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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어떻게 들릴지 다 알아 (32/98)

32. 어떻게 들릴지 다 알아

피곤과 숙취가 짓누르는 몸을 뒤척이며, 지환은 원치 않는 꿈을 꾼다. 

그곳엔 네가 서 있고, 가까웠으며, 달아나려 몸부림치면 칠수록 더욱 선명하게 들러붙었다. 

‘오빠, 나는 부자가 되었으면 좋겠어. 부자가 되면 나처럼 불우하게 자란 아이들에게 베풀며 살 거야.’너와 나는 사랑했다. 

꿈속, 시절은 그러했다. 

‘스타가 되면 돈 많이 벌겠지? 정말 열심히 해야겠지? 내가 성공하면 제일 먼저 오빠한테 보답할게. 오빠가 지금의 나를 있게 했으니까.’특별한 재주 없이 어여쁜 얼굴로 사랑을 받으니, 하루하루 꿈만 같다고 했다.

갑자기 모두가 저를 특별한 사람으로 대해주고 여겨주니 먹지 않아도 배부르다고 했다. 

살아온 인생에 가진 것이 없었고 유년이 불우했다 보니 갈수록 욕심이 생긴다고, 말했다. 

‘오빠, 지금이 꿈은 아니겠지? 나 지금 꿈꾸는 건 아니겠지? 몰래카메라 같아. 모두가 짜고 날 속이는 것처럼 이상해.’지환은 미간을 좁히며 반대로 돌아누웠다. 

어느 한순간에 날개를 달더니 거침없이 날아오르더라. 

본인도 믿기지 않는다 말할 만큼, 대한민국 곳곳엔 너의 얼굴로 치장이 되었더라.

이러다 질리는 게 아닌가 싶을 만큼 채널을 돌리면 온통 네가 나와 웃고 있더라.

‘오빠, 나 그냥 오빠랑 연애한다고 말할까 봐. 거짓말하는 것도 너무 힘들어.’널 알기에 기뻤고, 믿기에 기뻤다. 

너만큼 기뻤고, 너만큼 웃었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끊긴 연락, 바뀌어버린 전화, 닿지 않던 소식.

남들만큼도 모르던 너의 이야기, 할 수 있는 거라곤 기다리는 것밖에 없던 때.

‘오빠, 나 믿지? 세상 사람 모두가 날 믿지 않아도, 오빠는 나 믿지?’아무 생각 없이 틀어놓은 TV 속 연예 프로그램 사회자가, 그녀 결혼 소식을 전해왔다. 

믿어줘. 

무슨 일이 있어도 날 믿어줘……. 

“가라…….”그의 입술 사이로 말이 툭 튀어나온다. 

“이제 그만…… 가…….”꾸던 꿈은 그제야 허상이 되어 날아가고, 그는 꿈이 날아가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눈을 떴다. 

그러자 당황함에 눈만 크게 뜨고 있는 희원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지환은 느리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아니, 내가 온 줄은 어떻게 또 알고 가라고…… 서지환 씨가 하도 조용해서 숨은 쉬나 확인하려고 가까이 와본 거거든요.”꿈 사이 고되고 지쳤는지 노력으로 끌어올릴 만한 웃음도 남아 있질 않다. 

지환은 민망함에 투덜거리는 희원을 바라보았다. 

과도한 음주로 어제의 기억을 상실한 상태. 

지환은 겨우 나오는 목소리로 그녀를 향해 물었다. 

“내가 어제 이 집으로 왔습니까? 걸어서? 직접?”“어머, 그럼 제가 끌고 왔을까 봐요? 본인이 왔다구요. 걸어서. 직접.”“침대에서 잤습니까? 바닥에서 안 자고?”“간단하게 말하면 서지환 씨와 나, 하리, 셋이 전부 이 침대에서 잤어요. 최선이었고, 둘 사이에서 나는 부대꼈고, 힘들었고.”카랑카랑한 그녀 목소리가 귓가에 고이자 기운 없던 얼굴로 피식, 헛웃음이 흐른다. 

