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흩날리는
바깥의 찬 공기와 단절된 아늑한 침실.
몸에 감겨드는 감촉이 예술인 도톰한 이불. 뜨끈뜨끈한 온도로 등을 따뜻
하게 만들어주는 전기장판.
희원은 몹시 편안한 자세를 취한 채 깊은 잠을 청했다.
일이 넘쳐나는 남편께서 집에 돌아오지 못한 관계로 혼자 맞이하는 아침,
한껏 늦잠을 자도 좋은 때였다.
온종일 동영상을 돌려 보고 돌려 보고, 또 돌려보다가 새벽 늦게 잠이 든
희원은 도톰한 이불 감촉을 잠결에 느끼며 만족스럽다는 듯 숨을 내쉬었다.
바닥은 따뜻하고, 공기는 코끝이 약간 시릴 만큼 적당한 찬기를 머금고 있
으니.
아아, 지상낙원이다. 지상낙원.
“흐으음…….”
희원은 낮게 투정하며 몸을 뒤척거렸다.
생각해보니, 무척 오랜만에 혼자 침실을 사용하고 있다.
잠꼬대를 해도, 혼잣말을 해도, 대각선으로 자도 누구도 뭐라고 하지 못할,
혼자.
큰 인형을 남편 대신 끌어안고 익숙한 자세를 찾아 몸을 뒤척이던 희원은
그래, 이것도 참 오랜만이다.
나는 원래 이렇게 혼자 잠들고 혼자 일어나는 걸 좋아했는데.
맞아. 좋아했지. 혼자 눈을 뜨고 혼자 맞이하는 새하얀 아침의 풍경을.
결혼하기 전의 나는 이런 것들을 좋아했는데 말이야.
“……뭐 먹지.”
일어나서 뭐 먹지. 음, 간단하게 브런치를 먹을까. 우아하게 플레이팅을 끝
낸 뒤 사진이나 한 장 찍어볼까.
“스크램블…… 토마토…… 올리브……오일이랑…….”
희원은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식단을 중얼거렸다.
아직 무거운 눈꺼풀은 들지 못하고, 천천히 정신이 깨고 있는 중에 벌어진
일이다.
“음…… 커피…… 내리고…… 아…… 맛있겠다…….”
그때였다.
풉. 곁에서 풉, 하며 비웃는 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기분 탓인가?
희원은 쉽게 눈을 뜨지 못하고 입을 꽉 다물었다.
풉, 풉?
……풉?!
“으아아, 깜짝이야아아아!”
희원은 눈을 뜨자마자 버럭 소리를 질렀다.
분명히 오늘 못 들어온다고 했던 남편이 바로 옆에 누워 있는 게 아닌가?
“으아아아 깜짝이야아아아! 아, 뭐야아아! 언제 왔어어!”
너무 놀란 나머지 비명이 터진다.
희원이 오두방정을 떨며 소리 지르자 지환은 그제야 참고 참았던 웃음을
터트리듯 눈꼬리를 휘었다.
“자면서 뭘 그렇게 먹어. 쩝쩝대면서.”
“하, 놀래라. 하, 완전 놀래라. 아침에 먹을 거 생각하고 있었지.”
“대단하네. 눈도 못 뜨면서 아침 식사 준비부터 하고.”
“잠 깨는 방법이거든? 아침 먹을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지고 해서, 아니, 그
건 그렇고 오빤 언제 왔어?”
희원이 다소 안정된 눈빛을 찾으며 묻자 지환은 벽시계를 힐끔 바라보았
다.
“나 온 지 얼마 안 됐어.”
그는 재킷만 벗은 정장 차림을 하고 있었다.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한 희원은 하아아아암, 하품을 하며 눈을 비볐다.
“그럼 아침 이슬 맞고 들어온 거야? 피곤하겠다.”
“다시 나가봐야 해. 잠깐 들어온 거야.”
아? 다시 나간다고요?
희원은 눈을 비비던 행동을 멈추며 지환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아직 옷에서 바람 냄새가 나는 것만 같은데, 다시 나가봐야 한
단다.
“바로 가야 하는 거면 뭐 하러 집에 왔어? 그 시간에 사무실에서 눈 좀 붙
이지.”
“부인 보러 왔지.”
“……왜 이래요, 아침부터.”
