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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지금 사랑하면 돼 (79/98)

79. 지금 사랑하면 돼

백인호가 기자회견장으로 들어서자 카메라 셔터 세례가 쏟아진다.

자신을 향하는 수많은 눈길에 익숙한 백인호는 진중한 걸음으로 걷다가 멈

춰 섰다.

카메라에 들어온 빨간 빛이 일제히 그를 향한다.

그는 일련의 절차를 모두 생략한 채 준비한 반박문을 펼쳤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여러분의 참된 일꾼, 백인호입니다.”

백인호의 뒤로, 그를 지지하는 여러 국회의원들이 늘어섰다.

검은 정장, 타이를 하지 않고 윗 단추를 풀고 입은 셔츠. 간밤 잠을 설쳤음

을 알리는, 약간 거뭇해진 턱수염.

모든 것은 연출되었고, 그는 계산된 수순을 밟으며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정의가 살아 숨 쉬는 대한민국에서,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찰칵, 찰칵.

“대한민국 국민의 일원으로, 또한 국민의 부름을 받아 국회의원이 되어 지

금껏 국민 여러분의 손과 발을 자처한 일꾼, 저 백인호에게 검찰은 증명되

지 않은 거짓으로 저의 위신을 깎아내리고 있습니다.”

찰칵, 찰칵.

카메라 셔터음만 간간이 들린다.

“금괴 밀수 혐의로 구속된 차민규는 저의 친척이 맞습니다. 하지만 저 백인

호는 단언컨대 차민규의 혐의와 단 1%도 엮인 바가 없음을 호소하는 바입

니다.”

백인호는 반박문을 바라보던 시선을 들었다.

“국민 여러분! 제가 누구입니까! 백인호입니다! 하늘을 우러러 단 한 점의

부끄러움도 모른 채 여기까지 왔습니다. 당을 위해서! 나라를 위해서! 또한

우리 국민 여러분을 위해서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지금 이 자리에 섰습니다!”

그는 억울함을 호소하는 눈길로 기자들을 찬찬히 살폈다.

“이 추악하고 더러운 음모의 시발점을 확보했습니다! 바로 여기! 그 증거들

을 모아 여러분 앞에 백인호가 섰습니다!

백인호는 들고 있던 종이를 높게 들어 올렸다.

“중앙지검 검찰청에 소속된 검사가 개인적인 앙심을 품고 치밀하게 계산,

계획하여 저를 함정에 빠트렸습니다!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운 불미스러운

일을 들키자 권력을 남용하며 일을 벌인 것입니다!”

“자세히 말씀 주십시오!”

“그게 누구입니까!”

촤르르르르, 한 다발의 셔터음이 장내를 훑고 지나간다.

“이미 한참 전에 수사 종결 지시를 받고도 조직 내에서도 알지 못하게 비밀

스럽게 수사를 진행하며 함정을 파고, 교묘하게 저를 끼워 맞추며 백인호

의 추락을 기대한 중앙지검의 검사에게 죄를 물어야 합니다!”

“그게 누구입니까! 원한의 이유는 무엇입니까!”

“증거는 무엇입니까! 어떤 증거를 확보하셨습니까!”

백인호는 질문이 쇄도하자 팔을 내렸다.

모쪼록 질의응답이란, 쥐고 펴는 타이밍이 중요했다.

분위기가 한껏 고조되었을 때. 모두가 자신의 말을 진실이라 믿을 수 있을

만큼 분위기를 끌고 갔을 때.

한 번에 터트려야 한다.

“저는 모든 일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며 홀로 안고 가려고 했지만 그렇게 되

지 못했습니다. 심려를 끼쳐드려 국민 여러분께 대단히 송구스럽습니다.

국민 여러분께서 보내주시는 믿음에 보답하며! 저 백인호는 끝까지 부패한

검찰의 함정에서 사력을 다해 벗어날 것입니다!”

바로 지금이다.

“지금부터 저의 결백을 입증할 증거를 보여드리겠습니다!”

백인호는 돌아섰고, 설치된 화면을 응시했다.

이제 곧 동영상이 시작될 것이며 그곳엔 서지환과 강희주가 서 있을 것이다.

둘이 연인이었다는 증거는 죽은 전 매니저에게 확보했고,

강희주가 의도적으로 그의 아내 권희원에게 접근한 내역 또한 쉽게 얻을

수 있었다.

“백인호 씨.”

