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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괜찮아 내가 갈게 (76/98)

76. 괜찮아 내가 갈게

오한이 스미듯 차가움이 느껴진다.

희원은 추운 기분이 들어 제 어깨를 비볐다.

휴대폰을 들고 있는 손이 떨렸지만 갑자기 추워진 까닭이라고, 믿어보기로

한다.

“아…… 그랬구나.”

툭, 하고 그녀는 말을 뱉었다.

뜻이 담긴 말은 아니었다. 경황은 없었다.

스스로 완벽하게 상황을 이해한 건지는, 건너뛰기로 한다.

“아…… 그래서, 그러니까, 그러니까, 서지환 씨…… 때문에 나한테 접근을

했다는…….”

유명한 정치인의 아내.

첫눈에 입이 떡 벌어질 만큼 예쁜 여자.

걷는 걸음걸음 사이, 모든 이의 시선을 한 몸에 받던 여자.

화려했던 연예인 생활을 단숨에 접고 결혼을 선언한 여자.

그 이면에, 그렇게 만인의 박수를 받던 시간 뒤에,

내 남자의 상처가 있었다.

“어…… 그렇지, 그런 거라는…… 아…… 어쩐지 이상하긴 했는데…… 서

지환 씨 때문에 나한테…….”

아아. 그랬구나. 그랬던 거구나.

못 잊은 게 아니라 잊을 새가 없었겠구나.

원하건 원치 않았건, 그녀의 소식을 접하며 보고 듣고 해야만 했을 테니까. 

상처가 더디게 나은 것이 아니라ㅡ

당신은 그저, 나을 새가 없었던 거구나.

“아니 잠깐만, 나 그런데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는데, 그런데 왜 나한테

접근을 한 거지? 그게 서지환 씨와 무슨 관계가 있는 거지?”

조금씩 의심이 스며든다.

아무리 객관적으로 들여다보려고 해도 그 여자의 행동이 이해되질 않는다.

“결혼까지 해놓고 지금껏 잘 살아놓고 나한테 왜? 왜? 왜?”

화가 난다.

“아직도 그 여자가 서지환 씨 못 잊었대? 아니, 잠깐만. 그럼 뭐야. 결혼했

으면서 왜? 아니, 아니지, 이건 아니어야지.”

ㅡ…….

“대체 뭔데? 지금 이게 뭐야? 무슨 상황이야?”

불쾌함을 넘어서는 분노가 머리끝으로 올라온다.

희원의 목소리가 갈라진다. 

“그럼 서지환 씨도 그 여자가 나한테 의도적으로 접근했다는 거, 알고 있었

어요?”

……질문의 영역은 조금씩 넓어졌다.

종전보다 더욱 떨려오는 팔을 간신히 잡고, 희원은 물었다.

“맞아? 내 말이 맞아? 알고 있었어? 그 여자가 나한테, 그러니까, 그 여자

가 나한테 일부러 접근한 거 알고 있었냐고 서지환 씨는.”

ㅡ알고 있었어.

“뭐, 뭐라고?”

감정은 급변하고, 분노 위로 상실감과 서러움이 밀려든다.

“알고 있었다고? 그런데 왜 말 안 했어? 나한테 왜, 서지환 씨는 왜 나한테

아무 말도 안 했어?”

ㅡ알리고 싶지 않았으니까.

“……뭐라고요?”

ㅡ괜한 말로 들쑤시는 일이 될 것 같아서, 하루라도 더 몰랐으면 해서.

“이렇게 알았잖아, 이렇게! 이렇게! 차라리 미리 알려줬어야지!”

언성이 높아진다.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어 놀아난 듯한 기분이 밀려들어 참을 수가 없었다.

“미리 알려줬어야지. 나 바보 된 것 같잖아. 미리 말을, 미리 말을 해서 나

한테, 나한테 가까이하지 말라고 알려줬어야지.”

ㅡ미안하다.

……미안하다.

그의 사과 앞에 그녀는 거침없이 뱉어내던 말을 멈추었다.

