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121화비올라는 독자로서의 모든 지식을 총동원하여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 지를 필사적으로 생각해 냈다.
‘완벽하게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어.’
둘 다 어마어마한 실력자다.
섣부른 논리로 저들을 이해시키려다가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일으킬수 있었다.
논리보다는 감성에 입각하여 설명하기로 했다.
“아버지가 다정한 덕분이었어요.”
그 말에 힉슨이 눈을 치켜떴다.
갑자기 귀를 후볐다.
“이상하네. 내 귀가 좀 잘못됐나?”
진지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아버지가 다정한 덕분이었다고?
네 아버지는 폭력적이잖아.”
힉슨은 비올라가 했던 말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저 작고 여린 고사리 같은 손을 자신에게 내밀면서 이렇게 말했었다.
‘아버지는 내게 무관심해. 나를 이런 야생에 던져놓고 그토록 무관심한 건, 일종의 폭력이잖아.’
그런 헤론 공작이 다정하다니?
힉슨은 절대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고.
“내게 반지를 선물해 주셨어.”
“알아. 마거리트 꽃밭을 통째로 갈아 만들어줬다지?”
힉슨은 어딘지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었다.
“응. 그런데 평범한 꽃밭이 아니었어.”
“그럼?”
“아레나를 잔뜩 머금은 꽃밭이었어.”
아레나는 ‘기적을 일으키는 물로서 정령후조차 단 한 번만 반출할 수 있는 정령수.
퐁퐁이는 생애 첫 꽃밭을 가꾸기 위하여 대량의 아레나를 공수해 꽃밭에 뿌렸었다.
메데이아도 상당히 흥미로운 듯했다.
“아레나라면…… 기적을 일으키는 생명의 정령수?”
“맞아요. 아버지라면 마거리트 꽃들이 아레나를 머금었다는 사실을 아셨을 거예요.”
사실 비올라도 모른다.
헤론이 그 사실을 알았는지, 몰랐는지는.
“그래서 그 꽃들을 반지에 담아 제게 선물하셨던 것 같아요.”
힉슨은 점점 더 표정이 나빠졌다.
다리를 꼬고 앉아 심드렁한 얼굴로 대꾸했다.
“아레나를 머금은 꽃이랑, 네게 주는 선물이랑 뭔 상관인데?”
“내가 익힌 검은 초검(草劍)이잖아.”
“그래서?”
“어쩌면 아버지는 내가 초검을 익히기를 바랐던 것일지도 몰라. 이 반지는 초검을 익힌 자에게 큰 힘을 선물해 줘.”
헛소리!
힉슨은 그렇게 외치고 싶었다.
그 요망한 녀석은 그저 귀여운 딸에게 꽃을 선물해 주고 싶었을 뿐이다!
그렇게 말하고 싶었으나 또 한편으로는 비올라의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놈이 워낙 철두철미해야지.’
워낙 먼 미래를 보는 놈이라 그럴 수도 있지 않겠나라는 생각이 잠깐들었다.
‘정령수를 머금은 꽃(풀)이 가득 담긴 반지라.’
힉슨은 인상을 찡그린 채 중얼거렸다.
“반지 안에 무한히 생성되는 꽃밭이 존재하겠군.”
기적의 정령수 아레나의 힘을 입었으니 충분히 가능한 얘기였다.
초검과의 상성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좋다는 것도 자명한 사실이었다.
“너는 초검을 통해 그 힘을 끌어내쓰기만 하면 되는 거겠어. 네 정령친화력은 대륙에서 제일가는 수준이니, 정령수를 머금은 풀의 힘을 훨씬 더 유리하게 힘을 사용할 수 있었을 거야.”
후릅.
비올라는 코코아를 마셨다.
힉슨의 혼잣말은 비올라에게 가르침을 주었다.
‘음. 이제야 조금씩 알겠네.”
힉슨이 말을 이었다.
“다만 그 정도 기적을 담기 위해서는, 기적을 능가하는 아티팩트여야 하는데…….”
힉슨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듣다 보니 비올라의 말이 다 맞는 것 같았다.
‘그놈이 진짜로 이런 안배를 준비한 거였어?’
그냥 요망한 선물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단순히 선물이었다면 이렇게까지 설계되어 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마도명장 쿠룸쿠룸을 찾았던 것이었나!”
기적을 담으려면 기적이 필요하다.
그래서 기적을 만드는 명장 쿠룸쿠룸의 힘이 필요했던 모양이었다.
