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5. 너만 몰랐으면 하고 (75/98)

75. 너만 몰랐으면 하고

지환은 조사실이 아닌 자신의 검사실로 향했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자진 출석을 한 참고인에 대한 예우일 뿐이었다.

사방이 꽉 막힌 답답한 조사실보단 훨씬 더 부드러운 환경과 공간, 지환은

책상 앞으로 걸어갔다.

이곳까지 걸어오면서 단 한 마디도 나누지 않은 두 사람은 책상 하나를 사

이로 멀어졌다.

“앉으시죠.”

입고 있던 재킷을 벗으며 그는 말했다.

희주는 책상 앞에 마련된 의자를 응시하다가 천천히 걸어가 앉았다.

……시간이 자꾸만 뒤로 흘러갈 것만 같아, 그녀는 조심스럽게 깊은숨을

내쉬었다.

지환은 참고인 진술을 받기 전에 책상을 정리하고 모니터에 시선을 주었

다.

모니터에 시선을 박았다고 하는 것이, 옳을지도 몰랐다.

“시작 전에 참고인 진술 관련 영상 녹화가 이루어질 예정입니다. 동의하십

니까.”

“……네.”

지환은 손만 움직여 영상 녹화를 시작했다. 여전히 그의 시선은 모니터에

있다.

“성함 말씀 주십시오.”

“…….”

조사는 시작되었다. 

“성함, 말씀 주십시오.”

“강……희주입니다.”

“주민번호.”

그저 이름 한마디 떼었을 뿐인데 목이 멘다.

희주는 뜨거움을 누르려고 자꾸만 마른침을 삼켰다. 눈썹 끝에 눈물이 흔

들릴 것만 같았다.

눈물을 삼키면 손끝이 떨렸고, 손끝에 힘을 주면 목이 메었다.

잔기침을 뱉으며 숨을 고르는 때면 또다시 눈물이 맺히고, 눈물을 삼키면

어지러움에 주변이 아득해졌다.

태연하고 싶어도, 평범하게 있고 싶어도,

그러자니 제 안에 신경 쓸 것이 너무 많아 정신을 차리기가 힘이 들었다.

“주민번호 말씀 주십시오.”

……한때는, 사랑을 했다.

“XXXX, 입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그렇지.

나는 당신을 지키려고 나를 버렸는데.

당신을 떠나오며 나는 나를 모조리 태워버렸는데.

“현주소 말씀 주십시오.”

이제 와 생각해보니 단 한순간도 후회하지 않은 적은 없었던 것 같아.

망가질걸. 차라리 당신도 나도 함께 무너질걸.

그래도 함께라면 그걸로 되었을 텐데.

어쩌자고 그때의 난, 그런 선택을 하고 말았을까.

“XXX…… 입니다.”

……결국 말다운 말은 해보지도 못하고 눈물이 떨어진다.

희주는 급하게 고개를 숙였고, 지환은 내내 모니터만 응시하며 숨을 내쉬

었다.

그러다가, 손만 뻗은 채 티슈를 잡아 그녀 앞으로 밀었다. 

“미안……해요…….”

그다지 듣고 싶지 않은 말이 흘러 나온다.

“참고인. 영상 녹화 중입니다.”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지환은 이를 아득 물었다.

모니터에 선명하게 적힌 강희주, 이름 세 글자가 또렷해 들여다보기가 힘

들었다.

“전부 다…… 미안해요…….”

그는 결국 녹화를 중지했다.

“정말 너무 많이…… 미안해요…….”

“그만해.”

“내내 이 말을 하고 싶었는데 못 해서…… 내내…… 하려고 했는데…… 못

해서…….”

“그만하라고!”

지환은 모니터에서 시선을 뗐다.

고개를 숙인 채 어깨만 흔들리는 그녀를 보고 있자니, 어떻게든 눌러보려

던 가슴의 응어리가 터지고 말았다.

……복발한다.

“너 뭐야. 너 뭔데 여기까지 와서 그딴 말을 해. 너 참고인이 뭔지 몰라? 지

금 니가 무슨 자격으로 왔는지 벌써 잊었어?”

