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082화휠체어에 앉은 헤라가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에르사. 뭘 어떻게 한 거야?”
“그리 대단한 걸 하지 않았습니다.
사용인의 자세를 진지하게 얘기하고 설득했을 뿐입니다.
“그래?”
“네. 그렇습니다.”
“벨라투의 명성에 흠이 갈 만한 행동을 한 건 아니겠지?”
“그런 짓은 일절 없었습니다.”
비올라는 가만히 헤라와 에르사의 대화를 듣기만 했다.
저 대화는 분명 크롬슨 들으라고 하는 얘기였다.
말하자면 크롬슨을 향한 낚시기도 했다.
‘지금쯤 크롬슨의 심리 상태를 유추해 보자면…….’
벨라투의 명성에 흠이 갈 만한 행동을 했지!
너는 세 시간 동안 나를 구타하지 않았느냐!
이 귀신 마귀할멈 같은 여자야!
그렇게 외치고 싶은 것을 꾹 참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다만 크롬슨의 생각은 틀렸다.
‘미안하지만 아저씨. 구타한 것은 벨라투의 명성에 흠이 갈 만한 행동이 아니야.’
사용인의 지나치게 불손한 태도에 침묵하고 조용히 넘어가는 것이 오히려 벨라투답지 않은 행동이다.
그렇게 넘어가는 것보다는 구타가 훨씬 낫다.
벨라투는 일반적인 상식의 세계가 아니니까.
비올라가 한마디를 보탰다.
“에르사. 다시 한번 묻겠어. 정말로 벨라투의 명성에 흠이 갈 만한 짓은 하지 않았어?”
일부러 이렇게 물었다.
마법사들은 자존심이 매우 강한 족속이고, 겨우 구타 한 번에 모든 자존심을 내려놓지는 않을 거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영상석에 구타 영상을 저장해 놓거나 했을 확률이 매우 높아.’
사실 그 영상이 소식지를 통해 전해져도 크게 상관은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미스러운 일을 만들지 않는 편이 가장 좋았다.
실제로 크롬슨은 영상석을 몰래 사용하여 에르사의 행동을 모두 녹화해 놓았다.
그것이 크롬슨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에르사가 대답했다.
“네. 물론입니다. 벨라투의 명예를 걸고 맹세합니다.”
“근데 왜 이렇게 고분고분해졌어?”
크롬슨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는 중이었다.
무언가 눈치를 많이 보는 모양이었다.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모를 리가.”
비올라가 크롬슨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 신체에 많이 익숙해진 비올라는 체내에 잠재되어 있는 살기를 끌어올렸다.
안 그래도 주눅 들고 위축된 크롬슨에게는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나는 벨라투의 6공녀, 비올라 벨라투. 내 이름을 걸고서 물을게. 에르사가 무슨 짓을 했는지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시간이야.”
기회는 한 번이야.
마치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그, 그것이………!”
크롬슨은 에르사의 눈을 피했다.
에르사가 어지간히도 두려운 모양이었다.
두렵긴 두려운데 또 할 말이 있기는 있는 듯했다.
비올라가 싱긋 웃었다.
“땡. 시간 끝.”
크롬슨의 반응으로 다 알아냈다.
크롬슨은 마음으로 굴복하지 않았다.
에르사의 구타에 잠시 항복했을 뿐이다.
“내놔.”
“무, 무엇을 말입니까?”
“몰라서 물어?”
“모, 모르겠습니다.”
크롬슨은 헤헤 웃으며 또 파리처럼 손을 싹싹 비볐다.
“제가 안전하고 편안하게 모시겠습니다. 출발은 언제쯤 할까요?”
“에르사. 두 시간 더 줄게.”
비올라가 다시 헤라의 휠체어를 밀었다.
고, 고객님?”
당황한 크롬슨이 벨라투의 두 공녀를 잡으려 했지만 이미 너무 늦었다.
지옥의 두 시간이 또 찾아왔다.
결국 에르사는 영상석까지 압수해 버렸다.
철두철미한 벨라투의 계산 속에서 크롬슨은 어마어마한 무력감을 느꼈다.
‘괴, 괴물들……! 피도 철로 이루어졌을 괴물 같은 놈들!’
모두가 괴물이다.
그런데 직접 구타를 자행한 에르사보다 씨익 웃으며 살기를 내뿜던 6공녀가 더 두려웠다.
에르사가 보이는 칼이라면, 비올라는 보이지 않는 맹독 같았다.
지금 와서야 깨달은 거지만 비올라는 애초에 영상석을 압수할 생각이었던 것 같다.
‘나는 그 손바닥 위에서 놀아난 거야.”
그래. 애초에 이 무자비한 구타를 시킨 게 그 공녀들인데.
왜 나는 순간 그 공녀를 믿었을까?
