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197화
비올라는 오랜 시간 꿈을 꾸었다.
신기하게도 비올라는 그것이 꿈임을 알고 있었다.
꿈속에서 그녀는 누군가의 손을 잡고 있었다.
‘손이 따뜻해.’
꿈속의 그녀는 손을 잡고 있는 사람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분명 얼굴이 보이는데 누군지는 알지 못했다.
그렇지만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툰드라.’
아니. ‘한준 오빠 같은 느낌인데..
한아린이었던 그 시절.
강한준과 손을 잡았던 기억이라고는, 아주 어린 시절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올라는 이 손이 강한준의 손이라는 사실을 느낄수 있었다.
“어디 가는 거야?”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꿈속의 비올라는 걷고 또 걸었다.
어딘가를 향해서.
“오빠?”
그런데 어느 순간 느껴졌다. 손의 주인이 어디론가로 멀어지고 있었다.
아직까지는 손을 잡고 있는데, 이상하게 멀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어디 가는 건데?”
어느 순간. 손이 사라졌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비올라는 느낄 수 있었다.
어둠 속에 가려진 저 얼굴에는 미소가 피어올라 있었다.
마치 행복하라고 말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비올라는 혼자가 되었다. ‘어디론가 가야 해.’
그곳이 어디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두운 공간.
그녀는 완벽히 혼자였다.
그래도 어디론가로 걷기는 해야 했다. 걷지 않으면 잊힐 것만 같은 극심한 공포가 느껴졌다.
‘움직이지 않으면 사라질 거야.’
사라지고 싶지 않았다. 이곳에서 새로운 가족들과 만났고 소중한 사람들과 인연을 맺었다.
그 인연들은 하나하나가 귀했다. 그들에게 잊혀진다고 생각하면 너무나 끔찍했다. “나는… 어디로 가야 해?”
세상 사람들은 철혈 성녀라고 떠받들지만 사실 비올라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비올라는 스스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무서워.”
무섭고 두려웠다. 눈물이 흘러나왔다.
누가 되었든, 누군가 나타나서 손을 잡아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누구라도 함께 걷고 싶었다.
“제발, 나 좀 도와줘.”
그럴 때마다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냥 포기해.”
‘이대로 잠에 빠져들자..
‘그러면 편해질 거야.’
그러한 목소리에 몸을 맡기고 싶을 때도 있었다. 그때마다 그녀를 일으켜 세웠던건, 비올라를 위하여 ‘옛 무인들의 성지’까지 찾아온 수많은 사람이었다.
그들은 기적을 일으켜 주었다. 그중에는 뛰어난 영웅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도 있었다.
‘지면 안 돼.”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게 걷고 또 걷던 어느 무렵. 정신을 차려보니 또 누군가가 손을 잡고 있었다.
“툰드라!”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이전과 똑같은 손이었으나 이 손은 강한준의 손이 아니었다.
‘응?”
강…… 한? 뭐였더라.
비올라는 순간 고개를 갸웃했다.
“강한….”
그리 익숙하지 않은 호칭이 떠올랐다. “....…오빠?”
오빠? 내게 오빠가 있었던가.
‘비첸은 아닌데.
비첸의 손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3공자 쿤도는 더더욱 아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비올라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에게 중요한 건 기억나지 않는 ‘강한……‘이 아니라 툰드라의 손이었다.
“약속을 지켰네.”
이제는 그렇게 두렵지 않았다. 출구가 보이지 않았으나 이 손과 함께라면 어디든지 갈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걷고 또 걸었다.
얼마나 걸었는지는 그녀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저 멀리,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 * *
베나토는 늘 궁금해했다.
“유모, 제 어머니는 어떤 분이세요?”
벨라투의 그림자> 속에서는 본래 대마법사 벵가스가 되었을 그 아이는 엘시나의 손에 무럭무럭 컸다. 그는 과연 ‘대마법사’의 자질을 갖춘 아이다웠다. 태어난 지 1년 만에 성인만큼 능숙하게 말을 시작하였고, 세 살이 되던 해에는 4공녀 헤라와 심도 깊은 토론을 나누었으며, 네 살이 되던 해에는 정식으로 마법사가 되었다.
