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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잘 지내고 싶어 (52/98)

52. 잘 지내고 싶어

씻고 나온 그가 다시 옷 방으로 들어가자 기다렸다는 듯 그녀가 따라 들어온다. 

“부르면 들어가려고 대기하고 있었는데 혼자 잘 씻었나 보네요?”“아, 아, 어, 덕분에 잘 씻었습니다. 부인.”제길. 귀가 빨개지는 기분이 든다. 

지환은 엉성하게 답하며 황급히 돌아섰다. 

“주변 정리는 잘 못 하고 나와…….”“내가 할게요. 그런 거 안 바라니까.”“미안한 일투성이네.”“뭐가 불편한 건지 말해줬으면 진작 해줬잖아. 말을 안 해, 사람이.”일단 여기 앉아봐요. 희원은 간이 의자를 툭툭 쳤다. 

지환은 앉으라니 일단 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스킨을 화장솜에 덜어내고는 부드럽게 얼굴을 닦았다. 

자연스럽게, 그의 눈이 감긴다. 

“그동안 스킨 어떻게 발랐어요?”“뭐, 짐승의 움직임으로.”“아오, 말을 하지 좀. 입 뒀다 뭐 해? 순 농담이나 하려고 들고.”이번엔 로션을 덜어낸다.

“다른 말 할 것 없이 이런 거나 좀 확실하게 얘기하라고요. 세상에 한 손으로 로션을 어떻게 덜어내고 발랐어?”타박을 하는 것 같지만, 몰라서 미안했다는 미안함이 묻은 음성이다. 

그녀가 로션을 얼굴에 묻히자 그는 웃었다. 

“그냥 얼굴에 뿌리고 문질렀지.”“잘났다, 진짜…….”이내 손길이 부드러워진다. 

어루만지듯이 얼굴을 문지르는 그녀 손길이 좋아 조금 느껴보려고 하니.

철썩, 철썩, 이내 약간의 과격한 손길이 이어진다. 

“지금 때리는 것 같은데.”“아니, 이렇게 발라야 흡수가 잘 되지.”철썩, 철썩. 

……뭐지. 얻어맞고 있는 것 같은데. 기분 탓인가.

지환은 따가움에 인상을 찌푸렸다. 그제야 과격하게 로션 바르던 손길이 멈춘다. 

“끝?”“머리, 말려줄게요.”“호오.”아니 이렇게까지 바란 적은 없었는데. 

지환이 탄성을 터트리자 희원은 눈을 가늘게 떴다. 

드라이기를 꽂고 전원을 켜자 지환은 물었다.

“혹시 이게 우리의 마지막 밤이라거나, 날 두고 영영 떠날 생각이라거나, 그래서 지금 마지막 선물처럼 잘해주는 거라든가, 그런 건 아니지?”“서지환 씨 소원이 그쪽이면 그렇게 해주고.”“그럴 리가.”머리를 헝클어트리는 그녀 손길이 좋아서, 그는 다시 웃고 말았다. 

희원은 꼼꼼하게 그의 머리를 말리다가 거울에 반사되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몰랐어요. 그렇게 불편할 거라고는.”“모르는 게 당연하지.”“난 이렇게 모르는 게 많아요. 앞으로도 모르는 게 많을 거고.”“…….”“당신이 말하지 않으면 난 당신이 힘든 것도 모르고 지나가겠죠. 앞으로도.”그녀는 약간의 뜻이 담긴 말을 전했다. 

다 알아 들었을까, 거울에 비친 그는 눈을 감은 채 중얼거렸다. 

내가 당신에게 나누어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게 힘든 일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괜찮아. 모르고 지나가도 돼. 충분히.”……그러니 뭐든 괜찮아. 당신은 지나쳐도 돼.

“힘든 건 나만 할 테니까.”부디 그래줬으면 좋겠어.

마음 쓰린 일은, 앞으로도 나만 할게.

“미안해.”미안해. 그가 낮게 중얼거리자 머리 말리기에 집중하던 희원은 드라이기를 잠시 껐다. 

“아까부터 뭐가 자꾸 미안하다는 거예요. 듣는 사람 민망하게.” “그냥, 이것저것.”“미안한 일 참 많네요. 미안하면 빨리 나아요.”“그래, 빨리 나을게.”……말끝에 마음이 글썽인다. 

