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너의 꿈을 말해봐
일정을 모두 마친 희원은 동료들과 함께 탈의실로 돌아와 옷을 갈아입었다.
“배고파, 떡볶이 먹고 싶어.”누군가 옷을 갈아입으며 툭, 말을 뱉자 삽시간에 동요가 일었다.
“아아, 맛있겠다. 어묵 넣고 한껏 졸여서 진한 레드로 변한 시장표 떡볶이, 정말이지 퍼스널 컬러야. 내 인생 컬러.”“내 말이. 난 즉석 떡볶이 먹고 싶어. 밀떡…….”“난 목욕 가고 싶어. 뜨거운 물에 들어가고 싶다.”“으아아아…… 좋지…….”무대 위를 장악하던 무용수의 껍데기를 벗은 그들은, 먹고 싶은 것도 많고 가고 싶은 곳도 많은 평범한 청춘일 뿐이다.
“상상했어, 방금. 목욕하고 나와서 떡볶이 먹는 내 모습.”희원이 중얼거리자 다들 오늘 저녁은 떡볶이라며 아우성이다.
서지환 씨는 떡볶이 좋아하나? 매운 거 잘 먹나? 오늘 저녁에 떡볶이 먹자고 해볼까?
그녀는 자연스럽게 지환을 떠올렸다.
이젠 무얼 먹어도 함께 먹어야 하는, 우리는 가족이니까.
떡볶이만 오매불망 떠올리며 거울 앞에서 옷매무새를 점검하는, 그때였다.
“여보세요?”희원은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주혁이다.
ㅡ주혁입니다.“네, 대표님.”목소리만 들었을 뿐인데, 희한하게도 항상 그에게서 풍겨 나오는 향을 맡은 기분이 든다.
지환에게서 나는 부드러운 향과는 사뭇 다른 묵직한 향을.
ㅡ오늘도 선약이 있습니까?“오늘……요? 오늘은 아직…….”ㅡ할 말이 좀 있는데, 끝났으면 식사 어때요?네? 할 말요? 그녀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가 제게 할 말이라는 게 도무지 유추되지 않았다.
ㅡ그럼 허락으로 알고 장소는 메시지로 보낼게요. 이따 봐요.“아…… 네. 네, 대표님.”희원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던, 미안함이 자못 크기도 했다.
“대표님이 언니 자주 찾는 것 같아.”“맞아. 엄청 바쁠 텐데 언니 만나러 자주 오시는 것 같아. 부러워.”그가 사라지자 주변에 있던 무용수들이 그녀 곁으로 다가왔다.
좀처럼 다른 사람들과는 말을 섞지 않으며, 유독 희원과 대화를 나누는 주혁은 누구에게나 특이사항으로 보였다.
“부럽다, 언니. 대표님이랑 막 친하게 지내는 거 너무 부러워.”“부럽긴, 별게 다.”희원은 얼버무리며 태연한 척했다. 동료들의 부러움을 받는 건 부담스러웠다.
“나도 대표님이랑 얘기 좀 해보고 싶다. 나도 할 말 많은데.”“나도. 난 그분께 듣고 싶은 얘기가 많아. 내 무대 영상 좀 봐주셨으면 좋겠어.”“희원 언니, 혹시 대표님이 언니 마음에 들어 하시는 건 아닐까요?”“무슨 소리 하는 거야, 지금.”희원이 정색하자 동료들은 그럴 수도 있다며 눈을 커다랗게 떴다.
눈빛엔 기대가 가득하다.
“그렇잖아요. 대표님이 언니 공연 동영상도 다 봤다며. 혹시 언니를 캐스팅하려는 이유는 아닐까요?”……캐스팅.
“대표님이 언니 세계무대로 데뷔시켜주려고 하는 거 아냐? 난 막 그런 촉이 오는데?”“설마.”희원은 중얼거리며 가방을 들었다.
동료들은 미리 김칫국을 마시며 저들끼리 소란을 떨었다.
