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Go Back
그녀의 침실은 무척이나 심플했고 단출했다.
딱히 시선 둘 곳도 많지 않은 공간 안에서 그녀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자니ㅡ
한 침대를 쓰자고 말하고 있는, 그녀는 무척이나 침착해 보였다.
“어째 날이 가면 갈수록 권희원 씨의 농담이 발전합니다? 이젠 장르마저 불문하네요?”“농담 아닌데. 서지환 씨 입장에선 멜로로 들리는지 에로로 들리는지 잘 모르겠지만, 지금 내 장르는 다큐고요.”“그래서, 한 침대를 쓰자는 말입니까?”“한 방이나 한 침대나. 내 입장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은데요.”“난 다릅니다. 달라도 무척 다르다고요.”“올라와서 자요. 바닥 불편하잖아요.”“허.”허, 순진한 건지 담이 좋은 건지 모르겠네.
지환은 희원의 권유에 당황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남녀가 한 침대를 쓴다니.
그게 무슨 말인지, 지금 모르고 하는 건가?
“권희원 씨. 배려는 고맙지만 내가 수락할 수 있는 범위는 아닌 것 같네요.”“만취 상태로도 옆에 누워 아무 일 없이 잠만 잤는데, 설마하니 맨정신에 무슨 일이라도 나겠어요?”“나도 남자입니다.”“그래서요?”“권희원 씨는 여자이고. 우리는 성인이고, 건강하고.”“네네. 그래서요.”허. 이 여자 보게.
지환은 무슨 말을 해도 그게 뭐 대수냐는 표정을 짓고 있는 희원을 바라보았다.
뭐지, 신종 고문인가.
내가 오늘 또 뭘 잘못했나……?
“남들 성교육 받을 때 엎드려 잤습니까? 아니면 그날 결석했나?”“불편하니 침대에서 자라는데 무슨 성교육 얘기까지 나와요? 혼자 지금 진도를 어디까지 빼고 있는 거예요.”이 남자가 진짜, 그렇게까지 정색할 일이야 이게?
희원은 민망함에 입술을 삐죽거렸다.
이 방에 들어와 무턱대고 자던 날처럼 아무 생각 없이 올라와 자면 또 어때서?
좋다고 올라와 잘 줄 알았더니, 눈에 쌍심지까지 켜고 있네?
“서지환 씨가 바닥에서 자는 거, 내내 불편했다고요. 아침마다 끙끙 앓는 소리 내며 일어나는 것도 보기 싫고.”“밤새 끙끙 앓고 싶진 않단 말입니다.”“뭐요?”“하, 진짜 답답하네. 권희원 씨, 내가 진짜 걱정돼서 하는 말인데 나 믿지 마요. 뭐 이렇게까지 믿어, 사람 불안하게.”“서지환 씨야말로 뭘 이렇게까지 정색해요. 침대 넓으니 한쪽에서 자라는데, 그렇게 자신 없어요?”“없습니다. 자신.”“…….”“없으니까 그냥 내버려둬요. 애먼 배려로 사람 더 괴롭히지 말고.”“……진짜, 무슨 말을 못 하겠네. 그럼 알아서 해요.”희원은 화들짝 놀란 얼굴을 하고는 다시 화장대로 돌아앉았다.
화장대 여기저기를 정리하며 희원은 고개를 수그리고 엷게 웃었다.
……당신이 침대로 편안하게 올라왔다면 조금은 서운할 뻔했다.
날 그만큼 여자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섭섭함이 밀려왔을 테니까.
“내가 여자로 보이긴 보이는 모양이죠. 그렇게 정색하는 걸 보니.”“여자로 보입니다. 보이는 정도가 아니라 예쁘게 생긴 것도 아주 잘 보인다고요.”“그럼 꼬셔보든가. 사람이 입만 살았어.”“아내가 무서울 땐 일찍 자라고 하더군요. 그럼 먼저 자겠습니다. 잘 자요.”그래, 희망은 있는 거다.
당신에게 내가, 여자로 보이는 거니까.
병원에 입원한 딸아이의 치료비를 마련해야 하는 가장은 모든 준비를 마쳤다.
