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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그래 그렇게 (50/98)

50. 그래 그렇게

“어디 보자…… 몇 시나 되었나…….”지환은 시간을 확인하려고 휴대폰을 들었다. 

그 모습을 바라본 최 계장은 탄식을 터트렸다. 

“검사님, 아직 5분도 지나지 않았습니다. 조금 전에도 시간 확인하셨잖습니까?”“아아, 그랬죠. 시간 되게 안 가네요, 오늘따라.”지환은 한시도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들썩거렸다. 

사무실 앞으로 오겠다던 희원의 말을 듣고 난 이후로는 뭘 해도 시간이 가지 않는 경험을 하고 있는 중이다. 

이유 없이 실실 웃음이 나기도 했다. 

“퇴근 후에 약속 있으신 모양입니다, 검사님.”“네네. 약속이 있어서요. 칼퇴 해야 하는데 말이죠.”“약속이라면 사모님과 데이트라도?”“어? 어떻게 아셨습니까? 아니, 제가 이렇게 또 팔이 부러졌다고 굳이 셔틀을 해주겠다고 하지 뭡니까. 본인도 바쁘면서.”지환은 굳이 묻지 않은 이야기까지 꺼내며 너스레를 떨었다. 

“괜찮다는데도 굳이ㅡ 오겠다고. 부러진 팔로 일을 하려니 얼마나 힘들겠냐며,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아주 지극 정성이에요, 와이프가.”“아아, 그러십니까?”“예예. 그렇습니다.”지환은 저도 모르게 싱글벙글 웃으며 답했고, 최 계장은 미소를 머금은 채 다른 서류를 열었다. 

“이래서 다들 신혼, 신혼 하나 봐요. 우리 검사님이 저렇게 좋아하실 줄 누가 알았겠어요?”이야기를 듣던 사무관이 참견하자 다른 사무관이 받아쳤다. 

“맞아요. 매주 선보러 다니시며 개인 명함 만들어두실 때가 엊그제 같은데. 너무 보기 좋네요, 검사님.”“다들 결혼하세요. 다른 인생이 기다리고 있습니다.”“네네. 새겨 듣겠습니다아아.”최 계장 외엔 미혼인 사무관들은 지환의 결혼 종용에 대답하며 웃음을 터트렸다. 

팔이 부러져도 와이프 생각하며 온종일 저러고 웃고 다니니. 검사님이 저렇게 변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이제 몇 시나 되었나…….”지환은 다시 휴대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옘병, 이제 막 3분이 지났을 뿐이다. 

아아, 진짜 시간 안 간다. 

그나저나 만나면 뭐를 한담. 그냥 집으로 돌아가긴 아쉬운데.

……흠. 지환은 긴 숨을 내쉬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 보니 결혼 후 밖에서 데이트다운 데이트를 해본 기억이 없다. 

처음엔 따로 살아서, 서로에게 관심이 없어서.

다음엔 하리를 돌보느라. 그 뒤론 다시금 멀어져서. 

“진짜 한 번도 없네.”기껏해야 늦은 저녁 치킨에 맥주 한 잔 마셔본 일이 전부라는 것을 깨달은 지환은 갑자기 마음이 급해졌다.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어디 근사한 식당이라도 예약해서 식사를 해야겠다. 

근사한 식당이라면 줄줄 꿰고 있을 만큼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이게 다 수도 없이 보아온 선 자리 덕분이다.

피식 웃음이 흘렀다. 

이렇게 써먹으려고 그렇게 선을 봤나 보다, 하는 마음에.

지환은 그중 기억에 남는 몇 곳을 정리했다. 

가장 분위기가 좋았던 곳, 식사가 훌륭했던 곳, 뷰가 좋았던 곳.

……문득 어제, 데니스 한이 떠오른다. 

“그렇게 비싼 와인을…… 잘도…….”구언이 말해준 대로 와인은 헉, 소리가 날 만큼 비쌌다. 

그런 비싼 와인을 남의 와이프에게 사는 저의란 무엇인가?

너만 살 줄 알아? 나도 살 줄 알아…….

흥, 지환은 내친김에 고급 와인도 함께 알아보기로 한다. 

데니스 한의 얼굴을 지속적으로 떠올리며 지환은 눈을 가늘게 떴다. 