“아아, 상상만 해도 좋다. 우리 희원 언니가 세계적 무대로 데뷔하는 모습. 그렇지 않아?”“맞아. 떨려. 단지 상상만 했는데도 막 온몸에 소름이 돋아.”모두는 기대를 걸었다. 희원이 데니스 한에게 발탁되기를 은연중 바랐다.
그의 전지전능한 능력 앞에, 그녀가 날아오를 수 있기를 희망했다.
“나 가볼게!”“잘 가요, 희원 언니! 대표님이랑 무슨 얘기 했는지 내일 알려줘요!”아주 가능성 없는 이야기는 아닐 거라고, 모두는 생각했다.
지환은 야근이 확정이라는 소식을 전해왔고, 그녀는 저녁 약속이 있다고 말했다.
약속 장소에 도착한 희원은 주혁과 마주 앉아 식사를 이어가는 중이다.
“대표님께서는 어쩜 그렇게 매번 기획하는 공연마다 성공시킬 수가 있는 거죠? 궁금했어요.”희원은 평소 주혁 ㅡ 데니스 한에게 궁금했던 질문을 던졌다.
주혁은 앞서가는 길을 두려워하면, 실패는 벌어지지 않겠지만 성공도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시작하기 전엔 아무도 모르는 거라고.
“내년엔 브릭트먼 팩 감독과 함께 세계 전통춤과 관련된 공연 기획을 하고 있습니다.”“와…… 그러시구나.”“모든 전통춤엔 그 나라 국민성과 향이 묻어 있더군요. 발견할수록 즐거운 일이었습니다. 공연은 런던을 기점으로 시작하려고 합니다.”“런던…… 한 번쯤 가보고 싶은 곳이었어요. 런던은 어떤가요?”“음, 안개 낀 템스강을 끼고 타워브리지를 바라보고 있자면 회색 도시의 느낌을 물씬 받을 수 있죠.”“가보고 싶어요. 여행 리스트에 빠지지 않고 있는 곳이거든요.”“권희원 씨가 템스강 주변에 서 있다면 오만한 풍경도 누그러질 것 같은 느낌인데요.”주혁의 말끝에 그녀는 웃었다.
그가 오만하다 표현하는 회색도시 런던의 풍경을, 그녀도 느껴보고 싶었다.
그러다 문득 궁금한 것을 떠올렸다.
“저, 대표님은 많은 나라를 다니시죠? 그렇게 떠돌다보면 집이 그립진 않으신가요?”“……두 가지를 모두 얻을 수는 없더군요.”주혁은 물 잔을 들었다.
그녀가 와인을 거절한 까닭에, 오늘은 와인 없는 식사가 진행 중이다.
“가끔은 날 기다려주는 것이 그리울 때도 있지만, 다 가질 수 없다면 선택할 줄도 알아야 하니까.”“가족은…… 없으세요?”“있었죠.”“아, 죄송합니다.”“괜찮습니다. 내가 나를 몰랐던 게 잘못이었죠. 난 머물러 살 수 없는 사람인데 말입니다.”……머물러 살 수 없는, 사람.
어쩐지 주혁은 훌쩍 큰 어른처럼 여겨졌다.
어지간한 크기의 풍파는 눈길도 주지 않을, 강인한 사람처럼 보였다.
“난 이렇듯 떠돌지만 매번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인생을 택했습니다. 한곳에 머물러 살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오래전에 깨달았거든요.”“네. 그렇군요.”“권희원 씨는 어떤가요. 머물러 살 수 있는 사람인가요?”칼질을 이어가며 그가 눈길을 준다.
희원은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질문에 어깨를 으쓱 올려 보였다.
원했던 적이 있었지. 한없이 자유롭고 싶었다.
자유를 갈망하여 사랑 없는 결혼도 선택했던 내가 아니었던가.
“아니라고 말하기엔 고여서 잘 살고 있으니까요. 그런대로 만족하며.”
하지만, 이 시점에 그의 말이 떠오른 건 왜 일까.
“만족이란 상대적일 수밖에 없죠. 다른 인생을 경험해보지 않으면 비교 대상이 없으니까.”“그럴 수도 있어요. 하지만 내 삶에 충분한 행복을 부여하려고 노력하고 있으니까요.”
