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092화
“진짜 너무해! 나 화났어.”
아주 잠깐 등골이 서늘해졌다.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귀신이라도 튀어나온 줄 알았다.
차라리 귀신이라면 다행이지, 살수같은 거라면 더욱 무섭다.
물론 이곳은 겨울성이고 살수 따위가 잠입했다가는 아버지인 헤론에게 두 동강이 나고 말 테지만.
아무튼 아무도 없는 곳에서 목소리가 들려오자 속으로 오만 생각이 다들었다.
‘근데…
어디서 많이 들어본 목소리였다.
소리가 들려오는 곳은 침대 밑이었다.
비올라가 고개만 내려 침대 밑을 쳐다보았다.
침대 밑에 작은 소년이 하나 기어들어 가 있었다.
그 작은 소년의 이름은 퐁퐁이였으며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정령후였고, 비올라와 계약한 정령이기도 했다.
‘응?’
침대 밑에 들어가 있는 것도 범상치 않았는데 표정은 더욱 범상치 않았다.
“울어?”
“우, 울긴 누가 울어!”
물의 정령 퐁퐁이의 커다란 눈망울에서 맑은 눈물이 톡 떨어져 내렸다.
퐁퐁이는 많이 억울하고 속상한지 아무렇게나 말을 내뱉었다.
“나는 안 울어. 나는 안 나쁘니까.
나쁜 건 비올라지, 나는 위대해.”
……”
비올라는 퐁퐁이가 왜 이러는지 이유를 알아낼 수 있었다.
비올라는 퐁퐁이와 계약을 할 때 이렇게 말했었다.
‘우리 같이 예쁜 꽃에 물 주지 않을래?’
그런데 여차여차 일이 바빠 퐁퐁이를 소환하지 못했다. 퐁퐁이는 공작저의 꽃밭들을 구경하지도 못했고 물을 주지도 못했다.
“그래. 내가 나빴네.”
“분명 나랑 약속했잖아. 왜 약속안 지켜?”
“약속 지킬게.”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흘러내리고 있는 표정을 보아하니 정말 많이도 억울한 것 같았다.
“거짓말. 저번에도 약속해 놓고선.”
“이번엔 진짜로 지킬게.”
생각해 보니 조금 너무하기는 했다.
사탕발림으로 어린 정령을 유혹(?)
하여 계약을 맺어놓고서는 그 소박한 소원조차 들어주지 않고 있었다니.
“거짓말. 나는 10년이나 기다렸어.
10년 동안 약속을 안 지켰는데, 이제 와서 지키겠다는 거야? 난 비올라한테 신뢰를 잃었어.”
“10년?”
그러고 보니 정령계와 이곳은 시간의 흐름이 다르다는 설정이 있었던 것 같다.
물론 정령의 수명은 거의 무한에 가깝기 때문에 10년이라는 시간이 그들에게 큰 의미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10년이 짧은 시간은 아니었다.
“위대한 물의 정령에게 10년은 그저 찰나 아니야?”
“그렇지만 꽃밭에 가기로 약속했잖아. 꽃에 물 주게 해주겠다고 했잖아. 그랬잖아.”
비올라가 침대에서 내려왔다.
쪼그리고 앉아 침대 밑에 구겨져 있는 퐁퐁이와 눈을 마주쳤다.
그러자 또 퐁퐁이의 맑은 눈에서 눈물이 퐁퐁 솟아났다.
“지금 가자. 물 주러. 미안해, 약속안 지켜서.”
“안 가! 비올라는 거짓말쟁이야.”
“지금쯤이면 마거리트 꽃밭의 꽃이 엄청 많이 폈을 거야.”
퐁퐁이는 고개를 휙 돌렸다.
휙 돌리면서 침대 바닥에 머리를 부딪쳤지만 아픈 것을 내색하지는 않았다.
대신 또 눈물이 주르륵 흘러나왔다.
“마거리트의 꽃말이 뭔지 알아?”
“꽃말?”
“진실한 사랑, 예언, 사랑을 점친다, 비밀을 밝히다.”
과거 강한준이 부적으로 주었고, 툰드라도 비올라에게 선물해 줬었던 꽃.
정확히 시기는 기억나지 않지만 공작저에 마거리트 꽃밭이 생겼다.
마법으로 구현된 특별한 공간이었는데, 그 넓이가 어지간한 평야보다 넓다고 했다.
비올라도 아직 가본 적은 없었다.