희원이 눈을 가늘게 뜨자 지환은 미소를 지었다.
잠결에 헝클어진 그녀의 머리를 빗겨주듯 손으로 쓸어 넘기던 지환은 다시
금 입술을 열었다.
“어떡하지, 나 도시락 못 먹었는데.”
“아아, 괜찮아요, 그게 뭐 대수라고. 그런데 그 정도로 바빴어? 그럼 여태
까지 밥도 한 끼 못 먹은 거야?”
“도시락은 사무관들이 먹었어. 맛있다고 칭찬이 일색이던데, 어디서 샀
나?”
“뭘 어디서 사! 전부 다 부인의 솜씨지!”
희원은 누워 있던 몸을 뒤집으며 상체를 일으키곤 지환을 내려다보았다.
염려가 잔뜩 묻어나는 얼굴이다.
“서지환 씨, 배 안 고파?”
“고프지.”
“안 졸려?”
“죽겠다.”
“그럼 내가 밥 얼른 해줄 테니까 먹고 조금만 자고 가면 안 돼? 한 삼십 분
만이…….”
지환은 결심이 굳었는지 바로 일어서려는 희원의 팔을 잡아끌었다.
“밥 먹고 눈 붙일 거였으면 사무실에 있었지. 여기까지 와서 부인한테 밥
차려 달라고 하겠어?”
“아니, 일단 왔으니까. 왔으니까 밥은 먹어야지, 왜 굶어. 그거 죽을 때까지
못 찾아 먹…….”
그녀가 꽉 안고 잠을 청하던 인형처럼, 그는 그녀를 꽉 안았다.
희원은 고분고분 그의 품 안에서 숨만 쉬다가ㅡ 그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이렇게 안겨 있는 것만으로도,
그의 고단함이 느껴졌다.
“일, 힘들어요?”
“아니. 오래 준비했던 거라. 원래 길게 싸우려면 버틸 힘도 필요한 거거
든.”
“그…… 백인호 의원님 사건, 맞지? 어제 종일 뉴스에 나오던데.”
그녀가 백인호의 이름을 입에 담자 그가 무의식적으로 손을 움직였다.
움직이던 손을 들어 그녀의 목덜미를 감싸 쥐고, 둥근 이마에 입술을 맞췄
다.
그가 쉽게 답을 내어주지 않자 희원은 숨을 죽였다.
아내의 염려란, 이런 것에서 비롯되었다.
정치니 법률이니, 그런 것 하나 모르고 살아온 그녀지만ㅡ
“근데 오빠, 그분 대단한 분이잖아. 그런 사람을 어떻게 잡아 가둘 수 있
어? 다 사실인 거 맞아요? 난 좀 혼란스럽더라고.”
지금 남편이 싸워야 할 상대가 대한민국 힘의 중심인 사람이라는 것쯤은
잘 알고 있다.
그런 사람과 싸우려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대단히 많은 것들과 싸워야
한다는 것 또한.
“오빠 괜찮아? 서지환 씨, 괜찮은 거 맞지?”
“그럼. 괜찮지. 이제 퇴근이 늦어질 테니 그게 언짢을 뿐.”
“뭔가 우리 서지환 씨 되게 힘들 것 같다. 뭔가 막, 그런 느낌이 드는데.”
“일터에서 벌어지는 일일 뿐입니다. 부인께서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
다.”
은연중 민망하면 꼭 존댓말을 쓰더라.
희원은 자신의 염려를 원치 않는 지환의 마음을 헤아리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일터에서 힘들 수도 있지. 그럼 집에 와선 에너지 충전해야지.”
“그러려고 왔지. 오랜만에 혼자 자니까 어땠어, 좋았어?”
“어, 좋던데요. 뭐랄까, 미혼이던 권희원으로 잠깐 돌아간 기분이었어.”
“……뭐라?”
지환이 품에서 약간 떨어트리며 그녀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원했던 답은 이게 아닌데? 좋았다고?
“미혼이던 권희원은 지금 이 세상엔 없어. 죽고 없어. 유부녀 권희원만 살
아남아 숨을 쉬고 있지.”
“헐, 죽었대. 말 심하게 하는 것 봐. 대박 사건.”
“죽고 없어. 환생 불가. 그리워도 말고 더듬어 기억하지도 마. 알겠어?”
“하, 참, 기가 막혀. 진짜 기가 막혀서 말도 안 나온다.”
