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그래 이렇게
“글쎄 이렇게 찾아오셔도 소용없다니까요? 저 그 무대 안 해요, 사무장님.”
“아아, 희원 씨. 희원 씨. 이러지 말고 우리 얘기 좀 해요. 서로, 예? 마음의
문을 열고.”
“제가 왜 사무장님한테 마음의 문을 열어요, 마음의 문을 닫게 한 사람이
사무장님인데.”
어이가 없네. 희원은 중얼거리며 탄식했다.
전화를 끊자마자 사무장은 그녀의 집 앞으로 득달같이 찾아왔다.
문전박대는 할 수 없어 집 앞 카페에서 사무장을 만났다.
대차게 거절당하고 찾아온 까닭일까,
사무장은 나라 잃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이제 와서 말하는 거지만 희원 씨. 제 마음은 그런 게 아니었어요. 희원 씨
를 보내고 제가 얼마나 속이 상했는지 아십니까?”
“그러니까요. 그걸 왜 이제 와서 말씀하세요, 사무장님.”
“제가 정말 속이 상해서, 하유, 말도 마십시오. 진심입니다. 이게 제 진심이
에요, 희원 씨.”
“사무장님의 진심은 제가 그날 아침에 사무장님 사무실에서 충분히 확인한
것 같은데요.”
“아…… 뭔가 희원 씨 오해가…… 있으셨던 것…….”
“아아. 오해요.”
오해라.
희원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홍삼 한 팩, 비타민을 입안에 털어 넣으며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해고 통보
를 하던 그날의 사무장이 떠올랐다.
“그래요, 사무장님. 오해일 수 있죠. 아주 깊은 오해. 풀고 싶지 않고 가슴
에 남겨두고 내내 곱씹고 싶은 깊은 오해.”
“아아아…… 희원 씨…… 아…….”
사무장은 말꼬리를 흐렸다.
마주 앉은 희원이 이야기를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차가운 태도로 일관하자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를 섭외해야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무슨 일이 있어도!
“희원 씨. 저, 희원 씨.”
“이름 닳겠어요. 네. 사무장님, 말씀하세요.”
그녀는 말해보라며 시원하게 커피를 삼켰다.
사무장은 손수건을 들어 정수리에 맺힌 땀을 닦았다.
“저 좀 살려주십시오, 희원 씨.”
……희원은 커피를 마시던 손을 멈췄다.
“집에 고등학교 2학년짜리 아들놈하고 이제 막 대학교 입학한 딸이 있습니
다. 살려주십시오, 희원 씨.”
“사무장님, 제가 무슨 힘이 있다고 사무장님을 살려요. 저한테 왜 이러세
요.”
납작 엎드린 자세로 사무장이 살려달라 말하자 희원은 자세를 고쳐 앉으며
허리를 폈다.
그는 처량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희원 씨에게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그렇게 매몰차게 굴었겠습니
까? 위에서 안 된다고 하니 딱 잘라내려고 독하게 한 거였죠. 별거 없습니
다, 희원 씨.”
그녀는 사무장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사무장은 목이 타는 듯 찬물을 벌컥벌컥 삼키며 말을 이었다.
“뭐……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희원 씨는 이번 공연에 참여 안 해도 워낙
미래가 창창하니까. 공연 하나 취소됐다고 희원 씨가 못 먹고 못 살겠나,
그건 아닐 테니 그냥 저도 편하게 생각했습니다.”
“…….”
“희원 씨는 이번 공연 아니라도 미래가 있지만, 저는 여기서 잘리면 미래가
없어요. 희원 씨.”
“뭐, 좋아요. 사무장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아까보단 훨씬 듣기 편하네요.”
“아…… 그렇습니까. 다행입니다.”
혼자만 여름인 듯 땀이 비 오듯 쏟아져, 사무장은 연신 손수건으로 땀을 닦
았다.
자잘한 얼음만 남아버린 컵을 몇 번째 들었다가 놓았다를 반복하며 긴장한
표정을 풀지 못했다.
희원은 그런 사무장을 빤히 바라보다가, 입술을 열었다.
