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어서 오세요 민호문방구-2화 (2/151)

#2. 할아버지의 마지막 선물(2)

딸깍.

문방구의 조명이 간만에 켜졌다.

국민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지 할아버지와 지냈던 이 문방구는 20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놀랄 만큼 모든 게 그대로다.

각종 학용품부터 뿌옇게 색이 바랜 장난감들이 발 디딜 틈 없이 차곡차곡 쌓여 있다.

어릴 적 할아버지의 문방구는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할아버지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울면 원하는 장난감이 내 손에 들렸다. 그렇게 새 장난감을 들고 학교로 가는 날이면 또래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다. 할아버지가 문방구를 한다는 사실은 그 시절 대통령도 부럽지 않은 자랑거리였지.

아버지는 산으로 들로 쏘다녔다고 하지만 90년대에는 놀거리가 이 작은 문방구에 가득했다. 문방구 앞 공터는 학교를 마친 아이들의 놀이터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어린 시절을 추억하려면 이 작은 문방구가 내 전부였다.

스윽.

나는 장난감 박스 윗부분을 가만히 손으로 쓸었다. 먼지가 얇은 막처럼 덮여 있었지만 오래된 세월만큼 쌓이진 않았다.

아마 성실한 할아버지께서는 병원에 가기 전날까지 부지런히 청소하신 모양이다.

아침 애국가가 나오기도 전에 늘 문방구 앞을 쓸고 속이 다 빠져 비루한 낡은 먼지떨이로 사방팔방을 털어대던 할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드르륵.

문방구를 대충 한 바퀴 둘러본 나는 방문을 열었다. 진한 피톤치드 향이 한 번에 코끝을 때려 작게 기침이 나왔다. 노인네가 혼자 사는 냄새가 싫다며 한사코 명절선물로 방향제를 사 오라 하셨던 할아버지다.

가게 옆에 붙어 있는 방. 전형적인 70년대 단층 건물 구조.

그나마 아버지 친구분께서 10여 년 전에 화장실과 부엌을 싼값에 리모델링 해주셨기에 사람이 살 만한 집이 되었다. 그전에는 보일러 대신 주방 아궁이에 불을 때야 겨울을 날 수 있었다.

연탄을 쓰는 집이 얼마나 부러웠던지.

불편함은 돌이켜보면 모두 추억이 되어 있다.

할아버지의 흔적과 내 어린 시절 추억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이 공간은 이제 내 것이다.

“읏샤!”

바닥에 아무렇게나 벌러덩 드러누웠다.

이대로 여기서 살면 얼마나 좋을까?

잠깐만.

살 수 있다.

어차피 출퇴근 시간 때문에 무리해서 구한 비싼 월세의 원룸은 이제 필요가 없어졌다. 당분간 구직 활동을 하려면 나름 경기도권인 남양주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법적으로도 내가 주인인 집이다.

나는 벌떡 일어나 주방의 수도꼭지를 틀어봤다.

쏴아아.

수압은 합격! 다음은 보일러다. 곧 다가올 겨울에 지낼 수 있는지 아닌지가 판가름 될 핵심이다.

우르릉.

기름보일러 역시 난방 버튼을 누르자마자 힘차게 돌아간다.

“좋았어.”

특별히 더 신경 쓸 건 없었다. 인터넷이 조금 걸리긴 하지만 어차피 인터넷 티비가 들어와 있으니 인터넷도 추가로 설치가 얼마든지 가능할 터. 사실 인터넷이 없어도 큰 상관은 없다. 유일한 취미는 폰으로 웹소설이나 웹툰을 보는 게 전부니까.

거취가 결정되니 몸이 바빠진다.

외풍이 들어오지는 않는지, 따로 사야 할 가구가 있는지, 태워야 할 유품들. 하나하나 확인하려고 하니 이 작은 집이 갑자기 넓어 보인다.

우선은 할아버지의 유품이다. 문방구에 온 이유이기도 하다.

내일 49재에 태울 물건들을 정리해야 한다. 혹시나 아버지께 따로 챙기실 물건이 있는지 물어봤지만 무심한 아버지는 그저 알아서 하라는 말뿐이셨다.

바닥에 커다란 보자기를 깔고 장롱부터 하나씩 할아버지의 물건을 쌓았다. 굳이 태우지 않고 내가 써도 될 법한 물건들도 있었지만 이내 아까운 마음을 비우고 모두 태우기로 했다.

딱히 사자의 물건이라 찝찝해서가 아니다. 만약 저승이 있다면 사자의 물건을 태워서 그곳에 보낼 수 있다면, 그리하는 게 맞겠다 싶은 마음이 들어서다.