그가 웃자 희원은 힐끔, 그를 바라보며 입술을 열었다. 

“무슨 일 있었어요? 엄청 취했던데?”“그냥, 뭐, 하는 일이 그렇듯이.”“진짜 별일 없었던 거 맞아요? 그렇게까지 만취도 하는구나. 몰랐어요.”“안 합니다. 안 하려고 노력하고. 안 하는 중인데.”“…….”“어제는 그냥 그렇게 됐습니다. 그냥 뭐, 그냥. 그냥 일이 좀.”그냥.

그 시시하고 두루뭉술한 단어를 반복하며 얼버무리는 지환을, 희원은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아닌데. 당신은 무슨 일이 있었던 것만 같은데.

하지만 내가 더 캐묻는다 해도 답을 해주진 않겠죠. 

“정말 하나도 기억 안 나요? 이 방에서 자겠다고 막 떼썼잖아요.”“떼를 썼다? 내가 왜?”“그걸 왜 나한테 물어요. 이 방에서 자겠다고 서지환 씨가 엄청 떼쓰고, 결국 이 좁아터진 침대에서 셋이 자야 했죠.”전멸하다시피 없어진 기억. 

지환은 굳이 떠올리려는 노력도 하질 않았다. 

떠올려봐야 아무것도 득이 될 것은 없으리라. 오히려 지워진 어제의 일을 감사해하며, 지환은 다시 눈을 떴다. 

“나 때문에 잠 설쳤겠네요. 미안하게.”“이럴 줄 알았다면 나도 어제 술 한잔할걸 그랬어요. 술 냄새에 취하는 건 또 처음이라. 그나저나 집으로 간다고 했잖아요.”“그러게요. 귀소본능을 따르긴 했는데 이리 왔네요. 내 정신 상태가 이곳을 집으로 인식하는 모양입니다.”“……돌아갈 집이 많아서 좋겠네요. 아무 곳이나 가도 집이라서.”희원은 지환의 ‘귀소본능’이라는 말에 기분이 좋아진다. 

몸에게 맡겨진 머리가 자신의 집을 향했다니 마음이 느긋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 일도 없었습니까? 한 침대에 있었다며?”“허. 서지환 씨. 정말로 기억, 안 나요?”“농담하지 마요. 나 의외로 철벽이니까.”지환이 고개를 돌리며 희원의 질문을 넘겼다. 

잠시 지나도 희원의 말이 이어지질 않자 지환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장난치지 말아요, 권희원 씨. 나 또 의외로 순진합니다. 다 믿어요.”“아…… 서지환 씨는 기억이 나질 않는군요. 그럼 됐어요, 그만 이야기해요.”되…… 되긴 뭐가 돼!

그거 내 얘기잖아!

“이봐요, 권희원 씨.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과감하고 능숙했어요. 서지환 씨는.”“……아?”아? 내가?

제가요?

지환은 눈을 껌뻑껌뻑 하다가 부러 되돌리지 않으려 했던 어제 일을 미친 듯이 회상했다. 

이미 이 집에 발을 디딘 구간은 아무것도 기억나질 않는데, 되돌려봐야 술집에서 혼자 술이나 마시던 정도나 드문드문 생각날 뿐.

“어…… 권희원 씨. 우리 진지하게 그럼 이야기를, 아니, 일단 미안합니다, 아니, 무조건 미안합니다. 얘기를 좀…….”“와, 이 남자 위험한 사람이네. 요즘 같은 세상에 그런 정신 상태로 사기당하기 십상이라고요. 서지환 씨. 일은 개뿔, 코를 어찌나 골던지!”“……아오.”아오…… 지환의 입술 사이로 진한 탄식이 흐른다. 

희원은 천국과 지옥을 한 큐에 오고 간 사람 같은 지환의 표정을 바라보다가 깔깔 웃음을 터트렸다.

