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침대로 와요
서로의 숨소리가 메아리처럼 돌고 도는 연습실.
뱉은 말의 무게를 모르는 것처럼, 그녀는 편안한 자세로 바닥에 앉아있다.
구언은 그녀가 툭 던진 말을 곱씹고 곱씹다가 어지럽다는 듯 이마를 짚으며 간신히 입술을 열었다.
“아. 아아, 권희원. 권희원, 그러니까, 그러니까 지금 네 말은.”……매일매일 오늘이 궁금했고, 매일매일 오늘을 상상했다.
잠에서 깨어날 때, 잠과 멀어질 때.
잠을 청하기 전에, 잠이 막 들기 시작했을 때, 잠을 자는 중간중간ㅡ
결국은 내가 사는 모든 순간ㅡ
궁금했어. 막연히 상상했지.
“사랑 없이, 결혼했다고……?”
내가 내 마음을 털어놓는 그 순간
너는 무슨 말을, 어떤 표정을, 내게 보여줄까.
“맞아. 그 사람하고 나, 사랑 없이 결혼했어.”“어째서, 아니, 아니, 아, 그래. 어째서? 어째서……?”상상에 이런 답을 원한 건 아니었다.
“너도 알다시피 우리가 사랑을 할 시간이나 있었나, 없었지. 그냥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지듯이 만났으니까.”바닥이 하늘 위로 오르는 것처럼 어지럽다.
구언은 말아 쥔 주먹으로 이마를 짚으며 짧은 숨을 토했다.
그녀는 지금 구언이 느끼는 모든 감정을 그대로 지켜주었다. 바라보았고, 낮게 말했다.
“나는 탈출구가 필요했어. 그 사람은 나에게 그런 의미였고, 그 사람에게 내가 그런 의미였고.”너도 잘 알잖아.
“결혼이라는 제도만 필요한 점도 닮았으니 그 사람과 내가 선택을 미룰 이유가 없었지. 서로는 서로에게 최상의 파트너였으니까.”“…….”“약속했어. 사랑만 하지 말자고. 우리가 모든 감정을 다 나눠도 사랑만은 하지 말자고.”“미쳤어? 권희원 너, 결혼이 뭔지 몰라?”“…….”“결혼이 애들 장난이야? 뭐? 사랑을 하지 마? 뭐를 하고 뭐를 안 해? 파트너?”이번엔 그가 득달같이 화를 낸다.
“미쳐도 정도껏 미쳐야지, 인생까지 내던지며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과 결혼이라니! 이게 말이 돼? 지금 제정신이야?”“지금 나 제정신 아니야. 구언아.”“뭐, 뭐라고?”“제정신 아니라고. 제정신일 수가 없다고.”“하…… 진짜 돌아버리겠네…….”구언은 몸을 이리저리 돌리며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이 엄청난 그녀의 고백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당장은 혼란스러웠다.
“하나만 묻자, 권희원. 너 지금 나한테 이런 이야기 해주는 이유는 뭐냐?”서로 죽도록 사랑한다 해도 포기가 될까 말까인데.
행복에 겨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해도 돌아설 수 있을까 말까인데.
사랑을 하지 않는다니.
“나한테 거짓말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냐? 모든 가능성을 전부 다 차단해줘야 하는 거 아니…….”“사랑하게 됐어.”“…….”“내가, 그 사람을.”당사자 없는 고백이 민망한지 그녀가 말끝에 희미한 미소를 매단다.
그녀 앞에 서 있는 그의 발끝은 몇 번이고 움찔거리다가 다시금 멈췄다.
“와, 구언아 있잖아, 그 사람이 좋아지더라. 내가 있잖아, 그렇게 되더라.”“……거짓말.”“거짓말이면 좋겠어. 나도.”희원은 진실을 담은 표정으로 구언을 바라보았다.
