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제발 좀 만나지 말자
“아아, 끝났다. 끝났다!”거추장스러운 옷을 갈아입고 비로소 편안해진 희원은 가족들의 배웅을 받으며 지환의 차에 탑승했다.
아아아! 와아아아아!
단전에서부터 끓어오르는 환희는 곧장 함성으로 이어졌다.
희원은 두 팔을 쭉 뻗고 아이처럼 소리를 질렀다.
운전석에 앉은 지환은 희원을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그렇게 좋습니까?”“서지환 씨는 안 좋아요? 난 지금 날아갈 것 같은데?”우와아아아아! 자유다! 자유다아아아아!
당장 오늘부터 집에 들어가지 않아도 된다.
당장 오늘부터 아홉 시 통금은 권희원의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도 안 된다는 얼굴로 희원은 시종일관 기쁨을 표했다.
“진짜 믿기지 않아요. 나 지금 자유를 얻은 거, 맞죠?”“네. 맞는 것 같네요.”“우와아아아!”예식 내내 집 떠날 생각에 눈물짓던 그녀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다.
그 웃음소리를 듣고 있자니 전염된 듯 지환도 웃음을 터트렸다.
“결혼 축하해요.”“네. 서지환 씨도 축하해요. 이제 선 자리에서 해방됐네요.”“권희원 씨는 진정한 자유를 획득했죠. 프리덤.”“……우와아아아아아!”발까지 동동 구르며 꺄륵꺄륵 웃는다.
유일무이하게 바라던 소원이 이루어졌으니 현재 그녀의 기분이란 설명이 필요 없으리라.
“어른들껜 평화를 선물하고 나는 자유를 얻고. 이 결혼 너무 괜찮은데요?”누군가에겐 아무것도 아닌 일이.
누군가에겐 이토록 어려운 일인 것이다.
“권희원 씨는 제일 먼저 뭘 하고 싶습니까?”전방을 주시하며 지환은 물었다.
“글쎄요. 생각은 진짜 많이 해봤는데 모르겠어요. 뭐부터 해야 하는지 감이 안 와요.”“이젠 낮술 끊어도 되겠네요.”“낮술을 끊기보단 낮부터 밤까지 이어 마셔야겠죠?”“이 여자 생각보다 위험하네. 내내 술 마시려고 결혼한 겁니까?”“농담이에요, 농담. 아무렴 내가 술 마시려고 결혼했을까?”“권희원 씨라면 가능한 것도 같은데요?”“……맞아요. 저라면 가능할지도 모르죠.”두 사람은 합의하에 신혼여행은 가지 않기로 했다.
낯선 곳에 둘만 남기엔, 생각에 이런저런 무리가 따랐다.
그런 곳까지 가서 따로 있는 게 웃기기도 하고.
그녀 공연 일정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이유와 그의 바쁜 업무를 핑계로 두었다.
딱딱 맞아떨어지는 이유 앞에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다만 오늘 하루는 서울 모처의 호텔에서 하루를 지내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이 호텔은 터에 뭐가 있나 봐요. 주로 이 호텔에서 우리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 같은데.”“그러게요. 서지환 씨와 저는 이 호텔하고 인연이 깊은 것 같아요.”어느덧 도착한 호텔은 두 사람이 맞선을 보았던 장소.
그녀가 친구의 예식에서 부케를 받았던 장소이다.
희원은 감회가 새롭다는 듯 건물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제가 이 호텔 예식장에서 부케를 받을 때만 해도 결혼을 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 했는데 말이에요. 그렇죠?”지환은 대답 대신 씩 웃었다.
부케를 받고 결혼을 하지 못하니, 3년은 재수 없을 예정이라며 웃던 그녀 얼굴이 떠오른다.
“그러고 보니 인연 참 신기하네요. 누가 알았겠습니까, 우리가 결혼을 할 거라고.”인생이란 어느 지점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예상할 수 없다.
“권희원 씨는 혹시 이런 말, 들어봤습니까?”“네? 어떤 말이요?”……문득 어떤 명언이 떠오른다.
지환은 중얼거리듯 말했다. 차량은 천천히 호텔 정문으로 진입했다.
