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090화비올라는 소설 속 설정들을 읊어주었다.
독자 시점의 비올라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지만 카를로 입장에서는 모두 새로운 사실이었다.
“정령의 힘이 느껴지지 않아요.”
비올라는 푸른 제복에서 정령의 힘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정령의 가호는 정령술사가 부리는 정령과 멀어지면 점점 옅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도 가르쳐 주었다.
“그게 자연의 기본 원리거든요. 마도 공학으로도 극복하지 못한,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영역.
그리고 이게 결론이었다.
“혹여 누군가가 그 정령력과 가호를 정령술사의 도움 없이 유지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건 사기라고 보면 돼요. 만에 하나 가능하다고 해도,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는 그 행위가 마도 공학에 비해 과연 효율적인지 생각해 볼 문제죠.”
어차피 사기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다.
그래서 비올라의 말에는 거침이 없었고 태도는 당당했다.
〈벨라투의 그림자〉를 좋아한 독자 한아린의 머릿속에 숨어 있던 지식들이 하나씩 빛을 보기 시작했다.
“훌륭하고 똑똑한 사람들도 사기 수법에 넘어가는 경우가 많아요. 특히 그들이 절박하거나 조급할 때에는 말이죠.”
카를로는 비올라의 눈웃음을 보았다.
비올라의 눈동자는 마치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있는 것 같았다.
“파르아 자작령 내에서도 보이지 않는 전쟁이 늘 진행 중이죠?”
말하자면 이곳은 명품 업계의 집합소다.
누가 올해의 트렌드를 선도할 것이냐.
누가 더 뛰어난 디자이너와 아티팩트를 배출할 것이냐.
누가 대륙 최고의 명가이냐.
그들은 그들의 패권을 두고 다툰다.
그들끼리도 나름대로 세력을 이루고 있으며 파벌이 존재한다.
“최근 루이바르텐 가문은 고르바드가문과 출혈 경쟁도 마다하지 않는다고 들었어요. 고르바드 가문이 루이바르텐의 디자인을 훔쳐 갔든, 디자이너를 도의에 어긋나게 데려갔든, 루이바르텐에 비해 전통과 명성이 부족하든. 그런 부가적인 문제들은 차치할게요. 중요한 건 루이바르텐가가 누군가와 큰 경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니까.”
카를로는 말을 하지 못했다.
이 모든 내용이 이제 갓 열두 살이 된 소녀.
그것도 북방 끝에 위치하고 있으며 파르아 자작령과는 접점이 없는 벨라투의 소녀가 언급할 만한 문제는 아니었다.
‘스승님의 걸작이… 비올라 공녀를 선택한 이유가 정말로 있는 건가.’
비올라가 말을 이었다.
“그렇게 경쟁을 하면 마음이 조급 해지게 마련이고 평소에는 보지 않던 다른 것을 보게 마련이죠.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에요. 눈을 돌리면 새로운 길이 보이고 그것이야말로 새로운 영역을 창조하는 첫걸음이니.”
“………..”
“다만, 그 첫걸음의 시작이 누구였을까요? 카를로 수석 디자이너께서 보시기엔 누구였죠?”
카를로는 처음으로 대꾸했다.
“세르사 공녀님이었습니다.”
“카를로 수석 디자이너께서 보시기에 세르사 공녀님은 어떤 분이죠?”
“예술에 대한 열정이 누구보다 뛰어나십니다. 훌륭한 장인이 되실 분입니다.”
“한길을 올곧게 가는 열정적인 사람이라는 뜻이네요.”
“맞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무식하게 한길만 판 사람이고.”
그것은 세르사 공녀님에 대한 모독입니다.
그 말이 목구멍까지 튀어 올랐지만 참았다.
그가 본 비올라는 허튼 말을 할 영애가 아니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도 세르폰 공자에게 ‘개망나니’라 표현했으니 할말이 별로 없기도 했고.
“그래서 인간관계에 아주 능숙하지는 않겠죠. 저는 오히려 그 점을 존경합니다. 장인은 장인의 길을 가면 되는 거니까. 다른 거까지 잘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비올라의 ‘존경한다’는 말에 카를 로는 괜히 가슴이 떨렸다.
같은 말이라도 누가 하느냐에 따라 받아들이는 사람의 감정이 다르다.
지금 비올라가 하는 말은 카를로의 가슴을 뒤흔들었다.
비올라와 대화를 하니 감정이 마구 널뛰는 기분이었다.
12살 어린애가 아니라 120살 능구렁이와 대화하는 기분이었다.
“그녀의 주변을 잘 살펴보세요. 분명히 그 열정을 속여먹으려는 승냥이 같은 놈이 있을 테니.”
“……승냥이 말입니까?”
그 훗날 사기꾼으로 이름을 떨치게 될 헤르톤이라는 놈 있어요.
그 말까지는 하지 못했다.
그런데 헤라가 말했다.
“헤르톤, 스스로를 세르사 공녀의 소꿉친구라고 소개하고 다니는 그자를 살펴보시길.”
헤라가 빙긋 웃었다.
“네가 하려는 말이 이거 맞지?”
“…….”
뭐야. 저 언니.
무서워.
헤라는 이미 다 알고 있었다.
비올라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
여러 번 느꼈다.
‘헤라 언니가 내 편이라 정말 다행이야. 진짜로.
파르아 자작령으로 올라올 때와 달리 내려갈 때는 굉장히 화끈했다.
마탑 소속의 마법사 넷을 한꺼번에 불러서 무려 워프를 통해 하산했다.
수많은 사람이 그 광경을 구경했다.
제논과 에르사가 미리 대기시켜 놓은 마차에 올라타고 나서야 헤라는 우웨엑! 구역질을 했다.
