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122화제논은 조금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헤론 공작이 비올라의 방문 앞에서 꽤 오랜 시간 서 있었다.
“공작님, 귀환하셨군요.”
공작의 시선이 제논을 향했다.
제논은 빙그레 웃으며 공작에게 고개를 숙여 예를 취했다.
“비올라 공녀에게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지요?”
“그래.”
“제가 전달해 드릴까요?”
“그러려면 내가 직접 오지는 않았겠지.”
“그것도 그렇네요.”
제논은 조금 의아하다고 생각이 들기는 했다.
직접 찾아오셨다는 것은 분명 중요한 말을 하기 위해서일 텐데, 왜 한참이나 서성이고 계신 건지.
“어린아이들은 보통 몇 시에 자서 몇 시에 일어나지?”
헤론은 어릴 때 깊게 잠을 자본 기억이 거의 없었다.
잠을 자는 대신 극한으로 자신을 몰아세우며 훈련에 임했었다.
어릴 때의 그는 자는 시간이 아까 웠었다.
“비올라 공녀는 보통 오후 11시~12시 사이에 잠들어 7~8시경에 기상하는 편입니다.
“지금 시각은?”
“오후 10시 52분입니다.”
“그렇군.”
제논이 빙그레 웃으며 다시 물었다.
“혹시 비올라 공녀가 잠에서 깰 것이 염려되셨습니까?”
그래서 방문 앞에서 서성이고 있던 것인가.
기감을 퍼뜨리면 자고 있는지 깨어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을 텐데 그렇게 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보통 기감을 퍼뜨려 기척을 읽어내는 것은 상대가 적일 경우다.
그래서 딸이 자고 있을지도 모를 방의 기척을 읽어내지 않은 것 같았다.
“아직 잠에 빠져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군.”
헤론은 어딘지 모르게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제논이 이사벨라에게 올렸던 흥미로운 보고가 떠올랐다.
‘그리하여 매우 편안한 잠에 빠져 들었으며, 머리카락을 질겅질겅 씹고 계십니다. 아마 좋은 꿈을 꾸고 계신 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꿈속에서 에그타르트를 드시고 계실지도 모를 일이지요.
깊게 잠들면 그 보라색 머리카락을 질겅질겅 씹고 있었을 텐데.
철혈 공녀의 숨겨진 모습을 볼 수 있었을 텐데.
내가 너무 빨리 왔나.
헤론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하는 무의식 속에서 그러한 생각들이 오갔다.
“들어가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제논이 노크했다.
“공녀님, 공작님께서 오셨습니다.”
비올라는 침대에 앉아 내일 먹을 디저트에 관하여 진지한 고찰을 펼치던 중이었다.
내일 간식은 팬 케이크를 먹어야겠다.
생크림과 메이플 시럽을 잔뜩 올린 수플레 팬 케이크를 먹어야겠어.
으음, 맛있겠어, 내일이 빨리 오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하던 와중 눈을 번쩍 떴다.
‘아버지가?’
눈이 부는 곳으로 원정을 떠났던 헤론이 돌아온 모양이었다.
여전히 또래보다 체구가 많이 작은 비올라는 높은 침대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무사히 귀환하셔서 기뻐요. 이번에도 대마물을 토벌하고 오셨나요?”
“그래.”
비올라의 눈이 헤론을 향했다.
‘역시 잘생겼단 말이야.”
무섭긴 해도 확실히 최애캐다운 미모를 선보였다.
헤론의 미모에 감탄하는 한편, 머리는 재빠르게 회전시켰다.
‘근데 여긴 왜 왔지?’
올 이유가 별로 없는데.
아니, 근데 왜 최애캐는 냄새도 예뻐요?
‘아, 이거 아니지. 정신 차리자.’
이 세계에 꽤 익숙해진 건지, 헤론이 이전만큼 무섭지는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최애캐를 향한 덕심과 사랑이 공포를 이겨내는 중이었다.
헤론은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뭐 하는 거지?’