미친 듯이 쏟아내며 그를 비난하다 보니ㅡ

나라면 할 수 있었을까, 나의 과거를 서슴없이 귀띔해줄 수 있었을까.

모르는 게 약이라는 그런 생각.

ㅡ차마 내 입으로는 말이 안 떨어져서. 어차피 참고인 조사도 있고 하니 되

도록 당신 알게 되는 일 없이 잘 매듭지으려고 했는데.

나는 안 했을까.

그런 어둡고 안타까운 과거 따위, 모르게 하고 싶지 않았을까. 

ㅡ당신이 묻는데 거짓말은 할 수 없어서 말했어. 아마 당신이 묻지 않았다

면 내내 말하지 않았을 거야. 앞으로도.

“그래서 서지환 씨.”

ㅡ…….

“괜찮아?”

희원은 이마를 달구던 뜨거움이 조금 식어가는 것을 느끼며, 간신히 물었

다.

그녀의 질문이 느닷없다고 여겨졌는지 그가 말이 없다.

“지금 괜찮냐고요. 여태 조사했다며. 만났다며.”

ㅡ…….

“괜찮아? 괜찮은 거 맞아? 조사 잘한 거 맞아? 진짜로?”

할 말이 없는지 그가 웃는다.

사람 속도 모르고, 태연하게도 웃는 그의 웃음소리가 그 어떤 대답보다도

더 안전하게 들려왔다.

ㅡ괜찮지 않을 리가 없잖아.

“……정말 괜찮은 거 맞아? 믿어도 되는 거야?”

ㅡ내 걱정을 당신이 왜 해, 난 지금 당신이 걱정인데.

“서지환 씨는 당연히 내 걱정해야지! 나 지금 미치고 팔짝 뛰기 일보 직전

인데! 내 걱정 당연히 해야지! 해야 하는데!”

ㅡ희원아,

“왜요! 내 이름 왜 부르는데! 그것도 지금 이 타이밍에! 그렇게 다정하게!”

ㅡ내 걱정 말고 화내도 돼. 참지 말고, 혼자 삭이지 말고 하고 싶은 말 다

해.

……마음이 미어진다.

ㅡ당신 지금 화나야 하는 게 맞다. 화가 나야 정상이지. 속으로 참아 누르

지 말고 하고 싶은 대로 다 해. 괜찮아.

그 작은 조사실 안에서ㅡ

숨을 곳도, 피할 곳도 없었을 그 작은 공간 안에서ㅡ

나의 남편은 무엇을 어떻게 참아가며 고된 시간을 보냈을까.

ㅡ지금 당장이 아니라도 순간순간 화가 나면 화내. 언제든지. 참지 마, 희원아.

매일매일 참고 사는 것에 익숙해진 나의 남편이, 그렇게 살지 말란다.

그러다 병난다고. 속 탄다고.

내가 해봐서 아는데, 그렇게 살면 안 되는 거라고.

ㅡ내 생각 조금도 하지 말고 당신 생각만 해. 아무것도 참지 마. 생각나는

대로, 나한텐 아무렇게나 해도 돼.

“오늘 늦어? 많이?”

……당신이 못 견디게 보고 싶어졌다.

죄도 없이 죄인이 된 채 홀로 버티고 있을 당신을 떠올리니, 눈물이 핑 돌

았다.

상처는 꺼내지 않는 사람이라, 아파도 아프다 말하지 않는 사람이라,

어디에도 말 못 한 채 또다시 당신 마음이 곪고 있을까 봐, 심장이 조여왔

다.

ㅡ아, 조금. 조금 늦을 거야. 최대한 일찍 마무리해보긴 할 건데 늦…….

“알았어요. 괜찮아. 걱정 말고 일 열심히 해.”

희원은 자신을 휘감았던 모든 감정을 지웠다.

지워낸 것이 아니라, 지워졌다.

“일 열심히 하고, 돌아와요. 기다릴게. 올 때까지.”

……더 많이 기다려줄게.

우리를 감싼 모든 비바람이 완벽하게 지나갈 때까지.

