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177화 마탑과 신관의 조합은 이상한 조합이었다.
다짜고짜 말문을 열었던 엘바토가 인상을 찡그렸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야 할까.”
잠시 생각하는가 싶더니, “아, 그래. 이거부터 이야기해야겠군.”
엘바토는 품속에서 편지 한 장을 꺼냈다. 엘프들의 여왕인 하모나로부터 온 편지였다.
“흠흠, 쓰잘데기없는 내용은 빼고.”
비올라로서는 편지 안에 무슨 내용이 있는지는 알지 못했다. 서두에는 아마도 에바토 영감의 안부를 묻는 등의 이야기가 있으리라 짐작했다.
에바토 영감은 눈살을 찌푸렸지만 입가에는 미소가 서려 있었다.
“아무튼 흠흠, 중요한 내용은 하모나가 새로운 계시를 받았다는 거야.”
“하모나께서 새로운 계시를 받았다.
고요?”
“그래.”
벨라투의 그림자> 속에서는 없었던 일이다. 그러나 충분히 납득은 가능했다. 하모나의 설정 중 ‘신의 계시를 받는 권능을 지니고 태어난 여왕’이라는 설정이 존재하니까.
“뜬구름 잡는 소리니 그냥 글자 그대로 읽어볼게.”
[원한과 증오와 복수 대신.
용서와 사랑과 은혜로 말미암아 태어난 아이가 있어.
어울릴 수 없는 것을 어울리게 하고, 조화롭지 못한 것을 조화롭게 하여.
아이의 몸에 담긴 기적의 마나가… 진정한…….]
엘바토가 다시 한번 인상을 찡그렸다.
‘에잉, 뭔 놈의 계시는 맨날 이딴식이야’ 하고 투덜거렸다. “영감님, 자꾸 인상 찡그리면 주름늘어요.”
“하모나 그 할망구랑 똑같은 말은하지도 말아라.”
“계속 인상을 쓰니까요.”
“그래, 뭐. 아무튼 계시는 여기서 끝났어.”
“기적의 마나가…… 진정한…… 으로 끝났다는 거죠?”
“그래,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으나 왠지 비올라 너라면 알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
거기에 엘시나가 한마디를 보탰다. “어울릴 수 없는 것이 어울리게 하는 것. 그게 지금 엘바토 영감님과 제가 하고 있는 것이거든요.”
6마탑의 못난이 엘시나. 전직 기적의 신관 엘바토.
둘은 합심하여 하나의 계획을 진행중이다.
이름하여 ‘신관 양성’ 프로젝트.
비올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보니 그건 그렇네요. 마탑기준에서는 괴짜인 엘시나 경. 그리고 그냥 괴짜 덩어리인 영감님. 원래대로라면 두 집단은 서로 힘을 합친다는 개념 자체가 없잖아요.”
“그래, 그런데 확실히 신관의 힘과 마법사의 힘을 합치는 것이 조화롭지 못한 건 사실이야.”
엘바토의 오른손에 하얀색 신성한 빛이 새어 나왔다. 엘시나의 오른손에는 푸른색 마나가 일렁거렸다.
두 기운이 두둥실 떠올라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팟!
밝은 빛을 내며 터져 버렸다.
엘바토의 신성력도, 엘시나의 마나도 모두 사라져 버렸다.
“이렇게 되거든.”
비올라는 솔직히 찔끔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치마 밑의 호달달 떨리는 다리는 오늘도 들키지 않았다.
다리는 떨렸지만 입가로 은은한 미소를 띠었다.
“과연, 무슨 말인지 알겠네요.”
엘시나가 눈을 크게 떴다. “정말인가요?”
“네.”
“저는 계시 속 아이를 알고 있어요.”
“그게 누구죠? 위대한 마법사인가요? 혹은 또 다른 기적의 신관?”
“아뇨.”
비올라가 빙그레 웃었다. “주변에 있잖아요.”
“주변이요?”
엘시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녀는 아기 띠를 두르고 있었다.
비올라의 시선이 아기 띠 안에서 곤히 잠든 아기를 바라보았다.
“아이가 태어났다고 했잖아요.”
“…네?”
엘시나가 설마 하는 표정을 지었다. “설마 베나토를 말씀하시는 거예요?”