그때였다.

뒷문으로 들어선 몇 명의 형사들이 그를 둘러쌌다.

동영상이 시작되기만을 기다리던 백인호는 뒤를 돌아보았다.

“뭡니까.”

“XX경찰서에서 나왔습니다. 백인호 씨, 당신을 밀수가담 혐의, 불법 정치

자금 혐의 등으로 긴급체포합니다.”

“뭐야!”

백인호가 놀라 뒷걸음을 걸으며 큰소리를 치자 기자들은 자리에서 일어섰

다.

대기 중이던 백인호의 지지자들이 벌떼처럼 몰려들며 그를 에워싼다.

기자들은 미친 듯이 사진을 찍어댔고, 장내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체포해!”

형사들은 날렵하게 움직이며 백인호를 붙잡았다.

“저항하지 않으면 수갑은 채우지 않겠습니다.”

완강하게 저항하던 백인호는 차츰 순순히 멈춰 섰다.

긴급체포.

형사는 체포 전 고지를 순순히 마쳤다.

모든 상황은 생중계가 되어 전 포털 사이트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국민 여러분! 이것은 음모입니다! 속지 마십시오! 저 백인호는 국민 여러

분의 곁으로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반드시! 반드시!”

백인호는 형사들에게 좌우 팔을 포박당한 채 걸어가며 끝까지 목소리를 높

였다.

이미 꺼진 마이크를 붙잡고 소리치며, 그는 적들에게 포박되어 가는 장수

처럼 행동했다.

기자회견장에서 체포된 국회의원.

흔한 일은 아니었다.

*

긴 하루가 지나가고 어두운 그림자가 발끝에 매달릴 때ㅡ

지환은 집으로 들어섰다.

세상은 점점 시끄러워져만 가는데, 그의 마음은 점점 고요해져갔다.

집이 가까워질수록 눈빛은 옅어졌다. 걸음을 옮길수록 그림자는 가벼워졌

다.

현관 앞에 도착할 때쯤엔 지녔던 생각들이 차츰 사라지고 단 하나의 생각

만이 자리했다.

“어? 왔어요?”

……아내가 보고 싶다.

“서지환 씨 생각보다 일찍 왔네?”

나의 아내가, 보고 싶었다.

쿵, 문이 닫히고 지환은 현관 앞에 섰다.

몸을 풀던 중이었는지 거실에 요가매트를 깔아두고 있던 그녀는 현관 앞까

지 달려 나와 웃는다.

“와, 이게 얼마 만에 일찍 퇴근한 남편이야?”

“일찍 퇴근했다고 말하기엔 벌써 열 시인데. 미안한 마음이 큽니다, 부인.”

“괜찮아요. 내겐 오후 여섯 시 정도로밖에 안 느껴지니까. 나 사실 늦잠 잤

거든.”

어서 들어오라며 그녀가 서류 가방을 이끈다.

지환은 구두를 벗고 안으로 들어서며 집 안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운동하고 있었어?”

“아? 운동? 아, 응응. 몸 좀 풀고 있었지.”

요가 매트 옆에 가져다 둔 물통 하나, 블루투스 스피커 하나.

밤이 깊은 줄도 모르고 연습에 매진하는 아내가 기특하기도 하고, 한편으

로는 그런 그녀가 고대하던 공연이 취소되었다는 생각에 속이 쓰리기도 하다. 

지환은 그녀의 젖은 머리칼을 쓸어내리며 거실로 향했다.

“서지환 씨, 일은 잘했어?”

“이제 시작이야.”

“아…… 이제 시작이구나, 그 말 너무 슬프다.”

왜인지 그녀는 시종일관 웃는 얼굴을 하고 있다.

지환은 서류가방을 내리며 비스듬히 고개를 꺾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닌 척하려고 해도 은연중 말아 올라가는 입꼬리가, 그녀는 감정 같은 건

속일 줄 모르는 정직한 성격을 알려주었다.

“부인 오늘 좋은 일 있었구나?”

“어라? 어떻게 알았지?!”

그녀가 휙 돌아서며 눈을 동그랗게 뜬다.

그는 머플러를 풀며 웃었다.

“다 아는 수가 있습니다. 제가 부인에 대해서 모르는 게 어디 있겠습니까?”

“와, 검사 남편 무섭네. 무서워.”

벌써 알았단 말이죠? 희원은 소파에 앉으며 중얼거렸다.