“끊어요. 아무 생각 하지 말고 서지환 씨는 열심히 일만 해.”

시간이 해결해줄, 많은 것들을 지나칠 때까지.

“서지환 씨 생각은 내가 하고 있을게.”

*

“이, 인호야! 인호야!”

쇠로 만들어진 의자가 거칠게 밀린다.

백인호 의원을 발견한 차민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접견실로 사용되는 공간으로 들어선 백인호는 쿵, 문을 닫았다.

단독으로 들어왔고, 차민규 또한 단독으로 있었다.

“인호야, 인호야아아…….”

세상은 온통 두 사람의 이야기로 시끄러운 와중에 면회가 성립되었다.

면회를 오는 길은 세상에 드러나지 않았고 비밀리에 완성이 되었다.

실제 이곳에 근무하는 사람들 중 백인호가 걸음 했음을 아는 사람도 많지않았다.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든, 백인호가 지닌 권력의 위세를 들여다볼 수 있는

상황이었다.

“앉아. 시끄럽게 굴지 말고. 시간 없어.”

백인호는 소리가 날카로운 쇠 의자를 끌며 자리에 앉았다.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며, 차민규는 따라 앉았다.

“왜 이제 왔어, 인호야. 내가 지금 어떤 상황인지 알면서 왜 이제 왔어, 연

락도 없이.”

백인호는 주머니를 뒤적거려 담배를 꺼냈고 그 앞에 내려놓았다.

골초인 차민규는 눈을 번쩍 뜨며 담배를 정신없이 꺼내 들었다.

수갑을 차고 있는 차민규의 손을 바라보다가, 백인호는 시선을 돌렸다.

“인호야, 나 진짜 어떡하면 좋냐. 나 너무 무섭다. 나 여기서 나갈 수 있는

거지? 그렇지?”

담배를 태우려다가, 차민규는 우선 내렸다. 

한가하게 담배나 피워 대며 사담을 나눌 여유가 없었다.

“나갈 수 있는 거지? 그런 거지? 대비책 있는 거지? 그렇지 인호야?”

차민규에게 변호사 네 명이 붙었다.

전 법무부 장관이 연결해준, 꽤나 능력자들이다.

“최선 다하고 있어. 너무 걱정하지 마.”

“그렇지? 그런 거지? 나 걱정 안 해도 되는 거지?”

짧은 대꾸를 하자 차민규의 눈빛에 생기가 돈다.

음식이 맛이 없다, 너무 춥다, 여기 사람들 너무 불친절하다, 나 언제까지

버텨야 하는 거냐.

차민규는 기다렸다는 듯 우다다다 말을 쏟아냈다.

“그 검사 새끼가 날 얼마나 압박하는지 몰라. 하마터면 넘어갈 뻔했어. 나

그래도 꾹 참고 입 다물고 있다, 인호야. 다 널 위해서 내…….”

“입 잘못 나불거리면 어떻게 되는 건지는 잘 알고 있지.”

“……어?”

지금 누구 때문에 이 고생을 하고 있는데.

따뜻한 말 한마디 없이 살벌하기만 하다.

백인호는 서늘한 눈빛을 하며 차민규를 바라보았다.

“여기서 좀 있어줘야겠어.”

“……어, 얼마나?”

“…….”

“얼마나? 얼마나 있어야 하는데? 일주일? 한 달?”

“몇 년은 있어야 하지 싶은데.”

“이, 인호야!”

몇 년이라고? 차민규는 눈알이 튀어나올 만큼 커다랗게 치떴다.

수갑을 찬 손이 덜덜덜덜 떨렸다.

“여, 여기서 몇 년을 살아야 한다고? 나 혼자? 너는? 너는!”

“시끄러워! 내가 살아야 형도 살려줄 것 아냐!”

쾅, 백인호는 책상을 소리 나게 치며 윽박질렀다. 

어안이 벙벙해진 차민규는 입술만 멍하니 벌렸다.

……후. 백인호는 안경을 벗으며 미간을 문질렀다.