추적이 되지 않는 인터넷 메신저로 초대받은 그는 여권을 준비했고, 비행기 티켓을 수령했다.
가장의 임무는 한국으로 밀수된 금괴를 다시 일본으로 넘기는 것으로 최대한 많은 양을 몸에 지니고, 세관의 눈을 피하면 되는 일이었다.
“다녀올게, 여보.”가장은 간단하게 꾸린 짐을 들며 아내를 바라보았다.
“자기, 정말 돈 구할 수 있는 거지?”“그렇다니까. 걱정 말고 기다리고 있어. 내가 도착해서 전화할게.”가장은 아내에게조차 사실을 털어놓지 못했다.
일본에 사는 오랜 친구가 있는데, 돈을 빌려줄 테니 일본으로 들어오라고 했다며 그는 아내에게 거짓말을 했다.
가장은 신발을 신고 아내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몇 달 사이 몇 년은 늙어버린 듯한 아내의 얼굴을 바라보자니 울컥하는 뜨거움이 울대에 고여든다.
“여보, 조금만 더 힘내. 다 괜찮아질 거야.”“내가 힘든 게 뭐 있어. 당신하고 우리 애가 힘들어서 그렇지, 나는 괜찮아.”“밥 좀 먹어. 있는 거라도 차려서 끼니 거르지 말고 먹어. 당신부터 힘을 내야지.” 부부는 무엇을 예감했는지 좀처럼 서로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울컥하는 마음에 급히 밖을 나서려던 가장은 현관문 아래 놓여 있는 아이와 아내의 신발을 보고는 멈칫, 했다.
얼마나 뛰어놀았는지 닳아버린 아이의 신발과ㅡ
“…….”얼마나 오래 신었는지 닳아버린 아내의 신발ㅡ
닳아버린 시간이나마 함께여서 행복했던 가족의 시간이 주마등처럼 가장의 머리를 스쳐 지나간다.
어쩌면 다시는 못 볼 것 같은 두 켤레의 신발을 내려다보다가, 이러면 안 되지, 이렇게 나약해지면 안 되지, 가장은 다시금 고개를 들었다.
“다녀올게.”“도착해서 연락 줘요. 조심히 다녀오고.”가장은 무너지면 안 된다.
가장은 영혼을 팔아서라도 가족을 지킬 준비가 되어 있었다.
오늘부터 누워서 자요. 침대에서.
“하, 도대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 거야…….”지환은 연거푸 어제 그녀가 제게 한 말을 떠올리다가 중얼거렸다.
아무리 편하다, 사심 없다 하기로 한 침대를 쓰자니.
한 침대를 쓰자니.
한 침대를! 나란히! 옘병! 나란히!
내가 동성의 친구 정도로 보이나?
그게 아니면 아예 성별이 없는 제3의 생물체로 보이나?
해탈의 경지에 이렀다고 인식한 건 아닐까?
그런 게 아니라면, 말이 되나?
“해도 해도 너무하네. 그 정도로 내가 남자로 안 보인다, 이거지.”희원은 요즘 통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시선이 느껴져 바라보면 관찰하듯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한마디를 하면 열 마디로 공격해오곤 했는데,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분도 되질 않았다.
그녀가 헷갈린다던 말들은 이런 것이었을까.
그러다 문득 지환은 달력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시간은 흘러 하리가 그녀의 집을 떠날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날씨가 부쩍 추워지면서 겨울이 코앞으로 여겨졌다.
“진짜로 얼마 안 남았네.”그녀와 함께하는 시간, 얼마 남지 않았다.
이 시간이 지나고 나면 서로는 평소의 생활로 돌아가리라.
한편으론 아쉬웠고, 한편으론 빨리 돌아가야 한다고 여겼다.
그녀의 집에서 오래 머문다는 것은 자신에게 좋을 게 없어 보였다.
어쩐지, 예감이 그러했다.
“서검, 나 들어간다.”“그래. 들어와.”생각이 접힌다.
문을 열고 정윤이 들어서자 지환은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녀는 소파에 앉았고, 지환은 책상을 돌아 나와 정윤과 마주 앉았다.