“진실한 사랑? 예언? 사랑을 점친다? 비밀을 밝혀?”
퐁퐁이는 이내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똘망똘망해진 눈동자는 꽃에 대한 사랑과 희망을 숨기지 못했다.
“응. 저 꽃.”
“저 꽃?”
비올라가 한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예전 툰드라가 선물해 주었던 마거리트 꽃이 마법 처리되어 화병에 보관된 상태였다.
“안 보여.”
“침대에서 나와야 보이지.”
“나는 안 나갈 건데……….”
“우리 같이 마거리트 꽃에 숨겨진 비밀을 밝혀보자. 네가 물을 주면 많이 예뻐질 거야.”
퐁퐁이의 몸이 움찔움찔했다.
몸이 근질근질한 것 같았다.
“다음부턴 약속 잘 지킬 거지?”
“지금 약속 지키고 있잖아.”
“10년 걸렸잖아.”
“사과할게. 10년이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위대한 퐁퐁이는 마음도 넓으니 이만 나를 용서해 주지 않겠어?”
퐁퐁이는 결국 비올라를 쳐다봤다.
못 이기는 척 끙끙대며 침대 밑에서 기어 나왔다.
“나는 위대하니까 용서하는 거야.”
그리고 눈동자를 굴려 화병 쪽을 쳐다보았다.
눈이 커졌다.
“저게 마거리트?”
“응. 내 부적 같은 거야.”
“예뻐.”
퐁퐁이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물. 주러 가자!”
***
비올라는 굉장히 피곤했다.
파르아 자작령에서부터 여기까지 상당한 강행군이었다.
게다가 헤라의 뺨을 때리면서 어마어마한 심력까지 쏟아버렸다.
진이 다 빠져서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그렇지만 애써 흥분을 감추며 즐거워하고 있는 퐁퐁이를 보니 피곤이 날아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귀엽네.’
꽃에 물 주는 게 저렇게 신날까.
‘저런 걸 보면 참 원작 속 퐁퐁이도 불쌍해.’
저렇게 감정이 풍부하고 원하는 것이 확실한 정령인데.
원작 속 악녀인 하이디는 퐁퐁이를 피의 정령으로 만들어 불행을 몰고 다녔다.
끝까지 이용만 해먹는 악질 중의 악질이었다.
“여기로 가는 거야? 인위적으로 가공한 마나의 힘이 느껴지는데.”
퐁퐁이는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정령들은 본능적으로 마법 혹은 마도 공학에 거부감을 느낀다고 했다.
정령은 자연의 힘을 그대로 이용하는 것이고, 마법은 자연에 존재하는 힘을 인간이 인위적으로 배열하고 짜맞추어 억지로 사용하는 힘이었으니까.
“응. 이 문을 지나면 꽃밭이 펼쳐질 거야.”
“왜 이런 번거로운 짓을 해? 그냥 들판에 꽃밭을 만들면 되잖아.”
“겨울성은 땅이 너무 척박하거든.”
“척박해? 왜?”
“ “눈이 부는 곳과 맞닿아 있어. 그곳은 생명을 빨아먹는 기운을 가진 곳이래.”
“그런 건 딱히 안 느껴지는데?”
“이곳 전체를 거대한 마법진과 더불어 벨라투가가 지키고 있으니까.”
퐁퐁이는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벨라투 녀석들. 나만큼은 아니지만 꽤 위대한 녀석들이구나.”
비올라는 풉, 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어린 조카와 놀아주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비밀의 문’을 통과하여 마거리트꽃밭으로 들어갔다.
‘우와.
비올라도 속으로 감탄했다.
끝없이 펼쳐진 마거리트 꽃들이 보였다.
‘엄청나네.’
마거리트로 가득한 꽃밭.
초록 들판에 하얀색과 노란색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퐁퐁이는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중얼거렸다.
“무성한 진녹빛, 청초한 흰빛.”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후우우우웁!
“보드라운 향기.”
퐁퐁이는 간절하게 바라왔던 것을 드디어 만난 어린아이처럼 기쁨에 겨워했다.
“어여쁜 노란빛.”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비올라는 따뜻한 눈으로 계약 정령인 퐁퐁이를 그냥 쳐다보기만 했다.
“나는 물을 줄 거야.”
“그래. 꽃들도 좋아할 거야.”
“깨끗하고 맛있고 시원한 물을 줄거야.”
퐁퐁이의 몸이 거품이 되어 사라졌다.