“다친 곳이 많아서, 미안해.”그는 웃음으로 갈무리했다. 

잘 준비를 마친 희원이 침대에 눕지 못하고 오랜 시간 화장대에 앉아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다. 

앞으론 같이 자자. 

“설마…… 농담이었겠지.” 

전에도 말했지만 나 이 침대 마음에 들어.  

당신은 더 마음에 들고. 

희원은 아침에 지환이 던지고 간 말을 곱씹으며 긴장한 얼굴을 했다. 

분명 아침에 그는 오늘부터 같이 자자는 말을 했다. 당장 오늘부터.

당장! 오늘 밤부터!

“무슨 일이야, 이게 대체. 물에 빠진 사람 건져줬더니 보따리 내어놓으라는 것도 아니고…….”팔을 다쳐서 집에 데려왔더니 안방 침실까지 점령할 셈인 모양이다. 

희원은 저도 모르게 손톱을 잘근잘근 물었다. 

내가 그냥 다른 방에서 잘까? 잠시 생각했던 희원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닌 것 같은데…….”그럼 그 방으로 따라오겠지! 

소파에서 자도! 따라올 거 아냐!

희원은 화장대 거울로 비치는 자신의 침대를 바라보았다. 

그와 누워본 기억이 없는 것도 아닌데, 곁에 하리가 있고 없고는 굉장한 차이를 보였다. 

한참이나 침대를 바라보던 희원은 거울 속 자신의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이렇게 긴장한 듯이 앉아 있으면 그가 좋아하겠지. 

지금 긴장한 거냐며 엄청 놀려댈 것이 뻔하다. 

“긴장은 개뿔이나, 됐고. 권희원, 당당해져야 해.”그래, 뭐. 한 침대 쓰는 게 어때서? 안 써본 것도 아니잖아. 

무슨 일이 일어날 거였으면 진작 일어났을 수도 있는 건데 뭐.

게다가 지금의 그는 환자가 아니던가?

“뭐야, 생각해보니 그러네.”희원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어차피 한쪽 팔도 못 쓰는 남자잖아.

흠. 희원은 마음의 준비를 끝마쳤다는 듯 눈가에 붙이고 있던 작은 아이팩을 떼어냈다. 

남은 화장품을 톡톡 두드려 흡수시키고 있던 때ㅡ

“준비 끝났어?”그가 문을 열었다. 

조금 전까지 달래놓았던 마음은 어디로 가고ㅡ

“나, 들어가도 될까?”희원의 마음속으로 쿵, 하며 심장이 떨어져 내렸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의원님.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늦은 밤, 사람들의 눈을 피해 백인호 의원의 자택으로 찾아온 사내가 있다. 

두툼한 점퍼 차림의 사내는 두 손을 공손히 모은 채 백 의원 앞에 서서 허리를 구부렸다. 

오랜만에 뵙는다는 사내의 인사를 받지만 백인호 의원의 표정은 차갑기만 하다. 

별다른 인사도 필요하지 않다는 것처럼, 백 의원은 턱 끝을 들며 사내에게 소파에 앉으라 했다. 

사내는 두리번거리다가 소파를 발견하고는 걸음을 옮겨 앉았다. 

소파에 앉은 사내와, 서재 책상 의자에 앉아 있는 백 의원 사이로 간격이 벌어진다.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눌 생각은 없는 듯 백 의원은 자리 그대로 앉아 사내를 바라보았다. 

자택까지 불려온 사내는 불편한 기색을 지우지 못한 얼굴로 힐끔힐끔 백 의원의 눈치를 보았다. 

“다시는 의원님 뵐 일 같은 건 없을 줄 알았는데 말입니다.”그러다가 침묵을 견디기 힘든지 사내는 입을 열었다. 

“어쩐…… 일로 저를 찾으셨습니까?”백 의원은 미간을 문지르며 고개를 반쯤 숙였다. 

“묻고 싶은 말이 있어서.”“아…… 묻고 싶은 말…… 예예.”사내는 다시 자세를 바르게 했다. 

묻고 싶은 말이 무언가, 사내는 빠르게 생각해보지만 딱히 짚이는 것이 없다. 

