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사는 건 다 처음이야
“하리 잘 잤어? 굿모닝.”
지환은 눈을 비비며 방에서 나오는 하리에게 아침 인사를 건넸다.
헤헤. 삼촌의 인사를 웃음으로 받아낸 하리가 꼬물꼬물 다가와 발돋움을하며 말을 한다.
“삼촌 뽀뽀.”
하리가 뽀뽀, 하며 입술을 오므리자 지환은 황급히 허리를 수그리며 아이에게 볼을 가져다 댔다.
아아, 맞다. 그렇지.
하리는 눈을 뜨면 아침 인사로 뽀뽀를 건넸으니까.
“그럼 삼촌도 하리한테 인사해야지.”
조카님의 황송한 아침 인사에 지환도 볼 뽀뽀를 건넸다.
아주 소소한 아침의 풍경이지만 이 작은 행동 하나가, 하루를 싱그럽게 시
작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곤 했다.
가족의 유대감을 높여주는 무척 좋은 습관이라고. 지환은 생각했다.
“아아? 하리 일어났어요?”
거실에 있던 희원이 부산한 소리를 듣고 달려온다.
헤헤. 하리는 여지없이 희원을 향해 발돋움을 했고, 희원 역시 자연스럽게
아이와 아침 인사를 나누었다.
“우리 하리 잘 잤어요?”
“네에, 숭모. 하늘이도 잘 잤어여.”
“아아. 그래에? 다행이다.”
세계무용축제가 성공리에 끝나고 시간적 여유가 생긴 희원은 하루만 하리를 재워도 되겠냐고 물었다.
지환의 형과 형수는 쾌히 허락했고, 하리는 지금 두 사람의 집에서 눈을 떴다.
화장실을 가겠다며 하리가 걸음을 옮기자 희원은 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하리 방을 그대로 두길 잘한 것 같아요. 치우자니 좀 허전할 것 같아서 그
대로 뒀는데.”
“그러게. 요긴하게 쓰이네.”
“그건 그렇고, 서지환 씨 출근 안 해?”
“아아. 해야지. 그런데 오늘따라 출근 되게 하기 싫다.”
“언제는 좋아서 출근한 것처럼. 갚을 빚을 좀 생각하시죠?”
“아…… 서둘러 출근해야겠다…….”
지환은 아내의 말에 바로 수긍하며 출근을 서둘렀다.
제길, 먹다가 생긴 빚은 갚을 만하면 새롭게 탄생하고 갚을 만하면 새롭게 탄생했다.
허리가 휜다.
“그럼 당신, 오늘은 집에 있을 거야?”
“응. 하리하고 하루 종일 놀 거야. 생각만 해도 너무 좋네요.”
희원이 방금 갈아 만든 녹즙을 건네며 웃자 지환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아이를 예뻐하는 것과 함께 있어준다는 것이 전혀 다른 의미라는걸 지환은
잘 알고 있었다.
어찌 보면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자신의 조카를 진심으로 아껴주는 아내란, 여러모로 고마운 일이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부인.”
“네네. 오늘 하루도 힘내세요, 서방님.”
지환이 출근을 하겠다며 현관 앞으로 걸어가자 하리가 종종종 걸어 나온다.
과장된 몸짓을 하며 하리에게 출근 보고를 하던 지환은 상체를 일으키더니
희원의 허리를 감았다.
“아아, 부인. 출근인사 합시다.”
……네? 뭔 인사?
남편의 낯선 행동, 낯선 말 앞에 희원은 눈을 동그랗게 뜨다가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아아. 하리가 뒤에 있으니 뽀뽀를 해야 한다는 말인 것이다.
“그렇죠. 출근인사 해야죠.”
힐끔 돌아보니 하리가 기대에 찬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다.
지환은 희원의 허리를 가볍게 감고 끌었다.
망설이는 일 없이 두 사람의 입술은 맞닿았다.
……맞아. 그랬지.
집도 사람도 낯설던 결혼의 시작 어느 즈음에, 하리를 만나 기습적으로 입을 맞추게 되었지.
마음도 의지도 없이 마네킹에 입을 맞추듯.
그 어떤 경건한 의식을 치르듯 매일 아침, 매일 밤, 입을 맞추었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그때도 지금도 같은 입술, 같은 온기인데, 이렇게 다를 수가 있을까.
