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1. 사소함에 묻어나는 (51/98)

51. 사소함에 묻어나는

와인…… 늘었다며…….

“집에 다 왔어. 이제 일어나자.”“아 몰라…… 몰라…….”와인이 늘긴 개뿔이나! 

뭐가 어떻게 얼마나 늘었다는 거냐!

대리 기사님은 진즉 자리를 떠나고 뒷좌석에 덩그러니 남은 지환과 희원은 몇 분째 씨름 중이다. 

집에 왔다고 일어나라고 해도 그녀는 요지부동이다. 

“권희원 씨, 집에 다 왔다니까?”“…….”불편하게 목을 꺾은 채로 잘도 잔다. 

완전히 곯아떨어진 그녀가 깨어나기를 한참이나 기다리던 지환은 슬슬 차 안이 추워진다는 것을 깨닫고는 차 문을 열었다. 

왼팔에 통깁스를 했으니 자연스럽게 행동은 둔해졌다. 

차에서 내린 지환은 허리를 꺾어 뒷좌석을 내려다보았다. 

이대로 두고 가도 모를 만큼, 그녀는 쌔근쌔근 잘도 자고 있다. 

어느덧 그녀 입에서 입김이 새어 나온다. 

“어어, 춥겠는데. 더 있으면 안 되겠어.”하…… 지환은 붕대 감은 팔을 내려다보았다. 

내가…… 한 팔로…… 그녀를 부축할 수 있을까?

식당에선 어찌어찌 끌고 나왔다만 차에서 그녀를 데리고 나오기란 쉬워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머물러 있을 수도 없으니 일단 그녀를 차량 밖으로 끌었다. 

주우욱, 마네킹처럼 끌려 나온다. 

“조심, 조심.”지환은 안간힘을 쓰며 한쪽 팔로 그녀를 부축했다. 

추욱 쳐진 와이프는 생각보다 더 무거웠다. 

흐어, 미치겠네, 지환은 악력으로 그녀의 허리를 지탱하며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입술은 저절로 꽉 물게 되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지환은 힐끔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녀 자발적으로 서 있다고 하기보다, 자신이 세워 놓았다는 표현이 더 옳을 것 같다. 

띵동, 문이 열린다. 

이미 더 아래 지하주차장에서 타고 올라온 사람이 흠칫, 하며 놀란다. 

“아, 안녕하세요.”“네. 안녕하세요.”입주민이니 인사를 나누고 본다. 지환은 힘겹게 올라타며 민망하다는 듯 웃었다. 

추욱, 쳐진 그녀를 가까스로 안고 있자니 주민이 조심스럽게 묻는다. 

“도와드릴까요? 보아하니 팔도 불편하신 것 같은데.”“아닙니다. 괜찮습니다.”“사모님이 만취하셨네요.”“네. 그러네요.”문이 열리고 주민이 사라진다. 힐끗 돌아보는 사내의 눈빛에 짠함이 배어 있다. 

비로소 문이 닫히자 지환은 끙차, 하며 그녀를 부축한 손에 힘을 주었다. 

한 줌이나 될 것 같은 허리를 꽉 붙잡고 있지만 로맨틱하다 말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비로소 집 앞에서 엘리베이터가 열리고ㅡ

짐짝 끌어내리듯이 지환은 영차, 영차, 구령 소리와 함께 그녀를 내렸다. 

그녀가 사정없이 기대온다. 넋이 나간 그녀는 그에게 기댄 채 목덜미 부근에 숨을 내리 쉬었다.

으어어어…….

비밀번호를 눌러야겠는데 도저히 어느 팔로 어떻게 눌러야 하는지 모르겠다. 

지환은 그녀를 몸에 밀착시키고 붕대 감은 팔로 등을 눌렀다. 

비로소 자유로워진 오른팔로 비밀번호를 순식간에 누르고 문을 열었다. 