“하리랑 셋이 같이 잤다니까요. 그 말은 어디로 날려버리고 과감하고 능숙하긴, 으휴. 퍽이나.”“욕해도 됩니까? 지금 내가 당신한테 해코지를 해도 천당에 갈 것 같은 기분인데.”“시끄럽고 얼른 씻고 정신이나 차려요! 욕을 하건 해장을 하건 그 이후에 하고요!”메롱! 희원은 혀를 쏙 내밀고는 주방으로 나섰다.

된통 당했다는 생각이 드는지 지환은 분이 풀리지 않는 목소리로 다시 고개를 들었다. 

“진짜 그러다가 한번 호되게 혼나지! 나한테! 아주 과감하고 능숙하게! 진짜로!”아오…… 지환은 크게 소리치자 골이 흔들리는 통증에 이마를 부여잡았다. 

“아아, 머리…….”오랜만에 과음이다. 언제가 마지막이었는지, 이제는 희미할 정도로.

지환은 무거워진 머리를 내리며 긴 숨을 불어 내쉬었다. 

자고 일어나니 마치 어제의 일 같은 건 실로 지독하게 꾼 꿈만 같다. 

그래, 꿈.

자고 나면 응당 깨어나야 할 것이며 깨어나고 나면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말 꿈.

“침대 좋네. 푹신하고. 침대 어디에서 샀는지 물어봐야겠다.”내가 사는 지금의 세상에선 조금도 필요하지 않은, 꿈.

“아, 여보세요? 저…… 광고 보고 전화 드렸는데요.”서울 모처에 사는 평범한 집안의 가장은 몇 날 며칠을 고민하다가 휴대폰을 들었다. 

갑작스러운 큰 아이의 병중에 예상하지 못한 거액의 병원비가 발생했다. 

가장은 돈이 필요했다. 

가장은 내 아이를 살려야 했다. 

가장이 필요한 건 돈이 아니라 아이였지만, 아이를 살리기 위해선 돈이 필요했다. 

“그…… 돈을 쉽게 벌 수 있다고…….”ㅡ예. 물론이죠. 뭐 어려운 건 없습니다. 혹시 신상에 문제 있거나 그러셔도 다 괜찮아요. 수배 중은 아니시죠? 수배 중엔 출국이 안 돼서.“아, 아닙니다! 그, 그런 건 아니고 아이 치료비가 급하게 필요해서……!”ㅡ네네. 그냥 근처 가까이 해외여행 가신다 생각하시면 됩니다. 좋은 숙소, 좋은 구경거리 다 마련해드리니까, 마음 편안하게.가장은 아이 병원 앞 편의점에 붙어 있던 자그마한 명함을 내려다보았다. 

병원 앞엔 여러 가지 ‘급전’에 관련된 광고가 많았다. 

명함 속, 급전을 주겠다는 사람들은 돈이 필요한 자들. 돈을 두고 뭐든 할 준비가 되어 있는 자들을 원했다. 

병원은 그러한 이유로 안성맞춤이었다. 

“그런데 하나만 여쭤봐도…… 되겠습니까?”세상에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일은 없다. 

가장은 그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부부가 온종일 녹아나며 일을 해도 겨우 한 달이나 살아갈 뿐 이렇듯, 갑자기 터진 일 앞엔 속수무책이었으니까. 

가장은 하루살이가 아닌 한 달 살이였다. 

이젠 그마저도 힘들어졌다. 

“혹시 위험한 일이라거나…… 불법이라거나…… 뭐…… 그런…….”ㅡ…….“그러니까 그게, 어…… 요즘 뉴스 보면 별일이 다 있던데…… 보이스피싱 같은 걸 한다거나…… 아니면 그…… 제가 좀 위험해진다거나 하는…….”ㅡ저기요, 선생님.상대방은 가장을 불렀다. 이런 질문엔 이골이 났다는 것처럼 염증이 묻어나는 음성이었다. 

ㅡ불법이면 어떻고 보이스피싱이면 어떻습니까? 아이 치료비 하셔야 한다면서요. 선생님 지금부터 뼈 빠져라 24시간 365일 일해도 이 돈 못 벌어요.상대방은 가소롭다는 것처럼 음성 안에 웃음을 실었다. 

