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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아직은 먼 거리의 그대가 (15/98)

15. 아직은 먼 거리의 그대가

희원은 로맨틱한 프릴이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원피스를 입고 거울 앞에서 최종 점검을 마쳤다. 

“서지환 씨 기다리겠다. 빨리 가야지.”휴대폰을 챙기고 립스틱 하나를 챙겨 작은 클러치에 넣고, 희원은 마지막으로 머리를 빗었다. 

왜인지 자꾸 거울 앞에서 떠나질 못하겠다. 

마치 설레는 데이트를 앞둔 여자처럼. 

“아이쿠, 진짜 늦었다. 늦었어.”엘리베이터만 타면 도착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지 자꾸 굼뜨게 된다. 

약속 시간 2분이 경과했음을 확인한 희원은 갈아 신을 신발을 꺼냈다. 

똑똑.

“잠시 만요!”이크. 희원은 신발을 제대로 신지 못한 채 통통 뛰어가 문을 열었다. 

지환이 데리러 온 거라 확신했다. 

“누구세요?”“접니다. 서지환.”지환이라는 말에 희원은 단숨에 문을 열었다. 

“미안해요. 지금 막 나가려던 참이었어요.”준비 다 했어요. 어서 가요.

희원이 문을 밀며 앞으로 나아가려 하자 지환은 한 발, 안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난데없이 지환이 안으로 밀고 들어오자 희원은 문고리를 놓친 채 뒷걸음을 걸었다. 

“……아? 그게 다 뭐예요?”샴페인과 케이크를 들고 서 있는 그의 모습에 당황한 희원은 샴페인과 지환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 호텔 지하에서 판매하고 있는 유명한 케이크다. 

그녀가 한 번쯤은 먹어보고 싶었던. 

“권희원 씨가 좋아할 것 같아서, 사 봤습니다.”“와, 진짜 먹어보고 싶었던 건데. 내가 좋아할 거란 건 어떻게 알았어요?”희원의 질문에 지환은 웃었다. 

“좋아한다니 다행이네요. 안 좋아할까 봐 걱정했는데.”혹시나 희원이 bar로 올라갔을까 봐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뒤 미친 듯이 달려왔다. 

다행이지, 희원은 아직 객실에 있었다. 

“고마워요. 어서 나가서 먹어요, 우리.”희원이 다시 한 번 앞으로 나아가려 하자 지환은 그녀의 걸음을 막아섰다. 

다시 지환에게 진로를 막힌 희원이 움찔하며 멈춰 선다. 지환은 평온한 표정을 유지했다. 

안 돼요. 못 나갑니다. 

지금 밖엔 놈이 출몰했거든요. 

“서지환 씨, 안 나가요?”“그래도 기념일인데 스위트룸에서 한잔할까요?” “네? 방……에서요?”그녀 눈에서 동공지진이 일어난다. 

룸에서 샴페인을 마시자니 뭔가 충격적인 모양이다. 

“꼭 방에서…… 음…… 어…… 방에서요?”“네. 방에서.”“꼭? 꼭 방에서 마셔요?”“네. 꼭. 꼭 방에서.”휴, 이러려고 산 샴페인이 아닌데.

망할 유구무언 때문에 사심 충만 드러운 놈으로 보이기 십상이다. 

지환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녀의 눈빛이 사정없이 흔들리는 것을 보고 있자니 옘병, 수치스럽다. 

“서지환 씨. 저는 밖이 더 좋은데요?”“저는 여기가 더 좋은데요.”“나가면 안 돼요? 서지환 씨하고 룸에 둘이 있기 좀 부담스러운데.”안 돼! 나가긴 어딜 나가!

밖엔 유구무언이 활개를 치고 있다고!

“부담스럽습니까? 왜요?”지환은 갖은 노력을 다하며 희원의 걸음을 막아섰다. 

어쩐지 나가면 바로 유구무언을 만날 것만 같았다. 

“내가 부담스러운 이유는 뭡니까? 사심도 없으면서.”“…….”희원은 말문이 막힌 표정으로 지환을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과 단둘이 호텔 방에 있어도 아무 생각 없다는 얼굴이다. 