아주 잠깐이지만 비올라가 내 편인 것 같은 느낌을 받았고, 그것이 약간의 머뭇거림으로 표현되었다.
그게 실수였다.
‘내 머리 꼭대기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기분.
마탑에서는 이런 느낌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따뜻한 온실 속에 있다가 이제야 살벌한 야생을 마주한 느낌이었다.
‘조심하자.’
결국 그는 마음으로 굴복했다.
‘안 좋게 엮이면 안 돼.’
37년 만에 사회생활을 배운 그는 37년 만에 야생을 겪었고, 진심으로 자존심을 꺾었다.
새사람이 되었다.
***
출발은 내일 오전 7시로 결정되었다.
비올라와 같은 방에서 묵게 된 헤라가 물었다.
“영상석이 있다고 확신한 거야?”
“확신은 못 했어.”
크롬슨은 아주 뛰어난 마법사는 아니었다.
사회성이 떨어지고 눈치가 빠르지도 않았다.
영상석을 실제로 준비했을지, 비올라도 잘 몰랐다.
“근데 왜 그렇게까지 한 거야?”
“어차피 출발하기에는 늦은 시간이었잖아.”
“만약 영상석이 안 나왔다면?”
“그건 어쩔 수 없지, 뭐.”
“무서운 동생이네.”
“언니도 조심해. 나 무서운 여자야.”
헤라가 킥,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조심해, 비올라. 나중에 제국 인권 위원회에 걸릴라.”
“괜찮아.”
비올라가 씨익 웃었다.
손뼉을 치자 문밖에서 대기하던 제 논이 들어왔다.
“나도 영상석 준비해 놨거든.”
-그 유명한 벨라투의 공녀님들이라고 하지 않았어? 뭐야, 이 핏덩이 들은?
-내가 지금은 마탑 소속이 아니라고 무시하는 거야? 그런 거냐?
헤라마저도 조금 놀랐다.
“이건 또 언제 준비했어?”
“낙오된 마탑 마법사라면 이런 반응을 보일 거 같아서.”
헤라는 약간 충격을 받았다.
비올라는 강하다.
자신과는 태생이 달랐다.
어쩔 수 없이 하얀 벨라투를 선택한 자신과는 다르게 어마어마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그렇게 강한데 철두철미해.’
헤라는 결국 빙그레 웃으며 애정가득한 눈으로 비올라를 쳐다보았다.
“네 옆에 누워도 돼?”
“침대도 좁은데 굳이?”
“잠시만 누워 있을게.”
비올라의 옆에 누운 헤라는 비올라를 계속 쳐다보았다.
비올라의 체온이 느껴졌다.
“몸도 차가울 줄 알았더니. 따뜻하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그냥. 너를 선택한 것이 틀리지 않은 것 같아서.”
“갑자기?”
“어. 방심하지 않는 강자가 가장 무서운 법이거든.”
비올라는, 몸을 옆으로 돌린 채 자신을 똘망똘망한 눈으로 쳐다보는 헤라가 부담스러웠다.
“내가 본 강자 중에, 혹은 강자가 될 사람 중에 너처럼 방심하지 않고 절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처음 봐.”
비올라는 헤라의 시선을 애써 무시했다.
으. 부담스러워 죽겠네.
헤라와 친해진 건 좋은데, 이건 너무 부담스러웠다.
“그건 그만큼 네가 후계자의 자리에 절실하다는 뜻이겠지?”
아뇨!
전혀요!
절대! 네버! 아닙니다!
그냥 벨라투의 그림자〉라는 이 미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는 중입니다만.
비올라의 속마음과 상관없이 헤라는 지극히 상식적으로 오해했다.
“나는 네 절실함이 마음에 들어.
절실한 강자가 방심까지 하지 않는다는 건 아름답고 숭고한 일이야.”
헤라가 천천히 손을 들어 비올라의 머리에 얹었다.
그리고 비올라와 눈을 똑바로 마주치고 말했다.
“나를 선택해 줘서 고마워, 내 동생.”
*
다음 날 아침이 되었다.
비올라는 여느 때처럼 눈을 떴다.
평소라면 제논의 얼굴이 가장 먼저 보여야 했는데 오늘은 조금 달랐다.
‘으. 어쩐지 잠자리가 불편하더라니.’
꿈인 줄 알았는데 꿈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헤라가 굳이 자신의 품에 파고들었던 것 같은 기억이 있다.
비몽사몽이어서 제대로 기억은 안나지만, 그 와중에 헤라는 비올라의 팔을 들어 올려 베개 삼고 잠들었다.
‘아. 팔 저려.’
비올라가 눈을 떴을 때 헤라는 여전히 잠든 상태.
“두 분. 사이가 좋으시네요.”
