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089화카를로는 움찔했으나 이내 속마음을 감추고 태평스럽게 말했다.
“물론이지요. 입어보셔도 됩니다.”
비올라가 옷을 받아 들었다.
그러자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옷 색깔이 변했어?”
비올라의 손에 닿은 드레스의 색깔이 연보라색으로 변했다.
마치 머리카락 색깔을 빨아들인 것처럼 말이다.
옷의 크기가 전체적으로 조금 줄어들어 밑단이 살짝 짧아졌다.
마치 처음부터 맞춤제작을 한 것처럼 편안했다.
‘와. 엄청 편하네.’
이 세계의 드레스는 대부분 불편했다.
그런데 지금 이 옷은 마치 옷을 걸치지 않은 것처럼 가볍고 편했다.
상쾌한 기분까지 들었다.
‘뭐지?’
그런데 더 이상한 건, 헤라나 카를 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눈으로 비올라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었다.
옷이 저절로 바뀌었는데, 조금 바뀐 것도 아니고 색깔이 통째로 바뀌었는데 왜 아무런 반응이 없는 거지?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거야, 아니면 진짜 모르는 거야?’
아무리 봐도 진짜 모르는 것 같았다.
일부러 운을 떼어봤다.
“제 눈동자 색깔과 비슷한 드레스는 처음이라 신기하네요.”
“눈동자 색깔…… 말입니까?”
카를로는 비올라의 눈동자를 다시 한번 쳐다보았다.
연보라색이었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이 드레스가 연보라색으로 보이십니까?”
“네.”
비올라는 괜스레 불안해졌다.
이거 왠지.
색맹이라고 오해받는 거 아냐?
“정말로 연보라색으로 보이시는군요.”
비올라가 당황함을 감추며 마음을 추스르는 사이, 헤라가 말했다.
“제 눈에는 붉은색으로 보이는데요.”
“제 눈에도 붉은색으로 보입니다.
다만…… 이 옷은 제 스승님의 걸작입니다. 혹자는 예술적 가치나 옷으로서의 가치가 떨어진다고 폄하하기도 합니다만, 제 스승님이 걸작이 아닌 물건을 제게 남겨주셨을 리 없습니다.”
카를로의 스승.
그는 난쟁이족이며, 어린 카를로에게 많은 것을 전수한 뒤 난쟁이들의 숲으로 돌아갔다고 알려져 있었다.
“이 옷은 주인을 알아보는 옷이라고 하였습니다. 그게 이런 뜻인 줄은 몰랐군요.”
카를로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 옷의 주인은 비올라 공녀였구나.
아까까지는 슬프기만 했다.
망나니 놈이 친 사고를 수습하느라 간이고 쓸개고 다 빼앗기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명품은 가치 있는 자가 입을 때에 빛을 발하는 법.
카를로의 심장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스승의 작품이 주인을 알아본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아마 스승께서도 기뻐하시리라!
“오오. 색깔이 변하고 있습니다. 이제 제 눈에도 연보라색으로 보이는군요. 옷이 진정한 주인을 찾은 모양입니다.”
카를로는 기쁨의 박수를 쳤다.
“역시 비올라 공녀님은 범상치 않으신 분이군요.”
“…….”
비올라는 할 말을 잃었다.
판타지 세계관에서 판타지스러운 일이 일어났을 뿐이지만, 여전히 이런 건 적응이 안 됐다.
한눈에 이 옷을 고른 비올라 공녀님의 안목이 실로 무섭습니다.”
카를로는 진심으로 감탄하며 말을 이었다.
“특별한 자격을 갖춘 분들은 이 옷을 알아본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특별한 자격을 갖춘 분들은…….”
카를로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했다.
“지배자의 운명을 타고났다고 말씀하셨지요.”
비올라는 말하고 싶었다.
망할 스승 같으니라고!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예언을 하는 거야!
나는 그냥 하이디의 옷 같아서 본 거란 말이야!
그 옷이 어지간한 창칼은 다 막아준다 했다고!
헤라가 한술 더 떴다.
“난쟁이족은 예술로 가장 뛰어난 종족이지만, 예언과 점성술에도 일가견이 있는 종족이라고 알고 있는데. 제 말이 맞나요, 수석 디자이너님?”
마도 공학이 이렇게 발전한 세상에 예언과 점성술이 웬 말이냐!
그게 말이냐 방구냐!
“그렇습니다. 제 스승님은 난쟁이족 중에서도 아주 뛰어난 점성술로 유명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냥 옷 색깔이 바뀌었다는 말을 했을 뿐인데 갑자기 ‘지배자가 될 운명을 타고난 소녀’가 되어버렸다.
약간은 울고 싶었다.
비올라는 울고 싶은 속마음을 숨기며 겉으로는 여유롭게 웃었다.
“마음에 드네요. 이걸로 하죠.”
하나도 마음에 안 들었다.
***
비올라 일행은 루이바르텐가의 손님으로서 귀빈실에서 머물게 되었다.
비올라가 물었다.
“필요한 모든 건 다 산 것 같은데.
왜 계속 여기 있는 거야?”
“사교계는 또 다른 전쟁이고 너는 전쟁에 임한 장수야.”
벨라투는 사교계의 이방인이다.
그래서 시작부터 이런 방법을 쓰기로 했다.
“너는 루이바르텐의 귀빈으로 대접받으며 시간을 보내고 있어. 아마 곧 세르폰 공자도 우릴 찾아와 사죄하겠지? 우린 당연히 한 번에 용서하지 않을 거고.”
밖에서 봤을 때 속사정은 모른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세르폰 공자가 귀빈실을 계속 찾으며 친분을 쌓으려 노력하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전통 명가 루이바르텐의 귀빈. 직계 혈족이 매일같이 찾아오는 귀빈.
