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쉽고도 어려운 길
“희원아, 진짜 나 없이 괜찮겠어?”
……그녀는 혼이 나갔다.
친척들과 간신히 인사를 마친 희원은 풀린 동공을 하고는 간신히 서 있었다.
지환이 그녀의 어깨를 흔들흔들하며 이리저리 살펴보지만,
“부인, 괜찮습니까?”
“여기는…… 어디……?”
역시나 그녀는 인사만으로도 진이 빠진 게 분명했다.
한참이나 흔들어도 넋이 나가있던 희원의 눈에 번쩍하고 불이 인다.
이제야 현실로 돌아왔는지, 희원은 눈을 크게 떴다.
“아…… 서지환 씨, 이제 가야 하지?”
“어. 이제 가야해. 해가 일찍 떨어지니까 이제 빨리 가야지.”
지환은 집 안 어르신들을 따라 선산에 떼를 입히러 출발한다고 했다.
남자들은 명절이면 으레 선산을 돌보았고, 그 시간 동안 여자들은 음식을 마련했다.
봉분이 한두 개가 아니니 빨리 돌아오지는 못할 거라고 했다.
미치겠다. 이 낯선 곳에 혼자.
“나…… 살아남을 수 있는 거지? 그렇다고 말해줘. 어서.”
희원이 연신 불안해하며 옷자락을 잡고 늘어지자 지환은 가만히 바라보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또 이렇게 긴장한 모습은 처음이다.
“수만 명 앞에서 공연도 하면서 왜 이렇게 떨어. 괜찮아.”
“대고모님이 너무 무서워…….”
“말투만 무서우시지 아니야. 형수님도 처음엔 그러셨어.”
희원은 지환의 옷자락만 잡고 늘어지다가 어쩔 수 없음을 깨닫고는 놓았다.
지환이 늦으면 늦을수록 욕먹는 건 자신일 게 뻔하다.
“친척분들 기다리시겠다, 어서 가 봐요. 내 걱정은 나만 할게.”
“영 발길이 안 떨어지네. 최대한 빨리 끝내고 올게.”
지환은 이리저리 바라보다가 희원의 손등에 입을 맞추고는 사라졌다.
후…… 긴 숨을 불어 내쉰 희원은 일단 마당으로 걸어갔다.
이미 음식을 준비하는 손길들이 분주하다.
“저…… 저는 뭐부터 할까요?”
“응? 글쎄. 잠깐만요.”
지내오던 명절과는 전혀 다른 풍경.
희원이 멍청하게 서서 주위만 두리번거리고 있자, 대고모님의 레이더에 딱 걸리고 만다.
“새 아가, 이리 와라.”
헐…… 지저스…….
대고모님의 묵직한 부름에 희원은 삐거덕거리는 발걸음을 옮겼다.
어후, 은색처럼 보이는 백발의 대고모님께선 소매를 걷어 올리신 채 마당
중심에 계셨다.
“전 부쳐본 적은 있고?”
“어…… 이렇게 많은 양은 사실…….”
“다 그렇지. 여기 앉아 봐라.”
“네. 대고모님.”
쫄따구는 말없이 대고모님 옆에 앉았다. 저절로 다소곳해진다.
이걸 다 누가 먹나 싶을 정도로, 재료는 엄청나게 쌓여 있었다.
“우리는 차례 때 음식 안 올린다. 이건 차례 지낼 음식이 아니고, 혼자 사시
는 주변 불우 이웃들과 나누어 먹을 음식을 하는 거다.”
“……네?”
희원이 반문하자 옆에 계시던 다른 분께서 설명을 해주신다.
뜻은 이러했다.
“우리 서씨 가문은 차례 때 아주 간단하게 떡국만 올리는 정도고, 지금 하
는 음식들은 양껏 해서 주변 독거노인분들하고 어려운 이웃들에게 나눠주
는 거예요.”
“아…… 그렇군요…….”
“응. 우리가 음식 해두면 이따가 관공서에서 사람들이 나올 거야. 많이 해
놔야 많이 나눠드릴 수 있으니까 열심히 도와요.”
와…… 희원은 뭐에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서씨 가문은 예로부터 제사나 차례를 간소화했다. 상다리 휘어지는 차례상은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푸짐하게 음식을 만들어 어려운 이웃과 나누는, 무척이나 오랜 전통이라고 했다.
