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198화 베나토는 비올라 앞에서 깨달을 수 있었다.
‘내가 가진 마나를 모조리 사용하면…… 이 둘을 깨울 수 있어.”
똑같은 자세. 똑같은 호흡으로 누워 있는 저 두 사람.
한 명은 후견인인 비올라고, 한 명은 후견인의 반려검인 툰드라.
‘비올라 성녀님만 깨울 수도 있을 것 같아.’
그러면 마나를 모조리 사용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그러나.’
그건 바라지 않았다. 엘시나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베나토, 무엇인가를 눈치챈 모양이구나?”
“네.”
베나토는 스스로 깨달은 것을 모두 말해주었다. 헤론의 몸이 바르르 떨렸다.
비올라와 관련된 일에 있어서만큼은 냉정을 유지하지 못했다.
엘시나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베나토, 깊이 생각하고 또 생각하렴.”
베나토는 전도유망한 마법사다. 마탑에서 나고 자란 엘시나조차도 베나토 같은 재능을 가진 마법사는 본 적이 없었다.
어쩌면 오늘 하루의 선택으로 인하여, 세상은 미래의 대마법사를 영영잃어버리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생각 많이 했어요.”
베나토의 시선이 비올라에게 향했다. “기적의 마나는 본래 제 것이 아니었어요.”
“.......”
“누군가 잠시 제게 맡겨두었던 거라고 생각해요.”
헤론은 베나토를 잠시 바라보았다. 혹여 베나토가 ‘저는 못하겠어요, 안 할래요’라고 말한다면, 헤론은 강제적으로라도 베나토의 마나를 사용하여 비올라를 깨울 작정이었다. 헤론에게는 베나토보다 비올라가 훨씬 소중했으니까.
그렇지만 일단은 두고 보았다. 진안을 통해 느껴지는 베나토의 마음이 숭고했으므로,
“그래서 저는 잠시 맡아두었던 기적을 반납하려 해요.”
“앞으로 영영 마법을 익히지 못할 수도 있어.”
엘시나는 베나토를 직접 가르쳤다. 베나토가 얼마나 마법을 좋아하는지도 잘 안다.
마법사에게서 마나를 뺏는다는 건, 평범한 사람에게서 심장을 빼앗는 것과 똑같은 일이었다.
“알아요. 하지만 저는.”
5살이 된 베나토는 5살답지 않았다. “세상에 족적을 남길 마법사가 되는 것보다, 사람을 살리는 베나토가 되는 것이 훨씬 가치 있다고 생각해요.”
엘시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그녀는 베나토의 생각을 존중했다.
“아무나 할 수 없는 결정이구나.”
베나토의 손을 잡아주었다. 베나토의 손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담담히 말하고 있으나, 베나토 스스로도 두려운 모양이었다.
손에 힘을 꽉 주었다.
‘누가 이 아이를 어린아이라 할 수 있을까?’
이윽고 베나토의 떨림이 잦아들었다. 베나토가 빙그레 웃었다.
“고마워요, 유모.”
그러고서 비올라와 툰드라의 손을 마주 잡게 했다. 이내 그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화려한 마법 영창이나 술식을 구사하지 않았다.
‘기적이 일어나기를.’
그저 누군가 빌려준 힘으로, 누군가를 살리기를 기원했다.
베나토의 몸에서 황금색 마나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 빛이 비올라와 툰드라의 몸 전체에 골고루 스며들었다. 털썩.
베나토의 몸이 쓰러졌고, 헤론이 유령처럼 움직여 그 몸을 받아 안아주었다.
헤론은 확신했다.
오늘, 기적이 일어났다고, **
비올라는 오랜 꿈에서 깨어났다.
깨어나고 보니 누군가의 손을 잡고 있었다.
“강한….”
머리가 아파왔다. ‘강한준’이라는 이름이 머릿속에서 자꾸 맴돌았으나, 이내 그 글자가 사라져 버렸다. “툰드라.”
그녀는 툰드라의 손을 잡고 있었다. “툰드라?”
비올라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아니. 일으키려고 했다.
‘몸이 안 움직여!’
5년간 혼수상태에 놓여 있다 보니,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비올라보다 먼저 정신을 차린 툰드라가 옆에 앉아 있었다.