희원은 한참 지환을 노려보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아아, 들려주려던 답변은 그게 아니었는데, 사람 말 끝까지 듣지도 않고 죽
고 없다니.
“자는 동안 혼자 잠드는 것도 나쁘지 않았는데 눈 뜨고 바로 앞에 서지환
씨가 있으니까 더 좋더라.”
……맞아. 좋아했지.
혼자 눈을 뜨고 혼자 맞이하는 새하얀 아침의 풍경을.
그런데 그것보다 더 좋아하는 풍경이 생겨버리고 말았다.
“오빠가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서 자는 날 보고 있는 그 모습이, 너무 좋아
서 잠깐 꿈인 줄 알았어.”
맞아. 좋아졌어.
함께 눈을 뜨고 함께 맞이하는 핑크빛 아침의 풍경을.
“꼭꼭 곁에 있어요. 미혼인 권희원은 죽고 없으니까, 유부녀 권희원이 오래
도록 살아남을 수 있도록.”
결혼한 후의 나는 이런 것들을 좋아하게 되었는데 말이야.
당신은, 어때요.
“아아, 그건 그렇고 나 이제 슬슬 가야 하는데.”
“벌써? 벌써 간다고?”
희원은 고개를 뒤로 돌려 벽시계를 바라보았다.
얼마나 같이 있었다고 벌써 헤어져야 한단 말이냐.
아아, 서럽다, 서러워.
“씻고 옷 갈아입고 바로 가야 해. 이제 일어나야겠다.”
“아……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지환은 다시 한 번 그녀의 이마에 입술을 맞추고 일어났다.
희원이 따라 일어서려고 하자 지환은 그녀의 이마를 검지로 누르며 다시
눕혔다.
“부인은 일어나지 말고 그대로 누워 있어.”
“나? 왜? 나 일어나면 안 돼?”
“나 씻고 옷 갈아입는 그 중간 어디쯤에 다시 올 거거든. 침대로. 또렷한 목
적을 가지고.”
지환이 음흉하게 말하자 희원은 하, 탄식했다.
“졸려 죽겠다더니, 침대로 다시 기어 올 힘은 있나 봐? 서지환 씨?”
“있어. 굉장히 많은 힘이 축적되어 있지. 기다려, 꼼짝 말고.”
“어흐…… 야해, 아침부터 야해 죽겠네, 진짜로.”
“야한 남편 너 되게 좋아하잖아.”
……쳇, 부정을 할 수가 없네.
입술을 삐죽거리던 희원은 얌전히 다시 누웠다.
어쩌겠어요. 누워서 기다리는데, 누워서 기다려야죠.
희원이 다시 눕자 지환은 마음에 든다는 듯 크게 웃더니 샤워실로 향했다.
거실 옆 화장실에서 물 트는 소리가 들려오자 희원은 벌떡 일어나 침실에
딸린 화장실로 후다닥 들어갔다.
“양심적으로 양치는 하자, 양치.”
희원은 급하게 칫솔을 꺼내 들었다. 치약을 듬뿍 묻히며 거울을 바라보았
다.
아, 씻을까? 확 씻어버려? 희원은 칫솔을 물고 샤워기 물을 틀었다.
싱그럽게 시작해서, 애틋하게 마주하고, 음흉하게 끝날 부부의 아침이었
다.
*
새벽녘 도착한 경호원들의 호위를 받으며 일단 막무가내식으로 경찰청을
빠져나온 백인호는 자택에 진입하는 일로 애를 먹었다.
이미 골목을 가득 메운 기자들을 차량으로 밀어내듯, 힘겹게 자택으로 들
어섰다.
정신없이 서재로 들어선 백인호는 곧장 책장 뒤에 마련된 비밀 금고를 열
었다.
처분하지 못한 금괴들이 쌓여 있고, 백인호는 그것들을 한참 바라보다가
입술을 질끈 물었다.
아무리 언론 플레이를 하고 아무리 목소리를 높여 사태를 덮어보려 해도
압수수색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당장은 서울중앙지검의 지검장을 믿는 수밖에 없지만.
어제오늘 그가 제게 보여준 돌변한 태도는 당장 무엇도 장담할 수 없게 됐
다.
위태로운 목숨이란 지검장이나 자신이나 그다지 달라 보이지 않았으므로.