“제가 솜씨는 없지만 열심히 돕겠습니다. 좋은 일이네요.”
“명절에 굶주린 이웃이 있으면 되겠나? 느린 손이라도 하나 보태면 더 많이 나눌 수 있겠지. 여기 앉아서 해 봐라.”
“네, 대고모님.”
음식을 해야 하는 명확한 취지를 알고 나니 그녀의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희원이 눈치껏 비닐장갑을 끼자 대고모님께서 다시 힐끔, 시선을 주신다.
어흐, 바라보실 때마다 몸이 저릿저릿한 기분이다.
“옷, 안 불편하겠냐?”
“아…… 저요? 그래도 첫 명절이고 해서 입어봤는데…….”
그녀는 한복을 입고 있었다.
대고모님은 턱 끝으로 주변을 가리켰다.
“봐라, 너 말고 누가 한복 입었나. 뭐 이렇게 거추장스러운 걸 입었어.”
대고모님도 한복 입고 계시잖아요…….
“저는 편해요. 괜찮습니다.”
희원이 생글생글 웃자 대고모님은 그럴 리가 있겠느냐는 표정을 지으셨다.
“요즘 사람들 중에 한복 편하다는 사람 또 처음 보네. 눈치 보지 말고 가서
갈아입어. 쫄쫄이 바지 같은 거라도 입으면 덜 불편하겠지.”
“정말 괜찮습니다. 불편하면 갈아입을게요.”
쫄쫄이 바지보단…… 이게 편할 것 같아요…… 대고모님……
“그럼 그러든지. 마음대로 하려무나.”
잘 모르시겠지만…… 저……
이거 입고 춤도 춰요…….
“한복이 원래 제 작업복이에요. 한복 입으면 어쩐지 자신감도 좀 올라가는
기분이고요. 갑옷 같다고나 할까요?”
“뭐라는 거냐? 갑옷 입고 나랑 싸우자는 거냐?”
“정말 편하다는 뜻입니다, 대고모님.”
희원이 한복이 편하다며 웃자 대고모님은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녀가 어디 사는 누구인지, 직업이 무언지, 그런 것 하나 관심 없으신 쿨한 분이셨다.
대고모님은 쟁반에 든 나물을 챙기시더니 툭, 하고 말을 뱉으셨다.
“곱구나.”
“한복이요?”
“너 말이다. 너.”
오옷. 예쁘다고 칭찬 받았다.
희원은 옆으로 몸을 슬쩍 기울이며 대고모님 귓가에 속삭이듯 말했다.
“대고모님도 고우세요.”
“근데 왜 속삭이냐? 누가 들으면 안 되는 것처럼?”
“부끄러워서요.”
“내가 고운 게 부끄럽냐?”
“아, 아뇨. 그런 게 아니라…….”
희원이 머쓱하게 웃음을 터트리자 대고모님 입가에 실금 같은, 아주 옅은
미소가 걸렸다가 금세 사라졌다.
“웃음소리 한번 방정맞다.”
“아, 죄송합니다! 제가 사실 긴장을 많이 해서요, 강약 조절이 안 되네요.”
“긴장한 거 맞냐? 너 같은 애는 처음 본다.”
잔말 말고 이거나 다듬어라. 대고모님은 도라지가 수북한 통을 넘겨주셨다.
“어떻게 다듬을까요?”
“그냥 다듬어! 어떻게 다듬긴! 깨끗하게!”
버럭하신다.
희원은 흠, 도라지를 바라보다가 손으로 가늘게 죽 찢었다.
“대고모님, 이렇게요?”
“니 마음대로 해라. 가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어 명주실 같고 아주 좋구나.
볶아놓으면 머리카락보다 더 얇겠네.”
친척분들이 웃으신다.
희원은 머리를 긁적이다가 다시 도전했다.
곁의 친척분께 도움을 받아 적당한 크기로 도라지를 손봤다.
“미숙한 건 알겠는데, 조금 더 빨리 할 수는 없는 거냐? 올해 안에 도라지 손질 끝나기는 하냐?”
“죄송합니다! 더 빨리 하겠습니다!”
서씨 가문 명절의 시작.
불우이웃돕기의 현장이었다.
*
[이번 명절에도 집에 안 올 것 같아서 다녀간다. 음식 좀 넣어 놓았으니 빠트리지 말고 먹어.]
