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너는 눈이 부시게
[긴급] [강희주, 백인호와의 결혼생활 폭로 '지옥이었다']
[강희주, 검찰 측 고백 '희롱, 폭행, 감금으로 이어진 ‘결혼’]
[검찰... 증거는 모두 확보... 기소·소추 확대 암시]
[백인호 불법 정치자금, 금고 밀수 등 혐의 12개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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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호의 구속영장 실질심사가 진행되는 동안, 그는 검찰청에 불구속 입건
되었다.
48시간 내에 영장이 발부되어야 그를 구속 수사할 수 있는 상황.
백인호는 끝까지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며 자신의 정치생명을 끝내려는 집
단의 ‘음모’로 방향을 틀었다.
지환이 단독으로 꾸민 보복성 수사라고 하기엔 이미 때를 놓쳤고, 멀리 와버렸다.
게다가 강희주가 터트린 사생활 폭로는 다른 모든 것을 덮을 만큼 치명적이었다.
밀수 금괴를 앞다투어 다루던 언론들도 일제히 강희주의 폭로 건으로 기사
를 바꾸었고, 국민들은 일제히 분노했다.
어지간한 일에 놀라지 않고,
어떤 상황에서도 사람 아래 머리를 숙이는 일 없던 백인호지만ㅡ
“아, 왔어?”
지금 그는 두려웠다.
작은 조사실에 초조하게 앉아 있던 백인호는 문이 열리자 안색을 바꾸며
일어섰다.
목소리는 전에 없이 다정했다.
“앉아. 앉아 앉아. 오느라 수고 많았어.”
다름 아닌 자신의 와이프, 희주의 등장이었다.
그녀는 책상 맞은편 의자에 앉았고 백인호는 그녀가 앉자 자신도 따라 앉았다.
희주는 입을 열었다.
“시간 없어요. 할 말 있으면 빨리해요.”
그녀는 모든 인터뷰, 언론의 질문을 피하지 않았다.
백인호의 아내라는 이유로 발생한 몇몇 개의 혐의 또한 순순히 인정했다.
아내의 텅 빈 음성을 듣던 백인호는 입가에 억지 미소를 달았다.
지금은 그녀를 붙잡지 않으면 달리 방도가 없었다.
하…… 백인호는 한숨을 내쉬며 미간을 문질렀다.
“당신, 왜 그랬어.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조사를 받은 거야.”
“왜 그랬냐는 질문은 너무 늦은 것 같은데요. 당신도 안전하지는 않을 거라
고 난 분명 경고했고.”
“경고……! 경……고라니. 당신이 무슨 나한테, 나한테 경고를…… 했다고
그래.”
치솟는 분노를 억지로 누르느라 백인호의 말은 현저히 느려지고, 때마다
고비를 넘겼다.
바르르 떨리는 입술만 보아도 그가 얼마나 화를 삭이고 있는지 훤히 보인다.
희주는 실소했다.
“걱정할 것 없어요. 난 단 하나의 사건도 지어내거나 부풀리지 않을 테니
까. 있었던 일들만 그대로 세상에 보여줄 테니까.”
“……희주야.”
희주야.
그 낯설고 어색한 음성 앞에 희주는 눈을 크게 떴다.
목덜미로 차가운 기운이 스쳐 지나가니 소름이 돋았다.
“희주야. 이러지 마라. 응?”
결혼 전에도, 결혼 후에도.
남편의 입을 통해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자신의 이름.
“안다. 다 안다. 하지만 지금 니가 나를 배신하면 어떻게 되겠니. 응? 이건
둘 다 죽자는 거야. 너는 살 수 있을 것 같아? 천만에. 아니거든.”
“…….”
“국민들은 이런 자극적인 기사를 원하고 영웅의 몰락을 즐겨보지만 남은
니 인생도 생각해야지. 지금은 니가 이렇게 나설 때가 아니야. 알잖아, 지금 어떤 상황인지.”