가장은 듣는 것 외엔 아무런 답도 하지 못했다. 

ㅡ보이스피싱 하러 가는 거 아니고, 신체에 위험 생기는 일 아니니까 걱정 마시고, 하나만 기억하세요. 이 뭣 같은 나라에서 법 지키고 살아봤자 나라는 내 새끼 안 살려줍디다. 생각 있으면 또 연락 주시고요.“아, 아! 저! 저 하겠습니다! 할게요!”가장은 준비가 되었다. 아니, 어쩌면 질문을 할 때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 

불법이라는 답을 들어보았자 변하는 건 없을 거란걸. 

아이를 살려야 하니까. 

가장의 목소리에서 절박함을 깨달은 상대방은 경계를 다소 누그러뜨렸다. 

이 바닥에 잔뼈가 굵은 상대방은 전화를 걸어온 자들의 음성만으로 실제 돈이 필요한 사람인지 아닌지를 구분했다. 

상대방은 확신했다. 가장은 일에 가담할 것이란걸. 

ㅡ저는 일단 중간에서 알선만 해드리는 거라 따로 연락이 또 갈 거예요. 지금처럼 통화는 어려울 거고 메시지가 갈 겁니다.“아, 네.”ㅡ궁금하신 건 거기에 물어보시면 되고, 몇 가지 준비하실 것들이 있으니 그것도 그때 들으세요. 가장은 전화를 끊었다. 

발아래에 이미 수북하게 쌓인 담배꽁초를 바라보다가, 다시금 한 개비를 꺼내 물었다. 

그러곤 입술이 버석버석하게 말라 들어가고 있을 아내에게 빠르게 전화를 걸었다. 

……가장은 잘못된 경로로 돈을 벌어 부자가 되고 싶은 게 아니었다. 

호화로운 생활을 영위하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여보세요? 나야, 여보. 그…… 돈이 해결될 것 같아.”나의 자식을 살리고 싶었다. 

“그래그래, 걱정 말고. 자세한 이야기는 집에 가서 할게. 어디서 구하긴, 다 구할 곳이 있었지. 응응. 그래그래, 이따가 보자.”가장은 단지 그것뿐이었다. 

의원실에 앉아 있는 백인호 의원은 자신의 오른팔 사내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사내는 백인호 앞에 장부를 내려놓았다. 

“조합장들에게 이번 달 총합 12억 정도 넣었습니다. 다음 달에 있을 지지도 조사에 아마 큰 힘이 될 겁니다.”“그거 가지고 되겠어? 더 넣었어야지. 돈 앞에 장사 없는 거야. 선거 전까지 팍팍 뿌려.”“예. 의원님. 더 챙기도록 하겠습니다.”“여론조사 기관은, 섭외했어?”“예. 착수 중입니다.”“차질 없게 해. 아무것도 틀어지면 안 돼. 알겠어?”“예. 의원님.”백인호는 안경을 벗고 미간을 문질렀다.

시장통을 한 바퀴 돌고 왔더니 머리가 지끈지끈하다. 

“거지새끼들. 아무리 쳐다봐도 거지새끼들에겐 적응이 안 돼.” “고생 많으셨습니다. 의원님.”“지들이 나라의 주인이다 어쩌다, 그런 개소리를 해대며 사람 하나 바꾸면 지들이 잘 먹고 잘사는 나라가 될 거라 믿으니 평생 빌어먹고 사는 거지.”백인호는 시장에서 만난 상인들을 떠올리며 조소했다. 

정기적으로 얼굴을 내밀며 이것저것 살피는 이른바 ‘정치쇼’를 이어가는 건 단지 그들이 원하기 때문이다. 

의원실에 처박혀 수십 개의 안건을 만드는 것보다 훨씬 더 나를 알리기 쉽고, 효율적인 일이었다. 

“서지환 검사 쪽을 좀 파봐. 건방진 새끼, 감히 나를 두고 먼저 일어나?”그러다가 지환을 떠올렸다. 