“…….”

“미안? 미안? 미안이라니. 이제 와 미안이라니! 내가 너한테 사과나 받자

고 여기 앉아 있는 줄 알아? 미안이라니! 어떻게 그런 말이 나와 내 앞에

서!”

끅끅, 그녀는 말을 잇지 못했다.

……후. 지환은 굵은 숨을 내쉬며 타이를 비틀었다.

급격하게 열이 오른 머리가 어지러워 고개를 숙이며 두 손으로 이마를 짚

었다.

숨이 엉켜 끅끅거리는 그녀의 울음소리만 공간을 가득 메우고ㅡ

“사과하지 마.”

그는 눈을 감은 채 중얼거렸다.

“받아줄 생각 없어. 함부로 빌지 말고, 멋대로 사과하지도 마.”

“그땐…… 그게 최선인 것 같아서…….”

그녀는 흐르는 눈물을 어찌할 바를 몰라 질끈 감았다.

“무서워서…… 진짜로 무서워서…… 나도 끝이고…… 오빠도 끝이라고 협

박하는데…… 그게 정말 너무 무서워서…….”

……그래. 아주 오래된 이야기지.

시작은 있었으나 끝은 없었던, 허무하고 시시한 어느 연인의 이야기.

“일이 꼬였는데…… 난 그때 너무 아는 게 없었고…… 너무 몰랐고…… 진

짜 당장 오빠가 어떻게 될 것 같아서…….”

장래를 촉망받는 어느 정치인의 눈길을 받아 헝클어진 미래.

“내가 오빠 망칠까 봐…… 그 사람이 정말로…… 오빠 어떻게 할까

봐…….”

“…….”

“미안해요…… 미안하다는 말도…… 너무 미안해서…… 하고 싶지 않은

데…….”

협박에 팔아버린 행복.

“미안해요…… 미안해요…… 이 말밖엔…….”

딴에는 믿었던 최선.

……침묵이 흐른다.

“이제 와서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이야.”

동요하지 않는 그의 음성이 시간을 잘라낸다.

“난 지금 니가 하는 이야기 하나도 믿지 않아. 관심도 없어. 그러니까 연극

하듯이 감성팔이 하지 마. 미안해서, 그래서 내 아내에게 접근했어?”

그녀는 더욱 눈을 질끈 감았다.

“내가 무슨 생각을 했을 거라 생각해? 당장이라도 달려가 네 멱살이라도

잡고 싶은 걸 억지로 참았어. 왜 그랬는지 알아?”

“…….”

“이렇게 만날 거니까. 너하고 내가, 검사와 참고인으로.”

그는 조금의 틈도 내어주지 않았다.

사정없이 밀어냈고, 벼랑 끝에 세웠다.

“궁금…… 했어요.”

“……하.”

“궁금해서…… 정말 너무 궁금해서…… 잘못된 줄은 알지만…… 어떤 사람

인지 너무 궁금…… 해서…….”

그대의 아내는 너무 예쁜 사람이라, 기쁘고 슬펐다.

그 사랑 행복하다 말하며 웃으니, 행복하고 서러웠다.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어요…… 멈춰야지, 멈춰야

지…… 했는데…… 안 됐어요…….”

나는 내가 사는 지옥을 버티려고ㅡ

천국 같은 당신들의 결혼 생활을 엿보고야 말았다.

“뭘 어쩌고 싶어서 접근했던 건 아니에요, 정말…… 정말 그런 건 아니었어요…… 

미안요…… 미안합니다…….”

“……후.”

지환은 물 잔을 들었고 한입 가득 삼켰다.

물이 반쯤 남아 있는 물컵을 바라보다가, 키우는 작은 화분에 물을 뿌렸다.

아끼는 것이 메말라 보여 안쓰러움에 물을 준 느낌은 아니었고ㅡ

다만 물을 줄 시간이 되어 할 일을 한 것뿐이다, 하는 사무적인 느낌 또한

아니었다.

그가 다른 행동을 하자 희주는 무의식적으로 시선을 들어 바라보았다.

