이야.”

제르미는 특별한 패턴을 가지고 싸우고 있다.

처음 공격은 무조건 가벼운 찌르기로 시작한다.

“지금 폭풍 검의 모든 공격은 찌르기에서 시작되고.”

그 움직임 자체는 단순했다.

다만 너무 빠르고 자연스러워서 대응하기 어려울 뿐.

“찌르기의 반응에 따라 제르미 공자의 다음 동작이 결정돼.”

뒤로 물러나면 열에 아홉은 깊이 들어온다.

만약 맞받아치려 하면 오른쪽 사이 드로 빠지는 스텝을 구사한다.

그 말을 들으며 제르미는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진짜네?’

비올라의 말이 맞았다.

무의식에 남아 있던 동작들이 비올라의 눈에 훤히 보인 것 같았다.

‘역시 벨라투인가.’

원래 자신보다 고수의 허점은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비올라는 자신의 허점을 너무나 잘 읽어냈다.

‘나보다 더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겠지?’

아직 어려서 신체 능력이 조금 떨어지기야 하겠지만, 적어도 흐름을 읽는 눈만큼은 타고났다는 얘기였다.

이대로 시간이 흘러 몇 년 뒤가 되면, 어쩌면 비올라는 자신을 훨씬 능가하는 강자가 되어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챙!

검과 검이 맞부딪쳤고 하나의 검이 부러졌다.

제르미의 검이 부러져 버렸다.

본래 사용하던 검이 아닌 싸구려 검인지라 충격을 오래 버티지 못한 듯했다.

털썩.

제르미의 검을 부러뜨린 툰드라는 기절해 버렸다.

“자, 무승부.”

한 명은 검이 부러졌고 또 한 명은 기절했다.

제르미는 아쉽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비올라에게 반말을 하겠다고 선포했지만 반말을 할 수 없었다.

개(犬)인 툰드라와 무승부였으니, 그 주인인 비올라에게는 패배한 셈이었다.

“네, 무승부네요. 검을 익힌 지 몇 년 안 된 걸로 아는데 과연 반려검은 반려검이군요. 힉슨 경이 제자로 거두실 만한 것 같아요.”

그리고 그 시선이 비올라에게 옮겨갔다.

제르미가 싱긋 웃었다.

“그리고 비올라 공녀님. 고마워요.

덕분에 나쁜 습관을 캐치했어요.”

“도우려고 한 말은 아니에요.”

소설 속에서는 이렇게 표현되었다.

「“좋은 가르침 감사합니다, 메데이아공녀.”

“언젠가 반드시 당신을 넘고 벨라투를 함락시키겠습니다. 오늘은 살려주어 고맙습니다.”

그 시점에서 메데이아는 원수이면서 은인이기도 했다.

비올라가 짚어준 제르미의 약점들은 사실 훗날 메데이아가 짚어주는 것이기도 했다.

“제르미 공자는 폭풍 검을 익히고 있겠지요?”

“네, 맞아요.”

“폭풍 검은 툰드라의 검과 마찬가지로 기세가 강렬하고 마나 소모가 굉장히 빠른 패도적인 검이죠?”

“네.”

“요르가 명상식을 수련하면 크게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

“요르가 명상식이요?”

그 말을 듣자마자 힉슨이 푸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요르가 명상식은 이 세계의 귀족영애들이 익히는 호흡법과 기초 운동법이었다.

그러나 훗날 제르미에 의하여 재평가를 받게 되는 것이 바로 요르가 명상식이기도 했다.

「“내가 요르가 명상식을 5년만 일찍 익혔어도 훨씬 큰 성취를 이뤄냈을니다.”

어쨌든 지금 시점에서 요르가 명상식은 무인(武人)들이 익히는 종류의 명상식은 아니었다.

“당신의 개와 겨우 무승부를 일궈낸 것에 대한 비웃음인가요?”

“그럴 리가요. 전 최선을 다한 결투를 존중해요. 내 개에게 최선을 다해줘서 고마워요.”

제르미는 재미있다는 듯한 눈으로 비올라를 한참이나 쳐다봤다.