얼굴에 ‘나 오늘 좋은 일 있었어요.’라고 큼지막하게 써놓고는 영문도 모르

는 아내라니.

지환은 소파에 따라 앉았다.

“무슨 일인데? 남편도 좀 함께 즐거워보자.”

“나, 공연 다시 하기로 했어.”

“엇, 진짜? 세계무용축제 다시 하는 거야?”

“응. 안 하려고 했는데 사무장님이 집 앞까지 찾아와 사정사정하는 바람에.

하는 수없이 대인배인 내가 넘어가 주기로 했죠.”

그것도 전원 복직. 그녀는 브이자를 그려 보이며 활짝 웃었다.

“이여어어어, 권희원. 살아 있네.”

지환이 따라 웃자 희원은 비로소 꾹꾹 참아놓았던 웃음을 터트렸다.

아, 오늘 이 말을 하고 싶어서 얼마나 남편을 기다렸는지.

“서지환 씨 기다리다가 병날 뻔했어. 얼마나 기다렸는데. 나 계약서 검토도해줘야 해요.”

“알았어. 다 해줄게. 해주는 건 그렇다 치고, 오빠라던 호칭은 내팽개치고

또 서지환 씨야? 요즘 계속 서지환 씨라고 하네?”

“아…… 그냥 서지환 씨라고 하면 안 돼? 난 이게 좋은데.”

지환이 눈썹을 추켜올리자 희원은 어깨를 으쓱 올려 보였다.

요지는 이러했다. 마트에서 식품을 고르다가 ‘오빠ㅡ’라고 불렀는데 앞에

있던 네 명의 남자가 뒤를 돌아보더라고.

정작 당신만 뒤를 돌아보지 않더라.

“난 조금 더 특별한 호칭을 원한다고요. 열 명이면 열 명이 돌아보는 호칭

말고.”

“아, 너무 거리감 있는 호칭인데.”

“사랑스럽게 부르면 되지. 서지환 씨이이이이이. 이렇게.”

희원이 눈꼬리를 둥글게 휘며 예쁘장한 목소리로 이름을 부르자 지환은 맥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오가던 웃음도 그치고, 잠시 말이 끊긴 자리.

“오늘 백인호 의원 자택에 수색 다녀왔어.”

“……아? 그래?”

“아까 당신 전화했을 때, 거기 있었거든.”

“아아, 그랬구나.”

희원은 다소 놀란 음성을 했다.

그가 백인호 의원의 자택에 다녀왔음에 놀란 것이 아니라ㅡ

처음으로 그가, 자신의 이야기를 먼저 꺼낸 사실에 놀란 것이다.

“강희주가 우리 쪽에 협조를 해줘서, 문제없이 다녀왔어.”

“아아, 그랬구나. 잘됐네요. 안 그래도 뉴스 봤어. 잡혀가던데?”

묻지 않았음에도.

“잡았지. 자택에서 밀수 금괴를 다량으로 발견했거든.”

그는 밖에서 있었던, 사실은 그녀가 몰라도 괜찮을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

원래의 그라면 말해주지 않을 이야기를.

“강희주 씨, 만났겠네?”

“응. 만났어.”

“매듭은 잘 지었어요?”

“지었지. 잘.”

지환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매듭. 아내의 입 밖으로 나온 단어가 신중했던 까닭에, 그도 신중히 답했

다.

“잘 지내라고 해서, 알겠다고 했어.”

“그분은 괜찮은 거예요?”

“뭐, 강희주도 혐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본인 스스로도 처벌을 원하니,

그건 법이 공정하게 심판해줄 거고.”

“…….”

“편안해 보이더라.”

“아…… 그래요, 그거 잘됐네.”

희원은 고개를 끄덕끄덕, 느리게 움직이며 중얼거렸다.

생각할수록 밉고, 생각할수록 괘씸했지만, 생각할수록 가엽기도 했다.

“몇 번 더 조사 차원에서 우리 쪽으로 출석해야 해. 그땐 다른 검사가 담당

이 될 거야. 어차피 내 선에서 더 할 일은 없을 것 같고.”

지환은 ‘강희주와 더는 엮일 일이 없겠다’는 것을 암시했다.

염려 말라는 것처럼,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이해해줘서 고맙다. 내가 이 말을 못 한 것 같아서.”

