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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반딧불을 당신께 (64/98)

64. 반딧불을 당신께

“그래서, 현수 만나서 얘기는 잘한 거냐?”“잘하긴 뭘 잘해! 주먹이 몇 번 날아가려다가 멈췄는지 네가 알아?”아오씨. 정윤은 분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지환을 흘겨보았다. 

“서검 너, 한 번만 더 나한테 남현수 찾아가라고 지령 내리면 진짜 죽는다. 알겠어?”“허어, 내가 언제 찾아가라고 했던가? 전화로 해도 될 일을 굳이 찾아가 대면한 건 자네가 아닌가?”“시, 시끄러워! 하여튼 너 때문에 되는 일이 없어 되는 일이!”“아아. 그 대목은 무척 마음에 드네. 자네가 되는 일이 없다는 것이 이렇게 또 내게는 행복이…….”“이것들이 진짜 쌍으로 사람을 빡치게 하네. 야, 너 나와. 책상 돌아 나와.”정윤이 한판 뜨자며 나오라고 손을 휘젓는다. 

구경하던 최 계장은 웃음을 터트렸고, 지환은 입술을 꾹 다문 채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정윤의 일그러진 표정엔 전 남편과 얼마나 박 터지게 싸우고 왔는지 여실하게 적혀 있었다. 

“야 인마, 차검. 너랑 현수는 대체 애들도 아니고 왜 그렇게 싸우냐?”“내가 싸우고 싶어서 싸웠어?”“같이 살 때는 어찌 되었건 같이 살아보려고 싸웠다 치자. 이혼까지 했는데 뭘 그렇게 죽일 듯이 싸워, 싸우기를.”“걔가 자꾸 나한테 시비 걸잖아! 나이도 나보다 어린 게! 성깔은 드러워 가지고!”“언제는 연하여서 좋다더니? 박력 있는 성격 니 스타일이라더니?”“……죽을래 진짜? 깁스도 풀었는데 기념으로 나하고 한 판 떠? 진짜?”어억. 진짜 열받았다. 

지환은 곱게 입을 다물겠다는 표시로 입에 자물쇠를 채우는 시늉을 했다. 

어쩌면 저렇게 상극인 사람들이 만나 결혼까지 했던 건지 알 수가 없다. 

뭐, 결국엔 안 맞으니 이혼까지 했겠지만.

……휴. 정윤은 화를 내봐야 소용없다는 걸 인지한 듯 짧은 한숨을 내쉬며 분노를 다스렸다. 

전 남편과 형사과 앞에 서서 대화를 나눈 시간이라곤 고작해야 10분 남짓.

거짓말 조금 보태서 1분에 한 번씩은 싸운 것 같다.

“어쨌든 얘기는 전달했어. 그 똥멍청이가 잘 이해했는지는 모르겠지만.”“그래. 수고했다.”지환이 영혼을 싣지 않고 말하자 정윤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진다. 

기필코 한 대 후려치고 말겠다는 의지가 그녀 얼굴에 새겨지자 촉이 좋은 최 계장은 종이컵을 구겨 휴지통에 던지며 정윤의 가까이 다가섰다. 

“아이고, 차 검사님. 어때요? 형사님들 여전히 바쁘시지요?”“네, 뭐, 그렇더라고요. 다들 밤 새우고.”“밤을 새운다는 게 보통 일이 아닙니다. 뭐, 우리도 그렇지만 다들 힘든 일이에요.”최 계장은 말끝에 지환을 바라보았다. 

“이쯤 질문 하나. 서 검사님은 왜 이렇게 열심히 일하십니까?”“저요? 저는 갚을 밥값이 남아서.”하…… 또 생각났다…… 

밥값…….

“예? 밥값? 하하하, 하긴. 빚만큼 사람 열심히 일하게 만드는 게 없죠.”“그러는 계장님은 왜 이렇게 열심히 일하십니까?”“저야 뭐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먹여 살릴 처자식이 있는데, 열심히 해야죠.”지환은 최 계장을 바라보며 빙그레 미소 지었다. 