작업은 의외로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작은 장롱에 계절별로 옷가지 몇 개, 주방기구, 티비장 밑 잡다한 세간살이가 끝이다.

툭.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와중에 바닥에 작은 철제 상자가 하나 떨어졌다.

양과점 쿠키 박스.

으레 어르신들은 이런 박스에 반짇고리 같은 것들을 넣어두신다. 사랑방 캔디가 조금 큰 쿠키 박스로 바뀌었을 뿐.

무심코 비우려 상자를 쏟았는데 안에 들어 있는 내용물은 뜻밖이었다.

편지들이다.

그것도 제각기 다른 봉투에 들어 있는 오래된 손편지들.

나는 그중에 비교적 최근 걸로 보이는 봉투를 하나 열었다.

「문방구 할아버지께.

잘 지내시는지요?

엊그제 고향에 내려왔다가 문방구 생각이 나 잠시 들렀었습니다.

어릴 때 모습 그대로더군요.

…」

「할아브X부지께

감사해씁니다.

훌륭한 사랍X람이 되께요.」

나도 모르게 얼굴에 웃음이 피어올랐다.

하나만 열어 보려던 편지는 어느덧 내 손 가득 들려 있다.

이 작은 분교의 학생들에게 할아버지는 특별한 존재였음이 분명했다. 이 많은 아이들이 자라서도 문방구를 잊지 않았다.

편지를 열어보는 손은 점점 느려진다.

그리고 어느덧 마지막 편지.

가장 색이 바래고 잘못 들면 바스러질 것만 같은 오래된 편지를 조심스럽게 펼쳤다.

「형님께.

형님 아들의 결혼 소식을 뒤늦게 건너 들었습니다.

이 경사스러운 일에 축하해 드리러 가지 못함을 용서하십시오.

형님이 없는 형편에 보내주신 돈 때문에 아들의 결혼식이 초라할까 싶어 늘 죄스러운 마음뿐입니다.

염치없지만 이 주식으로 빌린 돈과 축의금을 대신하고자 합니다.

조병기 배상.」

뒷장에는 온갖 한자로 가득한 종이 주식이 몇십 장 들어 있었다.

간만에 본 한자들이 너무 어려워 더듬더듬 인터넷의 힘을 빌린 해석본은 이러했다.

‘삼정공업, 10주, 오백 원정’

삼정공업?

삼정!

대한민국 최고의 대기업 삼정전자의 주식이다! 그것도 까마득히 오래전 주식. 적혀 있는 금액은 오백 원이지만, 지금 그 가치가 얼마나 될지 가늠할 수 없었다.

가슴이 두근거려 급한 대로 수돗물을 벌컥벌컥 들이켜고 곧장 차에 시동을 걸었다. 하지만 차는 움직이지 못했다.

어디로 가야 하지? 은행인가? 아니면 증권사? 종이 주식은 잘못하면 지급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던데?

머리가 더 복잡해졌다.

그렇게 한참 동안 고민하다 예탁결제원에 문의 전화를 하고서야 제대로 된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우선은 대행은행이다.

* * *

“주식계좌는 있으신가요?”

“네? 아뇨. 그냥 제 계좌에 입금 받으면 안 되나요?”

“전환된 실물주식을 전산으로 변환해 드리는 업무까지만 저희가 해드립니다. 나중에 따로 주식을 매매하셔서 주식계좌에 들어온 돈을 일반계좌에 입금하실 수 있습니다.”

“네. 그러면 여기서 증권계좌 개설도 가능할까요?”

“여기 서류 작성부터 해주시고요. 전산 입력이 완료되면 2, 3일 이내에 등록하신 계좌로 주식이 등록됩니다. 더 필요하신 건 없으신가요?”

업무 종료 시각이 가까웠는데 귀찮은 고객이 왔음에도 직원분은 친절한 미소를 잃지 않았다.

다행히 실물주식을 전환해 주는 업무가 은행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할아버지의 유언장과 양도세 납부증명서, 가족관계증명서 등등 필요할 법한 서류를 모두 챙겨간 게 정답이었다.

주식은 전환 받을 수 있었고 액면분할 전의 가치로 고스란히 내 주식계좌에 들어올 예정이다.

혹시 휴지 조각을 들고 설레발을 친 건 아닐까 싶어 불안했던 마음이 진정되자 다리에 힘이 풀린다.

나는 그길로 눈앞에 보이는 카페에 들어갔다.

“딸기 요거트 스무디 하나요.”

“결제는 키오스크를 통해서 부탁드립니다.”

젠장, 손님도 없는데 그냥 해주면 되겠구먼.

