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064화툰드라가 눈을 번쩍 뜨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안 돼!”
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그의 외침에는 마나까지 소량 포함되어 있었다.
힉슨이 툰드라의 뒤통수를 탁! 때렸다.
“왜 소리를 지르고 발광이야?”
“아…….”
정신을 번쩍 차린 툰드라는 말이 들려온 쪽을 쳐다보았다.
그럼 우리 이제 친구 하는 거다.
그 말과 함께 제르미와 비올라가 손을 잡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악수를 나누고 있는 광경이었지만 툰드라의 눈에는 손을 잡은 것처럼 보였다.
기분이 매우 나빠졌다.
힉슨에게 따지듯 물었다.
“스승님은 기분 안 나쁘십니까?”
“뭐가?”
“제르미 공자가 공녀님이랑 친구하겠다잖아요.”
“비올라가 수락했잖아.”
툰드라는 왠지 싫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비올라가 제르미를 부담스러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래서 제르미가 싫었다.
“비올라. 나 얘 좀 잠깐 빌린다?”
“왜?”
“데리고 갈 곳이 있어.”
“어디?”
“말해줘도 몰라. 아무튼 이놈을 좀 더 강력하게 키울 수 있는 방법이 생각났어.”
툰드라는 사실 거절하려고 했다.
비올라와 한시도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반려견으로서 당연한 마음가짐이라 생각했다.
‘강해질 수 있다?’
제르미와 결투를 치르면서 또 느꼈다.
나는 아직도 멀었다.
빠르게 성장하고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아직 많이 부족하다.
자신이 만약 압도적으로 이겼다면 비올라가 제르미와 친구가 되는 일따위는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툰드라. 가고 싶어?”
아니요.
주인님 옆에 더 있고 싶어요.
그렇지만 속마음을 숨겼다.
강해져야 했으니까.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그럼. 갔다 와.”
제르미에게는 이 광경도 생소했다.
제르미가 생각하는 비올라는 군림하며 명령하는 사람이었다.
‘말로는 개라고 하면서…….’
그러면서도 툰드라를 충분히 배려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툰드라의 의사를 먼저 물어보고, 툰드라가 원하는 대로 해주고 있었다.
‘말만 개지, 사실은 가장 친한 친구 같은 건가.
비올라가 반말로 말했다.
“출발은 내일 오전 9시. 이 정도면 되겠어?”
“그래, 좋아. 자작가 정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편하게 반말로 대화를 나누는 제르미를 보며, 툰드라는 또 낮게 으르렁거렸다.
***
그날 밤.
툰드라는 제르미가 머물고 있는 숙소를 찾아갔다.
제르미는 자작가에서 내어주는 편한 특실 대신, 허름한 여관방을 구해 쉬는 중이었다.
“왜 이런 곳에 있지?”
제르미가 어깨를 으쓱했다.
“이런 곳이 어떤 곳인데?”
“허름하고 낡고 누추한 곳?”
제르미가 방긋 웃었다.
“대부분의 사람이 이런 곳에서 살아. 설마 잊은 거 아니지?”
툰드라는 여기보다 훨씬 더 열악한 곳에서 살았다.
어떤 인프라도 없는 산골에 통나무로 얼기설기 만든 오두막에서 살았다.
치안도 나빴고 먹을 것도 풍족하지 않았었다.
잊고 있었다.
비올라와의 생활이 너무나 풍족해서.
모든 것이 갖추어진 공작가에서 살다 보니 이전의 것들을 잊고 있었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 수많은 사람에게 공감할 수 없어.”
“무릇 힘을 가진 자라면 그 힘에 걸맞은 눈높이를 가져야 해.”
“내게 갑자기 설교하는 이유는?”
“네가 비올라 곁에 있고 싶어 하니까.”
툰드라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제르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잠자코 듣기만 했다.
“비올라는 군림하는 자야. 지배자의 운명을 타고났어. 그리고 그것이 더없이 어울리는 사람이기도 해. 비올라는 반드시 그렇게 행동해야만해.”
제르미는 비올라의 욕심을 읽어냈다.
비올라는 야망이 있는 여자였고, 벨라투를 집어삼키고 싶어 한다.
언젠가 반드시 벨라투를 지배하는 절대자가 될 것이다.
제르미가 파악한 비올라는 그랬다.