“알잖아. 쉽게 가라앉지는 않을 거야. 누구건 책임을 지고 있어야 뭐라도

시도해볼 수 있어.”

“그, 그러니까, 그러니까 지금 나더러 독박을 쓰라 이거 아냐. 그렇지? 그

런 거지?”

“말했잖아. 상황이 좋지 않다고. 내가 살아야 다음을 도모할 수 있다니까?”

“그러니까. 너 살자고 난 감방에서 썩어 나자빠져라, 이거 아냐!”

“거참 말귀 못 알아듣네.”

“…….”

“십억 준비해놨어. 일 년에 십억씩 더 쳐줄 거고 출소하는 대로 현금으로

손에 쥘 수 있게 해줄게.”

“인호야…… 나 돈 필요 없다…… 나 여기서 나가게 해줘…….”

“지금 여기서 나와 봤자 형 사람답게 못 살아.”

“…….”

“내가, 그렇게 놔둘 것 같아?”

백인호는 조소했다.

차민규의 목덜미로 소름이 끼친다.

“내, 내가 입 다물어도 어차피 김복재가 다 불걸? 다 불어버릴걸? 그, 그땐

어떡하려고?”

“그쪽도 손 써놨어. 그 부모한테 돈 전해줬고 합의 봤어. 김복재는 입 다물

어주겠다던데.”

……돈.

“좀 참아. 몇 년 살고 나오는 대가치고 죽을 때까지 못 만져볼 돈을 준다는

데, 이 정도 거래 정도면 할 만하잖아.”

“그러니까…… 넌 애당초 여기서 날 꺼내줄 생각이 없는 거지……?”

“……형.”

백인호는 의자에 상체를 기대며 다리를 꼬아 앉았다.

깍지 낀 손을 무릎에 떨구며, 차민규를 표정 없이 바라보았다.

“원래 그러려고 형 쓴 거야.”

“…….”

“내 덕에 호의호식하고 지금껏 지냈으면 보은해야지. 안 그래?”

모든 혐의를 인정하면 가중처벌이다.

차민규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새겨들어. 내가 여기서 멈추면 우린 둘 다 죽어. 내가 살아야 중간에 형을

특사로 빼줄 수 있다고.”

“……믿어도 돼? 중간에 나 빼줄 거야? 일 년에 십억씩, 줄 거야?”

“당연하지. 특사로 빼줄게. 걱정하지 마.”

백인호는 벗어두었던 안경을 다시 썼다.

한줄기 희망을 품고 면회실을 찾았던 차민규의 표정은 한없이 어두워졌다.

“형 변호사들과도 이미 이야기 끝났어. 변호사들이 시키는 대로만 하면 돼.

문제없어.”

“…….”

“대답 안 해?”

“알았다…… 인호야…….”

백인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간신히 얻은 면회시간도 끝이 나고 있었다. 

“나 이제 못 찾아와. 변호사한테 설명 듣고, 잘 버텨. 허튼소리 했다간 고모

도 안전하지 않아. 나중에 효도해야 할 거 아냐?”

모친의 안전을 입에 담자 차민규의 눈썹이 일그러진다.

볼일이 끝났다는 듯 두어 번 책상을 툭툭 치더니 백인호는 의자 뒤로 돌아

나왔다.

차민규는 고개를 푹 숙였다.

“참…… 개 같다…….”

“뭐?”

백인호는 잘못 들었다는 것처럼 미간을 일그러트렸다.

더 이상의 말이 이어지지 않자 백인호는 잠시 후 말을 이었다.

“돈이 부족해? 그럼 조금 더 얹어주고.”

“그냥…… 괜찮은 거냐고, 형 잘 지내는 거냐고, 한마디도 못 물어보냐? 그

런 걸 먼저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니냐?”

“…….”

“그냥 개 같다. 나는 그냥 니가 키우는 개였구나. 짖으라면 짖고, 앉으라면

앉는.”

“형.”

차민규는 고개를 들었다.

“그걸 이제 알았어?”

백인호는 이미 저만큼 걸어간 뒤였다.

