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All in
“장모님, 제가 하겠습니다. 그냥 두…….”“아이고, 아니야. 이게 무슨 일이라고. 금방 깎아. 내가 하는 게 빨라 그리고.”“아…… 제가 다 하고 싶은데…….”저녁 식사가 끝나고 뒷정리를 하는 사이, 그녀의 어머니는 자연스럽게 싱크대 앞에 섰다.
디저트로 먹을 과일을 미리 꺼내두었더니 알아서 접시를 꺼내시고는 알아서 과도를 찾아 과일을 깎고 계시다.
“깨끗하게 해놓고 사네. 엉망일 줄 알았는데.”“희원 씨가 깔끔합니다.”“걔는 할 줄 아는 게 없어. 내가 가르친 게 없어서 말야. 다 지환이 솜씨겠지 뭐.”하나를 보면 열을 아는 주부 9단 엄마는 지환의 깔끔함을 단번에 캐치했다.
빠르게 과도를 움직이며, 엄마는 사위 얼굴을 향해 고개를 돌리곤 웃었다.
“세상에, 그 많은 음식을 혼자 했어? 희원이 도움 없이?”지환은 그릇에 과일을 담으며 웃었다.
“혼자 오래 지내서 어지간한 음식은 다 합니다. 어렵지 않게 했습니다.”“대단하네. 너무너무 맛있었어. 내가 한 것보다 더 맛있더라.”“설마요.”“아버님도 한 그릇 다 비우셨잖아. 갈비찜을 그렇게 잘 드시는 거 오랜만에 봤어. 희원이 아버지도 그렇고. 두 분 다 입이 까다로워서 어지간하면 입에 대지도 않으시는데.”“다행이네요. 사실 긴장을 좀 했는데.”지환이 머쓱하게 연신 웃으며 곁에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자 엄마는 힐끔 뒤를 돌아 거실을 바라보았다.
손녀가 사라지고 바둑 둘 상대가 사라졌던 할아버지는 이곳까지 바둑판을 챙겨 오시곤 손녀와 오랜만에 바둑 삼매경이다.
아버지는 그 곁에서 훈수를 두며 오랜만에 따뜻한 투 샷을 바라보고 계셨다.
“고마워. 서 서방.”“아닙니다, 제가 더 감사합니다. 그리고 일찍 초대 드려야 했는데, 늦어 죄송합니다.”“아니야, 아니야. 마음 다 알아. 둘만 잘 살면 돼, 우리한테까지 신경 쓸 필요 없어.”그녀의 엄마는 진심을 담아 말을 전했다.
너무 고맙다고.
“앞으로 희원이 생일엔 둘이 보내. 우리는 이렇게 한번 와 봤으면 됐어. 둘이 맛있는 거 먹고 좋은 곳 가서 데이트도 하고 그래. 어른들까지 챙길 필요 없어.”“둘은 평소에도 맛있는 거 먹고 좋은 곳도 갑니다. 희원 씨가 좋아하는 걸 보니 내년에도 모시고 싶은데요.”하유…… 어쩜 이렇게 말도 예쁘게…….
그녀의 엄마는 사위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굳이 깎고 있는 과일에 시선을 주지 않아도 뚝딱뚝딱 과일을 잘라내니, 지환은 신기하다는 듯 장모님의 손을 바라보았다.
“이 정도면 달인 아니십니까?”“응? 뭐가? 아, 이거. 주방에 오래 있으면 다 해. 이건 기술도 아니야.”“대단하신데요.”“지환이나 희원이가 하는 일이 기술이지. 이건 그냥 손에 익으면 다 해, 누구나.”……엄마의 얼굴도 모르고 자란 지환은 푸근한 장모님의 말끝에 묘한 기분을 느꼈다.
딸의 집으로 초대받으셨음에도 싱크대 앞을 떠나지 못하는, 엄마의 모습.
“반찬 잘 먹겠습니다. 당분간 도시락 싸 들고 회사 다녀도 되겠더라고요.”“입에 맞을지 모르겠어. 한다고 했는데. 먹어보고 맛있으면 내가 간간이 해줄게.”“아, 아닙니다. 아닙니다. 안 그러셔도 돼요.”……누구의 엄마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순간.
“저번에 보니까 지환이가 고추장 양념을 더 잘 먹는 것 같아서 그런 종류로 많이 해왔어. 유통기한 짧은 순으로 넣어 놨으니까 순서대로 먹어.”“예. 장모님.”“저기, 있잖아.”수십 년을 타인으로 살고 만난 사람들이라고 보기엔 엄마는 푸근했고, 사위는 아들 같았다.
