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몸이 비에 젖은 강아지처럼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176화
툰드라는 비올라의 말을 전부 들었다.
그 말들을 듣자마자 툰드라의 가슴이 폭발할 것처럼 뛰기 시작했다. 그가 입을 열었다. “혹시….”
말을 하려는데 앞에 무엇인가 거슬리는 것이 있었다.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못 보던 생명체였다.
비올라의 모습을 가리고 있어서 슥밀어냈다.
그 생명체는 하릴없이 밀려났다. “저를 염두에 두고 말씀하신 건가요?”
비올라가 말했던 모든 것이 툰드라 자신을 지목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기뻤다. “……….”
비올라는 잠시 침묵했다. 어떻게 하면 사이코패스를 떼어 낼수 있을까를 고민하며 말을 했던 건데, 생각해 보니 툰드라를 콕 집어 말한 것처럼 되어버렸다.
‘이제 와서 아니라고 말하는 것도 웃기지?’
하. 모르겠다.
될 대로 돼라.
“그래.”
“공녀님의 취향이라서 기쁘네요.”
툰드라가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웃었다. ‘아니, 저게 저렇게 기쁠 일이냐고?’
비올라는 이 세계가 어딘지 모르게 약간 잘못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자 제논이 물었다. “황제 폐하께 명인의 자격을 부여 받을 정도의 딸기 에이드를 탈 줄 아는 집사는 혹시 취향이 아니십니까?”
셰일란과 메데이아도 거들었다. “동대륙 출신의 용감한 암살자는 어때요, 제자님?”
“벨라투의 후계자에 가장 가까운 자이며 별을 하사받은 기사는 어떠니?”
헤라가 종지부를 찍었다. “부자는 어때?”
비올라는 격하게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벨라투의 그림자) 세계 속에 빙의한 자본주의의 영혼은 돈 앞에 무릎 꿇을 뻔했으나, 다행히 그런 참사는 벌어지지 않았다.
비올라는 저들의 허튼소리에 딱히 대답하지 않았다.
저들은 마치 어린아이에게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하고 묻는 것과 비슷한 심리일 것이 분명하니까.
“어쨌든 확실한 건 키라엘 공자는 내 취향이 아니에요. 저는 제 뜻을 밝혔으니 돌아가 주셨으면 하……
키라엘 공자?”
한편, 키라엘은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 충격파를 일으킨 사람은 다름아닌 툰드라였다. ‘나를 밀어냈어?’
벌레를 쫓아내듯 하찮은 움직임이었다. 키라엘은 그 손길을 피하려고 했다.
감히 내 몸에 손을 대?
사실 반격까지 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저자의 손이 몸에 닿은 순간, 몸이 굳어버렸다.
툰드라가 딱히 마나를 일으킨 것도 아닌데, 자신의 마나가 저 마나에 굴복해 버렸다.
어머니를 상대로 대련할 때에도 이런 적은 없었다.
툰드라의 뒷모습이 보였다.
어깨가 굉장히 넓었고 이제는 커다란 존재감이 느껴졌다.
거대한 바위가 눈앞에 있는 것 같았다.
“비올라 공녀,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싶은데 어때요?”
*** 비올라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지그시 누르며 침대에 누웠다.
‘하아.’
어딘지 모르게 잘못된 것이 틀림없었다. 키라엘의 제안은 황당했다.
‘저자와 대련을 해보고 싶어요. 이왕이면 진검이면 좋겠네요. 내가 지면 깔끔하게 패배를 인정하고 혼인 서약서를 찢어버릴게요. 키라엘은 툰드라와의 대련을 원했다.
‘ ‘대신 내가 이기면 비올라 영애는 나와 혼인하는 거예요. 어때요?’
비올라는 잠시 고민했다. 키라엘의 설정이 모두 다 기억나지는 않지만, 지금의 툰드라라면 키라 엘에게 질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차라리 이렇게 마침표를 찍는 것이 확실할 것 같다는 판단이 섰다.
그래서 툰드라의 생각을 물었더니, ‘당신이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이라는 말로 수락했다. 그리하여 대련이 성립되었다.
‘말이 대련이지, 결투나 다름없잖아.’