비올라는 진심처럼 보였다.

‘요르가 명상식을 배워보라고?’

장난 같지는 않았다.

왜 비올라가 저런 말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제르미는 일단 납득했다.

“알겠어요. 비올라 공녀의 말을 깊이 새겨듣도록 해보죠. 어쨌든 저는 오늘 비올라 공녀 덕택에 나쁜 습관을 알아차렸고 발전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건 다행이네요.”

“그리고 공녀님의 개와 동률을 이루었으니, 공녀님에게는 패배한 셈이고요.”

“네.”

“제 모든 행동을 진심으로 사과합니다. 그저 공녀님과 친해지고 싶은 마음에 의욕이 앞섰어요.”

“말로만 사과하는 거예요?”

“원하는 게 있어요?”

비올라가 가볍게 웃었다.

제르미는 저 미소가 왠지 모르게 두렵다고 느꼈다.

눈 뜨고 코 베일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제르미 공자의 호의는 이미 알고 있었어요.”

“정말요?”

“그 과정과 방법이 틀렸을 뿐.”

“……네.”

“그렇기에 저는 그 호의를 받아들이기는 할 거예요.”

일명 ‘미치광이 마법사의 실험실’이라고 이름 붙인 곳.

그곳에서 제르미는 ‘켈’의 성을 가진 정령과 계약하게 되는데 그 정령은 훗날 바람의 정령 왕으로 성장한다.

‘나도 거기서 정령과 계약할 수만 있다면…….’

그곳에서 정령을 만날 수만 있다면 인생이 편다고 할 수 있다.

저 ‘미치광이 마법사의 실험실’이라는 공간은 아주 특별한 곳이어서 정령과의 친화도가 높지 않아도 정령과 계약할 수 있는 신기한 유적지 이기도 했다.

거기서 나도 정령과 계약하는 거야.’

말하자면 보디가드, 아니, 수호 정령을 만날 수도 있는 기회였다.

“그러니까 저는 제르미 경과 함께 유적지를 방문하려고 해요.”

“거절할 줄 알았어요.”

“거절하려고 했죠. 내 개와 진심으로 싸워주는 걸 보기 전까지는.”

아니다.

거절할 생각 없었다.

제르미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얻을 수 있는 이득은 다 얻으려고 했다.

제르미가 느낀 ‘눈 뜨고 코 베이는 기분이 아주 허황된 기분은 아니었다.

“저는 무인으로서 제르미 경을 인정하기로 했고, 따라서 동행을 결심한 것뿐이에요. 폭풍 검은 잘 봤어요. 뛰어난 성취네요.”

“헤헤.”

제르미는 코를 슥슥 문질렀다.

비올라처럼 뛰어난 실력을 가진 벨라투가 인정을 해주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아졌다.

“대신.”

비올라가 본론을 꺼냈다.

“그곳에서 뭔가를 얻게 된다면 우선권을 저에게 주는 걸로 합의하죠.”

제르미는 잠시 고민했다.

유적지에서 어떤 것이 나올지는 모른다.

심지어는 아무것도 발굴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비올라 공녀는 일부러 내 약점과 잘못된 습관을 짚어주며 내게 가르침을 줬어.’

만약 적이었다면 가르쳐 주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내 자존심을 지켜주기까지했지.’

직접 가르쳐 주지 않았다.

툰드라에게 조언을 주는 척하면서 정보를 알려줬었다.

제르미는 그것이 비올라의 세심하고 따뜻한 배려였다고 판단했다.

“제가 무턱대고 그 조건을 수락하면 아버지께서 화내실 것 같아요.

사실 아버지께서 알려주신 정보거든요.”

“그럼 저는 동행하지 않겠어요.”

“아이참. 성격이 왜 이리 급하실까?”

제르미가 히히 웃었다.

“저도 추가로 조건 하나를 걸게요.

들어봐요. 손해는 아닐 테니.”

“뭔데요?”

“저는 공녀님에게 관심이 생겼어요. 친해지고 싶어졌거든요. 그 나이에 그런 눈을 가진 게 신기하잖아요.”

“그런데요?”