“내가 딸만 키워서 그런지 지환이가 사위가 되어줘서 엄마는 참 든든해.”‘엄마’라는 호칭에 지환의 가슴이 뜨끔한다.
두 볼에 열이 나고, 가슴이 두근두근하다.
“희원이 보내놓고 나면 되게 허전할 줄 알았는데, 내가 요즘 웃는 일이 많아. 지환이 생각하면 자다가도 웃음이 나. 주책이야.”“……감사합니다. 제가 더 잘하겠습니다.”“아니야. 노력하지 않아도 돼. 노력은 집 밖에서만 해도 돼. 괜찮아. 괜찮아.”엄한 집에서 자라ㅡ
할아버지, 아버지, 형과 함께 지내온 오랜 세월.
엄마라는 낯선 존재는 지환의 가슴속 깊은 굳은살을 어루만지는 것만 같았다.
“일하는 거, 힘들지?”“아닙니다. 저보단 희원 씨가 더 힘들어요.”“힘들지, 왜 안 힘들겠어. 나라에 안 좋은 일이 생기고 범죄자가 생겨야 지환이가 일을 하는 거잖아. 일하는 동안은 예쁘고 고운 일은 하나도 못 보고.”에효. 그녀의 엄마는 속이 상한지 미간을 찌푸렸다.
어느덧 과일은 예쁘고 정갈하게 그릇에 담겼다. 엄마는 집에서 가져온 생강차를 꺼내 들었다.
“젊을 땐 별일이 다 힘들어. 힘들다는 것도 다 에너지가 있어야 느끼는 거야. 사람이 기운 없고 나이를 먹으면 힘든 일도 몰라. 아무 감정을 못 느껴, 그게 얼마나 슬픈 일인데.”보온통을 열자 뜨끈하고 진한 생강 냄새가 퍼졌다.
“젊어서 그런 걸까요, 종종 생기더라고요. 힘든 일이.”지환은 어인 일로 속내를 드러냈다.
엄마, 그 이름 앞에서 속내란 노력하지 않아도 흘러나왔다.
“그래. 힘들지. 힘든 이유란 끊임없이 만들 수 있어. 사람 몫이야. 똑같은 무게를 짊어져도 누구는 무너지고, 누구는 그냥 지나가고, 그러는 거야.”지환이 꺼내준 찻잔에 생강차를 따르며, 엄마는 말을 이었다.
“무너지려는 사람은 한도 끝도 없이 무너질 수 있어. 무너져야 하는 이유를 자꾸 만들거든. 일어서려는 사람은 어떻게든 일어서려고 하고.”“…….”“하지만 터널에도 끝은 있고, 지금 당장 불빛은 희미해도 언젠간 통과하게 돼 있어. 그러니까 너무 자신을 들들 볶지 말고 편안하게 살아.”자, 다 됐다. 엄마는 생강차를 따라놓고는 주변을 살폈다.
지환은 코끝에 스민 생강차가 온몸에 퍼진 것처럼 따뜻한 기운이 느껴져, 장모님의 얼굴을 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해주신 말씀, 잘 새기고 살겠습니다. 많은 힘이 됐어요, 장모님.”“그래? 다행이네.”엄마는 웃었다.
“사람에게도 이정표가 필요하고, 그래서 경험자의 말도 필요한 거지. 요즘 사람들은 통 들으려고 하질 않아. 지금 이 터널을 먼저 지나간 사람들의 이야긴 줄은 모르고 말야.”경험자, 어른의 역할.
엄마는 쟁반을 들며 지환을 바라보았다.
아직은 한참 어린아이들로 보이는 신혼부부.
“지환이나 희원이는 똑똑하니까, 걱정 안 해. 엄마는 두 사람보다 더 아는 게 없어. 그래도 힘들 때 찾아오면 얘기는 들어줄 수 있으니까, 언제든 지환이 편이 여기 있다ㅡ 생각해.”“네. 장모님.”“가자.”엄마는 과일을 들고 앞장섰다. 지환은 생강차를 들고 장모님의 뒤를 따랐다.
“어? 생강차네? 우리 집에 이런 게 있어?”“엄마가 집에서 가져왔지. 겨울인데 생강차 한 잔 마셔야 감기도 안 걸리는 거야.”희원이 오랜만에 엄마표 생강차를 받아들고는 활짝 웃는다.