묘한 오기가 생겨 어제 그 식사 자리보다 무조건 더 좋은 곳으로.

무조건 더, 좋은 음식과 분위기로.

검색을 이어가며 드럽게 잘생긴 데니스 한의 얼굴을 떠올리던 지한은 힐끔, 작은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가만히 바라보다가, 손가락으로 볼을 푹 찔렀다. 

봐라. 나도 이렇게 하면 보조개 들어간다. 너만 있냐? 나도 있다. 

……볼을 힘껏 찌르니 손가락 자국이 남는다. 

애써 보조개처럼 보이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지환은 곧 사라지는 자국에 눈을 더욱 가늘게 떴다. 

그러다가 느낌이 수치스러워 고개를 들어보자 최 계장이 자신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다. 

제길, 없는 보조개 만들다가 들켰다. 

“검사님, 볼에 벌레 물리셨어요? 그럴 땐 십자가로 눌러야 합니다.”“……됐습니다.”휴. 지환은 엄한 행동은 관두기로 한 채 다시 열심히 식당 검색에 나섰다. 

드디어 적당한 곳을 찾았고, 전화로 예약을 하려고 하던 때ㅡ

마침 그녀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지환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휴대폰을 들었다.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자상했고, 당당했다. 

“여보세요? 아아 당신 어디야. 도착했어?”

[한국이 이렇게 발전한 나라인 줄은 미처 몰랐어. 공항이 끝내주더군.]주혁을 만나기 위해 한국으로 입국한 브릭트먼 팩 감독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저녁 식사 자리. 주혁을 만나자마자 브릭트먼 팩 감독은 신세계를 경험했다며 한국에 대한 평을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인터넷 속도는 믿기지 않을 정도야. 거리도 깨끗하고, 완벽해.]이어지는 감독의 극찬에 주혁은 빙그레 미소 지었다. 

감독은 턱을 괴며 그를 바라보았다. 

[데니스, 자네에겐 한국의 피가 흐르지?][그렇지.][하지만 한국 방문은 자네도 처음이잖아. 소감이 어때?][다를 바 없어. 자네와 같은 기분이지.]주혁의 대꾸에 감독은 크게 웃었다. 

사랑하는 내 동료의 나라, 브릭트먼 팩 감독은 주혁과 한국에 나란히 앉아 있음에 감회가 새롭다고 말했다. 

[나는 한국이 아주 마음에 들었어. 음식도 훌륭해. 황홀할 지경이라고.][진정해. 지금 우리가 먹고 있는 건 한식이 아니니까.]스테이크를 주문해 놓고는 한국 음식 칭찬을 이어가니 주혁의 핀잔이 이어진다. 

아무렴 어떠냐며 브릭트먼 팩 감독은 와인을 들었다. 

[언제나 즐겨 마시는 와인이지만 오늘은 더욱 최고야. 한잔하자고.][…….][데니스?][아, 미안. 한잔하지.]멍하니 생각에 잠겼던 주혁은 서둘러 와인잔을 들었다. 

함께한다는 간단한 제스처를 취한 주혁은 홀짝, 와인을 삼켰다. 

머릿속엔 온통 복잡한 생각들이 자리했다. 

죄송해요. 대표님.

아무래도 오늘은 어려울 것 같아요. 

그녀는 잠시의 고민도 없이, 제안을 거절했다. 

주혁은 희원과의 통화 내용을 곱씹다가 미간을 좁혔다. 

‘권희원 씨는 브릭트먼 팩 감독의 명성을 잘 모르는 겁니까?’‘아뇨, 잘 알고 있습니다. 평소 존경하는 분이고요.’‘그런데 어째서…….’‘안타깝지만 남편과의 약속이 있어서요.’당황함은 주혁의 몫이었다. 

일생일대의 기회를 망설임 없이 차버리는 그녀가 이해되지 않았다. 

‘권희원 씨, 고작해야 남편과의 약속으로 이런 기회를 놓칠 수 있습니까? 남편은 집에서도 볼 수 있는 사람인데.’‘집에서도 볼 수 있는 사람을 굳이 밖에서 봐야 할 땐 이유가 있는 거니까요.’‘맙소사, 권희원 씨. 생각 잘 해요. 이런 기회란 흔치 않단 말입니다.’‘알아요. 하지만 남편과의 약속도 제겐 흔치 않은 일이라서요.’주혁은 들고 있던 와인잔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의 거절이란 그의 상식에선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일이었다. 