“그러는 차 검사님은 왜 이렇게 열심히 일하십니까?”최 계장이 이번엔 정윤을 향해 물었다. 

지환의 책상에 있던 서류더미 중 아무거나 집어 들어 훑던 그녀는 가볍게 입술을 열었다. 

“저는 먹여살려야 할 제가 있거든요.”“……네?”“저요. 저. 저는 저를 먹여살려야 한다고요.”“아…….”아아. 네. 최 계장은 예상하지 못한 정윤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종이를 넘기며 정윤은 말을 이었다. 

“내 위장 내가 안 벌어 먹여살리면 누가 먹여 살려주겠어요? 그래서 지치면 안 돼요. 열심히 살아야 하고요. 저는 세상 그 누구보다 잘 먹고 잘살아야 하거든요.”“네네. 좋은 말씀입니다.”최 계장은 분위기가 온화해지는 것을 느끼며 치고 빠졌다. 

지환은 어느덧 평온해진 정윤을 힐끔 바라보다가 입술을 열었다. 

“아, 맞다. 나 너한테 할 말 있다.”“뭔데?”“고마웠다고. 우리 쇼윈도 거 알면서도 모른 척해준 거.”“아아, 그거.”여전히 그녀 눈길은 서류를 훑고 있다. 

“그게 뭐 대수라고. 어차피 인생 다 쇼윈도 아닌가? 회사건 밖이건 사람 부딪치는 곳에선 결국 다 쇼윈도로 사는 건데.”“오, 철학적인 접근인데.”“맞잖아. 인생은 쇼윈도야, 너나 할 것 없이. 진정한 ‘나’로 사는 사람 몇이나 되겠어? 별생각 없었어. 그래서 아는 척 안 한 거고.”……모두가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세상. 

회사에선 직함으로, 사회에선 관계로, 감정과는 다르게 말하고 웃어야 하는 매일매일.

“결혼이라고 뭐 다를까 싶네. 중요한 건 쇼윈도냐 아니냐가 아니라. 그래서 행복해? 아니면 불행해? 이것밖에 없으니까.”진짜 내가 누군지, 나도 나를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세상.

“쇼윈도라고 덜 행복하고 쇼윈도 아니라고 더 행복하고, 그런 건 아닌 것 같아.”“…….”“어찌 되었건 희원 씨한테 잘해줘. 두 사람 보기 좋더라.”정윤은 무심하게 중얼거리며 다 훑었다는 듯 서류를 내렸고, 이어 볼펜을 들었다. 

정갈하게 묶인 서류 몇 곳에 큰 동그라미를 치고는 지환에게 건넸다. 

……어차피 인생은 쇼윈도.

“잘 읽었어. 중첩되는 내용 있어서 표시했어. 다시 검토해봐.”“아아, 땡큐.”그래. 어차피 인생은 쇼윈도.

그래서 나는, 나를 사랑하며 사는 인생을 택했다. 

“간다. 수고해, 서검.”미련 없이.

“세계무용축제는 서울시에서도 기대가 큽니다. 지역 축제의 개념을 벗어나 세계적인 축제로 자리 잡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여부가 있겠습니까, 백 의원님. 예산 한 푼도 허투루 쓰이지 않도록 회계 관리 역시 철저하게 진행하고 있습니다. 메이저 페스티벌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백인호 의원은 축제 관계자를 만났다. 

서울시에서 막대한 예산을 투자했고, 축제 기간 동안 벌어들일 가상 수익은 꽤 만족스러웠다. 

원활한 축제 준비를 위해, 서울시는 추가 예산 투입을 앞두고 있었다.