어쩐지, 혼자만 야릇한 상상을 했나 싶어 그녀 심기가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왜 이렇게 그와 하는 일들에 혼자만 유별나게 구는 건지 모르겠다. 정작 그는 아무 생각도 없어 보이는데. 

“그러니까, 서지환 씨는 부담스럽지 않다는 말씀이시죠? 나와 단둘이 방에 있어도?”“물론이죠. 부담스러울 이유가 뭡니까?”아니야! 나는 사실 부담돼! 

세상에서 제일 부담스러운 게 지금이야!

지가 말하고도 지가 민망한지 지환은 케이크를 들고 있는 손에 힘을 주었다. 

“권희원 씨와 단둘이 방에 있다고 인성 변하는, 그런 사람 아닙니다.”아니야! 사실 나는 변할지도 몰라! 

그래도 나가는 건 더 싫어!

“나 아직 스위트룸 구경도 못 해본 거, 알죠. 나도 좀 구경하고 싶은데.”“음…….”희원은 어딘가 허술한 이유를 늘어놓으며 방에 있기를 종용하는 지환을 이상하게 바라보았다. 

모처럼 분위기 좀 내보려고 예쁜 옷도 입었는데.

“하긴, 서지환 씨는 방구경도 제대로 못 했잖아요. 이 방은 서지환 씨도 누릴 권리가 있죠.”하지만 호텔 어디를 걸어도 지금 이 객실만큼 예쁜 공간을 찾기는 힘들 거다. 

방에서 찍은 사진이 더 리얼한 부부의 모습을 보여줄 수도 있을 거고. 

로맨틱하잖아? 방에서, 

남편과, 신혼 첫날밤. 

단둘이…….

“으아.”결국 생각을 끝까지 해버린 희원의 입에서 이상한 탄식이 흐른다. 

지환은 멀뚱멀뚱 그녀를 바라보았고 희원은 홱 돌아서 걸어갔다. 

가만히 있자니 붉어진 얼굴을 들킬 것만 같았다. 

“난 서지환 씨와 bar에 가서 간단하게 와인이라도 마시려고 했는데. 뭐, 상관없겠죠. 들어와요.”하…… 얼굴이 빨개졌어…… 어떡해…….

희원은 손부채질을 하며 리모컨을 찾아 에어컨 온도를 내렸다. 

뭐랄까, 일이 좀 이상하게 되어 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되도록 쿨하게 행동해야겠다. 쿨하게. 

밖이건 아니건 아무 생각 없다는 남자 앞에서, 나만 이상한 여자로 보일 수는 없으니까. 

“그럼 실례하겠습니다.”“네. 어서 오세요.”결국 방에 둘이 남았다. 

사실 누구도 원한 일은 아니었다. 

“당분간 밖에 있겠다고 하더니, 왜 벌써 들어왔어?”“그냥요. 혼자 나가 있으려니 영 심심해서. 할 일도 없고.”현역 선배를 만난 구언은 머쓱하게 입을 떼며 웃었다. 

해외 스케줄을 핑계로 희원의 결혼식을 불참했지만, 사실은 이틀만 출국하면 되는 단순한 스케줄이었다. 

희원의 결혼식 전에 공연은 끝이 났고, 구언은 어제 귀국했다. 

“너 들어온 거 아는 사람 나 말고 또 있어?”“없어요. 괜히 소문나서 희원이 귀에 들어갈까 봐, 말 안 했어요.”“희원이 결혼식 안 오려고 그런 거지? 뭐 하러 그렇게까지 했어.”“그냥, 내가 원이 결혼식 가서 뭐하나 싶기도 하고. 한국에 있는데 안 가면 희원이가 이상하게 생각할 것 같기도 하고.”구언이 솔직하게 답하며 시종일관 웃자 선배는 미간을 좁혔다. 

“웃지 마. 니가 웃는다고 웃는 것처럼 보이는 줄 알아?”“그러게요. 내가 지금 웃는 게 웃는 게 아니네. 근데 또 웃는 것 말고는 할 게 없네.”“에휴, 널 보고 있자니 내 속이 다 썩는다. 썩어.”친한 선배의 탄식이 씁쓸하다. 