쿵, 문이 닫히고ㅡ

신발을 벗기지 못한 채로 그는 그녀의 허리를 휘어 감아 공중으로 들었다. 

“미치겠다, 어후, 무거워.”쿵쿵쿵쿵. 그는 빠른 걸음을 걸어 그녀의 침실로 직행했다. 

그녀를 눕히자니 자연스럽게 침대에 함께 쓰러졌다. 

“헉, 헉, 헉…….”거친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다. 

지환은 눈만 감았다가 뜨며 천장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데리고 올라왔는지 모르겠다. 스스로의 대견함에 피식피식 웃음이 흘렀다. 

곁에선, 세상모르고 잠이 든 와이프의 깊은 숨소리가 들려온다. 

“……여기, 우리 집이야?”“어라? 깼어?”곁을 바라보니 그녀가 희미하게 눈을 뜨고 있다. 

혼이 쏙 빠진 눈길로 그녀는 연거푸 눈을 두어 번 감았다가 뜨더니 피식, 웃었다. 

초점이 흐린 것을 보아하니 제정신은 아닌 것 같았다. 

“거짓말. 여긴 집이 아니라 꿈속인 거 다 알아.”그녀는 술주정을 하듯 중얼거리더니 이내 다시 눈을 감았다. 

허, 황당함에 탄식을 내뱉은 지환은 다시 천장을 바라보았다. 

“꿈이라니. 큰일 날 소리 하네.”

이겨줘요.

“이제 나한텐 당신이 현재인데.”그는 형체 없는, 지독하게도 괴롭히던, 그러한 것들과 싸울 준비가 된 것만 같았다. 

덮어두고 묻어두기 급급했던 그것들과의 싸움. 

그녀의 숙제를 시작하기로 한다. 

익숙하고 따뜻한 이불, 눈을 뜨지 않아도 내 침실, 내 침대라는 걸 알 수밖에 없는 향기.

희원은 천근만근 무거운 눈꺼풀을 올리지 못한 채 조금씩 잠에서 깨어났다. 

……오랜만의 만취다. 

처음엔 데니스 한의 제안을 단칼에 잘라낸 속상함에 넙죽넙죽 와인을 마셨다. 

그러다가 지환과의 대화에 심한 갈증이 났다. 

그림자처럼 그에게 매달린, 이유 모를 애처로움에 자꾸만 술이 들어갔다. 

그렇게 한 입, 두 입, 마시다 보니 진심이 흘러나왔고 결국엔 실려 왔다. 

눈을 뜨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지환이 집에 데려왔을 것이고, 이 대단한 두통은 숙취일 것이고. 

그나저나 몇 시냐…….

희원은 눈만 감고 있을 뿐 조금씩 현실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눈꺼풀에 닿는 햇살의 밝기가 이미 아침이라는 것을 알게 해줬다. 

그러다가, 평소보다 주변이 지나치게 따뜻하다는 것 또한 깨닫고.

“음…….”베개가, 내 것이 아니라는 것 또한 깨달았다. 

음…… 낮은 소리를 내던 희원은 번쩍하고 눈을 떴다. 

“으아아아…….”“굿모닝.”너무 가까워 얼굴도 제대로 들여다보이지 않는, 나의 남편이 곁에 누워 있다. 

너무 놀라 희원이 눈을 크게 뜨자 지환은 일어났냐며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녀가 곁눈질하듯 베개를 바라보니,

“우어아아아악!”그의 팔이다. 그것도 붕대 감아 놓은 팔.

희원은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얼마나 놀랐는지 숨이 거칠어진다. 

옆으로 비스듬하게 누워 그녀에게 팔베개를 제공했던 지환은 붕대 끝에 간신히 나와 있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이보게 와이프. 나는 괜찮네. 아직 감각은 있으니.”“뭐, 뭐예요! 나 언제부터 이러고 잔 거예요?!”“글쎄 시간 확인은 못 했지만 날 밝기 전부터였으니까.”헐…… 희원은 이불로 얼굴을 가리다가 슬금슬금 지환을 바라보았다. 