“내가 이 이야기를 네게 해준 이유는 너의 솔직함에 대한 나의 답이야.”“안 했어도 돼. 안 했어도 충분히 괜…….”“그래. 너의 고백도 할 필요가 없었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얘기란 없으니까.”그녀는 무릎을 세워 두 팔 안에 가두고 편안하게 웃었다.
잔뜩 토라진 단짝 친구를 달래는 듯한 시선과 말투로, 그녀는 그에게 말했다.
“내가 네 마음을 밟고 가서 이런 벌을 받는구나, 싶어. 그래서 달게 받으려고 노력하는 중이야.”“권희원…….”“이제 여기서 우리가 더 많은 이야기를 섞고 시간을 보내면 안 되겠지? 우리, 그렇게 지내면 안 되잖아. 멋진 동료였으니까.”그녀는 매듭을 지었다.
마치 떠날 시간이 되었다는 것처럼,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네 바람만큼 내가 행복하지 못해서 미안해. 나는 지금부터 그 사람 마음잡으러 달려갈 거야. 최선을 다해봐야지.”“이 멍청아…….”“가볼게. 요즘 자존감이 바닥이라 충전이 좀 필요하거든. 먼저 간다.”희원은 가방을 들고 손을 흔들었다.
마치 지금 돌아서면 영영 끝인 사람처럼, 모든 행동에 의미가 부여되었다.
“힘들면 찾아와! 권희원!” 그는 옷자락을 붙잡듯 목청을 높였다.
마른 주먹을 쥐었다. 그러곤 마음에게 청했다.
……저 발걸음, 따라가지 말자.
“내가 뭐라도! 뭐라도 해줄 수 있는 게 있을 수도 있잖아!”“말만 들어도 든든하다! 갈게!” 그림자마저 보내주자.
“양파…… 샀고, 달걀 샀고…… 휴지 샀고…….”희원은 집 앞 마트에 들러 저녁 찬거리를 둘러보고 있었다.
생선이 싱싱해 보이는데 사다가 구워볼까? 두부를 사다가 찌개를 끓일까?
흠. 카트를 끌며 이것저것을 바라보다가 희원은 멈춰 섰다.
……그토록 원하던 자유와는 다소 먼 인생.
가족에게 헌납하며 인생을 살아온 엄마 같은 삶은 살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자신을 떠올렸다.
“나쁘진 않네. 같이 먹을 밥을 준비한다는 게.”부정적이었던 시선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 지워졌음에 희원은 피식, 웃었다.
예전의 자신이라면 이런 모습,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다.
“호박을 좀 살까…… 저번에 보니까 호박전 잘 먹던데.”희원이 야채 코너에서 이것저것 들여다보는 때였다.
전화가 걸려와 희원은 휴대폰을 들었다.
“여보세요?”ㅡ아직 바쁩니까?지환이다.
“바쁘긴 하죠. 반찬거리 사러 마트 왔거든요.”ㅡ그래요? 집 앞?“네. 집 앞요.”희원은 천천히 걸어가며 파프리카를 집어 들었다.
샐러드를 좀 해볼까? 괜찮을 것 같은데?
“서지환 씨는 어디예요? 오늘도 늦어요?”아스파라거스를 좀 굽고, 그러면 베이컨을…… 내일 아침은 간단하게…….
ㅡ전화 안 했으면 큰일 날 뻔했네요. 장바구니에 담은 것도 어쩌면 이렇게 똑같은지.“네?”희원은 고개를 들었다. 어느덧 자신의 앞에 지환이 서 있다.
자신의 카트와 마주 댄 그의 카트를 내려다보았다.
“아…….”
양파, 달걀, 휴지가 들어 있는 그의 카트를 내려다본 희원은 다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지환은 휴대폰을 내리며 머쓱하게 웃었다.
그녀 또한 천천히 휴대폰을 내렸다.
……하다못해 이런 만남마저 운명처럼 여겨져, 당신은 점점 더 특별해져 간다.
“내건 제자리에 정리하고 올게요. 여기서 기다려요.”여기서 기다리란 말이 자꾸만 소중하게 들려, 당신은 점점 더 내 안에 자리한다.