구언은 따라놓은 보드카를 넋 잃은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입술을 떼었다. 

“결혼, 잘했어요?”“누구. 희원이?”“네.”선배는 오늘 희원의 결혼식을 다녀왔다. 

빈 잔에 술을 따르며 선배는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지. 예쁘더라. 뭐, 희원이는 항상 예뻤지만.”……예쁜 너의 결혼식.

그 곁엔 내가 있었으면 했던 바람.

“신랑도 잘생겼던데. 검사라며. 선봐서 만났다고.”“…….”“너한텐 이런 말, 잔인하게 들릴 줄 알지만 두 사람 잘 어울리더라.”결혼에 뜻이 없다니 그런 줄로만 알았다. 

그렇게 혼자를 꿈꿀 너라면 차라리 평생 혼자이길 바랐다. 

지금처럼 네 곁에서 자유로이 함께할 수 있도록.

숨긴 마음을 후회하지 않을 수 있도록.

“잊어. 별 수 있어? 이젠 남의 여자인데. 깨끗하게 잊고 비워버려.”마음이 산산조각 난다. 원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종료된다. 

고백이라도 해볼걸 그랬다. 이러나저러나 어차피 접어야 할 마음인데. 

시원하게 차여라도 볼걸. 깨끗하게 거절이나 당해볼걸.

“너도 인마, 너 좋다는 여자 만나. 니가 뭐가 모자라고 부족해서 이렇게 짝사랑에 목을 매냐? 접어.”……부질없는, 후회.

우는 마음을 대신해, 입술이 웃는다. 

“알았으니까 술이나 사줘요. 오늘은 좀 취하고 싶네.”“그래. 알았어. 너 그런데 희원이한텐 귀국한 건 언제 말하려고. 니들 공연 연습도 있잖아. 희원인 공연 때문에 신행도 취소했다는데.”“신행을 취소했대요? 희원이?”“그래. 걔는 신행도 포기하고 연습하겠다는데 폐 끼치면 되겠어? 일은 일이지.”“……뭐, 조만간 말해야죠. 조만간.”조만간. 나는 네 앞에 새로운 사람이 되어.

사랑 같은 건 해본 적 없는 또 다른 내가 되어. 

“마셔. 마시고 털어버려. 괜찮아, 인마. 인연 아닌걸 뭐 어쩌겠어. 희원이 행복하면 됐지. 남자답게 축하해줘. 알겠어?”“……네.”어쩌지. 조만간 만나게 될 내가, 벌써부터 나는 두려운데. 

구언은 내내 시선을 주던 술잔을 들고 벌컥벌컥 술을 비웠다. 

이 호텔 아래층 어딘 가에 그녀가 머물고 있다는 것은 꿈에도 모른 채.

결심한 대로 마음을 접을 수 있을지 없을지, 그것도 종잡지 못한 채. 

“케이크 맛있네요. 먹어보고 싶었는데, 비싸서 내 돈 주고는 못 사 먹겠더라고요.”“많이 먹어요. 이미 많이 먹고 있지만.”“다 먹어야죠. 아까우니까요.”희원은 부지런히 케이크를 파먹었다. 

애매한 시선처리로 케이크만 응시한 채, 물리고 질릴 만큼 먹은 케이크를 멈추지 않고 흡입했다. 

이미 질린 케이크는 입안에서 식도로 넘어가지 않고 맴돌았다. 

하지만 먹는 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왜냐. 

“아…… 맛있다…….”먹는 것 말고는 할 게 없으니까!

단둘이 앉아 있는 이 방은 지나치게 조용하다. 

하필이면 테이블도 침대와 가까운 곳에 배치되어 있다. 

침대와 떨어져 있는 다른 테이블에 앉아도 되겠지만 무슨 정신인지 이곳에 앉고 말았다. 

케이크를 먹고 있지만 정신이 오만 곳에 팔려 얼떨떨하다. 

폭신한 케이크를 한 입 덜어 꾸역꾸역 밀어 넣을 때마다 긴장했음을 말해주는 잔기침이 나왔다.  