“베나토가 열 살이 되는 해에 가르쳐 줄게.”
베나토는 분명 총명했다. 그러나 엘시나의 눈으로 보면 아직 어린아이였다. 세알 자작 부인의 외도에 대해서 벌써부터 알려주고 싶지는 않았다.
베나토는 더 이상 억지를 부리지는 않았다.
“알았어요.”
베나토는 유모인 엘시나를 믿었다. 이유가 분명 있으리라 생각했다.
“제 후견인이 비올라 성녀님이라는 건 진짜인가요?”
“그럼.”
베나토는 희미하게 웃었다. 지금 대륙에서 가장 위대한 영웅을 꼽으라면 모두가 한 사람을 꼽는다.
바로 철혈 성녀 비올라였다.
“그토록 위대한 분이 제 후견인이 시라니.”
베나토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분은 언제 깨어나실까요?”
“빨리 깨어나기를 바라고 있단다.”
“혹시 제가 그분을 한 번 뵐 수 있을까요?”
“왜?”
“한 번 만나뵙고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어서요.”
비록 의식은 없다지만, 그래도 한번은 찾아뵙고 싶은 것이 베나토의 마음이었다. 이토록 큰 은혜를 입었으니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성의 표현은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글쎄, 헤론 공작께서 허락하실지 모르겠구나.”
현재 비올라는 21중첩 마법 결계가 걸려 있는 ‘야수의 관’ 속 침대에 누워 있다. 본래 7중첩 마법 결계가 있는 곳이었는데, 비올라와 툰드라를 이쪽으로 옮기면서 21중첩 마법 결계를 펼쳤다. 어쨌든 이 야수의 관’에 출입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심지어 황제마저도 이곳에 들어갈 수 없었다.
“유모는 가끔 비올라 성녀님을 뵙고 오시잖아요.”
엘시나는 그곳을 출입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렇긴 하지.”
“그분의 모습을 눈에 담을 수 있도록, 공작님께 말씀 좀 전해주시면 안 될까요?”
“그분은 아주 작은 변수라도 만들고 싶지 않아하셔.”
그간 헤론의 성격은 많이 변했다. 그 누구보다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던 그는 점차 보수적으로 변해갔다. 비올라와 관련된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이 세상의 그 누구보다도 예민하게 반응했다.
“그래도 말씀은 드려볼게.”
*** 그날. 엘시나는 공작의 서재를 찾아 자초지종을 얘기했다.
“그 아이의 마음은 기특하나, 비올라가 누워 있는 곳은 최고 수준의 보안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알지요.”
그곳에 출입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해봐야 대륙을 통틀어 열 명이 채 되지 않았다. 헤론, 메데이아, 비첸, 헤라, 엘시나, 힉슨, 카이저, 제논.
이 정도였다. 참고로 비올라의 스승이자 유령 마부로 이름을 날린 세일란조차도 ‘야수의 관 입장은 허락되지 않았다.
“그러니 불허한다.”
“그렇지만 공작님. 베나토에게 기적의 마나가 깃들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주세요.”
“기적의 마나?”
에바토 영감과 엘시나의 ‘신관 양성 프로젝트’가 성공할 수 있었던건 기적의 마나를 간직한 베나토 덕분이었다. “엘프들의 여왕도 기적의 마나에 대해 언급했잖아요. 어쩌면 베나토가 또다시 기적을 일으킬 수도 있지 않을까요?”
헤론은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대답했다. “나와 동행하는 조건으로 허락하지.”
*** 어둠 속을 정처 없이 걷던 비올라는 ‘빛’을 마주했다.
그 빛에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이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습니다.”
“·맙습니다.”
“고맙습니다.”
빛에 가까워지자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비올라는 이 목소리가 ‘신의 목소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신의 목소리.’
이 목소리가 ‘작가’의 목소리인 건지. 아니면 작가가 이 세계를 창조하면서 남긴 ‘의지’의 목소리인 건지. 정확한 정체는 알 수 없었다.