난데없이 촤륵, 화분에 물을 뿌린 그는 컵을 책상에 내리며 입술을 열었다.

“내 팔이 아직은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있음에 감사해라. 아니었다면 너한

테 뿌렸을 테니까.”

희주는 메마른 입술을 피가 나도록 사리물었다.

……그대의 세상에 나 하나만을 남겨두고,

영원히 함께할 거라 속삭이며 전부라 믿게 만들어놓곤, 사라져버렸다.

한순간에. 모든 흔적 없이. 연기처럼.

“그러니까 너도 정신 차려. 참고인으로 왔으면 진술이나 똑바로 해.”

“…….”

“참고인, 영상 녹화 시작하겠습니다.”

그 시절, 나는 그를 배신했다.

변명의 여지가 없다. 

*

“걱정 마십시오, 의원님. 절대로 체포 동의안을 승인하지 않을 겁니다.”

“맞습니다. 우리 당의 사활이 걸린 문제이기도 한데, 절대로 그런 일이 생

겨서야 되겠습니까?”

비상 대책 상황실이 꾸려졌고, 백인호를 찾아온 여러 의원들은 입을 모았

다.

백인호가 금괴 밀수에 가담을 했건 안 했건, 불법 정치 자금을 꾸렸건 아니

건 진실이 중요한 건 아니었다.

지금 백인호가 무너지면 당의 상황은 최악을 면할 수 없으리라.

어쩌면 당을 없애야 할지도 모른다.

백인호는 턱을 문지르며 입을 열었다. 

“여론몰이를 잘해야 합니다. 청와대건 법원이건 요즘은 뭣도 모르며 떠드

는 여론에 맥을 못 쓰니까.”

“예. 염려 마십시오. 음모론으로 잘 대응하고 있습니다.”

“차민규 씨의 변호사를 통해서도 잘 이야기해두었습니다. 차민규 씨만 입

다물고 잘 넘어가면 공론화도 몇 개월 안에 끝날 겁니다.”

“……휴.”

백인호는 짧은 숨을 내쉬었다.

처음엔 경황이 없어 대응하지 못했던 것들을 하나하나 준비하며 이른바 전

투태세를 갖춰나가기 시작했다.

“사모님께서 자진 출석을 하셨는데, 이건 어떻게 해야 할지…….”

강희주는 검찰청으로 직접 걸음을 했다.

뉴스에서 하루 종일 그녀와 자신의 이야기를 떠들고 있지만 이미 조사를

받고 있는 강희주는 손쓸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새벽같이 집을 나선 모양이다. 자신과 마주치지 않으려고.

“백 의원님, 사모님께선 대체 뭘 알고 계신 겁니까?”

“아는 게 없으니 용감한 겁니다. 다들 아시잖습니까, 이래서 사람은 출신이

중요한 겁니다.”

강희주를 향한 분노와 배신감에 치가 떨리지만 백인호 의원은 침착한 표정

으로 일관했다.

자신이 불안해하면, 앞에 있는 자들도 불안해할 것이다.

불안함은 의심을 사고, 의심은 곧 다른 살길을 궁리하게 할 테니.

한배를 탄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나 하나만 살면 그만인 사람들.

백인호 의원은 그러한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한 말씀 드리자면 여기 모이신 분들 중 제 도움받지 않은 사람, 없습니

다.”

백인호는 상체를 소파에 기대며 입술을 열었다.

“불법 정치자금이니 뭐니 말이 많지만, 제가 무슨 죄가 있습니까. 다 여러

분들의 정치생명을 위해 발로 뛴 죄밖에 더 있겠습니까?”

불법 정치자금.

다 너희와 나눈 것이다. 그는 은근한 압력을 넣었다. 

“당을 위해 희생한 저입니다. 그러니 이제 여러분들께서 제게 보답할 차례

입니다.”

“백 의원님, 걱정 마십시오. 저희가 의원님의 힘이 되어 드리겠습니다.”

“저는 여전한 자금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원하시는 만큼, 필요한 만큼 지원

해드릴 테니 지금 당에 처한 이 난관을 함께 뚫고 나가봅시다.”