“돈만 생각해. 돈. 형이 좋아하는 돈.”

분하고 서글프지만 백인호의 말은 모두 옳았다.

개처럼 사는 수밖엔, 다른 방법이 없었다.

*

날씨가 어둑어둑하더니 얕은 비가 내린다.

눈도 아닌 것이, 비도 아닌 것이, 습한 날씨에 좁쌀 같은 물기가 연신 바람에 쓸려왔다. 

희원은 우산을 들고 1층으로 무작정 내려왔다.

밤을 새는 일이 많은 요즘, 졸음운전을 하면 안 되니 대중교통을 타고 다니

겠다며 요즘 그는 차를 두고 다녔다.

이제 집으로 돌아온다는 연락은 받았고, 그 후로 비가 내리기 시작했으니

우산이 있겠나 싶어 일단 내려온 것이다.

그런 그녀의 손에, 작은 종이가 쥐여져 있다.

저벅저벅 밟히는 흙 소리가 좋아 하염없이 주변을 배회하다가, 인기척이

날 때면 우산을 들고 그의 모습인지 확인하다가.

한참이나 그렇게 서성이다 보니 먼발치서 걸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자세히 보이지 않지만 어둠 속의 저 실루엣, 그가 맞다.

희원은 기분과는 관계없이 희미한 미소를 그렸다. 예상했던 것처럼 그는

우산 없이 걸어오고 있었다.

트렌치코트를 입고 서류 가방을 든 채, 그는 저벅저벅 걸음을 옮기고 있었

다.

고개를 꼿꼿하게 들지 않고 바닥을 향하고 있는 모습을 보자니ㅡ

그는 생각이 많은 것 같았다. 

“저거 봐, 저거 봐, 저럴 줄 알았어.”

희원은 그 모습을 보다가 중얼거리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도 인기척을 느꼈는지 고개를 든다. 그러곤 우뚝 멈춰 선다.

“어? 당신 나와 있었어?”

희원은 말없이 그의 앞으로 걸어갔다.

가만히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다가ㅡ

“서지환 씨 올 것 같아서 기다렸지. 비 오잖아.”

천천히 팔을 뻗었고, 그를 향해 우산을 기울였다.

간격이 다소 있던 까닭에 그녀의 몸이 우산을 벗어난다.

지환은 깜짝 놀란 얼굴로 우산을 그녀에게 기울여보지만 그녀가 꼼짝을 하

지 않는다.

“비 맞잖아, 당신 써.”

“아니. 오늘은 서지환 씨가 써. 내가 씌워줄게.”

“그럼 같이 써야지 비 맞……!”

“아니. 그냥 서지환 씨 써요. 오늘은 내가 씌워주고 싶어.”

지환이 희원에게 다가가자 희원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러곤 우산 속에 온전히 그만 남겨두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지환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왜 나와 있었어, 집에서 기다리지.”

“또 우리 서지환 씨가 세상 다 죽어가는 표정 짓고 여기까지 올 것 같아서.”

“…….”

“그러곤 집 안에 들어설 땐 활기차게 들어올 게 뻔하니까.”

희원은 어깨를 으쓱, 올려 보였다.

“그래서 내려왔지. 다 털어버리고 들어갈 생각이라면 나랑 함께 털고 가자

고.”

그는 이마를 짚었다.

타인이 들으면 별말 아니게 여길 수 있는 아내의 말속에 담긴 뜻을, 모를

수가 없어 가슴이 뜨거웠다.

아내가 씌워준 우산 속은 조금씩 따뜻해졌다.

이곳까지 몰고 왔던 비도 바람도, 모두 물러갔다.

“당신 단단히 화났을 것 같아서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하나, 내심 걱정하면서

왔는데.”

“……화났지. 서운하기도 했어요, 솔직하게 말하자면.”

“…….”

그녀는 빗속에서 진심을 내보였다.

모든 것이 젖어 쓸려가고, 그런 것만이 남은 것처럼.

“가만히 못 있겠더라고. 별생각이 다 드는 거야. 화도 나고 속도 상하고, 억

울하기도 하고 서지환 씨가 밉기도 하고.”