미쳤다. 남편의 부러진 팔에 기댄 채 자다니.

간병해줘도 모자를 판에! 짐이 되어버리고 말다니!

“팔 괜찮아요? 진짜로 괜찮은 거예요?”“괜찮다니까. 봐봐, 희미하지만 움직이잖아.”애처로운 그의 손가락 끝이 붕대 사이로 꼼지락거린다. 

아흑, 희원은 머리를 쿵쿵 치다가 긴 탄식을 뱉었다. 

“날 밀어내야지. 바보처럼 그러고 그냥 버텼어요? 옆으로 밀어내면 됐잖아.”“어허, 무슨 소리. 어떻게 얻은 기회인데 내가 당신을 밀쳐내.”“그나저나 왜 내 침대에서 잔 거예요?”“가지 말라며?”……응? 내가?

기억에 없다. 

“내가 가지 말라고 했다고? 정말?”“그렇다니까?”희원이 눈을 껌뻑껌뻑하며 끊긴 기억의 구간을 더듬자 지환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의심 많은 눈길로 바라보지만 뭐, 심증은 있어도 물증은 없을 테니까. 

“언제는 가지 말라며. 옆에 있으라며.”“못 살겠다, 술김에 한 말을 또 곧이곧대로.”“당신도 나 취했을 때 옆에서 재웠잖아. 이심전심, 빚은 이렇게 갚는 거지.”그녀는 슬그머니 손을 이불 속에 넣어 옷 상태를 점검했다. 

아아, 옷은 무사하다. 헷.

뭐가 무사한데! 지금 이게 문제가 아니잖아!

“아무 일도 없었으니 됐어요. 오늘 일은 묻어두기로 하죠.”“아무 일도 없었다니, 무슨 소리야.”“뭐, 옷도 그대로인데?”“내가 다시 입혀놨을 거라는 생각은 안 드는 모양이네?”“죽여야겠다…….”희원이 목을 조를 것처럼 덤벼들자 지환은 금세 항복했다. 

눈길이 진짜로 죽일 것만 같아서, 금세 항복하고 마는 것이다. 

“농담. 농담입니다. 반성합니다.”“아오, 살 떨리는 농담하지 말라고요.”희원은 그에게 덤벼들었던 자세를 곧게 하며 이마를 짚었다. 

저절로 눈은 질끈 감겼다. 

“와인…… 내가 다신 마시나 봐라…… 내가 개야, 개…….”“검사실에서 재울 때도 그 얘기 했는데. 난 그럼 지금 반려견과 함께인 건가?”“우씨…… 아침부터 웬 시비예요? 싸우고 싶어요?”“뭐, 싸우다가 정도 드는 거지.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고 하니까.”“물 베기라는 건 세간의 이야기고. 난 꼭 그것만 벨 것 같지는 않아서. 조심 좀 하죠.”희원이 목을 베는 시늉을 하며 눈을 흘기며 말하자 지환은 흠칫, 했다. 

처음부터 같이 있으려고 했나 뭐. 

재워놓고 나가려고 했다. 취한 와이프 곁에 있어 봤자 좋을 일은 없을 것 같아서.

하지만 그녀가 추운지 꼬물꼬물 옆으로 붙더라. 

잠깐 얼굴 좀 들여다보고 나간다는 것이, 이렇게 되고 말았다. 

“앞으론 같이 자자.”“뭐, 뭐요?!”“전에도 말했지만 나 이 침대 마음에 들어.”“…….”“당신은 더 마음에 들고.”지환은 상체를 일으켰다. 놀라 눈이 휘둥그레진 그녀를 바라보다가 머리를 헝클었다. 

너무 놀라 전투력을 상실한 그녀 얼굴은 볼만했다. 