“사랑으로 키우고 계시죠?”
“그, 그건 당연하죠.”
베나토는 원래 벵가스가 되어야 했다. 「벵가스는 복수라는 뜻이었다.
벵가스의 원래 뜻은 복수였다.
그 아이가 ‘사랑의 결실’이라는 뜻의 베나토가 되었다. “계시가 맞다면 그 아이에게 기적의 마나가 깃들어 있을 거예요.”
벵가스(베나토)는 대마법사가 될 자질을 가진 아이였다. 나면서부터 마나를 가지고 태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아이.
“이 아이는 태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걸요.”
한때 대마법사 꿈나무였던 엘시나도 마나를 처음 받아들이기 시작한 나이가 다섯 살이었다. “엘시나 경, 확인은 해보셨어요?”
“아뇨, 확인 같은 건…….”
상식대로라면 확인 같은 건 필요 없었다. 엘시나가 눈을 크게 떴다.
‘설마!’
아닐 거야. 이건 마탑의 유구한 역사 속에서도 유례가 없던 일이라고.
태어나자마자 마나를 가지고 태어나는 아이라니.
‘설마.’
조심스레 아가의 이마에 손을 대었다. 손을 통해 마나를 살살 흘려 넣어보았다.
‘뭐야?’
여태껏 확인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아가의 몸에는 거대한 우주가 자리 잡고 있었다. ‘내 마나를 빨아들여?’
아기의 마나와 자신의 마나가 만났다. 베나토에게는 분명히 마나가 존재했다.
“지, 진짜잖아요?”
비올라가 빙그레 웃었다. “그럼 이제, 고민은 해결된 거죠?”
*** 비올라는 침대에 누웠다.
‘신의 계시라.’
비올라 입장에서 이 세계의 ‘신’은 곧 작가였다. 하모나라는 등장인물은 ‘계시’라는 수단을 통해 신과 교감할 수 있는 존재였고,
‘원작에 저런 계시는 존재하지 않았어.’
머리가 조금 복잡해졌다. 신이 새로운 계시를 내렸다는 건, 작가가 또 다른 글을 썼다는 것일까?
‘작가가 이 세상을 창조한 이후 계속 신의 역할을 하는 걸까?’
그도 아니면, 작가의 세계가 하나의 생명이 되어 이 세계의 신으로 군림하고 있는 걸까?’
어찌 되었든 새로운 신의 계시가 임했다는 것은 신이 존재한다는 뜻아닐까. ‘어려워.”
정말로 이 세계에 신이 존재한다면 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왜 빙의하게 되었을까. 의문점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비올라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 * *
한편, 엘시나는 베나토를 요람에 누이고 조심스레 방 밖으로 걸어 나왔다. “영감님, 베나토는 잠들었어요.”
“거봐, 비올라는 알 거라고 했지?”
“신의 뜻을 그대로 직역해 버리다니.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신의 선택을 받은 아이겠지. 그러니 열세 살에 불과한 나이로 겨울성의 차기 후계자로 떠오르고 있는 거고.”
엘바토의 오른손에는 월계관이 들려 있었다. 하모나가 원래 가지고 있던, 기적의 권능이 담긴 왕관이었다.
“아무래도 실마리가 풀려가는 것 같아.”
베나토의 숨결에서 새어 나온 마나가 왕관과 반응하고 있었다. “우리, 정말 이래도 되는 걸까요?”
“뭐가?”
“신관을 양성한다는 거. 뭔가 불경하잖아요. 심지어 마법사와 신관의 조합이라니.”
“신의 뜻을 거역하는 꼬맹이도 있는 마당에 뭘 그리 대수라고.”
엘바토가 킥킥대고 웃었다. “천벌을 받아도 그 꼬맹이가 먼저 다 받아줄 거야. 우리 차례는 오지도 않을걸?”
“꼬맹이라 함은 비올라 영애를 뜻하는 거죠?”
엘시나는 눈을 흘겼다. 신관이 천벌을 운운하며 비올라를 언급하니 좋게만 보이지는 않았다.
“왜 그리 봐?”
“말이 좀 심한 거 아녜요?”
“심하긴 개뿔.”