도저히 뜨거운 속을 삭일 수가 없어, 사실은 그런 마음을 품고 1층으로 내

려왔다.

그런데.

우편함에서 익숙한 것을 발견했다.

“이게 뭔지 알아?”

희원은 들고 있는 엽서를 팔랑거렸다.

지환은 모르겠다는 듯 눈썹만 추켜올렸다.

그 언젠가 여행지에서, 그녀가 그에게 보낸 엽서.

To. 서지환 씨에게.

엽서는 처음 써봐요. 당신에게 쓰는 편지도 처음인데 말이죠.

“이거 원래 괌에서 서지환 씨한테 주려고 쓴 엽서였는데, 도착했더라고. 얼

떨결에 읽어봤는데 그때 내가 나한테 주려고 썼나 봐.”

엽서에 적혀 있던 모든 말은 나에게 위로가 되었다.

분명 당신을 위해 썼는데,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나를 염려했던 듯이.

……희원은 엽서로 시선을 주었다.

“읽고 있는데, 읽으면서 서지환 씨 기다리는데, 마음이 차분해졌어.”

엽서가 도착할 때쯤이면 우리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요.

더 많이 행복해졌을까요?

우리는, 그렇게 되었을까요?

“지금 내가 하는 생각, 마음, 다 부질없더라고. 아무 힘도 없는 지난 시간의

일들 때문에 앞으로의 우리를 망치고 싶지 않아요.”

누가 그러던데, 과거는 바꿀 수 없지만 미래는 바꿀 수 있다고.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미래를 아름답게 바꿔갈 거라고,

나는 믿어요.

“어차피 지나간 일이고, 서지환 씨의 과거를 바꾸거나 지워버릴 수는 없을

테고, 그러니 어떤 형태건 간에 결말은 필요했겠지. 그게 오늘이었나 봐.”

서지환 씨.

내가 바라는, 분명한 건 단 하나.

“그걸로 됐어요. 당신이 과거와의 싸움에서 이겼다는 말, 나는 믿으니까.”

당신도 나도 우리도 모두 행복하길 바란다는 거.

“그리고 서지환 씨 안 다치고 여기까지 왔으면 됐어. 다쳤어도 할 수 없지

만, 안 다쳤다면 좋…….”

……지환은 말없이 희원을 끌어안았다.

우산은 저 아래로 내려가고, 빗속에 두 사람은 하나처럼 여겨졌다.

내가 너를 어떡하면 좋을까.

내가 어쩌다가, 이렇게 예쁜 너를 만났을까.

“미안해. 쓸데없는 걱정시킬까 봐 말 못 했어. 생각이 많아질까 봐, 그래서

말 못 했다, 미안해.”

“이해해. 아마 서지환 씨가 미리 말해줬더라면 차라리 말하지 말지 그랬냐

며 화냈을 거야. 알고 싶지 않았을 테니까. 나라면 분명히, 분명히 그랬을

테니까.”

말을 해도 하지 않아도,

괴롭게 지나갔을 시간이 흘러간다.

“미안하다…… 괜한 일 신경쓰게 만들어서 미안해…….”

지환이 읊조리듯 중얼거리며 꽉 끌어안자 희원은 가만히 서 있다가 그의

등을 쓸어안았다.

연약하고 얄팍했던 시간들은 이렇게 지나가는 걸까, 

비는 내렸지만ㅡ

아무도 빗줄기에 젖지 않았다.

두 사람은 서로의 마음에 젖어들기도 바빴으므로.

“나 서지환 씨 믿어. 아무리 생각해봐도 서지환 씨만큼 내가 믿을 수 있을

만한 사람은 없었던 것 같아. 또 날 많이 사랑해줬으니까, 그것도 내가 믿

으니까.”

“믿어. 믿어도 돼.”

“…….”

“나보다 너를 더 사랑할 사람, 앞으로도 없어.”

당신도 나도 우리도 모두 행복하길 바란다는 거.

그러니 행복하기로 하죠. 우리, 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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