“지역구 경제 활성에도 큰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합니다. 단 한 번도 실패해본 적 없는 축제인 만큼 올해는 더욱 분발해 주시길 바랍니다.”“감사합니다, 의원님. 성과로 보여드리겠습니다.”축제 관계자와 백인호는 인사 끝에 서로의 손을 잡았다. 

호방하게 잡은 손을 흔들다가, 백인호는 무언가 생각났다는 것처럼 입을 열었다. 

“아아, 뭐 하나 물어볼 일이 있는데 말입니다.”잡았던 관계자의 손을 놓으며 백인호는 축제 관련 서류를 집어 들었다. 

“한국 대표 참가자들은 발탁 기준이 어떻게 됩니까?”“아…… 우선 발탁 기준은 분야별 전문가들과 함께 일정 기준을 만들고, 그 기준을 통과한 무용수들 가운데 인지도…….”“그러니까, 전문가들 기준이라는 건 명확한 공정성은 없다는 것 아닙니까?”“예? 어…… 글쎄요, 최대한 공정하게 진행했습니다만…….”백인호가 던진 질문의 뜻을 제대로 파악하기 힘든 관계자가 말꼬리를 흐리자, 백인호는 시종일관 웃던 얼굴에 그늘을 드리웠다. 

“막대한 지역 예산이 투입되는 축제에 특혜를 받아 수혜를 입는 사람들이 있어서 되겠습니까? 기준이 모호하다는 건 훗날 잡음이 나올 수도 있는 일인데.”“다시 한 번 검토해보겠습니다. 하지만 특혜를 준 인원은 없는 걸로 압니다.”“그건 조사를 통해 확인해보면 알 것이고.”흠, 백인호 의원은 다시 서류로 시선을 내렸다. 

“질문이 하나 더 있는데.”“예, 의원님.”그러곤 거듭 페이지를 넘기다가, 어느 한 부분에 멈췄다. 

“세계축제에 꼭 한국무용이 들어가야 합니까?”“……예?”관계자는 눈을 껌뻑껌뻑 거렸다. 

백인호는 미간에 깊은 주름을 만들며, 이건 아니라는 듯 고개를 작게 휘저었다. 

“글로벌 축제엔 모두가 즐기고 누릴 수 있는 무대들이 줄을 이어야 하지 않나. 가장 황금 시간대에 한국 무용이라니. 요즘 누가 한국무용을 봅니까?”“아…… 어…… 예, 의원님. 하지만 매번 한국무용은 빠지지 않고 들어갔던 터라.”“매번 들어갔다고 항상 들어가야 하는 법, 있습니까? 사람들이 더 즐길 수 있을 만한 무대로 꽉꽉 채우란 말입니다. 이름만 들어도 누구나 알 만한 그런 인물들로 섭외해서.”“…….”“그러라고 추가 예산 나가는 겁니다. 달리 드리는 게 아니라.”“예, 의원님. 잘 알겠습니다.”‘예산’이 입에 오르내리자 관계자는 바로 허리를 숙였다. 

다만 얼마라도 예산을 더 받아야 하는 관계자는 지금 백인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어명처럼 느껴졌다. 

무조건 더 화려하게 무대를 꾸며라. 

“꼭 한국적인 것만이 능사는 아닙니다. 외국 사람들은 그런 것 관심 없어요. 국민들도 관심 없는 한국 무용 같은 거, 누가 보고 싶겠습니까?”“하지만 준비를 거의 끝마친 상황이라 이제 와서 변경을 한다는 게…….”“…….”관계자는 얼마간의 말을 더하다가 금세 멈춰버렸다. 

바라본 백인호의 표정이란 자신의 말을 들어줄 것 같지 않았으니까.

당황한 관계자는 급히 머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의원님의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순간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이 자가 누구인지, 잠시 잊고 있었다. 

“축제는 성공적으로 끝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축제 끝에 여러 사람 자리가 날아갈 수도, 보전될 수도 있는 건데. 당신 자리도 그렇고.”“아…… 예, 의원님.”백인호는 예산안 관련 서류를 들어 관계자의 손에 쥐여주었다. 