“안전하다는 것은 대부분 미신이다.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그의 차량이 들어서자 대기하고 있던 호텔 직원들이 그의 차량을 반긴다.
명언을 중얼거리는 지환을 바라보던 희원은 빙그레 웃었다.
그녀도 알고 있는 구절임이 틀림없었다.
“따라서 인생은 대담한 모험이거나.”그가 이어 말하자.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다.”그녀가 매듭을 지었다.
차량이 멈춰 서고, 호텔 직원들이 문을 열어주었다.
두 사람은 잠시 차 안에 머무르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인생은 대담한 모험이거나,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다.
“도착했습니다. 이만 내리시죠. 부인.”“네. 서지환 씨.”우리는, 대담한 모험을 떠난다.
“투숙 확인해드리겠습니다. 예약자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지환과 희원은 나란히 프런트 앞에 섰다.
깔끔한 유니폼 차림의 직원은 시종일관 미소를 띤 채 질문을 했다.
서지환. 이름을 검색한 직원은 잠시 PC화면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결혼 축하드립니다.”“아아, 감사합니다.”지환은 멋쩍게 웃었다. 투숙은 지환의 형이 예약을 해두었는데, 아마도 코멘트를 남겨둔 모양이다.
“두 분 너무 잘 어울리시네요. 저희 호텔은 두 분의 특별한 날을 위해 룸 업그레이드를 해드리겠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업그레이드요? 와.”오오. 희원은 눈을 빛냈다.
직원은 분주하게 마우스를 움직이더니 설명을 덧붙였다.
“업그레이드된 스위트룸은 저희 시그니처 객실입니다. 안내해드리겠습니다.”예약된 방이 스위트룸이긴 한데, 그중에서도 등급을 올려 룸 배정을 해주겠단다.
희원은 예상하지 못한 환대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언제 또 이런 호사를 누려보겠나.
이 호텔의 스위트룸이라면 1박 가격을 알고 싶지도 않을 만큼 비쌀 텐데.
“두 분 룸으로 모시겠습니다.”“저기, 잠시만.”지환은 아직 할 말이 남았다는 듯 직원을 불렀다.
희원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알고 있었기에 가만히 기다렸다.
지환은 안내데스크로 몸을 기울이며 나직하게 말했다.
“객실을 하나 더 추가하고 싶은데요.”“네? 객실 추가를 말씀이십니까?”직원은 다시 몸을 틀며 마우스를 잡았다.
“당일, 그러니까 오늘 말씀이시죠?”“네. 오늘.”“원하시는 객실이 따로 있으십니까?”“아뇨. 디럭스로 부탁합니다.”“조회해보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신혼부부로 들어와서 룸 업그레이드까지 해주었더니, 방을 하나 더 달란다.
직원은 우선 요청사항을 해결하려 비어 있는 객실을 검색했다.
“네. 시티뷰로 객실 배정이 가능합니다. 다만 투숙 예정이신 스위트룸과는 가깝지 않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네. 더 좋네요. 그렇게 해주세요.”“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정작 직원은 별생각이 없는데, 희원과 지환만 민망하다.
결혼 당일부터 각 방 쓰려는 부부가 이상하게 보이지는 않을까, 염려되는 것이다.
“완료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감사합니다. 결혼식 때문에 멀리서 온 친구가 있어서 객실을 추가했네요.”“네? 아, 네. 친구분께서 편안한 여행길이 되셨으면 합니다.”아무 생각도 없던 직원은 지환의 설명에 친절한 대답을 했다.
결국 친구에게 객실을 주려 한다는 엉뚱한 변명을 늘어놓으며 지환은 희원을 바라보았다.
도둑이 제 발 저린 두 사람은 어떻게든 이상한 부부로 보이지 않으려고 갖은 애를 썼다.
오, 그 변명 괜찮은데요?
희원이 눈썹을 꿈틀거리자 지환은 그녀의 등을 가볍게 밀며 앞으로 나아갔다.
직원의 안내를 받아 스위트룸으로 들어섰다.
“와아…… 진짜 좋다아…….”황홀하고 고급스러운 객실 인테리어에 희원은 우뚝 멈춰 서 눈을 반짝였다.