사랑한다고.
“권희원 씨.”“네. 대표님.”“혹시 다른 삶을 권고받는다면, 어떻겠습니까?”희원은 무심하게 이어가던 칼질을 멈췄다. 문득 동료의 말이 뇌리를 스친다.
혹시 언니를 캐스팅하려는 그런 이유는 아닐까요?
“이번 한국에서 가장 큰 수확을 얻었다면 권희원 씨, 당신을 만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언니 세계무대로 데뷔시켜 주려고 하는 거 아냐?
“권희원 씨, 이번 무대가 끝난다면 전 세계로 무대를 넓혀보는 것은 어떻겠습니까?”“……네?”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쿵, 하고 마음에 돌이 떨어져 내린다.
쿵, 쾅, 쿵, 쾅, 심장이 급격하게 요동치기 시작하고, 아무리 침착해보려 해도 손끝이 바르르 떨려왔다.
“당신에게 한국이라는 무대는 너무 작아. 나는 권희원 씨가 더 넓은 무대를 만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주혁은 그런 그녀를 주시하며 손등으로 턱을 괴었다.
매사 미소 지으며 유쾌하던 호텔 투숙객 한주혁은 어디로 가고ㅡ
“권희원 씨가 세계무대에서 성공하는 일, 가능하리라 봅니다.”“…….”“나와 함께라면.”진중한 눈길로 매섭게 말이 이어가는 NK 에이전시의 대표, 데니스 한이 앉아 있다.
“어…… 저기, 잠시만, 잠시만요, 대표님. 제가 지금 정신이 하나도 없…….”“나는 권희원 씨와 지금부터 이런 이야기를 지금부터 이어가보려고 하는데. 천천히, 차근차근.”그의 눈에 가득 찬 확신을 바라보며, 희원은 점점 더 가까워지는 꿈을 보았다.
“대화, 괜찮겠죠.”심장은 터질 듯이 뛰었다.
‘아, 맞다. 차 검사님 혹시 들으셨어요? 남 형사님 다시 복귀하셨대요.’정윤은 빠르게 복도를 걸었다.
‘누가…… 어디로 뭘 해요?’‘남현수 형사님이요. 지방 파견 끝내시고 돌아오셨다던데…… 어…… 알고 계셔야 할 것 같아서…….’심장은 쿵쿵 뛰었다.
곁에 누가 지나치는지도 모르게, 그녀 걸음은 무척이나 빨랐다.
‘검사님께선 아직 모르고 계실 것 같아서 알려드려요. 관할이 겹치니 언제고 마주치실 것 같아서. 게다가…….’‘…….’‘지금 서지환 검사님 방에 계세요.’그게 뭐 대수냐는 듯.
전 남편이 원래 관할로 돌아온 것이 뭐 대단한 일이냐는 듯 침착하게 그 자리를 파하고 나왔지만 전신이 저려왔다.
아무 파일이나 손에 쥐고 지환의 사무실로 향하던 정윤은 순간 우뚝 멈춰 섰다.
연거푸 숨을 뱉고 정신을 차려보자, 자신이 왜 이렇게나 동요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찾아가서, 뭘 어쩔 건데.”이혼 뒤 자신과 엮이는 것이 불편해 지방으로 자처해서 내려갔던 전 남편을, 이렇게 다시 만나 뭘 어쩌자고?
손에 쥔 파일이 미세하게 떨렸다. 정윤은 입술을 꾹 깨문 채 파일을 내려다보았다.
“그래. 일이 있어서 찾아가는 거야. 이거 서검한테 줘야 하니까.”그래. 다른 건 없다.
갑자기 전달해줘야 할 파일이 생각나 찾아가는 것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정윤은 결심한 듯 서둘러 다시 걸음을 옮기다가, 멈춰 섰다.
휴대폰을 꺼내 카메라를 틀고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화장이 지워지진 않았나, 머리가 헝클어지진 않았나.
그래. 이건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아니라, 너 없이도 잘 살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은 의지다. 의지.