“하…… 이것들을 어떻게 밖으로…….”
금괴를 서둘러 빼돌려야 한다.
하지만 저렇게 골목을 에워싼 기자들의 눈을 피해, 금괴를 밖으로 내보낸
단 말인가? 어떻게?
움직여줄 차민규도 붙잡혔고, 측근들은 손발이 묶여 연락조차 시도해볼 수
없게 되었으니.
……백인호는 서재를 빠져나와 입주 가정부를 불렀다.
“이 사람 어디 갔나?”
“아…… 사모님 새벽에 나가셨어요, 의원님.”
“나갔다고? 새벽에?”
백인호는 인상을 구겼다.
남편이 지금 어떤 상황인데 밖을 쏘다닌단 말인가?
“이게 미쳤나, 진짜.”
하지만 당신도 안전하진 않아.
백인호는 중얼거리다가 희주가 제게 했던 말을 상기했다.
가만있어 보자, 혹시 지금 이 사태와 강희주, 그리고 서지환이 서로 연결되
어 있는 건 아닌가?
강희주가 서지환을 도왔다면?
아직도 두 사람의 관계가 끊긴 건 아니라면?
“엮을 수도 있다…….”
유명 정치인의 아내, 그 아내의 과거의 남자.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한 자신들의 마음을 들킨 것에 대한 보복으로 일
을 꾸민 거라, 언론 플레이를 한다면?
……피해자가 될 수 있다.
백인호는 대기 중인 자신의 비서를 바라보았다.
“일전에 집사람이 검찰청 주차장에서 서지환 만난 적 있다고 했지.”
“네, 의원님.”
“CCTV 확보할 수 있나?”
“요청해보겠습니다.”
비서는 빠르게 사라졌고, 백인호는 한쪽 입꼬리만 올리며 중얼거렸다.
“내가 혼자 죽을 것 같아? 어림없는 소리…….”
아무리 쉽게 들끓고 쉽게 돌아서는 민심이라지만, 서지환은 정치판을 너무
만만하게 보았다.
돈이라는 것이 얼마나 막대한 권력을 가지고 있는지. 얼마나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을 가능하게 하는지.
서지환은 모르고 있음이 분명했다.
통화를 마친 비서가 다가오며 묵례했다.
“의원님, CCTV는 일단 요청했습니다.”
“차민규한테 변호사는, 붙였어?”
“네. 지금 함께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금 한 의원님께 연락이 왔는데 상
황실에 전부 모였다고 합니다. 구속 수사는 절대 안 된다는 입장 발표가 있
을 예정이라고 합니다.”
“당연한 말을.”
백인호는 실소했다.
감히 나를 구속 수사할 수 있을 것 같은가? 말도 안 되는 소리.
“비상대책위원회 설치하라고 하고 각 위원장들 끌어모으라고 해. 설계는
김 의원이 해줄 테니까 거기서 연락받으라고 하고.”
“예. 의원님.”
서지환.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엮어 추락시켜주겠다.
누구의 말로가 더욱 처참할지는,
“우리도 준비해둔 시나리오야. 침착하게 대응해. 댓글 관리 잘하면서 분위
기 끌어가란 말이야. 알겠어?”
“예. 지금 약 팔십 명 정도 모여 작업 중입니다.”
두고 보면 될 일이다.
*
“검사님, 눈은 좀 붙이셨습니까?”
최금호 계장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지환을 바라보았다.
밤새 차민규와 씨름하고, 차근차근 확보했던 증거를 한데 모으고,
그러더니 갑자기 집엘 다녀오겠다며 쓱 일어나더라.
“아아, 네. 자는 둥 마는 둥 잠깐 넋을 놓긴 했네요.”
“집에 다녀오시더니 더 피곤해 보이시는데요.”
후룩, 커피를 마시며 최 계장이 중얼거리자 지환은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그 틈에 끼어 정윤은 야채가 담뿍 들은 모닝롤을 베어 물었다.
“부지런하다, 부지런해. 그 와중에 집엘 다녀오고. 서검, 원래 그렇게 부지
런한 인간이었어?”
“내가 원래 이런 인간이었겠나, 집에 계신 부인께서 날 이토록 부지런하게
만들었지.”
“헛소리가 아직 나오는 걸 보니 덜 힘들구나. 이틀 밤은 더 지새워도 괜찮
겠어, 서검.”