“제논, 언니 좀 깨워.”
제논 뒤로 에르사가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헤라 공녀님은 제가 모시겠습니다.”
에르사는 익숙한 듯 헤라를 번쩍 안아 들어 올렸다.
마치 깃털을 드는 것처럼 쉬워 보였다.
손가락 하나로도 들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한 손으로는 휠체어를 밀고 또 한손으로는 헤라를 안았다.
아주 작은 아기를 안은 것처럼 조심스레 움직였다.
“에르사. 휠체어는 제가 밀겠습니다.”
“제 일입니다.”
“하지만 저는 지금 일이 없는걸요.
동업자에게 도울 기회를 주시는 건 어떨지요? 아마 비올라 공녀님도 좋아하실 겁니다.”
“비올라 공녀님이요?”
“네. 효율을 중시하시는 분이거든요. 저라는 노동력이 무가치하게 허비되는 것보다는, 동료를 돕게 하는 것이 비올라 공녀님의 생각이실 겁니다. 그렇지요?”
비올라가 대답했다.
“그래. 휠체어는 네가 밀어.”
그제야 에르사는 휠체어를 제논에게 맡겼다.
에르사는 잠든 헤라를 안고서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자신의 품 안에서 새근새근 잠든 헤라를 보며 죽은 딸아이를 떠올렸다.
‘내가 안아주면 참 잘 잤는데.’
헤라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호흡이 굉장히 편안하고 느렸다.
에르사는 괜스레 눈시울이 붉어졌다.
헤라의 모습이 평소와는 조금 다른 것 같았다.
‘잠자리에 예민한 분인데…… 어제 오늘은 어떻게 이렇게 깊이 잠드셨지?’
그건 아마도 비올라 공녀의 힘일 것이다.
비올라의 옆에 잠든 헤라가 보였다.
키 자체는 헤라가 더 컸지만, 비올라 옆의 헤라는 마치 작은 아이 같았다.
‘비올라 공녀님 앞에서는 4공녀 헤라가 아니라, 사람 헤라일 수 있어 서인가요?’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든든한 동생을 가진 언니가 되는 건가요?
에르사는 기분이 좋아졌다.
늘 일에 치여 살아가는 헤라를 볼때마다 가슴이 아팠었다.
‘저는 헤라 공녀님이 행복하면 좋겠습니다.
앞서가는 비올라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다짐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비올라 공녀님이 단단히 저 높은 곳에 서 계셔야겠네요.
에르사는 결심했다.
‘제가 돕겠습니다, 비올라 공녀님.’
헤라는 가주가 될 수 없다.
헤라 스스로도 잘 알고 있고, 그것에 욕심내지 않는다.
에르사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
‘저는 비올라 공녀님을 지지하겠습니다.
비올라도 모르는 사이, 비올라를 차기 가주로 추대하고 싶은 극성 팬이 한 명 생겨 버렸다.
비올라는 왠지 뒤통수가 으스스한 기분이 들었다.
어쨌든 비올라 일행은 정신 무장을 새롭게 한 크롬슨의 안내를 받아 파르아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플라이.”
그는 가벼운 플라이 마법을 활용하여 휠체어를 공중에 아주 살짝 띄웠다.
에르사는 신기한 듯 휠체어를 밀어보았다.
“무게감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군요.”
“이것이 마법의 정수입니다. 후후.
고용인분들을 편안하게 모시는 것이 제 임무죠. 어떠십니까? 편하십니까?”
“좋네요. 마법이 훌륭해요.”
“과찬이십니다. 하핫! 더욱 편안히 모시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헤헤.”
파르아산을 오르는 길은 총 세 개.
그중에서 가장 원만한 길을 선택하여 올랐다.
그 와중에 몇몇 사람을 마주쳤다.
가마를 타고 이동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업혀서 움직이는 사람들도 있었다.
마찬가지로 마법사를 고용해서 등 반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단 한 명 뿐이기는 했지만 아예 날아가는 사람도 있었다(아마도 마탑의 마법사이리라 짐작되었다).
파르아산은 험준했고 하루 만에 오를 수 있는 산은 아니었다.
중간중간에 쉼터가 마련되어 있었다.
“곧 1번 쉼터가 나옵니다.”
꽤 무리했는지 크롬슨의 호흡도 거칠었다.
에르사가 빙그레 웃었다.
“오늘은 저곳에서 쉬었다 가시죠.”
다음 날은 2번 쉼터.
그리고 그다음 날은 3번 쉼터.
며칠이 흘러 마지막 7번 쉼터에 도착했다.
이틀만 더 가면 파르아 자작령에 도착할 수 있었다.
7번 쉼터는 규모가 굉장히 컸고 꽤 많은 사람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음?’
개중 눈에 띄는 사람이 있었다.
‘설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