“카를로 수석디자이너의 스승이 쿠룸쿠룸이라는 소문도 있어요.”
“과연, 어쩐지 반지와 드레스 사이에 묘한 연결 고리가 있는 듯했어.”
“아저씨도 그렇게 느꼈어요?”
“비올라의 살성과 반응해서 마나의 흐름을 유기적으로 만들어주었던 것 같아. 그래서 반지에서 생성되는 강력한 정령의 힘을 큰 무리 없이 다룰 수 있었고.”
메데이아가 빙그레 웃었다.
“비올라의 살성이 드레스의 힘을 일깨우는 키였던 모양이네요.”
“마도명장의 자존심이었겠지.
등장인물들이 똑똑한 덕분에 비올라는 코코아를 마시며 기다릴 수 있었다.
‘아, 그렇게 된 거구나. 그래서 내가 센 거구나.”
코코아가 달게 느껴졌다.
***
총집사 칼튼은 달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공작님의 귀환이 늦어지신다.
대마물의 전조 증상을 느끼고 홀로 혹한을 들고서 눈이 부는 곳으로 향하셨다.
연락이 두절된 지 오래였고 칼튼은 남몰래 속앓이를 했다.
‘그분은 강하시지만, 대마물들 역시 강하다.
만약 겨울성의 군주가 헤론 벨라투가 아니었다면, 겨울성은 진작에 무너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헤론은 이미 재앙이라 불릴 수 있는 여러 종의 대마물을 토벌해 왔다.
세상 사람들이 누리는 이 평화는 헤론 덕분이었다.
적어도 칼튼은 그렇게 생각했다.
며칠만 더 기다려 보자.
귀환이 이렇게 늦어진다면 비밀리에 수색대를 꾸려서라도 ‘눈이 부는 곳’으로 향해야 했다.
칼튼은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
헤론은 혹한을 갈무리한 채 길을 걸었다.
‘눈이 부는 곳은 눈이 강하게 불어 시야가 제대로 확보되지 않는 곳이었다.
그러나 헤론에게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이곳에도 없나.”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느새 밤이 된 것 같았다.
‘눈이 부는 곳은 낮과 밤의 경계가 불분명한 곳이었다.
때로는 밝았고 때로는 어두웠다.
눈이 부는데 열천(熱川)이 흐르는 곳도 있었다.
이 세상의 상식과는 동떨어진 신세계.
헤론은 ‘눈이 부는 곳’을 그렇게 정의했다.
“시간이 조금 더 걸리겠어.”
헤론은 무엇인가를 밤낮없이 추적했다.
그는 오랫동안 걸어도 지치지 않았고, 먹거나 마시지 않아도 괜찮았다.
헤론이 입을 열었다.
“죽일 생각은 없으니 가만히 있거라.”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마물무리를 향해 한 말이었다.
인간의 언어였지만, 그 언어에는 헤론의 의지가 담겼다.
마물들은 본능적으로 그 의지를 읽어낼 수 있었다.
헤론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온갖 형태의 마물들이 한 걸음,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흉폭한 마물들의 눈에 담긴 것은 분명한 공포였다.
포식자를 향한 피식자의 본능적인 두려움.
인류가 그토록 두려워했던 ‘눈이 부는 곳’의 마물들은 헤론을 두려워했다.
헤론은 마물들을 그다지 신경 쓰지 않으며 계속 걸었다.
‘눈이 부는 곳’에서 요동치는 마나를 벗 삼아 무엇인가의 흔적을 읽어 내렸다.
“여기인가.”
명검 혹한을 꺼내 들었다.
땅을 향해 휘둘렀다.
‘눈이 부는 곳에 폭풍이 일었다.
끝없이 몰아치는 눈을 몰아냈고 땅이 갈라졌다.
헤론의 눈이 갈라진 땅 밑을 바라보았다.
지저 밑에서 꾸물거리는 거대한 무엇인가가 보였다.
그 모습은 마치 지저로부터 기어나온 지옥의 마물 같았다.
저것을 찾기 위해 ‘눈이 부는 곳으로 홀로 원정을 왔다.
‘네게 원한은 없으나, 이 또한 자연의 이치.’
다시 한번 검을 휘둘렀다.
날카로운 검풍이 일어 무엇인가를 베었다.
헤론은 가볍게 뛰어 땅속 깊은 곳에 착지했다.