“잘 모르겠어. 그냥, 서지환 씨의 입장해서 생각해보니까 날 속이려던 것도

아니고, 내게 거짓말을 한 적도 없고.”

희원은 지환의 어깨에 슬며시 기댔다.

……타인의 깊은 상처를 완벽하게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

다.

가늠한다는 것 역시 오만이다.

“그냥 서지환 씨는 나의 어떤 부분을 지켜주고 싶었던 거구나. 알고 나면

고통스러울 나의 어떤 부분을 지켜주고 싶었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

그러나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

그 모든 절차를 생략할 수 있을 만큼.

“내 생각이 맞을 테고. 그치? 서지환 씨?”

희원은 그의 어깨에 기대 있다가, 스르륵 무릎을 베고 누웠다.

밤을 지새워도 끄떡없을 것 같았던 에너지는 어디로 가고ㅡ

그의 어깨에 기대어 있자니 묵직한 피곤이 내려앉았다.

“뭐야, 나 갑자기 졸려.”

“졸려? 늦잠 잤다며.”

“솔직히 요즘 계속 잠을 설쳤다고요. 곁에 누가 없어서.”

아, 졸리다. 희원은 눈을 뜨고 있기도 번거롭다는 것처럼 스르륵 눈을 감았

다.

아직 옷도 갈아입지 못한 지환은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다가 중얼거렸다.

“뭐야, 벌써 자? 진짜 자려고?”

“아 몰라. 귀찮아. 나 그냥 잘래.”

“들어가서 편하게 자. 나 아직 옷도 못 갈아입었는데.”

“그냥 이렇게 자면 안 돼? 나 지금 자세 딱 잡았는데?”

그녀는 일어날 생각이 없다는 것처럼 꼬물꼬물 거리더니 완벽하게 자리를잡았다. 

지환은 상체만 움직여 슈트 재킷을 벗고는 타이를 조금 느슨하게 풀었다. 

“그래, 그럼 자. 나 이제 안 움직일게.”

“나 이러고 자면 서지환 씨는 앉아서 자려고?”

“난 그냥 너 자는 거 보고 있을게. 푹 자, 꿈에서 야하게 놀아줘.”

피식, 그녀가 웃는다.

“아아, 야한 남편이랑 사는 거 너무 힘들다. 꿈도 마음대로 못 꾸네. 아아아

아.”

“웃기지 마. 그게 니 마음이잖아.”

“……묵비권을 행사하겠어요.”

*

새벽 두 시나 되었을까.

희원이 잠이 들고난 한참 후, 지환은 그녀를 침대에 옮겨주고는 소파에 앉

아 노트북을 들여다보았다.

몸은 집으로 돌아왔지만 끝없이 쏟아지는 일은 그를 잠들 수 없게 했다.

몇 번 침실 문을 열고 그녀가 자는 모습을 확인했는데, 정말 누가 업어 가

도 모르게 생겼다.

딸깍딸깍, 간혹 마우스를 움직이는 소리만 들려오는 거실.

난데없이 침실 문이 열린다.

지환은 고개를 들었다.

“뭐야, 왜 깼어?”

그녀가 눈을 반쯤 뜨고 좀비처럼 비틀비틀 걸어온다.

목적지를 보니 자신의 무릎 쪽이다.

“서지환 씨는 안 자?”

지환은 황급히 무릎 위에 올려두었던 노트북을 치우며 그녀를 맞이했다.

풀썩 쓰러지듯 희원이 무릎 위에 엎드린다.

“왜 안 자, 서지환 씨는 안 졸려?”

“아아, 이제 자려고 했지. 이제 자야지.”

……거짓말.

두 시간 뒤에 다시 나가려고 했으면서.

“남편 기다리다가 지쳤어어어어…… 왜 안 들어와아아아…….”

“누가 업어 가도 모르게 자던데.”

“중간중간 계속 깼다고요오오오…… 살 맞대고 자고 싶은데에에에…….”

희원은 잠꼬대를 하듯 느리게 대꾸하며 그의 무릎을 꽉 안았다.

지환은 상체를 내려 노트북 전원을 껐다.

“꿈에서 남편이랑 잘 놀았어? 놀고 깬 거야, 놀고 싶어서 깬 거야.”

“어후, 진짜 드럽게 야하다. 그런 거 말고는 나한테 할 말이 없니?”

“없지. 이 시간에, 이 상황에, 내가 권희원한테 할 말이 이런 거 말고 더 있

겠어?”