흥! 정윤이 대놓고 괄시를 하지만 지환은 찍소리도 못한 채 정윤에게 우유
를 건넸다.
사실 이번 사건의 일등공신은 정윤과 현수다.
“어이, 차검. 내 자네의 업적을 진심으로 높이 기리는 바이네. 그런 의미로
오늘은 무슨 말을 해도 그냥 넘어가 주겠네.”
“뭐라는 거야, 말미잘 같은 게. 자근자근 밟아서 가로세로 12cm로 만들어
버릴까 보다.”
“12cm라니. 너, 너 무슨 말을 그렇게 심하게 하냐?”
“허. 무슨 말을 해도 그냥 넘어가 준다며? 어떻게 10초도 못 가?”
……끙. 지환은 고개를 돌리며 헛기침을 했다.
도대체 차검은 왜 항상 화가 나 있을까.
알 수가 없다.
“하여튼 고생 많았다. 너랑 현수랑 큰일 했어.”
“야, 내 앞에서 남현수 이름 꺼내지 마. 가로세로 다 더해서 8cm로 줄여버
리기 전에.”
……아아. 싸웠구나.
그것도 격렬하게.
“아무리 생각해봐도 남현수는 나 열 받게 하려고 태어난 놈 같아. 어쩜 그
렇게 하나도 예쁜 구석이 없는지 몰라.”
“언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예쁘다며. 태어나 그렇게 눈이 예쁜 남자는 처
음 본다며.”
“죽을래?! 그땐 내가 눈이 삐었고!”
“범인 잡는 형사 눈빛이 예쁘다는 사람은 아마 차정윤이가 처음일 거다.”
“……내가 미쳤었다. 잠시.”
인정. 정윤이 모닝롤을 우적우적 입안으로 밀어 넣는다.
그 모습에 기함하며 지환은 빨리 사라져라, 손을 팔랑팔랑 흔들었다.
“제발 부탁인데 뭐 먹을 땐 니 사무실 가서 먹으면 안 되냐? 쓰레기는 맨날
여기다 처박아두고 몸만 떠나지 말고.”
“싫어. 여기서 먹을 거야. 내 사무실은 쾌적했으면 좋겠어. 항상.”
여긴…… 조만간 벌레 나올 것 같아……
너 때문에…….
“어, 검사님. 자리에 계셨네요.”
그때였다.
똑똑, 문을 두드리며 수사관이 들어왔다.
지환과 정윤이 둘 다 돌아보자 급박한 일인 듯 잔뜩 긴장한 얼굴로, 수사관
은 빠르게 들어왔다.
“저, 일이 좀 생겼습니다. 서 검사님.”
“무슨 일입니까?”
“백인호 의원님의 사모님께서 참고인 조사 차원의 자진 출석을 하셨습니
다.”
“네에?!”
놀란 목소리는 듣고 있던 정윤의 것이었다.
말을 잃은 지환을 대신해 정윤은 들고 있던 빵을 내리며 눈을 크게 떴다.
“지금 여기로 왔다고요? 강희주가? 직접?”
“예. 변호인도 없이 혼자 출석하셨습니다. 지금 기자들 사이에 난리가 났습
니다. 어떡할까요?”
변호인도 없이, 혼자.
특검팀이 꾸려지기도 전에. 정식으로 소환장을 보내기도 전에.
법원과 국회가 아직 백인호의 거취를 정하지 못해, 그들도 혼란스러워할
때.
“서검. 어떡할까? 어떡하지?”
……사건의 참고인.
“아니, 강희주는 부르지도 않았는데 왜 갑자기 와? 연락도 없이? 그것도
혼자?”
강희주를 이토록 빨리 보낸 건 백인호의 그림인가.
언론을 의식한, 일종의 두뇌 싸움인가.
“내가 내려가서 강희주 만날 테니까, 서검 너는 여기 있어.”
……수가 읽히지 않는다.
“됐어. 그럴 필요 없어.”
지환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정윤은 잔뜩 굳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목소리는 금세 갈라졌
다.
“서검, 설마 니가 강희주를 조사하겠다는 건 아니지? 그치? 내가 할게. 내
가 한다니까?”
“됐어. 어차피 한 번은 있을 수밖에 없는 일이야. 예상보다 앞당겨진 것뿐
이고.”