“친해지려면 우리 말부터 놔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번부터 놓으려고 했는데 하필이면 패배하는 바람에.”

“…….”

제르미는 입술을 살짝 깨물어 자신의 굳은 의지를 내비쳤다.

무조건 말을 편하게 하겠다는 강력한 심지가 엿보였다.

이왕 내친김에 빠르게 말을 이었다.

“만약 말 놓는 걸 거부한다면 저는 공식적으로 벨라투 가문에 약혼을 요청하려고요.”

“약혼이요?”

비올라는 제르미가 여자나 결혼 등에 관심이 일절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제르미의 눈에 잔뜩 서린 호기심은 여자로서의 호기심은 절대 아니었다.

비올라 벨라투라는 ‘신기한 인간’에게 보이는 호기심과 호의였다.

“어차피 전 여성이나 결혼 등에 관심 없어요. 어차피 결혼해야만 한다면 벨라투가와 인연을 맺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죠. 벨라투가에서도 사실 거절할 이유가 없잖아요?

저 나름대로 폭풍 요새의 후계자이고, 벨라투는 폭풍 요새라는 남방의 요새를 손에 넣을 수 있고요. 지리적으로 모나크 제국을 견제하기에 아주 아주 좋은 위치인데, 벨라투 입장에서도 일석이조죠. 아마 하얀 벨라투인 비올라 공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겠죠?”

비올라는 허-하고 웃고 말았다.

협상 혹은 협박의 수단으로 청혼을 들먹일 줄이야.

“보상의 우선권을 양도하는 조건으로, 반말을 수락하죠.”

“저랑 약혼하기가 그렇게 싫어요?”

“네.”

싫다.

제르미는 주요 조연 중 한 명이고 온갖 위험과 역경을 이겨내며 성장하는 인물이다.

그의 주변에는 늘 엄청난 악역과 함정들이 도사리고 있다.

제르미의 얼굴을 뜯어먹고 살 게 아니라면 멀리하는 것이 상책이다.

“남들은 저보고 잘생겼다고 하던데.”

“잘생기긴 했죠.”

“그럼 보통은 약혼 받아들이지 않나요?”

얘가 왜 이럴까.

어차피 약혼 따위에는 관심도 없으면서.

비올라가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제 취향이 아니라서요.”

얼굴은 취향이긴 한데요.

당신 설정이 너무 위험해요.

가늘고 길고 행복하게 살려는 내 인생 계획을 모조리 망쳐 버릴 수 있는 인간이라 안 돼요.

“그것참 유감이네요. 저는 비올라 공녀가 귀여운 것 같은데.”

“빈말이라도 고맙네요.”

힉슨이 눈을 크게 떴다.

‘저 자식!’

비올라의 귀여움을 알아차리는 또다른 인간이 존재할 줄이야.

저렇게 찬바람과 살기가 쌩쌩 부는 비올라의 표정에서 한 줄기 귀여움을 발견하다니.

‘제법 괜찮은 놈이었잖아?’

그 누구도 비올라 벨라투에게 귀여움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비올라 벨라투에게 숨겨진 귀여움을 알아내는 인간 자체가 별로 없었다.

심지어 비올라 본인도 자신이 귀여운 줄 모른다.

근데 싫기도 하고.

자신만 몰래 알고 있던 비올라의 귀여움을 다른 사람이 알아버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귀여움을 공유했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다가도, 또 묘하게 언짢았다.

‘어쨌든 청혼은 안 되지.

그건 안 될 말이다.

왜 안 되냐고 묻는다면 사실 할말은 없지만 아무튼 그건 안 된다.

힉슨은 비올라가 단칼에 거절해서 기분이 좋았다.

“아무튼. 우리 말 놓기로 한 거다?”

“그래.”

“그럼 우리 이제 친구지?”

비올라가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고 제르미는 뭐가 그리 좋은지 실실 웃었다.

그쯤에서 툰드라가 정신을 차렸다.

툰드라에게 제르미의 말이 들려왔다.

“그럼 우리 이제 친구지?”

툰드라가 눈을 번쩍 뜨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