어쨌든 ‘신의 목소리는 맞았다. 그 목소리는 환상처럼 다가왔다. 꿈속 세계에서, 비올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그저 신기루 같은 그 목소리를 듣기만 했다.
“저는 비올라 벨라투를 불행하게 만들었어요.”
‘신’은 비올라 벨라투를 좋아했다. 최초의 성격을 설정하고, 스토리를 이끌어가면서, ‘비올라 벨라투’는 결국 성공했다.
아버지를 죽이고, 언니를 죽이고, 오빠를 죽이고, 자신을 사랑한 남자를 죽이면서.
결국 정상의 자리에 올랐다.
“결국 그녀는 불행했어요. 저는 그게 너무 슬펐어요.”
비올라는 계속 걸었다. 빛을 향해.
“잘못을 바로잡고 싶었어요. 하지만 제게 그런 힘은 없었어요. 잘못을 깨달았을 때는 너무 늦었어요.”
작품의 최종장에 이르러, 갑자기 비올라를 행복하게 만들 수는 없었다. 그녀의 곁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다 죽었다. 그녀는 고독한 절대자가 되었다.
“저는 비올라가 행복하길 바라요.”
빛이 점점 밝아졌다. “비올라는 행복할 권리가 있는 사람이니까요.”
탁! 비올라는 무엇인가와 부딪쳐 걸음을 멈추었다.
손을 뻗어 만져보니 ‘벽’이 존재했다.
나갈 수…… 없는 거야?’
이 세계의 끝. 빛은 존재하나 빠져나갈 수 없는 외로운 곳.
의지할 수 있는 거라곤, 여전히 꽉 붙잡아주고 있는 손 하나.
‘나가고 싶어.”
많은 사람이 기다리고 있을 거다. 그들을 만나러 가야 했다. ‘어떻게 하면, 나갈 수 있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벨라투의 그림자> 속에 이런 설정이나 얘기는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걱정 말아요. 그대가 뿌린 기적의 씨앗이 이곳에 뿌리를 내릴 테니.”
그 시각. 베나토가 비올라를 향해 공손히 절을 올렸다.
그리고 헤론에게 물었다. “공작님, 제 후견인께 가까이 다가가도 괜찮을까요?”
“이유는?”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신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요.”
“신의 목소리?”
“네, 비올라 성녀님 앞에 서야 할것 같아요.”
헤론은 ‘진안’으로 베나토의 진심을 읽어보았다. 베나토에게 나쁜 마음은 없었다.
베나토는 비올라 앞에 섰다.
비올라의 얼굴은 창백했다.
“제가, 감히, 이 손을 잡아도 될까요?”
베나토는 경건한 자세로 조심스레 물었다. 베나토의 눈에는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천재적인 육감과 재능.
마나의 축복을 타고난 베나토는 이 자리에 서자 알 수 있었다.
“제가 가진 마나의 축복은 이분을 위한 것이었어요.”
이 앞에 서자 눈물이 흐르며 깨달을 수 있었다. 마치 그 자신이, 오늘을 위해 준비된 자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제 확실히 알 것 같아요. 제 몸안에 깃든 기적의 마나. 이 마나는 신의 뜻을 거스르고 생겨난 돌연변이였어요.”
베나토는 자신의 출생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그렇지만 마나가 가르쳐 주고 있었다. “원래는 이 세계의 존재할 수 없는힘. 그래서 기적이라 불리는 힘.”
이 기적을 낳아준 사람이 바로 철혈 성녀 비올라였다. 비올라를 보자마자 그 사실을 정확히 느낄 수 있었다.
그는 확신했다. “저는 비올라 성녀님을 일으킬 수 있어요.”
지금이 적기였다. 여태까지는 너무 어렸고, 시간이 더 지나면 ‘기적의 마나가 옅어진다.
“어쩌면 후견인을 뵙고 싶어진 것도, 지금이 ‘때’이기 때문일지도 몰라요.”
헤론에게 말했다. “제가 비올라 성녀님을 깨울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