“말도 안 돼, 어떻게 거절할 수가 있단 건지.”[데니스, 자네 지금 뭐라고 말했어? 한국말 같은데?][아냐. 아무것도.]어떻게 이런 기회를 저버릴 수 있단 말인가? 

기껏해야 남편을 밖에서 만나기 위해? 

고작 그렇고 그런 시시한 이유로, 인생이 바뀔 수도 있는 찬스를 외면한단 말인가?

어째서? 어떻게?

[맞다, 데니스. 아까 소개해주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하지 않았어? 함께 오겠다고?][……오늘은 어려울 것 같아. 선약이 있다고 하더군.][선약? 아아, 그래. 그럴 수 있지. 하지만 데니스 한의 제안을 거절할 만한 선약을 지닌 사람이라니, 그건 좀 놀라운 일인데.]감독의 말에 주혁은 텁텁한 미소를 지었다. 

그가 업계에 발을 들이고 세계적인 사업가로 거듭난 뒤로 처음 맞보는 거절이었다. 

모두는 자신의 주변에 항상 대기 중이었고, 자신과 시선 한 번을 섞기 위해 몸 닳아 했으니까.

이해할 수 없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러지 말고 데니스, 며칠 동안 한국에 있으면서 생긴 일들 좀 말해봐. 오기 전에 괌에도 들렀잖아. 별일 없었어?][일, 있었지.]주혁은 와인을 홀짝였다. 

[요 며칠 동안 고집 세고 어리석은 무용수를 만났어.]호오. 감독은 흥미롭다는 눈빛을 했다. 주혁은 희원을 떠올렸다. 

[진심으로 자신의 분야를 사랑하는 무용수야. 하지만 뭔가 억압되어 있고, 갇혀 있는 느낌도 있고.][자네가 발굴하고 싶은 게로군. 혹은 내면적 열망을 끄집어내주고 싶다거나.][그럴지도.]주혁은 중얼거리며 창밖으로 시선을 주었다. 

이윽고 그녀와의 마지막 통화 내용이 떠올랐다. 

‘권희원 씨, 지금 이 기회보다 남편과의 약속이 더 중요하다는 말입니까? 당연히, 당연히…….’‘더 중요해요. 당연히 제일 중요하죠.’‘…….’‘가족이 제일 중요하다는 당연한 사실을 모르는 쪽은, 오히려 대표님인 것 같은데요.’주혁은 그녀의 일갈을 새기며 미간을 일그러트렸다. 

당연히 기뻐할 줄 알았는데. 눈을 반짝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적잖은 충격이었다. 

[데니스. 자네가 오늘 내게 소개해주고 싶다던 무용수, 그녀 맞지?][맞아. 자네도 봤으면 했는데, 아쉬워.]흠. 브릭트먼 팩 감독은 말끝에 확신을 가지는 주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주혁은 감독의 시선을 의식하며 어깨를 으쓱 올려 보였다.

[그녀가 오늘은 나의 제안을 거절했지만, 다음 제안은 아마도 거절하기 힘들 거야.][어떤 제안을 하려고 하는데?]감독이 묻자 주혁은 빙그레 웃기만 했다. 

오랜 시간 함께 해오며 상대의 표정만으로 기분을 읽을 수 있는 사이가 된 감독은, 지금 마주 앉은 주혁의 얼굴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데니스 한은 묘한 오기를 품었다. 

[아주 매력적인 제안. 그때도 내 제안을 거절할 수 있는지, 두고 봐야겠어.]자존심을 다친 것 같았으며, 회복할 명분을 찾고 있는 듯 보였다. 

그는 타고난 승부사였다. 

아쉽다…… 아쉬워…….

하…… 희원은 연거푸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영혼 없는 눈길로 스테이크를 썰어 나가는 희원을 바라보다가 지환은 입술을 열었다. 

“식사가 마음에 안 들어? 다른 곳으로 이동할까?”“아뇨. 그건 아닌데.”희원은 정갈하게 스테이크를 썰어 놓은 뒤, 접시를 들어 지환의 앞에 내려놓았다. 

“팔 부러져서 칼질도 못 하는 사람이 무슨 스테이크?”“아니, 그러니까. 내가 그것까진 생각을 못 해서.”염치없이 희원이 썰어준 스테이크 접시를 넘겨받으며 지환은 웃었다. 