혼자 영화관에 들러 영화 관람을 하고 나온 정윤은 엄마에게 도착한 메시
지를 확인하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우, 하마터면 엄마랑 마주칠 뻔했네. 영화 보러 나오길 잘했다.”
집 앞 영화관을 다녀오는 길이라, 그녀는 터벅터벅 걸음을 옮겨 집으로 향했다.
어느 순간부터 명절은 불편해졌다.
집에 친척들이 다녀가다 보니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그런 딸의 마음을 헤아리는 부모님도 명절에 다녀가란 말씀을 굳이 하지 않으셨다.
딸아이의 이혼이 친척들 사이에서 거론되는 게, 싫으신 거다.
“진짜 다녀가셨네.”
집에 돌아온 정윤은 집안을 휘휘 돌아보았다.
변한 게 없는 것 같지만 미세한 변화가 있는 집.
바닥이 깨끗해졌고, 물건이 가지런해졌다.
“히익. 이걸 누가 다 먹는다고 이렇게 많이 가져오셨어.”
엄마는 잊지 않고 딸아이의 집에 들러 손수 해 오신 명절 음식을 냉장고에 넣어두셨다.
평소에도 잘 먹던 호박전, 육전,
“엄마표 나물이랑 산적 오랜만이네. 맛있겠다.”
삼색 나물과 산적. 떡국과 잡채, 갈비찜과 손 만두.
본가엔 주방을 봐주시는 분이 계시지만, 엄마는 딸아이가 먹을 음식은 꼭 직접 하셨다.
한눈에 봐도 엄마가 했다는 것이 느껴지는 익숙한 나물과 전을 바라보다가, 정윤은 냉장고를 닫았다.
받았다고 메시지를 넣을까 말까 하다가 관두기로 한다.
언제부턴가 메시지 함엔 엄마의 일방적인 메시지만 있고 정윤의 답은 없다.
마음과는 달리 예전의 다정했던 모녀 관계로 돌아가기가, 정윤에겐 힘이든 것이다.
“하…… 모르겠다…….”
털썩 소파에 앉은 정윤은 눈만 껌뻑껌뻑했다.
모처럼 긴 휴가가 주어졌는데 뭘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명절엔 배달음식도 쉬고, 나가서 할 것도 없고, 심심하네.”
언제부턴가 외딴섬의 낙오자처럼 명절이 쓸쓸해졌다.
정윤은 의미 없이 리모컨을 들고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전 남편 ㅡ 현수를 떠올렸다.
“얘는 집에 내려갔나?”
흠, 가만히 휴대폰을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돌려 저 멀리 냉장고를 응시했다.
혼자 먹기엔 너무 많은 양의 명절 음식을 떠올리다가, 정윤은 일어섰다.
“그래. 남아서 버리느니, 누구라도 먹으면 좋겠지.”
그녀는 무작정 냉장고 안에 들어 있는 음식을 쇼핑백에 챙겼다.
준비를 끝마친 뒤, 그녀는 가볍게 집을 나섰다.
전 남편이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면서.
대신 먹어줄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면서.
*
“어라? 차 검사님!”
명절이라 그럴까, 한산한 느낌의 경찰서는 사람도 적었다.
정윤은 쇼핑백을 들고 형사과로 향했다.
“양 형사님, 안녕하세요.”
“아이고, 차 검사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네네. 늦었지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정윤은 자신을 알아보는 전 남편의 동료와 마주쳤다.
형사과에 들어가기가 무안했는데 이렇게 마주치다니. 잘 됐다.
“형사님, 오늘 당직이세요?”
“예. 보시다시피.”
명절엔 당직근무로 순환되었다. 사건사고란 명절이라고 피해 가지 않았으니까.
오히려 더 굵직한 사건들이 일어나기도 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대한민국의 명절이다.
“고생이 많으십니다, 형사님. 집에도 못 가시고요.”
“아유, 뭐, 하루이틀입니까. 괜찮습니다. 오히려 시골 안 가도 된다고, 당직 서면 집사람은 좋아해요.”
“아아, 그래요? 그럼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요?”
정윤과 양 형사는 가감 없이 웃었다.
웃음 끝에 양 형사는 형사과 안을 가리켰다.
“남 형사 자리에 있습니다.”
정윤의 마음에 쿵, 하고 작은 돌이 떨어진다.
“당직도 아닌 놈이 나와가지고 저러고 앉아 있네요.”