“안 그래도 엄마 생강차 너무 그리웠는데 어떻게 알고. 잘 마실게요!”“엄마가 다 알지. 엄마가 모르는 게 어딨어?”“자자, 고만 말 시켜라! 희원이 바둑 둔다!”바둑에 집중한 할아버지가 모처럼 활력을 찾으신 듯하자 내내 붙잡혀 바둑을 두던 희원은 엄마와 지환을 바라보며 웃었다.
모든 것이 감사하고 따스한 시간.
……가족의 시간이었다.
“뒷정리하는 거 하나도 못 도와주고, 미안해요.”즐거운 시간을 끝으로 그녀 가족들이 사라진 공간.
희원은 말끔해진 주방을 바라보고는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지환은 신경 쓰지 말라며 손을 저었다.
“내가 한 거 하나도 없어. 장모님 손이 얼마나 빠르시던지.”“할아버지가 바둑이 너무 두고 싶으셨나 봐. 설거지는 내가 도와줬어야 하는데.”“더 큰 일 했잖아. 할아버님 즐겁게 해드렸으면 됐지. 그게 뭐 대수라고.”지환은 마지막 뒷정리를 끝낸 뒤돌아섰다.
자신을 향해 미안한 표정을 짓고 있는 희원을 바라보다가, 흔연한 미소를 그렸다.
“어땠어. 선물은 마음에 들었나?”“엄청. 진심. 대박.”희원은 엄지를 세웠다.
호오. 지환은 눈썹을 추켜올리며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부모님이랑 할아버지를 초대했을 줄은 몰랐어요. 상상도 못 했네. 어떻게 그렇게 기특한 생각을 다 했지?”그녀가 진심으로 기뻐한다.
설마하니 친정 식구들과 생일을 보내게 될 줄은 몰랐다고.
“우리 부모님은 더 좋아하셨을 거예요. 생일 밥은 항상 같이 먹었었으니까. 고마워요.”“고맙긴. 가족인데. 이런 건 당연한 거 아닌가.”그는 약간은 멀리 떨어져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를 응시했다.
처음, 결혼을 결심하게 되었을 때만 해도 상상도 못 한 그림.
또 다른 가족이 탄생할 수 있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던 그때.
“당신이 얼마나 사랑받고 자랐는지 충분히 알겠어. 내내 그런 생각이 들더라.”“예를 들면?”“음. 생강차?”“아, 생강차.”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언지 깨달은 희원은 웃음을 터트렸다.
딸의 집에 온다고 보온병에 직접 만든 생강차를 가져온 엄마의 마음이, 지환에겐 크게 와닿았던 모양이다.
그 어떤 대단한 선물보다도.
겨우내 뜨끈하게 한 잔 먹이지 못한 생강차가 내내 마음에 걸렸을, 엄마의 사랑이.
“그런 귀한 집 따님을 제가 모셔왔습니다.”“이제 알았죠? 나 엄청 귀하게 자랐다고요.”“자주 찾아뵙자. 오늘 장모님께 배운 것도 많고, 할아버님 즐거워하시는 것도 보기 좋고. 장인어른도 그렇고.”각자의 삶을 즐기기 위해 만나,
결국은 하나가 되어가는 과정.
“장모님이 지환아, 이렇게 불러주시는데 가슴이 쿵쿵했어.”“들었어. 엄마가 지환 씨 이름 부르더라. 가까워지고 싶은 모양이에요.”“이미 가까운데? 장모님이 엄마가, 엄마가, 하시더라.”지환은 말끝에 미소를 지었다.
“진짜 엄마 같았어. 나, 처음으로 그런 감정 느껴본 것 같은데.”희원은 주방에 서서 나직하게 말을 잇는 지환을 바라보다가, 마른 주먹을 쥐었다.
그의 어머니는, 그를 낳다가 돌아가셨다.
“남자들만 북적거리는 집에서 살아봐서 그런가, 그냥 좋더라고. 잘 모르고 살았는데 내게도 결핍이 있었나 싶기도 하고.”……누군가에겐 아무것도 아닐 만큼 평범한 가정.
그마저도 가져본 적 없는 그의 삶.
어쩐지, 지금의 그는 바라보기가 애처로울 만큼 가여워 보이는 까닭에 희원은 얼굴이 뜨거워졌다.
희미한 미소를 담은 그의 얼굴은 진심으로 편안해 보였지만,
“내가 살아온 집의 분위기와는 많이 달라서, 좋네. 다정하고 따뜻하고. 우린 좀 삭막했거든.”할 수만 있다면 과거로 흘러가 어린 그를 붙잡고 안아주고 싶었다.
희원은 아일랜드 식탁에 시선을 고정한 채 서 있는 지환을 바라보다가, 입술을 열었다.