안 그래도 열풍 일을 처리해야 한다. 안 그래도 바쁜데, 참 사사로운(?)
일이 많이 벌어지는 것 같았다.
어쨌든 오늘의 해는 또 밝아왔다. 대련 시각은 정오.
둘의 결투는 이례적인 관심을 끌어 모았다.
그 자리에 있었던 메데이아 언니랑 헤라 언니는 그렇다 쳐도. 한창 남문 수비에 바쁜 용병왕 카이저는 여기 왜 왔단 말인가.
‘공사가 다망하신 우리 아버지께서도.’
예전에는 한 번 마주치기도 어려웠던 헤론 공작도 이 자리에 있었다. 6마탑의 낙오자였던, 대마법사로서의 자질이 출중한 엘시나도 함께였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비첸은 맹독을 바른 단검을 들어 올린 채 헤실 헤실 웃고 있었다.
‘헤라 언니가 왔으니 에르사가 함께하는 것도 당연한 일인가…….’
헤라의 집사인 에르사. 다른 말로 검귀도 구경을 왔다.
“야, 툰드라. 지면 죽일 거야.”
툰드라는 살벌한 스승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질 수 없습니다.”
그의 눈이 키라엘의 오른손에 들린 ‘혼인 서약서’에 닿았다. 눈빛만으로도 저 서약서를 찢어발길 것만 같았다.
마부로 직업을 바꾼 셰일란은 아름드리나무의 가지 위에서 나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걱정 마요, 힉슨, 나는 내 제자님을 시집보낼 여유가 아직 없으니.”
그의 살기 어린 눈동자가 키라엘을 향했다. 툰드라가 질 리는 없겠지만 혹시라도 진다면 자신이 나설 생각이었다.
“혼인할 상대가 없어지면 혼인도 못 하는 거잖아?”
셰일란이 씨익 웃었다. 그와 동시에 대련의 중재를 맡게 된 제논이 대련 시작을 알렸다.
키라엘과 툰드라의 몸이 사라지는가 싶더니 어느새 맞붙었다.
후웅~!
커다란 충격파와 함께 강풍이 불어닥쳤다.
키라엘이 황급히 자신의 몸을 뒤로 뺐다.
“쿨럭.”
단 한 번의 격돌이었으나 키라엘은 패배를 직감했다. 그의 입가에 한줄기 선혈이 흘러내렸다. “나의 주인의 반려가 되려면.”
툰드라가 검을 크게 휘둘렀다. 그의 검에는 마나가 덧씌워져 있었다. 키라엘의 눈으로 보기에는 커다란 검 하나가 돌진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것은 마치 하나의 화살이었다.
쏘아진 화살이 그의 목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나부터 넘어서라.”
쾅! 거대한 폭발음이 터져 나왔다.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이내 주변에 한기가 밀려들었다. 제논이 툰드라와 키라엘 사이에 끼어들었다.
쩌저적 –
툰드라의 검이 얼어붙기 시작했다.
툰드라와 제논.
키라엘이 서 있는 땅도 함께 얼어붙었다.
셋의 입에서 입김이 새어 나왔다.
툰드라가 얼어붙은 검을 회수했다.
“아쉽군.”
“그래도 겨울성에서 살인은 안 되니까요.”
제논도 빙그레 웃으며 검을 회수했다. 그의 검에도 얼음 결정이 맺혀 있었는데, 이내 바스스- 가루가 되어 부서져 내렸다. 키라엘은 다시 한번 쿨럭! 피를 토해내고서는 그 자리에 쓰러졌다.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상대인 툰드라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완패였다. 한때 기적의 신관이라 불렸던 엘바토가 다가와 그를 치료해 주었다.
비올라조차도 놀라운 결과였다.
‘툰드라가 강해졌다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사실 이 자리의 모두가 툰드라의 실력에 놀랐다. 다만 헤론만큼은 크게 놀라지 않았다. 툰드라의 실력 자체는 놀라웠으나, 그에게 있어서 이건 당연한 일이었다.
‘내 딸의 반려검이라면 저 정도는 되어야지.’