왜 저 아이가 콧구멍을 벌렁거린 건지 잘 모르겠다.
레인보우 밀웜의 피 냄새가 몸에 배어 있는 것인가.
살성을 지닌 아이이니 피 냄새에 민감할 터.
비올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긴 어쩐 일이세요?”
“너는 하얀 벨라투이지 않느냐?”
하얀 벨라투라면 내가 여기 왜 왔는지 정도는 스스로 알아차려야 하는 것 아니겠느냐, 라는 질문이었다.
비올라는 덕질의 세계에서 빠져나왔다.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텍스트를 덕질하는 것과 실존 인물을 덕질하는 것에는 역시 큰 차이가 있었다.
텍스트를 덕질할 때는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한껏 음미하면 그만이었지만, 지금은 목숨을 걸어야 했다.
몸으로 쓰는 팬픽은 현장감과 생동감. 그리고 위기감이 흘러넘쳤다.
‘초검 때문인가?’
아마도 그럴 확률이 높았지만 확실하지는 않았다.
‘확실하지 않은 것을 그럴듯하게 말하느니…… 차라리 모른다고 말하는 게 나아.’
헤론은 그런 캐릭터였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하는 것을 용기라고 인정해 주는 캐릭터.
‘전부 다 모른다고 말하면 목이 날아가겠지만….’
오늘은 무슨 중요한 임무가 있는 것도 아니고 후계 경쟁에 특별한 이 슈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오늘은 솔직함을 택하기로 했다.
“잘 모르겠어요.”
“모른다?”
“저는 아버지께서 저를 찾아오실 이유를 찾지 못하겠어요.”
순간, 헤론은 괜스레 기분이 나빴다.
하얀 벨라투가 아무것도 모른다니.
모른다는 말을 저렇게 쉽게 내뱉다.
니.
하필이면 힉슨의 얼굴이 떠올랐다.
“힉슨이 이 방을 종종 찾는다지?”
“네.”
“그가 이 방을 찾는 이유는?”
비올라는 고개를 갸웃했다.
힉슨이 이 방을 찾는 이유는 간단했다.
“친구가 없대요.”
힉슨의 친구는 공작저 주변을 돌아다니는 고양이들뿐이었다.
힉슨은, 최근 비올라의 창문 앞에 종종 모습을 드러내는 갈색 고양이에게 나비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비올라를 찾아와 수다도 떨 겸, 나비와 교감도 할 겸.
“사실 거창한 이유는 없는 거 같아요.”
“그렇군.”
헤론은 이유 모를 불쾌감이 밀려들었다.
힉슨이 찾아왔을 때도 ‘왜 왔어요?‘라고 묻는지 궁금했다.
그러나 묻지는 않았다.
헤론은 잠자코 비올라를 쳐다보았다.
사실 그는 마음속이 복잡한 상태였다.
‘나는 왜 이곳에 있는가.
비올라에게 던진 질문이었으나 사실은 헤론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이기도 했다.
그조차도 자신이 왜 이곳에 있는지 알지 못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비올라는 자신을 바라보며 이유 없는 호감을 잔뜩 보내오고 있었다.
철혈의 공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진실된 호감을 말이다.
“비올라. 너는 내가 두렵지 않은가?”
“두려워요.”
비올라는 솔직하게 말했다.
젤톤의 목을 베어 성문 앞에 내걸었던 것도 헤론이다.
형제들 간의 피 튀기는 후계 경쟁도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 인물이기도 했다.
까딱 잘못하면 목이 날아가는 이 세상의 절대자.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별로 두려워하는 기색은 아니구나.”
헤론을 향한 두려움도 사실이었지만, 반대로 헤론을 향한 애정도 사실이었다.
아린이었던 시절부터 헤론을 좋아했고 덕질했는데, 심지어 그 대상이 눈앞에 있으니 애정이 없으려야 없을 수 없었다.
“그야. 좋아하니까요.”
헤론은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다른 자식들에게서는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말이었다.
좋아한다는 저 말은 결코 가식이나가면이 아니었다.