정윤은 각오를 마친 듯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종전보다는 제법 전투적으로 변한 걸음. 정윤은 생각할 틈도 없이 단숨에 지환의 사무실을 열었다.
“내 결혼식도 못 올 만큼 바쁘다더니, 서울에 다시 온 소감이 어때.”“어지러워 죽겠습니다. 뭐 이렇게 빡빡한지. 이러니 정이 붙겠습니까?”……오랜만에 들려오는 목소리에 소름이 끼친다.
문을 반쯤 열고, 정윤은 멈췄다.
“그나저나 어떻게 하면 팔이 부러집니까, 모양 빠집니다.”“야, 그만큼 절박한 상황에서 아이를 구했…… 어, 차검.”지환이 열린 문틈 사이로 멈춰 서 있는 정윤을 발견하고 부르자, 깍지 낀 손을 무릎에 떨군 채 소파에 앉아 있던 그녀의 전남편이 고개를 돌린다.
정윤은 숨이 엉켜 헛기침을 뱉었다.
“저기, 차검 왔네. 남 형사.”“저도 눈 있습니다.”“들어와, 차검.”“……어라? 손님이 있었네?”정윤은 모르고 왔다는 것처럼 태연하게 말을 뱉었다.
당당하게 들어가자, 당당하게 행동하자.
그녀는 평소보다 더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들어섰다.
파일을 대충 지환의 책상에 던지며 그녀는 말을 뱉었다.
숨이 가쁜 탓에 말이 빨라졌다.
“문서상 기밀이니 확인하고 연락 줘. 손님 앞에서 직접 언급하기 그러니까.”“아, 그래.”지환이 힐끔 현수를 바라보며 고개를 작게 끄덕이자 정윤은 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두 사내를 등지고 있던 정윤은 다시 자신감을 장전한 채 그들을 향해 돌아섰다.
“여긴 왜 왔어? 어쩐 일?”엇. 나름 부드럽게 말하려고 했는데 의지와는 다른 냉랭한 음성이 튀어나간다.
후회했지만 무를 수가 없어, 정윤은 표정을 굳혔다.
굳이 딱딱하게 보이려 하지 않아도 긴장한 까닭에 얼굴이 굳어버렸지만.
그녀의 전 남편 ㅡ 남현수 형사는 한참이나 시간을 보내다가 입술을 열었다.
“겸사겸사.”그 짧은 대꾸에 그녀는 마른 주먹을 쥐었다.
동굴 속에서 말하는 것처럼 낮에 퍼지는 특유의 음성, 길게 말하는 법 없는 말투.
모든 것은 그대로였다.
“아아, 겸사겸사.”정윤은 그다지 관심사는 아니었다는 것처럼 과장된 표현을 하며 그의 말을 곱씹었다.
“겸사는 서검 만나는 일이겠고, 나머지 다른 겸사는 뭡니까? 남 형사님?”네? 네? 정윤이 눈을 부릅뜨며 묻자 현수는 입을 콱 다물었다.
그러자 정윤의 눈꼬리가 사납게 올라간다.
저, 저, 저 말 씹는 버릇! 여전하구만?!
사람이 변한 게 없어 변한 게!
“고향 내려가시니까 좋으셨어요? 네? 아주 좋으셨겠어요. 왜? 고향에서 살고 싶으시다더니? 네? 그냥 거기 쭉 계시지 여긴 왜 다시 돌아오셨어요?”“어어, 차검, 남 형사 돌아온 거 들었어, 벌써?”“……야, 서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지금!”“괜히 나한테 화살이 꽂혀, 새우 등 터지네.”지환이 중얼중얼하며 현수의 다리를 발로 툭툭 쳤다.
야야, 빨리 해결해. 쟤 지금 터진다.
“그냥 고향에서 풀이나 뜯고 소도둑이나 잡으면서 사실 일이지 여긴 또 왜 오셨냐구요, 남현수 형사님.”“뭔 대답이 듣고 싶은 건데 지금. 높은 데서 가라는 지시가 내려왔으니까 왔지, 달래 왔나?”“하! 완전 웃겨. 지가 언제부터 높으신 분들의 말씀을 새겨들으며 지냈다고.”정윤은 전 남편의 짤막한 대꾸에 팔짱을 끼며 코웃음을 쳤다.