“때를 봐서 수사권 없는 적당한 자리로 내보내야겠어. 짖을 줄 아는 것들은 조용한 곳으로 보내야지.”검찰청에 은근한 압력을 넣어서 좌천이라도 시켜야겠다. 

검사에게 ‘수사권’이 사라진 자리는 즉 좌천이었기에.

그러기 위해선 서지환의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 

드러난 이력이 아닌, 숨은 이력까지 전부 다.

“사모님께서 요즘 만나고 다니시는 인물 중에 권희원이라고 무용수가 있습니다.”사내가 느닷없이 아내를 언급하자 백인호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희주의 수행기사는 사사로운 모든 일을 사내에게 매일매일 보고했다. 

“그…… 권희원의 남편이 서지환 검사입니다.”“……뭐라고?”백인호는 고개를 들었다. 

사내는 더욱 목소리를 낮추었다. 

“사모님께서 요즘 한국무용 쪽에 관심을 보이시고 무용수와 가깝게 지내시는 걸로 보고받았습니다.”“그래?”백인호 의원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했다. 

이렇듯 타인에게 보고받지 않으면, 아내가 무얼 하고 사는지 조금의 관심도 없는 사람이었다.

“집사람이 이 사실을 알고 있나?”“아마 알고 계신 것 같습니다. 일전에 사모님께서 한 차례 권희원 무용수에 대해 보고받으신 적이 있습니다.”보고를, 받았다. 

백인호는 잠시 침묵했다. 

이런 상황이라면 지환을 처음 소개해주었던 날 이후로 언질이 있었을 법도 한데, 아내는 그런 말을 일절 하지 않았다. 

말할 필요를 못 느꼈나? 

아니면,

“캐봐. 일이 조금 더 쉬울 수도 있을 것 같으니까.”……감춰야 했나?

“예. 의원님.” 백인호 의원은 사내가 내려놓은 서류철을 펼쳤다. 

돈을 받은 자의 이름과 액수가 적힌 종이를 건성으로 읽어대며, 백인호는 지환을 떠올렸다. 

서지환. 여러모로 기분이 나쁜 자였다. 

“뭐가 더 있을 거야. 분명히.”희주가 그의 아내와 친분이 있다는 건 어쩐지 꺼림칙했다. 

겹치는 우연 같은 건 반기며 살지 않았으니까. 

“야, 오랜만이다?”희원은 연습실에 등장한 구언을 바라보며 어깨를 가볍게 툭 쳤다. 

구언은 신발을 갈아 신는 자세 그대로 고개를 올려 희원을 바라보았다. 

나풀거리는 그녀 움직임에 은근한 향기가 묻어난다.  

코끝에 스며드는 그녀 향이 익숙하고 아찔해서, 구언은 잠시 숨쉬기를 멈췄다. 

“공연 잘하고 왔어? 나 동영상 봤어. 해외에선 난리더라.”희원은 평소와 같은 말투로 그를 대했다. 

내년 봄까지 이어지는 공연을 마무리하면, 구언과 얽히는 일을 없게 하려고 그녀는 준비했다. 

내어놓을 변명은 간단했다. 접점을 없애면 그만이니까. 

앞으로는 한국무용에만 집중하겠다고, 그녀는 구언에게 설명할 생각이었다. 

“구언아 나 있지, 할 말 있어.”희원이 할 말 있다고 하자 구언의 가슴으로 쿵, 하고 돌이 내려앉는다. 

긴장한 눈빛을 들며 어쩔 수 없이 숨을 내쉬니 아직 살아 있는 그녀 향이 코끝으로 깊숙하게 들어온다. 

“뭔데. 말해봐.”이렇듯 부드러운 향에는 의외의 가시가 돋아 있어 폐부가 따가웠다. 

“공연 봄까지만 하자. 나 이제 한국무용만 하려고.”희원은 돌아서며 구언을 바라보았다. 

조금 먼 거리를 유지하며, 그녀는 바닥에 앉았다. 