“고객님, 객실은 마음에 드십니까?”“네. 무척요. 정말 마음에 들어요.”오늘 밤.
그녀 혼자 지내게 될 럭셔리한 공간이었다.
지환의 결혼식장을 빠져나온 정윤은 곧장 인근 백화점을 향했다.
황금 같은 휴일에 백화점을 그냥 두고 지나칠 리가 없다.
마침 세일도 하니까.
“손님, 정말 잘 어울리세요. 사이즈도 어쩜 이렇게 딱 맞을 수 있을까요?”“흠. 이번 시즌 룩은 프린팅이 좀 과한 것 같은데. 너무 튀지 않아요?”정윤은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이리저리 비춰보았다.
“아뇨. 정말 예뻐요. 이 옷 소화하시는 분 많이 없어요.”“흠. 그럼 이거 주세요. 아까 입어본 것도 같이 주시고요.”“네. 잘 알겠습니다.”직원은 빠른 손길로 옷을 가져갔다.
“결제는 어떻게 도와드릴까요?”“일시로 주세요.”“네. 알겠습니다.”“아아. 포장하는 김에 이것도 같이.”“네. 손님.”그녀는 사냥하듯 공격적인 쇼핑을 했다.
정윤은 유행에 민감했고, 과감한 스타일의 옷도 줄곧 소화하는 타입이었다.
검사라는 보수적인 집단을 벗어난 인간 차정윤은 소비에 스트레스를 풀고 맛있는 음식에 감복하는, 안과 밖의 모습이 다른 사람이었다.
검은 슈트와 검사 패용증으로 평일을 살아간다면.
이토록 화려한 옷과 높은 하이힐로 주말을 살았다.
“수고하세요.”“네. 감사합니다.”매장 입구까지 따라오며 인사를 하는 직원들을 뒤로하고 정윤은 걸음을 옮겼다.
캬, 역시 카드 긁히는 소리에 묵은 스트레스가 날아간다.
정윤은 커다란 선글라스 사이로 연신 신상을 훑으며 백화점 사이사이를 걸었다.
“정윤 언니?”그때였다.
누군가 자신이 부르는 소리에 멈춘 정윤은 돌아보았다.
“……아.”순식간에 정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는다.
“맞죠, 정윤 언니.” 명품관을 누비던 여성이 정윤에게 가까이 다가온다.
여성의 뒤에 멈춰 선 수행비서는 여성이 구매했을 명품의 쇼핑백을 주렁주렁 달고 있었다.
정윤은 힐끔, 여성과 그녀의 비서를 바라보다 오만상을 찌푸렸다.
제길. 여기서 보다니.
“언니, 잘 지냈어요? 어떻게 지냈어요?”하필 여기서 얘를 볼 게 뭐람.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힐끔 여성을 바라본다.
한때는 유명 인사였으니 낯이 익을 만도 하다.
사람들의 시선을 개의하지 않는 여성은 해사한 미소를 지었다.
전직 슈퍼모델다운 늘씬한 키, 예쁜 얼굴.
여성은 여전했다.
“와, 여기서 언니를 다 보다니. 진짜 반가워요.”“그래. 오랜만이긴 하네. 반가운 건 모르겠고.”정윤은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짧게 인사를 건넸다.
딱딱한 음성이나마 정윤의 대답이 반가운지 여성은 더욱 환하게 웃었다.
때 묻지 않은, 악의가 없어 보이는.
화려한 이목구비와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여성의 웃는 얼굴과 눈빛.
“주말이라 백화점 오신 거예요? 언니 얼굴도 여전하시네요. 변한 게 없어요.”……바라보자니 진절머리가 난다.
“어떻게 지내셨어요. 언니, 우리 이럴 게 아니라 차라도 한 잔 마시면서…….”“야.”상대의 살가움을 무색하게 하는 정윤의 음성.
예쁘게 웃던 희주의 표정은 조금 어둡게 변했다.
“나 너 하나도 안 반가워. 우리가 이렇게 반갑게 인사할 사이는 아니잖아?”“아…… 그게…….”희주는 말꼬리를 흐리며 죄인처럼 고개를 수그렸다.
정윤은 천천히 시선을 내려 희주 왼손에 자리한 결혼반지를 내려다보았다.