지환은 묵묵히 재킷을 입고, 단추를 잠갔다.
말을 잃고 바라만 보는 정윤을 힐끔, 바라본 지환은 괜찮다는 듯 두어 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내가 시작한 일이고 내가 끝을 봐야 하는 일이야.”
“하지만 서검…….”
“걱정 마라.”
……운명은 개연성을 무시한다.
흘러갔으면 하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법이 없다.
“걱정 마라, 차검.”
인간이란 그러니 그저,
때마다 견디는 수밖에 없는 거다.
“너 이제 그런 일로 내 걱정, 안 해도 된다.”
*
“저기! 저기 차량 들어온다!”
어느 기자의 외침을 필두로 고요했던 검찰청 앞의 분위기는 급변했다.
검은 세단은 거침없이 검찰청 안으로 진입했고 보란 듯 계단 앞에 멈춰 섰다.
차르륵ㅡ! 차르르르륵ㅡ!
아직 차에서 누군가 내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셔터음은 합창하는 것처
럼 울려 퍼졌다.
단 한순간도 놓칠 수 없는 취재진의 열기란 대단했다.
카메라에서 쏟아지는 빛이 눈부시다. 희주는 차에서 내리기 전 마지막 심
호흡을 했다.
운전대를 잡은 기사는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사모님, 괜찮으십니까? 문을 열어도 되겠습니까?”
검게 코팅된 차량 안을 들여다볼 지경으로 기자들의 카메라가 세단을 포위
한다.
“사모님, 지금이라도 차를 돌릴까요?”
희주는 마치 들개들의 습격을 당하는 것처럼 떨리는 팔을 잡고는, 마지막
으로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문 열어줘요.”
“네. 알겠습니다.”
운전사는 결심이 선 듯 차에서 내렸다.
크게 관계가 있는 사람도 아닌데 더 많은 셔터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차량을 돌아 상석으로 걸어간 운전사는 기자들이 넘쳐나는 공간 속으로,
그녀를 공개했다.
차 문이 열리자 취재진들의 열기는 더욱 뜨거워졌다.
그녀가 지면에 발을 딛기도 전에ㅡ
“자진 출석은 누구의 생각입니까? 백인호 의원께서 지시하신 일입니까?”
“자진 출석하신 이유가 뭡니까? 오늘 여기서 밝히고자 하는 것들은 뭡니
까!”
기자들의 질문이 쇄도한다.
희주는 굳은 표정으로 차량에서 내렸다.
그녀가 내리자 대기 중이던 검찰청 관계자들이 계단을 뛰어 내려왔다.
두 팔로 진영을 넓혔다.
예정된 출석이 아니다 보니 취재진 경계선이 없어 몸싸움은 정신없이 이어
졌다.
“백인호 의원이 금괴 밀수에 연루되어 있음을 인정하십니까!”
“오늘 밝히려는 것들에 대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그녀는 고개를 수그린 채 경호원들의 비호를 받으며 앞으로 묵묵히 걸어갔
다.
화장기 없는 얼굴, 유독 수수하게 차려입은 옷.
그녀는 평소 화려하던 모든 모습을 지워냈다.
“국민들께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지금 심경이 어떠신지요!”
“어떤 이유로 자진 출석을 한 건지 말씀해주세요!”
계단을 서둘러 올라갔다.
문 하나를 통과하니 언제 그랬냐는 것처럼 기자들이 넘치던 바깥과 완벽하
게 단절되었다.
관계자들은 그녀의 좌우, 뒤를 막으며 앞으로 걸었다. 희주는 그들이 안내
하는 대로 걷다가ㅡ
“여기서부턴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익숙하고, 또 익숙한 목소리에 걸음을 잠시 멈췄다.
“수고하셨습니다.”
“예, 검사님.”
희주는 천천히 고개를 들고 앞을 바라보았다.
그곳엔 그가 서 있었다.
지환의 지시에 둘러싸고 있던 관계자들은 서둘러 뒤로 물러났고, 지환은
입을 열었다.
벌써부터 뜨거움이 울대를 막아, 그녀는 손을 말아 쥐었다.
……살며 단 한 번도 상상해본 적 없었던 지금 이런 순간,
이런 만남.
“지금부턴 저를 따라오시죠.”
신의 장난이라고밖에 생각 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