거만의 부를 암시하며 백인호가 돈을 대주겠다고 하자 의원들의 눈빛이 달

라진다.

이러한 와중에도 일신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자들.

신물이 났다.

“백 의원님, 그럼 준비하신 것들은 언제쯤 터트리실 생각이십니까?”

“기자회견 날짜 시간은 당 대변인을 통해 이야기하는 걸로 합시다.”

“예, 의원님. 잘 알겠습니다.”

결의를 다지는 의원들의 표정을 바라보다, 백인호는 마른 주먹을 쥐었다.

강희주의 조사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초조해졌다.

어떤 카드를 쥐고 서지환을 만났는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그들도 백인호가 어떤 카드를 쥐었는지 알지 못하는 것처럼.

*

긴 조사 시간이 흘렀다.

어느덧 안정을 찾은 희주는 자발적 출석을 한 이유에 대해 차분하게 진술

했다.

검사 서지환은 참고인 강희주의 진술을 묵묵히 들었고, 간간이 질문을 했

다.

참고인 강희주는 덤덤하게 진술했고, 검사 서지환의 질문에 간간이 답을

했다.

구경하는 이는 없지만 찰나도 놓치지 않고 촬영 중인 작은 기기 앞에, 두

사람은 맡은 역할에 충실할 수 있었다.

희주는 백인호 의원의 가려진 행실에 대해 이야기했다.

많은 국민들은 백인호 의원이 주도하는 정치쇼에 속고 있다.

그는 정직하고 강직한 사람이 아니다. 

개인의 이득을 위해 많은 법규를 위반했으며, 많은 사람들을 돈으로 매수

했다.

나 또한 그의 정치쇼에 가담하게 되었다. 나 역시 그의 조력자 역할에 충실

했다.

……지환은 얼굴의 모든 표정을 지웠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그녀의 불운한 결혼 생활이 드러나고야 말았다.

“참고인. 하나만 더 묻겠습니다. 금괴 밀수 관련 혐의에 대해선 아는 바가

없습니까?”

“금괴 밀수에 대해 아는 바는 없습니다. 현재로는.”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백인호가 더 큰 죄를 덮기 위해 작은 죄를 터트리고 있는 건지.

그가 강희주를 움직이고 있는 건 아닌지.

앞에 앉아 있는 강희주는 백인호의 사주를 받아 인형극을 벌이고 있는 게

아닐까.

……대화가 이어질수록, 혼란만 가중되었다. 

“참고인이 자발적 출석을 택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한 일입니다. 제가 너무 늦은 것도 잘 알지만 지금이

라도 백인호 의원의 민낯을 공개해야 한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습니다.”

“뒷받침할 만한 증거는 가지고 있습니까?”

“……여기, 있습니다.”

그녀는 작은 USB를 꺼내 책상에 내렸다.

지환의 눈은 작은 기기를 향했다.

아주 어렵고, 아주 무거운 시간이 흘렀다.

“지난 몇 년 동안 남편 백인호 의원에게 당한 멸시와 폭언이 담긴 USB입니

다. 혹시 몰라서 집 안에 있을 땐 항상 소형 녹음기를 착용하고 있었습니

다.”

가슴이 난도질당하듯 아리고 저려오는 것을 모른 척하며, 희주는 USB를

지환에게 밀었다.

아직 USB에서 떼지 못한 손끝은 미세하게 떨렸다.

“그리고 백인호 의원이 사석에서 포섭한 각계각층의 고위 간부들과의 대화

내용도 있습니다. 물론 제가 함께 있을 때의 일들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원했던 결혼은 아니었다고,

앞선 고백을 해야 했던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USB 안에 무엇이 들어 있건 어떤 내용을 확인했건 간에 당신, 놀라지 말라

고.

“그는 단 한 번도 아내인 저를 인격적으로 존중한 적이 없습니다. 필요한

건 제가 아니라 제가 가진 인지도였을 뿐입니다.”

차마 지환의 눈을 바라볼 수 없어, 시선은 USB에 닿았다.