“서지환 씨 집 못지않게 우리 집도 삭막했어요. 알잖아, 할아버지 엄했던 거.”“아아, 그랬을까.”“그럼. 지금에야 이렇게 다 같이 모여서 웃는 거지. 내가 맨날 반항해서 우리 집 엄청 살벌했다고요.”어딘가 모르게 공허한.
어딘가 모르게 채울 수 없는 외로움이 있는 것만 같아서, 그의 모습이 시리게 다가왔다.
희원은 걸음을 옮겨 그에게 다가갔다.
다가가고, 가까워진 뒤, 그의 허리를 뒤에서 감싸 안았다.
“있잖아, 서지환 씨.”“응?”만들어 놓았던 미역국, 솜씨가 좋았던 갈비찜.
그런 거 저런 거 다 빼고서라도ㅡ
“앞으론 내가 해줄게. 서지환 씨.”이런 당신이라면, 나는, 얼마든지.
“내가, 서지환 씨의 둘도 없는 가족이 돼줄게.”……들어봐.
내가 당신의 가족이야.
내가 당신의 둘도 없는, 세상 하나뿐인 가족이야.
“서지환 씨가 힘들었는지, 아팠는지, 내가 살펴주고 보살펴줄게. 등도 쓰다듬어주고, 때때로 예쁘다, 예쁘다 해줄게.”당신의 그늘이 되고ㅡ
당신의 햇살이 되고ㅡ
“뭐든 다 괜찮다고 말해줄게. 지쳐서 기대오면 내가 씩씩하게 안아줄게. 전부 다 감싸주고 지켜줄게.”나의 어머니가 내게 그랬듯.
내가 당신을 지켜줄게.
그러니까, 그러니까 당신ㅡ 부디ㅡ
“한순간도 외롭다는 생각 같은 건 하지 않게, 내가 서지환 씨 곁에 꼭 붙어 있을게.”슬프거나 허하지 않았으면ㅡ
희원이 뒤에 꼭 붙어 중얼거리자 지환은 빙그레 웃으며 자신의 허리춤을 감고 있는 그녀 손을 잡았다.
자신의 말 어느 구간 구간에 외로움이 흘렀던 걸까.
그녀는 지금의 자신이 안쓰럽고, 가여운 게 틀림없었다.
“여, 이거 엄청난 감동이 막 밀려오는데.”“진심이야. 나 진심이라고요, 서지환 씨.”……비어 있던 마음의 공간이, 채워진다.
그는 그녀의 손을 붙잡으며 돌아섰다.
돌아서서 그녀와 시선을 맞추고, 그녀의 등을 감싸 안았다.
“앞으로 호강시켜준다는 말은 못 하겠다.”“괜찮아. 갈비찜을 서지환 씨만큼 잘하는 남자는 찾기 힘들 테니까.”“이만큼 일을 잘하는 남자도 찾기 힘들 거야.”“일 잘하는 건 나랑 관계없잖아요.”“무슨 소리야. 낮에도 일을 잘하고 밤에도 일을 잘하는데.”야한 남편으로 급변한다.
“호강은 못 시켜줄 테니 일이라도 잘해야지. 그렇지? 부인?”“어…… 아…… 어…….”“내 말 기억하지, 쉽게 잠은 못 잘 거라고.”그는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입막음을 하듯 순식간에 그녀 입술을 삼키고는, 잠시 떨어져 피식 웃었다.
“갑시다, 부인.”야한 남편이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었다.
쿵, 침대에 두 사람이 포개지듯 떨어진다.
주방에서 침실로 들어오는 그 짧은 시간 동안 그에게 안겨 있던 희원은 등이 침대에 닿자 깊은숨을 내쉬었다.
잠시 잠깐 동안 두 발이 디딜 곳을 잃고 허공을 헤매던 순간.
그의 팔에 실린 힘으로 전신이 공중을 떠돌던 순간.
놀이기구를 탄 것처럼 정신이 없었고,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것처럼 아찔했다.
숨이 부딪칠까 봐,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
가파르게 맥이 뛰어 오르고ㅡ
“생일 축하해. 내일이지만. 내일은 내일 다시 축하할게.”“고마워요.”가슴이 떨려 음성은 흐려지고ㅡ
“손 좀 줘봐.”“손? 왜?”가볍게 손을 들어보지만 손끝은 긴장했다.
희원이 손을 들자 지환은 그녀의 손을 천천히 잡고. 베개 아래로 끌었다.
베개 속으로 손이 들어가자 작은 상자가 만져진다.