내내 침착함을 유지하려던 구언의 눈빛에 당황함이 서린다. 

“할아버지가 싫다고 하시네. 나더러 외도한다나? 명맥을 이어야지 한국무용 두고 한눈판다고, 싫으시대.”“…….”“생각해보니 할아버지 말씀이 맞는 것 같아. 너도 알잖아, 나 할아버지 말씀 거역 안 하는 거.”“나하고…… 있는 게 불편한 거지. 넌.”“아냐. 그런 거 아니야, 구언아.”그런 게 아니야. 희원은 침착하게 설명했다. 

예상한 대로 녀석은 변명을 온전히 믿지 않았고, 자신과의 관계가 불편해서 도망치는 거라고 여겼다.

사실이었지만 그렇다 해서 긍정할 수도 없었다. 

녀석이, 상처받을 테니까.

“야, 공연 안 한다고 너랑 내가 못 보는 것도 아니고, 뭐 그렇게 받아들이냐? 사람 민망하게.”“공연 아니고서는 다시 못 볼 것 같아서.”“…….”“못 볼 것 같다, 이제 너하고 나. 네가 날 안 볼 테니까.”그날, 그 공연장 대기실에서 마주했던 이후로ㅡ

내내 불편했다. 내내 어색했다. 

말을 붙이면 붙일수록 그녀는 움츠러들었고, 말을 하지 않으면 하지 않을수록 그녀는 빠른 속도로 멀어져 갔다. 

체감했다. 이제 끝이 다가오는 거라고. 

구언은 바닥만 내려다보았다. 

“그래. 좋은 생각이다. 너하고 나, 이렇게 계속 붙어서 공연하는 것도 사실은 이상한 거지.”마음은 아직 준비가 안 됐는데, 현실은 그런 것 따위 받아주질 않는다. 

너는 결혼을 했고.

“그렇게 빙빙 돌려 변명하지 않아도 괜찮아. 내가 너를 모르냐? 그냥 시원하게 얘기해, 괜찮아. 권희원.”너는, 결혼을 했고.

“그래, 권희원. 나 좀 시원하게 털어놓을게. 이쯤 되면 나도 다 털어야지. 털지를 못해서 자꾸 미련이 남는 것 같다.”“…….”“내가 너, 좋아했다. 그것도 많이.”“구언아.”“결혼 생각이 없다고 해서 사실은 조금 느긋하게 기다렸어. 공연에 폐 끼치고 싶지 않아서, 조금 기다렸다가 고백해야지, 하고는.”바라보지 않고 중얼거리니 마치 아무도 없는 공간 속 독백 같다. 

구언은 외려 이러한 상황을 다행이라 여겼다. 

“너무 네 결혼 소식이 느닷없어서, 놀랐어. 당황했고. 어떤 언질도 없이 갑자기 결혼을 한다고 하니까 내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이…….”“…….”“진짜, 진짜 노력 많이 했는데 잘 안 되더라. 믿기지도 않고, 실감도 안 나고. 자꾸 질투가 나고 화가 나고. 인정할 수가 없고.”남자의 고백이란 게 이토록 연약하고 가여웠던가.

희원은 그를 말 없이 바라보았다. 

“나중엔 사랑해서 결혼을 했는지, 그것도 모르겠더라. 그냥 서로가 도피처가 된 건 아닌가. 뭐, 결혼 생각이 없다고 했으니까. 그러다가 갑자기 결혼을 했으니까…….”“맞아. 구언아.”구언은 입을 다물었다. 

“나 그 사람, 사랑해서 결혼한 거 아냐.”구언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희원을 바라보았다. 

이 엄청난 고백을 하고 있다는 상황이라기에 그녀는 너무나도 태연한 음성과 눈빛을 했다.

“그 사람도 나 사랑해서 결혼한 거 아니었고.”잠시 침묵이 흘렀다. 

“우리 그냥, 그렇게 만나서 결혼했어.”언제고 풀어야 하는 숙제. 

희원은 책임을 져야 하는 오늘을 지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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