“오늘은 먹을 거 없어. 나 오늘 좀 바빴거든.”“누가 뭐라고 했냐? 싱겁긴.” 오자마자 먹을 게 없단다.
노상 먹을 걸 들고 오던 정윤이 두 손을 들어 보이며 빈손이라 하자 지환은 뚱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수사 인물을 너무 많이 둬서 속도가 안 붙어. 밀착 수사해야 하는데 인력도 부족하고.”“우리가 남들에게 손 벌릴 입장은 아니잖아. 할 수 없지.”“차민규 근황이야. 요즘 자숙하는 듯해. 움직임도 거의 없고.”정윤은 들고 온 파일을 내렸다.
백인호 의원의 고모 아들.
정윤은 차민규의 행적을 파악하는 데 집중했다.
“조금 의심스러운 구간이 있어.”“뭔데.”“고모가 결혼한 사람이 예전 백인호 의원 비서실장 삼촌이더라.”“……그래?”“같이 사는 것 같지는 않아. 카드 내역서를 살펴보니 각자 주거지역과 사용 패턴이 달라.”“결국 필요에 의한 결혼인가.”“그럴지도 모르지.”필요에 의한 결혼.
지환은 본인이 뱉은 말에 본인의 사정이 떠올라 미간을 좁혔다.
‘백인호’와 관련된 업무를 처리하다 보면, 사실상 웃는 얼굴을 할 수가 없다.
“등본상 거주지엔 거주를 하지 않더라고. 최저 관리비만 납부하고 있는 상황이야.”“출입국 내역은 살펴봤어?”“살펴봤지. 한 달에 세 번 정도.”“홍콩발?”“응. 홍콩발. 그중 두어 번은 일본.”……심증은 완벽해져간다.
지환은 가만히 생각에 잠긴 듯하다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확증이 필요한데. 대포폰을 수거할 수 있다거나.”“압수 수사를 하지 않는 이상은 현재로서 힘들지.”“다른 쪽으로는…… 뭐가 없을까?”응? 정윤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환은 턱을 문지르며 입을 열었다.
“그쪽으로 선상에 올려놓기가 힘들면 작은 구실을 찾아서, 일단 이쪽과 연관 짓지 않은 선에서.”“아. 음, 찾아볼게.”그런 방법이 있었다.
“차민규라면 가능할 수도 있어. 음주로 면허 취소된 지 얼마 안 됐거든. 소액이지만 재산세 체납 중이고.”“괜찮네. 그쪽으로 한번 잡아끌어보자.”“오케이.”차민규를 어떻게든 잡아야 한다. 밀수 과정에 빈틈이 없다면 다른 일상생활을 뒤져서라도.
법망에 올려놓아야 다음을 기약할 수 있다.
“너…… 이 수사 계속해도 되는 거야?”정윤은 근심을 담아 물었다.
지환은 그제야 그녀를 바라보았다.
“무슨 말이야.”“내내 저기압이잖아. 그것도 몹시.”자신의 표정이 무척 굳었음을 깨달은 지환은 힘을 뺀 채 눈을 감았다가 떴다.
이미 늦은 일이다.
“좀 잔인한 것 같은데. 이 수사 네가 계속하는 거.”“일터에선 일만 하자며. 괜찮다.”“일터가 아니라면, 괜찮지 않은 모양이네.”“차검.”지환은 그녀를 낮게 불렀다.
다음에 이어질 말을 예상한 정윤은 급히 손사래를 쳤다.
“걱정돼서 그래, 걱정돼서. 내가 모르는 것도 아니고.”“…….”“알았어. 나 오지랖 인정. 오지랖 부리는 차정윤은 이만 퇴장할게.”“안 괜찮아도 이젠 별 수 없는 거, 아냐?”일어서던 정윤은 자리에 멈췄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지환을 내려다보았다.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해. 끝은 볼 수 있으니까.”웃음기가 사라진 녀석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자니ㅡ
세상에 섞이지 못하고 물과 기름처럼 분리되어 살던 녀석의 지난날이 떠오른다.
웃지 않았고, 말이 없었다.
“그래. 끝은 보겠다. 그럼 좀 나을 수도 있겠네, 차라리.”정윤은 문득 궁금해졌다.