“입장 이해 못 한 거 아닙니다. 그때도 사무장님과 사무실 직원들의 입장을
이해했기 때문에 별말 못 하고 돌아선 거예요.”
“아…… 그러셨습니까.”
“공연 취소될 수 있죠. 그럴 수 있어요. 그런데 사무장님.”
“예, 희원 씨.”
“무대에 서는 사람들도 감정 있습니다. 필요에 의하여 쓰이고 버려진대도,
우린 다 사람이에요.”
사무장은 입술을 굳게 닫았다.
희원은 표정을 굳혔다.
“공연계에서 목소리 좀 낸다는 저도 이렇게 자괴감 들었는데, 하물며 그렇
지 않은 다른 분들은 어떻겠어요. 누구도 그들을 그렇게 만들 자격은 없
죠.”
그때, 갈 길을 잃고 찾아갔을 때ㅡ
따뜻한 위로 한마디 받았더라면.
어쩔 수 없음을 함께 안타까워하는, 눈빛 한 번 마주했더라면.
이렇게까지 이를 갈지는 않았을 거라고.
“말씀대로 고작 공연하나 취소당했을 뿐인데, 제가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
는 사람처럼 여겨졌거든요.”
“……무슨 말씀이신지, 잘 알겠습니다.”
“…….”
“앞으로는 그런 일 없도록 주의, 또 주의하겠습니다. 희원 씨.”
사무장은 자신의 과실을 인정했다.
타협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라는 것을 방패삼아, 그들의 마음을 헤아려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자신의 입장만 주입시킨 날들에 대한 성찰.
“희원 씨. 저도 이번 일을 겪고 나니 깨닫는 바가 많습니다. 결국 돕고 도움
받는 일인데 말이에요.”
“공연 취소된 인원이 저 포함 몇 명이죠?”
“단체 공연 및 한국 공연 기획 연출자를 포함하면 86명 정도 됩니다.”
“전원 복귀인가요?”
“……예? 아…… 예! 예예! 그렇습니다!”
사무장은 눈을 번쩍 뜨며 고개를 미친 듯이 끄덕였다.
경황이 없어 전원 복귀까지는 아직 생각을 못 했지만 희원이 복귀를 한다
면 응당 그들도 다시 돌아와야 할 것이다.
그녀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그럼 전원 복귀를 조건으로 생각해볼게요.”
“아이고오오! 희원 씨이이이이이ㅡ!”
사무장은 어깨춤이라도 출 표정으로 기쁨의 소리를 내질렀다.
쉿! 희원은 주변을 살펴보며 조용히 하라고 손짓했다.
“아직 마음 결정한 거 아니고요. 생각해보겠다고요, 사무장님.”
“그게 어딥니까! 어이고,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희원 씨!”
“저 진짜 섭섭했어요. 아세요? 제가 사무장님 때문에 밤에 잠도 못 잤다고
요.”
“하, 제가 한 명도 빠짐없이 전원 복귀시키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
다, 희원 씨!”
주변 시선도 무시한 채 사무장은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희원은 그런 사무장을 바라보다가 피식,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계약서 가지고 오셨어요?”
“물론이죠! 여기 있습니다!”
사무장은 황급히 가방을 열어 그녀의 계약서를 꺼냈다. 빠르게 만년필도
꺼내들었다.
희원은 계약서를 보지 않고 바로 돌돌 말아 쥐더니 일어섰다. 사무장의 얼
굴이 따라 올라온다.
“계약서 검토가 좀 필요해서요. 계약서를 봐주시겠다는 전문가가 가까이에
계셔서.”
“아…… 검토, 전문가, 예예. 얼마든지요. 예예.”
“끝나면 연락드릴게요.”
희원은 계약서 검토를 해줄 전문가를 떠올렸다.
세상 가장 든든한, 나의 조력자를.
*
[국민인권당 백인호 의원...혐의 관련 기자회견]
[백인호 의원 혐의 강한 부정...반박 증거 확보]
.
.
.
백인호 의원이 속한 국민인권당의 당대변인과 원내대변인은 종일 바쁘게
움직였다.
검찰 조사를 전면 부인하고 나선 백인호 의원이 그와 관련된 반박자료를
공개하겠다며 기자회견을 열었다.