그녀는 물을 한 모금 삼켰다.
“니가 나를 괴롭히지 않아도 나 지금 충분히 괴롭다. 정신이 하나도 없다
고. 니가 보태지 않아도 내가 갈 길이 멀어. 희주야, 멈춰라.”
“멈추라고요?”
“그래. 멈춰. 이렇게 하면 안 돼. 니가 언론을 모르고 정치를 몰라서 그래.
지금은 세상이 다 너의 말을 들어주고 있는 것 같지만 이거 금방 잊혀. 그
때 가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몰라.”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모른다.
“끝까지…… 날 협박하는 거예요?”
“협박이라니. 아니다, 아니야. 그저 내가 네게 미안한 일이 많다는 걸 이제
깨달은 것뿐이야. 내가 그동안 미안했어.”
백인호는 희주의 손을 끌어다가 잡았다.
흠칫, 놀란 희주의 손이 그의 손바닥 아래에서 미세하게 떨려왔다.
그런 낌새를 느낀 백인호는 더욱 아내의 손을 힘주어 붙잡았다.
“우리 함께 헤쳐나가자. 내가 여기서 나가면 당신한테 잘할게. 평생 잘할게.”
“이미 늦었다고요.”
“아냐. 아직 방법은 있어. 검찰 쪽의 압력을 받았다고 해.”
“뭐라……고……?”
희주는 손을 빼보려고 하지만 백인호는 다른 손을 마저 포개어 그녀의 오
른손을 잡았다.
“서지환을 팔아. 그럼 모든 게 끝나. 아무렴 당신, 나하고 산 세월이 얼마인
데 아직도 그 자식 편을 들고 싶은 건 아니겠지.”
백인호는 말했다.
옛 연인이었던 검사의 회유에 못 이겨 일을 도모했다고.
남편이자 국회의원인 백인호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국민들이 이해해줄 거다. 당신의 상황, 당신의 마음을 다 이해해줄 거야.
남편이 살고 봐야지. 그렇잖아, 희주야.”
“이거 놔요.”
희주는 있는 힘껏 손을 뺐다.
그러곤 백인호를 흘겨보다가 가방을 열어 서류봉투를 꺼냈다.
그게 뭐냐는 표정을 짓고 있는 백인호의 앞으로, 서류를 밀었다.
“이혼 서류예요. 난 이미 처리했으니 가급적 빠른 시일 내에 처리해줘요.”
“야! 너……!”
호칭은 급격하게 변한다.
희주는 매서운 눈매를 했다.
“난 당신한테 이거 주러 온 거니까 헛소리 말아요. 이제 앞으로 당신 얼굴
직접 볼 일은 없을 테니까. 마지막이라는 걸 알려주려고 온 거라고.”
“야, 너. 이게 진짜. 잘 먹고 잘살게 해줬더니 나를 이딴 식으로 배신해?
야! 나 백인호야!”
“알아. 누가 모른댔어?”
“허…….”
희주는 일어섰다.
끝까지 자신밖에 모르는 백인호를 바라보다가, 그녀는 작게 혀를 찼다.
조사실에 홀로 앉아 있는 그를 대면하고 있자니ㅡ
이렇게 한심하고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사내를 나는 왜 그렇게 두려워만 했
었나, 스스로 서글퍼졌다.
“강희주, 너 내가 가만 안 둬. 알겠어? 너 이대로 가면 내가 가만히 안 둔다
고!”
그녀는 가방을 들었다.
“이혼? 이혼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내가 널 놔줄 것 같아? 내가 너 혼자 살
겠다고 도망치는걸, 내가 두고 볼 것 같아?”
“해주기 싫으면 말아. 법대로 해, 그러면.”
“이게 진짜 미쳤나. 야, 너 앉아. 앉으라고 했……!”
촤라락!
그녀는 반쯤 마시고 곁에 둔 물컵을 들어 그의 얼굴에 뿌렸다.