“무, 무슨, 하리도 없는데 우리가 왜 같은 침대를, 아니, 갑자기 혼자 진도를 이렇게 빼…….”“미안한데 남은 말은 퇴근 후에 하고 나 출근 좀 해도 될까?”“…….”“지금 출발해도 지각인데.”희원은 눈을 감았다가 뜨고는 시계를 바라보았다. 

헐, 그의 말대로 출근하기엔 시간이 늦어버렸다. 

그녀는 튕기듯이 일어났다. 

“미쳤어, 진짜! 빨리 일어나서 준비해요! 하, 나 진짜 미치겠네! 날 깨웠어야지!”“너무 곤히 자니까 엄두가 안 나던데. 안 그래도 조금 기다리다가 일어나려고 했어.”“이렇게 자꾸 지각하다가 잘려요, 서지환 검사님! 네?”미치겠다, 희원은 부리나케 거실로 나갔다. 

그의 출근 준비로 침실을 함께 쓰자는 제안은 유야무야 넘어갔다. 

지환은 성공적이라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부인! 와이셔츠 입혀줘야 하는데!”“어어어! 기다려요! 기다려! 금방 해줄게요!”“옷도 벗겨줘야 하는데! 부인!”“어어어! 기다려요! 금방 벗겨줄게요!”팔은 한없이 저려왔지만 어쩐지 상쾌한 아침의 시작이었다. 

스케줄이 일찍 끝난 희원은 땀을 많이 흘린 까닭에 곧장 집으로 들어섰다. 

혼자 있으니 옷을 편안하게 벗고 방을 나서려던 희원은 우뚝 멈춰 섰다. 

그러곤 천천히 벗은 옷을 돌아보았다. 

“흠.”그녀는 다시 주섬주섬 옷을 입었다. 그러곤 가만히 서 있다가 왼팔을 구부렸다. 

그런 자세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희원은 커튼을 묶는 기다란 천을 꺼내어 양 끝을 묶고, 왼팔을 넣었다. 

깁스를 한 사람처럼 자신을 만들어두고는 다시 옷 벗기를 시작했다. 

“아, 이게 되게 어려운 거구나.”한 팔로 옷을 벗으려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어렵다. 그녀는 꽤나 오랜 시간을 투자해서 옷을 벗었다. 

그대로 샤워실에 들어섰다. 한 팔이 묶여 있으니, 뭐부터 해야 하는 건지, 아니, 뭐를 할 수 있는지 생각하게 되었다. 

“오른팔 안 다친 게 정말 신의 한 수네.”일단 머리부터 감아볼까? 희원은 물을 틀었고 머리를 적셨다. 

물줄기가 흘러 왼팔을 적실 때마다 그녀는 오만상을 찌푸렸다.

“이렇게 씻다간 붕대 다 젖겠다. 아후.”어찌어찌 물을 묻힌 희원은 고개를 들었다. 

아뿔싸, 샴푸가 눌러서 짜는 것이 아니라 뚜껑을 돌려 열어야 하는 제품이다. 

“별게 다 말썽이야.”우씨. 희원은 붕대를 감아놓은 팔을 이용해 샴푸통을 가슴에 품고는 뚜껑을 열었다. 과정이 험난하다. 

뚜껑을 열긴 열었는데, 어떻게 짜야 하는지 모르겠다. 

“와, 뭐냐 이거.”이 와중에 물은 철철 흐르고, 희원은 엉거주춤하게 서서 다리 사이에 샴푸통을 끼고 있는 힘껏 샴푸를 짰다. 

쿵, 하고 샴푸가 떨어진다. 일전에 지환이 씻다가 샴푸통을 떨어트렸다던 말이 떠올라 희원은 미간을 좁혔다. 

“진짜, 하…….”가까스로 집어 들어 미끌미끌한 샴푸통을 고정하고 샴푸를 짰다. 

샴푸의 반은 손바닥에, 반은 바닥에, 가관이다. 