자신의 정치 생명을 겨냥한 표적수사이다, 이번 사건과 무관하다는 주장을
뒷받침할 여러 증거를 확보했다, 라고 말하며 백인호는 대단한 자신감을
내보였다.
백인호의 언론 플레이가 거칠어지고 대담해질수록 검찰 쪽은 침묵했다.
“의원님, 오늘 초청된 기자 명단입니다.”
“줘봐.”
기자회견 시간을 기다리던 백인호는 기자 명단이 적힌 종이를 바라보았다.
거물급 인사의 사건인 만큼 그 수는 압도적으로 많았다.
주요 방송사, 신문사의 명단을 우선적으로 확인하며 백인호는 고개를 끄덕
였다.
평소 호의적인 기사를 내어주던 기자들의 이름도 확인할 수 있었다.
“질문 먼저 받아. 당황하지 않게.”
“예, 의원님.”
“미제출 질문은 답하지 않겠다고 전해.”
“예. 알겠습니다 의원님.”
두 시간 후.
기자회견이 시작될 예정이다.
백인호는 일찌감치 도착한 대기실에 앉아 호흡을 가라앉혔다.
그러다가 무엇을 떠올렸는지 피식, 헛웃음을 흘렸다.
……검찰 쪽 모두는 백인호가 차민규의 희생을 딛고 일어설 것이라 예상했
다.
하지만 백인호가 생각하고 있는,
그가 밟고 일어설 상대는 차민규가 아니었다.
“어린 새끼들 같으니라고.”
서지환이었다.
*
“백인호 의원은 기자회견장에 도착했습니까?”
“예. 삼십 분 전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지환은 최금호 계장을 통해 백인호의 현재 위치를 파악했다.
호기로운 자세로, 백인호는 꿋꿋하게 자신의 혐의를 전면 부인하며 검찰
조사에 대한 불신, 적폐를 드러냈다.
당최 무슨 패를 거머쥐고 저토록 큰소리로 언론 플레이를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어차피 그건 살아남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백인호가 어떤 수를 가지고 나와도 흔들리지 않을 만큼.
검찰은 아직 세상에 공개하지 않은 확실한 증거를 확보한 상태였다.
그러니 기다리면 된다.
수풀에 몸을 가린 채 적이 가까이 오기만을 기다리면 되는 일이었다.
“그럼 이제 슬슬 가볼까요?”
“예, 검사님.”
지환은 시계를 들여다보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까이 서 있던 수사관들은 지환이 일어서자 각자 나갈 차비를 마쳤다.
재킷을 입고 단추를 잠근 지환은 수사관들을 바라보며 씩 웃었다.
……올해가 다 가도록 치밀하게 준비해온 시간.
“검사님, 어지간한 기자들도 전부 기자회견장으로 이동했을 테니 한산하겠
네요.”
“그러니 아주 좋은 상황입니다.”
지환은 책상을 돌아 나왔고, 수사관들과 함께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백인호 의원의 기자회견이 예정된 터라 검찰청 앞도 한산했다.
준비된 차량에 올라탄 지환은 심호흡을 했다.
“자, 출발합시다.”
“예. 검사님.”
백인호의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
“캬, 으리으리합니다. 이게 집이란 말이죠?”
차에서 내린 최금호 계장은 엄청난 규모의 대저택에 말을 잃었다.
자택을 둘러싼 높은 담장은 성벽처럼 여겨졌다.
촘촘하게 늘어선 CCTV는 약간의 사각지대도 허용하지 않을 것처럼 보였
다.
“저, 그런데 말입니다. 검사님.”
최금호 계장은 다소 긴장했는지 손을 비비며 말했다.
“지금 이 상황이 차민규와 백인호의 합작품이면 어떡합니까?”
차민규는, 백인호의 자택에 숨겨져 있는 다량의 금괴 위치를 실토했다.
사안이 막중했지만 지환은 아직 수색영장을 발부받지 못한 상황이었다.
법원은 신중에 신중을 기하고 있었다.
“만약에 들이닥쳤는데 금괴 없으면, 이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눈앞이 캄캄
한데요.”
중얼거리며 최금호 계장은 힐끔 지환을 바라보았다.
