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따뜻하던
“부인, 남편은 이만 과중한 일과를 해치우러 떠나겠소.”“뭐예요, 아침부터 그 이상한 말투는?” 아침 출근 시간.
희원은 뚱한 표정을 지으며 출근길을 서두르는 지환을 바라보았다.
셔츠도 입혀주고, 넥타이도 예쁘게 매 줬더니 이상한 말투를 시전하고 계신다.
“부인께서도 오늘 하루 고되겠으나 보람찬 하루를 보내고 돌아오시오.”“대체 왜 그러는 거냐구요, 벌써부터 사람 고되게.”눈을 뜨자마자 저런 상태인 남편을 바라보다가 희원은 질색하는 표정을 했다.
진심으로 싫어하는 태가 나자 지환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그냥, 뭐, 당신이 뭘 좋아하는지 몰라서 앞으로 이거저거 시도해보려고.”“참나.”“한국 무용하니까 이런 말투 좋아하지 않을까 해서.”“왜? 이왕 하는 김에 도포 자락 휘날리며 갓 쓰고 말 타고 출근하지?”“그래도 부인께서 이 사람을 사대부의 사내로 인정해주니 참으로 고마울 따…….”“시끄럽고 빨리 출근해요! 이상한 사람이야, 정말!”“넵.”희원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지환은 눈치를 슬슬 보다가 현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눈을 가늘게 뜨던 그녀는 그런 지환이 귀엽다는 듯 피식 혼자 웃으며 그 뒤를 따라갔다.
밤새 저런 말투를 생각했을 그의 엉뚱함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 남자, 가끔 보면 귀여워. 희원은 지환의 어깨를 툭툭 털어주며 말을 이었다.
“서방님, 그럼 오늘 하루도 막중국사에 지쳐 쓰러지지 마시옵고 힘을 내시옵소서.”“뭐야!”지환이 홱 돌아보자 희원은 웃음을 터트렸다.
“배신자. 아닌 척하면서 혼자 즐기고 있었어.”“즐기다니요. 오해십니다, 서방님.”희원이 맞장구를 치며 연신 웃음을 터트리자 지환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다가 따라 웃음을 터트렸다.
……어제의 피곤이 채 물러가기도 전에 맞이한 아침.
자못 무기력하고 우중충한 집안의 분위기를 환기하는 일은, 그다지 어렵거나 대단하지 않았다.
시시콜콜한 농담에 크게 한 번 웃고 마는 것.
덕분에 활기찬 아침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것.
“자, 농담은 그만하고 늦겠어요. 어서 출발해요.”희원은 현관 앞에서 떠나질 않고 머뭇거리며 시간을 끄는 지환의 등을 밀었다.
그러자 지환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그녀에게 다가가며 목덜미를 가볍게 그러쥐었다.
당기듯 끌어, 입술을 올렸다.
……이마에 닿는다.
“진짜 다녀올게.”갔다가, 올게.
“그래요. 다녀와요.”희원은 이마에 그의 입술이 닿자마자 뒷걸음을 치며 가볍게 멀어져 손을 흔들었다.
표정 변화가 없는 희원을 바라보다가 지환은 씩 웃고는 현관문을 열고 나섰다.
쿵, 문이 닫히자 희원은 가만히 서 있다가 자리에 풀썩 쓰러져 앉았다.
“끄, 끌어당겼어…….”목덜미를 움켜쥐고, 허락 없이 끌어당기며…….
“어우, 뭐야. 왜 이렇게 심장이 뛰어. 이게 뭐라고.”심장이 발악을 하듯 뛰고 내려 희원은 심장 부근에 손을 가져다 댔다.
하리의 고집으로 인해 단순히 뽀뽀를 할 때도, 이마에 지분이 있다며 느닷없이 입술을 가져다 댈 때도 이렇게 떨리진 않았던 것 같다.