수천은 우습게 호가할 다이아반지는 요란한 빛을 뿜어내며 위풍당당하게 몸값을 과시했다.
정윤은 피식 헛웃음을 터트렸다.
“하. 내가 진짜 어처구니가 없어서.”분노가, 치민다.
“야, 너.” 정윤은 낮은 음성으로 희주를 부르며 한발 더 다가섰다.
“반가운 척 연기하면서 사람 간 보지 말고, 하던 쇼핑이나 마저 하고 돌아가.”“…….”“우리 이렇게 우연이라도 다신 보지 말자. 날 봤으면 피하든지 도망가든지, 둘 중에 하나는 해줬으면 좋겠어. 건방 터지게 사람 불러 세우지 말고.”비서님 기다리시잖아. 가봐.
정윤은 마무리를 하듯 툭 말을 던지곤 희주를 지나쳤다.
“……아, 맞다.”조금 걸어가던 정윤은 멈춰 섰다.
아직 그 자리, 그곳에 서서 바닥만 바라보고 있는 희주를 향해 돌아섰다.
어지간하면 그냥 돌아서고 싶은데, 도저히 심사가 뒤틀려서 그럴 수가 없다.
“서검 오늘 결혼했어. 결혼식 다녀오는 길이야.”“……네? 네에?!”무슨 말을 해도 반응이 없더니, 화들짝 놀란 눈으로 돌아선다.
정윤은 뭐 이런 게 다 있냐는 표정으로 선글라스를 벗었다.
약간 부은 눈이, 날카롭게 희주를 응시했다.
“뭘 그렇게 놀라? 서검은 결혼하면 안 돼?”“아…….”“너만 결혼해서 잘 살라는 법 있어? 서검 결혼했어. 정말 예쁘고 좋은 여자랑.”“…….”“난 있지, 니가 평생 불행하길 바랄거야. 너에게 남은 행복이 있다면 이젠 그거 서검 줘야 하잖아?”간다. 정윤은 다시 선글라스를 꼈다.
조금 떨어져 있던 희주의 비서를 신경질적인 얼굴로 지나치며 그녀는 그길로 백화점을 나섰다.
차 핸들을 붙잡고 있던 정윤은 짜증이 섞인 얼굴로 한숨을 토했다.
“별 그지 같은 걸 만나가지고 기분 잡쳤네.”……다른 백화점 가야지이이이이.
“열받으니까 쇼핑해야지이이이이이.”정윤은 다른 백화점으로 쇼핑 2차를 떠났다.
행복은 지금 누리고, 지금 누린 행복의 죗값은 다음 달 카드 값으로 받으리라.
“쇼핑하고 혼자 고기 먹어야지이이이 소고기 먹어야지이이이.”정윤은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며 운전을 했다.
여러모로 정신없는 날이 기운다.
“친척도 진짜 많네. 전부 다 기억할 수 있을까?”희원은 넓디넓은 스위트룸에 혼자 앉아 지환의 일가친척의 전화번호를 정리했다.
수순대로 양가에 전화를 넣고, 폐백 때 인사를 드렸던 수많은 친척 분들께 전화로 인사를 했다.
폐백 때 얼마나 많은 분들께 절을 했는지 나중엔 무릎이 다 아프더라.
체감할 수 없었던 종가의 위엄을 언뜻 엿보았다.
“선물은 뭘 사야 한담.”소소하게 선물이라도 준비해야 할 텐데. 뭘 준비하지?
희원은 혼자 펜대를 굴리다가 침대에 털썩 누웠다.
객실은 너무 좋고, 편안한데 심각하게 심심하다.
“심심해…….”가만히 앉아서 숨만 쉬려니 너무너무 심심하다.
객실의 서비스도 누릴 만큼 누렸겠다, 슬슬 몸이 지루함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서지환 씨는 뭐 하려나?”가만. 희원은 휴대폰을 들고 지환에게 전화를 걸었다.
각자 1박을 보내기로 했지만 잠깐 만나도 되지 않을까?
증거물로 인증 샷도 좀 남겨주고. 서지환 씨도 심심할 텐데?