“아, 네.”
정윤이 머쓱하게 웃자 양 형사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그럼 검사님도 오셨으니 저는 밥 좀 먹고 오겠습니다.”
“아, 아! 이거! 이거 음식인데!”
양 형사는 손을 저었다.
“집이 가까워서, 잠깐이라도 가봐야죠. 집사람이랑 애들이랑 먹으려고요.”
“아…… 네. 다녀오세요. 제가 자리 지키고 있을게요.”
“예예. 든든하네요. 다녀오겠습니다.”
일부러 피해 주는 건지 정말 밥을 먹으려고 하는 건지 양 형사가 사라진다.
형사과엔 남 형사만 남아 있는 상황.
정윤은 심호흡을 길게 하고는 형사과 안으로 들어섰다.
낯선 인기척에 PC를 들여다보던 현수가 눈만 들어 앞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쭉 뺀다.
“어라? 뭐고.”
“뭐긴. 그러는 남 형사는 뭐하고 있었어?”
정윤이 빠르게 걸음을 옮기며 현수의 자리로 다가갔다.
급하게 그의 PC 모니터를 바라보니, 그는 지뢰게임을 하고 있었다.
“이걸 그렇게 열심히 하고 있었냐?”
“아아, 뭐, 거의 깰 뻔했는데 망했다.”
지뢰를 밟은 현수는 허망하다는 듯 서둘러 게임을 껐다.
한적한 형사과의 풍경, 흔한 일은 아니다.
“여 근처 지날 일 있었나?”
현수가 의자를 돌리며 묻자 정윤은 머뭇거리다가 쇼핑백을 들어 올렸다.
“밥, 먹었어?”
“…….”
“안 먹었으면 밥 먹자고. 명절이니까.”
정윤의 질문에 그는 말없이 그녀의 얼굴을 바라만 보았다.
그러다가 천천히 시선을 내려, 그녀가 들고 있는 쇼핑백을 바라보았다.
제법 묵직하게 보이는 쇼핑백은 들어있는 내용물이 많다는 걸 알려주었다.
잠시 쇼핑백을 바라보던 현수는 얼굴색 하나 바꾸지 않고 입술을 열었다.
“……안 먹었다. 마침 배고팠는데, 잘됐네.”
사실 그는 삼십 분 전에 밥을 먹었다
소화도 되기 전에 생긴, 그녀의 방문이었다.
*
대체 끝나긴 끝날까, 언제나 다 할 수 있을까 싶었던 양도 어느덧 줄어들더니 끝이 난다.
흐어. 희원은 찌릿찌릿 저려오는 허리를 두드리며 하늘을 올려보았다.
선산의 떼를 입히러 떠난 서방님께선 아직 감감무소식이고, 곁을 돌아보니
내가 한 게 맞나 싶을 정도로 수북하게 쌓인 호박전이 맛깔스러운 자태를 자랑한다.
엄마가 해줘서 먹을 땐 몰랐지.
기름 냄새라는 게 이렇게 버거울 줄이야.
“대고모님, 안 피곤하세요?”
그나저나 걱정이 되는 건 자신이 아니라 곁의 대고모님이다.
젊은 사람도 팔이 빠지고 허리가 부러질 것 같은 시간 동안, 꼼짝도 않으시
고 엄청난 양의 전을 부치셨으니까.
쫄따구의 스킬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노오란 전의 때깔은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돈다.
대고모님의 허리가 염려스러운 희원이 묻자 대고모님께선 별일 아니라는듯 대꾸를 하셨다.
“나보단 네가 더 피곤해 보이는데. 가서 좀 쉬어라.”
“괜찮습니다. 불우한 이웃들을 위해 힘쓰신다고 하니 더 열심히 하게 돼요.”
“내 눈엔 지금 니가 불우하게 보이는데. 너부터 좀 도와야겠다.”
“아, 아뇨. 저는 이제 얼마 안 남았어요. 대고모님 허리가 좀 아프실 것 같아서.”
“사람이 같은 일을 반복하다 보면 버릇이 돼서 그냥저냥 하게 되는 거지.
내 걱정은 마라. 아직 꼬부라질 정도는 아니니까.”
아…… 대단하시다…….
희원은 진정 경이롭다는 표정으로 대고모님을 바라보았다.
남들보다 더 많이, 더 빠르게 전을 부치면서도 허리 한번 펴질 않으신다.