그녀는 밉지 않게 눈을 흘기다가 자신이 먹을 스테이크의 칼질을 시작했다. 

간간이 한숨은 이어졌다. 

단호하게 주혁의 제안을 거절했지만, 속이 쓰린 건 어쩔 수 없었다. 

평생 한 번 오기도 힘든 기회가 하필 오늘 오다니.

하필. 

하필!

배우 지망생이 유명 할리우드 감독과의 독대를 발로 차버린 것과 뭐가 다르단 말이냐!

미쳤어…… 내가 미쳤지…….

아흑…….

희원은 아무리 모르는 척하려고 해도 진한 아쉬움이 남는 까닭에 불편한 얼굴을 했다. 

왜 그렇게까지 단호한 대답이 나갔는지 모를 일이다. 

주혁에게 부드럽게 말해도 될 일이었는데.

너무나 감사한 일, 맞는데.

주혁이 지환과의 약속을 아무렇게나 치부하는 과정이 불쾌했고, 그래서 순간 욱했다. 

하지만 불필요한 감정 소모였다. 

누가 개개인의 가정사까지 염두에 두며 비즈니스를 제안한단 말인가. 

그의 입장에선 황당할 만도 하겠지. 

“휴…….”희원이 한숨을 내쉬자 지환은 미지근한 물을 홀짝 삼키고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오늘 당신, 무슨 일 있었나?”“있었죠. 너무나도 험난한 유혹과 시련이 다녀갔죠.”“뭔데? 누가 괴롭혔어?”“……아녜요. 말해도 잘 모를 테니까요. 식사해요, 우리.”“잘 몰라도 들어줄 수는 있는데. 대강은 이해할지도 모르고.”희원은 접시를 바라보던 시선을 들었다. 

그는 이야기를 들어줄 준비가 되었다는 것처럼 턱을 괴었다. 

뭐든 말해도 괜찮아, 라고 알려주는 것만 같은 눈빛. 

그녀는 그런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희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냥 좀, 어긋난 타이밍 때문에 잡지 못한 일이 생겼어요. 흔한 일은 아니라서, 좀 아쉬울 뿐이에요.” 당신을 만나러 오기 위해 일생일대의 기회를 날려버렸다고는,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쉽겠다. 뭐든 타이밍이 중요한 건데.”“그러게요. 아쉬워서. 금방 나아지겠지만.”그녀는 매달린 아쉬움을 떨쳐버리려는 듯 와인잔을 들었다. 

잊자, 잊어. 곱씹어 봐야 속만 쓰리지.

“음식은 입맛에 맞아?”“네. 맛있어요. 이런 맛집은 또 어떻게 알았어요?”“아, 아, 뭐, 그냥, 뭐, 예전에 한 번, 운명처럼.”“선봤구나, 여기서.”“…….”지환은 기습을 당했다는 것처럼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희원은 뭘 그렇게까지 놀라는 표정이냐는 듯 힐끔 그를 바라보고는 다시 식사에 열중했다. 

“서지환 씨.”뜨끈한 스튜를 먹다가, 희원은 그를 불렀다. 

“내가 너무 야박하게 굴어서, 나한테 섭섭하죠.”“……그럴 주제가 되나, 내가.”그가 아니라며 웃는다. 

희원은 사심 없이 웃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가슴이 뭉근하게 저려오는 기분을 느꼈다. 

그녀는 빈 와인잔에 와인을 채웠다.

“좋아하라면 좋아할 수 있어. 내가 서지환 씨를 마음에서 완벽하게 비워낸 건 아니니까요.”뜻밖의 말이 공간을 울린다. 

그는 모든 행동을 멈췄다. 

쪼르륵, 와인을 따른 희원은 한입 삼켰다. 

“서지환 씨와 하리가 우리 집에서 지낸 마지막 날, 사실 지하 주차장에서 서지환 씨를 봤어요. 죽을상을 하고 있더라고.”그는 마른침을 삼켰다. 

기억이 스쳐간다. 그날, 아아, 그날.