“맙소사…… 벌써 힘들어…….”머리에 거품을 올리기 시작한 때부터 그녀는 기진맥진했다. 

한 팔로 거품을 내려니 그것도 만만한 일이 아니다. 깨끗하게 감긴 건지, 그것도 잘 모르겠어.

우여곡절 끝에 머리를 감고 나니 보디샤워 용품도 뚜껑을 돌려서 짜야 하는 제품이다. 

그러고 보니 치약도, 스킨로션도.

“어떻게 씻었을까. 대단하네, 서지환 씨.”샤워를 끝냈음에도 조금도 개운하지 않은 기분을 안고 그녀는 물을 잠갔다.

한 손으로 머리를 털고 몸을 닦고, 수건을 몸에 돌돌 마는데 그 역시 편안한 과정은 아니다. 

문을 열고 나오자 평소의 배로 걸린 샤워시간이 확인된다. 

희원은 어후, 한숨을 내쉬고는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그 후로도 그녀는 한참이나 끈을 매고 다니며 왼팔을 고정해두었다. 

“얼추 알겠어. 그럼 일단 마트를 다녀와야겠다.”그러곤 다시 밖을 나섰다. 

스스로 겪어보지 않으면 알지 못할, 지환의 자잘한 불편함을 알고 싶었다. 

가늠만으로는 전부 알 수 없었으니까. 

그는 전부 다, 말해주지 않을 테니까. 

“부인, 남편 왔어.”“어서 와요, 서지환 씨. 생각보다 일찍 왔네?”희원이 마트에 다녀오고, 저녁을 준비하고 있는데 지환이 돌아왔다. 

한쪽 팔만 입고 한쪽 팔은 입지도 못한 코트 사이로, 꺾인 팔이 보인다. 

희원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그의 팔로 향했다. 

잠깐 체험해봤다고, 엄청난 불편함이 느껴졌다. 

“오늘은 별일 없었어?”지환은 그녀를 스쳐 옷방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그를 따라 들어갔다. 

“별일 없었죠. 무사했고.”“다행이네.”그는 좋다는 듯 눈썹을 추켜올리며 코트를 벗었다. 희원은 자연스럽게 코트를 받았다. 

재킷을 편하게 벗을 수 있도록 도왔다. 

“나가서 먹어도 되는데 식사 준비하고 있었어?”“그냥, 추우니까. 집에서 먹어요. 간단하게 하고 있었어.”순서처럼 그의 넥타이를 풀었다. 지환은 그녀가 다가와 옷을 벗겨내니 약간 당황한 듯 멈춰 섰다. 

“팔 좀 벌려봐요.”“어? 아아, 어.”희원은 숨도 쉬지 않는 얼굴로 빠르게 셔츠 단추를 풀었다. 

지환은 그녀가 시키는 대로 양팔을 벌리고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뜨거운 물 받아놨어요. 거품도 알차게 불어나고 있으니까 들어가서 몸 좀 녹여요. 반신욕.”“어, 어. 어어.”그녀가 셔츠를 단숨에 벗긴다. 지환은 집에 들어온 지 1분 만에 상의 탈의를 하고 당황했는지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의 셔츠를 벗긴 희원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지환은 그녀가 무얼 하려는지 알겠다는 것처럼 몸을 움츠렸다. 

“왜, 왜 이래.”“뭘 왜 이래요. 바지 벗기려고.”“아, 아, 아, 궈, 궈, 권희원 씨.”“벗기 힘들잖아. 벗겨줄게요.”“어, 어, 아니, 아니, 자, 잠깐만. 잠깐만요.”희원은 준비가 되었다는 듯 힘껏 그의 허리를 자신 쪽으로 끌었다. 그가 엉성하게 끌려온다. 

그의 정장 바지의 버클을 노려보듯 하던 희원은 턱, 벨트를 잡고 버클을 열었다. 

정장 바지의 잠금도 풀었다. 