그가 돌아서서 카트를 밀며 멀어진다.
희원은 아랫입술을 꾹 깨물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집 앞, 마트, 야채 코너 앞에 서서ㅡ
내가 지금 당신을 어떻게 여기고 있는지 다시 한번 절실하게 실감한다.
“헤어 나올 수가 없겠구나…….”당신이 나를 제자리로 돌려놓을 수 있을까.
내가 당신을 나의 곁으로 데려올 수 있을까.
애석하지만 어떤 순간도 상상이 되지 못했다.
“서지환 씨는 어떤 여자가 좋아요?”“어떤 여자?”“이상형은 있을 거 아녜요. 이상형.”함께 식탁에 앉아, 희원은 능청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뭐,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 아니고요. 라는 눈빛으로 그의 답을 기다렸다.
“이상형 없는데요.”아, 진짜 이 사람이.
“있었을 거 아녜요. 예전에는 적어도. 어? 뭐, 그러니까 실패 전.”실패 전엔 있었을 거 아니야, 이 답답한 사람아.
과거형이라도 좋으니까 뭐라도 말해보란 말이에요.
“이상형? 글쎄요, 과거의 이상형이라…….”지환은 젓가락질을 멈췄다.
희원은 무심하게 듣고 있다는 것처럼, 분주하게 젓가락을 움직였다.
“일단 코가 예쁘고 눈이 예쁘고. 입술은 붉고.”지환의 시선이 자신에게 닿아 있음을 느낀 희원은 가슴이 두근거려 꿀꺽 밥을 삼키고 말았다.
“긴 머리는 쓸어 넘기면 부드러울 것 같은?”마치 자신의 이목구비를 뜯어보며 서술하는 것만 같아, 맥박은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키는 몇입니까?”“저요? 165요.”“좋네. 키는 165 정도.”심장이 피를 쥐어짜듯 오그라들었다가 확장한다.
희원은 애먼 눈길만 이리저리 옮기며 젓가락질을 했다. 뭘 먹고 있는지도 사실은 모르겠다.
“자신의 일을 사랑했으면 좋겠고, 열정적이라면 더 좋겠고.”오, 맙소사.
내가 당신의 이상형이야?
“결정적으로 이게 제일 중요한데.”짝사랑 종료, 어쩌면 생각보다 빠르겠는데?
“나를 좋아하지 않은 여자가 이상형입니다.”“아, 진짜.”탁. 희원은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눈에 쌍심지를 켰다.
농락당하고 있다. 농락당하고 있어.
“말하고 나니 권희원 씨가 내 이상형이네, 이제 보니까.”“됐어요! 별꼴이야, 진짜!”틀렸어, 이 사람아!
나는 당신을 좋아한다고! 이 눈치 없는 남자야!
으휴. 희원은 입술을 삐죽거리며 나물 반찬을 집었다.
지환은 멀뚱멀뚱 희원을 바라보다가 다시 젓가락을 들었다.
“그러는 권희원 씨는 이상형이 어떤데요?”“나요? 나는 뭐.”나야말로 당신이 이상형일세.
알아? 아냐고, 이 양반아.
“우리 아빠 같은 사람이 이상형이에요.”“아…… 장인어른…….”지환은 희원의 아버지를 떠올렸다.
뵙기에 굉장히 무뚝뚝하고 무심해 보이시던데.
표현이 풍부하지 않으시고 늘 뒷짐만 지고 계시던데.
취향이 그런 쪽인가…… 츤데레…….
“몰랐네요. 장인어른이 이상형인 줄은.”“우리 아빠는 변하지 않거든요.”희원은 하리의 밥공기 위로 반찬을 챙겨주며 웃었다.
“변하지 않는 것들이 좋아요. 사람도 그렇고, 사물도 그렇고.”“뭔가 낭만이 있는데요. 변하지 않는 것들.”……당신이 그랬으면 좋겠다.