오히려 하루하루 지날수록 익숙해져서 조금씩 무뎌져갈 거라 생각했는데.
목덜미 한 번 휘어 잡힌 여파는 생각보다 강력했다.
희원은 멍하니 앉아 있다가 목덜미가 뻐근할 때처럼 손으로 목덜미를 지그시 눌렀다.
“모, 목덜미가 뜨거운 것 같아…… 어떡해……”그의 악력, 온기, 코트에 배어 있던 향기, 이런 것들이 한꺼번에 뒤섞여 그녀를 강타했다.
희원은 자신의 반응이 본인도 황당하다는 것처럼 고개를 번쩍 들었다.
남편한테 목덜미 한 번 휘어 잡혔다고, 이러기 있냐? 권희원?
“이, 이, 이, 입술에 한 것도 아닌데. 나 왜 이렇게 오버야? 지금 완전 황당한데?”키스라도 하면 볼만하겠다?
허리라도 휘어 잡히면 입에 거품 물겠어?
“아하하, 하하하, 하하…… 권희원, 너무 웃겨, 너무 웃겨어…….”이런 상태라면 그 이상의 진도는 꿈도 못 꾸잖아!
희원은 기계적인 하하하, 웃음을 내뱉다가 뚝 그쳤다.
눈만 깜빡깜빡거리다가 천천히 목덜미를 쥐고 있던 손을 내렸다.
“잠깐만. 이거 뭔가 이상한데?”나 지금 서지환 씨한테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냐? 이건 마치 아무런 문제 없는 신혼부부의 모습인데?
……생각해보니 지금 자신의 모습은 말과 행동이 전혀 따로 노는, 서지환 이라는 남자에게 온통 마음을 내어준 여자처럼 행동하고 있다.
그도 어느새 자연스럽게, 자신이 마음을 열었다고 확신한 것처럼 굴었다.
“뭐야. 우리 지금 이 상황, 이 관계 무엇?”그냥 우리 이렇게, 그냥 막 흘러가는 거야? 물처럼?
가만히 생각에 잠기던 희원은 깨달았다는 것처럼 미간을 좁혔다.
“맞아. 서지환 씨가 팔이 부러지면서 우리 집에 왔잖아. 그러면서 갑자기 유야무야 이렇게, 관계가 막 이렇게 급진전…….”병간호를 해줘야 한다는 생각에 데려왔을 뿐인데 자신의 상태는 점점 위험해져갔다.
한 침대를 쓰고 있지, 걸핏하면 이마에 입술 맞추지.
난 또! 그럴 때마다 가만히 있지!
“이럴 게 아니라 뭐라도 사달을 내야겠어. 병간호의 수준을 뛰어넘은 지금 이 상황, 이대로 그냥 흘러가게 두면 안 돼.”흥. 희원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전의를 불태웠다.
유야무야 넘어갈 수는 없는 일이다. 팔이 부러졌다는 이유 하나로, 이렇게 은근슬쩍 합쳐질 수는 없는 거니까.
그래. 맞아.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뭐든 확실한 게 좋은 거니까.
“여사님, 피곤하시죠! 좀 쉬엄쉬엄하셔도 됩니다.”“왔으면 열심히 해야죠. 괜찮습니다.”희주는 자신의 숙소로 찾아온 봉사단체 사람과 대화를 나누었다.
최빈국에서 일어난 강진. 그로 인해 십수만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재난민의 수는 당장 셀 수도 없었다.
임시 거처를 마련해줄 수 없는 정부의 무능함에 집을 잃은 사람들은 갈라진 도로 위에서 잠을 청했다.
식수도 부족하고 먹을 것도 부족했으며, 환자의 수에 비해 의료진 또한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사람들의 눈물은 끊이질 않았고, 설상가상 오염된 공기 속으로 전염병이 침투했다.
역사상 최대 규모의 대지진, 아비규환.