권희원 씨도, 녀석의 이런 표정을 알고 있을까?
녀석이 원래 어떤 사람이었는지, 얼마나 차가운 사람이었는지, 그녀는 알고 있을까?
“서검 표정 좀 풀어. 한동안 잘 웃는다 했더니, 무섭다 너.”“…….”“아, 그리고 지금 세관에서 금괴 밀수 건으로 현행범 긴급 체포했다고 해. 이송 중이야.”“아까 들었다. 가.”“알았어.”이런 녀석의 진짜 모습을, 그녀는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좋아요를 또 눌렀네.”희원은 자신의 SNS를 살피다가 중얼거렸다.
자신이 사진을 올릴 때마다, 희주가 방문해서 하트를 눌러 놓았다.
때때로 먼저 메시지가 오더니ㅡ
“내일 점심 먹자고 했지, 장소가 어디더라.”내일은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한국무용의 발전에 도움을 주고 싶다며, 자신이 초대받은 세미나에 함께 가자더라.
“호의가 고맙긴 한데 어째 좀 부담스럽다?”딱히 거절할 이유가 없는 희원은 약속을 승낙했다.
……모두가 떠난 연습실.
희원은 연습실 뒷정리를 하고 밖을 나섰다.
다람쥐 쳇바퀴 굴러가는 것 같은 시간의 요즈음, 곧장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일주일도 안 남았다, 일주일도…….”그가 떠나면 뭘 하지.
앞으로 나의 삶은 어떻게 되는 거지.
희원은 그와 함께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상기하며 무겁게 발걸음을 옮겼다.
“전화나 해볼까, 많이 늦나?”그가 생각난 김에 전화를 걸었다.
난 이제 연습이 끝났다. 집으로 돌아갈 거다. 오늘도 늦어요? 그럼 먼저 저녁 먹을까요?
이렇듯 소소하고, 시시한 이야기들을 나누려고.
ㅡ네. 서지환입니다.무거운 목소리가 들린다.
희원은 걸음을 우뚝 멈췄다.
“아, 네, 저예요. 희원이.”ㅡ네. “아…… 바쁘죠.”ㅡ네. 조사 중이라.“아아, 미안요. 끊어요.”ㅡ그럼 끊겠습니다. “네! 네! 끊…….”띠리릭, 채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전화가 끊긴다.
희원은 휴대폰을 내려다보며 긴 탄식을 흘렸다.
“뭐야, 얼마나 바쁘면 전화를 이렇게 끊어.”쳇. 그녀는 내심 서운했다.
그가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 종잡을 수는 없었지만,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냉정한 음성이 서러울 정도로 싫었다.
“이해하자. 이해하자. 그래, 이해하자, 권희원.”그녀는 발걸음을 다시 옮겼다.
주차되어 있는 자동차를 찾는데, 전화가 걸려온다.
“아…….”그녀는 휴대폰을 내려다보다가 급히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그의 전화였다.
검찰청으로 이송된 사내는 아이의 치료비를 목적으로 금괴 밀수에 가담했다고 한다.
털어봐야 나올 것이 별로 없는 한 집안의 가장과 마주 앉아, 지환은 한참이나 가장을 응시했다.
가장에게 무엇을 물어도, 가장은 ‘모른다’로 일관했다.
“조언 드리자면 모른다는 것이 죄를 덜어주지 않습니다.”앵무새 같은 말만 반복하니, 지환은 중얼거리며 관자놀이를 짚었다.
가장은 고개만 수그린 채 여전히 묵묵부답이다.
“범법인 걸 알면 멈췄어야죠. 그것도 모르진 않았을 것 아닙니까.”“저…… 검사님은 결혼을 하셨습니까?”가장은 느리게 입술을 열었다.
“했습니다.”지환은 희원을 떠올렸다.
“아이는 있으신지요?”“없습니다.”“그렇군요.”가장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며 헛웃음을 흘렸다.
뭐에 홀렸다가 깨어난 것처럼, 모든 것은 부질없게 여겨졌다.