‘진심이군.’
진심으로 말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헤론은 혼란스러웠다.
왜 저렇게까지 진심인지, 헤론으로서는 알 도리가 없었다.
“왜지?”
“적어도 저를 버리지는 않았잖아요.”
비올라는 헤론과 눈을 마주쳤다.
“분명히, 백 밤만 지나면 저를 데 리러 올 거라고 말했어요.”
헤론은 비올라의 말을 잠자코 들었다.
아무래도 빈민가에 버려질 때의 얘기를 하는 모양이었다.
“그게 다섯 살 때의 일이었어요.
저는 매일매일 손가락을 세면서 기다렸어요.”
보육원 선생님께 물었었다.
우리 아빠는 언제 오냐고.
내가 숫자를 잘 못 세서 그런 거냐고, 그러면 이제 숫자 똑바로 세겠다고 말했었다.
그때의 상처가 날카로운 송곳이 되어 비올라의 눈을 찔렀다.
비올라는 새어 나오려는 눈물을 억지로 참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도 나를 데리러 오지 않았어요.”
헤론은 무덤덤한 눈으로 비올라를 계속 바라보았다.
비올라의 살성이 담긴 저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그 모습에, 헤론은 가슴 언저리가 욱신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제게 말씀해 주셨어요. 내 딸이 되겠냐고.”
헤론은 그때의 비올라를 떠올려보았다.
기억 속 그 아이는 또래의 아이들보다 훨씬 작았다.
손에 쥐면 부서질 것처럼 가늘고 여렸다.
그때의 비올라는 맨발이었다.
“아버지는 저를 버리지 않았어요.”
비올라는 늘 생각했다.
나쁜 아버지여도 좋으니까, 나쁜 엄마여도 괜찮으니까, 그냥 내 옆에만 있으면 좋겠다고.
나도 엄마, 아빠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헤론은 자꾸만 욱신거리는 마음을 내색하지 않고 건조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비가 자식을 버리지 않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잠시 말을 멈추었다.
“앞으로도 나는 너를 버리지 않을 것이다.”
조심스레 손을 들어 올리려다가 멈칫했다.
조용히 올라가던 손을 다시 내렸다.
겨울 군주인 그는 딸의 눈물을 닦아줄 용기를 내지 못했다.
“그러니 울지 말거라.”
마음이 아프니.
그 말은 하지 않았다.
헤론은 헤론의 방식으로 비올라를 위로했다.
“가끔 시간을 내거라. 네 새로운 검술의 대련 상대가 되어주마.”
***
마리앙투의 수호 기사들이 몰살당했다.
세나 공녀는 행방불명되었고, 결투참관인이었던 레븐은 시체로 발견되었다.
겨울성을 떠난 지 8일 만에 벌어진 참사였다.
대륙의 소식지들이 심도 있게 이 사건을 다루었다.
마리앙투 측에서 즉각 수색대를 꾸려 주변을 탐색하였고, 벨라투 역시 그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였다.
무려 메데이아가 직접 수색대를 이끌고 실종 지점을 샅샅이 뒤졌으나 아무런 소득을 올리지 못했다.
그건 마리앙투 측 수색대도 마찬가지였다.
세나 공녀는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렸고, 이 끔찍한 사건의 원흉이 누구인지조차 밝혀내지 못했다.
이 사건은 메데이아가 성공해 내지 못한 유일한 임무가 되었다.
그리고 약 1년이 흘렀다.
비올라는 숨을 한껏 들이마시고서 한 방문 앞에 섰다.
“제논, 노크해.”
제논이 방문을 똑똑 두드리자 에르사가 문을 열어주었다.
“비올라 공녀님께서 방문하셨습니다.”
에르사는 따뜻한 눈으로 비올라를 바라보았고, 비올라는 거침없이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달달 떨리는 다리를 숨긴 채 당당히 말했다.
“언니. 나 언니한테 부탁이 있어.”
지난 1년 동안 오늘을 기다려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