차마 눈을 뜨고 마주하기 힘든 참담함은 현장에 오지 않는 이상 경험하기 힘들었다.
“여사님께서 적극적으로 나서주신 덕분에 한국에서 많은 지원이 오고 있어요. 정말 감사드립니다.”“뭐라도 도움이 된다니 정말 다행이에요. 저는 알아서 잘 있을 테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된답니다.”그 가운데에, 희주가 있다.
봉사자들은 그녀의 열성적인 태도에 연신 감탄했다.
직접 왔다는 것도 신기한데, 사진 몇 장 찍고 인터뷰나 하며 그림이나 완성하려 하는 여타의 유명인사와는 달라도 무척 달랐다.
“그래도 저희는 여사님 몸 상하실까 봐 걱정입니다. 안 그래도 이렇게 험한 일은 해본 적 없으셨을 텐데, 혹시 병이라도 걸리실까 봐…….”“몸은 힘들어도 마음은 편해요. 이런다고 지은 죄가 덜어지진 않겠지만, 무엇이라도 속죄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그런 거니까.”“네? 속죄……요?”봉사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희주는 빙긋 웃었다.
“농담이에요. 그냥 보고 있자니 자꾸 마음이 쓰여서.”“아…… 하하, 농담. 네.”“그리고 저, 원래 험한 일 전문이었어요.”맨 얼굴, 갈아입어도 금세 더러워지고 마는 흰 티셔츠.
그녀는 어느 때 어느 일보다 더욱 열심히 구호 현장에 매달렸다.
한국에서 뭐라고 떠들건 간에, 남편의 지지율이 올라가고 있건 말건 간에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지금이 편했다.
“사모님, 양 비서입니다.”“들어와요.”때마침 그녀의 비서가 찾아오고 봉사자는 퇴장했다.
피곤함에 어쩔 수 없이 무거워진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희주는 손을 씻었다. 양 비서는 그녀 곁으로 다가왔다.
“한국에서 연락 온 거 있어요?”“네. 의원님께서 주신 연락은 아니고, 그게, 그러니까.”무슨 말이기에 뜸을 들이나, 희주는 힐끔 양 비서를 바라보았다.
휴대전화가 잘 터지지 않는 터에 그녀는 한국에서 오는 연락을 직접 받을 수 없었다.
대부분의 연락은 비서를 통했고.
“임광호 씨라고…….”“……누구?”비서가 의외의 인물을 언급하자 희주는 급히 물을 껐다. 오랜만에 듣지만 잊을 수도, 지울 수도 없는 이름.
그는 자신이 연예계 생활을 하던 때의 매니저다.
그때 그녀는 욕심이 많은 매니저에게 모든 것을 믿고 맡겼고, 의지했다. 그것이 실수였을까.
“임광호 씨라고 합니다.”“그런데? 그 사람이 왜?”“어제 사망했다고 연락이…….”“뭐라고……?”죽어?
죽었다고?
“과도한 빚에 시달려 괴로웠다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했다 합니다. 연락은 고인의 동생이 남겼습니다. 고인의 휴대폰에 사모님의 번호가 남아 있었다면서.”“그러니까, 그러니까, 자살을…….”“…….”“자살을…… 했다고……?”“네. 사모님.”희주는 입술을 멍하니 벌렸다. 뜻밖의 이야기에 그녀는 할 말도 잃어버렸다.
“어떻게 처리할까요. 조의금을 전달할까요? 아니시면 근조화환이라도…….”“일단 알겠으니까 나가 봐요. 다시 부를 테니까.”“네, 사모님.”희원은 의자에 앉았다.
충격을 받은 그녀의 눈동자는 하염없이 떨렸다.
“죽다니, 자살을 했다니, 대체 왜…….”삶에 대한 의지가 강력하고 욕심이 많은 그가 자살을 택하다니. 좀처럼 믿을 수가 없었다.