내 안의 피가 달구어지고 뜨겁게 흐르는 것이 느껴진다.
맞닿은 입술을 떼고 싶지 않을 정도로.
온종일 당신과 입을 맞추고 싶을 정도로.
“이제 그마안. 이제 그마아아안.”
쪽, 하고 끝나야 하는 출근 인사가 끝나지 않자 기다리던 하리가 그만하란다.
“그마아아안. 그마아아아아안.”
적당히 하란다.
“그케 오래 하면 안 대여어어. 그마아아안.”
지환과 희원은 아쉽게 떨어졌다. 하리가 다가와 희원의 치맛자락을 흔들며
그만하라고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만할까? 하리야, 삼촌 이제 숙모랑 뽀뽀 그만해?”
“오늘은 그마아아안. 아까도 많이 했자나여어어.”
지겨워 지겨워. 그마아아안.
사랑 전도사 하리가 그만하라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지환과 희원은 서로
민망하게 바라보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집이 떠내려갈 듯한 웃음소리였다.
“하리야, 삼촌 좀 아쉬운데 숙모랑 인사 조금만 더 하면 안 될까?”
“안 돼애에에에에! 그마아아아아아안!”
놀라운 변화, 놀라운 사랑이었다.
*
“그나저나 이번 명절에 다들 뭐 하십니까?”
지환의 사무실.
떡을 조금 가져왔다는 정윤이 도착하자 최금호 계장과 지환은 커피를 뽑아왔다.
최 계장의 입에서 ‘명절’ 이야기가 나오자 정윤은 대번 미간을 일그러트렸다.
“대체 그따위 날은 누가 만든 거예요. 없어져야 해, 명절 같은 거.”
“동의.”
지환이 동의한다고 말하자 최 계장은 웃었다.
“하긴 그래요. 돈은 돈대로 억수로 들고 명절 끝나면 며칠씩 야근하는 날보다 더 피곤합니다.”
돌아온 싱글의 정윤이나, 종가의 지환이나, 명절이 고달프긴 매한가지인듯했다.
“저는 뭐, 그냥 집에서 혼자 쉬려고요. 여행도 알아봤는데 어후, 남은 비행기 티켓이 없어.”
“좋겠다…….”
좋겠다…… 지환의 입술 사이로 진심이 터져 나온다.
최 계장은 말랑말랑한 떡을 집어 들며 지환을 바라보았다.
“검사님 댁은 명절에 친인척분들 많이 모이시죠?”
“말도 마세요. 지금은 좀 나아졌지, 저 어릴 땐 진짜 심각할 정도로 많이 오셨다가 가시곤 했습니다.”
“세뱃돈 두둑하게 준비하셔야겠습니다?”
“……누굴 위한 명절인지 정말 모르겠네요.”
에효. 지환이 한숨을 쉬자 정윤은 입술을 삐죽거렸다.
“야, 서검. 말은 똑바로 해야지. 명절에 고달픈 건 네가 아니라 희원이 아니야?”
“그러니까. 제사나 이런 건 참여 안 하는데 명절은 피할 수가 없다 보니.”
“일반 가정집도 힘든데 종가의 명절이라니. 나 같으면 너랑 절대 결혼 안했어.”
“그런 걱정은 마라, 차검.”
“…….”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너랑 안 해…….”
“야! 죽을래?!”
허, 정윤이 기분 나쁘다는 듯 떡을 우걱우걱 먹는다. 그 모습에 오만 정이
떨어진다는 듯 지환이 혀를 끌끌 찼다.
“서 검사님, 이번 명절에 가시면 2세 계획은 없느냐, 언제 애를 낳을 것이냐, 질문이 쇄도할 겁니다.”
“와…… 소름 돋았어요, 최 계장님. 나에게 벌어질 일은 아니지만 듣는 것만으로도 정말 끔찍해.”
정윤이 학을 뗀다.
흠, 지환은 낮게 한숨을 쉬었다.
“손이 귀한 집안이니 또 오죽하겠습니까? 각오 단단히 하고 가셔야겠는데요.”
“뭐…… 형이라도 아들을 낳았으면 좀 덜할 텐데, 아무래도 가면 그런 이야기, 꼭 듣겠죠?”