“지퍼 정도, 혼자 열 수 있죠?”“아…… 어어…….”“열어줘요?”“아니! 아니오!”희원은 턱 끝으로 뒤를 가리켰다.

“뒤에, 보이죠? 가운 사다 놨어요. 가운 입고 들어가서 목욕해요. 불편한 일 있으면 목욕 중에 불러줘요. 머리 정도는 감겨줄 의향이 있으니까.”놀란 지환은 흰자만 희번덕거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실컷 벗겨놓고 뒤로 돌아 주방으로 나섰다. 

“지금…… 뭐가 지나간 거야…….”지환만 멍하니 자리에 남았다. 

“나 왜…… 벗고 있냐…….” 그녀는 모르는 것이 분명했다. 

바지 버클은, 하는 게 힘들지 푸는 건 무척 쉽다는걸.

그녀는 주방에서 식사 준비가 한창이고, 지환은 가운을 입은 채 바깥의 동향을 살피다가 후다닥 샤워실로 들어갔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그냥 좀 위험한 느낌이 든다. 

“뭔가 자꾸 말리는 것 같은데.”지환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가운을 벗었다. 

더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샤워실엔 그녀가 준비해둔 목욕물이 반기고 있었다. 

“거품 목욕이라니.”이런 거품, 태어나 처음 본다. 

지환은 우선 머리부터 감을 생각으로 물을 틀었다. 몇 번 해봤다고 나름 씻는 일에 익숙해졌다.

처음엔 정말이지 너무 힘들더라. 

물을 묻힌 지환이 샴푸통을 찾는데, 원래 쓰던 것은 보이질 않고 새 제품이 놓여 있다. 

“다 썼나? 아닌데, 많이 남았었는데.”지환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눌러서 샴푸를 짰다. 

뚜껑 있는 제품을 쓰다가 눌러서 펌핑하니 세상 편하다. 

보디워시도 펌핑용으로 바뀌었다. 

지환은 별생각 못 하고 평소보다 편안하게 간이 샤워를 마쳤다. 

드디어 뜨거운 물로 입성하니 으어어어, 단전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소리가 자연스럽게 터진다. 

“으어어어, 좋다…….”붕대 감은 팔에 자꾸 물이 묻을 것 같아 깊숙하게 들어가지 못하고 몸을 뒤척이던 때. 

곁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끈이 자꾸만 시선을 잡아끈다. 지환은 멀뚱멀뚱 바라보다가 팔을 집어넣었다. 

엇, 잘 고정이 된다. 

“야, 이렇게 하니까 편하네. 그런데 여기 왜 끈이 묶여 있는 거지.”조금 더 물속으로 들어간 지환이 중얼거리다가, 천천히 세면대로 시선을 옮겼다. 

아깐 미처 보지 못했는데, 세면대엔 미리 치약을 묻혀놓은 칫솔이 있다. 

지환은 가만히 욕실을 둘러보다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바뀐 욕실 제품. 미리 걸어둔 팔걸이.

전투적으로 옷을 벗기던 그녀 손길. 

“……후.”그는 오른팔로 세수를 다시 하듯 얼굴을 문질렀다. 

아마도 그녀는 머무는 동안 조금이라도 더, 편하게 만들어주고 싶었으리라.

세심하게 관찰했을 것이고, 

“미치겠다…….”오래도록 생각했을 것이다. 

그녀가 평소 사용하는 제품인지, 거품 속에서 무척 익숙한 꽃향기가 난다. 

지환은 고개를 꺾으며 편안하게 기댔다. 

눈을 감고, 퍼지는 꽃향기를 가득 들이마셨다. 

이렇듯 가만히 앉아 눈을 감고 그녀의 향을 맡고 있자니 욕심이 났다. 

“K.O다, K.O.”당신도 내 기억을 가득 베어 물면, 온통 나로 퍼지는 세상을 만날 수 있게 되기를. 

지금의 나처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