그런데 그 귀빈이 벨라투의 입양딸. 어때? 화제성만으로 이미 최고 아니겠어?”
무엇이든 최고를 추구하는 헤라의 성향이 그대로 묻어났다.
“뭐든지 시작이 중요하니까.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비올라의 등 뒤로 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보고 있는 거야?’
적이 되었다면 정말로 힘들었으리라는 사실을 다시금 절감했다.
헤라의 말대로 비올라 벨라투에 관한 소문이 전 대륙을 들썩이기 시작했다.
화제성은 최고였다.
며칠 후,
비올라 일행은 파르아 자작령을 떠나기로 했다.
카를로 수석 디자이너는 못내 아쉬운 듯했다.
“벌써 떠나시렵니까?”
작별 인사를 거의 끝냈다.
그런데 비올라는 여태껏 참고 참아왔던 질문을 꺼내기로 했다.
“수석 디자이너님. 뭐 하나만 여쭤볼게요.”
“얼마든지요.”
“루이바르텐가의 사람들이 입고 있는 푸른 제복 말인데요.”
귀빈실에 머물면서 루이바르텐가의 사람들을 여러 번 마주쳤다.
그들은 대부분 루이바르텐가를 상징하는 문양이 새겨진 푸른 제복을 입고 있었다.
세르폰 공자와 처음 만났을 때 입고 있던 푸른 제복과 전체적으로 비슷한 형태였다.
“정령의 축복과 가호가 깃든 물건이라고 들었어요. 맞나요?”
“예. 아직 시제품이기는 하지만 그쪽으로 방향을 잡았습니다.”
루이바르텐가는 정령술사와 손을 잡고 그들이 생산하는 모든 제품에 정령력을 덧씌우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고 했다.
“어째서죠?”
여태까지는 아티팩트와 마도 공학의 연계만 생각해 왔지만, 먼 훗날에는 마도 공학보다는 정령학과의 접목이 훨씬 유리하리라 생각이 되기 때문입니다.
카를로는 그렇게 대답하려고 했다.
그런데 비올라가 먼저 말했다.
“설마 마도 공학과의 연계보다 정령학과의 연계가 더 좋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효율이 좋다거나. 같은 가격에 대량 생산이 가능하다거나. 마나를 소모하지 않아 내구성이 높다든가.”
굳이 따지자면 마도 공학은 이 세계의 메이저 학문이고, 정령학은 마이너 학문이었다.
마법을 기반으로 한 마도 공학은 이미 실생활 여기저기에 뿌리 깊게 관여하고 있으며 마법사들은 그들의 공동체인 마탑까지 설립하여 그 세를 공고히 하고 있는 상태다.
그에 반해 정령술사는 굉장히 희귀할뿐더러, 제대로 된 정령력을 다루는 사람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마법사들의 마탑 같은 대규모 단체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은 소설 후반부에 가도 마찬가지였다.
‘아! 생각났다!”
비올라는 기억 저편 어딘가에 묻혀 있던 소설 속 내용을 떠올릴 수 있었다.
‘루이바르텐가가 중간에 휘청거렸다는 내용이 분명히 있었어.’
루이바르텐가에 대한 내용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하나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소설을 읽을 때는 관심이 없어서 기억하지 못했던 부연 설명들.
‘희대의 사기꾼 헤르톤에게 당했다.
고 했었지.”
헤르톤은 굉장히 뛰어난 달변가였고, 유력 가문들을 방문하여 사기를 치는 대담한 수법의 소유자였다.
수많은 명가가 헤르톤에게 사기를 당했고, 그중에는 파산한 가문까지 존재할 정도였다.
‘헤르톤에게 피해를 입고 순식간에 빚더미에 앉아 자기 아들을 죽이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내용도 있었지, 아마?’
소설 속에서 자세히 다루는 내용은 아니었다.
등장인물들. 그것도 조연들 간 대화 서너 줄로 끝나는 간단한 부연설명이었다.
‘와, 이걸 기억해 냈다고? 나 천재 아냐?’
비올라가 피식 웃고 말했다.
“제가 켈의 성을 가진 물의 정령과 계약했다는 사실을 말했던가요?”
“아, 아뇨. 듣지 못했습니다.”
“ “제가 정령 친화력이 굉장히 높아요.”
“그, 그랬군요.”
“제가 보기에 푸른 제복에는 그 어떤 정령의 축복도 느껴지지 않아요.
정령 비슷하게 꾸민 냄새는 나는 것 같지만.”
카를로는 순간 대답하지 못했다.
“제 생각에는 누가 인위적으로 조작한 것 같네요.”
대답하기가 애매했다.
고맙다고 당장 조사에 착수하겠다.
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그건 루이바르텐가의 체면이 손상되는 일이니까.
‘그렇다고 비올라 공녀의 말을 대놓고 부정하기도 어려워.”
어떤 대답도 하기 어려웠다.
비올라가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카를로 수석 디자이너님의 입장을 이해해요. 대답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그러니 제 말을 그냥 듣기만 하세요.”
헤라는 흐뭇한 표정으로 비올라를 쳐다보았다.
‘저 정도면 닥치고 내 말 들으라는 뜻이잖아?’
그런데 말을 듣는 당사자인 카를로 조차도 그것을 제대로 의식하지 못한 듯했다.
오히려 비올라에게 고맙다고 표현했다.
‘타이밍이 절묘하네.’
이게 비올라가 가진 힘이었다.
상황과 타이밍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최상의 결과를 이끌어내는 것.
‘역시 내 동생.’
눈이 가늘어졌다.
‘벨라투의 지배자가 될 아이답네.’
비올라는 본의 아니게 루이바르텐가에 큰 은혜를 입히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