서류만 오갔을 뿐, 아직 예산은 확정되지 않았다. 

그의 말에 부조건 복종해야 했다. 

예산을 받아야만 했고ㅡ

“당장 빼세요.”“예. 의원님. 바로 시정하겠습니다.”자신의 자리를 지켜야 했다. 

일찍 올 테니 부인은 남편 기다립니다. 

알겠습니까? 

집에 도착한 희원은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오늘, 늦지 마. 

“아, 이거 어떡하지? 일이 일찍 끝나서 일찍 온 것뿐인데, 꼭 일찍 들어오라고 해서 일찍 온 것 같잖아.”희원은 중얼거리며 엘리베이터를 탔다. 

온종일 시계만 들여다보다가, 연습도 대강하는 둥 마는 둥 정신을 못 차리다가. 

일찍 오라던 남편의 야한 말에 꽂혀 일찍 와도 너무 일찍 온 거지. 

에효. 희원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현관문 앞에 섰다. 

지환이 도착했는지는 모르겠고, 일단 들어가야겠는데 영 마음이 싱숭생숭하다. 

그가 집에 있어도 문제. 없어도 문제.

“아휴…… 왜 이렇게 떨리냐…….”희원은 중얼거리며 현관 도어록만 노려보았다. 

생일선물이라며 구언이 전해준 쇼핑백을 들고, 한참이나 도어록만 노려보던 그녀는 용기 내어 비밀번호를 눌렀다. 

역사적인 날이다. 

역사적인 날이야.

으으으. 으으으. 희원은 이상한 소리를 내며 문을 열었다. 

“서지환 씨 안에 있어? 나 왔어요.”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 희원은 언제 떨고 있었냐는 듯 표정을 평온하게 바꿨다. 

절대로 절대로 온종일 긴장했다는 걸 들키지 않으리라. 그녀는 은연중 각오를 다졌다. 

“없나? 아직 안 왔나?”왜냐. 놀림당할 게 뻔하니까! 

희원은 불러도 대답 없는 지환을 찾다가 거실에 멈췄다. 고요하다. 

고개를 돌려 현관을 바라보니 그의 구두가 가지런히 놓여 있다. 

응? 왔네? 

“왔어?”“아, 네. 왔…….”그가 인기척을 낸다. 

희원은 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돌아보다가 말꼬리를 흐렸다. 

“일찍 왔네. 생각보다 더.”“아…… 어…… 네.”쿵, 희원의 마음속에 싱크홀이 생겨난다. 

밑천이 드러나듯 당황함이 그녀 얼굴에 고루 새겨진다. 지환은 힐끔, 그녀를 바라보았다. 

“씻고 나오느라 온 줄 몰랐어.”“아…… 알지…… 씻었다는 거 잘 알지…….”허리춤에 수건만 감고 나와 머리를 털고 있는데, 내가 모를 수가 없지…….

“땀을 좀 흘렸어. 씻고 나니까 좀 살겠다.”“땀?”이 겨울에……? 이렇게 뜨끈한 집에서……?

뭘 했는데……? 땀은 대체 왜……?

희원은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금방 목욕을 끝낸 남편은 물기 있는 얼굴로 서서 근육 자랑 중이시다. 

머리를 털어내는 과정에도 씰룩거리며 움직이는 등 근육이 사정없이 그녀 시선을 강탈했다. 

눈을 떼고 싶은데, 뗄 수가 없다. 

“가, 가운은 어쩌고…… 그러고 있어요.”아니야. 사실은 지금 좋아. 아주 최상이야, 서지환 씨.

“당신 이렇게 빨리 올 줄 몰랐지. 나 원래 이러고 있어. 당신 몰랐겠지만.”“아, 아, 그랬구나.”희원은 급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애써 다른 곳으로 옮겼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의 상체에 자석이라도 있는 것처럼, 시선은 다시 달라붙었다. 

