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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양 딸 역할을지나치게 잘 해버렸다-123화 (123/201)

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123화에르사는 문 앞에 서서 비올라의 뒷모습과 헤라의 모습을 한꺼번에 눈에 담았다.

헤라는 책상에 앉아 서류 더미를 살피고 있었고 비올라는 사뿐사뿐 걸어 헤라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시간이 참 빠르네.’

헤라는 이제 14살이 되었다.

그녀는 더 철두철미해졌고 조금 더 차가워졌다.

에르사는 그 모습이 아쉽고 슬펐으나 하얀 벨라투로서의 어쩔 수 없는 성장이라 생각하며 헤라를 보살피는 중이었다.

‘그래도 비올라 공녀님과 함께 있으면 더 많이 웃으시지요.”

헤라를 웃게 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중 한 명이 비올라였다.

그래서 비올라가 찾아올 때면 에르사의 마음도 한결 따뜻해졌다.

헤라에게 비올라 같은 동생이 있어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언니. 나 언니한테 부탁이 있어.”

“뭔데?”

헤라는 서류 더미에서 눈을 떼고 비올라를 올려다보았다.

부탁이라고 했다.

비올라가 어지간해서는 하지 않는 말이기도 했다.

보통 필요한 것이 있으면 제안을 하거나 거래를 하는 편이었지, 부탁을 하는 편은 아니었으니까.

“내가 예전에 했던 저금통 얘기, 기억나지?”

“기억나. 하나를 넣으면 둘이 되어 나오는 저금통?”

블루 다이아몬드를 맡기면서 그렇게 말했었다.

“내가 맡겼던 다이아몬드를 돌려받고 싶어졌어. 더 가치 있는 것으로.”

헤라는 손에 들고 있던 깃펜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비올라와 눈을 마주쳤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 부탁이지?”

비올라는 헤라의 눈빛이 날카롭다.

고 느꼈다.

비첸처럼 칼을 들고 히히 웃는 살벌함은 없었지만, 그보다 고요하고 예리한 기운이 느껴졌다.

헤라는 비올라를 좋아했지만 공과 사는 철저히 구별했다.

의미 없는 적선 같은 건 하지 않았다.

비올라가 대답했다.

“예의를 갖추고 찾아뵈어야 할 분이 있어서.”

“네가 예의를 갖추는데, 왜 내게 부탁을 하는 거야?”

“나한테 없는 것이 언니한테 있잖아.”

1년 전.

헤라는 비올라에게 받은 블루 다이아몬드를 쪼개어 여러 공방에 판매하였다.

그리고 그 수익금으로 핑크 다이아몬드를 대량 구매하였다.

당시 블루 다이아몬드는 핑크 다이아몬드보다 세 배 이상 비싼 가격이었고, 헤라는 수완을 발휘하여 많은 핑크 다이아몬드를 구입하였다.

1년 전에는 블루 다이아몬드가 훨씬 희귀하고 비쌌으나 지금은 상황이 역전되었다.

동대륙에 블루 다이아몬드가 잔뜩 묻힌 광산이 발견되면서 값이 하락했고, 영애들 사이에서 핑크 다이아몬드 유행이 불어 닥치면서 핑크 다이아몬드의 값이 잔뜩 올랐다.

물론 세계 각지의 디자이너들을 섭외하여 핑크 다이아몬드를 유행시킨 장본인이 바로 헤라였다.

“너한테 없는 것?”

“응. 최상급 핑크 다이아몬드, 예로부터 상대를 위로하고 존중의 마음을 표시할 때 건넸던 선물로 알고 있어.”

“맞아. 그런데?”

“언니는 최상급의 핑크 다이아몬드를 이미 가지고 있고, 나는 그걸 언니한테 받으려 해.”

“구매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달라고?”

헤라는 장사꾼이었다.

아무리 사랑하는 동생이어도 무턱대고 핑크 다이아몬드를 달라며 억지를 부리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화를 내지는 않았다.

비올라에게 무슨 생각이 있겠지.

헤라는 비올라를 믿었고, 여유를 갖고 기다려주었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어야 해.”

핑크 다이아몬드 중에서도 가장 영롱한 빛을 뽐내는 것들은 모두 테라 상단에서 취급하고 있다.