희원은 자신의 말을 곱씹는 지환을 바라보다가 눈썹을 추켜 올렸다.
전력을 다해 이 남자를 좋아해 볼 생각이지만,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없는 지금.
“밥 다 먹었으면 서지환 씨가 먼저 씻어요.”“설거지하겠습니다. 염치도 없이 얻어먹고 나 몰라라 하면 되겠습니까?”“먼저 씻어요. 뽀득뽀득하게 그릇을 닦고 싶어졌거든요.”다가가도 될까, 가까이 가도 될까, 나는 아직 알 수 없지만ㅡ
당신이 내 앞에 마주 앉아 있는 지금의 풍경이,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가급적 오랫동안.
“그래도 설거지는 내가 합니다. 밥을 한 사람이 있으면 뒤처리를 하는 사람도 있어…….”“서지환 씨. 우리 너무 이해타산 생각하며 지내지 말죠.” 숨 쉬는 오랫동안.
“너무 남 같잖아요. 그런 건 또 싫으니까요.”“……아.”희원은 어서 일어나라며 손짓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이런 것들.
“일어나요. 설거지하고 과일 줄게요.”급한 마음 갖지 않으며 조금씩 조금씩, 당신의 세상을 열어가는 것.
나의 마음을 강요하지 말 것. 그가 몰라준대도 당연한 일이니 서운해하지 말 것.
오랫동안 당신과 내가, 함께할 수 있도록.
잘 준비를 마친 희원이 침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바닥에서 자려고 지환이 이불을 꺼내고 있다.
희원은 화장대에 앉아 머리를 둘러놓은 수건을 끌렀다.
“바닥에서 자는 거 안 불편해요?”“군 생활 때 생각나네요. 그때보단 푹신하니 그걸로 버틸 만합니다.”군 생활까지 떠올리며 버틴다고 하니 희원은 헛웃음을 흘렸다.
스킨을 덜어내 얼굴 구석구석을 닦아내고, 크림을 듬뿍 올렸다.
그사이 지환은 척척 이불을 펴고는 자리에 눕는다.
으어어어…… 앓는 소리가 그의 입술을 통해 저절로 튀어나온다.
“어흐, 아저씨 같아.”“아저씨 같은 게 아니라 아저씨 맞습니다. 잊었나? 날 아저씨로 만든 게 누군데?”으자자자, 지환이 이리저리 뒤척이며 편안한 자세를 찾아간다.
희원은 거울 뒤로 보이는 지환을 바라보다가 연신 미소를 지었다.
시간과 반복이란 이토록 무서운 거다.
이제는 그와 한 방에 있어도 어색하지 않으니까.
희원은 머리를 말리며 거울로 계속 그를 바라보았다.
편안한 자세를 잡았는지, 지환이 자신을 바라본다.
……거울로 시선이 부딪친다.
그녀는 연신 손을 움직이며 머리를 말렸고 시선은 거울로 반사되는 그에게 닿았다.
어쩐 일인지 그도 시선을 피하지 않고 바라본다.
아직 다 마르지 않은 머리를 두고 그녀는 드라이기를 껐다.
“왜 그러고 봐요? 머리 말리는 거 처음 봐요?”“내가 봤을 때 권희원 씨가 나를 먼저 보고 있었습니다.”“그거야 서지환 씨가 날 볼 것 같으니까 내가 봤겠죠. 왜 봤냐구요.”나한테 관심 있어요? 희원은 묻고 싶은 말을 꾹 참았다.
허, 지환은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쳐다보니까 얼떨결에 본건데 이젠 그거 가지고도 뭐라고 하는 겁니까?”“아니 난 또 예뻐서 봤습니다. 여신 같아서 봤습니다. 이런 대답이 돌아올 줄 알았는데, 돌아오는 답변이 싱겁네요, 오늘은 좀.”“허어.”허어어어. 지환은 긴 탄식을 하며 희원을 다시 바라보았다.
점점 더 뻔뻔해지는 희원의 농담을 들으며, 지환은 탄식했다.