“그러니 네가 그 옆에서 비올라가 할 수 없는 것들을 채워줘야지. 낮은 곳에서, 낮은 눈높이로, 백성들에게 공감하고 다가가는 역할.”
“…….”
“내가 본 비올라는 말이야.”
야망과 지배욕이 엄청난 사람이지만 동시에 따뜻한 사람이기도 했다.
다만 전자의 마음이 너무 커서 후 자의 마음을 돌볼 수 없는 사람이기도 했다.
“따뜻함이 있는 사람이야. 그렇지만 따뜻하면 안 되는 사람이기도 해. 가면을 쓰고 따뜻함을 숨길 거야. 어느 누구에게도. 그러니 따뜻한 역할은 네가 해.”
…조언은 고맙군.”
“그래서 네가 나를 찾아온 이유는 뭔데?”
“경고하기 위해 찾아왔다.”
“경고? 무슨 경고?”
“네가 공녀님께 그토록 접근하는 의도는 뭐지?”
“의도가 어디 있어? 친해지고 싶은 거지.”
“손해를 감수해 가면서까지?”
툰드라가 보기에 제르미는 손해를 감수했다.
기껏 찾은 유적지의 보상에 대한 우선권까지 넘기면서.
왜 굳이 이런 선택을 했는지, 툰드라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손해를 감수하면 안 되는 거냐?”
“…뭐?”
“나는 비올라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어.”
이성적인 호감이라기보다는 사람에 대한 호감에 가까웠다.
신기하고 재미있는 사람을 보는 느낌.
“호감을 가진 상대라면, 내가 좀 손해 봐도 되는 거 아니냐?”
“네 의도가 정말 그렇다면 그렇겠지.”
그러나 툰드라는 제르미를 완전히 믿지 않았다.
미공자 제르미에 관한 소문 중에는 질이 나쁜 소문도 많았다.
그의 행실과는 상관없이, 그가 수많은 영애를 농락했다는 소문도 존재했다.
그의 화려한 외모 때문에 따라다니는 어쩔 수 없는 소문이었다.
“만약 공녀님께 털끝 하나만큼의 잘못이라도 저지른다면, 나는 네 목을 벨 거다.”
“좀 과하지 않아?”
제르미가 고개를 갸웃했다.
기분이 나쁘다기보다는 진심으로 궁금해하는 표정이었다.
“충직한 신하를 자처한다면 그 역할에 충실하도록 해. 너 이거 집착이야.”
“내 역할을 오해하는 모양인데.”
충직한 신하를 할 생각은 없다.
“내 꿈은 신하가 아니라 반려견이야.”
“그게 진심이야?”
“물론.”
제르미는 툰드라의 눈빛에 담긴 진심을 읽어냈다.
저런 헛소리를 저토록 진지하게 할 수 있다니.
제르미마저도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혹시 내가 비올라랑 얘기하고 손잡고 그러면 질투나?”
“손잡은 게 아니라 악수겠지.”
“물리적으로 손이 닿은 건 맞잖아.”
그르렁.
툰드라가 또 그르렁거렸다.
제르미는 저 소리가 참 신기하다고 느꼈다.
“흠, 아무튼 질투가 난다는 거군.
재미있어, 연구 대상이야.”
자작의 저택으로 돌아온 툰드라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의 머리와 가슴이 따로 놀았다.
‘제르미는 괜찮은 녀석 같다.
그것을 느끼고 있다.
그는 마나의 냄새를 느낄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가졌다.
마나의 냄새를 느껴보면 이 사람이 악인인지, 선인인지 대충은 가늠이 된다.
제르미의 냄새는 선했다.
악의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 왜 나는 그 녀석이 싫을까?’
제르미는 분명히 괜찮은 사람인데..
비올라에게도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은 사람인데.
그렇다면 나는 제르미와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만 할 것 같은데.
‘싫다.
왜지?
비올라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라면 좋아해야 하는 건데.
‘모르겠어.’
툰드라는 오랜만에 이불을 뒤척이며 고뇌에 빠졌다.
*****
오전 8시 20분.
자작으로부터 성대한 환송 만찬을 대접받은 비올라는 활동하기 편한 가죽옷으로 환복했다.
“슬프네요.”
“뭐가?”