해당 다이아몬드는 야만의 협곡 근처에 위치한 페르샥 광산에서 채굴되는데, 그곳과 테라 상단이 독점체결 계약을 맺었기 때문이다.

“그래야 내 진심을 보일 수 있어.”

“돈으로 살 수 없다면 무엇으로 대가를 지불할 생각인데?”

헤라의 눈이 가늘어졌다.

돈이 아니라면 무엇으로 대가를 치를 수 있단 말인가.

“언니의 미래.”

순간, 비올라는 발가락에 힘을 꽉줬다.

손발이 오그라드는 것을 겨우 참아내며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헤라는 이런 말을 좋아하니까.

“언니의 미래를 주고 사겠어.”

헤라는 킥,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네가 아닌 다른 사람이 말했다면 한껏 비웃었을 거야.”

“지금도 비웃고 있는 것 같은데?”

“그런 거 아냐.”

헤라는 한참 동안 웃었다.

그녀는 비올라의 이런 점이 마음에 들었다.

“좋아. 내어줄게. 핑크 다이아몬드.

어차피 네가 준 블루 다이아몬드로 구입한 것이기도 하고.”

헤라의 웃음이 짙어졌다.

“사실 네게 선물로 주려고 준비해 놓은 것이 있었어.”

비올라는 고개를 갸웃했다.

“나한테?”

소설 속에서는 당연히 없던 내용이었다.

본래 소설 속에서 테라 상단은 핑크 다이아몬드를 다루는 상단이 아니었으니까.

“재미있는 건 말이야. 나도 너랑 같은 꿈을 꾸고 있었다는 거야.”

헤라가 책상 서랍 속에서 작은 쪽지 하나를 꺼냈다.

헤라의 손글씨가 적힌 쪽지였다.

[내 미래를 팔고 싶어.]

우연히도, 헤라 역시 비올라의 생일 선물을 미리 준비했다고 했다.

최상급 핑크 다이아몬드와 함께 이쪽지를 건네려 했다고 했다.

“네 원대한 꿈과 함께 호흡하고 싶다는 게, 내 꿈이거든. 너라면 내 꿈을 비싼 값에 사줄 것 같아서.”

뒤쪽에서 에르사가 아까보다 더 따스한 미소를 짓고 두 공녀를 바라보았다.

제논의 입가에도 화사한 미소가 서렸다.

‘다들…… 웃네.’

나만 못 웃겠네.

비올라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

비올라는 제논과 툰드라와 동행하여 세알 자작령으로 향했다.

늘 그렇듯 그 흔한 수행원도 몇 없었다.

제논이 마부를 자처하였고 툰드라가 비올라의 시중을 들었다.

공작가 영애의 여정치고는 지나치게 소박하고 단출한 구성이었다.

때문에 세알 자작령의 기사가 공작가의 마차를 알아보지 못하여 막아서는 헤프닝이 있기는 했으나 세알자작이 직접 마중을 나온 덕분에 큰 문제는 벌어지지 않았다.

마차 앞에 선 세알 자작은 약간 이상함을 느꼈다.

‘마차에 공작가의 표식이 전혀 없다.

벨라투 공작가는 사치하는 가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근검절약하는 가문도 아니었다.

마차에 보석을 치장하지 않는다 뿐이지 재질은 늘 최상급을 사용하였다.

그런데 이 마차는 그렇지 않았다.

‘낡고 허름한 마차.’

공작가의 영애가 탈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마차였다.

몰락 귀족의 여식이 겨우겨우 영혼까지 끌어모아 타고 다닐 법한 마차였다.

이윽고 마차 문이 열렸다.

“먼 길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세알 자작은 자신의 은인이라 할 수 있는 비올라에게 손을 내밀었다.

비올라는 그의 손을 살포시 잡고 마차에서 내려섰다.

비올라의 손에는 하얀 면사 장갑이끼워져 있었다.

‘옷이………?’

새하얀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먼 여정에는 어울리지 않는 복장이었다.

투박한 재질의 이 하얀 드레스는 어떠한 기교나 디테일이 포함되지 않은 순백색의 드레스였다.

비올라의 얼굴에는 그 흔한 화장기 하나 없었다.

보통 귀족가의 영애들이 나들이를 나설 때면 늘 화장을 한다는 것을 감안했을 때 이례적인 일이었다.

“세알 자작님, 오랜만이에요.”