중간중간 해야 할 일들도 정해주시고 진행 상황도 확인하시면서.
“대단하신 것 같아요. 그런 생각이 들어요.”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대단한 일인 것이다.
“응? 뭐가? 나 말이냐?”
대고모님이 반문하자 희원은 네, 라고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연세가 연세이신 만큼 노동이 쉽지만은 않을 텐데.
“어쩜 이렇게 빠르게 부치세요? 저는 따라 하지도 못하겠어요. 좀 쉬다 하세요. 걱정돼요, 대고모님.”
“글쎄 너나 그만해도 된다니까? 니가 가서 쉰다고 누가 뭐라 하냐? 너 빼곤
다 가서 쉬다 왔는데 왜 쉬라고 해도 안 쉬고 나를 들들 볶아? 난 괜찮은데?”
“제가 보기에 안 괜찮아서요. 허리 강녕하세요? 오른팔은 안녕하신지요?”
“허리는 강녕하고 오른팔도 안녕하다. 내가 지금 이걸 몇십 년째 하고 있는
데 겨우 이걸로 안녕을 안 해?”
허으. 희원은 못 당하겠다는 것처럼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벌써 커다란 식용유 통이 몇 번째 갈렸는지도 모르겠다.
“대고모님이 안 쉬시니까 저도 덩달아 못 쉬겠어요.”
“아깐 불우한 이웃돕기라 더 열심히 한다더니?”
“……아, 조금 쉬었다가 해요, 대고모님. 저하고 같이 쉬어요.”
“대체 내가 뭘 어쨌다고 자꾸 나를 걸고 넘어져? 너는 너고 나는 나지. 가서 쉬어, 나도 니가 부담스러워.”
“같이 좀 쉬면 안 될까요? 제가 제일 막내인데, 어떻게 대고모님을 두고 혼자 쉬겠어요.”
“이렇게 입씨름하는 동안 가서 식혜를 마셔도 한 동이는 마셨겠다. 가서 마셔. 마시고 제발 쉬어.”
“대고모님 식혜 좀 가져다 드릴까요? 드실래요? 당 떨어지시죠?”
“그래. 당이 좀 떨어진다. 너 때문에.”
옥신각신, 쫄따구와 왕고모님 사이에 입씨름이 오고 간다.
너나 쉬어라, 함께 쉬자, 말로만 서로 쉬라 마라 하며 부지런히 전을 부친다.
희원은 오기로 남아 마지막 호박을 잘랐다. 으아, 이것만 하면 정말 끝이긴하다.
“첫 명절부터 무리 마라. 난 너더러 쉬라고 분명히 아까부터 노래를 불렀다.”
“네네. 알아요. 눈치가 있어서 못 떠나는 것뿐이지, 대고모님 말씀은 잘 새겨들었으니까요.”
“아까는 내가 어렵고 불편하다고 하지 않았냐?”
“아…… 그랬어요. 맞아요.”
희원이 뒤집개를 들며 허리를 폈고 깔깔 웃자 대고모님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뭐 이런 애가 다 있냐는 표정을 지으신다.
“오늘 생각해보니 저는 붙임성이 좀 좋은 것 같아요. 그렇죠? 대고모님?”
“글쎄 모르겠다. 내가 붙임성이 없어서 붙임성 좋은 성격을 못 알아보겠는데.”
희원은 다시 깔깔 웃음을 터트렸다.
뭐랄까, 대고모님과 대화를 계속 나누다 보니 어쩐지 친정에 계신 할아버지가 떠올랐다.
할아버지 손에 자랐으니, 대고모님과의 대화도 어느덧 자연스럽게 익숙해지는 거다.
두 분, 성격도 묘하게 닮으셨다.
“저, 대고모님.”
“그래. 안 불러도 나 여기 있다. 계속 니 얘기 듣고 있고.”
“궁금한 게 있는데요. 왜 이렇게 열심히 하세요? 전 부칠 사람도 많은데.”
대고모는 희원을 힐끔 바라보았다.
별 이상한 질문을 다 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게 내 일이다. 내 일.”
“……일이요?”
“그래. 너도 집에 가면 니가 하는 일이 있을 거 아니냐? 난 이게 내 일이다.”
희원은 하던 일을 멈추고 대고모님을 바라보았다.