“그런데 검사님, 정말 아이 생각은 없으십니까?”
“네, 계장님. 저희는 둘 다 생각이 없는 쪽이라.”
지환은 망설임 없이 답했다.
아이 생각이 없는 건 희원도 마찬가지였고, 그 이야기는 결혼하기 전 깨끗
하게 마무리를 지은 뒤 단 한 번도 서로 대화해본 적 없는 부분이었다.
“아아. 그렇습니까 검사님? 하긴 요즘은 아이 없는 부부도 많더라고요.”
“맞아요, 계장님. 아이 문제야말로 타인이 참견할 수 없는 일이죠. 부부가
알아서 해야 하는 거고요.”
정윤이 열정적으로 거들며 지환의 뜻을 지지한다.
“그래, 서검. 둘이 행복하게 살아. 그렇게 살면 안 될 건 없잖아? 난 이 부부 의견에 적극 찬성.”
“찬성도 좋고 뭐도 좋은데, 떡 좀 다 먹고 말해. 입에서 콩가루 튀잖아, 제발 좀.”
지환은 어깨에 묻은 콩가루를 털어내는 시늉을 했다.
물론 묻지는 않았다.
“이게 진짜! 지 편 들어줘도 난리야! 콩가루 좀 튀면 어때서! 아오 씨!”
퉤퉤퉤! 나 갈 거야!
정윤은 성질난다며 휙 뒤돌더니 사무실을 나가 버렸다.
쿵. 문을 닫고 나가자 최 계장은 닫힌 문을 바라보다가 중얼거렸다.
“아아, 차 검사님 또 화나셨네요.”
“그게 아니라 떡을 다 먹어서 간 겁니다.”
“아…… 그렇군요.”
최 계장은 텅 빈 떡 상자를 바라보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분위기를 환기하려는 듯 손뼉을 치며 지환은 힘 있게 말했다.
“자, 떡도 먹었겠다, 오늘도 찰떡 호흡을 자랑해봅시다, 계장님.”
“예. 검사님.”
환상적인 콤비의 하루가 시작되었다.
*
“지난번 검사 때보다 혈압이 더 높습니다. 검사를 받아보시죠.”
“혈압이 높다고?”
“예, 어르신. 심지어 맥압 차가 점점 커져요. 자세한 진단은 검사 후에 가능하겠습니다.”
병원을 찾은 희원의 할아버지 ㅡ 권난섭 선생은 주치의의 소견에 흠, 하고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주치의는 권 선생의 차트를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오신 김에 검사받으세요.”
“오늘은 그냥 가고, 나중에 다시 오지요.”
권 선생의 대꾸에 주치의는 눈에 힘을 주었다.
“일전에도 그냥 가시지 않으셨습니까? 혈압이 높다고 당장 크게 문제가 있
는 건 아니겠지만 주의하셔야 합니다, 어르신.”
검사를 받아보라는, 벌써 몇 번째 권고인지 모르겠다.
“이대로 방치하다가 중대 질병이 따를 수도 있어요, 어르신.”
“젊은 사람이 노인네 데려다가 겁주긴. 이보오, 내가 의사 양반한테 그 말을 몇 년째 듣고 있어.”
“대체 왜 검사를 안 받으시려는 겁니까? 그리 어려운 검사도 아닙니다.”
“검사는 간단하겠지. 검사 도중 문제가 발견되면 치료가 복잡한 것 아니겠소?”
“치료가 필요하다면 당연히 치료받으셔야죠. 수술이 필요하면 수술도 받으시고.”
“수술 싫어.”
“수술이 왜 싫으십니까? 가만히 누워만 계시면 되는데요?”
“그 가만히 누워 있는 게 싫다고, 이 사람아.”
주치의의 잔소리가 익숙하다는 듯 권 선생은 자리에서 일어나 외투를 입었다.
“내 나이가 몇인데. 살 만치 살았으면 됐지, 뭐 얼마나 더 살아보겠다고 아등바등하겠는가?”
“…….”
“병원 검사라는 게, 하다 보면 몰라도 되는 병까지 튀어나와 입원이니 수술이니, 싫소.”
“별다른 이상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어르신.”
“내 몸이야 내가 잘 알지.”