하! 저 봐! 저 보라고 사람 환장하게 하는 말투!
“야야, 또 싸우냐? 싸우지 마, 여기서. 니들은 대체 몇 년 만에 만났는데 얼굴 보자마자 싸우냐?”지환이 보다 못해 거들자 현수는 고개를 홱 돌렸다.
허! 정윤 역시 불쾌하다는 듯 고개를 홱 돌렸다.
……나가면 그만일 일을, 꼿꼿하게 서서 전투력만 높이고 있다.
“야, 현수. 싸우지 말고 빨리, 빨리 사태 해결해.”지환이 발로 현수를 툭툭 치며 오만상을 찌푸리자 현수는 그러게 왜 불렀느냐는 표정을 지으며 쿨럭, 헛기침을 뱉었다.
고개만 꼿꼿하게 들고 딴 곳만 주시하는 전 와이프를 바라보다가, 현수는 말을 꺼내려고 했다.
지환은 일순 긴장했다.
그래! 이 분위기 좀 어떻게 해봐! 제발! 현수야!
“뭔 볼일이 있다고 그러고 서 있는 건데.”“나, 나갈 거야! 누군 여기 있고 싶어서 있는 줄 알아?!”……망했다.
지환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며 현수를 노려보았다.
“진짜 어이없어 죽겠네. 내가 지 보려고 이렇게 서 있는 줄 알아? 서지환 검사와 개인적으로 볼일이 있어서 기다리는 중이었거든?!”“……저랑요?”저랑 무슨…… 이야기를……?
지환이 자신을 가리키며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소환된 이유를 묻자 정윤은 손부채질을 했다.
이 와중에 나갈 생각은 없어 보인다.
현수는 포기한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볼게요. 팔 부러져서 술도 못한다며, 다음에 한잔해요.”“그래. 내가 보다시피 상황이 이래서. 깁스 풀고 연락할게, 진하게 한잔하자. 와인도 좋고.”“깡시골에서 나고 자란 놈한테 와인은 무슨, 소주나 한잔해요.”살갑지 않은 성격처럼 남방을 무심하게 툭툭 털고 일어난 현수는 별 인사 없이 소파를 돌아 나왔다.
뭐라도 인사하겠거니,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린 채 은근 기다리던 정윤은 현수가 아무 말 없이 문을 열고 나서려고 하자 눈을 크게 떴다.
“어, 얼마나 있었다고 벌써 가? 가도 내가 가야지 왜 먼저 가는 건데?”“할 말 있다며, 서 검사님하고.”“내일 해도 돼! 우리는 맨날 만나는 사이니까!”“……저랑요?”저랑 매일 만나요……? 언제부터……?
다시 소환된 지환이 의문스럽게 묻자 정윤은 콱 씹으며 쿵쿵쿵 앞으로 나아갔다.
현수와 가까워지듯 서더니, 그가 잡고 있던 문고리를 그녀가 붙잡았다.
그녀의 움직임에 현수는 빠르게 문고리를 놓았다.
“예나 지금이나 그 거지 같은 성격. 퉤.”“잘 지냈고?”“그래! 잘 지냈다! 왜! 너도 잘 지낸 모양이네! 신수가 아주 훤하셔! 아주 그냥!”“……맞나.”“간다! 가! 비켜!” 정윤은 홱 하니 서검의 사무실을 나서 떠나버렸다.
그녀가 열어놓고 간 문틈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자, 지환은 그런 현수를 바라보다 혀를 끌끌 찼다.
“차검, 쟤는 꼭 너만 만나면 바이오리듬의 디폴트가 분노로 형성되더라.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네.”“제가 죄 많은 놈입니다. 다 제 탓이죠 뭐.”“현수야. 그러니까 다른 겸사의 이유가 너라고 말을 했어야지. 차검, 너 보러 왔다고.”지환이 안타깝다는 듯 조언하자 현수는 헛웃음을 지으며 문고리를 잡았다.