곁눈질로 자꾸만 침대가 보였다. 

이런 일에 익숙하지 않은 심장은 낯선 박동으로 그녀를 당황하게 했다. 

지환은 홀짝, 샴페인을 마시며 그녀를 응시했다. 

“먹기 싫으면 그만 먹어도 돼요. 표정은 거의 울기 직전인데.”“아뇨? 아뇨? 아뇨? 다 먹을 건데요?”지환이 그만 먹으라고 하자 희원은 더욱더 적극적인 표정으로 케이크를 잘랐다. 

흐엉. 한 입 더 밀어 넣었다간 헛구역질이 나올 것 같았다. 

“내가 그렇게 불편합니까?”“아뇨? 제가 왜요?”“불편해 죽겠다는 신호 아닙니까? 싫은데도 꾸역꾸역 먹으면서 눈도 안 보고.”“……네, 뭐. 사실은 어색해서요.”슬그머니 접시를 내려놓았다. 

케이크를 한 조각 더 먹느니, 솔직하게 말하는 게 백 번은 나을 것 같다. 

“서지환 씨하고 결혼하기 전에 좀 더 친해질걸 그랬어요. 이렇게 어색할 줄 알았다면.”“난 괜찮은데.”말끝에 지환은 샴페인을 다시금 홀짝 삼켰다. 

그녀의 불편함을 진즉 알고 있어 나가주고 싶다가도, 심심한 그녀가 홀로 밖을 나갔다가 유구무언을 마주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도 저도 못 하고 있다. 

일단 버텨보기로 한다. 

“그, 동료는 언제 옵니까?”“누구요?”“왜 있잖아요. 누구지? 누구더라?”유구언. 유구언. 유구언.

지환은 생생하게 기억하는 그의 이름을 애써 모른척했다. 

그녀에게 큰 관심사는 아니라는 듯 보이고 싶었다. 

“아, 혹시 유구언 말인가요?”“그랬나? 뭐, 그랬던 것도 같고. 같이 연습하던.”“네네. 맞아요. 유구언. 구언이.”“해외 나갔다고 들은 것 같은데? 왔습니까?”지환은 애써 궁금하지 않은 척 흘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갑자기 생각이 난 것처럼. 

사실은 내내 유구무언 생각뿐이었으면서.

“모르겠어요. 일정이 좀 길다고만 들었거든요.”“한국에 있을 확률은 얼마나…….”“확률? 글쎄요. 잘은 모르겠지만 지금 있을 확률은 거의 없죠? 왜요?”“아닙니다. 그냥 심심해서 물어봤습니다. 갑자기, 아주 갑자기 불현듯 생각이 나서.”희원은 지환의 부자연스러운 손사래를 바라보다가 갸우뚱했다. 

갑자기 구언의 이야기를 꺼내니 이상한 거다. 

“구언은 참 좋은 무용수예요. 같이 연습하면서 동기부여도 많이 됐죠. 해외에서 더 유명한 무용수라 개인 스케줄도 엄청 많아요. 하나하나 다 알 수도 없고.”“그렇군요.”희원은 결혼식 전에 도착한 구언의 메시지를 떠올렸다. 

무사히 결혼식 끝났다고 답이라도 보내줄걸.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녀는 부산한 손길로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맞다. 연락해준다는 걸 깜빡 잊었어요. 생각난 김에 연락해줘야겠다.”“누구? 유구언 씨 말입니까?”“네. 아까 연락이 왔었거든요. 정신이 없어서 잊어버리고 있었어요.”안 돼! 

지금 여기 있단 말이야!

“잠깐, 권희원 씨, 잠깐만.”지환은 덥석 희원의 손을 잡았다. 

휴대폰을 들고 있던 그녀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잡은 휴대폰을 이도 저도 못하게, 지환은 힘을 꽉 주었다. 

“권희원 씨. 난 지금 누구에게도 이 시간을 방해받고 싶지 않은데요.”……하도 급하니 헛소리가 절로 흘러나온다. 

“내게만 집중해줄 순 없습니까?”“미쳤어요?”희원은 눈을 가늘게 뜨며 지환을 응시했다. 