아아, 단 하나 유추하자면 희주와 관련이 있을 거라는 것.

“희주는 잘…… 지냅니까? 뉴스를 보니 봉사활동을 갔던데.”“…….”고개를 반쯤 숙이고 있던 백 의원이 사나운 눈빛을 들자 사내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가 손사래를 쳤다. 

“죄송합니다. 사모님, 사모님께서는 안녕하십니까?”그는 오래전, 희주가 방송생활을 하던 때의 매니저다.

거액의 돈을 받고 그녀를 백 의원 앞에 데려다준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때, 결혼 발표를 하던 당시에 말이야.”질문을 끊듯이 백 의원의 입술이 열리며 본론이 시작된다. 

사내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그를 바라보았다. 

떳떳하게 마주 앉아, 서로의 안부나 물을 수 있는 관계는 아니었으므로. 

“만나던 남자가 있다고 했는데.”“아…… 남자……요……?”사내는 그 당시 꿈도 꾸지 못할 거액을 손에 쥐었다. 

남들보다 부지런히 발로 뛰며 차곡차곡 열심히 날아오르던 신예 스타의 날개를 부러트렸지만 그녀의 남은 인생은 지금보다 황금빛일 거라고, 나름의 위안을 했었다. 

백인호 의원의 아내가 된다면 그녀도 종국엔 행복할 거라고.

모두가 사는 길이라고.

“그 남자가 누군지 당신은 알지.”……돈에 눈이 멀어 그녀의 절규를 외면했다.

“아…… 남자의 신원을…… 물어보시는 겁니까?”“되도록 짧게 대답해줬으면 좋겠는데. 되묻지 말고.”“아…… 이게 오래된 일이라서요, 기억이 날 듯 말 듯…… 아…… 이게…….”사내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시간을 끌었다. 

챙겼던 거액의 돈은 도박과 유흥으로 탕진한 지 오래. 사내는 돈이 필요하던 차였다. 

“아…… 있었던 것 같기는 한데…… 워낙 또 오래전 일이고 제가 기억력이 그다지 좋지 않다 보니…….”백 의원은 사내를 바라보다가 서랍을 열었다. 

두툼한 봉투를 꺼내 바닥으로 던졌다. 

사내는 튕기듯 일어나 봉투를 손에 쥐었고, 거침없이 열어보았다. 

눈이 돌아갈 만큼의 액수를 확인한 사내는 감출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백 의원은 사내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기억이 조금 날 것도 같습니다. 그때 아마, 사모님께서 만나던 남자가 그…….”이름이 뭐더라…… 뭐였는데…….

“저, 하나만 더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제가 땅을 좀 보고 있는데 조건이 까다로운 터라, 의원님께서 규제 완화를 좀 해주신다면…….”“비서실장에게 말해두고 가면 처리하지.”“예예, 그 남자가 아마 검사였을 겁니다. 당시에 검사가 된 지 얼마 안 됐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겠고 이름이…….”“서지환, 맞나?”“어? 알고 계시네요?”……아. 사내의 표정은 빠르게 굳었다. 

순간의 유혹에 눈이 멀어 덥석 뱉어놓고 보니, 희주에게 안 좋은 일이 벌어질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어쩌겠나. 이미 벌어진 일을.

없었던 일을 만들어 고하는 것도 아닌데.

“그런데 오래된 예전 일을 왜 이제 와서 물어보시는 건지…….”사내는 누가 뺏어갈세라 돈 봉투를 점퍼 안쪽 주머니에 욱여넣으며 근심 어린 표정을 했다. 

백 의원은 가증스럽다는 듯 나가보라 다시 턱 끝을 들었다. 

“다시 보는 일은 없었으면 하고. 나가 봐.”“아…… 예. 나가보겠습니다. 부탁드렸던 땅만 잘 처리 부탁드립니다.”사내는 허리를 깊숙하게 숙이며 인사했다. 

백 의원은 표정을 감춘 채 뒤돌아 나서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사내가 사라지자, 백 의원은 인터폰을 눌렀다. 

ㅡ예. 의원님.“후에 문제 생기지 않도록 잘 처리해.”ㅡ예. 알겠습니다.그는 인터폰을 끄며 마른 주먹을 움켜쥐었다. 