“내 새끼가 저러고 아픈데 당장 돈을 구할 곳이 마땅치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명함을 발견했고, 장기라도 떼어가려면 떼어가라는 심정으로 전화를 했지요.”“…….”“가족을 지켜야 했습니다. 아내가 너무 힘들어하니까요. 아이를 살려야 하고, 내 가족을 내가 지켜야 하니까…….”“…….”“그런 제가 뭘 할 수 있었겠습니까? 선택의 여지라는 게, 있기는 했는지요?”“그런 것들이 범죄의 이유가 될 순 없습니다.”“범죄자 아비보다, 무능한 아비가 더 나쁜 법입니다.” “…….”가장이 읊조리듯 중얼거리자 지환은 잠시 옆으로 고개를 돌려 증거물 사진을 바라보았다.
가장이 일본으로 가지고 나가려던 금괴와 가장의 주머니에서 나온 물품들.
담배, 라이터, 낡고 허름한 지갑.
휴대폰.
“전두용 씨는 현재 특정범죄 가중처벌법상 관세 및 관세법 위반. 그리고 외국환거래법 위반. 정부에서 단속 강화를 지시했기 때문에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번호가 맞지 않았을,
그래서 구겨버렸을 한 장의 복권.
“그 사람들이 큰돈을 벌 수 있을 거라고 하던가요. 운반비는 그리 크지 않을 건데.”“……몰랐습니다. 한 달에도 몇 번씩 오가고 해야 하는 줄은.”결국 사내는 한 푼의 돈도 수중에 남기지 못한 채 범죄자가 되었다.
지환은 구겨진 복권에서 좀처럼 시선을 떼지 못했다.
가장의 모든 상황이, 그 하나에 담겨 있는 것만 같았다.
“협조하시죠.” 직업에 대한 회의는, 이런 곳에서 시작했다.
“협조를 하셔야 최악의 상황은 면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최선의 결과를 이끌어낼 수도 있겠고.”“최선의…… 결과요……?”잡아야 할 인간들은 활개를 치고 다니는데, 명함을 로또처럼 받아들었을 한 집안의 가장은 전과를 얻게 생겼다.
서글픈 현실이다.
“십 분만 쉽시다. 담배 한 대 태우세요.”“아…… 그래도 될지…….”“태우세요. 괜찮으니까.”지환은 계장에게 받아온 담배와 라이터를 내밀고는 휴대폰을 들고 나섰다. 그녀에게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가장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고 싶었고, 조금 전 야멸차게 끊어버린 전화가 마음에 걸리기도 했다.
ㅡ여보세요?“나예요. 아까는 일이 좀 있어서 전화 받기가 힘들어서.”누군가는 사력을 다해 지키려는 가정, 가족.
ㅡ그랬구나. 바쁜 것 같았어요.삶의 원동력, 울타리.
“연습 끝났습니까?”ㅡ네. 이제 막 끝났어요.우리는, 얼마나 서로를 지키고 있는 걸까.
“잠깐 이쪽으로 올래요? 난 오늘 집에 못 들어갈 것 같은데, 괜찮으면 밥이라도 먹읍시다.”ㅡ아뇨. 하리 때문에 들어가 봐야죠. 바쁘다면서요.“그래요. 그럼 조심히 들어가요.”ㅡ저기, 지환 씨.우리는, 얼마나 서로를 지키고 싶어하는 걸까.
“말해요. 듣고 있으니까.”지환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유리창 밖을 바라보았다.
조사실 안에는 당장 내일이 암담한 어느 한 집안의 가장이 앉아 있고ㅡ
ㅡ힘내요. 어쩐지 지쳐 보이는데.수화기 너머엔 나의 목소리만으로 간단하게 기분을 간파하는 나의 아내가 있다.
“그런 거 아닙니다. 하지만 힘낼게요.”지환은 뜨끔하는 헛웃음을 토했다.
더는 낯이 뜨거워 통화를 이어가기가 어렵다고 느껴졌을 때쯤ㅡ
ㅡ좋아해요. 지환 씨.뜻밖의 말이 수화기 너머 들려왔다.
ㅡ내가 진심으로 좋아하게 됐어요. 서지환 씨를.너무 길어서 끝은 있을까 했던, 그런 날에도 어둠은 깔렸다.
그녀 목소리와 함께 밤이 찾아왔다.
그는 말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