꽉 막힌 노인네나 할 법한 소리를 속으로 내뱉은 나는 키오스크에서 부지런히 메뉴를 넘기며 딸기 요거트 스무디를 찾았다.

버벅거리는 움직임으로 힘겹게 이미지가 넘어가는 마지막 페이지에도 딸기 요거트 스무디는 없다.

“저, 딸기 요거트 스무디가 없는데요?”

“지금 솔드아웃되어서 주문이 불가능합니다.”

그걸 먼저 말해달라고.

뭉개는 발음으로 대답하는 카페 직원의 표정에는 귀찮음과 하기 싫음이 그대로 얼굴에 드러났다.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시급이 많이 올랐다곤 하지만 결국 최저시급 언저리를 받으며 해야 하는 일. 오래 한다고 해서 전망이 있는 것도 아니요, 열심히 한다고 해서 시급이 올라가는 것도 아니다. 그저 정해진 시간만큼 일해주면 그만이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자로 잰 듯 손익을 챙겨가는 곳이 아니다.

같은 일을 해도 마음가짐에 따라 얻어가는…….

아니다. 인제 와서 무슨 꼰대 같은 생각인지. 그렇게 헌신해서 일하던 직장에 시원하게 욕을 갈기고 그만둔 마당이다. 아무리 속으로 했다지만 누구의 인생에 참견해서 조언을 해줄 만한 입장이 못 되었다.

머릿속에 잠시 스쳐간 이름 모를 카페 직원의 인생 훈수를 떨쳐낸 뒤, 메뉴 중에 그나마 비슷한 딸기 프라페를 고르고 창가 자리에 앉았다.

평소 같으면 사무실에서 한창 서류들과 씨름하고 있을 시간.

회사에서 나온 지는 벌써 일주일이 지났지만, 몸은 아직 적응하지 못했다. 매일 밤늦게 야근하고 주말이면 쓰러지듯 잠들어 침대에서 나오지 않는 생활을 10년 가까이 했다.

주식을 받으면 뭘 하지? 아니, 그냥 놔둘까? 퇴직금도 넉넉히 받았는데 우선 그걸로 여행이나 갈까?

나름 행복한 고민이라 기분은 한껏 들떴으나 생각해 보면 노는 법을 잊은 지 오래였다.

이직한 선배에게 전화 한 통으로 싱겁게 끝난 이직은 두 달 뒤로 결정되었다. 두 달이라는 긴 휴가를 받았음에도 내 생활은 딱히 변화가 없었다.

우선 이사부터 하자. 원룸의 짐을 빼려면 그래도 하루는 족히 걸릴 테니까.

삐리리.

[최 부장]

오랜만에 전화가 걸려왔다. 그것도 가장 받기 싫은 전화가.

“여보세요?”

(김 대, 아니, 김 과장. 지금 통화 가능해?)

“말씀하세요.”

(우리 저번 고도화사업 관리 문서들 말이야. 혹시 매뉴얼 같은 거 있을까? 새 사업 RFP에 맞게 수정을 좀 해서 써야 할 거 같은데 일정관리 엑셀 파일 같은 거 조금 건드리니까 함수들이 다 깨지네.)

한없이 나긋나긋한 목소리다.

회사에서 최 부장에게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그거 원래 프로젝트 PM이 작성해야 하는 문서 아닌가요?”

(그거야 그런데 예전부터 김 과장이 했으니까…….)

그렇다.

나는 1도 관련 없는 프로젝트 문서들을 사업제안서와 요구사항에 맞게 작성해 주고 감사 시즌마다 꼬박꼬박 불려가 대응까지 해줬다. 그렇게 감사 결과가 잘 나오면 성과는 부장과 그 아래 줄을 댄 PM들이 고스란히 가져갔다.

“저도 잘 몰라요. 그냥 대충 예전 것 보고 하면 됩니다. 끊습니다.”

(김 과장! 김 과…….)

나는 그대로 통화종료 버튼을 눌렀다.

내가 처음 일을 떠넘겨 받았을 때 최 부장이 했던 말을 고스란히 돌려주게 될 날이 올 줄이야.

군자의 복수는 10년이 걸려도 늦지 않는다 했다. 정말 근 10년 가까이 지나 이렇게 통쾌한 복수를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회사의 이름 빨로 사업을 수주하면 인맥으로 프로젝트와 전혀 관련 없는 PM들을 자리에 앉혀 놓던 최 부장의 주변엔 본인을 포함해 실무를 아는 사람이 전무했다.

큰 회사가 나 하나 없다고 안 돌아가는 건 아니지만 최소한 최 부장만큼은 고생깨나 할 것이다.

오늘따라 딸기 프라페가 달다.

0