툰드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눈물만 주룩주룩 흘리고 있었다.
“네가 가장 먼저 담은 이름이, 내가 아니라 툰드라구나.”
헤론은 진심으로 섭섭했다. 그러나 그 섭섭함보다는 지금의 기적이 더욱 행복했다. “깨어났구나.”
그제야 비올라가 시선을 옮겼다.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안 보여요.”
어둠이었다. 비올라의 눈에 보인 건 툰드라가 유일했다.
헤론이 비올라의 몸을 살짝 일으켜주었다.
5년간 침대에 누워 있었다지만, 그래도 비올라의 육체는 타고난 살성의 육체.
정신만 차리면 금세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체온이 느껴져요.”
헤론의 체온이 느껴졌다. 거친 숨소리도.
거센 심장박동도.
“또 울어요?”
딸을 되찾은 아버지의 흐느끼는 울음소리도, 조금씩, 조금씩, 세계가 들리기 시작했다. 점차 어둠이 옅어졌다.
엘시나가 마법을 운용하여 헤론의 품에 안겨 기절한 베나토를 허공에 둥둥 띄웠다.
그와 동시에 헤론이 비올라를 와락끌어안았다.
“보고 싶었다.”
엘시나는 베나토를 안아 든 채 몸을 뒤로 돌렸다. 툰드라도 마찬가지였다.
이것은 울고 있는 겨울성의 주인을 향한 배려였다.
야수의 관.
수십 겹의 마법 중첩진이 걸린 이 은밀한 곳에, 한 사람의 울음소리가 가득 찼다.
“왜, 이렇게 늦게 왔느냐?”
비올라는 조금 혼란스러웠다. 자신이 얼마나 혼수상태에 있었는지.
어떻게 깨어나게 된 것인지.
바하카룬은 완전히 소멸된 것인지.
그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 그렇지만 지금 가장 중요한 건 하나였다. “아빠.”
이 사람이, 진심으로 울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누구보다 강인하고 냉정했던 사람의 어깨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아무튼, 울보라니까.’
비올라는 가만히 팔을 들어 올려 헤론을 안아주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뒤돌아 있던 툰드라가 말했다.
“공작님, 저도 이제 인사를 하면 안 될까요?”
툰드라도 마음이 간질간질했다. 비올라 옆에 있고 싶었다.
비올라의 안위를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비올라와 얘기하고 싶었다.
자신이 이 정도 예의를 갖추었으면, 헤론도 이쯤에서 양보해 줄 것이라 생각했다.
“불허한다.”
“.…예?”
툰드라는 난데없는 살기에 찔끔 놀랐다. 바하카룬에게서도 느껴보지 못한 종류의 따끔따끔한 살기였다.
‘무슨……?’
가만히 눈동자를 돌려 헤론 쪽을 쳐다보니, ‘공작님?’
헤론은 비올라를 안아 든 상태였다. 마치 소중한 보물을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겠다는 듯한 모양새였다.
“너의 공로는 인정하는 바이나, 비올라의 옆을 허락하지는 않을 것이다.”
“.......”
툰드라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천살 공작 헤론의 모습이 낯설었다.
“비올라 공녀님 옆은 제 자리입니다.”
“그 자리는 내가 갖기로 하였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5년이 지났다. 그간 겨울성의 법이 바뀌었다.”
“법이 바뀌었다고요?”
엘시나도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도 겨울성에서 5년을 넘게 살아왔지만 법이 바뀌었다는 말은 금시초문이었다.
“아버지는 무조건 딸의 옆에 있어주는 것이 법이다.”
엘시나는 저도 모르게 허- 하고 입을 벌리고 말았다.
저런 법은 듣도 보도 못했다.
“딸의 옆을 지켜주지 않는 아버지는 사형으로 다스릴 것이다.
엘시나는 황급히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이곳은 수십 겹 마법 결계가 펼쳐진 ‘야수의 관’이었고 저 허황된 명령을 엿들은 사람은 없었다.
……라고 생각했으나 한 명 더 있었다.
오늘도 몰래 야수의 관에 침입한 전직 살수 셰일란이었다.
‘비올라가 깨어났다!’ 생검의 경지에 오른 셰일란은, 비올라가 잠든 이후로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수련에 수련을 거듭했다.