“이놈의 워프는 멀미가 너무 심하단 말이야.”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파르아 자작령에 방문한 사람들의 모든 시선이 벨라투의 영애들에게 쏠려 있는 상황.
그 상황에서 헤라는 벨라투의 저력을 제대로 과시했다.
“마탑 소속의 마법사들을 어떻게 넷이나 부른 거야?”
“6마탑이 이권 다툼에 관심이 많거든.”
자세히는 설명해 주지 않았다.
대륙 중심 모나크와 북부의 겨울성을 잇는 ‘골든 로드’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까지만 가르쳐 주었다.
비올라도 더 이상 깊이 묻지는 않았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헤라가 무려 마탑의 마법사 넷을 동원할 능력을 갖추었다는 사실이었다.
그것도 오로지 ‘과시’를 위해서 말이다.
‘역시 무서운 세계야. 한국이라면 겨우 중딩이었을 텐데.”
헤라의 능력에 또다시 감탄한 비올라가 질문을 이어갔다.
“근데 헤르톤에 대해서는 어떻게 안 거야?”
“이상하잖아. 세르사 공녀에게 친구가 없다는 건 너도 알고 나도 알고,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인데.”
…..
…그래?
세상이 다 아는 거 맞아?
그냥 언니만 아는 거 같은데.
“그런데 자꾸 자기를 세르사 공녀의 소꿉친구라고 떠벌리고 다니는 놈이 있어서 조사를 좀 해봤어.”
…보통 그런 소문이 있다고 뒷조사까지는 안 하지 않나?
아니, 애초에 벨라투가 내에서 어떻게 그런 소문까지 들어?
난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데.
“루이바르텐가와 접촉했다는 건 사실이었고, 그 얼마 후 루이바르텐의 제복이 바뀌기 시작했지. 그들이 마도 공학이 아닌 정령학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는 건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내용이고, 뭐. 너도 다 알고 있었겠지만.”
“…….”
“네 말을 들어보니 내 조사에 신빙성이 생겼어. 헤르톤이 가장 수상했고 그를 언급했을 뿐이야. 루이바르텐가의 사람들도 똑똑하니까 그 정도 단초만 제공하면 알아서 잘하겠지.”
비올라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똑같은 경험을 했다.
‘정령학’이라는 하나의 키워드로 상당히 많은 것을 떠올려 냈다.
아마 루이바르텐가도 그럴 것이다.
하나만 깨달으면 그 뒤는 자연스레 따라올 것이다.
며칠 뒤.
비올라 일행은 겨울성으로 복귀했다.
‘아…… 힘들었다.
그놈의 사교계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해야 한단 말인가.
아니. 이게 아니지.
마음을 다잡았다.
‘벌써 해이해졌어.’
살려면 개똥밭에도 구를 수 있다!
나는 가늘고 길게 행복하게 살 거다!
마음을 다시 다잡고 있는데 제논이 서신 하나를 가져왔다.
“공녀님. 카를로 수석 디자이너가 보낸 서신입니다.”
서신을 뜯어보니 정말로 감사하다.
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너무나 충격적인 부분이 존재했다.
[협력의 증표이자 선물로 보내주신 헤르톤의 머리는 잘 받았습니다. 고개 숙여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비올라 공녀님.]
비올라는 치마 아래에서 달달 떨리는 다리를 숨긴 채 여유롭게 말했다.
“제논, 딸기 에이드는?”
“지금 대령할까요?”
응.
제논을 밖으로 내보낸 비올라는 그제야 의자에 주저앉듯 앉았다.
조금만 늦었어도 다리 풀리는 걸 보여줄 뻔했다.
비올라는 떨리는 손으로 서신을 몇 번이나 살펴보았다.
‘이게 뭐야?’
헤르톤의 머리를 잘 받았다고 비올라는 그런 적이 없다.
그저 마차 안에 타 있었을 뿐이다.
‘헤라 언니가 꾸민 짓 같아.’
일의 전후 사정은 잘 모르겠다.
헤라가 손을 써서 헤르톤을 죽인 뒤 그 머리를 카를로 수석 디자이너에게 보낸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비올라가 한 것처럼 꾸민 것 같았다.
‘무슨 이런 일이………!’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제논이 쟁반 위에 딸기 에이드를 올려서 가져왔다.
비올라는 다리를 꼬고 앉았다.
심적으로 동요하는 모습을 감추기 위해 최대한 노력했다.
“제논, 마차는 네가 운전했지?”
“네. 제가 했습니다.”
“에르사는?”
“에르사는 대부분의 시간을 저와 함께 있었습니다.”
“대부분은 또 뭐야?”
“볼일이 있다면서 잠깐 자리를 비운 적이 있었거든요.”
“돌아왔을 때는 피 냄새가 묻어 있었어?”
제논은 잠시 생각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희미하지만 피 냄새가 났던 것 같아요.”
“왜 피 냄새가 났대?”
“그것까지 물어보지는 않았는데, 가서 물어보고 올까요?”
“아니, 됐어. 그보다 헤라 언니에게 갈 거야.”
비올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헤라가 비올라 몰래 살인을 저질렀고 그 목을 루이바르텐가에 선물했다.
비올라에게는 단 한마디 상의도 없이 진행된 일이었다.
이건 비올라를 기만하고 무시하는 행위였다.
“기별을 넣을까요?”
“아니.”
“에스코트하겠습니다.”
천천히 걸어가던 제논이 조용히 물었다.
“공녀님.”
“왜?”
“그래도 이곳은 겨울성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주세요. 살인은 안 됩니다.”
“혹여 겨울성의 법칙을 어겨야만 하는 날이 온다면, 집사를 애용해 해주세요.”
비올라의 집사.
제논입니다.
얼마 후,
제논과 비올라는 헤라의 방문 앞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