아내와 서지환이 만났던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주먹을 더욱 거칠게 움켜쥐었다. 

어쩌면 서지환이 집요하게 사건을 물고 늘어지는 건, 자신을 잡기 위한 복수의 수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건가.

어디까지 알고 싶은 건지?

“서지환…….”쾅ㅡ! 그는 소리 나게 책상을 내리쳤다. 

꽉 다문 입안에선 비릿한 피 맛이 흘렀다. 

지환은 편안하게 누웠고 한참이나 딴짓을 하던 희원은 결심을 굳힌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침대 끄트머리를 지나 그와 간격을 널찍하게 벌리고 일단 앉았다. 

으아. 갈수록 심장이 두근두근거린다. 

그녀는 휴대폰을 켰다. 

“안 눕고 뭐 해?”“검색 좀 하고요.”“검색? 무슨?”“호신술 정도.”……피식, 지환이 웃는다. 

희원은 못 들은 척하며 검색을 이어갔다. 

“이래 봬도 남편이 와이프 호신술 정도 알려줄 능력은 되는 사람인데 나한테 배우지그래.”“당신한테 써먹을 건데 당신한테 배워서 뭐 해?”……피식, 그가 또 웃는다.

“백날 눈으로 읽혀도 나 하나 제압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닐 텐데.”“팔 한쪽 제대로 못 쓰는 남자 제압할 힘 정도는 나도 있어요.”“아아, 그래. 그럼 잘해봐.”“……뭘 잘해! 뭘! 뭐를!”희원이 홱 돌아서며 언성을 높이자 지환은 힐끔 그녀를 바라보았다. 

제압하겠다고 하니 그러라고 한 것뿐인데, 갑자기 이 분노는 무엇?

“갑자기 분위기 싸하게 만드는 이유는 뭐지?”“아, 아니. 제압할 상황 같은 건 만들지 말라는 뜻이죠. 내 말은.”오호, 지환은 팔꿈치로 바닥을 지탱하며 손바닥에 머리를 기댔다. 

옆으로 누워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제 보니 뭘 자꾸 기대하시는 것 같은데요, 부인.”“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한 침대를 쓰자고 하니까 내가 자꾸 이런 헛소리를 하는 거 아녜요.”아흑. 나 지금 뭐라고 떠드는 거냐.

희원은 입술을 꾹 깨물며 휴대폰을 내렸다. 

“긴장했어? 나 옆에 있어서?”이거 봐. 긴장한 듯 보이면 저렇게 좋아한다니까?

“오해 말아요. 굳이 서지환 씨가 아니라도 나 아닌 타인이 곁에 누워 있으면 긴장되니까.”“긴장했구나, 내가 옆에 있어서.”“아 진짜! 멀쩡한 게 더 이상한 거잖아! 이 상황에서!”희원은 눈꼬리를 올렸다. 

볼썽사나울 정도로 긴장한 자신과는 달리, 물처럼 흐르는 저 사내의 여유를 좀 보라.

옷 벗겨줄 때 허둥지둥하던 모습은 대체 어디로 가고?

별꼴이야 진짜!

“서지환 씨, 분명히 말하는데 당신이 환자라서 봐주는 거예요. 알겠어요?”“그런데 나는 언제까지 그 서지환 씨, 호칭을 들어야 하는 건지?”“함께하는 동안. 죽을 때까지. 누구 하나 사망신고서 내기 전까지는 내내!”“사는 동안 이혼할 생각은 없다는 거네. 마음에 들어.”아…… 

끓는다…….

희원은 더 이상의 말씨름은 하고 싶지 않다는 것처럼 침대에 누웠다. 

어찌 되었든 편안하게 뒤척일 정도의 간격을 확보했고, 이대로 잠을 잔다면 문제는 없어 보였다. 

“불 꺼도 될까?”……미치겠다.

“마음대로 해요.”켜두고 잘 수는 없는 거잖아.

그녀는 지환이 불을 끄자마자 곁에 있는 수면등을 켰다. 

은은한 불빛, 제길, 분위기는 더 이상해졌어.