지금이라도 멈춰야 하는 건 아닌가, 더 신중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자택 안에 금괴가 발견되지 않을 경우 검사 개인의 ‘실수’로 치부되지 않을
것이다.
진위를 모두 가리기도 전에 백인호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꼴이 될지도 모른
다.
검찰의 명예는 추락할 것이고, 그 모든 책임은 여기 있는 사람들이 나눠 가
져야 할 것이다.
이곳에 있지 않은 자들의 미래도, 장담할 수가 없다.
“검사님.”
“우린 지금 가택침입 하는 거 아닙니다. 염려 마세요, 계장님.”
지환은 높다란 담장을 덤덤하게 바라보다가 시선을 내렸다.
반들반들한, 두껍고 육중한 대문으로 시선을 옮긴 그는 가만히 바라보다가
걸음을 떼었다.
벨을 눌렀다.
♬♪♬♬♩ ♬♪♬♬♩
요란한 벨소리는 오래가지 않고 금방 꺼졌다.
띠이이이이익ㅡ 커다란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열렸다.
“누구냐고도 안 물어보는데요, 안에서. 이거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최금호 계장은 더욱 수상하다는 듯 목소리를 낮췄다.
어서 들어오라고, 열린 문.
지환은 손 뼘만큼 벌어진 현관문 안을 바라보며 입술을 열었다.
“차민규의 증언만 믿고 온 건 아닙니다. 안심하세요.”
이곳엔 강희주가 있다.
“참고인 강희주의 협조를 받았고, 지금 우리는 초대받은 겁니다.”
같은 시각.
백인호의 기자회견이 시작되었다.
*
“어서 오세요.”
집 안으로 들어서자 백인호의 아내 강희주가 그들을 맞이했다.
꽤나 많은 사람들이 올 것을 예상했는지, 현관 앞엔 미리 꺼내놓은 슬리퍼
가 상당히 많았다.
지환은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섰다.
참고인으로 검사실에서 만난 것도 모자라, 강희주가 살고 있는 집까지 오
게 되다니.
……최악의 인연임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서지환 검사입니다.”
지환은 패용증을 꺼내 보이며 그녀에게 묵례했다.
뒤로 들어선 최금호 계장은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지, 내부 인테리어
를 찬찬히 훑으며 입을 멍하니 벌렸다.
희주는 차례대로 들어오는 사람들이 안으로 들어설 수 있도록 조금 더 뒤
로 물러났다.
“입주 직원들은 개별적으로 딸린 공간에 모여 있습니다. 이곳엔 아무도 없
으니 편하게 수색하세요.”
희주는 남편을 피해 며칠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고 했다.
남편의 기자회견이 시작되었음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
“서재가 어딥니까?”
차민규에게 진술받은 대로 지환은 백인호 의원의 서재부터 찾았다.
함께 들어온 수사관들은 각자의 영역으로 퍼졌고, 희주와 지환이 남았다.
“따라오세요.”
희주는 지환을 바라보다가 돌아섰다. 한참이나 걸어가고, 계단을 올라가니
백인호의 서재가 나온다.
그녀는 먼저 들어갔다.
지환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안으로 들어섰다.
텅 빈 책상, 그 뒤로 빼곡하게 책이 꽂힌 책장이 있었고, 훑어보기엔 이상
한 기운을 느낄 수 없었다.
……차민규와 강희주를 믿고 시작한 일.
지금은 도리 없이 그녀를 믿어야만 하는 일.
“아직 금괴가 남아 있는지 확신은 할 수 없어요.”
그녀의 목소리에 그는 걸음을 멈추었다.
희주는 그가 걸음을 멈추자 손을 뻗었고, 책장 어디쯤을 가리켰다.
“비밀번호는 모릅니다.”
“알겠습니다.”
지환은 그녀가 가리키는 곳을 향했다.
빽빽하게 꽂힌 책을 바라보다가, 지환은 책장 사이사이를 두드렸다.
뒤가 막혔음이 여실한 묵직한 소리.
조금씩 공간을 이동하며 책장을 두드리다 보니, 약간은 다른 가벼운 소리
가 난다.
