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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양 딸 역할을지나치게 잘 해버렸다-94화 (94/201)

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094화

“받거라.”

공작이 내민 것은 작은 백금 반지였다.

백금인데도 불구하고 빛의 각도에 따라 여러 가지 색깔로 보였다.

초록빛이 나는 것 같기도 했고 노란빛이 나는 것 같기도 했다.

또 어떻게 보면 하얀색처럼 보이기도 했다.

오묘한 색깔이었다.

자세히 보니 눈으로는 제대로 식별 하기조차 어려울 정도의 미세하고 작은 문양들이 새겨져 있었고,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보석이나 장신구에 대해서 잘 아는 건 아니었지만 척 봐도 명품 중의 명품이었다.

“이게…… 뭐죠?”

헤론은 누군가에게 선물을 주는 성격이 아니다.

사랑했던 라엘을 잃은 이후로 누군가에게 선물을 준 적이 없다.

“곧 물망초 연회가 열린다.”

비올라도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곳은 비올라의 사교계 데뷔장이 될 것이다.

그곳에서 여러 귀족가의 자제들과 좋은 관계를 가지고 훗날 굴곡 없는 삶의 밑바탕을 다지기 위하여 노력하고 올 것이다.

“그때 쓰거라.”

감사합니다.”

일단 주는 거니 받기는 받았다.

순간, 어깨가 빠질 뻔했다.

‘헉…!’

뭐가 이렇게 무거워?

작은 것치고 무거운 게 아니라 진심으로 무거웠다.

‘안 돼. 버텨, 내 팔아.’

이㉮ 작은 반지에게 질 수는 없었다.

이건 자존심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영역이었다.

만약 이 반지를 놓치거나 떨어뜨리 기라도 한다면?

이 반지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힘들어한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해.’

이것도 시험이 분명했다.

생존에 대한 열망과 헤론에 대한 공포심을 바탕으로 힘을 끌어냈다.

‘든…… 다!’

다행히 소설 속 여주 비올라의 육체여서 이 무게를 감당할 수는 있었다.

팔이 바들바들 떨려왔지만 겉으로는 씨익 웃었다.

“누군가에게 반지를 선물 받는 건 처음이에요. 그 누군가가 아버지여서 기분이 좋네요.”

“무겁나?”

비올라는 잠시 고민했다.

무겁다고 솔직하게 말을 해야 하나?

아니면 무겁지 않다고 허세를 부려야 하나?

‘내가 무거워하는 걸 이미 읽었을 거야. 거짓말은 의미 없어.’

근육과 신경의 움직임까지 읽어내는 괴물 같은 무인이다.

거짓말은 의미가 없다고 판단했고 솔직하게 말했다.

“무거워요. 도대체 무엇으로 만든 반지인가요?”

“꽃.”

”네?”

헤론 공작은 그 말을 끝으로 미련없다는 듯 등을 돌렸다.

비올라가 이 작은 반지를 무거워하는 것에 대해 딱히 실망도 하지 않은 것 같았다.

마치 무거운 것이 당연하다는 듯한 태도였다.

끼익—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헤론에 대해 잘 안다고 자부하는 비올라지만 오늘만큼은 헤론의 행동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

그날 밤.

총집사 칼튼이 비올라의 방을 찾아왔다.

“제논 집사의 딸기 에이드가 일품이라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네. 일품이죠.”

“라스본 빙검식을 딸기 에이드를 만드는 데 사용할 줄이야. 혹시 공녀님께서 괜찮다면 제게도 딸기 에이드를 대접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비올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낮에는 헤론 공작이 왔다 가고 밤에는 칼튼이 찾아왔다.

그 대단한 세계관인 벨라투의 그림자> 속에서도 절대자급에 해당하는 사람들이다.

게다가 칼튼은 무려 헤론을 노렸던 전직 살수.

사람 죽이는 것이 직업이었던 사람이다.

‘무서워.’

지금이야 사람 좋은 미소를 하고 있지만 사실 냉혹하고 무서운 사람이라고 서술되어 있었다.

점심부터 지금까지.

도무지 마음을 놓으려야 놓을 수가 없었다.

얼마 후, 제논이 딸기 에이드를 만들어 왔다.

“정말 맛있군요. 처음 먹어보는 맛입니다.”

“본론이 뭐죠?”