지금은 모든 것을 잊고 뚝 잘라 남이 된 인연이라 할지라도ㅡ

아무렇지 않게 USB를 받아들 수 있는 사람, 많지 않을 테니까.

“녹음의 중간중간 백인호 의원이 지닌 정치적 사상, 국민을 생각하는 자세

등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우리 모두는 알아야 합니다.”

그녀는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

용기를 내어 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변한 듯 변하지 않은. 변하지 않은 듯 변한 그의 얼굴과 눈빛.

시간은 뒤로 가지도, 빠르게 흐르지도 않았다. 

다만 그녀 안에서 멈추었다.

“백인호 의원은 제가 연예인 삶을 살던 시절, 전 매니저에게 거액을 넘겨주

고 스폰서를 제안해왔습니다.”

세월에 박힌 가시가 입술 끝을 찢고 밖을 나선다.

“아무것도 알지 못했던 저는 그의 협박과 압력에 못 이겨 부당한 하룻밤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 후로도 이어진 감금과 폭행, 그렇게 백인호 의원과 결

혼까지 이어졌습니다.”

“…….”

“그것과 관련된 자료도 함께 제출합니다.”

그녀는 핸드백을 열어 작은 종이 몇 장을 꺼냈다.

예전 매니저가 적어준 백인호 의원의 연락처, 결혼 당시 나눈 계약서 등이

었다.

……말이 끊긴다.

갈 곳을 잃은 지환의 눈빛은 한참이나 헤매다가 USB에 닿았다.

무의식에 말아 쥔 주먹이 책상 위로 올라온다. 

“참고인.”

“……네.”

공기가 역겨워 토악질이 나올 것만 같았다.

“이런 것들을 이제 와서 세상에 공개하는 이유는 뭡니까.”

진심으로 묻고 싶었다. 어째서, 어째서 이제야.

희주는 그의 질문을 들으며 마음을 진정시키는 숨을 내쉬었다.

이제,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무서웠어요.”

……당신이 알까 봐.

“모두가 행복할 거라고, 부러워만 하는 결혼임을 알고 있었어요. 그것들을

깨고 제 불행함을 세상에 공개한다는 것이 무섭고 두려웠습니다.”

사실은 모두가 알아도 괜찮아, 당신만 몰랐으면 했어.

하지만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으니까. 결국엔 당신도 나의 불행함을, 듣게될 테니까. 

“그가 행하는 무차별 폭행에 익숙해져 개선의 여지를 찾지 못한 채 살았습

니다. 불행을 당연시하게 받아들였고 그렇게 살아야 하는 줄 알았어요.”

“…….”

“그런데 정신이 들었어요. 나 하나 참고 사는 것이 정답은 아니라는 걸 깨

달았으니까요. 잘못된 것은 바로잡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움직여야 한

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지환은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

맑고 투명했던 그 언젠가의 눈빛은 사라지고ㅡ

“제가 변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변할 수가 없겠더라고요. 멈춰 서서 환경이

변하길 바라는 어리석은 짓을 이제는 멈추기로 했습니다.”

어딘가 모르게 겸허해진, 세월에 성숙해진 눈빛의 강희주가 앉아 있다.

오해와 진실이 만나는 순간.

묵혔던 미움과, 빛바랜 증오가 길을 잃고 사라지는 순간.

“거짓말과 비겁함 앞에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다시는 그 누구도, 다

시는, 그…… 다시는 그 누구도…….”

그녀는 비로소 진술을 끝마치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제가 준비한 오늘의 진술은 여기까지입니다. 서지환 검사님.”

“…….”

두 사람은 한동안 일어날 수 없었다.

*

“여보세요? 서지환 씨?”

희원은 뉴스를 보다가 오래도록 연락이 없는 지환에게 전화를 걸었다.

세상이 시끄럽게 떠는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그 안에 소속된 지환이 염려

되었다.

ㅡ여보세요.

“아, 오빠. 바빠?”

ㅡ아냐, 대충 끝났어. 안 그래도 전화하려고 했는데.

전화하려고 했는데.

희원은 그의 말에 빙그레 미소 지으며 몸을 뒤척였다.