지환은 돌아보며 희주를 바라보았다. 희주는 긍정하듯 고개를 두어 번 끄
덕였다.
책장을 매만지던 지환은 힘주어 책장을 눌렀고, 우르르릉…… 소리와 함께
책장이 움직였다.
보기보다 쉽게 책장이 돌아간다.
그러곤 그 뒤로 비밀의 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래층에 있는 특별 수사관을 호출한 지환은 그가 비밀의 문을 열 때까지
잠시 기다렸다.
여러 숫자를 조합하던 수사관은 멈췄다.
“열었습니다.”
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린다.
지환은 장갑을 낀 채로 문의 손잡이를 돌렸다.
“허…….”
함께 따라와 내부를 들여다본 최금호 계장은 탄식했다.
희주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입을 가렸다.
백인호의 엘도라도를 찾은 것이다.
지환은 마른 주먹을 쥐었고 느리게, 입술을 열었다.
……이런 순간을 두고, 세상이 지어준 말이 있다.
“기자회견장에 대기 중인 수사팀에 연락하시고 체포하세요.”
“네. 검사님.”
끝났다.
*
“제가 도와드릴 건 없나요?”
수사관들이 각자의 일을 하며 바쁘게 움직일 때ㅡ
멈춰 서 골똘히 생각에 잠긴 지환의 곁으로, 희주가 다가왔다.
그녀의 삶은 이미 엉망진창이 되어버렸다.
지환은 모든 걸 내걸고 용기를 내준 희주를 힐끔 바라보았다.
“그동안 어디서 지냈는데.”
끼고 있던 흰 장갑을 벗었다.
“그냥, 이곳저곳에서 지냈어요. 형사님들이 따라다녀 주셔서, 안전하게 있
었어요.”
“괜찮겠나?”
“뭐가요?”
“이렇게 다 풀어헤쳐도, 괜찮겠냐고.”
단언컨대 백인호만 가라앉지는 않을 것이다. 부부의 연이었으니, 그녀 역
시 함께 가라앉으리라.
원했던 결혼이 아니었음이 만천하에 드러난대도ㅡ
잠깐의 동정여론이 따라다닐 뿐, 세상은 그녀를 지켜주지 못할 것이다.
남은 생, 여자로서의 삶도.
평범한 인간의 삶으로도,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웃기죠. 그런데 마음이 한결 편해요.”
희주는 말갛게 웃으며 말했다.
버릇처럼 머리를 쓸어 넘겼다.
“벗어날 방법이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돼요. 남은 건 제가 감당해야
할 몫이니까, 괜찮아요.”
“…….”
“적어도 이번엔 내가 원하고, 그래서 내가 선택한 일이니까. 후회 없어요.”
벗은 장갑만 매만지며 그녀의 이야기를 듣던 지환은 고개를 들었다.
그녀를 바라보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런 사소한 일로 잠시 고민하고 있
을 때ㅡ
“내 말을 믿어줘서 고마워요. 그걸로 됐어요.”
“…….”
“아, 맞다. 조금 전에 제가 확인한 일이 있는데.”
희주는 주머니에서 작은 USB를 꺼내 주었다.
지환은 그녀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제 일을 봐주던 매니저 오빠, 혹시 기억하세요?”
“……말해.”
그의 머릿속에 선명하게 자리 잡는 얼굴 하나.
떠올리며 살지는 않았지만,
잊지도 않았다.
“얼마 전에 자살을 했어요.”
“자살?”
“네. 그런데 어딘가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어서 그 동생분을 만나 몇 가지
물어봤는데, 오늘 연락이 왔어요.”
매니저의 동생은 전화를 걸어왔고, 격양된 목소리로 알려주었다.
형의 카드 내역을 확인했는데 죽기 며칠 전 서울엘 올라갔더라. 기차표를
끊었고, 기차역에서 택시를 탔는데ㅡ
“택시 회사에 전화를 걸어 영수증으로 주소지 추적을 해봤는데, 최종 목적
지가 이곳, 우리 집이었다고 해요.”
“……아.”
“매니저 오빠가 죽기 전에 제 남편을 만난 것 같아요.”