“샴페인 마시고 취했어요? 그런 게 아니면 무슨 그런 이상한 소리를.”“아, 취하는 것도 같고.”“뭐, 뭐요?”“됐고, 어쨌든 지금은 내게만 집중해요. 다른 일은 나중으로 미루고.”……망했다. 이 분위기는 무엇?

“내가 지금 서지환 씨에게 집중해야 할 이유는 뭐죠?”“아…… 글쎄요…… 잘은 모르겠으나…….”“잘 모르겠죠? 저도 잘 모르겠는데요. 서지환 씨.”끙. 지환은 되돌릴 수 없는 주둥이의 참사에 마른침을 삼켰다. 

희원은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계약 잊은 건 아니죠? 결혼했으니 날 어쩔 수 있다고, 설마 그런 생각 하는 건 아니죠?”“무슨 그런 무시무시한 말씀을.”“그럼 이 끔찍한 멘트는 뭔데요! 뭘 집중을 하라 마라, 으아, 소름 끼쳐.”……자신의 멘트에 질색하는 그녀의 표정을 보고 있자니 너무나도 수치스럽다. 

희원이 붉어진 얼굴을 홱 돌리며 휴대폰을 내리자 끙, 지환은 앓는 소리를 내었다. 

오늘만.

일단 오늘만 넘겨봅시다. 유구무언이 지금 여기 있다고요.

“우리, 이만 자리 끝낼까요? 서지환 씨도 피곤해 보이는데.”안 돼! 

내가 나가면 감시를 할 수가 없잖아!

“전혀. 전혀 피곤하지 않습니다.”“오늘따라 왜 이래요? 이상하게?”“원래 이상한 사람입니다. 신경 쓰지 말아요.”하…… 지환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망할 유구무언 때문에 기름진 멘트나 실없이 뱉어내며 죽치고 앉아 있는 진상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어떡해. 곧 죽어도 싫은데.

……가만.

지환은 가만히 생각에 잠긴 채 눈을 감았다가, 떴다. 

내가 왜 이렇게까지 전전긍긍하며 유구무언을 경계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왜? 왜? 그럴 이유가 뭐란 말인가?

“저는 피곤해서요. 이만 자고 싶어요.”그래. 내가 이럴 이유까지는 없는 거다. 

그녀의 인간관계이고, 내겐 그저 타인의 이야기일 뿐이다. 

신경 쓰고 초조해하며, 그녀와 유구무언을 격리시킬 권리가 내게는 없다. 

“피곤해서 헛소리가 자꾸 나오나 봅니다. 정신 차리고 이만 일어나겠습니다.”지환은 생각 끝에 일어났다. 

지금까지 자리를 버티고 앉아 있는 일이 한심하게 여겨진다. 

어쩌다 이렇게 물색없는 사내가 되었나, 스스로 바보 같았다. 

“피곤할 텐데 이만 자요. 가볼게요.”“아…… 네. 그래요. 서지환 씨.”생각을 정리하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볍다. 

그녀가 유구무언에게 연락을 하거나 아니거나, 그건 자신이 관여할 부분이 아님을 이제야 깨닫는다. 

“권희원 씨, 잘 자요.”“서지환 씨도 잘 자요. 좋은 꿈 꾸고요.”두 사람이 결혼을 약속할 땐 이혼을 고려하지 않았다. 

되도록 이혼을 하지 않되, 단 하나의 경우에만 합의를 해주기로 했다. 

“권희원 씨도, 좋은 꿈 꿔요.”상대에게, 혹은 내게,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을 때. 

그러니 지금 자신의 행동은 옳지 않다. 모든 것은 순리대로 따라야 하는 거니까. 

쿵. 문을 닫고 지환은 밖을 나섰다. 그대로 걸음을 옮겨 자신의 객실로 돌아갔다. 

진정한 사랑을 찾게 되면 서로를 쾌히 놓아주리라. 

두 사람은 그렇게 약속했고, 시작엔 자신도 있었다. 

자신. 진심으로 상대의 사랑을 축하해줄, 자신.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신혼 첫날밤이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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