소파에 누워 TV를 틀어놓고 있던 그녀는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홍차를 삼

켰다.

ㅡ뭐 하고 있었어?

“그냥, TV도 보고 청소도 하고, 아, 맞다. 아침엔 사우나도 다녀오고.”

ㅡ잘했네. 밥은 안 먹었어?

“먹었죠. 든든하게. 서지환 씨는 먹었어?”

ㅡ어, 이제 먹어야지.

이제 어둑해지는데, 점심을 건너뛴 모양이다.

희원은 뉴스를 바라보다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나 뉴스 보는 중인데, 있잖아.”

강희주.

그녀가 검찰청 안으로 들어서는 모습을 하루 종일 반복해서 틀어주는 뉴스.

오만가지 추측과 예상이 난무하는 그녀의 자진 출석.

“저…… 있잖아요, 그 강희주…… 라는 분. 오늘 검찰청으로 출석했던데.”

괜한 질문인 걸까.

그가 말이 없다.

“아니, 별건 아닌데 사실 내가 그분이랑 좀 안면이 있어서. 그분 괜찮은 걸

까 해서…….”

ㅡ아아. 저기, 희원아.

희원아. 그가 이름을 부르자 희원은 말을 멈췄다.

한없이 부드럽고 자상한 음성이었지만, 어쩐지 그는 지쳐있는 것 같았다.

“응, 말해요. 나 듣고 있어.”

ㅡ그, 강희주라는 사람. 너는 걱정 안 했으면 좋겠다.

“……응? 왜?”

희원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죄질이 나빠? 참고인이라던데? 현재는 그냥 참고인 아니야?”

ㅡ그런 것보다도 그냥 너는 그 이름 몰라도 돼. 몰랐으면 좋겠어.

들고 있던 찻잔을 테이블에 내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 뜻을 잘 모르겠어. 내가 그분이랑 되게 친하다고는 못

하겠는데, 이래저래 무용 관련해서 도움도 받고.”

격한 호감이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마다할 이유는 없던 인연이다.

“알아요, 일하는 거 묻고 싶지 않은데 그래도 걱정이 좀 돼서 강희주 씨한

테 먼저 연락을 해볼까 하다가…….”

ㅡ당신한테 의도적으로 접근한 거야. 단순한 호감이나 좋은 의도 아니었

고. 그런저런 이유에 내가 끼어 있고.

“아…… 그게 무슨 말…….”

희원은 점점 말꼬리를 흐렸다.

뭐가 뭔지 하나도 알 수 없었지만 어쩐지 지금 그의 음성과, 말투와,

ㅡ참고인 신분으로 출석해서 지금까지 조사했어. 담당이 나였거든.

“저기, 서지환 씨. 있잖아. 내가 뭐 묻고 싶은 게 있는데.”

ㅡ……그래.

지나치게 차분한 지금 그의 분위기가,

ㅡ물어봐. 괜찮아.

“혹시 그분, 서지환 씨가 아는 사람이야? 원래……부터…… 아, 그러니까

내 말은요,”

ㅡ그래. 맞아.

“…….”

ㅡ알았었어.

희원은 소파에서 일어나 바로 앉았다.

알았었다는 단어가 주는 미묘한 분위기를, 그녀는 읽었다.

“아…… 잠깐, 잠깐만요.”

이마를 짚으며 희원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급하게 오르내리는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서지환 씨 정말 미안해, 이런 거 자꾸 물어서. 그런데 하나만 더 물어볼

게.”

ㅡ괜찮아, 물어도 돼 얼마든지.

“그 사람이, 그러니까, 강희주 그 사람이.”

차마 말이 떨어지질 않는다.

당신의 과거였냐는, 그런 엄청난 질문은 감히 나오질 못했다.

ㅡ지금 네가 생각하는 그거, 맞아.

“아…….”

희원의 입에서 알 수 없는 탄식이 터졌다.

……상처받지 않으며 사랑한다는 것은 가능한 일인가.

차마 너도 나도 잇지 못해 끊긴 대화를 두고, 밤은 깊었다.

침묵으로 하는 고백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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