권 선생은 웃었다.
검은 두루마기 위로 흰 목도리를 칭칭 감으며, 권 선생은 주치의를 바라보았다.
주치의는 두통이 온다는 것처럼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르다가 눈을 떴다.
의사의 입장에서 권 선생과 같은 환자는 언제나 근심의 대상이었다.
“어르신. 이렇게 그냥 가실 거면 대체 병원은 왜 매번 오시는 겁니까?”
“내가 달리 병원을 찾는 게 아니고, 선생님께 정이 붙어 얼굴이나 보려고
드나드는 거요. 자식들이 성화니 일부러 다니기도 하고.”
휴, 주치의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원하는 분들 중 연로하신 분들께선, 지금의 권 선생처럼 검사를 꺼려하는 분들이 많았다.
단순히 ‘검사’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검사로 발견될 질병의 ‘치료’를 거부하셨다.
“다음엔 자녀분들하고 함께 오십시오.”
“허어. 자식들한테 무슨 고자질을 하려고 데려오라 협박을 해?”
“어르신께서 말을 안 들으시니 자녀분들의 힘이라도 빌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젊은 의사 선생님이 고약하구만.”
“일단 약 처방해드릴 테니 약은 잘 드셔야 합니다.”
“알겠소이다. 의사 양반 다음에 또 보려면 주는 약은 먹어야지.”
콜록. 권 선생은 가보겠다는 인사와 함께 작은 오렌지 주스 병을 주머니에
서 꺼내 주치의의 책상에 내렸다.
항상 올 때마다 작은 주스 한 명씩, 주머니에 넣어 오시곤 했다.
“우리 며느리가 손수 내린 주스요. 시중에서 파는 거랑 달라. 설탕 한 알도
안 들어갔으니 잡숫고 환자들 잘 보시오.”
“어르신, 약주 끊으시고 싱겁게 드시고요. 좀 걸으세요, 복부 비만 줄이셔야 합니다.”
“이 양반이 끝까지 잔소리네.”
“조금이라도 몸이 이상 징후가 있으면 응급실이라도 반드시 내원하셔야 합니다. 아셨어요?”
“아, 음료수나 마시라니까 잔소리는! 알았어!”
주치의는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는 것처럼 바라보다가 주스 병을 들었다.
꼭 마실 때까지 쳐다보고 계시니, 병을 따서 단숨에 들이켰다.
그제야 웃으신다.
“다음에 또 주세요. 이거 은근 중독성 있어요.”
입가를 닦으며 주치의가 말하자 권 선생은 껄껄 웃었다.
“알았어. 다음에 봅시다.”
……다음에.
주치의와 환자는 항상 마지막 인사에 여운을 두었다.
다음에 또 봅시다.
권 선생에게는 함부로 기약할 수 없는, 누구에게나 쉽게 건네지 않는,
이를테면 숙제 같은 인사였다.
*
바야흐로 한국의 최대 명절, 설이 다가왔다.
희원은 지환과 함께 서씨 가문의 집성촌에 도착했다.
“휴, 되게 떨리네요.”
결혼 후 첫 명절이나 다름없다. 서씨 가문의 법도에 따라 희원은 첫 명절이
었던 추석을 친정에서 보냈으니까.
지환의 집안은 예로부터 첫 명절은 친정에서 지내도록 했다.
종가가 한참이나 낯설 며느리에 대한, 그리고 딸의 부재로 헛헛할 친정 부모님을 위한 배려였다.
“별거 없어. 긴장하지 않아도 돼.”
“왜 긴장이 안 돼…… 나 실수할까 봐 엄청 떨리는데.”
휘유. 희원은 눈썹을 추켜올리며 긴 한숨을 쉬었다.
지환이 괜찮다고 다독여보아도 소용없다.
말로만 듣고 TV에서나 보던 ‘시월드’에 대한 형체 없는 불안함이 엄습한 것이다.
“너무 잘하려고 애쓰지 마. 원래 하던 대로만 해.”
“으으으…… 그래도 떨린다아아…….”
아무리 똑똑한 사람이라고 해도, 첫 명절을 지내는 며느리들은 혼이 쏙 빠지곤 했다.