“가까이 못 가겠더라고요. 엄두가 안 나는 거야. 너무 표정이 힘들어 보여서, 비틀비틀하면서 집으로 올라가는 뒷모습이 너무 위태로워 보여서.”“…….”“하지만 걱정은 되니까, 무슨 일 있었는지 물어보려고 뒤따라 올라가 문을 열었는데, 서지환 씨가 웃고 있더라고요. 아무 일도 없었단 듯이.”그녀는 말을 이었다. 

아아, 그때 알겠더라. 당신의 그런 얼굴, 어제오늘 만의 일은 아니었겠구나. 

당신의 하루 끝은 이렇게 고달팠겠구나.

“서지환 씨가 나와 있는 시간 동안 죽도록 노력하고 있었다는걸 알아버렸어. 그러니 그 이상을 바랄 수가 없게 됐잖아. 내가, 당신한테.”웃고 싶어서 웃는 게 아니라, 함께 있는 대상의 기분을 망치지 않기 위해 웃었구나.

결국은 나를 위해ㅡ

당신은 그런 시간을 지내왔구나. 

“그런 거 있잖아요, 둘이서 고무줄을 팽팽하게 잡아당겼는데, 결국 한쪽이 놨어. 다치는 건 결국 고무줄을 끝까지 잡고 있던 쪽이라는 거.”“…….”“난 당신이 놓을까 봐 무서워서 고무줄을 놨고, 서지환 씨는 고무줄을 끝까지 잡고 있었던 거죠. 그래서 당신이 더 많이 다친 것 같아 미안하기도 했어요.”그녀는 그를 바라보았다. 

다친 팔을 바라보고는, 다시 시선을 들어 올려 눈을 응시했다. 

“서지환 씨가 나를 바라보면서 웃을 때마다, 나는 아찔해요. 예전엔 미처 몰랐던 부분을 알고 나니 당신의 웃음이 전처럼 밝아 보이지를 않아.”“…….”“서지환 씨는 지금 진짜로 웃는 걸까? 아닌 걸까? 깊은 한숨은 이미 저 밖에서 백번쯤 쉬고 오지 않았을까? 정말 당신은 지금 기쁜 걸까?”지환은 그녀의 말을 들으며 와인병을 잡았다. 와인을 따랐고, 깊이 삼켰다. 

갈 길을 잃은 것처럼 그의 표정은 웃음을 지웠다. 

“불안한 거예요. 그 웃음이 날 위한 가짜 웃음일까 봐. 난 그런 웃음을 원한 건 아니었으니까. 매 순간순간 궁금할 거고, 당신의 웃음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난 선별하려 들 거예요.”이미 봐버렸으니까. 이미 난, 보고 말았으니까. 

“어느 날은 밑도 끝도 없이 믿다가도, 또 어느 날은 당신의 웃음을 온전히 믿지 못해 스스로를 불행하게 하겠지. 난 그런 게 두려워요. 내가 나를 불행하게 만들까 봐.”희원은 두 손으로 턱을 괴었다. 

“이게 솔직한 내 심정이에요. 당신이 좋고 싫고의 문제가 아닌, 내가 당신의 마음을 온전히 들여다볼 수 없는 이유.”……미처 몰랐다는, 알고 있는지 꿈에도 몰랐다는 미안한 시선을 하고 있는 지환을 바라보다가, 그녀는 웃었다. 

“변명도 안 해, 나쁜 사람.”“아니, 뭐, 봤다니까. 현행범은 묵비권을 행사할 수밖에.”“부탁 하나 할게요. 내 앞에서 서지환 씨, 솔직했으면 좋겠어요. 그게 어떤 모습이건 간에.”지환은 와인잔을 돌리다가 멈췄다. 

……솔직한 모습. 무엇으로 위장하지 않은, 진짜 내 모습.

지난 몇 년간 그런 모습을 수면 위에 올려놓았던 적이, 있었던가?

언제부터 나는, 감추고 사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렸나. 

“내 앞에선 숨기지 않아도 돼요. 서지환 씨의 모든 감정과 순간을 존중할 테니까.”“……어른이네, 권희원 씨.”“뭐, 당신이 고무줄을 끝까지 잡고 있어줬으니까요.”“…….”“다칠 걸 알면서도.”희원은 와인잔을 들었다. 

그에게 잔을 내밀며, 조금 취하는 것 같다고 눈을 찡긋거리며 웃었다. 