“서지환 씨, 오늘 또 새벽에 나가?”

“……아니. 오늘은 아침에. 정상적으로 출근.”

“아아, 좋다. 좋네요, 아주.”

계획이 급하게 수정된다.

지환은 새벽에 도착해 처리하려고 했던 모든 일들을 빠르게 수정했다.

자신의 무릎을 꽁꽁 싸매고 누워 있는 아내에게, 두 시간 뒤에 나가려고 했

다는 말은 차마 떨어지지 않았다.

“들어가자. 나도 좀 눕게.”

“아아…… 걸을 힘도 없어…….”

뭐해? 어서 날 안아.

희원은 그러한 뉘앙스를 풍기며 몸을 비틀었다.

안아 들어달라는 의사가 분명한 희원을 바라보다가 지환은 쌀가마니를 들

고 일어서듯 응차, 그녀를 들고 일어섰다.

추욱 그녀가 늘어진다.

“왕년에 쌀 배달 좀 해보셨나 봐요, 서지환 씨.”

“술 취한 권희원을 몇 번 집으로 배달해보기는 했지.”

“그러니까. 그게 문제야. 내가 술에 취했으면 호텔로 갈 일이지, 지 사무실

로 데려가는 꼰대가 어딨냐?”

“어? 이제 본심이야? 그때 그랬어야 했나?”

그녀는 처음 맞선을 본 날, 검찰청 사무실에서 재운 일을 여전히 못마땅해

하는 게 분명했다.

지환이 침대에 눕히자 희원은 꿍얼거리며 눈을 슬금 떴다.

“사람이 도덕책이어도 정도가 있지, 와, 눈을 떴는데 검사 사무실이야. 내

가 심정이 어땠겠어요?”

응? 응? 그것도 호텔 bar에서 마셨는데.

거기 남는 방이 몇 갠 줄 알아? 수십 개야, 수십 개.

그 방을 다 지나치고 검사실까지 가는 당신은 도덕책…….

“그때 할아버님께 전화만 안 왔어도 우리의 역사가 조금 더 빠를 수는 있었

지.”

그가 슬금슬금 그녀의 잠옷 단추를 끌러 내리며 중얼거리자 희원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 그냥 자면 안 돼? 오늘은 귀찮은데.”

“꼬셔놓고 발 빼기 있어? 괴롭히기 싫어서 거실에 유배당해 있던 나를 여

기로 끌고 온 건 당신이야.”

“아아…… 귀찮은데…….”

“팔 좀 들어봐.”

“네.”

희원은 잠옷을 빼기에 적당한 수준으로 팔을 들었다.

눈도 못 뜨고 있으면서, 말은 잘 듣는다.

……살과 살이 붙고, 엉킨다.

지환은 완벽하게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희원을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입을

맞추었다.

흔한 입맞춤이고, 익숙해 마지않는 온기지만 하루하루, 순간순간 다른 의

미가 부여되었다.

그의 입술은 입술로부터, 귓불을 지나, 쇄골을, 어깨를, 지나갔다.

어딘가는 정중했고, 어딘가는 무모했다.

서로에게 집중한 시간 동안엔 피곤도 사라졌고 잡념도 사라졌다.

그의 입술이 살갗을 간지럽힐 때마다 그녀의 입술 사이로 연약한 신음이터져 흘렀다.

굵어지는 그의 숨소리와, 불규칙한 그녀의 숨소리가 공간을 잠식했다.

“서지환 씨하고 있는 순간은 다 좋아. 그냥, 다 좋아.”

희원은 꿈을 꾸듯 중얼거렸다.

……사랑.

나를 귀찮게 하는, 나를 번거롭게 하는 모든 접촉에 편안함을 느끼는 기이

한 경험이다.

온기, 맞닿음, 그것은 보통의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짜릿하고 감동스러운 경

험이다.

“서지환 씨는 너무 귀찮은데, 그래서 너무 좋아.”

불편함의 감사함을 알게 하는 ㅡ

사랑이란 이토록 황당하고, 생각하면 할수록 논리적일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멋지고, 그래서 아찔하다.

“더 직설적이고, 더 구체적으로 말해줬으면 좋겠어.”

“아아, 더 직설적으로?”

너와 나는 빠질 수밖에 없다.

눈이 멀었으니까.

“과감하고 능숙한 서지환 씨를 완전 좋아해요.”

귀를, 닫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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