“여보세요?”ㅡ네. 헉. 헉헉…… 헉…… 여보세요……헉.그의 숨소리가 거칠다.
응? 희원은 고막을 때리는 그의 와일드한 숨소리에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호텔 방에 혼자 누워 이렇게 숨 찰 이유란 뭐란 말인가?
“혹시 지금 제가…… 혼자만의 시간을 방해했나요?”ㅡ헉, 헉…….희원은 오만상을 찌푸렸다.
대체 지금 뭐 하는 거요! 왜 그렇게 씩씩거리는 건데!
ㅡ운동, 운동 중입니다 휘트니스, 휘트니스. 헉…… 헉…….“아. 아아! 운동! 운동!”달리는 중이란다. 희원은 그제야 벅찬 숨소리를 이해하곤 웃음을 터트렸다.
심심해서요. 와인이라도 같이 마실래요?
편안하게 묻자 일단 조금만 기다리란다. 드럽게 헉헉 거린다.
희원은 전화를 끊고 외출을 준비했다. 고급 호텔이니, 예쁘게 차려입고 내려가 사진을 찍어 SNS에 올려주리라.
지환과 함께할 시간이 별로 없으니 생길 때마다 사진을 남겨 다정한 부부의 모습을 증빙하기로 한다.
운동 후 샤워를 끝낸 지환은 옷을 갈아입고 호텔 지하로 내려왔다.
이곳에서 판매하고 있는 베이커리가 무척 유명한데, 그녀에게 선물을 하고 싶었다.
그녀가 호텔 bar에 도착하기 전에 케이크를 사서 올라가 기다려볼 생각으로, 그는 걸음을 재촉했다.
“이번 달 한정판 케이크입니다.”지환은 만든 이가 예술의 혼을 불어넣었음이 분명한 케이크 앞에 멈춰 섰다.
요란한 홍보 문구를 달고 진열되어 있는 케이크는 한정판이라는 이름답게 비싼 값을 자랑했다.
케이크 하나를 12만 원씩이나 주고 살 일인가 싶다가도,
“네. 그걸로 주세요.”언제 또 이런 케이크를 선물해보겠나 싶어서 결정했다.
앞으로 우리에겐 그 흔한 결혼기념일도 없을 테니까.
케이크에 곁들일 샴페인도 샀다. 직원에게 건네받은 지환은 시계를 들여다보고 돌아섰다.
얼추 그녀가 나올 시간이 다 되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bar로 올라가려던 그때.
“……뭐야.”별생각 없이 앞을 바라보던 지환은 화들짝 놀라 기둥 뒤에 숨었다.
고개만 슬쩍 내밀어 앞을 바라보니 유구무언이 서 있는 게 아닌가?
“뭐야, 여기 왜 있어. 해외 갔다더니?”결혼식에 못 온다고 얼핏 들었던 유구무언의 행방에 무척 기뻐했는데.
해외 스케줄이 꽤 길어 당분간은 한국에 없을 거라고 듣기도 했는데.
그런 유구무언이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다.
“여보세요? 네. 저예요.”누구와 통화를 한다.
지환은 외국어 듣기평가 모드로 돌입하여 귀를 쫑긋 세웠다.
오늘부터 전공이다. 남의 말 듣기평가.
“다 왔어요. 지금 올라가요.”이곳에서 약속이 있는 모양이다. 위로 올라간다는 말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라진다.
허어. 지환은 턱을 문질렀다.
“어디로 간 거야, 대체.”유구무언이 어디로 간 건지 알 수가 없다. 위엔 bar도 있고, 식당도 있고, 카페도 있고, 갈 곳이 천지다.
설상가상 이제 곧 권희원 씨가 bar로 향할 시간이다.
그녀가 객실을 나섰다간 유구무언을 만날지도 모른다.
유구무언이 어디로 향하는지 알 길이 없으니 사방은 지뢰밭이나 다름없다.
둘이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유구무언은 희원이 이곳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알 리 없으니까.
공연히 마음이 조급해진 지환은 두다다다 엘리베이터로 달려갔다.
드는 생각은 단 하나. 두 사람이 만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는 것.
왜냐.
“왜 안 오냐, 엘리베이터. 빨리 와라 빨리…….”그냥.
싫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