“지켜볼 거예요. 앞으로도 계속. 당신의 모든 순간이 진심처럼 다가올 때, 나도 한 번쯤 생각을 고쳐먹어 볼 테니까.”천천히.

서두르지 말고.

당신이 당신의 모습 그대로 내게 보여줄 수 있을 때까지.

“그리고 서지환 씨에게 부탁 하나 할게요.”“무슨?”그녀가 내민 와인잔에 자신의 잔을 부딪치며 그는 눈썹을 추켜 올렸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잠시 뜸을 들이던 그녀는,

“이겨줘요.”단번에 알아들을 수밖에 없는 이야기를 꺼냈다. 

“여자 권희원은 껍데기뿐인 남자 서지환을 원하지 않으니까. 당신은 당신의 모든 것을 다 챙겨서, 나한테 올 거면 다 가져와요.” 쨍ㅡ 청명한 와인잔이 부딪치는 소리와는 사뭇 어울리지 않는 공기가 퍼진다. 

“그런 거 아니면 나, 죽어도 서지환 씨 안 받아 줄 거니까. 내 말 알아들었죠?”그는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부부란 경험해보지 못한 행복을 함께 누리는 것이 아니었다. 

“요즘 나 와인 좀 잘 마시는 것 같아. 안 그래요? 취해서 검사실 구경하던 내가 아니라고요.”“얼굴은 빨개져선, 혀도 꼬이는 주제에 무슨.”“아아 그런가? 근데 요즘 와인이 맛있어. 비싼 것만 먹어서 그러나?”“……좋겠네. 비싼 와인만 마시고 다녀서.”누구에게도 보여준 적 없는 서로의 밑바닥을, 진정으로 감당하는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두 사람은 겨우 출발선을 지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인생이란 길고도 먼 여정이었으므로. 

“그만 일어날까, 어지러워 보이는데.”시간은 얼마나 흘렀을까. 

지환은 조금씩 눈꺼풀이 무거워지는 그녀의 얼굴을 살피다가 입술을 열었다. 

“아닌데. 나 괜찮은데.”“아닌데. 안 괜찮아 보이는데.”“……헷.”데헷. 그녀가 정곡을 찔렸다는 듯 귀엽게 웃는다. 지환은 그녀의 웃음소리에 너털웃음을 흘렸다. 

“아니이, 와인이 맛있잖아요. 남기고 가기 아깝게.”“비상식량도 아니고 꾸역꾸역 마셔봤자 속만 아프지.”“술이 술술술, 술술술 넘어가는 걸 어떡해? 취하면 또 어때, 집에 갈 건데.”그녀는 머리가 무겁다는 듯 턱을 괴고는 홀짝 와인을 삼켰다. 말려도 듣질 않는다. 

“대표님이 사준 와인도 남기고 와서 얼마나 아까웠는지 알아요? 취할까 봐 양껏 마시지도 못하고. 그 비싼걸.”“……그것참 유감이네.”데니스 한과 있을 땐 빙글빙글 돌리기만 하고 마시질 않던 와인을 잘도 비워낸다. 

또 한편으로는 그런 모습이, 예쁘게만 보인다. 

“당신은 사람을 참 편안하게 하는 재주가 있는 것 같아.”그녀는 중얼거리며 두 눈을 꼭 감고 와인을 삼켰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생각해보면 한없이 경계를 풀게 했던 것 같아.”“칭찬으로 들을게. 요즘 나는 당신 칭찬에 굶주렸으니까.”“덕분에 검사실에서 잠도 자고요. 이렇게, 결혼도 하고.”그녀의 말은 조금씩 느려졌고, 눈꺼풀의 움직임 또한 한없이 느려졌다. 

“날…… 좋아해줘서 고마워요…….”그러다가 테이블에 기댔다. 

팔을 베고 머리를 기대더니, 그녀는 정말로 하고 싶었던 말을 뱉어냈다. 

“고맙고…… 미안하고…… 그래요.”그는 기어이 말이 끊긴 그녀를 응시했다. 

모든 움직임을 멈춘 채 테이블에 기대 잠이 든 그녀를 바라보자니, 울컥하는 뜨거움이 솟구쳤다. 

“뭔들 못 이길까 싶다.”그는 툭, 하고 말을 뱉어냈다. 

“당신 빼고는 다 이길 수 있을 것 같은데.”그녀는 잠이 들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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