꿈에도 상상하지 못한 장면이 눈앞에 펼쳐지자 백인호는 혼이 빠진 얼굴을
한 채 입을 크게 벌렸다.
굵은 숨을 연거푸 내쉬더니, 그는 물이 뚝뚝 떨어지는 안경을 벗었다.
“너, 미쳤어. 너 지금 제정신 아니야.”
“아니.”
“…….”
“당신에게 물을 뿌린 걸 보니 이제야 나는 제정신인 것 같아.”
희주는 조사실을 나섰다.
으아아아악! 장렬하게 내지르는 비명이 조사실을 가득 울렸다.
*
오랜만에 연습실을 향하던 희원은 지환의 사무실 앞에 잠깐 들러 도시락을
전해주었다.
일전에 가져다준 도시락은 먹을 시간이 없어서 못 먹었다 하니, 그게 마음
에 걸려 이번엔 점심 도시락으로 가져다준 거다.
안에 계신 분들과 나눠 먹으라고, 제법 많이 쌌다.
[고맙습니다 부인. 잘 먹을게 ♡.♡]
지환에게 도착한 메시지를 확인한 희원은 웃음을 터트렸다.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부쩍 가까워져 갔다.
함께인 시간이 혼자인 시간보다 훨씬 편안했다.
말이 끊긴 시간이 어색하지 않았고, 상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고민하지 않아도 되었다.
누군가와 같은 공간을 사용한다는 것은 상상했던 것보다 이로운 일이 많았
다.
적어도 그녀와 그에게는 그러했다.
“……아.”
차로 돌아가던 희원은 걸음을 멈추며 나직한 탄식을 터트렸다.
주변을 의식한 까닭인지 스카프로 얼굴을 가리고 챙이 넓은 모자를 썼지
만, 앞에 선 여자의 깊은 눈매는 여전했다.
“강희주 씨…….”
희원이 중얼거리듯 이름을 부르자 가만히 서 있던 여자는 천천히 모자를
벗고, 입가를 가렸던 스카프를 아래로 내렸다.
그러곤 고개를 떨구며 인사했다.
두 여자는 모두 예감했다.
“안녕하세요. 권희원 씨.”
마지막 숙제를 해야 하는 시간이 돌아왔음을.
*
“잘 지내셨어요, 강희주 씨?”
강희주 씨, 우리 얘기 좀 해요.
“네. 희원 씨도 잘 지냈나요?”
그래요, 권희원 씨.
우리 이야기 나눠요.
두 여자는 검찰청 근처 카페를 찾았다.
이야기를 하자고 청한 것은 희원이 먼저였고,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끄
덕인 쪽은 희주였다.
“뉴스…… 봤어요. 요즘 힘드시겠던데.”
“아아, 괜찮아요. 어차피 한 번은 지나가야 하는 일이라서요.”
따뜻한 커피를 시켜두고 서로 마주 앉은 두 여자는, 많은 염려가 묻어 있는
인사부터 나누었다.
타인의 시선을 받아 좋을 게 없는 상황.
희주는 사람들을 등지고 앉았고, 아무도 그들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강희주 씨와 나, 원래 이렇게 만나면 안 되는 건데. 그렇죠?”
……희주는 고개를 수그렸다.
남편의 얼굴에 물을 뿌릴 때 묻어나던 온갖 것의 차가움은 어느새 날아가버리고ㅡ
“서지환 씨…… 아니, 오빠한테 전후 사정 다 들었어요. 강희주 씨가 왜 제
게 다가왔는지. 두 사람 어떤 사이였는지, 어떻게 끝났는지.”
지은 죄가 많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남아 있지 않은 여자가 되어버렸
다.
“죄송……합니다. 제가 그땐 정말 제정신이 아니어서…….”
“…….”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정말 나쁜 의도는 없었어요. 그냥 두 사람 잘 지내는
모습을…… 가까이서 보고 싶었어요.”
아니다. 이것도 아니야.
이런 말도 하면 안 되는 거야.