“누가 권희원 씨를 이렇게 만들었나. 예쁘다고 칭찬하면 눈꼬리를 올리던 게 엊그제 같은데.”“잊었어요? 누가 날 이렇게 만들었는지?”“혹시 내가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설마, 진짜 내가?”“그럼 아닐까 봐?”쳇. 희원은 다시 드라이기를 켰다.
요즘 따라 예쁘다는 말도 잘 안 해주고, 귀엽다는 말도 안 해주고, 예전엔 무슨 얘기만 해도 그런 말로 농담하더니.
듣기 싫을 땐 진절머리가 나게 하더니,
막상 듣고 싶을 땐 왜 안 해주는 거요?!
“밀당하는 것 좀 봐…….”“뭐라고요?”위이이잉…… 희원은 더욱 드라이기 바람을 크게 했다.
바닥에 누워서 휴대폰을 바라보는 그는, 자신을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게 분명했다.
아. 갑자기 열받는다.
과감하고 능숙한 건 도대체 언제쯤 보여줄 건데? 그래서?
“아, 권희원 씨.”보긴 볼 수 있는 거냐?!
“이봐요, 권희원 씨.”“소심하고 서툰 거 아냐? 혹시?”“뭐?”위이이잉…… 그녀는 드라이기에 머리를 말리다가 뚝, 껐다.
그러곤 거울로 보이는 그를 응시했다.
지환은 눈이 마주치자 할 말이 있다는 것처럼 팔을 들어 그녀 침대를 툭툭 쳤다.
“이거 침대 어디 겁니까?”“그건 왜요?”“누워보니 좋던데, 나도 하나 장만할까 해서요.”“허.”허, 진짜 완전 대박적으로 충격.
희원은 눈꼬리를 날카롭게 올렸다.
이 침대가 좋아서 지도 사겠단다.
지 혼자 누워 자겠다고.
“집에 있는 침대가 오래돼서 매트리스를 갈긴 해야 하거든요. 이참에 그냥 싹 바꾸는 게 좋을 것 같아서.”“헐.”하…… 진짜…… 하…… 열받아…….
눈꼬리를 잔뜩 올리고 바라보니 어쩜 저렇게 해맑을 수 있는지 모르겠다.
침대가 마음에 들었는지 툭툭 치며 무척이나 그는 해맑게 물어왔다.
“링크 보내드릴게요! 링크! 보내드려요, 내가!”“오, 고마워요.”아아…… 끓는다…….
휴, 희원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드라이기를 정리했다.
“서지환 씨는 이 집 나가는 날만 학수고대하나 봐요?”“무슨 말을 그렇게 섭섭하게 합니까? 침대 어디서 샀냐고 물어본 게 학수고대로 이어지나?”“그렇게 좋으면 당장 누워서 자면 되겠네.”“……뭐라?”희원은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허리를 일으켰다.
완벽하게 마르지 않은 머리칼에서 그녀가 좋아하는 꽃향기가 났다.
“오늘부터 누워서 자요. 침대에서.”“침대에서 자라는 말입니까?”“네. 침대에서. 하리가 언제 또 우리 방에 들어올지 모르고.”……어느덧 호칭은 그녀의 방에서 우리 방이 되었다.
“하리가 불시에 또 들어왔는데 서지환 씨가 바닥에서 자고 있으면 이상하잖아요.”“그러니까 권희원 씨의 말은 바꿔 자자는 게 아니라 같이…….”“응. 같이. 난 바닥 잠은 질색이거든요.”희원은 두근거리는 심장을 잠시 모르는 척하기로 한다.
지환의 눈동자는 이미 지진이 났고, 희원은 아무렇지 않은 척 그를 바라보았다.
“보다시피 침대는 넓고 나는 잠버릇이 없죠. 서지환 씨에게 옆자리 대여는 어렵지 않을 것 같은데.”말해봐요, 서지환 씨.
“올라와서 자요. 편안하게. 쿨하게. 사심 없이.”자신, 없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