자신의 표정이 어떤지 생각해볼 겨를도 없이 희원은 자리에 서서 남편의 상체를 응시했다. 

“씻을래?”“……네?”아니요…… 

전 이대로 조금만 더 있었으면 좋겠는데…….

“당신 좋아하는 거품 풀어서 물 받아줄게, 당신도 씻어.”“…….”돌아오는 그녀의 대꾸가 없자 지환은 머리를 털던 수건을 내리며 돌아섰다. 

크어억. 씰룩거리던 등 근육이 시야에서 사라지며, 이번엔 평평하고 탄탄한 그의 가슴 근육이 그녀를 반겼다. 

“왜 그러고 서 있어?”나? 

좋아서.

“아, 아녜요. 아무것도. 나 옷 좀 갈아입고 나올게요. 더운물 받아주면 고맙겠네요.”“손에 든 건 뭐야?”“아아, 이거. 구언이가 준 생일선물.”희원은 멍청했던 표정을 애써 뒤늦게 수습하며 들고 있던 쇼핑백을 들어 보였다. 

골반 부근에 손을 받치고 서 있는 지환을 바라보자니 미치겠다, 섹시해.

“구언이가 선물이라고 가는 길에 줬어. 뭐라더라? 커플 잠옷이라고 했나?”“잠옷? 커플?”“네. 커플 잠옷이래요.”흠, 지환의 입에서 알 수 없는 탄식이 흐른다. 

영문을 알지 못하는 희원은 쇼핑백을 높게 들었던 팔을 내렸다. 

“그 친구가 되게 야한 선물을 했네.”“……네?”“커플 잠옷이라며.”“응. 커플 잠옷. 그게 왜 야해?”“야한지 안 야한지, 열어볼까?”어…… 아니……

나 일단 좀 씻을게…….

“아, 아, 이, 이따가요. 이따가.”“그러든가. 이따가. 이따가 열어보든가.”어쩐지 그의 분위기는 아침과 사뭇 달랐다. 

한없이 팔랑거리고 실없는 농담만 주야장천 날리더니. 

지금의 서지환은 뭐랄까, 말 한마디 쉽게 주고받기도 어려운 무거운 분위기가 있다고 해야 할까?

“서지환 씨, 좀 분위기가 적응 안 되는데 무슨 일 있었어요?”“씻고 나오면 말해줄게. 내가 왜 이러고 있는지. 나 좀 긴장했거든.”……야해지기로 작정을 한 것만 같다. 

희원은 더 이상 그와 대화를 주고받다간 씻은 타이밍도 놓칠 것만 같아 황급히 돌아섰다. 

가슴이 쿵쿵쿵쿵 뛰고, 다리가 휘청거리는 것만 같았다. 

지환은 터덜터덜 걷는 희원을 바라보다가 소리 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이어 수건으로 머리를 마저 털며 그녀를 향해 입술을 열었다. 

“깨끗하게 씻어.”“…….”“도움 필요하면 부르고.”아으어으아으어……. 

결국 참지 못한 희원의 입에서 알 수 없는 탄식이 흐르자 지환은 돌아서 피식 웃었다. 

귀여워.

“저, 저 그럼 옷 갈아입으러 가볼게요.”“그래. 알았어. 시간 없으니까 빨리 갈아입고 빨리 씻고 나와. 할 일이 많아.”“네에…… 할 일…… 그런데 할 일이…… 뭔데요……?”“선물 줄게.”귀여워서 못 살겠다. 권희원.

그가 받아준 따뜻한 물에 들어가 그 어느 때보다 경건한 마음으로 목욕을 끝마친 희원은 머리를 말렸다. 

한참 머리를 말리다 보니 밖에서 음식 냄새가 이것저것 뒤섞여 잡다하게 풍기는 것만 같다. 