희주는 뱉은 말을 취소하려는 것처럼 손을 내저었다.
“그저 제 잘못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러면 안 되는 거였는데, 죄송합
니다. 잘못했습니다.”
“아뇨. 아뇨. 강희주 씨에게 그런 이야기 듣자고 말하는 건 아니에요. 그런
건 이미 내 안에서 정리가 되었으니까.”
정리가, 되었다.
희주는 의미심장한 그녀의 말에 다시금 시선을 들었다.
행여나 자신 때문에 두 사람의 관계가 틀어지거나, 어그러진 건 아닌가 심
장은 쿵, 하고 내려앉았다.
“오빠가 이미 잘 설명해줬으니 걱정 말아요. 난 내 남편 믿으니까.”
하지만 금세 괜한 기우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희원의 눈빛은 한바탕 몰아치던 폭풍우가 지나간, 쩍쩍 갈라지던 가뭄이
끝난.
남편을 신뢰하는 아내의 눈빛이란, 이런 거였나.
“그동안 힘드셨겠어요.”
그녀의 말에 희주는 마른 주먹을 쥐었다.
순식간에 역류한 뜨거움은 울대를 가득 막았다.
“같은 여자 대 여자로, 느낀 게 많아요. 강희주 씨가 그 시절에 왜 그런 선
택을 했는지에 대해서도.”
“…….”
“남편을 둘러싸고 벌어진 일이라 마음을 진정시키는 게 어려웠지만 뭐, 얻
는 게 있다면 잃는 것도 있는 법이니까.”
희원은 말했다.
많은 것들이 제자리를 찾았고,
나의 남편은 기회가 없어 털어내지 못했던 과거의 짐을 덜었다고.
“우리 부부는 이번 일로 더 돈독해졌어요.”
남편은 아내의 무한한 믿음을 보았고, 타인을 믿는 것만큼 어리석은 게 없
다고 생각했던 신념을 박살 냈다.
아내는 쉽게 동요하지 않는 법을 알았고, ‘나’만을 생각하던 시선에서 벗어
나 ‘너’를 들여다보는 방법을 배웠다.
“살며 끼워야 할 수많은 단추들을 두고, 첫 번째 단추를 끼워 맞춘 기분?
아니, 두 번째 정도의 단추를 끼워낸 기분?”
아직 무수히 많은 단추가 남았지만 슬기롭게 초반의 단추를 해결한 것 같다고.
그러니까.
그러니까, 당신.
“강희주 씨 스스로 너무 자책은 하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제가 잘 알진 못
하지만 해결해야 할 일들이 많은 것 같은데, 그중 우리 부부가 관련된 일은
없었으면 해요.”
다 비워도 괜찮다고.
……말이 끊긴 자리로 희주의 미안함이 쌓여간다.
고개를 숙인 채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희주는 만감이 교차하는 시
선을 들었다.
위기를 기회로 삼는 그녀가 너무나 어른스럽게 느껴져, 마주 앉은 희원이
무척이나 크게 느껴졌다.
당당해서 절로 빛이 나는 그 얼굴을, 자꾸만 바라보고 싶게 되었다.
“다신 볼 일 없었으면 해요. 강희주 씨가 무사히 지금의 어려움을 지나칠
수 있도록 조용히 바라고 있을게요.”
“저도…… 언젠가는 희원 씨처럼 살 수 있을까요?”
“……네?”
희원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제야 자신을 바로 보는 강희주의 시선에서 공허함이 느껴졌다.
“저도 살다 보면…… 언젠간 희원 씨처럼 살 수 있을까 해서요. 당당하게.
빛이 나게.”
“아…….”
“저는 쓸모없는 인간이 되어버리고 말았어요. 그런 소리를 너무 많이 듣고
살았거든요.”
희주는 머리를 쓸어 넘기며 중얼거렸다.
마음은 고장이 나는 줄도 모르는 사이 망가져버렸다.