낯선 사람들, 낯선 환경,
쉬어도 불편, 일해도 불편,
아무것도 알아서 할 수 없는, 바보가 되는 기분이 들었으니까.
“괜찮아? 들어갈 수 있겠어? 조금 더 있을까?”
……차 안.
문 앞에서 한참이나 숨쉬기만 반복하던 희원은 지환의 질문에 그를 바라보았다.
한없이 자상한 표정을 짓고 자신의 손을 잡아주는 그를 보고 있자니, 없던
용기가 샘솟아 오른다.
“나, 잘한다는 말은 못 하겠지만 진짜 최선 다하고 올게.”
“그냥 하던 대로 하라니까.”
“아냐, 서지환 씨도 우리 부모님께 너무너무 잘하니까, 나도 잘하고 싶어.”
……부부의 생활이란, 일방적일 수 없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다. 서로가 잘하면 잘할수록, 주변도 따라 돌아보게 되었으니까.
“갑시다. 나 준비 완료!”
희원은 씽긋 웃고는 차에서 내렸다. 가득 챙겨온 명절 선물을 내리며, 희원
은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으으으, 떨린다.
으으으으으! 떨린다!
*
“새아가 어서 와. 먼 길 오느라 수고했어.”
예상대로 많은 분들이 계시다.
“안녕하세요.”
희원은 전투력 0%의 자세로 좁은 보폭의 걸음을 옮기며 연신 허리를 구부렸다.
“누구인가?”
“누구긴, 지환이 처잖아. 결혼식 때 안 봤어?”
“아아. 지환이 처. 그래, 지환이가 결혼을 했지. 잘 왔다, 어서 와라.”
흐어어…….
종가댁의 어마어마한 규모에 희원은 작게 입술을 벌렸다.
맞다. 결혼식 때 대형 관광버스를 두 대나 대절했었지.
식구가 많아 가족사진도 두 번에 나눠 찍었던 기억이 난다.
집에 돌아가기 전에 촌수나 다 외울 수 있을까 싶은 인원이 일제히 그녀를 바라본다.
희원은 얼빠진 얼굴을 했다.
“지환아, 밥은 먹었고?”
“네. 오는 길에 휴게소에 들러 간단하게 먹었습니다.”
“그런 걸로 요기가 되나? 기다려라, 한 상 차려줄 테니 밥 먼저 먹자.”
“인사 먼저 드릴게요. 안 사람한테 소개해드려야 할 분들도 많고 하니.”
지환은 희원의 손을 가볍게 잡고 두루두루 돌아다니며 인사를 했다.
“아아, 반갑소. 나는 그, 저, 그러니까, 지환이 할아버지의 동생이 우리 아
버지요. 나는 차남이고, 이쪽은 내 아들.”
“아…… 안녕하세요.”
촌수란 본인들도 세기 어렵고, 듣는 희원도 어렵고, 이곳은 신세계다.
왜 지환이 할아버지를 처음 만났을 때 ‘어르신’이라고 불렀는지 알겠다.
한참을 돌아다니며 인사를 하던 희원은 지환이 멈춰 서자 우뚝 멈춰 섰다.
지환도 어려운지 머뭇거리다가 희원을 힐끔 보고는 눈을 한번 질끈 감았다가 떴다.
그 순간, 희원은 많은 말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대고모, 저희 왔습니다.”
“그래. 왔냐?”
……대고모.
호칭부터 살벌한 기운이 흘러넘치는 백발의 할머니께서 힐끔, 시선을 주신다.
지환은 그녀를 대고모께 소개했다.
“대고모, 이쪽은 제 안 사람입니다.”
“그래. 네 결혼식 때 내가 가질 못해서 처음 보는구나.”
희원은 저도 모르게 두 손을 공손히 모았다.
딱히 별말씀을 하지 않으시는데 주시는 눈길만으로 발끝이 저릿저릿하다.
작은 안경 너머 매서운 대고모의 눈빛이 얼굴을 뚫고 지나가는 것만 같다.
“잘 왔다.”
“아, 네. 대고모님. 처, 처음 뵙겠습니다.”
크고 작은 대소사를 관리하시는,
집안의 명절 문화를 만들어 가시는.
지환의 할아버지의 누이. 서씨 집안의 왕 어르신이었다.
한마디로, 끝판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