이놈을 사냥하기 위해 이곳까지 왔다.
‘눈이 부는 곳에서만 서식하는 매우 특별한 형태의 밀웜이었다.
전체적으로 무지갯빛 색깔을 하고 있어 ‘레인보우 밀웜’이라 불렸으나이 개체에 대한 아는 사람은 헤론을 비롯한 극소수의 사람들밖에 없었다.
크기가 30여 미터에 이르며 지저에만 서식하고 있기에 사냥하기가 매우 까다로운 개체였다.
게다가 껍질은 단단하기 그지없어 5급 기사 이상의 힘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생채기조차 낼 수 없는 강력한 마물이었다.
‘작게 분쇄하는 것이 좋겠지.’
마거리트 꽃밭을 분쇄했던 것처럼 작게 잘라냈다.
지저에 서식하는 강력한 상위종 마물을 사냥한 헤론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1년은 걱정 없겠군.’
고슴도치들의 입맛이 까다로워 레인보우 밀웜이 아니면 먹지 않으려고 했다.
어쩔 수 없이 1년에 한 번 정도는 레인보우 밀웜을 사냥하러 와야 했다.
‘돌아가야겠어.’
겨울성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
칼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공작을 마중 나갔다.
“대마물은 처리하신 겁니까?”
“그래.”
인류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다 뿐이지, 레인보우 밀웜도 굳이 따지자면 대마물에 속하는 종이기는 했다.
“이사벨라 부인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헤론은 이사벨라와 만나 여러 가지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그중 헤론이 크게 관심을 가진 주제들이 있었다.
“제논이 이렇게 보고를 올렸어요.
그대로 전달해 드릴게요.”
이사벨라가 보고 내용을 전달해 주었다.
[매우 편안한 잠에 빠져들었으며, 머리카락을 질겅질겅 씹고 계십니다. 아마 좋은 꿈을 꾸고 계신 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꿈속에서 에그타르트를 드시고 계실지도 모를 일이지요.]
이사벨라는 공작의 눈치를 살폈다.
분명 은밀한 내용이 숨겨져 있을 것이다.
‘그게 무엇이지요?”
퀼튼가의 힘을 이끌어 냈다.
예리한 눈썰미로 공작을 관찰하며 그림자의 미묘한 흔들림을 읽어냈다.
‘그림자가 흔들려.’
무엇인가 심경의 변화가 있었다는 뜻이다.
‘분명히, 뭔가 있다.’
이사벨라가 공작저에서 있었던 일들을 계속 전해주었다.
“최근 결투에서 비올라는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답니다. 셀빈 공녀는 제가 선물한 포션을 사용하지 않았고요.”
“….…그렇군.”
그림자가 연신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헤론에게서 이 정도 동요를 읽어낸 것은 거의 처음이었다.
무엇이 헤론의 마음을 이토록 요동치게 하는 것인가.
“비올라가 익힌 무술은 초검이라는 무술로서, 공작님께서 주신 반지와의 상성이 매우 훌륭하다고 해요.”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초검을 미리 염두에 두고 선물을 해주신 것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부인의 판단에 맡기겠소.”
사실 저런 걸 염두에 둔 적은 없었다.
초검이라는 무술이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그러지요. 그리고 가장 중요한 소식이 하나 더 있어요.”
이사벨라는 잠시 눈을 감았다.
사실 이 소식이 가장 중요했다.
“마리앙투의 수호 기사들이 모두 몰살당했어요. 겨울성을 떠난 지 8일 만에 벌어진 참사였어요.”
수호 기사들은 전멸.
세나 공녀는 행방불명되었다.
“아마도 내통자가 있었던 모양이에요. 마리앙투는 즉각 수색대를 꾸렸고, 저희에게도 협력을 요청했어요.
메데이아 1공녀가 이끄는 수색대가 세나 공녀를 찾고 있어요.”
모든 내용을 전해 들은 헤론이 어디론가로 걸음을 옮겼다.
“어디 가세요?”
“6공녀에게 가보겠소.”
멀어지는 헤론의 뒤를 바라보며 이사벨라의 눈이 가늘어졌다.
토벌 직후, 보고를 듣자마자 향한 곳이 비올라의 방이라니.
역시 비올라와 헤론 사이에 무엇인가가 숨겨져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뭘 하러 가는 걸까?’
이사벨라는 염탐하고 싶은 마음을 가까스로 눌러 담았고, 헤론은 비올라의 방문 앞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