그리고 그 거품은 하나의 거대한 물방울이 되어 하늘로 두둥실 떠올랐다.
굉장히 커다란 물방울이 된 퐁퐁이는 여기저기 비를 내리며 날아다녔다.
퐁퐁이는 이상한 콧노래를 부르며 비를 뿌려댔다.
“쑥쑥 자라렴. 위대한 퐁퐁이의 선물이란다.”
퐁퐁이라는 이름을 싫어했던 과거는 잊은 듯했다.
마거리트 꽃밭이 워낙에 넓어서 한번에 다 주지는 못했다.
“이 몸은 위대하지만, 마거리트 녀석들이 물을 많이 좋아하네.”
퐁퐁이는 다시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와 헥헥거리며 이마의 땀을 닦아냈다.
힘들지 않은 척하려고 최대한 호흡을 조심하는 것이 눈에 보여 귀엽기도 하고 웃기기도 했다.
“그렇게 강인한 척하지 않아도 돼.”
“나는 강인해.”
“호흡이 가쁜데?”
“안 가빠.”
그런 것치고는 굉장히 헥헥대고 있지만 비올라는 그냥 넘어가 주었다.
그런데 그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인님?”
***
툰드라는 마거리트 꽃밭을 종종 찾았다.
왠지 마거리트 꽃밭에 오면 마음이 편해지는 기분이었다.
비올라가 그리울 때면 마거리트 꽃밭에 들어와 명상을 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마거리트 꽃들에 둘러싸여 있으면 비올라의 향기가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다.
‘공작저에 오셨다고 들었는데.
그렇지만 비올라는 많이 바쁜지 툰드라를 만나주지 않았다.
‘바쁘시겠지.’
비올라가 돌아오자 툰드라의 외로움은 더욱 커졌다.
툰드라는 자신이 외롭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았다.
‘반려견으로서 지극히 당연한 마음이야.’
반려견이라면 주인이 보고 싶은 것이 당연하다.
주인과 만나고 싶고, 주인의 눈을 보고 싶고, 주인의 손길을 기다린다.
최근 여러 번 만나 얘기를 나눈 반려견 행동 전문가도 그렇게 말해 주었다.
‘명상이나 하자.’
외롭다는 것을 인정한 채, 명상에 몸을 맡기기로 했다.
명상하다 보면 시간의 흐름을 잊을 때가 많았고, 밤도 여러 번 지새웠다.
명상에 집중하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콧노래 소리가 들려왔다.
무성한 진녹빛. 청초한 흰빛.
보드라운 향기.
어여쁜 노란빛.
명상 중이라서 말의 내용이 제대로 들리지는 않았지만 집중력은 흐트러졌다.
‘이 시간에 누가?’
그리고 툰드라는 번뜩 정신을 차렸다.
‘주인님의 냄새!’
비올라의 냄새가 났다.
강아지처럼 코를 쫑긋쫑긋 벌렁거렸다.
확실했다.
‘주인님의 냄새다.
비올라가 가진 마나의 냄새였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꼬리는 없지만 꼬리가 마구 흔들리는 것 같았다.
또 이상한 생각이 났다.
‘프로펠러가 뭐야?’
저번과 똑같았다.
엉덩이가 프로펠러처럼 흔들리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프로펠러가 뭔지 여전히 잘 모르겠지만, 명상에서 완전히 깨어났다.
비올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꽃들도 좋아할 거야.”
평소보다 훨씬 따뜻한 목소리였다.
비올라의 목소리가 또 들려왔다.
“그렇게 강인한 척하지 않아도 돼.”
“호흡이 가쁜데?”
툰드라는 저도 모르게 몸을 벌떡 일으켰다.
“주인님?”
비올라의 얼굴을 봤다.
비올라는 어딘지 모르게 행복해 보였다.
‘아….’
저 모습을 보니 괜스레 마음이 따뜻해졌다.
‘나도 행복하다.
가슴속 깊은 곳으로부터 차오르는 풍만한 충족감이 느껴졌다.
“툰드라? 넌 여기서 뭐 해.”
“명상 중이었어요. 마거리트 꽃밭에 들어오면 왠지 명상에 집중할 수 있어서요.”
툰드라는 비올라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지금 이 순간, 툰드라의 머릿속은 비올라로 가득 찼다.
비올라가 세상의 전부인 것 같은 느낌이었다.
툰드라가 말했다.
“돌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의 눈에는 반가움의 눈물이 맺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