“넘겨짚지 마십쇼. 갑니다.”“그럼 다음에 또 놀러 와라. 차검 화난 모습 오랜만에 보니 그것도 재밌네.”“일 없으니 쾌차나 하십쇼. 형수님께 안부 전해주시고. 갑니다.”현수는 무심하게 나가며 쿵, 문을 닫았다.
전 남편과 전 와이프. 검사와 형사 사이.
이혼 후, 2년 만의 재회였다.
‘왜 나예요?’주혁을 만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터덜터덜, 희원은 주차장에 차를 세우며 내렸다.
‘왜, 제가 선택되었는지 물어봐도 돼요?’‘당신이니까.’‘…….’‘그렇게 자신이 없습니까? 자신의 능력에 대해?’이야기 끝에 했던 자신의 질문을 곱씹다가 희원은 멈춰 섰다.
“너무…… 바보 같은 질문을 했어.”아직도 그의 제안에 대한 깊이가 현실로 다가오질 않고 주변을 배회한다.
희원은 웃음도 울음도 나지 않는 멍한 상태로 집까지 도착했다.
그가 계획한 세부적인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현실감은 사라져갔다.
터덜터덜, 왜인지 흥이 나지 않고 걸음이 무겁다.
‘지금 답하라는 것 아니니 집으로 돌아가서 생각해봐요. 갑작스러울 테니.’그토록 바라던 일인데.
너무나도 꿈만 같은 일인데.
언제부터인가 주혁이 그런 제안을 해올까 봐, 겁이 났다.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질까 봐, 은연중 불안하기도 했다.
갈등할까 봐. 고민할 일이 생길까 봐.
“미치겠다…….”마냥 기쁘고 행복하기만 한, 그런 제안이 아님을 실감하게 될까 봐.
희원은 어깨를 축 늘어트린 채 긴 한숨을 뱉었다. 지환을 떠올리니 마음은 한없이 복잡해져갔다.
스스로도 어떤 길을 택해야 하는 건지 알 수 없을 때.
그래서 발걸음이 자꾸만 무겁게 여겨질 때.
발걸음 소리를 죽이고 곁으로 다가온 낯선 사내의 손이 뒤에서 허리를 감싸 안는다.
허, 소리를 뱉으며 동시에 느껴지기를ㅡ
위협적이지 않고 다정하며 익숙한 향이 느껴져ㅡ
“이제 왔어?”“어, 언제 왔어요? 차도 안 가져갔잖아. 주차장엔 왜…….”지환임을 알아챈 그녀는 마음을 놓았다.
“당신 올 것 같아서 기다렸어. 얼마 안 됐고.”지환은 뒤에서 그녀를 한 팔로 안았다.
깁스가 불편한 탓에 제대로 안을 수는 없었지만, 그런대로 서 있을 만했다.
그녀가 움직이려 하자 그는 조금 더 힘을 주었다.
“잠시만.”……찰나를 영원으로 만드는 재주를 탐하고 싶은 순간.
“잠시만 이러고 있자.”희원은 지환의 말에 우뚝 멈춰 섰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그의 선연한 온기가 낯설었지만 완강하게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마음이 많이 지친 까닭에, 버둥거릴 힘조차 남아 있지 않은 것만 같았다.
“오늘 아침에 당신이 물었던 질문에 대한 답, 어땠어.”이런 와중에도 그의 질문에 피식 웃음이 난다.
그녀는 아침에 느꼈던 감정이 살아나는 것을 느끼며, 잠시 번뇌는 묻어두기로 했다.
“괜찮았어요. 조금 놀라기도 했죠.”“그런데 있지, 나 그 대답 정정하고 싶어서.”“응? 정정?”……사랑한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하고 싶다던 남자는, 다른 마지막 말을 택하고 싶다고 했다.
희원은 잠자코 그의 말을 기다렸다.
“답을 정정할게.”그러다가,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에 천천히 눈을 감았다.
등 뒤에서 울려 퍼지는 내 남편의 마지막 말을 들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