비닐장갑도 끼지 않은 손으로 뜨거운 전을 자유자재로 만지며, 대고모님은 말을 이었다.
“열아홉에 시집을 가서 이날 이때까지 바깥일이라는 것을 해본 적이 없었
지. 내가 유일하게 ‘일’이라고 칭하는 게 바로 명절 치르기야.”
“아…….”
“사람은 쓰임이 있어야 사는 거지. 어느 순간도 쓸모가 없으면 송장이나 마
찬가지니 내가 내 쓰임을 다하려고 열심히 매달리는 거다.”
“…….”
“네가 바깥일을 하며 자긍심을 느끼는 것처럼 나도 내가 부친 전을 누군가
맛있게 먹는 것에 자긍심을 느끼니까 말이다.”
희원은 멍하니 대고모님을 바라보았다.
아흔의 연세에도 어딘가의 쓰임을 희망하시는 것을 보며, 그녀는 내적 어
딘가에서 에너지가 솟아나는 기분을 느꼈다.
“꼭 기억할게요. 사람은 쓰임이 있어야 한다는 말.”
희원은 활짝 웃었다.
거창하지 않아도, 사소한 일에도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내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알았으면 전이나 뒤집어. 다 타잖아. 아무짝에도 쓸모없어서 내다 버리기전에.”
“아…… 아! 죄송합니다! 지금 뒤집습니다!”
희원은 정신을 놓았다가 다시 붙잡는 것처럼 눈을 크게 뜨며 전을 휙휙 뒤집었다.
오늘 처음 만난 집안의 쫄따구였지만, 대고모는 왜인지 희원이 예쁘게만 보였다.
“결혼한 지 얼마나 되었지?”
“아…… 1년이 좀 안 됐어요.”
“애는 언제 낳으려고?”
……희원은 전을 뒤집다가 다시 멈췄다.
드디어 아이에 대한 압박 질문이 시작되나 싶어, 희원이 머뭇거리며 말을
잇지 못하자 대고모님은 말을 이었다.
“안 생기는 거면 노력하고, 없이 살 생각이면 잘 생각하고.”
“아…… 어…… 네…….”
희원이 당황해서 말을 잇지 못하자 대고모님은 한참 만에야 허리를 폈다.
“뭐든지 급할 필요 없다. 한 사람과 사계절을 서너 번, 적어도 두어 번은 지내봐야 하는 거야.”
희원은 입을 쩍 벌렸다.
아이가 급할 필요는 없다니. 종가의 시댁에 와서 이런 이야기를 들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왜? 놀랐냐?”
“어…… 네…… 사실 뭐라고 답변을 해야 할지 몰라서 좀…… 망설였는데요…….”
“…….”
“종갓집이고 해서 아이 문제로 이야기 많이 들을 각오하고 왔거든요.”
“자식은 대를 잇는 수단이 아니야. 자식은 우주야, 우주.”
……지구 밖, 저 넓은 세상.
“내 자식의 눈은 화성이고, 코는 금성이고, 입은 목성이고, 머리는 태양이고.”
살며 단 한 번도 접해보지 못한 신비한 세상을 만나는 일이란다.
“자식을 품는다는 건 우주를 품는 일인데 얼마나 많은 각오와 준비가 되어
야겠냐? 또 얼마나 큰 사람이 되어야 우주를 품겠어. 생각을 해봐라.”
“허…… 어…… 와아…….”
“멋있게 살아. 즐겁게 살고. 준비가 되면 낳고, 아니면 신중하고, 전은 태우지 말고.”
“……아! 죄송합니다! 뒤집을게요!”
희원이 허둥지둥하자 대고모님은 피식, 웃음을 흘리셨다.
……첫 명절은 가히 지낼 만했다.
“대고모님.”
“왜.”
“저…… 지금 남편이 너무 보고 싶어요.”
“지금 누구 놀리냐? 과부 이십 년째 지내고 있는 나한테 말이 너무 심하다?”
“마음 상하셨다면 죄송합니다. 그럼 마음 상하신 김에 저랑 지금 식혜 드시러 가실래요?”
“너나 먹어. 제발 부탁인데 가라. 내가 너 때문에 머리가 지끈지끈하다.”
“그럼 조금만 더 부치다가 갈게요…….”
“가라고! 가! 가라고 좀!”
쫄따구는 대고모님을 구워삶았다.
생존 본능이 탁월한 희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