“서지환 씨, 빨리 자요. 머리만 대면 자는 사람이잖아.”“그러게. 그런데 오늘은 잠이 잘 안 오네.”두 사람은 널찍한 간격을 두고 누운 채 천장만 바라보았다. 

등을 돌리자니 아직은,

어쩐지 아직은.

“나 뭐 하나 물어봐도 돼?”작은 불빛만 존재하는 어둠 속에서 그가 물어온다.

그녀는 대답 대신 침묵을 택했다. 

“이 집에서 나 나가고 나서, 왜 연락 안 했어?”“할 말이 없었으니까요. 그리고 서지환 씨도 안 하니까 그냥 나도 자연스럽게.”“그동안 잘 지냈어?”“……그러려고 했죠. 나름.”그의 시선이 자신에게 닿고 있음이 느껴진다. 

희원은 모르는 척 천장만 바라보며 느리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러는 서지환 씨는 잘 지냈어요?”“……아니.”아주 늦은, 안부가 오고 간다.

“왜 연락 안 했어요?”“고백할까 봐.”……그녀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당신 괴롭힐까 봐.”“…….”“나는 잘 지내지 못했는데, 당신은 잘 지내고 있을 것 같아서.”“넘겨짚기는…….”“당신처럼 솔직할 자신이 없어서, 연락 못 했어.”불빛이 사라지고 눈앞에서 서로의 얼굴이 사라지자 진심이 오고 간다. 

희원은 자장가처럼 낮고 고요하게 울리는 그의 목소리에, 마음을 조금씩 놓았다. 

“그런데 후회했어. 조금 더 빨리 연락해볼걸. 이 집에서 나가지 말걸.”심장은 위아래로 뛰어오르는 것이 아닌,

밖으로 튀어나오려고 발악을 하는 것만 같았다. 

“당신이 그만하겠다고 했을 때 아무 생각 말고 그냥, 붙잡을걸.”터질 것도 같았다. 

“고백할걸.”이어지는 그의 한숨 같은 웃음소리에 그녀는 다시 눈을 떴다. 

약간은 슬프고, 아쉽게도 짧게 지나간 웃음소리가 심장 부근에 내려앉는다. 

그의 목소리에 어쩐지 가슴이 울리고 아파, 마음이 뭐라고 떠들고 있는 건지 알아채기도 힘들었다. 

“당신이 나한테 이겨달라고 했잖아.”“……그랬죠.”그녀가 간신히 대답을 하자 그의 말이 끊긴다. 

그는 숨을 뱉었고, 그녀는 숨을 들이 삼켰다. 

이겨줘요.  

당신을 괴롭히는 과거와의 싸움에서. 

“그 말 참 고마웠어. 고맙다고, 여러모로 고맙다고 인사 정도는 하고 싶어서.”“그게 뭐 인사 받을 일이라도 되나…… 그런데 왜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이 말 안 하고 넘어가면 내내 후회할 것 같아서. 그러고 당신이 말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모른다고 하니까.”한 이불을 덮고 널찍한 간격 사이로 누워, 마음을 전하는 대화를 하고 있는 지금.

희원은 어쩐지 매일매일 새로운 그를 발견하는 느낌을 받았다. 

처음엔 마냥 편하고 통하는 게 많은 사람이었는데.

“이기고 와달라던 말, 나 그때 농담한 거 아니에요. 알겠지만.”다음엔 감추는 게 많은 상처투성이, 남자를 보았다. 

“진심이었어요. 정말로.”“알아.”“…….”“가고 있어. 당신한테.”다음엔 나를 사랑한다는,

남자 서지환을 만났다. 

“나는 도착한 것 같은데, 앞으로 판단은 당신한테 맡길게.”그는 몸을 밀어 간격을 약간 좁혔다. 

아주 작은 움직임이었지만 좁아진 간격을 느낀 희원은 그대로 숨을 멎듯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거기까지.

그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고, 가까워지려 하지 않았다. 

잠을 청하려는 듯 그의 숨마저 내려앉은 때ㅡ 

비로소 그녀는, 그가 어떤 말을 하고 있는 건지 문득 알 것만 같았다. 

오늘 한 걸음, 그리고 내일 한 걸음 우리, 다가가자고.

“나 왔어.”“…….”“준비됐으면, 당신도 와.”당신, 마음 놓고 다가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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