딸기 에이드는 물론 맛이 있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맛이 제대로 느껴지지 않았다.

이 불편한 상황에서 얼른 벗어나고 싶었다.

“본론이요?”

“네. 총집사께서 아무런 이유 없이 제 방을 찾아오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고작 딸기 에이드를 얻어 마시러 왔을 리는 없고.”

“고작 딸기 에이드라고 말하기에는 섭섭하겠는데요?”

칼튼이 빙그레 웃으며 비올라 옆에 시립한 제논을 쳐다보았다.

제논도 마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공녀님께 드리는 딸기 에이드는 제 모든 정성과 심혈을 기울여서 빚어낸답니다.”

“라스본 빙검식처럼 살벌한 검술식으로 딸기 에이드를 만들려면 어느 정도로 섬세한 마나 컨트롤이 필요할지 문득 궁금해지는군.”

“총집사님의 살검에 비하면 별거아닙니다.”

둘의 대화를 들어보니 이 딸기 에이드가 별거 아닌 게 아닌 모양이었다.

아무튼 비올라에게 지금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아버지의 최측근, 총집사가 후계 자 후보를 개인적으로 만난다는 건 그리 좋은 처사는 아닌 것 같은데요.”

“그건 그렇죠. 형평성 문제도 있고 아무래도 보기에 좋지는 않을 겁니다. 다만, 제가 이곳에 온 것은 헤론 공작님을 제외하면 아무도 모르니 크게 문제 될 것은 없을 겁니다.”

칼튼이 의자에서 내려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 의자에 앉은 비올라를 살짝 올려다보았다.

“뭐 하는 거죠?”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공녀님의 손가락을 좀 살펴보아도 괜찮을까요? 정확히는 반지를 낀 쪽을 보고 싶습니다.”

칼튼이 공손하게 손바닥을 들어 올렸고 비올라는 여유로운 태도로 그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칼튼은 속으로 적잖이 놀랐다.

‘별로 힘을 들이지 않고 반지를 끼고 있잖아?’

이 반지는 열두 살짜리 공녀가 쉽사리 끼고 다닐 수 있는 반지는 아니었다.

열두 살의 메데이아라 할지라도 이렇게 쉽게 끼고 다닐 수는 없었을 것이다.

“무겁지…… 않으십니까?”

“처음에는 무거웠죠.”

“지금은 괜찮아 보이십니다.”

“네. 괜찮아요.”

칼튼은 크게 충격을 받았다.

“이 반지에는 무려 2,870만 송이의 마거리트 꽃이 녹아들어 있습니다.

……”

비올라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마도 명장 쿠룸쿠룸의 힘으로 제련된 반지죠.”

“쿠룸쿠룸이요?”

“예. 마도 명장들 중에서도 명장으로 손꼽히는 난쟁이족의 장로입니다.”

설명을 듣지 않아도 안다.

마도 명장 쿠룸쿠룸.

소설 속에 등장하는 모든 장인을 통틀어 최고봉에 올라선 자였다.

‘자기가 원하는 사람에게만 물건을 만들어주는 괴짜.’

소설 후반부에서 비올라는 쿠룸쿠룸에게 단도를 주문하게 되는데, 쿠룸쿠룸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그 주문을 거부해 버린다.

이에 화가 난 비올라는 쿠룸쿠룸을 죽이려고 했으나 쿠룸쿠룸이 몸에 걸치고 있는 희귀한 아티팩트들의 보호 때문에 시도는 실패로 돌아가게 되고, 인간 세계에 큰 염증을 느낀 쿠룸쿠룸은 난쟁이들의 숲으로 돌아가 다시는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 쿠룸쿠룸이 만든 반지를 날 줬어?’

순간 멍해졌다.

2,870만 송이의 꽃이 녹아들어 있는 반지라고?’

이런 걸 왜 줬을까?

이유가 뭘까?

비올라는 침착하게 생각을 이어갔다.

빙의한 지 어언 5년 차.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생각, 하자.’

비올라는 충분히 합당하고 이성적인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아버지께서 제게 원하시는 바가 명확해졌군요.”

무려 마도 명장 쿠룸쿠룸의 반지다.

사교계를 전쟁터로 비유한다면, 이 반지는 군인들의 무기라고 할 수 있다.

희귀성에서 놓고 보자면 루이바르텐가의 한정 제작품들보다 더 희귀하고 값비쌀 것이다.