엘바토가 한숨을 내쉬고 속마음을 드러냈다. “그 천벌을 내린 신이 무사할까 걱정이다, 나는.”
“신관이 그런 말 해도 돼요?”
“그러니까 말이다. 그런 말을 하게 만드네, 그 철혈 공녀가.”
엘시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해?”
“철혈 공녀라는 말은 비올라 영애를 온전히 표현해 주지 못하는 것 같아요.”
언뜻 보면 조화롭지 않은 마법사와 신관의 조합. 이것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비올라였다.
“비올라 영애가 아니었다면 저와 마탑 사람들은 겨울성에 자리 잡지 못했겠죠. 제게 이토록 사랑스러운 아들이 생기지도 않았을 거예요. 엘바토 영감님도 이 자리에 없었겠죠.”
“그건 그렇지?”
“단순히 철혈 공녀여서 엘바토 영감님이 여기로 온 거예요? 아니죠?”
엘시나는 큰 깨달음을 얻은 듯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비올라 영애에게 철혈 공녀라는 이명은 어울리지 않아요.”
“그럼?”
“철혈 성녀.”
“철혈이랑 성녀라니. 조합이 영 이상한데?”
영 이상한 것들이 겨울성에서 조화를 이루고 있다. 마탑과 신전.
마나와 신성력.
분노와 용서.
그 모든 것을 조화롭게 만드는 근본은 비올라였다. “그렇지만 그보다 비올라를 잘 표현해 주는 말은 없겠군. 마탑 출신 사람들에게 말하면 소문은 금세 페질 거예요.”
“응? 굳이 소문을 내려고?”
“그래야지요.”
엘시나는 비올라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 “그분이 진정한 후계자로 거듭나는데 도움이 될 이명과 서사잖아요.”
***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비올라가 눈을 떴다. ‘음?’
평소와는 달랐다. 늘 제논이 이불을 걷어주며 아침을 알려주었는데, 오늘은 제논이 아니었다.
“툰드라?”
“잠이 좀 깨셨어요?”
“언제부터 있던 거야?”
“새벽부터요.”
“새벽부터?”
툰드라는 척 봐도 불편한 자세로 서 있었다. 보아하니 새벽 내내 저러고 서 있었던 모양이다.
“왜 무식하게 그러고 기다렸어?”
“설레서요.”
“뭐가?”
“아침을 공녀님과 맞이할 수 있다는 사실이요.”
그 말에 틀림은 없었다. “그건 그렇네. 평화로운 아침도 며칠 안 남았겠어.”
비올라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툰드라가 한 손을 뻗어 비올라를 에스코트해 주었다.
비올라의 발이 땅에 닿았다.
“저는 공녀님과 함께할 수 있으면 어디든 괜찮아요.”
“그것도 반반백서의 내용이야?”
반반백서에 따르면, 반려견들은 보호자와 함께라면 그곳이 불 구덩이 속이라도 행복하다고 했다. “그럼요.”
툰드라가 웃었다. “그렇지만 제 꿈이 반려견이 아니었다고 해도, 공녀님과 함께하는 모든 시간은 즐거웠을 것 같아요.”
비올라는 움찔했다. 툰드라의 맹목적인 호의와 호감이 싫지 않았다.
툰드라는 비올라를 에스코트하며 말했다.
“그럼 이제 전쟁을 치르러 가볼까요?”
“전쟁?”
“며칠 안 남은 평화로운 전쟁 속, 살벌하지만 따뜻한 아침 식사잖아요.”
“단어들 조합이 영 이상한데?”
비올라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금방 이해할 수 있었다. 식당에는 누군가가 이미 도착해 있었다.
“…아버지? 저랑 조찬 약속 안잡으셨잖아요?”
“앉거라.”
“요즘 바쁘시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딸과 매일 아침 식사를 하는 것이 나의 오랜 소망이었다.”
…예? 언제부터요?
“싫으냐?”
“아뇨. 싫진 않죠.”
오히려 아주 좋았다. 흠흠, 잘생겼어. 역시 내 최애.
“비올라.”
헤론은 귀족다운 모양새로 기품있게 나이프를 들어 올렸다. “식사 후에 잠시 시간 괜찮겠느냐?
꼭 함께 가주었으면 하는 곳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