그녀는 느리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이건 진짜 생일 선물.”“첫 번째 생일부터 이렇게 감동 주면 다음번엔 어쩌려고 이래, 서지환 씨?”“아이디어 뱅크입니다. 걱정 마시죠.”놀라 민망해진 그녀가 타박하듯 말하자 돌아오는 그의 답이 가관이다.
희원은 참지 못하고 웃었다.
뛰는 심장이 눈에 담긴 듯 그녀 눈빛은 흔들렸다.
천천히 베개 속에 넣었던 손을 뺐다. 작은 상자는, 열어보지 않아도 무언지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반지다.
“반지네요.”상자를 열어본 희원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가락지네?”옥으로 된 쌍가락지가 들어 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디자인에 그녀는 작게 입술을 벌렸다.
뽀얗고 투명한 자태를 자랑하는 가락지.
“공연할 때 결혼반지는 못 낀다며.”……생일선물로 남편에게 옥가락지를 선물 받는 어린 아내가, 또 있을까.
“이런 디자인은 착용할 수 있다고 들은 것 같아서. 그때 끼라고.”“아…….”마치 사극 드라마에서나 구경했던 것 같은.
하지만 그녀는 무대 소품으로 종종 착용하는.
“어떻게 알았어? 나 이런 거 종종 끼는데. 물론 가짜 옥이고 소품이지만.”“남편이 이렇게 관찰력 뛰어난 사람입니다. 이제 그만 인정해주시죠.”“와, 와…… 놀랍다, 놀라워. 어떻게 이런 생각을.”희원은 반지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바라만 보았다.
공연 때는 어쩔 수 없이 결혼반지를 빼야 하니, 무대의상과 어울리는 가락지를 선물로 가져왔다.
“마음에 들어?”“진짜 마음에 들어요. 정말로. 이건 상상도 못 했어.”그녀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지환은 준비한 모든 과정이 순조로웠다는 것처럼 씩 웃었다.
“연습할 때도 끼고 있어야지. 좋다, 진짜로.”연신 눈을 빛내며 반지를 바라보던 희원은 고개를 돌려 그의 얼굴 가까이 다가갔다.
손바닥으로 머리를 받친 채 비스듬히 누워 있던 지환은 움찔하며 다가온 그녀를 바라보았다.
“퍼펙트.”희원이 중얼거리자 지환은 입술을 내렸다.
“총평은 잠시 후에.”입술이 얽힌다.
눈은 감기고, 간격은 더욱 좁아졌다.
모든 긴장감과 경계심이 사라진 지금, 완벽한 하나가 되어도 이상할 것 하나 없는 시간이 흘러가는 지금.
참아왔던 사랑이 터지듯.
미루고 미뤄왔던 바람을 이루듯.
잠시 그녀의 입술을 놓아주고 목덜미 부근으로 얼굴을 내린 지환은 뜨거움을 그녀에게 새기다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말끝에 갈라지는 음성이, 지금 그의 심정을 말해주는 것만 같았다.
“긴장 풀어.”“……아. 나도 모르게 자꾸 긴장이 돼서.”“그럼 천천히, 풀어도 돼.”희원은 경직되어 있던 몸을 편안하게 만들었다.
타인의 온기가 낯선 목덜미에 그의 온기가 찍히자 그녀는 깊은숨을 내쉬었다.
거친 숨은 하릴없이 터져 흘렀다.
“돌아버리겠다, 살 냄새.”“돌지는 마, 서지환 씨.”……예컨대 사랑한다는 말은 이런 뜻이었다.
그대가 나로 인해 행복했으면 좋겠다.
세상의 모든 기쁨이 나로 만들어져 나로 끝나는, 그런 세상에 그대를 놓아주고 싶다.
작게는 시선을 맞추는 일로부터ㅡ
“괜찮겠어?”“뭐가?”“쉽게 놔주지 않고, 쉽게 재우지 않을 거야.”크게는 그대의 숨결을 내가 집어삼키는 것까지.
내가, 그대로 인해 살아 숨 쉰다면 좋겠다.
“네. 좋은데요.”단지 그뿐이라면, 좋겠다.
지환은 희원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갰다. 지금껏 나누었던 달콤 상냥했던 입맞춤이 아닌, 뜨겁고 격렬한 힘이 실려 있었다.
삼킬 듯이 그녀 안을 휘저으며 그의 손은 천천히 그녀의 허리 주변으로 올라갔다.
옷은 들춰졌고, 몸은 맞닿았다.
거칠어진 숨이 엉키며 밤의 시작을 알렸다.
서로는 서로에게 많은 것을 허락했다.
오래 기다렸다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