자존감은 바닥으로 떨어지고 만 것이다.
“강희주 씨.”
“……네.”
“당신은 당신을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고 태어난 게 아녜
요. 누군가에게 쓸모 있자고 태어난 것도 아니고.”
“…….”
“당신은 조금 더 당신다울 필요가 있어요. 귀 닫고 당신한테 집중해요. 어
차피 인생은 마이웨이니까.”
나에게, 집중해라.
나의 삶에. 오늘보다 더 나을 내일의 행복 앞에.
……나에게 집중해본 적이 언제였던가.
언제나 쫓기듯 살고 타인의 시선을 두려워하며 살았던 내가, 나를 위한 시
간을 보내본 적이 있기나 했었나.
희주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진심으로 그녀 말에 동의했다.
“그리고 이건 여담인데, 정말 내 입으로 하고 싶지 않은 말이긴 한데 강희
주 씨, 당신 예뻐. 매력적이고.”
당신, 예쁘다.
희원은 그런 말을 했다.
강희주, 당신은 예쁜 여자라고.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얼굴뿐만이 아니라 모든 것을 자신의 탓으로만 돌리며 살아온 그, 어리석은 마음까지.
“그러니까 남들이 뭐라 하건 말건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아요. 세상에
내가 보내는 하루보다 더 값진 것은 없으니까.”
희원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함께 들어왔지만, 함께 나갈 자신은 없었다.
불확실한 인생을 사는 것이 느껴지는 강희주의 얼굴을 한참이나 바라보다
가, 희원은 웃었다.
“그럼 먼저 갈게요.”
“저, 희원 씨.”
“네.”
희원이 코트를 여미며 대답하자, 그녀가 처음으로 웃는다.
눈꼬리를 둥글게 휘며 환히 웃으니 당신 참 순수하게 웃는구나, 희원은 그
런 생각이 들었다.
“단어가 빈약하긴 한데, 고마워요.”
“그런 마음도 지워요. 싹 다. 전부. 날 잊어요, 레드 썬!”
희원이 손가락을 부딪치며 대꾸하자 그녀는 더욱 밝게 웃었다.
나로 살아가는 법을 희원에게 배운 것만 같아, 어쩐지 용기가 나는 하루였
다.
“잘 가요. 희원 씨.”
*
“야야, 지금 같은 환란의 시대에 이 무슨 선비 같은 문화생활이란 말이냐?
나 지금 내가 좀 어색하다.”
“내 말이. 범죄 영상만 들여다보다가 이런 고퀄리티 무대를 라이브로 보려
니 되게 설레고, 좀 그렇다?”
바야흐로 오늘은 희원의 공연이 있는 날.
정치면이 어떻건 말건 세계 무용 축제는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고, 그중
가장 하이라이트 날짜, 시간대에 희원의 무대가 배정되었다.
다행히 늦은 시간에 무대가 시작되어 지환의 검사 동료들은 일전의 바람대
로 그녀의 무대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이런 문화공연 관람이 어색하다며, 동료들은 주변을 자꾸만 기웃거렸다.
여길 보아도 저길 보아도 넥타이 부대는 자신들뿐이다.
“서검, 우리 넥타이 좀 뺄까? 우리 주변으로만 검은 기운이 솟는 것 같지
않냐?”
누구랄 것 없이 검은 슈트, 검은 코드, 검은 가죽 장갑에 검은 서류 가방.
본인들이 본인들을 보아도 저승사자들이 모여 있는 것처럼 우중충하다.
“우리 주변에 사람이 없다. 여기랑 너무 못 어울리는 것 같은데? 지금 어떤
느낌이냐면 약간 꼰대 집단 같은…….”
도둑이 제 발 저리는 거지.
다들 가족 단위로, 혹은 친구들끼리, 혹은 커플이 나란히 붙어 즐거운 표정
으로 공연을 즐기고 있는 것과는 달리 검사 동료들은 도저히 순간을 즐기지 못했다.