비올라는 치맛단을 잡고 허리를 숙여 인사했고, 세알 자작은 오른손을 가슴에 붙이고 허리를 숙였다.

“자작님과 얘기하고 싶은 것이 있어요. 안내해 주시겠어요?”

“물론입니다. 제 마차로 모시겠습니다.”

세알 자작은 비올라를 에스코트하여 마차에 올라탔다.

마차 안에서 비올라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둘 사이에는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자작저의 응접실에 도착해서야 비올라가 입을 열었다.

“세알 자작님을 위로하기 위하여, 그리고 감사를 표하기 위하여, 이 자리에 섰어요.”

비올라가 손바닥을 들어 올리자 제 논이 다가와 그 손 위에 보석함을 얹었다.

“저는 세알 자작님이, 어쩌면 알고 싶지 않았던 진실을 마주하게 만들었어요.”

부인의 외도.

아들의 흑마법 중독.

다른 남자의 아이.

알지만 외면했던 것들을 바로 보게 만들었다.

“아뇨. 공녀님의 행동은 옳았습니다.”

“그와는 별개로 마음이 아픈 것도 사실이었지요.”

자작에게 인간적인 연민이 느껴졌다.

세알 자작이야말로 이 소설 속에서 가장 불쌍한 조연 아니겠는가.

“저였다면 무너졌을지도 몰라요.”

세알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철혈 공녀 비올라가 무너졌을 리 없다.

그러나 비올라의 진심은 느낄 수 있었다.

‘나를 조롱하는 게 아냐.’

그의 불행을 진심으로 공감하고 위로하고 있었다.

그 진심을 거절할 수 없어 조심스레 보석함을 받아 들었다.

그 안에는 핑크 다이아몬드가 들어있었다.

자작은 알 수 있었다.

돈으로도 살 수 없는 최고급 핑크다이아몬드였다.

“아시겠지만 돈으로 구할 수 없는 물건이에요. 저는 오늘을 위하여 이것을 예비하였고, 위로와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담아 자작님께 선물하고 싶어요.”

그제야 세알은 알 수 있었다.

낡은 마차. 그 어떤 무늬도 없는 하얀 드레스, 화장기 하나도 없는 얼굴.

이 모든 것에 의미가 있었다.

큰 아픔을 가진 세알 자작의 감정에 공감한다는 의미였고, 공작가의 영애가 아닌 사람 비올라로 이곳에 왔다는 것을 표현하는 행위였다.

“자작님의 사랑은 아름다웠어요.

그것이 옳은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저는 자작님을 존경해요.”

“…….”

자작은 할 말을 잃었다.

저 어린 공녀가 하는 한마디, 한마디의 말에 모두 힘이 있었다.

“그래서 저는 후견인으로서, 아이를 데려가려고 해요.”

그 아이는 세르폰과 자작 부인의 아이다.

세알 자작은 아이를 볼 때마다 자작 부인의 외도를 떠올려야 할 것이며, 그때마다 괴로울 것이다.

‘내가 벌인 일이니, 내가 책임져야지.’

대마법사 벵가스의 탄생을 막기 위해 움직였다지만 세알 자작에게는 미안했다.

세알 자작에게는 못할 짓을 해버렸다.

“자작 부인께서도 동의하셨어요.”

자작 부인에게는 서신을 통해 얘기했다.

그러나 자작에게는 직접 찾아와 눈을 마주치고 얘기했다.

외도했던 자작 부인을 대할 때와, 숭고하고 진실된 사랑을 보여준 세알 자작을 대할 때의 태도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공녀님.”

세알 자작은 핑크 다이아몬드를 받아들고 한참 동안 생각에 빠졌다.

부인과 배 속의 아이가 미울 때도 있었다.

그러나 늘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그래도 내가 사랑하는 여인의 아이이니, 내가 마음으로 품어야겠다.

저 아이도 내 아이다.

그렇게 생각하려고 무던히도 노력해 왔다.

그렇지만 그게 마음처럼 쉽지는 않아 자책하던 중이었다.

일단은 보석함을 돌려주며 말했다.

“며칠만……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충분히 생각해 보세요.”

비올라는 자신의 생각이나 판단을 강요하지 않았다.

자작에게 보여줄 수 있는, 비올라 나름의 경의였다.

며칠 후.

세알 자작이 결론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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