“가죽옷을 입은 공녀님도 멋지시지만, 사실 드레스가 훨씬 더 귀여우시거든요.”
비올라는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원작에서 제논은 ‘귀여움’을 언급 한 적이 없다.
당연하다.
벨라투와 귀여움은 공존할 수 없는 단어니까.
‘티 안 나게 시험하랬더니, 이런 식인 건가?’
그런데 또 애매했다.
제논이 너무나 진심처럼 보였다.
‘아냐. 속으면 안 돼.
원작 속 비올라는 천재였다.
그 천재를 작품 후반부까지 의심하고 시험하는 캐릭터가 제논이었다.
든든한 아군임과 동시에 늘 경계해야만 하는 인물.
“귀엽다는 말을 한 번만 더 꺼내면 입을 꿰매 버리겠어.”
“알겠습니다.”
제논은 진심으로 서운했다.
귀여운 걸 귀엽다고 하지 뭐라고 한단 말인가.
‘귀엽다는 말을 진짜 싫어하시나보다.
보통은 좋아하지 않나?
역시 벨라투는 벨라투인가 보다.
‘쩝. 아쉽군요.
제논은 속마음을 숨겼다.
비올라가 그렇게 싫다는데 계속 표현하는 것은 예의에 지나치게 어긋나는 행동이니까.
그래도 속으로는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다음에는 어떤 드레스를 사드리지?’
그 드레스에는 어떤 단도가 어울릴까?
혹은 메데이아 공녀가 사용하는 대도(大刀)도 잘 어울리실 것 같은데.
엄청 귀여우실 거야.
속마음을 감춘 채 보고를 올렸다.
“본가에 보고를 올렸고 답문이 내려왔습니다.”
답문은 내용은 간략했다.
요약하자면 ‘잘했다. 수고했다’ 정도였다.
“열두 살에 이런 일들을 해내는 벨라투는 없었습니다. 마물을 때려잡거나 산적을 토벌하는 업적을 이루었어도, 이토록 인간관계와 정치 관계에 침투하여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은 누구도 해내지 못했습니다. 그 대단하다는 1공녀님도요.”
“됐어.”
나는 그냥 미래의 벵가스가 내 편이 되었으면 좋겠어서..
열심히 발로 뛰었을 뿐이야.
정치니 복잡한 인간관계니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미래의 대마도사가 지팡이 들고 쫓아오지 않도록 만드는 게 우선이었을 뿐.
“또 다른 내용은?”
“공녀님의 유적 탐사를 허가하신다는 내용입니다. 물론 형식적인 보고 절차였습니다.”
벨라투는 후계자 후보들의 자유도를 존중한다.
제르미와 함께 유적 탐사를 진행하겠다고 보고만 올리면 더 이상 간섭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조금 묘합니다.
“뭐가?”
“제르미 경에 대한 뒷조사를 하라고 하셨습니다.”
“뒷조사를?”
비올라는 고개를 갸웃했다.
왜지?’
소설 속에서 그런 장면이 있었나?
없었던 것 같은데.
“네. 그래서 뒷조사를 좀 할 예정입니다.”
“아버지께서 굳이 제르미의 뒷조사를 할 이유가 있을까?”
혹시 내가 놓치고 있는 게 있나.
제르미에게 숨겨진 뭔가가 있다거나.
소설 내용과 설정집을 떠올려 봤는데 기억나는 것이 딱히 없었다.
“글쎄요.”
짐작 가는 부분은 있었다.
딸을 가진 아버지의 마음이랄까.
제논은 그렇게 짐작하기는 했지만 그것을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오전 9시가 되었다.
힉슨과 툰드라는 어디론가 떠났고, 제논과 비올라가 자작 내외의 인사를 받으며 정문으로 향했다.
“비올라 공녀. 오랜만이야.”
“하루 만인데요.”
“그럼 오랜만이지.”
제르미는 겨울성에서 처음 만났을 때처럼 가면을 쓰고 있었다.
원래의 제르미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비올라 뒤에서 따라 걷던 제논이 스르르-움직였다.
마치 유령이 움직이는 것처럼 부드럽고 자연스러웠다.
“그런데 말입니다, 제르미 경.”
제논이 비올라 앞에 섰다.
제르미와 비올라 사이를 가로막은 모양새가 되어버렸다.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제논이 황당한 말을 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