“아아, 양 비서.”“네, 사모님.”희주는 밖을 나서는 비서를 다시 불렀다.
그의 자살을 쉽게 수긍하지 못하는 건ㅡ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자꾸만 벌어지는, 그런 삶에 놓인 까닭이기도 했다.
그런 이유로 희주는 지금 이 순간, 남편의 얼굴을 떠올렸다.
“한국으로 돌아가야겠어요. 준비해줘요.”……예감이 좋지 않았다.
“네? 당장, 말씀이십니까?”“그래요. 당장.”죽은 임광호는 옛 연인이었던 지환을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었으므로.
“지금, 당장.”
정신없는 하루가 지나고 급하게도 어둠이 진다.
겨울은 여름의 하루보다 더 짧게 느껴지는, 그래서 모든 것이 여름보다 빠르게 정리되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 도시 위로, 차가운 눈이 내린다.
“여보세요? 나예요. 나 거의 다 왔어요.”희원은 오늘도 지환의 퇴근 셔틀을 자처했다.
아침에 다짐한 대로 오늘, 남편과 사생 결단을 내야겠다.
이대로 마음이 물처럼 흘러가는 건 두고 볼 수 없으니까 말이야!
ㅡ그래? 벌써 다 왔어? 천천히 와도 되는데. “밖이야? 시끄러운데요?”어수선한 소리가 들리자 희원은 물었다. 그는 사무실에서 나와 걷는 중이라고 했다.
ㅡ차가 멈추기 좋은 곳까지 걸어가려고. 걸으니까 좋네.“좋긴, 차 엄청 막혀. 그럼 걸으면서 기다려요.”희원은 지환과 만나기로 한 장소를 확인한 뒤 전화를 끊었다.
후, 후…… 긴 숨을 뱉으며 그녀는 조금씩 전투력을 상승시켰다.
“팔도 일부러 부러트린 거 아냐? 아니면, 부러지지도 않았는데 일부러 깁스하고…….”……아니, 그건 아니지.
응급실 의사 선생님들이 부러지지도 않은 팔에 깁스를 해주셨을 리는 없지.
“은근슬쩍 집에 들어앉아서는 남편 행색을 제대로 하시겠다? 막 뒤에서 앉고 이마에 뽀뽀하고 한 침대 쓰자고 하고. 어? 문제가 많아? 서지환?”희원은 길이 미끄러운 탓에 조심조심 느리게 갔다.
스스로 생각 정리를 하는 듯 혼잣말은 늘어갔다.
“뭐? 그때 뭐라고 했더라? ‘나 왔어. 준비됐으면, 당신도 와.’ 이랬지? 이렇게 말했지?”희원은 지환의 목소리를 따라 하듯 입술을 쭉 내밀고는 굵은 목소리를 내었다.
“뭐, 그렇게 말하면 다 성공인 줄 아나 본데, 내가 막 받아주고 마음 열고 그럴 줄 아나 본데 천만의 말씀! 사람 만만하게 봤다고요!”설레게 하고, 선도 없이 막 넘어오고.
나는 막, 그런 거에 또 물색없이 넘어가고!
“정리가 필요해. 교통정리. 오늘 아주 혼쭐을 내줄 거야.”감히 동의도 구하지 않은 채 날 설레게 한 죄를 물어주마. 서지환 딱 기다려.
흥, 흥, 희원은 연신 코웃음을 치며 운전을 했다.
어, 저기. 앞으로 걸어가고 있는 지환의 뒷모습이 보인다.
희원은 대로변에 바짝 붙어 천천히 운전을 하며 그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넓은 어깨, 곧은 걸음걸이, 앞모습을 기대하게 하는 멋진 분위기.
희원은 애정이 섞인 눈길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멈칫, 했다.
……혹시나 당신, 지금 쓸쓸한 표정을 짓고 있지는 않을까.
그녀는 주차장에서 지환의 힘든 얼굴을 목격한 때를 떠올렸다.