그러고 보니 거실에 들어왔을 때 이것저것 쓰레기가 많이 나온 것 같긴 하던데.

뭐 하는 거지?

머리를 말리고 거실로 다시 나오니 지환이 없다. 

냄새에 홀려 주방에 들어가니 이걸 누가 다 먹냐 싶을 만큼의 음식이 줄줄이 한 트럭이다. 

“이게 다 뭐야?”뭐야? 

허, 희원은 도저히 이 집에 있을 리 없는 정체불명의 음식들을 바라보다가 지환을 찾았다. 

어디 갔지? 

띡, 띡, 띡, 띡.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려 희원은 문 쪽으로 다가갔다. 

현관문이 열리는 그 잠깐의 시간,

“여긴가?”……맥이 탁 풀리고,

“예. 여깁니다.”힘이 실린 손과 발은 굳어버렸다.  

너무나도 익숙해서 소름 끼치는, 다름 아닌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희원은 멍하니 넋을 놓고 열리는 문을 바라보았다. 

“어머, 희원아!”“엄마…….”그리고 엄마.

“니 엄마만 찾고, 할애비는 안 보이는 게냐?”“저도 안 보이는 모양인데요. 아버지.”“할아버지…… 아빠…….”할아버지. 아빠.

희원은 느닷없이 등장한 자신의 친정 식구들을 꿈인 듯 아득하게 바라보았다. 

지환은 슬리퍼를 꺼내 내려놓으며 허리를 일으켰다. 

넋을 놓은 그녀를 바라보며, 그는 씩 웃었다. 

“제가 모셨다는 말을 안 해서, 아마 지금 놀랐을 겁니다.”“어머, 그랬어? 희원이 너, 오늘 할아버지랑 아빠랑 엄마랑 집에 오는 줄 몰랐어? 엄마는 너도 아는 줄 알았지.”……생일.

“며칠 전에 서 서방한테 전화가 와서 우리 초대한다고. 응? 엄마는 너도 아는 줄 알았는데?”“몰랐어요…….”……선물.

희원은 울대가 꽉 막힌 목소리로 간신히 몰랐노라, 웅얼거렸다. 

사위가 내어준 슬리퍼를 신고 안으로 들어온 엄마는 그 제일 처음, 딸아이를 안았다. 

“어디 좀 안아보자. 우리 딸 너무 오랜만이네.”“엄마아…….”“생일 축하해, 우리 딸.”“엄마, 잘 왔어. 아빠도 잘 왔어. 할아버지도 잘 오셨어요.”희원은 엄마를 꼭 안으며 뒤에 있는 가족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녀의 해맑은 웃음을 바라보며, 아빠, 할아버지, 지환. 세 남자는 같은 색깔의 웃음을 띠었다. 

엄마와의 인사를 끝으로 희원은 지환을 응시했다. 

일찍 들어오라던 말은 이런 뜻이었구나. 그는 홀로 며칠이나 애를 쓴 걸까.

많은 음식을 혼자 준비하느라고, 가족을 맞이할 준비를 하느라고 땀을 흘린 모양이다. 

당신하고 나,  

이제 좀 가족 같아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가족 같아져야 한다던 말은 그런, 뜻이었군요. 

이제야 그가 했던 말들이 모두 다 이해되는 순간. 

희원은 아침나절부터 지금까지 자신을 흔들던 긴장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고마워요. 

그녀가 눈으로 말하자 그는 들고 있던 케이크를 올려 보였다. 

“파티합시다.”준비한 선물이 그녀 마음에 들었을까, 대답은 듣지 않아도 알 것만 같았다. 

“가족끼리 모여서.”가족이란 이런 말, 이런 느낌이었나. 

말끝에 가슴이 울렁거린다. 

그가 만들어준 지금 이 공간은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하게 여겨졌다. 

네. 우리는 이렇게 가족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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