저 정도도 안 되면서 반려검을 운운했다면 진작에 목을 쳤을 것이다. 다행히 툰드라는 반려검에 부끄럽지 않은 무위를 선보였다.
‘그래도 마음이 놓이는구나.’
그 와중에도 툰드라를 한 번 노려보았다. 그러나 반려검 이상을 탐하려면.’ 툰드라가 말했다. 반려가 되려면 나부터 넘으라고.
그래서 헤론도 생각했다. ‘너도 나를 넘어야 할 것이다.
한편, 비올라가 키라엘 앞에 다가갔다. 충격에 빠진 키라엘에게서 혼인 서 약서를 빼앗았다.
키라엘이 말했다.
“찢지 말아줘요.”
“약속은 약속인데요.”
“알고 있어요. 나는 비올라 영애에게 다시는 혼담을 꺼내지 않을 거예요.”
아. 다행이다. 비올라의 마음이 편- 안 해졌다.
“그런데 왜?”
“섹시하잖아요.”
“네?”
“영애의 반려검.”
비올라는 머리를 한 대 세게 얻어맞은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툰드라요?”
“나는 나보다 강한 사내를 만난 적이 없어요. 적어도 내 나이 또래에서는.”
……그런데요?” “저는 저를 압도할 수 있는 사람이 좋아요.”
키라엘의 눈빛이 말하고 있었다. 그게 남자든 여자든.
누구든 나를 압도하면 좋겠어요.
“그러니 나는 당신의 반려검을 탐하고 싶은데요.”
비올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키라엘 공자의 마음 자체를 막을 길은 없으나.”
비올라의 눈이 툰드라를 향했다. 툰드라가 비올라에게 맹목적인 신뢰를 보내듯, 그건 비올라도 마찬가지였다.
“아마 힘들 거예요.”
“왜요?”
그 대답은 툰드라가 대신했다. 아공간에서 책 하나를 꺼내 키라엘에게 던져주었다.
“해답은 거기에 있다. 2페이지 세번째 줄.”
키라엘은 인상을 찡그렸다. ‘반려인이라면 꼭 알아야 할 반려 견 심리백서?’
이른바 ‘반반백서’였다. 키라엘은 책을 펼쳐보았다.
‘2페이지 세 번째 줄.
[반려견의 세상은 오로지 보호자로 가득 차 있답니다. 다른 사소한 것들이 끼어들 틈이 없어요. 혹시 있다면 간식 정도죠.]
“넌 간식보다 못해.”
키라엘은 단칼에 차였다.
* * *
대련을 빙자한 결투는 완전히 끝이 났다.
헤론이 결론을 내렸다.
“다시는 혼인에 대하여 왈가왈부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만약, 다시 한번 혼담을 꺼낸다면 네 결투를 지켜본 이곳의 모두를 모욕하는 행위가 될 테니.”
헤론은 힐끗 나무 위쪽을 쳐다보았다. 누군가에게 들으라는 듯 얘기했다.
“그토록 불명예스러운 일이 벌어진다면 나는 겨울성 군주로서, 겨울성내에서의 참형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셰일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작게 대답했다. “불명예는 나쁘죠. 죽일게요. 제가.”
한편, 대련이 끝난 뒤 엘바토 영감이 비올라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비올라, 잠깐만 시간을 좀 내줄 수 있겠니?”
카레나에서 만났을 때와는 인상과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그의 말투는 한결 부드러워졌다. “급한 일인가요?”
저는 좀 쉬고 싶은데. 그 마음은 숨겼다. 비올라는 이들 앞에서 철혈의 공녀여야만 했으니까.
엘바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급한 일이야.”
미리 말이 되어 있던 건지 엘바토옆에 엘시나가 섰다. 엘시나가 말했다.
“공녀님께 꼭 말씀드려야 할 일이 있어서요.”
비올라가 고개를 갸웃했다. “기적의 신관, 그리고 전직 6마탑의 천재. 둘의 조합이 영 이상한데요?”
신관과 마법사는 서로를 경시하는 존재들이다. 둘의 조합은 어울리지 않았다.
엘바토가 말을 이었다.
“영 이상한 조합이니, 영 이상한 얘기를 좀 해볼까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