지금 당신의 얼굴도 그때처럼 어둡거나, 힘들거나, 슬퍼 보이지는 않을까.
아직도 여전히 혼자일 때면ㅡ 웃음 같은 건 모르고 사는 남자의 얼굴을 하고 있지는 않을까.
……희원은 조금 더 속도를 냈다.
천천히 걷고 있는 그를 스치며, 그녀가 타고 있는 차량은 앞서갔다.
간격이 더 벌어지기 전에 희원은 룸미러로 그의 얼굴을 확인했다.
끼이이익. 그녀는 차를 멈췄다.
땅을 보며 걷고 있는 그의 표정은 잘 확인이 되지 않았지만, 예감할 수 있었다.
그가 다정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는걸.
“아…….”누군가를 떠올리고 있는 듯 도로를 훑는 그의 입가에 둥근 미소가 자리한다. 희원은 아직 자신의 차량을 발견하지 못한 채 느리게 걷고 있는 그를 바라보았다.
간간이 뒤를 돌아보며, 혹시 익숙한 차량이 보이지는 않을까 기대하는 그의 눈빛이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진심으로 그의 표정은 편안해 보였다.
희원은 운전석에서 내렸다.
눈이 내리는 거리, 느린 걸음을 걷는 그대.
……문득 어제의 라디오 사연과, 그가 어젯밤 지하 주차장에서 제게 해준 말이 동시에 떠올랐다.
어제, 그 지하 주차장에서ㅡ
내가 오기만을 기다렸던 그는, 다정하게 나의 등을 감싸며 질문에 대한 답을 내어주었다.
[지금은 매일매일 아내에게 사랑한단 말을 하고 있어요. 마지막이라는 건 예고 없이 온다는 걸 깨달았으니까요.]‘답을 정정할게. 사랑한다는 말은 앞으로도 많이 할 테니까, 난 조금 더 당신에게 특별한 말을 해주고 싶어. 만약에 마지막이라면. 이런 말은 살면서 자주 하지는 않을 테니까.’‘뭔데요?’‘당신은 최고야.’‘…….’‘최고의 아내고, 최고의 여자고.’[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명심하세요. 모든 말은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는걸.]희원은 여전히 자신을 발견하지 못한 그에게 빠른 걸음을 옮겼다.
라디오의 사연과, 그의 답변과, 내리는 눈과ㅡ
가까워 오는 것만 보아도 저절로 맡아지는 그의 향이ㅡ
뭉쳐지고 단단해지다가, 눈사람처럼 우뚝 세워진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기 좋은 날은, 바로 오늘입니다.]그녀가 자신을 발견하기 쉽도록 느리게 걷던 지환은 가까워 오는 그녀를 발견하곤 우뚝 멈춰 섰다.
바로, 오늘.
“어? 당신 어디서 왔어? 눈 오는데 왜 나왔어, 차에 있…….”……희원은 그의 코트 속으로 손을 뻗었고, 허리를 감싸 안았다.
잘 움직이지 못하는 팔을 어정쩡하게 두고, 그는 놀라 커다래진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무슨 일 있어? 왜 이래, 사고 났어?”“응. 나 사고 났어.”“어디서 사고 났어. 다친 곳은 없어? 놀라서 이러는 거야?”“응. 나 놀라서. 많이 놀라서.”알아들을 수 없는 대꾸만 늘어놓으며 품을 파고드는 희원을 바라보다가, 지환은 잠시 말을 멈췄다.
어련히 알아서 털어놓을 때까지 기다려보려는 심산인 것 같았다.
그러나 이제 발견한 그녀의 자가용은 저 앞에 멀쩡히 서 있고ㅡ
여전히 그녀는 품을 벗어날 생각이 없어 보이고ㅡ
“눈 맞잖아. 춥게.”지환은 오른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가렸다. 코트를 조금 여미며 그녀를 품에 가두었다.