비단 셰일란뿐만 아니라, 비올라를 잃은 수많은 사람이 그러했으나, 어쨌든 셰일란은 ‘암살자로서의 능력’을 갈고닦았다.
내가 좀 더 강했더라면.
내가 겁이 좀 더 없었더라면. 그랬다면 나의 제자님을 지킬 수 있었을까.
결국 이전보다 훨씬 뛰어난 실력의 암살자가 된 셰일란은 야수의 관을 뚫고 들어올 수 있으면서 헤론과 엘시나의 기감에도 걸리지 않는 유일무이한 암살자가 되었다.
‘아차!’
너무 흥분했다. 그래서 은신을 풀릴 뻔했으나 다행히 들키지는 않았다. 이쪽도 흥분했지만 헤론과 엘시나도 만만치 않게 흥분한 덕분이었다.
상식적으로는 황당한 말이 들려왔다.
“아버지는 무조건 딸의 옆에 있어주는 것이 법이다.”
그러나 셰일란은 전혀 황당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지당한 법이군.
아무래도 지 법령을 널리 선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저것은 겨울성의 지극히 높은 법도가 될 것이다!”
지금 당장에라도 내려가 비올라를 꽉 안아주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지만 일단은 참았다. 겨울 군주의 지엄한 명령을 세상에 전파하기로 했다.
* * *
비올라는 이 육체의 경이로운 능력에 다시 한번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5년을 누워 있다 일어났는데도 몸이 가뿐하고 상쾌했다.
‘역시 여주의 육체야.’
뭐지? 머리가 아파왔다.
‘소설이 맞기는 한데.
이 소설 여주가 어떤 여주였더라. 내가 어떻게 했더라.
내가 뭔가를 흉내 내고 따라 했던 것 같은데.
‘내용은 기억나는데…… 주인공이 기억이 안 나.
뭔가 중요한 걸 잊어버린 것 같았다.
‘옛 무인들의 성지’에 중요한 걸 놓고 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자꾸만 머릿속을 맴도는 ‘강한도 큰 공허함으로 다가왔다.
‘그렇지만….’
지금은 잃어버린 상실감보다 더 중요한 것들이 있었다. 너무나 많은 일이 쌓여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급한 일부터 처리 하기로 했다.
제논과 함께 엘바토가 묻힌 묘지를 찾았다.
“엘바토 영감님.”
그 꼬장꼬장하던 표정과 얼굴로. 기어이 ‘옛 무인들의 성지’까지 찾아와 기적을 일으켜 주었다.
“고맙습니다. 잊지 않을게요.”
비올라는 엘바토를 향해 경의를 표시했다. 그것이 비올라가 깨어난 이후 처음으로 갖게 된 ‘공식 행사’였다. 그리고 그것이 곧 비올라가 돌아왔음을 전 대륙에 증명해 주었다. 모든 소식지가 한 가지 소식에 집중했다.
<철혈 성녀, 깨어나다!〉되돌아온 기적의 성녀.>
제국 전체가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다.
겨울성의 지엄하고도 황당한 제1법령인 ‘아버지는 무조건 딸의 옆에 있어주는 것이 법이다’는, 다행히(?) 비올라의 귀환 소식에 묻혔다.
제국은 제국 차원에서 큰 파티를 열어 비올라의 귀환을 축하했고, 오늘을 국경일로 삼을 것을 공표했다.
한편, 엘바토의 묘소를 빠져나온 제논이 말했다. “공녀님, 돌아오셔서 기쁩니다.”
“그 말. 많이 한 것 같은데.”
제논이 빙그레 웃었다. “겨우 721번밖에 안 했답니다.
앞으로도 매일 할 것이다.
그래서 비올라의 귀환을 매일매일 기념할 것이다. ‘저는 당신의 집사니까요.’ 다시는 주인을 잃지 않을 것이다.
주인이 없는 집사는 죽은 집사였고, 제논은 다시는 죽고 싶지 않았다.
비올라가 누워 있는 동안 제논은 확실히 깨달았다.
‘당신이 나의 이유입니다.
하얀 장갑을 낀 오른손을 내밀었다.
비올라가 그 위에 손을 얹었다.
제논은 비올라를 에스코트한 뒤, 마차의 문을 열어주었다.
그리고 그때. 황당한 사건 두 개가 동시에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