“하얀 벨라투로서 그 위상을 공고히 하여라. 그 뜻이겠지요.”

칼튼은 입을 다물었다.

칼튼이 생각하는 바와 정확히 일치했다.

왜 헤론 공작이 굳이 번거로움을 감수해 가며 저 반지를 만들어 왔겠는가.

‘ ‘공작님이라 할지라도 마도 명장쿠룸쿠룸에게 주문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헤론 공작조차도 단 세 번만 주문할 수 있다.

한 번은 ‘혹한’을 만들었고, 한 번은 반지를 만들었으니, 헤론에게도 이제 기회는 한 번밖에 안 남은 셈이었다.

‘그만큼 하얀 벨라투로서 기대하는 바가 크신 거겠지요.

어떤 벨라투에게도 이렇게 파격적인 지원을 해준 적이 없었다.

아마 이번 처사는 아주 늦게 후계 경쟁에 뛰어든 비올라에게 주는 공작의 후원 같은 것이라 해석할 수 있었다.

“거기에 총집사님까지 찾아와 이러한 사실을 가르쳐 주시는 것은 제게 실수하지 말라는 일종의 경고이기도 하겠지요. 저는 그 뜻을 받들어 하얀 벨라투다운 모습을 보이고 돌아 오겠습니다.”

겉으로는 여유롭게 말했지만 속은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

툰드라와 대화를 나눈 힉슨은 헹!

하고 코웃음을 쳤다.

“아주 가지가지 하는구먼.”

힉슨은 기분이 조금 나빠 보였다.

“그 요망한 놈.”

“…요망한 놈이요?”

“그래. 헤론.”

툰드라는 주변을 살펴보았다.

다행히 연무장에는 아무도 없었다.

“스승님. 그래도 말조심을 조금 하시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야, 괜찮아. 쫄지 마. 그놈을 다 왜 그렇게 무서워하는 거야? 걔 은근히 마음 넓어. 좀팽이처럼 굴지 않는 녀석이란 말이지.”

욕 좀 해도 되고,

비속어 좀 섞어 써도 된다.

그것이 헤론 ‘벨라투’의 위신을 크게 깎아 먹거나 벨라투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는다면, 헤론은 별달리 문제 삼지 않는다.

다만 사람들이 지레 겁을 먹고 그렇게 못 할 뿐.

“그걸 왜 줬겠냐?”

힉슨은 오랜 친구의 마음을 꿰뚫어봤다.

“너 비올라한테 꽃 준 적 있지?”

“네.”

“왜?”

“공녀님께서 좋아하시는 것 같아서요.”

“그렇지?”

힉슨이 거기까지 말했으나 툰드라는 이해하지 못했다.

힉슨은 답답한 듯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걔도 똑같아.”

“…네?”

“꽃 준 거야, 그냥.”

툰드라의 눈이 커졌다.

꽃을 선물해 줬다?

수천만 송이를?

꽃밭을 통째로 증발시켜서?

“그니까 그 요망한 놈이 제 딸에게 꽃을 선물한 거라니까?”

“설마요.”

“꽃을 선물했다는 것에 네 오른 손목을 건다.”

“왜 제 손목을 겁니까?”

“그거야 내 손목이 아니니까?”

말을 하던 힉슨이 고개를 갸웃했다.

“엥? 근데 걔 그거 받고 멀쩡했대? 어디 손목 아작 나거나 어깨빠지거나 그러지 않았나? 아, 아니다. 내가 가봐야겠다.”

그 반지에는 어마어마한 꽃의 생기(生氣)가 녹아들어 있다.

일반인들은 들지도 못할 것이고 어지간한 무인들도 힘들어할 것이다.

열두 살의 육체가 감당하기에는 버거울 것이다.

‘그 어린것은 또 헤론 앞에서 당당하게 드는 척을 했겠지.’

그 차가우면서도 미련한 아이는 무겁다는 내색도 못 했을 것이다.

‘으씨. 어디 다쳤기만 해봐라.’

무슨 애한테 그런 선물을 준단 말인가.

줄 거면 무겁다고 설명이라도 좀 해주든지.

‘설명 안 해줬겠지?’

그놈 성격에 설명해 줬을 리가 없다.

힉슨의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비올라. 너 괜찮아?”

힉슨이 비올라의 방 안에 들어섰을 때, 황당한 상황이 벌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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