갑자기 그녀가 왜 이러는 건지 알 길은 없었지만, 그냥 이대로.
원한다면 언제까지고 그냥 이대로, 두고 싶었다.
그의 손바닥을 우산 삼아 한참.
그렇게 한참 그의 품에 안겨 숨을 쉬던 그녀는 마침내 입술을 열었다.
“있잖아, 언제까지 우리 집에 있을 거예요?”“어? 어? 아, 어. 팔 다 나을 때까……지……라도…….”“그 팔 다 나으면, 다시 나갈 거예요?”“어? 아, 어…… 아…… 어…… 아니…… 뭐…… 딱히…….”그녀가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 건지 감을 잡지 못해 지환은 말꼬리를 흐렸다.
불리할 땐 묵비권이 최고의 선택이다.
희원은 처음으로 파고 들어본 그의 품이 낯설고, 생각보다 따뜻한 까닭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눈을 맞을까 코트로 자신의 등을 여미며 손바닥으로 머리를 가려주고 있는 그의 행동에, 마음은 계절과는 상관없이 따뜻해져갔다.
“1가구 2주택, 어떻게 생각해요?”“어? 아, 어…… 상당히 문제가 많지…… 라고 답을 해야……겠나…… 아닌가……?”“그 집, 언제까지 비워둘 건데? 들어가 살 사람도 없는 그 집.”지환은 바로 답을 내어놓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조금씩 그녀 생각을 유추하다 보니, 무언가 답을 강요하는 듯한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그는 조금 더 코트를 여몄다. 네가, 언제고 따뜻했으면 좋겠다.
“합쳐 살자. 나 그 집 처분할게.”“진심이에요?”“그러고 싶은데. 나, 당신하고 살고 싶어.”“그래요, 그럼. 그렇게 해.”……이런 말을, 진정으로 원했다고?
지환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고개가 내려온다는 것을 깨달은 그녀는 민망한지 얼굴을 그의 가슴팍에 조금 더 묻었다.
“서지환 씨가 책임져요, 나 당신 때문에 사고 났으니까.” “대체 무슨…….”“설레기 시작했단 말이야. 다시 또.”……얼굴에 달라붙는 눈발이 조금도 시리게 느껴지지 않는다.
지환은 너무 놀라 우뚝 멈춘 것 같은 상태로 입술을 멍하니 벌렸다.
희원은 천천히 그의 가슴팍에서 눈을 떴다.
“버틸 자신이 없어. 나 말 자주 바뀐다고 뭐라고 할 거예요?”“그, 그, 그럴 리가! 그럴 리가!”“도착했다며, 이겼다며. 정말 믿어도 돼요?”“……믿어. 괜찮아.”“믿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없다며. 당신이 그랬잖아.”“그래도 믿어. 어리석게 만들지 않을 테니까.”희원은 그의 목소리를 가슴에 녹이며 천천히 다시 눈을 감았다.
어제, 주차장, 우리가 나눌 수 있는 마지막 말이라면 꼭 이 말을 해주고 싶다던 그의 말은ㅡ
그녀를 충분히 뜨겁게 했다.
당신은 최고야.
그래, 나는 그거면 되었다.
당신 없는 공간의 성공 같은 건, 슬프게도 이젠 필요 없어.
최고의 아내고, 최고의 여자고.
날 사랑해주는 사람에게 최고라면,
그 안에서 자유로울 수도, 꿈을 꿀 수도 있어.
최고의 무용수야. 당신은.
“서지환 씨, 나도 준비됐어.”“…….”“이제 막 도착했어요.”약속해.
우리, 서로의 우산이 되어 줍시다. 서로의 등불이 되어 줍시다.
“그래, 당신 잘 왔어.”서로의 꿈이, 되어줍시다.
“나, 이제 당신 안 놓쳐.”……도시 위로 따뜻한 눈이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