그와 그녀의 눈빛 사이로 같은 생각, 같은 기운이 흐른다.
희주는 그에게 건네준 USB를 바라보았다.
“집 안에 설치된 CCTV 확인해봤는데 그 날짜 기록이 전부 삭제됐더라고
요. 딱 한 대 남아 있어서, 담아놨어요.”
죽은 매니저가 집 안으로 들어서는 장면이 찍힌, 단 하나의 동영상.
“아무래도 수사가 급하게 종결된 걸 봐선 사건을 덮어준 관계자들이 많을
거예요.”
“…….”
“그리고 매니저 오빠가 유서를 남겼다는데 아무리 봐도 친필이 아니거든
요. 제가 가지고 있던 매니저 오빠 글씨가 있어요. 같이 담았으니까 확인해보세요.”
이젠 정말 끝인 것 같다.
그녀는, 그녀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다.
“그래.”
“…….”
“가서 확인할게.”
그는 그녀가 건네준 USB를 힘껏 쥐었다.
지금의 것들을 알려주기 위해 강희주, 그녀가 건너온 시간을 가늠해보며
지환은 처음으로 그녀 앞에서 표정을 풀었다.
……더는 미움도, 원망도 남아 있지 않은 마음.
디이이잉, 디이이잉, 때마침 지환의 재킷 안에서 진동이 울린다.
“잠깐 실례.”
지환은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아아, 나야.”
희주는 지환이 전화를 받자 잠시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지환을 바라보았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목소리, 다른 표정.
“지금 집이야? 뭐하고 있었어?”
입가에 슬그머니 걸리는 미소까지.
“밥은 먹었어? 별일은 없었고?”
……희주는 입을 멍하니 벌렸다.
이 집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온몸에 가시를 잔뜩 박아두었던 그가, 순식간
에 가시를 뽑아내었다.
“아, 희원아. 오빠 지금 일하는 중인데, 밖이거든.”
걸려온 아내의 전화를 받는, 그의 모습.
일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희주는 자신의 팔을 꽉 붙잡으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지환은 길게 통화할 생각은 없는지 일하는 중이라고 말했다.
언뜻언뜻, 그의 아내 목소리가 들렸다.
ㅡ아아, 일하는 중이구나. 그럼 남은 시간도 열일해요.
“그래. 저녁 먼저 먹어.”
ㅡ알았어, 내 걱정은 말고.
희주는 통화 소리를 들으며 빙그레 미소 지었다.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만 같아, 한없이 가슴이 일렁였다.
“그래요. 끝나고 다시 전화하겠습니다, 부인.”
그는 전화를 끊었다.
종료 버튼을 누르는 그 순간마저, 그는 따뜻한 시선을 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고마워요.”
그녀는 문득 이런 말을 했다.
“고마워요. 진심으로.”
고마워요. 나 없이도 잘 살아줘서.
내가 떠난 빈자리를, 잘 채우고 살아줘서.
“앞으로도 내내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서로 믿고 의지하고, 그렇게 살아
요.”
잠깐의 틈도 여유도 내게 주지 않아서,
보란 듯이 잘 살아줘서,
그래서, 헛된 욕심 같은 건 부리지 않게 만들어줘서.
“그래. 이런 말, 어떻게 들릴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이번엔 그가 말했다.
“너도 잘 지내라. 편안하게. 지금이라도 다 털고, 편안하게.”
잘 지냈으면 좋겠다.
어두웠던, 무거웠던 지난날들 같은 건 잊어버려.
그 시간 안에 내가 있다면 나 먼저 잊어버려. 처음부터 없었던 일처럼 날려
버려.
앞으로의 너는 지금의 너로 완연한 인생을 살아.
“검사님. 준비 다 됐습니다.”
“아아, 네. 철수하죠.”
수사관이 와서 귀띔하자 지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고개를 비틀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내어준 USB를 손에 쥐고, 그는 아주 희미한, 아주 흐린 미소를 지
었다.
“간다.”
그녀는 선연한 웃음으로 대꾸했다.
……망설임을 모르고 달려가게 하던, 내 어린 날의 사람이 사라진다.
“네. 안녕히 가세요.”
이제 더는 돌아보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