지환은 피식 웃었다.
“야야, 다 내가 겪은 거야. 괜찮아. 처음엔 나도 좀 민망했는데 아무도 우리
신경 안 써.”
“아무도 우리 신경 안 쓰는 거 아는데, 내가 신경이 쓰여…….”
“제수씨 공연은 언제 해? 아, 빨리 보고 싶은데. 제수씨 부분만 동영상 녹
화해도 되지?”
“야, 함부로 촬영하고 함부로 배포하지 마. 전속사 퍼블리시티권 있다. 우
리 제수씨는 민법의 보호를 받는 사람이야. 재산권적 측면을 지켜줘야지.”
“뭐라는 거야. 그러는 윤검, 너는 왜 동영상 준비하고 있는 건데?”
“난 우리 제수씨의 홍보를 위하여 사용할 절대적, 깨끗한 목적을 지니고 있
지.”
“이 자식이 진짜…… 나, 나는 뭐 더러운 곳에 쓰냐?!”
“야야, 됐고, 여기까지 와서 싸워 너네는. 시끄럽게 굴지 말고 조용히 기다
려. 조금 있으면 우리 와이프 나와.”
지환은 동료들의 으르렁거림을 잠재우며 무대에 시선을 주었다.
이 얼마나 학수고대해온 시간인가.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축제의 현장.
지환은 여전히 투닥거리는 동료들을 찢어놓다가 무대를 가리켰다.
“어, 나온다.”
“어디, 어디.”
“오오오…….”
싸우던 것도 잊고 금세 목을 길게 빼고 앞을 바라본다.
동료들이 기린처럼 목을 쭉 빼며 앞을 바라보고 있는 사이, 커피를 사 오겠
다고 자리를 떠났던 정윤이 다가왔다.
“뭐야? 시작해?”
“빨리 와. 저기 지금 제수씨 나왔어.”
후룩. 커피를 삼키며 정윤은 동료들의 손끝을 따라 앞을 바라보았다.
뜨겁고 고소한 커피 냄새가 풍긴다.
카페인의 유혹이 아찔한 동료 한 명이 정윤을 바라보았다.
“차검, 내 커피는?”
“꿈에서 마셔. 발품 안 판 자들은 이 순간을 즐길 권한이 없어.”
후룩. 정윤은 커피를 삼키며 미소 지었다.
“역시, 추운 날 공연은 뜨거운 커피와 함께. 그리고 작은 쿠키 하나. 이것이
참된 즐거움이지.”
“차검, 넌 먹으러 왔냐…….”
“시끄러워. 나만의 방식이야.”
동료들이 서로 으르렁거리건 말건 지환의 눈은 이미 먼발치 희원에게 고정
되어 있고, 하트가 남발한다.
여전히 춥고 쌀쌀한 날씨, 그녀는 눈이 부시도록 희고 반짝이는 한복을 입
고 무대에 섰다.
희원의 동영상이 화제였던 까닭인지 평소보다 많은 사람들이 북적였고, 취
재 열기 또한 뜨거웠다.
“……꼈다.”
지환은 무대 옆으로 설치된 전광판에 그녀가 끼고 있는 반지가 잡히자 조
용히 중얼거렸다.
그러자 용케 그 소리를 알아들은 동료들은 슬금슬금 그에게서 멀어졌다.
“드러워서 서검 옆에 못 서 있겠네. 양심 고백이냐?”
“제수씨 공연 시작하는데 방귀가 웬 말이야. 속 안 좋아? 긴장했어?”
남들이 뭐라 하건 말건. 억울한 누명을 쓰건 말건.
지환은 희원의 손가락에 자리한 가락지를 바라보며 내내 미소만 지었다.
눈처럼 새하얗고 눈부신 그녀가 무대 중앙에 섰다.
와아아아아아ㅡ
오매불망 그녀를 기다려온 대중들의 큰 함성이 그녀를 맞이했다.
오늘의 그녀는, 어쩐지 추워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